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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초 채영석] 제 66차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회 및 2023년 하반기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와 합동으로 실시하는 간산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치러질 예정입니다.
1 일시: 2023년 11월 4일(토요일) 오전 10:30 (시간 준수 바랍니다)
2 집결지
▶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10: 30분에 현충원 정문 입구에서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 회원들과 합류하여 합동 간산으로 실시
3 지하철 이용및 차량 이용 안내(만남의 장소)
▶ 지하철 4, 9호선 동작역에서 하차 8번 출구로 약 10분 정도 걸어 오시면 현충원 정문 입구가 나옵니다.
▶ 승용차 등을 이용하실 분은 현충원 출입이 가능하니 회장(010-6282-9721)에게 연락 바랍니다.
※ 다른 장소에서 합류를 희망하실 분은 정철화 부회장(010-3745-2357) 문영래 사무국장(010-9853-1357)
에게 연락 바랍니다.
4 참가비: 20.000원 (중식 기타 비용)
- 회비는 당일 사무국장에게 납부.
5 참가 대상: 풍수인이나 풍수를 공부하시는 학인, 문화답사 동호인, 일반인 등 모두 참석이 가능합니다.
※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이곳 하단 게시란에 반드시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6 답사지 안내 (답사지는 현지 사정에 따라 장소와 순서가 바뀔 수 있습니다)
풍수적으로 조명한 국립서울현충원에 대한 小考 [대한민국풍수지리연합회 고문 채영석]
우리나라 제 1의 국립묘지인 국립서울현충원은 국민이 함께 가꾸어 가는 호국 추모공원으로 한강을 바라보고 44만 평의 대지 위에 안온하게 자리하였는데 이곳에 현충원이 들어선 계기는 이렇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사자들을 부산의 범어사 및 금정사 등 주요 사찰에 임시로 봉안하였으나 전사자 수가 급증하면서 전국 곳곳에 흩어진 국군장병들의 넋을 한 곳에 안장하기 위해 1955년 7월 15일 국군묘지를 창설하였다. 10년 후에 국립묘지로 승격되고 1996년 6월 1일 국립현충원으로 변경되었으며 2006년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현충원은 현 신라호텔이 있는 장충단(奬忠壇) 터였다. 그러다가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고자 대한제국의 현충원인 장충단을 놀이공원으로 만들고 이등박문의 영혼을 기린다는 명목 아래 박문사(博文寺)를 지었으며 친일파(親日派)의 장례식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해방 후 박문사는 화재로 전소되고 장충단은 원래 취지대로 국립묘지로 재탄생하여 정부수립 후 군인, 경찰, 전사자를 서울 장충단 공원 안의 장충사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이 들어선 동작(銅雀)이란 지명(地名)은 구리(銅)로 만든 포탄 및 총알에 원귀(寃鬼)가 된 국군장병들이 하늘(雀)에서 영면(永眠)하는 영령(英靈)들의 터란 뜻으로도 해석된다.
이곳 현충원의 터를 일구는 백두대간맥(白頭大幹脈)의 행도(行度)이다. 대간(大幹)이 백두산에서 남하(南下)하다가 속리산(俗離山) 부근에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을 분맥(分脈)하고 이 맥이 북쪽으로 진행하여 안성의 칠현산(七賢山)에서 한남정맥(漢南正脈)을 분지(分支)한다.
한남정맥은 김포 계양산(桂陽山)까지 가는 맥으로 진행하는 도중에 수원 광교산(582m)에서 한 맥을 북동쪽으로 뻗어 백운산(566m)과 바라산(428m)을 솟구치고, 한국정신문화원이 있는 국사봉(582m)을 지나 몸통을 서쪽으로 크게 틀어 응봉(369m)을 일으키고 진행하여 화기(火氣)가 넘실거리는 화성체(火星體)인 관악산(冠岳山, 632m)을 솟구치는데, 이 산이 이곳 현충원 터를 일구는 태조산(太祖山)이다.
관악산을 출발한 용은 산자락 능선을 타고 북동쪽으로 진행하다가 봉천터널 위를 건너고 남현동의 인현고교를 지나 북서쪽으로 몸통을 틀어 동작고교와 행림초교 터를 일구면서 총신대 뒤쪽 능선으로 기어올라 상현중학교 뒤쪽에서 봉우리 하나를 크게 기봉(起峰) 하였는데 이 봉(峰)이 양팔을 벌려 병풍을 치고 현충원을 품 안으로 감싸면서 아우르는 소조산(少祖山)인 동작봉(銅雀峰, 159m)이다.
이곳은 1956년 국립서울현충원이 들어서기 훨씬 이전인 1551년 이 터로 이장한 선조(宣祖)의 할머니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1549)가 잠든 '동작릉(銅雀陵)' 이 자리를 선점한 곳이다.
1744년(영조 20) 겸재 정선이 지금의 동작대교가 지나가는 동작나루 일대를 강북(이촌동) 쪽에서 그린 화폭(畫幅)에 의하면 관악산과 우면산 등이 멀게 보이는 가운데 현재 국립현충원인 동작마을은 서울 세가(世家: 대 물려 특권을 누리는 집안)들의 별장인 기와집들과 관아, 그리고 동작능(銅雀陵)의 부모봉(父母峰)인 지금의 장군 제1묘역이 있는 장군봉 뒤로 동작봉(銅雀峰)을 위시하여 청룡(靑龍)과 백호(白虎)가 잘 묘사되었으며 특히 백호 자락이 당배룡(撞背龍)을 치면서 진행하는 기상은 마치 호랑이가 등을 곧추세우고 숲에서 나오는 듯한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의 물형(物形)으로 우람하면서도 힘이 넘쳐나고 청룡을 압도하는 모습은 장손(長孫)보다는 지손(支孫) 계열의 연관성이 강하다고 본다. 즉 기세가 등등한 백호에 비해 청룡의 모습이 순박하고 빈약(貧弱)하다.
이번 간산은 동작능을 비롯하여 이승만(李承萬), 박정희(朴正熙), 김대중(金大中), 김영삼(金泳三) 네 분의 대통령 묘소와 장군묘, 유공자 묘, 장병들의 묘소 등을 돌아보면서 개별적 풍수 간평(看評)과 함께 이곳 현충원 터가 간직한 풍수적 의미 등을 합동 토론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립서울현충원의 主穴을 점한 昌嬪安氏의 銅雀陵
서울 현충원의 주혈(主穴)에 터를 정한 창빈안씨의 동작능은 조선 11대 중종 임금의 아홉 부인 중, 여섯 번째 후궁(後宮)이다. 그의 손자인 선조가 조선 14대 왕위에 오름으로써 조선조 임금들 중, 적손(嫡孫)이 아닌 서손(庶孫)이 대통을 이은 첫 번째 왕이다.선조(宣祖)의 가계를 보면 그의 할아버지인 중종(中宗)은 성종(成宗)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연산군(燕山君)이 폐위되자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 중종의 맏아들인 인종(仁宗)이 왕위에 올랐지만 8개월 만에 후사(後嗣) 없이 승하하자 다시 중종의 둘째 아들인 명종(明宗)이 재위를 잇는다. 하지만 명종 역시 후사 없이 승하하여 그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창빈과 중종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셋째 아들인 선조이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고사(故事) 하나가 전해져 내려온다. 아들이 없었던 명종이 동생인 덕흥군의 세 아들을 자주 궁으로 불렀는데, 어느 날 임금만이 쓸 수 있는 익선관(翼蟬冠)을 가리키며 "머리의 크고 작음을 알고자 하는 것이니 차례대로 한 번씩 써 보라" 하자 선조의 두 형들은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하였으나 막내인 선조만이 "이
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함부로 쓸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쓰기를 거부하고 공손히 받들어 제자리에 갖다 두었는데 그 뒤로 명종의 신망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는 일화가 있다.그리고 서울 사직동 262번지의 도정궁(都正宮)은 선조가 태어나고 자랐던 집으로 후에 창빈안씨와 덕흥대원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선조 대왕부터 역대 열성조(列聖朝)들이 아끼고 은혜를 많이 베풀었는데 바로 왕실의 본(本)이었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왕이 등극하면 이곳으로 나와 전배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특히 조선 중기의 기인(奇人)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1509년~1571년)가 이곳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음을 예언했는데 선조의 뒤를 이어 고종이 즉위함으로써 두 번이나 왕이 배출되었다. 창빈안씨는 1499년(연산군 5)에 시흥(始興)의 한미한 집안의 딸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안산안씨(安山安氏)이다. 아버지 안탄대(安坦大)는 중종반정(中宗反正)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어 적순부위(迪順副尉)가 되었고, 우의정(右議政)에 증직(贈職)되었으며, 그의 청렴결백과 굳은 성격은 어린 시절의 창빈을 훌륭하게 키워내 여러 후궁 중에서도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거듭나게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어머니 황씨(黃氏)는 정경부인에 증직되었다. 1507년(중종 2) 아홉 살의 나이로 궁녀로 들어간 창빈은 생김새가 단정하고 행동이 정숙하였으며 특히 자비로운 성품과 근검절약하는 생활태도는 궁내에서의 덕망을 한 몸에 받을 만하였다. 20세에 중종의 총애를 입어 22세에 상궁(尙宮)이 되었고, 31세에 숙원(淑媛)에 이어 마침내 42세에 숙용(淑容)이 되었다.중종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맏아들은 영양군(永陽君)이고, 둘째 아들이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이며 외동딸은 정신옹주(靜愼翁主)이다. 1549년(명종 4), 친정집에 나들이 갔다가 갑자기 51세의 나이로 창빈이 세상을 떠나자 1550년 3월 8일 경기도 양주(楊州)땅, 서쪽의 장흥리(長興里)에 장례 지냈으나 다음 해, 자리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일자 지금의 터인 과천(果川) 땅, 동작리(銅雀里)로 이장하였다.
그리고 선조가 왕으로 등극하고, 1577년(선조 10)에 창빈(昌嬪)으로 추존되었다. 한편 후궁의 묘를“릉(陵)”이라 호칭할 수 없는데도 이곳 묘소는 예외로“동작능”이라 하였다. 묘소 아래의 신도비(神道碑)도 후궁에게는 거의 보기 드문 경우로 이것은 선조 이후 조선 군왕이 일본에게 망할 때까지 14명의 왕위계승을 창빈안씨 후손(後孫)들이 싹쓸이 한 것이다. 혹자들은 선조와 광해군, 인조 등 특정 인물을 들추어내면서, 난세(亂世)와 백성들의 고통이 모두 이곳 묘소의 인과(因果)인 양 폄하(貶下)하고 흉당(凶堂)으로 보기도 한다.
즉 우리네 풍수가 언제부터인지 특정 무덤의 후손들 공과(功過)나 벼슬 여부, 직함(職銜) 등을 나열하면서 결과론적 해석에 몰입하다 보니 풍수적 사실이 왜곡되거나 간과(看過)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또한 수 백 성상(星霜)의 세월이 흐르고 터가 지닌 국지적(局地的) 인작(人作) 등으로 본래의 모습이 모조리 재단(裁斷)되었거나 변형되어 용사 당시의 산천형세(山川形勢)나 형적(形迹) 등이 사라진지 오래인데도 과거의 모습을 추리하거나 유추하려 들지 않고 현실에서 들어난 형세(形勢)와 보국(保局), 수세(水勢) 등에 초점을 맞추어 평가함으로써 당시 선사들이 시도한 풍수적 감(感)이나 기법(技法) 등이 왜곡되거나 묻히는 등 우(愚)가 난무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인지 또는 터가 간직한 풍수적 연관성 인지【이곳 서울현충원 터는 청룡방에 비하여 백호방의 세력이 강하고, 이곳 터를 일구는 내맥도 동작봉에서 백호방인 右旋으로 진행하여 1. 2차 白虎峰을 지나 3차 백호봉(113m)에서 落脈하여 도로를 건너뛰고 將軍峰을 치켜세우는 입지】, 터의 영성(靈性)인지는 몰라도 첫 번째를 상징하는 장남(長男)과 본부인(本夫人)이 모두 배제되고, 후궁(後宮)인 창빈안씨(昌嬪安氏, 1499~1549)를 비롯하여 지자(支子) 출신인 대통령 세 분(이승만, 박정희, 김대중)과 영부인 세 분이 모두 후실(後室)이란 점을 참고하면 이곳 동작봉 아래와 백호방 터가 간직한 영동력(靈動力), 또는 인과관계(因果關係)로 볼 수 있다.
이곳 동작능을 두고 갑론을박(甲論乙駁) 여러 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청룡 백호가 양팔을 넓게 벌린 국세의 주봉(主峰)에서 옹골차게 진행하는 주룡의 맥상(脈上)에 터를 정하였다. 당시 입지적 상황을 1744년, 69세의 나이 때 겸재 정선이 그린 동작진(銅雀津)의 화폭(畫幅)을 참고하여 용혈법(龍穴法)으로 유추하면 상당한 수준급의 명사(明師)가 점혈(點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수법(砂水法)에 의하면 여러 부족한 점도 발견된다. 우선 이 터의 결함이라면 조안산(朝案山)이 생략되었다는 점과 명당의 경사도(傾斜度)가 심하고 청룡에 비해 백호의 세가 너무 강하다는 것과 전방의 한강 물길이 이곳 터를 치고 빠지는 공격사면(攻擊斜面)의 흐름이란 점이다. 동작릉의 좌향은 신좌인향(申坐寅向)에 우선수(右旋水) 계축파(癸丑破)로 자생향(自生向)이다.
▶ 국립서울 현충원에서 永眠 중인 네 분 대통령 묘소 考察
1)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 묘소
동작봉에서 낙맥하여 일군 터에 박정희 전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여사 묘소가 방형분(方形墳)의 쌍묘(雙墓)로 나란히 조성되었는데, 이곳 동작동 현충원의 묘소 중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동안 이곳 묘소의 길흉 여부를 놓고 여러 설들이 난무한 것도 사실이며 특히 자칭 신안(神眼)이라 주장하던 고(故) 육관 손석우 씨가 육영수 여사 묘소에 물이 가득 차 체백(體魄)이 썩지 않고 머리는 길게 자랐으며 손톱과 발톱도 흉측하게 자라는 등 어둡고 습한 냉혈(冷穴)을 이루어 자손들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 주장하면서부터다.
이 터는 현충원의 주봉인 동작봉에서 주룡(主龍)이 아래로 낙맥(落脈)하여 힘차게 진행하다가 이곳 묘소 바로 위에서 우측 백호방으로 전변(轉變)하는 용으로 바뀌면서 이 터는 혈(穴)이 아니고 백호방으로 진행하는 용(龍)을 지탱해주는 지각(枝脚)내지 사맥지(斜脈地)에 불과한 무맥지(無脈地)이고 이 곳 묘소 주변이 항상 습(濕)한 것은 본래 백호방에 비해 청룡방 쪽이 많이 낮고 계곡이 져 수십 톤의 흙을 보토하여 구배를 맞추다 보니 자생적으로 발생하는 수분이 많은 연유이다.
아무튼 이곳 묘소를 두고 여러 풍수나 학자들이 백가쟁명(百家爭鳴)하지만, 그 진위(眞僞) 여부에 대해 직접 현장에서 논하고자 한다. 이곳 현충원에서 제일 높은 터를 점한 묘역에서 전방을 바라보면 장군 제1묘역이 있는 목형산(木形山)의 장군봉이 안산(案山)으로 공(拱)하고, 그 너머로 한강의 물길과 함께 강북의 북한산 자락에서 너울거리듯 진행하는 산자락을 끌어안고 포옹하는 빌딩들과 아파트 등이 전개되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으며 감탄사마저 나온다. 이곳 묘향(墓向)은 신좌인향(申坐寅向)에 우선수(右旋水) 계축파(癸丑破)로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자생향(自生向)이다.
2)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 묘소
현충원의 소조산(少祖山)인 동작봉에서 낙맥하는 주룡(主龍)이 주먹처럼 뭉치어 탱탱한 장군봉을 일구고 아래로 내려오다 유공자 묘역의 백두진 전총리 묘소 부근에서 두 갈래로 분벽(分劈) 된 용맥에서 한 자락은 창빈안씨(昌嬪安氏)가 잠든 동작능(銅雀陵)으로 진행하고, 한 가지가 우측으로 나가 흙 심이 단단한 방지룡(傍枝龍) 내지 첩신룡(貼身龍)을 일구었다. 그러나 지근(至近)에서 응기(應氣)하는 호종사(護從砂) 등이 미미(微微)한 것도 사실이지만 묘역 주변에서 사격(砂格)의 역할을 대신하는 밀식(密植)된 조경수가 시야(視野)를 차단한다.
이곳 묘소의 향선(向線)이 통과하는 묘역 아래 도로 끝 쪽을 바라보면 이곳 터를 보듬고 아우르는 포신맥(抱身脈)의 증적(證迹)을 발견할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는 이곳에 터를 정한 네 분의 대통령 중에서 제일 작은 80여 평의 소박한 공간에 터를 정하였다. 이곳에 묘소를 정하게 된 사연은 처음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부근의 국가원수 묘역을 사용하고자 그 자리를 굴착(掘鑿)하였는데 자갈과 함께 수기(水氣)가 비치고 방위 등도 좋지 않아 이곳 터로 옮겨 조성하였는데 영롱한 오색토(五色土)와 함께 다이아몬드 구조의 흙 결정체가 비치는 등 최상의 토질 조건을 구비한 것으로 전한다.
이기법(理氣法)으로는 외입수(外入首, 龍入首) 유룡(酉龍)에 기유(己酉)로 천산(穿山)되고, 신좌을향(辛坐乙向)에 내입수(內入首, 脈入首) 병술투지(丙戌透地)로 격침(格針)된다. 물은 우선수(右旋水) 간인파(艮寅破)가 되어 팔십팔향법의 정양향(正養向)으로 합법향(合法向)이다.
3)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 묘소
우남(雩南) 이승만을 지칭하는 수식어는 독립운동가, 미국 박사, 정치가, 외교관, 초대 대통령, 독재자, 3․15 부정선거, 하와이 망명 등, 이 밖에도 많다. 어떻게 무엇을 평가해야 하고, 어느 것을 먼저 떠올리느냐는 것은 순전히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몫이고 재량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1875년(고종 12)부터 1965년까지 91년을 이 풍진 세상을 살다 갔다. 이승만은 영어에 능통하여 미국 조야를 누비면서 일본 침략의 부당성을 호소하였고 약소국의 기사회생을 위해 동분서주하며 온갖 역량을 동원하였다. 민족의 암흑기에 이승만의 행보는 겨레의 희망이 되었으며 암울했던 민중의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이승만은 조선 3대 임금 태종(太宗)의 맏아들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이다. 양녕의 다섯째 아들 장평도정 이흔의 15대 손으로, 6대 독자이다. 아버지는 이경선(李敬善)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며, 위로 누나가 둘 있었으나 해방 전에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한국에서 박씨(朴氏)와 혼인하였으나 헤어졌고 후에 오스트리아 국적의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없자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면서 당시 부대통령이던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이곳 묘소는 장군묘역에서 이어지는 한 맥이 국가유공자 묘역을 통과하여 이곳 터를 일구는 모습이지만 전혀 생기맥(生氣脈)의 형체를 실지 못한 양맥(陽脈)으로 진행하여 위로 기어올라 이곳 묘역을 일구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진행하는 용신(龍身)이 혈을 맺기 위한 본능적 모습이 아니라 동작능(銅雀陵)을 보호하는 청룡 역할을 하는 것처럼 그쪽을 향해 몸통을 휘면서 실격(失格)이다.
형세적(形勢的)으로는 도두(倒頭)가 두툼하고, 맥상(脈上)에 요기석(曜氣石) 처럼 보이는 암(岩)이 지상으로 돌출되어 요기맥(曜氣脈)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물풀 등과 함께 수분(水分)이 다분하고 암석의 모습이 청태(靑苔)의 흔적을 지니고 있어 그냥 힘을 실지 못하고 진행하는 무기맥(無氣脈)의 전형이다.
좌향은 창빈안씨와 같은 신좌인향(申坐寅向)에 우선수(右旋水) 간방(艮方)으로 출수(出水)하여 절향절류(絶向絶流)이다.
4) 김영삼 전 대통령 묘소
2015년 11월 22일 향년 86세로 영면(永眠)에 들어간 김영삼 전대통령은 이곳 국립서울현충원에 잠들어 있는 4명의 대통령 중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터를 정하였다.
1954년 4월 제3대 국회의원(당시는 민의원의원) 선거에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국회의원 당선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6세 5개월로, 이는 현재까지도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기록된다. 1965년에는 37세의 나이로 의정 사상 최연소 제1야당 원내총무가 되었고 1974년에는 46세의 나이로 당 총재가 되면서 당시에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불멸의 기록이다.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는데 3월 첫 달부터 경부선 무궁화호 열차가 노선 침하 사고로 전복되어 78명이 죽었고 198명이 부상했다.
6월에는 경기도 연천의 예비군 훈련장에서 장약통과 폭발물이 터지는 바람에 현역병과 예비군 병사 19명이 폭사하였고 5명이 중상을 입었다. 7월에는 아시아나 항공기가 전남 해남군 산속에 추락하여 승객 68명이 사망하였으며, 10월에는 전북 부안 앞바다에서 여객선 서해페리호가 침몰하여 무려 273명이 익사한 대형 해난사고가 일어났다.
또 이듬해 10월에는 서울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32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그 이듬해인 1995년 6월에는 서울 강남의 삼풍백화점 5층 건물이 한순간에 폭삭 주저앉으면서 쇼핑객과 직원을 포함한 501명이 매몰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문민정부 중반기에만 모두 14건의 대형사고가 잇달아 일어나면서 1천400여 명의 희생자를 기록하여‘사고 공화국’이란 오명을 남겼다. YS 시대에만 유난히 약속이나 한 듯이 집중적으로 대형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한 사고 때문에 8번이나 대(對)국민 사과를 했는데 헌정사상 그러한 전례가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그리고 1997년 11월 21일, 국가부도를 피하고자 구제금융을 신청한 IMF 사태가 일어나 1998년에만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자살(自殺)한 사람이 더 많은 해로 기록되었다. 아무튼 한마디로 그것은‘YS 에게는 불운(不運)’이었다.
이곳 현충원에서 함께 잠든 김대중과 김영삼은 민주화 투쟁의 쌍끌이 지도자로 살았지만 서로 결(結)이 달랐다. 김영삼은 발 빠른 현장주의자였고, 라이벌인 김대중은 치밀한 계산을 앞세운 신중 노선을 택하여 대조적이었다.
한국의 현대사가 상황이 불안정하고 급변하기 쉬운 난세(亂世)란 점을 고려하면 상황 변화에 발 빠른 대응이 쉽지 않은 심사숙고형인 DJ의 신중 노선보다는 순발력과 추진력이 뛰어난 YS의 현장 중심 노선이 성과를 낼 가능성이 더 컸다. 실제로 김대중보다 김영삼의 민주화 투쟁 업적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었고 빠른 처신으로 삼당합당(三黨合黨)에 동참하여 DJ보다 먼저 집권(執權)에 성공한 것도 YS 였다.
삼당합당이란 여당(與黨)과 야당(野堂)이 합당(合黨)한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최초의 사건으로 1990년 1월 여당이던 민주정의당이 야당인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사건이다.
김영삼 전대통령 묘소는 이곳 국립서울현충원의 주묘(主墓)인 동작릉(銅雀陵)을 기준하여 외청룡(外靑龍)에 해당하는데 동작봉에서 좌선(左旋)하는 지룡(枝龍)이 흑석동을 경계로 한 바퀴 빙 돌아 외청룡에서 분벽(分劈)된 한 맥이 거의 동쪽으로 진행하여 장군 제3묘역을 횡(橫)으로 일구고 더 나가 횡룡입수(橫龍入首)하여 나를 낳아준 동작봉과 태조산(太祖山)인 관악산(冠岳山)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의 터에 김영삼 전대통령의 묘소가 조성되었다. 그런데 이 터는 횡룡입수의 핵심(核心)인 귀성(鬼星)이 미미(微微)하고, 혈기(穴氣)를 내리는 용진처(龍盡處)마저 하격(下格)이다.
심호(沈鎬)의 지학(地學)에 의하면 용(龍)이 다하고 산(山)과 물(水)의 기운이 모여 음양상배(陰陽相配)를 이루면서 생기(生氣)를 내리는 곳을 용진(龍盡)이라 하고, 용(龍)이 다한 것 같지만 물이 달아나고 바람이 들이치는 등 기(氣)를 내리지 못한 곳을 용궁(龍窮)이라 하였다.
즉 이곳 터는 풍취수겁(風吹水劫)의 형세로 용궁처(龍窮處)에 해당한다. 현충원 정문 앞으로 깊숙이 파고드는 한강 강줄기를 타고 불어닥치는 바람을 막아 줄 청룡방(靑龍方)의 보호사(保護砂) 등이 모두 생략되고, 혈전(穴前)을 통과하는 천수(天水)를 갈무리할 역사(逆砂)마저 전무(全無)하다. 그리고 당판을 일구는 용체(容體)는 물길을 끌고 도망가는 사비(斜飛)의 형세가 되어 산기(山氣)와 수기(水氣)가 모두 흩어지는 터를 이루면서 실격(失格)이다.
【담자록(啖蔗錄)】의『오공구결(吳公口訣)』에 자리가 있고 없는 것은 터 아래에서 막아주는 하수산(下臂)의 유무(有無)에 달려 있다 하였고, 그리고 자리를 찾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먼저 하수산(下手山)이 짱짱하게 막아주는 터라면 자리가 있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후룡(後龍)이 오는지 안 오는지 등을 살피려고 하지 말고 하수산(下關)이 막고 있는지, 막고 있지 않은 지를 보고 결정하라 하였으며, 결혈(結穴)이 편안하고 평온한지(安穩, 안온)를 따지지 말고, 하수산(下關)이 긴밀(緊密)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보고 터를 결정하라 하였다.
『吳公口訣。有地無地先看下臂。又曰。看地有何難。先看下手山。又曰。未看後龍來不來。且看下關回不回。未看結穴穩不穩。且看下關緊不緊』
즉 우리가 혈(穴)의 진가(眞假)를 판단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물과 산기(山氣)를 갈무리하는 하수산(下水山)의 모습을 먼저 판단한 연후에 용혈(龍穴)과 사수(砂水) 등을 논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김대중 전대통령 묘소와 이 터를 함께 용사(用事)하신 황교수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명성이 자자한 풍수사라도 이미 포화상태의 입지(立地)가 되어 갈기갈기 깎이거나 끊기고, 도로나 공공용지 등으로 재단(裁斷)되어 사용마저 제한된 터에서 풍수의 법수에 합당한 터를 찾아 쓴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까? 풍수적 복(福)과 화(禍)란 순전히 이 터를 택한 망인(亡人)이나 가족의 몫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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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님 ,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유도 상 참석합니다.
정철화 참석합니다
하태주 정명채 위원님 참석
안완식 참석하겠습니다.
손정호 님, 참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