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년만 젊었어도
김회직
더도 말고 10년만 젊어서 이제 막 70나이에 들어섰다면 거리낌 없이 일을 시작할 것도 같다. 오랜 세월 별러왔던 꿈을 없던 일로 묻어둔다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그렇다고 능력도 안 되면서 덜컥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지 않은 길을 가기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터, 그러나 80이라는 내 나이가 그 용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뭔가를 새로 시작할 때가 아니라 살아온 날들을 정리하기에도 바쁜 급박한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내가 시작하고자 하는 일은 곧 나를 정리하는 일이기도 하다. 평생 그려온 그림을 한곳에 모으는 수장고를 마련하는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면 자손 대대로 보관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전시해 놓는 것은 내 일생을 정리하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부터 이미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서 몇 해 전에는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세부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껏 허황된 꿈 그대로 남아있다.
진등골 고향마을에 있는 듯 없는 듯 문을 연 작은 미술관
어느 길손 관람객의 뜸한 발걸음이 빈 하늘 한 점 구름송이처럼
잠시잠깐 머물다 가는 고즈넉한 쉼터 향인 갤러리
서까래가 훤히 드러난 고옥을 손질해 만든 한옥 미술관, 벽이며 마루며 있는 그대로의 공간을 최대한으로 살린 아담하고 촌스러운 미술관, 그래서 이름도 시골 향(鄕)에 어질 인(仁), 향인 미술관이라고 했다. 마당 한쪽에는 널찍한 정자가 자리하고, 장독대에는 크고 작은 해묵은 항아리들이 단정하게 줄맞춰서있다. 높이가 가슴까지 올라오는 옛 소달구지 바퀴 한 쌍을 이어 붙여 설치미술품처럼 잔디밭에 세워 놓았고, 정자 앞에 편안히 누워있는 커다란 바위가 영락없이 소를 닮은 것 같아서 와우석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앞마당에는 벚나무, 배롱나무, 라일락, 삼색버들, 백목련, 자목련, 사철나무, 무화과 같은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있고 마당 가장자리로는 석류나무, 감나무, 앵두나무, 보리수, 사과나무, 배나무, 매실, 복숭아나무가 철 따라 새콤달콤한 맛을 전해준다. 마당과 아래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나지막한 토담 너머로 여덟 그루의 굵은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서있다. 바람 부는 날이면 쏴-쏴- 솔잎 부대끼는 소리가 어찌나 크고 시원한지 <솔바람 쉼터>라는 팻말을 달아놓았다. 조상님께서 쓰시던 화강석 연자방아를 연못 한가운데에 기념비처럼 세워놓았더니 유구한 가문의 기운이 묵직하게 전해져온다. 오래 묵은 은행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솟대를 깎아 세워 빈 하늘을 채웠다. 솔숲 주변을 따라 수선화, 튤립, 꽃잔디, 무스카리, 돌단풍 등 봄꽃들이 여기저기서 삐죽삐죽 올라오고 산수유, 진달래, 철쭉, 벚꽃, 영산홍까지 무더기로 필 때는 꽃 대궐이 부럽지 않다. 녹음이 짙어갈수록 작약, 모란, 엔젤, 붓꽃, 불두화, 장미, 달맞이꽃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언제 어디서 날아와 싹을 틔웠는지 빨갛고 하얀 꽃양귀비까지 바람에 나풀거린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붉은 석산화가 무더기로 피어올라 마치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더미를 보는 듯한데 국화, 코스모스, 가을야생화들까지 함께 어우러져 마치 원시림 같은 꽃밭을 연상케 한다. 단풍으로 곱게 물든 만추의 아름다움과 어둠이 밀려오는 저녁나절의 쓸쓸함을 툇마루에 앉아서 한껏 즐기다가도 헐벗은 나뭇가지에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뜰 전체가 그야말로 겨울정원답게 하얀 침묵의 공간으로 바뀐다. 간간히 참새 떼들만 우르르 내려앉아 한참씩 조잘거리다가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리곤 한다. 그렇게 또 한 철을 보내고 입춘첩 건양다경(建陽多慶) 입춘대길(立春大吉)이 붙어있는 솟을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목, 회양목, 옥향, 남천, 소나무 같은 상록수들이 방문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겨울잠에 빠져있던 정원이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팬션마을>이라는 안내판이 동네 입구에 세워져있다. 가까운 곳에 군부대가 있어 면회객들이 찾는 숙박시설이다. 만약 내 꿈이 이루어진다면 전국에서 찾아오는 그 외지인들이 향인미술관의 주요 관람객이 될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더 깊고 아늑한 숲속정원을 만들어야 한다. 편안히 쉴 수 있는 휴식공간은 물론이고 차를 마셔가며 담소를 나누는 그림 같은 카페나 하루쯤 묵어갈 게스트하우스도 마련해야 한다. 관람객을 유치하려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난방비나 전기세, 수도세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수익사업이 꼭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 여든 살에 창업을 한다? 누가 봐도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다. 그러나 후회 없는 인생을 위해서는 미술관을 만드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이 없을 것 같다.
꼭 10년만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면 눈 딱 감고 과감히 도전해볼 텐데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의 나로서는 모든 것이 불가항력인 것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쯤해서 그만 접어야 될 것 같다. 이루지 못할 꿈을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비록 일장춘몽이었을망정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온 세월만큼은 행복했다는 것으로 위로를 삼을 수밖에.
<5월의 향기> 134x44 oil on canvas 2023
첫댓글 김 화백님이 모처럼 올리신 귀한 수필 옥고와 정성스러운 작품 <5월의 향기> 반갑게 감상했습니다.
팔순 연세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는 김 선생님을 뵐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도 젊으실까,
전혀 연세가 드신 분으로 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팔순이라니, 제가 지금도 현직 경찰관이라면
검문하듯 주민등록증 좀 보여 달라고 할 것만 같습니다.
제가 참여하는 어느 카페에는 70대인 제가 막내입니다.
한 원로 역사학자는 80대, 또 한 분 수필가이자 철학자는 90대입니다.
저는 10년, 20년 연치가 훨씬 높은 어르신임에도 왕성한 글쓰기를 하시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김 화백님께서도 제가 보기엔 <만년청춘>이십니다.
윤회장님, 그간 안녕하셨지요? 회장님의 의욕넘치시는 왕성한 문학활동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몸은 늙지만 마음이라도 젊어 그림이든 글이든 신선함 만큼은 잃지 말아야 할텐데 그마저도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젊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화창하네요. 나날이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