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붓다의 깨침은 중도(中道)이며 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가르침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곧 중생들의 사고는 유견(有見) 아니면 무견(無見)의 변견(邊見)에 머무르는데,
붓다는 이를 타파하여 중도정견(中道正見)을 설파합니다.
그러나 붓다와 일세대 제자들의 재새시인 근본불교시대에는 바르게 전해지던 중도사상(中道思想)이 불멸 후에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분열하여 18부파로 나누어지는 부파불교(部派佛敎)시대로 전개됩니다.
이렇게 여러 부파로 분열하였지만, 그 내용은 크게 두 부류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가 있다는 유부(有部)'와
그러한 '영원한 실체는 없다는 무부(無部)'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파불교(部派佛敎) 양상이 인도에서 400여년 전개된 후에 중도정견(中道正見)이 아닌 유무변견(有無邊見)의 부파불교는
정통의 불교가 아니라는 파사현정의 혁신운동이 제2의 석가로 불리우는 나가르주나(용수보살)의 중관학파의 중관사상(中觀思想)으로 전개되고,
한편 세친보살 등에 의한 유식학파의 유식사상(唯識思想)이 등장하여 이른바 인도의 초기 대승불교운동이 전개됩니다.
중관학파는 '연기=공=중도'의 공사상(空思想)을 중심으로, 유식학파(唯識學派)는 마음의 구조를 표층과 심층으로 천착하여
'전5식-6식-7식-8식'으로 규명하여 오직 식(識)일 따름이며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다는 유식(唯識)사상을 전개하며 유식무경(唯識無境) 사상이 그 중심이 됩니다.
불교공부의 두 산맥이 중관사상(中觀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인데 그의 바른 이해가 쉽지않고 대단히 복잡하여 불자들이 매우 힘들어 합니다.
특히 유식불교의 난해함은 공부인을 주눅들게 합니다. 이번 기회에 유식사상의 핵심인 '유식무경(唯識無境)'에 대한 훌륭한 저서를 집필한
이화여대 철학과 명예교수인 한자경 박사의 저술을 중심으로 유식사상의 핵심을 만나보도록 합시다.
=============================================================
[유식무경(唯識無境) -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의 인식과 존재)]
'오직 식[唯識]만 있고 대상은 없다'는 선언의 진짜 의미
유식불교(唯識佛敎)의 심장을 관통하는 선언,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오로지 식(識)만 있고, 식(識)을 벗어난 대상(境)은 없다" 는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이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계의 존재 방식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결코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을 텅 빈 것이라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우리의 정신(識)과 완전히 분리된 객관적 물질 세계(境)가 '저 바깥에' 따로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믿음, 즉 유물론(唯物論)과 이원론(二元論)을 비판하는 철학적 도전입니다.
이 글의 목적은 유식무경의 진짜 의미를 함께 탐구하는 것입니다. '나(주관)'와 '세계(객관)'가 서로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는 본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하고자 합니다.
이 깊은 통찰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 대한 관념부터 함께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정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의 마음(주관)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단한 물질의 객관적인 세상(객관)이 '저 바깥에' 실재한다고 믿습니다. 대상(境)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우리의 마음(識)은 그 대상을 거울처럼 비추거나 반영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유식불교(唯識佛敎)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인식을 벗어난 대상을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인식된 대상이 과연 인식을 떠나 존재한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가 '저기에 있다'고 확신하는 그 대상 역시, 결국 우리의 식(識) 안에 드러난 모습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객관적 세계'라고 믿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물질(色)' 이고, 다른 하나는 '소', '나무', '정의'와 같이 우리가 생각으로 파악하는 '관념(名)' 입니다. 이제 유식철학(唯識哲學)이 이 두 가지 믿음의 실재성(實在性)을 어떻게 해체(解體)하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계부터 그 실재성을 파고들어 보겠습니다.
* '객관 세계'라는 믿음의 해체
1. 물질(色)의 실체성에 대한 비판: 극미(極微)는 존재하는가?
우리는 물질 세계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근본 입자, 즉 '극미(極微, 원자)' 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극미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으로 이루어진 물질 세계 또한 객관적 실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식 철학은 이 '극미'의 실재성을 논리적으로,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모두 부정합니다.
첫째, 극미의 개념은 논리적 모순에 빠집니다. 극미에 공간적 부피(방분, 方分)가 있는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 만약 극미에 부피가 있다면? 부피가 있다는 것은 동서남북과 같은 공간적 부분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이는 곧 더 쪼개질 수 있다는 의미이므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극미의 정의와 모순됩니다.
• 만약 극미에 부피가 없다면? 부피가 없는 점(點)과 같은 것들이 아무리 모여도 어떻게 부피를 가진 물질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빛을 받으면 그림자가 생기는 물질의 특성은 공간적 부피가 없다면 설명할 수 없습니다.
둘째, 극미는 인식론적으로 경험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前五識)이 과연 극미를 인식할 수 있을까요?
• 하나의 극미는 인식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의 다섯 가지 감각 어디에도 극미의 모습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 감각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양상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 그렇다면 극미가 모이면 인식될 수 있는가? 이 역시 불가능합니다. 만약 하나의 극미가 본질적으로 인식될 수 없다면, 인식될 수 없는 것들이 아무리 많이 모인다고 해서 어떻게 갑자기 인식 가능한 것이 되겠습니까? 모인다고 해서 극미 각각의 본질(體相)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오한 통찰에 다다릅니다. 극미라는 개념의 논리적, 인식론적 불가능성은 유물론의 기초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줍니다. 물질 세계의 근본 구성 요소가 인식을 떠나 존재한다고 증명될 수 없다면, 마음과 무관한 객관적 실체라는 거대한 관념 전체가 무너집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의식을 현실의 수동적 관찰자가 아닌, 현실이 드러나는 데에 참여하는 능동적 주체로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2. 관념(名)의 실체성에 대한 비판: '소'라는 보편자는 존재하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소', '나무', '정의'와 같은 일반적인 개념(名)들은 과연 그 자체로 실재하는 보편적 본질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유식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이 실재하는 보편적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제6 의식(第六意識)이 여러 개별적인 것들을 묶어서 만들어낸 '생각의 도구(허망분별)' 일 뿐이라고 봅니다. 이는 언어와 의미의 관계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 의미현현론(意味顯現論): "의미는 원래 존재하고, 말은 단지 그것을 드러낼 뿐이다." [유부(有部) 등 실재론의 입장]
• 의미생기론(意味生起論): "의미는 말을 통해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다." (유식의 입장)
유식(唯識)의 관점에서 '소'라는 보편적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제6 의식이 여러 개별적인 소들을 보고 공통점을 묶어 만들어낸 개념적 약속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3. 물질과 관념에 대한 종합 비교
물질(色)과 관념(名)에 대한 유식 철학의 핵심 비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구분 일반적 믿음 유식 철학의 통찰
물질(色) 식(識)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이다. 식(識)의 활동(감각)과 분리될 수 없는 현상이다.
관념(名) 실재하는 보편적 본질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제6 의식이 만들어낸 분별적 개념일 뿐이다.
이처럼 물질과 관념이 우리의 마음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식(識)'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 구조는 어떠하며, 그 깊이는 어디까지일까요? 이제 그 심층 구조를 들여다볼 차례입니다.
* 마음의 지도: 의식의 표층(表層)과 심층(深層)
1. 마음의 건축술을 탐험하며
객관 세계라는 외부의 토대를 해체한 유식 철학은 이제 그 대안을 제시해야만 합니다. 그 대안은 단 하나의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표층의 기능과 심오한 깊이를 모두 갖춘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식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현실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이제 우리의 탐구를 안으로 돌려 이 내면의 건축술을 탐험해 보겠습니다.
2. 표층 의식 (제1~6식): 나와 세계를 나누는 마음
우리의 마음 가장 바깥층에는 다섯 가지 감각(前五識: ①안식, ②이식, ③비식, ④설식, ⑤신식)과, 이 감각 정보를 종합하고 분석하며 생각하는 마음(제⑥의식)이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를 묶어 '표층 의식'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표층 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분별(分別) 입니다. 즉, '나'와 '나 아닌 것', '주관'과 '객관'을 끊임없이 나누고 분석하여 우리가 아는 세계를 구성합니다. 바로 이 분별하고 이름 붙이는 활동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흔적을 남깁니다. 이 표층 의식들의 분별하고 집착하는 작용이 바로 다음 장에서 살펴볼 제8 아뢰야식에 저장될 씨앗(種子,종자)들을 만들어내는 근원입니다.
3. 심층 의식 1 - 제7 말나식(末那識): '나'라는 착각의 뿌리
제6 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는 끊임없이 '나'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제7 말나식이 있습니다. 이 의식은 두 가지 핵심적인 착각을 일으키는 뿌리입니다.
• 아집(我執): 변하지 않는 고정된 '나'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끈질긴 집착입니다.
• 법집(法執): '나'와 분리된 객관적인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끈질긴 집착입니다.
이러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우리 마음과 분리된 실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4. 심층 의식 2 -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 모든 것의 씨앗 창고
마음의 가장 근원적인 층에는 모든 경험과 가능성의 씨앗을 저장하는 제8 아뢰야식이 있습니다. 이 거대한 마음의 창고는 세 가지 핵심 기능을 합니다.
1) 모든 경험의 씨앗(種子,종자)을 저장함:
우리의 모든 생각, 말, 행동은 그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씨앗(종자)처럼 아뢰야식이라는 거대한 창고에 차곡차곡 저장됩니다.
2) 세계를 변현(變現)하는 근원:
저장된 씨앗들은 인연을 만나 싹을 틔웁니다. 이 싹이 바로 우리의 몸(有根身,유근신)과 우리가 경험하는 외부 세계(器世間,기세간)입니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아뢰야식의 씨앗들이 펼쳐낸 그림과 같습니다.
3) 말나식의 집착 대상:
제7 말나식이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착각하고 집착하는 대상이 바로 이 제8 아뢰야식입니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의 변화하는 흐름을 고정된 '나'로 오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깊고 얕은 마음들은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이제 그 역동적인 순환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마음의 순환 법칙
우리의 세계는 마음의 두 가지 과정이 순환하며 만들어집니다.
1. 첫 번째 과정 - 종자생현행(種子生現行): 마음이 세계를 낳는다
제8 아뢰야식이라는 마음의 창고에 저장된 씨앗(종자)들이 인연을 만나 싹을 틔워 우리의 몸(有根身,유근신)과 객관 세계(器世間,기세간)로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뢰야식의 창조적 활동인 '변현(變現)' 입니다.
2. 두 번째 과정 - 현행훈종자(現行薰種子): 경험이 다시 마음을 물들인다
아뢰야식이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우리의 표층 의식(제1~7식)이 경험하고 생각하며 집착하는 모든 활동은 다시 새로운 씨앗을 만들어 아뢰야식 창고에 저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의식의 경험적 활동인 '분별(分別)'이며, 새로운 씨앗을 심는 '훈습(薰習)' 과정입니다.
3. 핵심 통찰: 닫힌 원이 아닌 '나선형 순환'
이 두 과정의 순환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세계를 낳는 마음(제8 아뢰야식)과 그 세계를 경험하고 분별하는 마음(제1~7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 때문에 순환은 시작과 끝이 똑같은 '닫힌 원'이 아니라, 매 순간 변화와 성장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나선형 구조' 가 됩니다. 바로 이 어긋남의 틈새가 우리의 삶과 역사가 새롭게 전개될 수 있는 선택과 결단의 공간을 만들어줍니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논의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깨달음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 살펴보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을 깨닫는다는 것의 의미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면,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닙니다. 이는 세계가 우리 마음과 분리된 단단한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의 활동이 펼쳐낸 것(識所變,식소변)임을 깨닫는 깊은 통찰입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 삶에 두 가지 중요한 실천적 의미를 가집니다.
• 고통(苦痛)으로부터의 자유(自由)
세상이 내 마음의 투영임을 알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외부 대상에 맹목적으로 집착(我執,아집 · 法執,법집)하거나 그것의 본질을 오해[無明]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곧 우리를 괴롭히는 번뇌와 고통의 순환을 끊을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 세계의 창조자(創造者)로서의 책임(責任)
나의 모든 생각과 행동이 결국 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씨앗(種子,종자)이 됨을 자각하게 됩니다. 이로써 우리는 외부 환경에 휘둘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현실을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결국 '유식무경(唯識無境)'의 깨달음은 '나'와 '세계', '주관'과 '객관'이라는 분별을 넘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하나의 마음(一心)' 의 다른 모습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참된 본성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길로 우리를 안내하는 위대한 가르침입니다. [명산 글]
출전 : 한자경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의 『유식무경, 유식 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
[유식무경(唯識無境), 유식불교에서의 인식과 존재]
한자경 지음/예문서원
<들어가는 말>
* 오식(五識-①안식 ②이식 ③비식 ④설식 ⑤신식)이 인식하는, 즉 연(緣)하는 감각 대상이 바로 색(色) · 성(聲) · 향(香) · 미(味) · 촉(觸)의 오경(五境)이며, 이것이 곧 개체적인 물질적 존재로서의 색법(色法) 또는 색온(色蘊)이다. 그리고 감각과 구분되는 사유(思惟)는 불교 용어로 표현하면 전오식(前五識) 다음의 제6 의식(意識)이 되고, 사유 대상으로서의 보편적 관념이란 바로 의식 대상인 법경(法境) 또는 18계 중의 법계(法界)에 해당한다. 법경(法境)은 색(色)을 제외한 일체의 대상 존재로서, 색(色)과 구분하여 명(名)으로 표현될 수 있다.
* 우리는 흔히 감각(感覺)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감각 대상이 감각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實在)해야 하고, 사유(思惟)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유 대상이 사유와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서 실재(實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경우에만 그 감각이 착각이 아닌 바른 감각이 되고 그 사유가 그릇된 사유가 아닌 바른 사유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다면 개체적인 물질 또는 보편적인 관념은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의 마음을 떠나 그 자체로서 객관적 실유성(實有性)을 가지는 것이 된다. 그 중에서 개체적 물질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유물론(唯物論)’이 되고, 보편적 관념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 ‘독단적 관념론(觀念論)’이 될 것이다. 그 둘을 모두 객관적 실재로 인정하는 경우라면 ‘이원론(二元論)' 내지는 ‘다원적 실재론(多元的 實在論)’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유부(有部)의 논사들은 다원적 실재론자이다. 그들은 인식 주체로서의 마음(心法)이나 ‘마음의 작용'(心所法)과 독립하여 개체적 물질(色法)이나 보편적 관념이 각각 그 자체로 실재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해 유식(唯識)의 논사들은 일체 경(境)의 객관적 실유성을 부정한다. 심(心)과 심소(心所) 이외에 물질이든 관념이든 그것이 인식 대상인 이상 인식 주관을 떠나 그 자체만으로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엄밀히 말해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식(識)일 뿐이다. 식 너머에 식(識)과 독립하여 그 자체로 실재하는 경(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소위 외적 세계란 것도 실제로 식(識)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식(識) 안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 전자(電子)와 같이 시작과 끝이 맞물린 완료된 원은 언제나 동일한 궤도를 달려야 하는 비역사적(非歷史的) 순환만을 가능하게 하는 데 반해, 후자처럼 원의 끝(현행된 존재)과 시작(존재의 인식)이 서로 다른 이지러진 나선형 원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변천하는 역사성(歷史性)이 가능해진다. 바로 그 끝과 시작 사이의 간격, 다시 말해 인식(認識)과 존재(存在), 식(識)과 경(境)이 벌어져 있는 그 틈새 사이로 우리의 경험과 개념의 변천사, 우리 삶의 역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 가(假)의 현상 세계를 창출해 내는 아뢰야식의 전변(轉變) 활동, 그 무한한 에너지의 심층 활동이 자각되지 않은 채 가려져서 의식되지 않는 상태를 유식에서는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그 무명(無明)으로 인해 욕망과 집착의 자기 의식[末那識,말나식]과 분별적 대상 의식(意識,의식)이 발생하며, 그러한 표층적 의식 활동[業]이 종자를 낳고 그 종자가 다시 심층의 아뢰야식을 형성하며, 그 심층 아뢰야식의 종자가 다시 또 표층의 현상을 구성하는 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 대승 경전은 유식계(唯識系) 경전인데, 유식(唯識)은 중관(中觀)의 공(空) 사상을 계승하여 아공(我空) · 법공(法空)을 인정하면서도 공(空)으로서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가(假)의 현상 세계를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일체가 공(空)임에도 불구하고 경험적으로 대상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므로, 이러한 가(假)의 현상 세계를 형성해 내는 마음의 활동성을 철학적 분석과 논의의 중심 과제로 삼은 것이다. 이 점에서 유식(唯識)은 유부(有部)의 실재론(實在論)과 중관(中觀)의 공론(空論)을 비판적으로 종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1장 색(色)의 실유성(實有性) 비판
* 불교 인식론에 따르면 현재적 인식이란 의미에서 현량(現量)에 속한다. 현량(現量)의 감각 대상은 바로 시공간 상의 구체적 대상인 개체(個體)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체는 우리의 오감에 주어지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다. 사람이든 소든 꽃이든 시공간을 점한 구체적 개체라는 점에서는 돌맹이와 다를 바 없으며, 그 점에서 그것은 돌맹이와 마찬가지로 물질(物質)이다. 이러한 물질(物質)을 불교에서는 색(色)이라고 한다.
*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언제나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것, 없어질 수 없는 것, 한마디로 말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물질(色)의 궁극적 미립자를 불교에서는 극미(極微)라고 한다.
* 일체 존재에 대해 배중률은 지켜져야 할 원리이다. 그러므로 극미에 대해서도 극미는 방분(方分)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방분(方分)이라는 말은 방향적인 부분, 즉 공간적인 부분을 말한다. 따라서 극미가 방분(方分)을 가진다는 말은 극미가 각각의 부분으로 분할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부(有部)에 따르면 극미(極微)는 방분(方分)을 가지지 않으며, 경량부(經量部)에 따르면 극미(極微)는 방분(方分)을 가진다. 그런데 유식(唯識)은 그 두 경우를 다 검토해 보고는 두 경우가 모두 성립하지 않으므로 극미(極微)라는 것 자체는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한다.
* 유식(唯識)은 감각적 인식 상태인 현량(現量)에서는 그 대상이 인식 내적인 것인가 인식 외적인 것인가 하는 분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현량적 인식은 무분별적 인식이다. 현량(現量)의 대상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대상에 대해 그것이 우리의 식(識) 외부에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인식 내부와 인식 외부의 분별, 의식 내적 표상과 의식 외적 사물의 분별은 현량 차원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전오식(前五識)의 대상으로서의 경(境)은 그 대상을 반연하는 전오식(前五識)을 떠나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 근(根)이란 인식을 야기시키는 능력으로 설정된 일종의 가설(假設)이지, 객관적 물질 존재 즉 색법(色法)으로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능히 식(識)을 일으키는 것으로서 시설(施設)된 것이지 그 존재가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현량(現量) 대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2장 명(名)의 실유성(實有性) 비판
* 만일 보편이 실재(實在)한다면 우리의 개념적인 분별적 인식은 단순한 허망분별이 아닌 참된 인식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러나 만일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개념적 분별은 객관적 기준을 결한 주관적이고 임의적인 분별이 되며, 그러한 보편적 개념으로 표현되는 인식은 모두 허망성을 벗어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이 일반 명사를 명(名)이라고 하고, 개념들 간의 연관에서 성립하는 명제를 구(句)라고 한다.
* 명구문신(名句文身)은 바로 그러한 형식적 질서를 가장 일반적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중 명신(名身)이 개별적 현상 사물에 부여되는 '이름'에 상응하는 개념적 실재라고 한다면, 구신(句身)은 그러한 현상 사물들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문장'에 상응하는 명제적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유부(有部)는 이런 명신(名身)이나 구신(句身)이 그 이름이나 문장을 인식하는 우리의 식(識)을 떠나 객관적으로 실재(實在)한다고 본 것이다.
* 유식(唯識)에서는 말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의미를 전달해 주는 매개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말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생성된다는 의미생기론(意味生起論)의 관점을 취한다. 한마디로 말해 객관적 실유(實有)로서의 보편 또는 보편적 의미체란 실재(實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식(唯識)에 따르면 말소리와 그 말을 통해 생겨난 의미를 담고 있는 음운굴곡은 서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소리의 음운굴곡이 곧 뜻을 나타내는 것이되, 그 뜻은 소리를 떠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말이 비로소 의미를 생성시키는 것이기에, 말을 떠난 독립적 의미체 또는 보편 실체로서의 명(名)을 따로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감각에 주어지는 사물의 속성은 감각의 순간에 개별적으로 포착되는 표상이다. 그처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표상을 그 각각의 자체 상(相)이라는 의미에서 자상(自相)이라고 한다. 직접적 인식인 현량(現量)의 대상이 곧 자상(自相)이다. 반면 자상(自相)들을 비교 분석하고 추상화하여 개념으로 얻게 되는 표상은 더 이상 자상(自相)이 아니다.
* 속성 담지자로서의 실체, 의식 대상으로서의 법(法)은 의식의 분별 구조에 따른 개념적 구성물일 뿐이다. 이 개념적 구성물은 추상적이므로 일반성을 지닌다. 이와 같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상(相)을 공상(共相)이라고 한다.
* 존재론적으로 그렇게 서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제의 장미와 오늘의 장미를 동일한 하나의 장미로 보고, 한 촛불이 다 타오르도록 그 불꽃을 동일한 하나의 불꽃이라 여긴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자기동일적 무엇인가가 변화하는 현상 배후에 실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찰나생멸하는 현상의 배후에 상정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이란 단지 우리의 언어 구조에 따른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다. 유식(唯識) 역시 이와같은 경량부(經量部)적 통찰에 따라 의식에 의해 사유되고 집착되는 사물의 자기동일성은 의식 자체에 의해 분별되고 설정된 개념적 동일성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개념적 분별은 실유의 보편이 상응하지 않는 허망분별일뿐이다. 개념에 상응하는 보편적 실재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개념 또한 허망분별의 개념인 것이다. 즉 감각적 현량(現量) 안에서 구체적 자상(自相)으로 주어지는 개별적 존재를 넘어서서 일반화된 개념으로 표현되는 보편(普遍)이란, 단지 우리들 식의 허망분별의 결과일 뿐이다.
* 가(假)는 실재하는 실(實)과 대립적으로 사용된 개념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 의해 잘못 집착된 실(實)과 대립적으로사용된 개념일 뿐이다. 즉 가(假) 너머에 실(實)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유식(唯識)에 있어서는 개체(個體)이든 보편(普遍)이든 색(色)이든 명(名)이든 모두 그것을 인식하는 식(識) 너머에 그 자체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유(實有)가 아니다. 실유적 존재가 아니기에 가(假)라고 한다.
제3장 식(識)의 심층(深層) 구조
* 인식(認識)이란 인식 주관이 인식 객관에 대해 무엇인가 알게 되는 활동 또는 그 활동 결과를 뜻한다. 이처럼 인식은 주관과 객관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립하게 되는데, 그러한 인식 작용을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에서 연(緣)이라 한다. 그리하여 인식하는 주관은 '능히 연하는 것'으로서 능연(能緣)이 되고, 인식되는 객관은 '연해지는 것'으로서 소연(所緣)이 된다. 유식(唯識)은 인식 주관인 능연(能緣)을 견분(見分)이라고 하고 인식 객관인 소연(所緣)을 상분(相分)이라고 한다.
* 유식(唯識)에서의 인식이란 능연(能緣)의 식(識)이 소연(所緣)의 경(境)을 연(緣)하는 활동으로서, 인식 주관인 견분(見分)이 인식 객관인 상분(相分)을 아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인식 활동을 헤아림이라는 의미에서 량(量)이라 하기도 하는데, 능히 헤아리는 능량(能量)은 인식 주관을, 능량(能量)에 의해 헤아려지는 소량(所量)은 인식 객관을 의미한다. 인식 활동이란 곧 능량(能量)과 소량(所量) 사이에서 성립하는 량(量)이며, 그런 활동의 결과로서 발생하는 인식 자체는 헤아림의 결과라는 의미에서 양과(量果)라고 한다.
* 인식 주관과 인식 객관,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의 대립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래 그 둘이 분리 대립되기 이전의 주객포괄의 초월적 근거로부터 이분화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인식이란 표면적으로 보면 견분이 상분을 연하는 것이지만, 그 내적 근거로부터 보면 그러한 견상이원화(見相二元化) 이전의 통합적 근거인 식(識) 자체가 견상(見相)으로 이원화되는 활동, 즉 식(識) 자체의 주관과 객관으로의 자가이분화(自家二分化) 활동이다. 유식(唯識)에서 의식의 개념 안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 이러한 견상(見相) 또는 주객(主客)을 초월해 있는 식(識) 자체의 이원화 활동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견과 상, 주와 객이 분리되어 있는 지평을 초월해 있으면서, 또 그렇게 구분되는 두 부분으로 스스로 이원화하는 식자체(識自體)의 활동은 과연 어떤 활동인가? 유식(唯識)은 이와 같은 식(識) 자체의 이원화(二元化) 활동을 변(變) 또는 전변(轉變)이라고 칭한다.
* 우리가 객관적 · 독립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식(識)의 대상 즉 소연경(所然境)은 실제로 식(識) 자체의 전변(轉變) 결과 즉 식소변(識所變)이라는 것이 유식 식전변설(識轉變說)의 요지이다. 그리고 결국 그와 같은 식소변(識所變)으로서의 대상과 마주한 인식 주관인 능연식(能緣識)으로서의 견분(見分) 역시 식(識) 자체가 아니라 식(識)이 전변(轉變)한 결과일 뿐이다. 이처럼 주객으로 관계하는 식(識)이 소연경(所緣境)을 연(緣)하는 능연식(能緣識)이라면, 스스로 이원화하여 소연경(所緣境) 자체를 산출해 내는 식(識)은 그와 구분되는 능변식(能變識)이다.
* 자증(自證)이란 그 스스로 명증적(明證的)이라는 뜻이다. 한 인식의 참을 다른 인식에 의거하여 증명하는 것을 타증(他證)이라고 한다면, 다른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자체로서 명증적인 것을 자증(自證)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식(識) 자체를 자증분(自證分)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엄밀히 말해 자증적인 것은 견분이 상분을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진 인식 결과, 즉 양과(量果)이다. 인식 객관은 소량(所量)이고 인식 주관은 능량(能量)이며 능량이 소량을 인식하여 얻은 결과가 곧 양과(量果)인데, 이 양과가 바로 자증분(自證分)이다. 식(識) 자체로부터 능량(能量)과 소량(所量)이 이원화되고 인식이 발생하여 양과(量果)가 얻어지므로 유식(唯識)은 이 셋이 서로 분리된 별개의 실체가 아님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