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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식의
'클래식은 영화를 타고'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Portrait de la jenue
fille en feu : Portrait of a lady on fire >
여기...
서서히 타올랐으나 서로의 마음을 뜨거운 채로
탐하게 놔둘 수 없었던 시대,
자신들을 찾아온 사랑의 형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젊은 연인의 불에 새긴 사랑의 서사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이 있습니다.
밀라노 귀족과 결혼을 앞둔 딸 엘로이즈
(아델 에넬 분)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한 백작 부인의 의뢰를 받았던 마리안느
(노에미 멜랑 분)...
백작부인(발레리아 골리노 분)이 마리안느에게
내건 작업적 제안은,
초상화를 모델을 직접 마주하지 않고 오로지
기억에만 의존해서 그려야 된다는 것이었죠.
마리안느가 까다로운 초상화를 그릴 장소로
가는 여정은 사뭇 순탄치 않습니다.
격랑어린 운명을 암시하듯, 거센 파고를 헤치며
어슴푸레한 시각에 도착한 해변엔 거대한
돌기둥이 서 있지요.
이 밑을 지나 의뢰인 귀족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은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듯 합니다.
신화의 기운이 물씬한 이곳에서 마리안느가
그려야 할 초상화의 ‘대상’은,
바로 남성의 시선(male gaze)으로 ‘객체화'된
여성였던 게지요.
해서, 마리안느는 그 외딴 섬의 저택에서
며칠간 머물게 됩니다.
어쩌면, 그리스 신화 속 '에우리디체' 의 숙명을
타고난 엘로이즈...
그녀는 얼굴도 본 적 없고 심지어 죽은 언니의
상대자였던 남자와 원치않는 결혼을 해야 하죠.
황당한 정략 결혼의 방점을 찍을 매개체는
다름아닌 '초상화(Portrait)' 입니다.
혼인을 성사시키려 애쓰는 어머니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결혼에서 도망치고 싶은 엘로이즈는 애시당초
초상화 모델로 나설 생각이 없지요.
마리안느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의 신분을 숨긴 채, 산책 친구로 위장하여
접근하게 됩니다.
에우리디체를 살리기 위해 저승의 뱃사공
카론의 조각배를 타고 스틱스 강을 건넌
오르페우스처럼 말이지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와 처음 산책하던 날...
한동안 집에만 갇혀있던 엘로이즈는 집에서
나오자 갑자기 절벽을 향해 질주합니다.
마리안느도 그녀를 잡기 위해 뒤따라 달리죠.
낭떠러지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춘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보며 말합니다.
“늘 이걸 꿈꿔왔어요(I've dreamt of that
for years)."
“죽는 걸요?(Dying?)”
“달리는 것을요!(Running!).”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동안 초상화 작업을
마치기 위해 마리안느는 고군분투합니다.
꿈꾸던 달리기를 하듯 몸과 마음이 멀찍이
앞서가는 엘로이즈를 뒤쫓으며,
조금씩, 그리고 천천이 그녀의 부분 부분을
관찰하지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눈과 코, 귀를 바라보고
기억하려 애씁니다.
그렇게, 엘로이즈를 내밀히 바라보던
마리안느는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지요.
마리안느의 눈에 품어진 엘로이즈의 모습이
불현듯 그녀 자신의 마음에도 담기게 된
것입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생경한 감정은 마리안느를
행복케 해주지만 동시에 고통스럽게 만들죠.
함께 걸으며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는 두 사람.
마리안느는 결국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화가임을 솔직히 밝힌 후,
밤마다 기억을 더듬으며 완성했던 첫번째
초상화를 공개합니다.
초상화는 일견 아름답지요.
두 뺨에는 홍조가 돌고 옅은 미소와 함께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모습이 담겼습니다.
엘로이즈는 자신과 닮았냐 묻지요.
그러나, 마리안느는 결코 닮지 않았음을
압니다.
결혼에 대해 말할 때 엘로이즈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웠고, 입꼬리가 내려왔으며,
두 손은 갈 길을 잃었으니까요...
마리안느는 초상화에는 '규칙과 관습, 이념' 이
있다며 애써 둘러대지만,
"생기와 존재감은 왜 없느냐" 는 엘로이즈의
대꾸에 급기야 할 말을 잃은 채,
초상화를 짓이겨버리고 그만 떠나려
합니다.
한데, 여성이되 가부장의 틀을 체화한
백작부인은 초상화를 완성할 5일간의 시한을
주고 출타하죠.
덕분에,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또한 하녀
소피(루아나 바리아미 분)는,
여성을 옥죄는 모든 제약과 제한으로부터
시한부적인 자유를 맞이하게 됩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고민하는 소피를 위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자기 일인 양 애쓰는
'결속의 자유' 말이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향한 사랑의 향취를 만끽합니다.
마리안느는 스스로 '주체적' 인 포즈를 취한
엘로이즈를 곧바로 마주하게 되지요.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부터 입었다는
남색 드레스 대신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마리안느 앞에 섭니다.
마침내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자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를 응시하게
되지요.
그 시선 속에서 때로는 에로틱하고
때로는 애절한 사랑이 싹틉니다.
시선이 양방향이 되면서 전통적인 '작가
- 뮤즈의 관계' 가 새롭게 재탄생된 게죠.
마리안느는 시선의 교감으로
엘로이즈에게 색을 입혀갑니다.
그렇게, 착취하지 않는 응시로 서로를
고양시키는 두 사람...
마리안느는 화가로 다져온 관찰력을 과시하듯
평소 엘로이즈의 습관을 읊습니다.
"당신은 당황스러울 때 입술을 깨물죠.
화가 날 때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요."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곁으로 부른 뒤
예상했다는 듯 화답합니다.
"당신은 할 말이 생각이 나지 않으면 이마를
만지고, 평정심을 잃으면 눈썹이 올라가요.
또 당황하면 입으로 숨을 쉬죠...”
마리안느는 "어떻게 그걸 알았냐" 고
되묻습니다.
이제, 화가와 동등한 입장이 된 엘로이즈는
당당하게 말하지요.
“당신이 나를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겠어요?”
수녀원이 평등해서 좋았다고 말하는 엘로이즈...
그녀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진취적인
여성이죠.
귀족 가문의 딸이지만, 평민 출신의 마리안느와
동등한 입장에서 얘기하고,
심지어 하녀인 소피와 나란히 앉아 카드놀이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녀가 자수를 하고 자신이
대신 음식을 차리는,
자유를 갈망하며, 또 평등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지지요.
또한 글을 모를 가능성이 클 소피를 위해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신화를 읽어줍니다.
"지상의 문턱에 다다를 즈음,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체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과 보고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해,
그만 뒤돌아 에우리디체를 보고 말았다.
그녀의 마지막 작별인사가 오르페우스의
귀에 닿는 순간,
에우리디체는 지옥으로 다시 떨어졌다."
그런데...
그 신화에 대한 반응이 '3인 3색' 이지요.
하녀 소피는 서약을 깨트린 오르페우스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고 날선 목소리로 비판하죠.
"멍청한 오르페우스, 거기서 왜 돌아봐요?
말이 안 돼. 사랑한다면 명을 절대로 지키고
참아야죠!"
반면, 화가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 편에
섭니다.
"그는 그녀와의 추억을 취한 거야.
연인이 아닌, 음유시인(예술가)으로서의 선택을
한 것이지."
한데, 엘로이즈는 두 사람과는 전혀 다른 시각의
해석을 하지요.
이는 곧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본인들의
자화상이 됩니다만...
두 여자는 소피와 함께 해변에서 열린
마을 여자들의 축제 행사를 보러 갑니다.
이들은 아카펠라로 휘감아지는 뜨겁고도
격심한 모호함의 하모니, 'Le jenue fille en
feu' ('타오르는 젊은 여인') 와 어우러지죠.
섬뜻한 신비로움으로 풀어지는 마녀사냥적
주술 의식은,
평등과 자유, 또한 동성애를 거부하지 않는,
귀족 여성 엘로이즈를 향한 화살로 다가옵니다.
그러다...
모닥불에 그만 불이 옮겨붙어 '타오르는
그녀의 드레스 자락 형상' 은,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의
전체 이미지를 통렬하게 관통하죠.
죽은 그림이었던 초상화는 타오르는 순간에만
살아 있는, 제 자리를 비로소 찾은 그림이
된다는...
이들이 첫키스와 함께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는 하데스 지하세계의 재현인 동굴입니다.
이 곳을 나와 바다를 넘어 세상으로 나간다는
건 오르페우스가 고개를 뒤로 돌려
에우리디체를 확인하는 일인 게지요.
세상 밖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해석만
존재할 뿐입니다.
동굴을 나온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사랑을
지속할 방법은,
서로 떨어져 지내며 그림이나 음악과 같은
예술을 통해 상대방을 오래 기억토록 하는
것이죠.
마리안느는 자신이 마치 오르페우스가
된 것처럼 사랑하는 엘로이즈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계속 그녀의 환상을
보게되지요.
무심코 '뒤를 돌아보면', 그만 어둠 속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엘로이즈의 환상...
주어진 닷새의 마지막 밤, 마리안느는 전처럼
초상화의 얼굴을 지워버리려 합니다.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엘로이즈와 영원히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엘로이즈는 흡사 에우리디체처럼,
함께 한 모든 순간을 기억하라며,
마리안느를 신화 속 '시인, 오르페우스' 로
탄생시킵니다.
두번째 초상화를 맘에 들어하며 엘로이즈는
덧붙이지요.
잘 그린 것도 있지만 자신이 변한 탓도
기여했을 거라고 말입니다.
엘로이즈는 묻지요.
"그림이 완성됐다는 걸 어떻게 알아?"
마리안느는 '시인' 답게 읇조립니다.
"그리기를 멈추면."
그리고 몇군데를 덧칠한 다음 말하죠.
"끝났어!"
그 순간 초상화도, 둘의 관계도 끝난 것인지요...
마지막 밤을 함께하는 두사람은 서로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그림을 나누어 가지죠.
자신이 그린 엘로이즈 초상화을 조그맣게 그려
간직하려는 마리안느는 "자신을 위해서" 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오르페우스 신화 책
28쪽에 그려 선물하는 마리안느...
두 여성은 후회하지 않도록 잠을 쫓아내며,
서로를 '기억' 하려 애씁니다.
다음날 초상화를 백작부인에게 전달한 뒤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가려는 마리안느를
향해,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체처럼 부르짖습니다.
"뒤를 돌아봐!"
하지만, 마리안느가 뒤돌아보니 환상 속에
나타나던 하얀 웨딩드레스의 엘로이즈 모습은,
그대로 서 있다가 문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오르페우스 행동에 대한 엘로이즈의 답변은
이랬지요.
"에우리디체가 '뒤를 돌아봐줘요' 라고 간절하게
요구했을 수도 있어!“
능동적인 행위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런 어느 날,
마리안느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적인
회화(繪畵) '오르페우스 신화' 를 전시회에
출품하죠.
신화 속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에게 현실의
자신과 엘로이즈의 모습을 투영한 작품인 겁니다.
어느 화가가 그림을 평하지요.
"오, 이 오르페우스 작품은 훌륭하군요!
보통 그가 돌아보기 직전의 모습이나
에우리디체의 죽음에 대한 이미지로 그려지는데,
이는 마치 서로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
같네요!"
그림 안에서 에우리디체는 엘로이즈의
웨딩드레스와 겹쳐보이는 느낌의 흰 옷으로
치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림 속 오르페우스는 마리아느가
회화전에 입고 온 파란색 옷과 닮아보이는
의상을 걸치고 있죠.
그리고...
멀어지는 에우리디체를 향해 손을 뻗고
있습니다.
마리안느는 그림을 통해 따라오지 못하는
엘로이즈와,
그런 엘로이즈를 떠나보낸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어느덧, 우리는 무연스레 보게 됩니다.
뜻밖에도 이 전시회에 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말이죠...
엄마가 된 엘로이즈는 그림 속에서 한 손으로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있고,
다른 손으로는 마리안느가 선물한 책의 28쪽을
살짝 펼치고 있습니다.
이를 본 마리안느의 얼굴에 그녀만의 아련한
미소가 번지죠.
영화의 피날레...
마리안느는 오페라 하우스 콘서트에서
마지막으로 엘리오즈를 혼자서만
'바라보게' 되지요.
여전히 고혹적인 미모의 그녀는,
생생하게 타오르는 비발디의 '여름(L'Estate)'
3악장의 프레스토가 고조되어 갈수록,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템페스트처럼
휘몰아치는 음악과 함께 격렬히 울다 웃기를
되풀이합니다.
카메라는 그런 카타르시스의 엘로이즈 얼굴을
농밀하게 클로즈업하지요.
'엘로이즈, 그녀' 는 피아노로 연주해주며
비발디의 '사계'에 처음 눈뜨게 해줬던,
'마리안느, 그녀' 와의 애틋한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이겠습니다만...
그리고, 타오르는 열정으로 엘로이즈를 빤히
응시하는 카메라의 시선 또한 '마리안느의 눈길'
일 것이죠.
영화는 화가로서 그저 피사체를 관찰하듯
시작된 마리안느의 무심한 시선이,
점점 엘로이즈라는 인물의 외모만이 아닌
내면으로까지 파고들면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화학작용을 시적(詩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여,
감정선을 세세하게 쌓아올리며, 제목 그대로
'불타오르는' 영화는,
한 폭의 유화를 연상시키듯 유려한 색감과
영상미를 내뿜고,
두 캐릭터 사이에 오가는 눈빛과 표정은
단 한 순간도 낭비되는 일이 없이 감정을
전달하죠.
카메라 앵글과 연출은 캔버스를 터치하는
붓놀림 같은,
더할 나위없이 섬세한 톤으로 캐릭터들을
비춰냅니다.
영화는 그렇게, 정치한 구성의 편집과 함께
다양한 방식으로 감동의 울림을 건네주지요.
아울러 죽음과 탄생, 관습에 저항하는 자아 등
적절하게 배치된 미학적 미장센은 깊은 공명을
자아냅니다.
OST로 치환된 비발디의 '사계(The Four
Seasons)' 중 '여름(L'Estate)'의 배경 음악
역시 격정적으로 울려퍼지며,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서로를 향해 선연히
불사르는,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찬연하게 품어내고
있지요.
1. 영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예고편
- https://youtu.be/vWZuvr8n7FE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신화를 통해,
사랑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두 여인의
감정을 은유하지요.
화면 속 두 주인공은 다른 듯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과 마음은 그 시대 어디에도
닿을 곳이 없었죠.
당시 18세기 후반 유럽의 시대상을 환기해
보면,
여성 화가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림은
평가에서 제외되거나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안느' 는 유능한 화가인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 그림을 그려왔지만,
여성 예술가라는 잣대 속에 여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고,
전시회에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조차 제출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술 활동에서 철저히 배제되었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유를 갈망해야 하는
이는 또 있습니다.
바로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 이지요.
그녀는 원치 않는 정략결혼을 앞두고
정혼자에게 자신의 초상을 보내야 하는
입장입니다.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에서는 결혼 전 여자의
초상을 남자에게 보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남자는 자신의 신부가 될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았지요.
이런 클리셰는 여자의 선택과 취향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히려 남성에게만 선택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그 당시 불평등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줍니다.
이런 시대상 속에서 여성 화가로서 차별적인
삶을 감내해야 했던 마리안느와,
떠넘겨받은 결혼을 어떻게든 거부하고 싶었던
엘로이즈는,
서로에게 영혼의 유대감을 느끼지요 .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하나하나
잊을 수 없는 시선에 담아갑니다.
엘로이즈는 처음엔 마리안느가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으려는 화가임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녀의 올곧은 시선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엘로이즈의 얼굴을, 또 마음을 관찰하는
마리안느...
두 사람은 사랑의 권력이 평등의 근거로, 또한
완벽한 합일로 전위되는 미묘한 감정에 끌리게
되지요.
마리안느는 첫 번째 초상화가 완성됐을 때
죄책감으로 화가인 자신의 정체를 밝힙니다.
초상화는 엘로이즈의 정략결혼에 대한 저항,
자유에 대한 의지, 평등에 대한 갈망을 모두
부정하고 무력화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였죠.
그러자, 침묵하며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엘로이즈...
하지만 얼마후 그녀는 물에 흠뻑 젖은 채
되돌아오지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엘로이즈의 '타나토스(Tanatos)' 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시퀀스이지요.
처음엔 엘로이즈를 전형적인 초상화의 규칙과
규범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던 마리안느는,
둘 사이에 연모의 불꽃이 일자 진실한 감정이
개입한 동등한 시선의 존재로 서로를 포갭니다.
이제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의 초상화 작업은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와 겹치게 되지요.
그림 그리기와 사랑이 일체가 된 활동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누드도 그려요?” ,
“중요한 주제들은 여성을 비껴가요,
여성 화가의 활동을 제한하는 거죠.” ,
“그럼 안 그려요?” ,
“몰래 그려요...”
대화를 통해 엿볼 수 있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엘로이즈의 어머니, 즉 유사 가부장인
백작부인이 없는 동안, '몰래’ 한시적 조건부의
빛을 발합니다.
애초 마리안느가 저택을 찾을 때 칠흑의
동굴 입구와 같은 돌기둥을 통과한 건,
오르페우스 신화를 우회한 현실의 반영이란
암유적 설정으로 자리하지요.
처음엔 실망감과 배신감으로 무척 분노했던
엘로이즈였지만,
그녀는 어느새 마리안느 앞에서 능동적으로
포즈를 취해 보입니다.
둘은 교감을 통해 시선을 주고받고 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며 무섭도록 서로에게
빠져들지요.
"첫키스하고 싶었던 때를 기억해줘.
기억해! 너와 내가 나눈 모든 순간을..."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에서 정사 신은
두 배우가 입을 맞추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서로에 대한
생각의 암유의 여백으로 채워져 있지요.
하지만 열렬한 정사 신보다 더 긴장되는
두 배우의 눈빛과 감정 표현,
그리고 관객의 직관을 요구하는 여러 비유들이,
영화를 절대 느슨하게 만들지 않고
빠져들도록 해줍니다.
이는 여성인 동시에 본인이 퀴어인
셀린 시아마 감독의 의도 하에,
철저한 '여성의 시선(female gaze)'로 스토리를
풀어낸 것이 작용한 것이죠.
그녀는 화면 속에서 보통 영화라면 존재하는
여러 요소들을 빼거나 최대한 그 활용을
절제했습니다.
두 배우의 자극적인 정사 신, 배경음악(OST),
그리고 남성 등장인물과 '남성의 시선
(male gaze)' 들이 그리하지요.
역으로 감독은 관객들이 그 동안 영화에서
많이 배제되던 세가지를 이 작품에서 찾길
바랍니다.
충분히 감각적인 두 여인의 감정 라인과
이에 대한 시적인 비유(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 얘기),
배경음악의 효과 없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영화의 리듬,
또한 남성이 주류인 역사 안에서 크게 지워졌던,
여성이 살아온 흔적과,
역사에 없는 여성의 삶, 여성의 시선들,
여성 의복에서 사라진 주머니 등을 이르지요.
- https://youtu.be/rv-m744KKXE
원작이 있는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전의 느낌을 줄 정도로,
한 폭의 초상화처럼 미려한 영상미가 돋보이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하얀 캔버스에 목탄으로 선을 긋는
장면으로 영화는 그 막을 열어가죠.
1770년대의 프랑스, 젊은 여성들이 데생을
하며 누군가를 그리고 있습니다.
모델은 그녀들을 가르치는 화가 마리안느.
그녀는 앉아서 포즈를 취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한 여인의 뒷모습, 타오르는 드레스...'
눈에 띄는 독특한 그림을 발견하고,
그 작품을 함부로 꺼내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러자, 제자들 모두는 그림을 바라보면서
제목에 대해 궁금해 하지요.
마리안느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고
대답하며 강렬했던 사랑의 추억을 떠올립니다.
몇년 전, 마리안느는 브르타뉴의 한 섬으로
향하고 있었지요.
파도가 거칠어 배가 기우뚱하게 움직이는 동안
넓은 짐 하나가 바다에 빠지고 맙니다.
그녀는 바다에 뛰어들어 짐을 건져오고 옷이
젖은 채 도착한 섬에서 한 백작부인의 저택을
찾아가지요.
하녀 소피는 불을 쬐어주고 그녀를 돌봐주며
마리안느는 짐을 꺼내어 화첩을 말립니다.
식탁에서 빵을 먹던 마리안느는 소피에게
아가씨 '엘로이즈' 에 대한 정보들을 물어보지요.
아가씨는 수녀원에 있었고 결혼을 앞둔 언니가
있었지만 절벽에서 추락사해서 수녀원을
나왔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소피는 아가씨의 언니가 자살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떨어질때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라고 말하죠.
그렇게...
아가씨 엘로이즈는 결혼을 앞둔 언니가
"운명을 떠넘겨서 미안하다" 라는 편지를 남기고
자살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말그대로 언니의 운명을 넘겨받게 된 엘로이즈...
마치 새장에 갇힌 새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녀는 외딴 섬으로 건너오게 된 것입니다.
엘로이즈가 생각하는 탈출구는 바다 저 너머에
있는 어딘가에 있을런지요?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영화답게 감독은
정교한 아이러니를 직조해내죠.
마리안느는 자신이 원하는 것(보수)을 얻기
위해 엘로이즈가 저주하는 행위(정략결혼
상대에게 보낼 초상화 그리기)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엘로이즈가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며 아이러니는
세리아적 비극으로 색채를 바꾸어가지요.
18세기 프랑스에선 여성 간의 연애는 입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난제였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정략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절망적이지만,
갈망하는 이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이들을 낙담하게 만들지요.
자유의지에 따른 결혼 외에도 둘의 시선이
닿는 곳곳엔 여성에게 금지된 것으로
가득합니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회상할 때마다
정장 드레스가 아닌 잠옷 차림의 모습이
떠오르지요.
사회는 그들에게 꽉 조여진 모습을 원했지만,
정작 마리안느는 연인 엘로이즈가 가장 느슨한
모습으로 지내길 바랐던 것입니다.
두 여자 사이의 간극은 점점 좁아지죠.
하녀 소피의 힘겨운 낙태시술 이후,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의 서사가 나오는 건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마리안느는 실력 있는 화가이지만, 여성인
그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릴 수 있는 그림은
극히 제한돼 있지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비난받아야 했던
여인들의 얼굴이 슬픈 표정으로 그려집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후회하지 않지요.
본인이 고를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기에 그저
순간을 느끼고 머릿속에 새길 뿐입니다.
두 여인은 종종 세상의 끝인 바다에 가서
그곳 너머를 상상하지요.
마리안느는 깨닫게 됩니다.
어떤 기억이야말로 오늘의 삶을
지탱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아울러, 예술이란 가장 중요한 순간을
붙잡아 영원히 존속시키려는 간절한 바램,
그리고 누군가의 소중한 일부(기억)를
살아있게 하는 실존적 행위임을...
이제 마리안느는 여성을 향한 '시선과
기억의 예술' 을 확장하고 전승해 나갈
것입니다.
이토록,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에서
선택권이 극히 좁았던 두 여성이,
좌절 대신 현재를 느끼면서, 서로에 대한
'기억' 을 새겨나가는...
'엘로이즈'로 분한 아델 에넬과
'마리안느'의 노에미 멜랑은,
화면에 존재감을 불어넣는 압도적인
흡인력의 연기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영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은
삽입곡을 최대한 절제한 채,
파도와 바람소리, 숨결과 붓자국이 화폭 위를
스치는 삶과 예술의 마찰음을 절묘하게
강조하며 그 긴장감을 고양시킵니다.
명화들을 이어붙인 아우라의 화면의 구성과
그 화음(畵音)은 눈과 귀를 사로잡지요.
-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Portrait of a lady
on fire > 영어자막 Trailer
https://youtu.be/R-fQPTwma9o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화면 속엔
마리안느의 좌충우돌 퍼즐 맞추기식 '초상화
완성기' 라는 영화의 기본 구도를 바탕으로,
아래 층위(Layer)에는 색다르게 재해석된
오르페우스 신화가,
그 위 층위엔 '여성인권과 계층문제' 의
사회적 색채가 다층적으로 입혀져 있죠.
영화는 그렇게...서로의 시선으로 말미암아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겪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두 여성의 오디세이를 펼쳐냅니다.
수녀원과 외딴 섬의 저택에 갇혀 감옥같은 삶을
살아온 엘로이즈를 처음으로 세상과 연결시켜준
마리안느...
특히 그녀가 건네는 시선의 위력은 너무도
강렬해서,
마주보는 엘로이즈를 '살아있게' 하고
또 '타오르게' 합니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첫 산책을 하고 돌아와
예전의 화가가 남기고 간 미완의 초상화를 은밀히
꺼내보지요.
등잔불을 기울여 유심히 들여다보다 그만 불씨가
그림 속 '얼굴없는 여인' 의 왼쪽 가슴에 옮겨 붙고
맙니다.
그녀의 응시가 촉발시킨 이 불길은 가식적이고
타율적인 삶을 줄곧 거부해온 엘로이즈,
그녀의 얼어붙은 심장을 타오르게 하리란
복선적 암유인 게지요.
카메라는 시종일관 화자인 화가 마리안느의
시선을 취하지만,
엘로이즈는 단지 그 시선을 받는
객체적 입장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녀는 관찰되는 와중에도,
'당당하게 시선을 되돌려주는 자',
'주체적으로 탐구하고 평가를
내리는 자',
또한 '그리는 자에게 왜곡하지 말고
정확하게 표현하라고 요구하는 자' 로
거듭나지요.
마리안느의 첫번 째 그림 - '남편의
눈으로 그려진 초상화' - 이 엘로이즈의
마음에 들리 없지요.
"이건 내가 아니야, 그렇다고 당신도
아니야!"
대상의 본질도 창작자의 내면도 담지 못한
그림은 진정한 작품일 수 없다는 혹평...
수치심을 느낀 마리안느는 그림을
뭉게버리고 맙니다.
그런데...이게 왠 일일까요?
놀랍게도 엘로이즈는 그동안 거부해온
모델을 해주겠다고 자처한 것입니다.
초상화가 완성되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결혼' 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동반자 오르페우스(마리안느)가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도록,
에우리디체의 숙명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두번째 죽음(초상화의 완성) 을 스스로
받아들인 것이죠.
화면 속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시선'들이
오갑니다.
마리안느는 극 초반 일방적인 시선으로
엘로이즈를 관찰하지요.
그러나 마침내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자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하게 됩니다.
그 시선 속에서 때로는 에로틱하고 때로는
애절한 사랑이 싹트지요.
시선이 양방향이 되면서 전통적인
'작가 - 뮤즈의 관계' 가 전복된 것으로,
이 과정에서 오르페우스의 신화가 중요한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처럼 일방적이던
시선이 쌍방이 되는 순간,
두 연인은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는
것이죠.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부터 입었다는
남색 드레스 대신 짙은 파란색 드레스를
입고 마리안느 앞에 섭니다.
마리안느는 자신의 붓터치로 엘로이즈에게
색을 입혀가지요.
그리고 엘로이즈에게 비발디의 '여름'을
알려주면서, 마침내 둘의 감정은 불처럼
타오릅니다.
그러나 드레스에 붙은 불을 누군가가
꺼버리듯 둘의 사랑은 지속될 수 없지요.
수녀원복 같은 드레스에 옮겨붙은
불씨는 엘로이즈가 더이상 예전의
그녀일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자신의 언어를 발화하지 못한 채,
슬픔과 고통을 숨죽여 속삭이는
여인들의 저항적인 목소리에,
부당한 관습을 거부하는, 소리없는 외침이
꾹꾹 담겨진 엘로이즈의 사회적 자아가
오롯이 눈을 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각성한 엘로이즈는 프레임의
오른쪽(주변적 위치)에서 왼쪽(중심 인물의
자리)을 향해 스스로 걸어들어 갑니다.
소피의 고통스런 낙태 과정을 함께
지켜본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소피를
극진한 정성으로 간호하죠.
잠에서 깨어난 엘로이즈는 결연한
표정으로 마리안느를 형형히 바라보며,
소피의 낙태 장면을 재현해 그려달라고
이릅니다.
'예술가, 마리안느' 의 특별한 시선의
세례를 받아 재탄생한 '뮤즈, 엘로이즈' 가
이번에는 다른 시선의 그림을 요구한
것이지요.
강자와 주류 사회의 일방적인 안목에서
벗어나, 사회의 이면과 약자의 아픔을
직시할 줄 아는 예술가가 되라고
말입니다.
마리안느는 화가(예술가) 로서
오르페우스의 입장을 이해한다면서도,
그 선택의 배경에 관해 나름 그녀만의
해석을 내리죠.
“그녀와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서죠!
그래서 뒤돌아본 겁니다.
연인보다는 (음유)시인의 선택인 거죠.”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의 '뒤돌아봄' 을
그만의 '예술적 무의식',
즉 깊은 슬픔과 허무를 발판으로 더욱
뛰어난 '시인' 이 되고자 하는 선택적
욕망의 발현이라 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에우리디체가 오르페우스를 더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시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 이라는
엘리오즈의 해석은,
오르페우스 신화의 중심 인물을
에우리디체로 변용시키는 동시에,
엘로이즈 자신에게도 주체적 자아와 강인한
내면을 부여해주는 동인으로 작용하지요.
아울러, 이 시점부터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에겐,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체' 의 구도가
덧입혀지게 됩니다.
하여,
관객들은 새로운 프레임 안에서 영화 속
시선과 인물, 사건을
에우리디체처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지요.
섬에서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마리안느는 오페라 극장에서 엘로이즈를
목격하고,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은 듯, 간절한
눈길로 불러, 아니 바라봅니다.
아직 마리안느를 보지 못한 채,
객체적 '대상화' 를 거부하는 욕망의
엘로이즈는 연인과 시인 중 어느 쪽을
선택할런지요.
과연 고개를 돌려 '뒤돌아볼까요' ?...
2. 비발디의 '사계(The Four Seasons)' :
'여름(L'Estate)' G장조 RV. 315 중 '3악장
프레스토(Presto)'
비발디는 그가 직접 썼다고 전해지는
소네트(Sonnet : 작은 詩) 를 통해,
모든 것을 거침없이 파괴하는 '여름'의 광폭함을
'3악장 프레스토' 에서 격정적으로 노래합니다.
"아아, 그의 두려움은 얼마나 옳았던가.
하늘은 천둥을 울리고 번개를 내리치며
우박을 내리게 해 익은 열매나 곡물을 모두
쓸어버린다."
- 애쇼트 티그라냥 바이올린,
클래시컬 콘서트 챔버 오케스트라
https://youtu.be/Ytw99mkVZ8I
- 아드리안 챈들러 바이올린 / La Serenissima
https://youtu.be/NVc1bg6Omeo
3. '타오르는 여인'('La jeune fille en feu')
https://youtu.be/Sr04s6IfxAQ
https://youtu.be/1fWna2iIDBo
엘로이즈의 드레스가 불타는 장면에서
여성들이 합창하는 라틴어 노래,
'La jeune fille en feu' 는 자못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됩니다.
가사의 내용은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죠.
서로 주고받던 시선 속에 타오르는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밖으로부터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건지 모호합니다.
영화의 타이틀도 중의적이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Portrait de
la jenue fille en feu)' 은,
여인이 타오르고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여인을 그린 초상화가 타오르고
있다는 뜻인지 해석의 여지를 남깁니다.
- 李 忠 植
첫댓글 초상화를 그리는 행위에는 단순한 그림
그리기 그 이상의 의미가 존재하지요.
그 작업에는 권력 관계가 있습니다.
화가는 눈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인물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해석해 캔버스에 표현해내죠
때로는 '뮤즈'로 불리며, 그려지는 대상은
캔버스 안에서 화가의 관점대로, 객체적으로
대상화됩니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은 이런
일방적인 시선을 쌍방으로 바꿔내지요.
화가의 성별을 여성으로 바꾸면서
말입니다.
극 중 남성은 거의 등장하지 않지요.
그런데도 영화 속에서 남성 권력은
실재합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이유 역시 남편이 될 사람에게
엘로이즈보다 그림이 먼저 도착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부모의 뜻대로 결정되고, 이후의 삶은
남편의 뜻대로 결정될) 정략결혼을
원치 않는 엘로이즈는,
생면부지의 약혼자에게 보내질 초상화의
완성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결혼해 이탈리아에서 브르타뉴로
온 엘로이즈의 어머니가 그 증거입니다.
그녀 역시, 정략적으로 결혼을 약속한 부모에
의해,
예비 신부인 자신의 초상화가 남자에게
보내졌습니다.
그 시절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화' 된
여자의 초상화가 저택에 걸려있는 것이죠.
포즈 취하기를 거부하는 엘로이즈는 '대상화'
한 그림을 통해 가부장적 시스템 안에 자신을
넣으려는 남성 권력에 대한 거부로 읽힙니다.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OST 영상
https://youtu.be/1fWna2iIDBo
PLAY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예고편
https://youtu.be/rv-m744KKXE
PLAY
영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OST
'La Jeune Fille en Feu'
(Bande originale du film)
https://youtu.be/Sr04s6IfxAQ
PLAY
비발디의 '사계(The Four Seasons)' 중 '여름(Summer : L'Estate)', 3악장 프레스토
https://youtu.be/Ytw99mkVZ8I
PLAY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Portrait of a lady
on fire >
- Mystery of Love (Marianne + Héloïse)'
https://youtu.be/33ah1F-mx_E
PLAY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Portrait of a lady
on fire >
- The Rise of Desire / Video Essay
https://youtu.be/Kx4gkEwPRis
PLAY
'Hurricane'(몽환적인 음성의 Fleurie 노래)
https://youtu.be/pmVx17To0KY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고백하지요.
"홀로 외로울 때(In solitude) 나는 당신이
얘기한 '자유' 를 느껴.
하지만 당신이 '없음(Absence)' 을
실감하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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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Harpsichord Scene'
https://youtu.be/En3SOFEnHkM
"성당 미사곡이 지금껏 들어본 음악의
전부" 라는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는 처음으로 살아있는 음악인
비발디의 '여름' 을 합시코드의 연주로
들려줍니다.
엘로이즈가 향할 밀라노를 '음악의 도시'
라 덧붙이며...
'폭풍'(Storm)이 휘몰아쳐오는, 행복하진
않지만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비발디의
음악은,
엘로이즈의 심장에 뜨거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평생토록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기억의 버팀목' 이 돼주지요.
- The Rise of Desire / Video Essay
https://youtu.be/Kx4gkEwPRis
- Mystery of Love (Marianne + Héloïse)'
https://youtu.be/33ah1F-mx_E
PLAY
그 누가 말했던가요?
두 사람이 있으면 '내밀한 관계' 가
가능해지고, 세 사람으론 '사회' 가
만들어진다고...
셀린 시에마 감독은 이분법의 층위를
넘어선, 세가지 층위로 중첩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다양하고 복합적인 함의의 세계를
섬세한 터치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뒤돌아보지 말라' 는 계명의 어김으로
에우리디체가 두번 째 죽음을 맞이한 채,
오르페우스는 비탄어린 절망에 빠지지만,
그의 절절한 엘레지는 모든 존재들의
마음을 치명적으로 뒤흔들어대지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화면 속엔
기저 서사인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두번
죽는 에우리디체의 운명처럼,
반복적인 두 차례의 변주가 숨어있음을
발견케 됩니다.
그렇게...영화는 종종 삼분법 층위의
구도를 취하며 전개되지요.
'초상화' 를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 두 사람의 관계,
그리고 이들 사이에 자리하는 또 하나의
여성 하녀 소피...
감독은 시종 중의적인 영화 속 대사를
통해 에둘러 묻습니다.
"모든 연인들은 그들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걸 느낄까요?(Do all lovers
feel they're inventing something?)"
극 중 엘로이즈는 "수영하냐?
(Do you swim?)" 고 묻는 마리안느에게
"잘 모르겠다(I don't know)" 고 답하죠.
"수영 못하면 너무 위험한데(It's too
dangerous if you don't)" 라며 걱정하는
마리안느...
엘로이즈는 그런 그녀에게 "내가 수영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른다는 뜻(I meant
I don't know if I can swim) " 이었다고
얘기합니다.
고착된 시선을 해방하는 현란한 얼굴의
비전, 그 현재진행형의 그림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존재 이전에 응시가 있는 건지요.
영화는 ‘시선’을 이야기할 때 늘 수동성의
자리에 놓이게 마련인 ‘대상’의 자리를
선험적 응시의 자리로 뒤바꾸면서
‘대상’에 관한 인식의 변화를 도모합니다.
물론 이 선험적 응시의 자리에는,
여성들보다 먼저 혼인한 남성의 집에
도착해 그림의 실제 주인을 기다리던
초상화의 시선도 포함될 것입니다.
비발디 '사계' 중 '여름' 3악장 '프레스토'
- 안네 소피 무터 바이올린 솔로
: 무터 비루티오지 챔버
뉴욕 카네기 홀 펄먼 스테이지, 2014
https://youtu.be/124NoPUBDvA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