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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 소재한 한 쌍의 돌장승. 1999년 2월 26일에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 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성문 앞에 세운 공공장승이다. 질병을 방비하기 위한 기능 등 시기적으로 기능이 다르게 나타난다. 방촌리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마을 수호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 장흥 방촌리는 해안에 연하면서 천관산을 마주하고 있다. 선사시대의 고인돌이 300여 개 분포한다. 고려시대의 장흥부(회주목) 치소와 치소성, 조선시대 장흥(長興) 위씨(魏氏) 동족촌으로서 많은 문화재가 있다.
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관산읍에서 방촌으로 넘어드는 국도 23호선 도로변 좌우측에 서 있다. 화강석으로 된 2기의 석장승 가운데 서쪽에 위치한 장승은 ‘남장생’, ‘벅수’, 명문에 따라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하 ‘남장승’으로 표기)으로 불린다. 이 장승과 마주하는 동쪽의 장승은 ‘미륵석불’, ‘벅수’, ‘돌부처’, ‘여장생’ 등 다양하게 불리나 명문은 없다(이하 ‘여장승’으로 표기).
남장승은 전체적으로 간략하고 평면적이다. 얼굴이 있는 위쪽의 폭이 아래보다 조금 넓다. 얼굴에는 왕방울눈이 이중 선각으로 처리되었고, 주먹코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양옆 볼까지 찢어진 입을 보면 입술은 두텁고, 입꼬리는 귀밑으로 치켜 올라가 전체적으로 익살스럽게 활짝 웃는 형상이다. 목 밑에서 가슴의 명문 위쪽까지 역삼각형의 수염이 넓게 선각되어 있다. 수염 밑에서부터 좌대까지 ‘진서대장군’이라는 명문이 한자로 새겨져 있다. 크기는 높이 235㎝, 앞면 최대너비 54㎝, 두께 40㎝, 머리 높이 57㎝, 둘레 160㎝이다.
여장승은 남장승에 비해 풍만하면서도 조각이 깊고 무서운 인상을 하고 있다. 얼굴 반을 차지한 부리부리한 왕방울눈이 툭 튀어나와 있고, 우뚝 솟은 주먹코가 남은 얼굴 반을 차지하고 있다. 두터운 입술을 하고 있는 입은 직선에 가깝고 짤막하다. 이마에는 반원형으로 나란히 곡선이 선각되어 있다. 크기는 높이 197㎝, 앞면 최대너비 48㎝, 두께 48㎝, 머리 높이 92㎝, 둘레 173㎝이다.
역사 = 장흥 방촌리 석장승의 제작 연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유래가 전한다. 방촌리 석장승은 건립 당시 성문을 수호하는 공공장승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1265년(고려 원종 6) 장흥부(長興府)가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 개칭되고『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장흥도호부 건치연혁조에는 회주목의 치소가 있던 방촌을 보강하고자 상잠산성(觴岑山城)과 회주고성(懷州古城)을 축조하면서 성문 부근의 둔군동(屯軍洞)에 남․여 장승을 세웠다고 전한다. 회주고성은 고려 말때 극심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치소를 지키고자 축조된 성으로, 방촌마을 주변에 그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이 회주고성 읍성의 보허 진압(補虛 鎭壓) 및 수호를 위해 서문 밖에 이 장승을 세웠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창궐한 두창(痘瘡, 천연두)을 퇴치하기 위해 ‘진서대장군’이라는 명문을 새긴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진서대장군’이란 명문을 놓고 “옛날 중국 황제들이 우리나라 고구려, 백제의 왕에게 봉한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등의 명칭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 강남에서 오는 두신(痘神)을 퇴치하기 위하여 오히려 중국 황제의 권위를 빌려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이라는 명문을 새김으로써 호귀(胡鬼)마마를 되돌아가게 하자는, 옛 선비들의 재치가 만들어 놓은 해학이 깃든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방촌리 석장승을 성문을 지키는 공공장승보다는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해 세운 장승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방촌리 석장승은 고려 말에 건립된 성문장승으로 보는 견해와 조선시대 후기(17∼18세기)에 창궐한 천연두를 퇴치하고자 건립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방촌리 석장승은 후대에 접어들어 마을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마을 수호의 기능이 가미되어 나타난다.
내용 = 방촌리에서는 매년 정월대보름날에 마을 대동계(1768년 조직)가 주관하여 ‘토지신’에게 별신제를 거행한다. 제의에 앞서 장승에 금줄이 둘러쳐지고, 정월대보름이 되면 장승에서부터 매구(풍물)와 함께 별신제가 거행된다. 별신제는 토지신에게 마을의 질병 방지와 농사 풍년을 기원하는 제의이다. 제장은 마을회관 앞의 ‘뜸밭’으로 평지제단이며, 짚과 한지로 만든 허수아비들을 논둑에 세워 놓고 제사를 지낸다. 방촌리 석장승은 마을공동체 제의인 별신제의 신체로서 마을 수호의 기능을 하고 있다. ‘벅수골’이란 땅이름(지명)도 전하고 있다.
별신제라는 말은 광주시와 전남 일대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으며, 몇 년에 한 번 모시는 형태의 마을제사도 없다. 유독 장흥 지역에서만 특이하게도 별신제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장흥군 부산면 호계리, 용산면 운주리, 관산읍 방촌리 등지에 그 유례가 보인다. 이들은 매년 모시는 전형적인 마을제사이면서도 명칭과 양식을 약간 달리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이들 별신제가 보이는 양식의 공통성은 정형화된 관제(官祭)형식을 빌려 왔다는 것이다.
별신제 거행 기간에 제관은 물론 마을 전 주민이 각종 금기를 지키고 근신을 한다. 제사를 주관하는 제관은 집례, 음식을 장만하는 화주 두 명, 축관, 삼헌관 등 모두 일곱 명이다. 이들은 정월 초사흗날 마을 어른들에 의해 선정된다. 선정 조건은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부정이 없고 깨끗한 사람이어야 한다 등이다. 예전에는 득남을 원하거나 별도로 공을 드리고 싶은 사람이 자원해 맡기도 했다. 근래 들어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나 생기복덕에 따라 제관이 되어 제사를 지내곤 하지만 과거에는 마을 어른들이 단골에게 제의절차를 진행하도록 맡겼다.
과거에는 방촌을 단골판 구역으로 하는 단골이 있었다. 1960년대에는 밀양 박씨 성의 사람이 마을과 집안의 크고 작은 굿들을 맡았다. 단골은 방촌 사람들의 굿을 담당해 주고 봄과 가을에 식량을 얻어서 생활했다. 이 단골이 별신제를 맡아서 지내다가 일제강점기 중엽부터 일반 주민들이 맡아서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제관은 제사 사흘전에 화주의 집으로 옮겨 제사 준비를 시작한다. 그리고 제사 하루 전에 제장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고, 제장·석장승·화주(초헌관이 화주가 된다) 집에 황토를 깔고 왼새끼에 창호지를 끼운 금줄을 쳐 부정한 잡인의 접근을 금한다. 제를 준비하는 동안 미리 마을 주민들에게도 일체의 부정을 조심하고 가축을 잡지 말라고 당부한다. 제장과 화주 집의 정화작업이 끝나면 제관들은 화주 집에 모여 허수아비를 제작한다.
허수아비는 짚, 창호지, 대나무로 만든다. 짚으로 허수아비의 형체와 제물을 담는 오쟁이를 만든다. 창호지로는 만들어진 허수아비의 얼굴을 감싸고 손과 발가락을 표현한다. 대나무는 제상 앞에 허수아비를 세워 두기 위한 것이다. 만들어진 한 쌍의 허수아비에 성별을 표현하기 위해 할아버지의 경우 먹물로 상투와 수염, 할머니의 경우 쪽진머리에 비녀를 각각 그린다.
제물은 화주 집에서 준비한다. 제일 하루 전에 대동계 공사원과 별유사가 관산장(3, 8일장)에 가서 돼지고기, 닭, 소의 간, 나물, 과일, 어류 등 제물을 구입한다. 이때 가격을 깎으면 정성이 부족해진다고 하여 흥정을 하지 않는다. 제물을 준비할 때 제관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음식에 머리카락이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조심한다. 제사에 필요한 비용은 제자(祭資)라 하여 마을 대동계 자금으로 충당되며, 매년 15만원 정도(1995년 기준) 소요된다.
제 당일 요즘엔 덕석기가 없지만 예전에는 제장에 덕석기를 꽂아 놓고, ‘벅수골’ 위의 샘에서 화주가 목욕후 장승에 금줄을 둘러쳤다고 한다. 작은 기(旗) 2개와 함께 세우는 덕석기를 잘못해 넘어뜨리게 되면 그 넘어진 쪽 마을의 사람이 죽는다 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다뤘다 한다.
별신제는 음력 정월대보름날 아침을 먹고 회관에 모이기 시작해 매구의 어우름 마당으로 시작한다. 먼저 마을 진입로에 있는 진서대장군과 미륵석불에 간단하게 제물을 차리고 화주가 제사를 지낸다. 이때 매구꾼들은 화주와 함께 인사를 드리고 매구를 친다. 화주는 장승에게 재액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달라고 기원한다. 장승 앞에서의 간단한 제의가 끝나면 화주와 매구꾼들은 화주집으로 돌아와 술과 음식을 먹으며 한바탕 논다. 이후 매구를 치며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마당밟이를 한다.
대보름날 오후 반나절이 지난 뒤 아침 일찍 장승에서부터 시작하여 집집마다 돌며 치던 매구꾼이 마을 전체 마당밟이가 안 되더라도 마을을 한 바퀴 돌아 제장인 마을회관 앞 ‘뜸밭’으로 돌아온다. 이어 제관들은 모두 제복을 갖추고 별신제를 시작한다. 제는 진설, 분향, 재배, 강신, 재배, 헌작, 재배, 독축, 합동재배, 아헌, 종헌, 첨작, 분축, 소지의 순으로 여느 기제사와 같은 절차로 진행된다.
제의가 끝나면 제물을 조금씩 떼어내 허수아비 등에 있는 오쟁이에 가득 담고, 나머지 제물은 제관 및 온 동네 사람들이 골고루 나누어 음복을 한 뒤 마을 어귀에 있는 ‘허새비골’(산저마을 산밑 앞 개울)로 허수아비를 가져가서 헌식한다. 이 행위는 허수아비에 음식물을 주어 달래고, 마을의 온갖 액운을 허수아비 속으로 들여보내 마을 밖으로 내쫓는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을 안에는 마을주민을 괴롭히는 액운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이다.
장흥 방촌리 석장승은 고려시대 후기에 성문장승으로 세워졌다가 후대에 이르러 마을공동체 신앙인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기능이 습합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먼저 고려시대의 치소와 관련된 공공기능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다음으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천연두의 창궐 등 질병과 재난으로부터 대응, 향촌 공동체의 제의 공간적 신체로서의 기능 등 시기적 변화를 통하여 기능도 습합된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별신제는 조선 후기 이래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민속의례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특히 장승이 별신제의 하위 신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장승타령
정의=<적벽가(赤壁歌)> 중 패주하던 조조가 길 옆의 장승에서 관우의 형상을 발견하고 두려움에 떨다가 화가 나 장승을 벌하려 하자 장승이 억울함을 늘어놓는다는 내용의 소리 대목.
개관=<장승타령>은 박헌봉본과 이창배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창본과 필사본에 등장한다. 적벽에서 대패한 조조는 도망치던 도중 매복하고 있던 조자룡과 장비에게 공격을 받는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조조는 산중에 서있는 장승에서 관우의 형상을 발견하고는 놀라 두려움에 떤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화가 나서 장승을 벌하려 한다. 이에 장승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사설이 <장승타령>이다. <장승타령>은 동편제 송판 적벽가의 전승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송판 적벽가의 명인 모두가 <장승타령>을 장기로 삼았으며, 후기 팔명창의 한 사람인 장자백과 유성준, 유성준에게서 적벽가를 학습한 임방울도 <장승타령>의 대가였다.
내용=<장승타령>은 장승의 형용과 성격, 장승을 벌하려는 이유, 장승의 발명, 조조가 장승을 놓아보내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장승타령>이 위치하는 자리는 화용도로 들어가기 전에 나오는 유형과 조조가 관우의 아량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화용도를 벗어난 후 나오는 유형이 있다. 전자는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조조의 두려움을 드러내는 동시에 관우의 등장을 예고하는 기능을 한다. 후자는 조조를 왜소화시키는 동시에 관우의 위용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한다. 장승에 대한 묘사는 관우의 형용과 유사하며, 성격은 이정표의 기능보다는 축귀신장(逐鬼神將)의 기능이 강조된다. <장승타령>은 관운장의 형용을 한 장승을 통해 조조를 징치하고 싶은 백성들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조조가 장승을 벌하려는 이유는 관우의 형용을 하여 자신을 놀라게 하고, 승상이 행차하는데 굴복과 절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창본에서 신분적 지위에 눌린 장승의 발명은 술에 취한 조조의 꿈에 현몽한 목신(木神)의 입을 빌고 있다. 필사본에서는 군사가 장승의 억울함을 대신 말하거나 장승이 직접 발명을 하기도 한다. 장승의 발명은 천하게 태어난 신세 한탄, 팔자 좋은 나무에 대한 부러움, 천대받는 자신의 신세와 무고하게 죄를 받는 억울함 등이다. 신재효본 <장승타령>은 좋은 환경에서 자란 나무들이 훌륭한 쓰임새로 호강하는 삶과 장승이 되어 천대를 받는 삶을 대조하여 장승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다. <장승타령>은 장승의 입을 빌어,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양반에 비해 상반된 대접을 받는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민중들의 준엄한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조조는 장승을 불쌍히 여겨 풀어준다. 집권자인 조조가 장승이 제기한 현실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조조는 장승을 풀어주며 말을 하지 못하게 한다. 민중들의 억울함은 알지만 허용할 수는 없기에 지배자인 조조는 민중들의 불만과 하소연을 막아버린 것이다.
장승은 자신들의 삶을 짓밟는 지배자인 조조를 구축(驅逐)하려는 민중의 형상이다. 당대 민중들은 <장승타령>을 통해 집권층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지배자들의 횡포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특징 및 의의=<장승타령>은 당대에 불리던 연행물의 조합물이다. 신재효본 <장승타령>의 사설 구성 방식은 <변강쇠가>의 <기물타령>의 구성 방식과 유사하다. 또한 <나무 사설>은 민요인 <장승요>와도 내용이 비슷하다. 송흥록이 변강쇠가를 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장승타령>은 송흥록이 활약했던 19세기 초 이전에 형성되어 동편제의 전승 계보 속에서 여러 연행물을 수용하여 확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장승어원
정의=나무나 돌로 다듬어 만든 사람 모양의 형상물(形象物)로 마을이나 절의 들머리 또는 고개 등지에 세웠던 일종의 수호신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신령시하여 제사를 지내거나 치성을 드리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어원=장승의 어원은 1527년 최세진이 『훈몽자회(訓蒙字會)』(중권 제9장)에서후(堠)를 설명하면서 ‘댱승 후’라 기록하였으며, 이 ‘댱승’이 ‘쟝승→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승의 한자어 표기는 장생(長生, 長栍)으로 나타나며 조선시대에는 ‘댱생’이라 발음했지만 이도 ‘댱승→쟝승→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승을 부르는 명칭에는 장생, 장성, 장싱, 장신, 벅수, 벅슈, 벅시, 후, 수살, 수살막이, 수살목 등이 있다. 명칭으로 보아 장승이 일반적인 용어이며, 한자어로는 장생(長生, 長栍)·장성(長性)·장신(長神)·장승(張丞) 등으로도 쓰고, 사투리로 장싱이라 부르는 곳도 있다. 벅수라는 말은 경상도 해안 지역과 전라도에서는 장승을 벅수, 벅슈, 벅시 등으로 부른다. 이는 법수(法首) 또는 법슈에서 온 것이 아닌가 추측되지만 확실치 않다. ‘법수’의 의미를 ‘신선’ 또는 ‘선인’으로 보는 이도 있다. 후(堠)는 옛 문헌에 장승을 표현한 글자이고, 수살·수살막이·수살목 등으로 표현한 것은 장승을 세워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살(煞)인 나쁜 재액을 막아 준다고 여기고 붙인 말이다.
역사=일찍이 손진태는 우리나라 장승의 기원을 부족국가시대의 소도, 입석, 누석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63항)에 전남 장흥군의 신라국 무주 가지산 보림사 보조국사 영탑비명에 ‘장생표주(長栍標柱)’라는 명문이 있음을 보아 당시에도 장생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같은 책(291항)에 양산 통도사 국장생 석표의 기록에는 손내천(孫仍川, 또는 손잉천)에 국장생(國長栍)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울주의 상천리에도 고려시대에 세웠다는 국장생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영암군 불우조)에도 국장생의 기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권4, 보양리목조)에 청도 운문산선원에 장생이 있었다(943)는 기록과 운문산선원에 장생표탑(長生標塔)이 있었다(946)는 기록도 보인다.
조선 전기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권5)에 ‘김해에서 밀양으로 가는 길가에 장생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24, 여지고 도리조)에 ‘석장생(石長栍)’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이상의 역사적인 여러 기록을 보아 신라·고려·조선시대를 막론하고 장생, 장생표주, 장생표탑, 국장생, 황장생 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기능은 달랐겠지만 모두 장승이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 여러 곳에 예부터 장승을 깎아 세우고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시면서 장승제를 지내고 있는 마을이 많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의 장승제는 은산별신제와 같이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충남 공주시 탄천면 송학리 소라실, 청양군 대치면 대치리 한티, 이화리 새점, 정산면 용두리, 천장리, 송학리 상송, 아산시 송악면 종곡리의 장승제도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몇 백 년이 되었다 전한다. 또 오래전부터 장승제를 지내오고 있기는 하지만 오래되어 역사를 잘 모르는 곳으로는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정리 사기점과 동이면 청마리 마티, 충남 연기군 소정면 대곡리 한적골 등이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판소리 사설 「가루지기타령」에 나오는 전북 함양군의 장승도 오래되었다. 함양 마천면 추성리의 벽송사에는 약 100년 된 것으로 보이는 유명한 목장승이 장승각에 보관되어 있다.
돌장승으로는 세운 연대를 알 수 없는 영암 쌍계사지 돌장승, 18세기 중엽에 세웠을 것으로 보는 나주 불회사의 돌장승과 운흥사의 돌장승도 유명하다. 1906년에 세웠다는 명문이 있는 통영의 돌벅수도 특색 있는 장승이다.
형태-장승은 얼굴, 몸통, 체근(體根, 땅에 묻히는 부분)으로 되어 있다. 얼굴은 눈이 큰 퉁방울과 우뚝 솟은 코와 크게 벌려 이빨이 모두 드러나는 입으로 만들어져 있고, 목의 구분 없이 바로 몸통으로 연결되며, 팔과 다리의 표현이 없다. 장승은 만드는 나무에 따라 허리가 굽거나 약간 기우뚱한 것이 있어 재미있게 보이기도 하지만 대개 일자형으로 바로 서 있다. 장승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 표현이다. 그 모습이 해학적이어서 우락부락하면서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무섭게 보이면서도 다정다감하게 느껴져서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
장승은 남장승과 여장승으로 구분된다. 지역에 따라 눈·코·입을 그려 넣는 곳도 있지만 좀 잘 만드는 곳에서는 눈·코·입을 조각하고, 귀도 만들어 붙여 입체적으로 나타낸다. 머리 모양도 그려서 표현하기도 하지만 관을 쓰거나 사모를 달아내기도 하고, 여장승의 경우 비녀도 만들어 붙였다. 대표적인 것이 옥천군 사기점, 공주시 소라실 및 전북 남원시 실상사 앞의 목장승, 경남 하동군 석계초등학교 앞의 것이다. 남장승은 관모에 사모뿔이 있고, 여장승은 긴 비녀를 꽂았다. 이곳의 여장승들은 쪽머리까지 만들어져 있다. 남장승이 사모 달린 관모를 쓴 예는 많다. 연기군 소정면의 한적골,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엄미리, 충북 청양군 정산면의 상송과 옥천군 동이면의 마티, 충남 아산시 송악면의 종곡리 등이 그렇다.
장승을 깎아 채색을 한 곳으로는 연기군의 한적골이 대표적이고, 얼굴 모양을 조각하기보다 그려 넣기 위주로 한 곳은 청양의 한티가 대표적이다. 반각반화의 묘미를 살린 곳은 청양의 용두리이다. 광주의 엄미리의 것은 얼굴을 입체적으로 깎고 그려 넣기도 했으며, 수염을 따로 붙이고, 배 부분을 평면으로 깎아서 천하대장군이라 써 놓았다.
장승은 대개 길 양편에 1기씩 세우거나 언덕에 나란히 남녀 한 쌍을 세우는 경우가 많다. 드물게 동서남북 네 방향에 1기씩 세우는 곳도 있다. 중부지방의 청양이나 연기, 공주의 소라실, 광주의 엄미리처럼 옛것을 뽑지 않고 세워 둔 채 새로 또 세워서 여러 기의 장승이 집단으로 서 있는 곳도 있다.
장승은 만드는 재질로 보아 나무로 깎아 세우면 나무장승(목장승)이고, 돌로 깎아 세우면 돌장승(석장승)이다. 나무장승은 주로 소나무와 밤나무를 이용했고, 돌장승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나는 화강암을 많이 썼다.
기능=장승의 가장 큰 기능은 수호신의 역할이다. 마을 앞의 장승은 마을, 절 앞의 장승은 절을 각각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다. 마을이나 절에 들어올지도 모르는 나쁜 기운이나 병마·재액·호환을 방비하는 동시에 마을의 풍농과 화평, 출타한 가족의 건강과 안녕을 지켜주는 것이 장승을 세우는 가장 큰 목적이었다. 수살막이 장승으로 대표적인 진도 덕병의 돌장승은 마을 어귀에서 목에 쇠뼈를 달고 살막이를 하고 있다.
절을 지키는 장승은 대개 절 들머리의 길 양쪽에 서서 마주보고 있다. 목장승이 있는 곳으로는 함양 벽송사, 순천 선암사, 양산 통도사 등이다. 또 돌장승이 서 있는 곳으로는 창녕 관룡사, 남원 실상사, 나주 운흥사와 불회사, 영암 쌍계사지 등이다.
장승은 수호신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장승의 몸체에 어디까지는 몇 리라고 써서 이정표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를 노표(路標)장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경기도 광주시 하번내, 전남 진도군의 석현리 장승에는 거리가 표시되어 있다.
장승의 또 하나 기능은 풍수적으로 보아 지세가 허한 곳에 세워 지세를 보완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를 풍수에서는 비보적(裨補的) 역할이라고 하는데, 절이나 마을에서 고려하여 세웠다. 서산시의 해미읍성에는 사방에 비보장승을 세웠다.
장승은 마을의 네 방위에 세워 방위신 역할도 했으며, 성문 앞에 세워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도 했다. 아산 종곡리에는 동방·서방·남방·북방 축귀대장군을 세워 놓았고, 청양 용두리에는 장승 하나에 ‘동서남북중앙축귀대장군’이라고 써서 모든 방위를 지키도록 했다.
내용=일반적으로 장승의 몸체 전면에 세로로 새겨지는 글자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이 가장 많다. 청양 새점에는 ‘동방청제축귀대장군’과 ‘서방백제축귀대장군’, 아산 종곡리에는 ‘천하축귀대장군’과 ‘지하축귀여장군’이라고 했다. 공주의 소라실에는 남장승에 ‘동방천원축귀대장군’, 여장승에 ‘서방지하축귀여장군’이라고 했다. 여기서 ‘천원(天元)’은 하늘, ‘지하(地下)’는 땅이란 뜻으로 각각 쓰였다.
경남 통영의 돌장승에는 ‘토지대장군’, 함양 벽송사 목장승에는 ‘금호장군’과 ‘호법대신’이라 했으며, 진도 덕병의 돌장승은 ‘대장군’과 ‘진살등(鎭殺嶝)’이라 썼다. 남장승에 대장군이란 이름이 붙는 예는 많지만 여장승에 진살등이란 이름이 붙는 경우는 유일하다. ‘진살등’은 살기나 재액을 눌러서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달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 들머리의 목장승에는 ‘방생정계(放生定界)’와 ‘호법선신(護法善神)’이란 독특한 기록이 있다. 방생정계는 ‘매인 것들에게 자유를 베푼다’(안내 입간판의 설명), 호법선신은 불법을 보호하는 착한 신이란 뜻이다.
장승을 만들기 위해 산에 가서 나무를 벨 때 그냥 베는 것이 아니라 깍듯이 예를 갖추어야 한다. 적당한 나무가 정해지면 그 앞에 술을 한 잔 붓고 정중히 절을 한 뒤에 도끼질을 한다. 장승을 깎을 때에는 대개 솟대도 함께 깎는다. 이 작업은 대부분 정월 열나흗날에 하고, 정월대보름날 저녁에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장승제를 지낸다. 푸짐하게 제수를 차리고 술도 올린 다음 절을 하고, 축문을 읽고 소지도 올린다. 장승제를 지내기 전부터 풍물패는 동네를 몇 바퀴나 돌면서 축제의 시간이 다가옴을 알리려는 듯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달이 뜨면 달집을 태우고 마을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장승제 [長丞祭]
정의=마을의 입구나 사찰의 입구 또는 길가에 세워진 장승을 대상으로 지내는 마을공동제의. 장승은 마을제의 주신(主神) 또는 하위신(下位神)으로서 신앙의 대상이 되며, 솟대·돌무더기·신목(神木)·서낭당·선돌[立石] 등과 함께 마을제의 복합문화를 이룬다. 전라도 및 경상도 해안에서는 장승·장성·벅수·벅시·법수·법시·당산할아버지, 충청도에서는 장승·장신·수살막이·수살이·수살목, 경기도에서는 장승, 평안도와 함경도에서는 댱승·돌미륵, 제주도에서는 돌하르방·우석목(偶石木)·옹중석(翁仲石)·거오기·거액(去厄) 등의 명칭으로 불리며,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전해오고 있다.
유래=장승의 어원과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신라와 고려시대에는 장생(長生)·장생표주(長生標柱)·국장생(國長生)·황장생(皇長生) 등이 문헌과 실물로 전하여 오지만, 현존 장승과 형태나 기능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생(栍)·장승[長丞·長承·長栍]·장생우(長栍偶)·후(堠)·장성(長性·長城)·장선주(長先柱)·장선(長先·長仙)·댱승·쟝성·장신 등 다양한 명칭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최세진(崔世珍)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노표인 후(堠)를 ‘댱승후’로 새기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장승’이라는 명칭이 16세기 이후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민간에서는 자기 딸과 관계를 갖은 ‘장승상’을 징계하기 위해, 사람들이 나무 인형을 세워 그 앞을 오가면서 침을 뱉고 이를 장승이라 불렀다고 하는 유래담이 전하여 온다.
장승의 기원설로는 사찰의 토지 경계표시에서 나온 것이라는 장생고표지설(長生庫標識說), 솟대·선돌·서낭당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고유민속기원설과 북방기원설·남방기원설·환태평양기원설 등과 같은 비교민속기원설 등이 제기된 바 있다. 조선 전기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보면, 노표(路標)의 설치와 관련하여 이수(里數)와 지명을 기록한 후(堠)를 10리·30리마다 세우도록 법제화한 내용이 있다. 그리고 후가 노표와 함께 장생(長栍)을 지칭하기도 하였는데,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나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 등에는 후와 장생을 혼용하고 있다. 이로 보아, 장승이 노표인 후에서 유래된 것은 아닌지 추측되기도 한다. 위의 문헌으로 목장승이 16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성행되었던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의 석장승이 1689년,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 실상사(實相寺) 석장승이 1725년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석장승은 17세기 중반 이후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 및 지역사례=장승은 흔히 나무나 돌로 만들어져 마을의 수문신·수호신, 사찰이나 지역간의 경계표, 이정표 등의 역할을 하며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나무기둥이나 돌기둥의 상부에는 사람 또는 신장(神將)의 얼굴 형태를 그리거나 조각하고, 하부에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등의 글씨를 새기고 그 아랫부분이나 뒷부분에 작은 글씨로 이수(里數)를 적어 놓기도 한다. 보통 남녀로 쌍이 마주 서 있다.
장승제는 장승에게 지내는 마을제의 하나이다. 장승은 마을수호신이기도 하지만 산신·당산·서낭 등 마을의 주신에 부수적인 하위신일 경우 마을제의 일부로서 지내기도 한다.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엄미리의 경우, 2년마다 한번씩 산신제를 모시는 날 이른 아침 동네 남자들이 모여 오리나무를 골라 잘 다듬어 천하대장군·지하대장군의 장승 한 쌍을 만든다. 가느다란 나무 위에 새를 깎아 앉힌 솟대도 만들어서 동네 입구에 장승과 함께 세운다. 길가 쪽에는 천하대장군을, 안쪽으로 지하대장군을 서로 눈을 마주보게 세우고 고사를 지낸다. 과거에는 무당굿을 하였지만 요즈음은 주민들끼리 고사만 지내는데, 이때의 분위기는 매우 떠들썩하고 흥겹다. 자정이 되면 마을의 대표는 마을 뒷산에 올라가 산신제를 올린다. 장승제에 비하여 산신제는 말없이 조용한 가운데 엄숙하게 행하여진다. 마을의 주신인 서낭과 산신은 당집이나 산정에서 엄숙한 유교식으로 모시고, 장승제는 떠들썩하게 마을 입구에서 잡귀를 물리는 식으로 하는 것은 엄미리 외에도 강원도·충청도 내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무당을 불러 마을굿을 하는 경우에는 산신을 모시고 마을을 한 바퀴 도는 굿(돌돌이·고을맞이 등)을 할 때 장승을 모신다. 역시 남녀 장승을 세우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수원, 인천, 부천 등 경기 이남 지역에서는 동방청제장군·남방적제장군·북방흑제장군·서방백제장군으로 4개의 장승을 깎아 마을 사방에 세우고 고사를 지내기도 한다. 단, 중앙황제장군은 깃발만 만들고 세우지 않는다. 장승제를 지낼 때, 주민들이 풍물패와 함께 사방을 다니면서 떠들썩하게 제사를 올리는 점은 동일하다. 이러한 장승제의 목적과 기능은 장승을 매개로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고 공동 참여를 통한 주민간의 결속을 다지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장승재판
정의=소화(笑話) 중 지략담(智略譚)에 속하며, 지혜로운 원님이 장승에게 죄를 물어 도둑을 잡는다는 내용의 설화.
역사=장승을 취재하여 범인을 가려낸다는 내용의 이 설화는 『효빈잡기(效嚬雜記)』에 처음 보인다. 종이를 도둑맞은 종이장수가 현감에게 호소하여 종이를 찾는다는 내용의 이 설화는 임진왜란 무렵 중국 병사로부터 전래한 것으로, 『포공기안(包公奇案)』에 나오는 <돌비석치죄이야기>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후기 『매옹한록(梅翁閑錄)』, 『기문총화(記聞叢話)』에는 주인공이 정효성(鄭孝成)으로 되어 있고, 이후 ‘읍의 관장’으로 나타난다. 이 설화는 19세기 중반 『청구야담(靑丘野談)』에서 이지광(李趾光) 관련 설화로 다시 한 번 변이를 거치는데, 이 유형은 『한거잡록(閑居雜錄)』과 『아동기문』에 실려 있다. 한편, 『동야휘집(東野彙輯)』에는 재판관이 유성룡(柳成龍)으로 되어 있고 지역도 호남으로 바뀌어 있으며, 『성수패설(醒睡稗說)』에는 ‘호남의 어떤 관장’으로 나타난다. 『계압만록(鷄鴨漫錄)』과 『송천필담(松泉筆談)』에는 재판관이 이유민(李裕民)으로 되어 있다.
줄거리=종이(또는 비단)장수가 종이를 잃고 관가에 가서 찾아 달라고 한다. 원님이 행차 나가 보니 종이를 잃은 곳에 장승(또는 돌부처)이 서 있는데, 무엄하게도 눈을 부릅뜨고 있어 관원들에게 장승을 가져와 가두고 밤새워 지키게 한다. 그런데 살펴보니 관원들이 아무도 지키지 않자 이에 원님은 관원들에게 죄를 물어 벌금으로 종이를 바치게 한다. 원님은 관원들이 바친 종이 가운데 도둑맞은 종이를 발견하고 그 출처를 조사하여 도둑을 잡는다.
분석=구전설화의 내용은 『청구야담』에 실린 마지막 변이 유형과 거의 유사하다. 잃어버린 물건이 종이나 비단으로 바뀌거나 치죄의 대상이 장승, 돌부처, 돌하르방으로 바뀌는 정도이다. 장승이 등장하는 설화는 애초에 장승의 신성한 힘이 강조되는 예가 많았다. 그런데 이 설화에 와서는 관리의 지혜나 합리적 재판 방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이되어 장승은 작품의 화소 정도로만 남았다.
특징=이 설화는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원님의 합리적인 판단과 문제 해결 능력을 강조하여 사회질서가 잘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