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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9-14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로마서 11장 36절-12장 2절
어제도 서울 구치소에서 이순철 전도사를 만났습니다. 미소가 부드러운 분입니다. 최고수(사형수)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마음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진실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이 진실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거짓으로 말하겠습니까? 살아 있으면서 그분들만큼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하겠습니까? 저는 그분들을 대하면서 수시로 제 신앙과 비교해 봅니다. 그분들에게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 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변화 받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내 곁을 떠나갔다’고 허탈해 있는 순간 하나님께서 내 곁에 함께 하심을 체험했고, ‘못 고칠 질병이라 여겨 눈물로 베개를 적실 때’ 주님께서 깨끗케 해 주심을 체험했고 ‘처절한 실패로 다시 일어날 수 없어 쓰러져 있을 때’ 주님께서 손 내밀어 일으켜 주셨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마다 각자가 체험한 은혜는 만난 사람만큼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입니다.
렇다면 이처럼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고 난 후 한 결 같이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주님 이제는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 질문이 오늘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말씀을 듣는 저와 여러분 모두의 동일한 질문일 줄로 믿습니다. “주님! 새롭게 주신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들의 이 같은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해 주시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전반부인 1장부터 11장까지를 교리(敎理)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전반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받은 수많은 은혜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2장 이후부터는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반부가 신앙의 원리라며 후반부는 신앙의 실천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원리와 신앙의 실천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신앙의 원리가 뿌리라면 신앙의 실천 즉 크리스천의 생활면은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바울은 로마서 전반부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크고, 놀랍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우리들에게, 사도 바울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이 살아야 할 마땅한 삶은 이런 삶이라고 이처럼 간절히 호소하고, 또한 강력히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간절하고 강력하게 우리들에게 권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바울 자신이 죄인의 괴수였지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체험한 우리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바울이 우리들에게 간절히 권하는 말씀에 귀 기울이시고, 영혼을 기울이시는 귀한 시간이 될 수 있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바울은 무어라고 권고합니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말씀을 듣자마자 놀라는 분들이 많으실 줄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로마시대에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 중의 하나가 기독교는 사람을 잡아 희생 제물로 드리고, 그 피를 나누어 먹는다는 유언비어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몸으로 산제사를 드렸고, 또 성찬 예식을 하면서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몸과 살과 피를 산제사를 통해서 주셨지만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실로 간단한 것입니다.
“나를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산제사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아시려면 바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저희를 권하노니”라고 하신 말씀의 “그러므로”의 뒤이어지는 말씀은 결론에 해당한 것이고, 그렇게 결론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러므로”의 앞 절을 보시면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토록 있으리로다.”
바로 11장 36절의 말씀입니다.
만물의 기원(Origin), 진행(Course), 그리고 그 결과(End)가 하나님께 있다는 바울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시작이요(창조자), 진행자, 곧 통치와 섭리자시요, 또 심판자이십니다. 실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최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또 그분께서 나를 구원하셨음을 믿고, 다시 그분에게 돌아갈 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 즉 산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출애굽기 8장 1절과 9장 1절 말씀을 보면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유대인들을 모세를 통해서 극적으로 구출해 주시고 나서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바로에게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라. 히브리사람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들도 구원받았으므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1장 14절 말씀을 보면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우리를 창세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구원해 주신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43장 21절 말씀에서도 분명히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 그리고 ‘그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신다’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 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대한 명확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라.”
그러므로 예배드리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본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잘 드리지 않고, 예배를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나는 신앙이 좋다.”고 착각하고 계신 분들을 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면 감사할수록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예배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의해 양심을 살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를 마음에 공급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의해 더러운 상상을 정결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여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지를 바치는 것이다.”라고 윌리엄 템플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는 예배를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고 견고하게 해 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목적에 우리의 의지를 바쳐서 그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데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의 표현이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바치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드려야할 행위인 것입니다.
“어떻게 드리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까?”
그 대답을 주님은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그런데 본문에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와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먼저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소마’라는 단어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육체라는 단어와 구별해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소마’는 인간의 육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삶을 가리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소마’ 즉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예배”란 바로 우리들의 모든 삶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곧 삶이라는 말씀을 이처럼 명확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예배드리는 자들의 중심의 문제라면, “몸으로써 예배드리는 자”들의 주제는 삶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만을 강조하고, 삶으로 예배하는 것을 등한시 했다면 이 말씀을 깊이 새겨 우리들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고 결단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서를 주석한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우리는 예배드리러 학교에 가야하고, 예배드리러 일터에 가야하고, 예배드리러 공장에 가야 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일주일동안 믿음을 지키려고 기도하면서 몸부림치며 살던 사람은 주일이나 수요일에 드리는 예배가 감격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과 예배가 연결될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신령한 예배라고 바울은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몸으로 산 예배를 드립시다.
그러나 몸으로 산 예배를 드리려면 반드시 힘쓰고 애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이 세상’은 악한 정신에 지배받고 있는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따라가지 말라는 말씀은 눈에 좋은 대로, 내 육체가 이끄는 대로, 내 생각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어서 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악에 빠지고, 어떤 사람들은 악을 인정하지만 안타깝게도 악한 모습을 닮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탄이 간교하고 세상에 끌려 다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세상을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것을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첫째, 늘 다시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무심코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야 합니다. 방향은 올바른 것인지? 방법은 옳은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가장 합당한 방법을 소개합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생각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매번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들에게 책장에 꽂아 두라고 주신 책이 아닙니다. 추우니 불을 피워서 추위를 이기라고 주신 책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읽으라고 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며,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기에 온전케 하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셋째, 성령께서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방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내 생각, 내 고집, 내 욕망을 가득 차 있는 내 마음속에서 성령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을 온전히 비워서 성령께서 자유롭게 마음껏 일하실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결한 마음을 소유하고, 정직한 영을 회복키 위하여 늘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멀리 하지 않으실 것이고, 결코 우리에게서 주님의 성령을 거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세상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결론적으로 우리 영혼이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향상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악한 세상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말은 아라비아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원래부터 뛰어난 말로 태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하메드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을 길러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계를 다 뒤져 백 마리의 우수한 암말을 사 왔습니다. 그리고 이 말들을 산봉우리의 목장에서 길렀습니다. 그러나 말들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그 바로 밑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지만 말들이 보고 물 냄새만 맡을 수 있을 뿐 물을 마실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하메드는 말들로 하여금 갈증으로 고통을 받아 거칠게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 주고 물가로 가게 했습니다. 그러면 말들은 미친 듯이 물가로 달려 갈 것입니다. 그렇게 이 말들이 미친 듯이 물가로 뛰어나간 직후에 모하메드는 힘껏 나팔을 불었습니다. 이것은 말들에게 돌아오라는 신호였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말들은 돌아오라는 나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 나갔으나, 다만 네 마리만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모하메드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네 마리의 말들을 종자로 해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라비아의 말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쓰시겠습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질풍같이 달려가던 길에서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멈춰 서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글로벌 찬양의 교회는 올해 새로운 붐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이 세상을 따라가지 아니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 영으로 진실하게 그리고 거룩한 삶을 통하여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열심히 기도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십시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십시다.
그리하여 “영혼이 잘되는 삶”이 되십시다.
우리의 영혼이 잘되면, 하나님께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됨은 물론이고 영과 육과 삶이 강건해지는 축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열심히 기도하면 이런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할 때 자기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삶을 안전하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면 안전하게 인도함만 받으실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축복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낮의 구름 기둥으로 광야의 뜨거움을 피할 수 있게도 해 주셨지 않습니까?
밤의 불기둥으로 광야의 추위를 이길 수 있게도 해 주셨지 않습니까?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는 삶이 바로 예배드리는 삶입니다.
세상에 빠지지 않고, 세상에 흡수되지 않고,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며,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 기독교인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믿고, 부활을 믿고,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자들로서 살아가는 삶의 예배가 크리스천의 열매요,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