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맺혀있는 얼굴은 오늘도 그믐달로 떠오른다.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당신 가슴에 주홍 글씨로 새겨놓은 아들 이름 석 자.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이 여기 있지 않느냐고 아무리 간곡히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우리들을 보고 위안을 받으며 남은 삶을 편히 지내시라고 말씀 드려도 아버지는 늘 먼 산만 바라보신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여생이지만 남아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이제는 그 아픈 마음을 잠재웠으면 한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 하실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곁에서 다만 지켜보면서 빌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주홍 글씨 - 이영란
친정집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가면 13년 전 세상을 등진 동생의 묘가 있다. 소주 한 병, 과일 몇 개 놓고 나는 대답 없는 혼자만의 넋두리를 한다. “등에 짊어진 그 많은 짐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래 너는 하직 인사도 못하고 총총히 가버렸니?”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지, 누나. 누나 속까지 썩일 필요는 없지 않아.” 바람결에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2001년 3월 5일 새벽, 동생의 죽음을 전화로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 듯했다. 동생의 나이 마흔여섯. 아직도 한창 나이 아닌가. 한 가정의 가장이며 어린 네 아이의 아버지였던 동생. 할머니까지 아직 살아 계실 때인데 세상을 떠나다니. 더구나 동생은 내 친정집의 장손이 아닌가. 직장에서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젊은 나이에 퇴직을 당했으니 마음에 오죽 응어리가 졌을까. 병명은 심근경색이라고 하지만 집안 식구 누구와도 변변히 작별 인사도 못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가 버렸다. 친정집은 봄이면 복숭아꽃이 예쁘게 피어나던 과수원집이었다. 동생은 동네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간혹 과수원으로 복숭아 서리를 하러 온 옆 동네 친구들과 마주쳐도 차마 매몰차게 내쫓지 못하고, “얘들아! 어른들 오시기 전에 얼른 조금만 따 가.” 하고 사정 조로 말하던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복숭아를 몰래 따 주다 할머니께 들키는 일이 있어도 꾸지람을 대신 받으며 애들이 복숭아가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렇게 왔을까 하고 두둔하곤 했다. 학교에서 어쩌다 나와 같이 오게 되면 내 책가방도 곧잘 들어주면서 “누나 힘들지?” 하면서 착하게 웃던 동생이었다. 장남이라서 그런지 동생 셋 중에서 제일 마음이 넓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내다보고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를 보면서 특히 그런 생각을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할 때가 있는데도 그것을 용납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아버지도 당신의 창문으로만 동생을 바라보셨다고 할까. 칭찬보다는 질책을 더 많이 하셨던 아버지, 장남이란 이유로 책임감을 더 강조하셨던 아버지였기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들이 불의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그 아픔을 누구보다 아파하셨던 아버지.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엄격한 훈육만이 훌륭한 아들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신 아버지, 아들이 별안간 세상을 떠나자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를 새긴 것이다. 얼마나 큰 상처로, 얼마나 깊은 곳에 그 상처가 자리 잡고 있는지 우리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여든을 넘기신 두 분 부모님이 툇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계실 때가 많았다. 실은 언제나 아들이 묻혀 있는 묘지 쪽을 바라보고 계셨다. “큰애야, 이제 그만 이 늙은이들 네가 와서 데리고 가거라.” 이미 눈가에는 눈물조차 메말라 있었다. 오늘은 동생 생각이 더욱 나시나 보다. 아버지의 삶을 흔들어대는 저 애절함에는 약도 없는 것일까? “인생은 바람이여. 낙엽이 떨어지는 건 바람 때문이 아니라 세월 때문이여.” 하시며 찾아가시는 곳은 언제나 아들이 누워 있는 그곳이다. 살면서 잊히지 않는 슬픔이나 고통은 없다고 말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런 예가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버지에게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저 마음의 상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새록새록 새로워지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젠 산소에 그만 가세요. 가시면 아버지 오시는지 알기나 해요?” “내가 먼저 애비 왔다고 말하면 되지, 누가 먼저면 어떠냐.” 하시며 고개를 돌리신다. 참고 있던 통곡이 잔뜩 목울대까지 올라와서 허공을 맴돌고 있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고 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지만 그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아픔은 유별나다. 생인손가락을 앓듯이 평생을 앓고 있는 아픔이다. 나도 이제 살아온 삶의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은 나이가 되었다. 자식의 아픔도 함께 끌어안아야 하는 부모의 마음 말이다.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그 마음 어찌 다 알 수 있을까마는 이제는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는 있는 나이가 나도 된 것 같다. 가을은 나에게 만남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아버지는 13년 전으로 돌아가 아들을 잠시라도 만날 수 있다면 물어 보고 싶은 말이 꼭 있다고 하신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나는 그 말을 잘 알고 있다. 어째서 아버지에게 원망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렇게 총총히 갔느냐고. 너를 사랑하던 그 아내는 어찌하라고. 애비 없는 저 어린 자식들은 어찌하라고, 황천길 가는 길이 그리도 급하더냐고. 나도 덩달아 이렇게 묻고 싶다. 동생아! 아버지의 저 아픈 가슴을 누가 풀어드릴 수 있느냐고. 오늘도 지팡이에 의지하며 소주 한 병 들고 아들에게로 가고 계실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저토록 지독한 그리움의 끝은 어디일까? 끝이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일까. 먼저 간 그 아들을 만나는 날이 끝일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월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동생 묘지로 가고 있는 그 길을 우리는 막지도 못한다. 곁에 없어도 늘 함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 아들이다. 가슴에 맺혀있는 얼굴은 오늘도 그믐달로 떠오른다.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당신 가슴에 주홍 글씨로 새겨놓은 아들 이름 석 자.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이 여기 있지 않느냐고 아무리 간곡히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우리들을 보고 위안을 받으며 남은 삶을 편히 지내시라고 말씀 드려도 아버지는 늘 먼 산만 바라보신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여생이지만 남아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이제는 그 아픈 마음을 잠재웠으면 한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 하실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곁에서 다만 지켜보면서 빌고 있을 뿐이다.
이영란 --------------------------------------------------- 충북 증평 출생. 원석문학회 회원.
당선소감
흐드러지게 꽃이 핀 봄날입니다.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올해 회갑을 맞는 저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수필 공부를 시작한 저에게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젊은 아들을 당신보다 먼저 보내고 눈물 섞인 술잔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기억이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보면서 쓴 이 글은 그동안의 불효에 대한 반성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조금의 기억이라도 남아있는 아버지께 이 글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그동안 지도해주신 교수님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옆에서 손 잡아주고 격려해 주던 문우들도 고맙습니다. 늘 마음으로 응원해준 남편, 글을 쓸 때마다 읽고 날카로운 비평을 해 주던 두 딸, 늦은 시간에도 불평 없이 도와 준 아들. 모두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덜 여물어 미숙한 글이지만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날까지 열심히 글을 쓰리라 다짐해 봅니다. 기쁜 수상 소식에 부모님 모시고 늦은 봄꽃 구경을 떠나야 될 것 같습니다.
"가슴에 맺혀있는 얼굴은 오늘도 그믐달로 떠오른다.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당신 가슴에 주홍 글씨로 새겨놓은 아들 이름 석 자.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이 여기 있지 않느냐고 아무리 간곡히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우리들을 보고 위안을 받으며 남은 삶을 편히 지내시라고 말씀 드려도 아버지는 늘 먼 산만 바라보신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여생이지만 남아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이제는 그 아픈 마음을 잠재웠으면 한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 하실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곁에서 다만 지켜보면서 빌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의 주홍 글씨 - 이영란
친정집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가면 13년 전 세상을 등진 동생의 묘가 있다. 소주 한 병, 과일 몇 개 놓고 나는 대답 없는 혼자만의 넋두리를 한다. “등에 짊어진 그 많은 짐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래 너는 하직 인사도 못하고 총총히 가버렸니?”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지, 누나. 누나 속까지 썩일 필요는 없지 않아.” 바람결에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2001년 3월 5일 새벽, 동생의 죽음을 전화로 전해 들었을 때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는 듯했다. 동생의 나이 마흔여섯. 아직도 한창 나이 아닌가. 한 가정의 가장이며 어린 네 아이의 아버지였던 동생. 할머니까지 아직 살아 계실 때인데 세상을 떠나다니. 더구나 동생은 내 친정집의 장손이 아닌가. 직장에서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젊은 나이에 퇴직을 당했으니 마음에 오죽 응어리가 졌을까. 병명은 심근경색이라고 하지만 집안 식구 누구와도 변변히 작별 인사도 못하고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가 버렸다. 친정집은 봄이면 복숭아꽃이 예쁘게 피어나던 과수원집이었다. 동생은 동네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간혹 과수원으로 복숭아 서리를 하러 온 옆 동네 친구들과 마주쳐도 차마 매몰차게 내쫓지 못하고, “얘들아! 어른들 오시기 전에 얼른 조금만 따 가.” 하고 사정 조로 말하던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복숭아를 몰래 따 주다 할머니께 들키는 일이 있어도 꾸지람을 대신 받으며 애들이 복숭아가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렇게 왔을까 하고 두둔하곤 했다. 학교에서 어쩌다 나와 같이 오게 되면 내 책가방도 곧잘 들어주면서 “누나 힘들지?” 하면서 착하게 웃던 동생이었다. 장남이라서 그런지 동생 셋 중에서 제일 마음이 넓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내다보고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를 보면서 특히 그런 생각을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할 때가 있는데도 그것을 용납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아버지도 당신의 창문으로만 동생을 바라보셨다고 할까. 칭찬보다는 질책을 더 많이 하셨던 아버지, 장남이란 이유로 책임감을 더 강조하셨던 아버지였기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오히려 엄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들이 불의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그 아픔을 누구보다 아파하셨던 아버지. 이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나는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엄격한 훈육만이 훌륭한 아들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신 아버지, 아들이 별안간 세상을 떠나자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를 새긴 것이다. 얼마나 큰 상처로, 얼마나 깊은 곳에 그 상처가 자리 잡고 있는지 우리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여든을 넘기신 두 분 부모님이 툇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계실 때가 많았다. 실은 언제나 아들이 묻혀 있는 묘지 쪽을 바라보고 계셨다. “큰애야, 이제 그만 이 늙은이들 네가 와서 데리고 가거라.” 이미 눈가에는 눈물조차 메말라 있었다. 오늘은 동생 생각이 더욱 나시나 보다. 아버지의 삶을 흔들어대는 저 애절함에는 약도 없는 것일까? “인생은 바람이여. 낙엽이 떨어지는 건 바람 때문이 아니라 세월 때문이여.” 하시며 찾아가시는 곳은 언제나 아들이 누워 있는 그곳이다. 살면서 잊히지 않는 슬픔이나 고통은 없다고 말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그런 예가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버지에게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저 마음의 상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새록새록 새로워지는 것을 나는 느낀다. “이젠 산소에 그만 가세요. 가시면 아버지 오시는지 알기나 해요?” “내가 먼저 애비 왔다고 말하면 되지, 누가 먼저면 어떠냐.” 하시며 고개를 돌리신다. 참고 있던 통곡이 잔뜩 목울대까지 올라와서 허공을 맴돌고 있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고 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지만 그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아픔은 유별나다. 생인손가락을 앓듯이 평생을 앓고 있는 아픔이다. 나도 이제 살아온 삶의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은 나이가 되었다. 자식의 아픔도 함께 끌어안아야 하는 부모의 마음 말이다.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그 마음 어찌 다 알 수 있을까마는 이제는 어느 정도는 헤아릴 수는 있는 나이가 나도 된 것 같다. 가을은 나에게 만남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이다. 아버지는 13년 전으로 돌아가 아들을 잠시라도 만날 수 있다면 물어 보고 싶은 말이 꼭 있다고 하신다. 말씀하시지 않아도 나는 그 말을 잘 알고 있다. 어째서 아버지에게 원망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렇게 총총히 갔느냐고. 너를 사랑하던 그 아내는 어찌하라고. 애비 없는 저 어린 자식들은 어찌하라고, 황천길 가는 길이 그리도 급하더냐고. 나도 덩달아 이렇게 묻고 싶다. 동생아! 아버지의 저 아픈 가슴을 누가 풀어드릴 수 있느냐고. 오늘도 지팡이에 의지하며 소주 한 병 들고 아들에게로 가고 계실 아버지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저토록 지독한 그리움의 끝은 어디일까? 끝이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일까. 먼저 간 그 아들을 만나는 날이 끝일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세월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아픔 때문에, 동생 묘지로 가고 있는 그 길을 우리는 막지도 못한다. 곁에 없어도 늘 함께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린 아들이다. 가슴에 맺혀있는 얼굴은 오늘도 그믐달로 떠오른다. 누가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당신 가슴에 주홍 글씨로 새겨놓은 아들 이름 석 자. 아버지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들이 여기 있지 않느냐고 아무리 간곡히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우리들을 보고 위안을 받으며 남은 삶을 편히 지내시라고 말씀 드려도 아버지는 늘 먼 산만 바라보신다.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여생이지만 남아 있는 자식들을 위해서 이제는 그 아픈 마음을 잠재웠으면 한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 하실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곁에서 다만 지켜보면서 빌고 있을 뿐이다.
이영란 --------------------------------------------------- 충북 증평 출생. 원석문학회 회원.
당선소감
흐드러지게 꽃이 핀 봄날입니다.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은 올해 회갑을 맞는 저에게 최고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수필 공부를 시작한 저에게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젊은 아들을 당신보다 먼저 보내고 눈물 섞인 술잔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기억이 점점 흐려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보면서 쓴 이 글은 그동안의 불효에 대한 반성이기도 합니다. 아직은 조금의 기억이라도 남아있는 아버지께 이 글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그동안 지도해주신 교수님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 옆에서 손 잡아주고 격려해 주던 문우들도 고맙습니다. 늘 마음으로 응원해준 남편, 글을 쓸 때마다 읽고 날카로운 비평을 해 주던 두 딸, 늦은 시간에도 불평 없이 도와 준 아들. 모두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덜 여물어 미숙한 글이지만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날까지 열심히 글을 쓰리라 다짐해 봅니다. 기쁜 수상 소식에 부모님 모시고 늦은 봄꽃 구경을 떠나야 될 것 같습니다.
반가운 소식 듣고 환한 웃음 짓는 이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늘 밝은 표정이라 이처럼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당선작과 멋진 당선패 보시고 아버님 가슴 속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조금이나마 흐려져서, 여생을 가벼운 마음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셨으면 좋겠네요. 이작가님의 신인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첫댓글 영란씨! 축하 합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아픔이 있다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아픈 사연을 글로 쓰셨군요. 이글로 아버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영란씨 더욱 좋은 글로 원석 문학회를 빛내 주세요.~~~
반가운 소식 듣고 환한 웃음 짓는 이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늘 밝은 표정이라 이처럼 가슴 아픈 가족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당선작과 멋진 당선패 보시고 아버님 가슴 속에 새겨진 주홍글씨가 조금이나마 흐려져서, 여생을 가벼운 마음으로 건강하게 살아가셨으면 좋겠네요.
이작가님의 신인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슴이 아립니다.
가슴으로 잘 읽었습니다.
영란샘 당선을 축하합니다.
아버지의 아픔은 훗날 아들을 만날 때나 해결되시겠지요 .
아픈 마음을 알아주는 딸의 글을 읽고 조금이나마 편안해지셨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