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유럽에서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과 키이츠,셸리 등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문학이 융성했다. 이것은 현실보다도 공상의 세계를, 형식에 구속되지 않는 개성적인 사고 방식을 존중하는 사조였는데, 이 낭만주의 사상은 음악세계에도 침투하여 1830년 무렵부터 유럽 각국에 낭만주의 음악의 꽃이 일제히 현란하게 피어났다.
낭만주의 음악의 주요 작곡가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 짧은 기간동안 집중적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우선 1809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멘델스죤이 태어났다.다음해,쇼팽과 슈만이 각각 폴란드와 독일에서, 1811년에는 당시 헝가리령이었던 라이딩에서 프란츠 리스트가 태어났다. 이처럼 극히 짧은 기간에 대 음악가들이 계속해서 태어난 일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드문일이다.
리스트는 헝가리 귀족의 영지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피아노를 공부했다. 그가 9살이 되던해 어떻게든 자식에게 훌륭한 음악 교육을 받게 하고 싶었던 부친 아담은 전재산을 처분해 가족들을 이끌고 음악의 도시 비인으로 이주했다.
리스트가 비인에서 사사받은 피아노 교사는 피아노 교본으로 유명한 칼 체르니였다. 당시 체르니의 레슨비용은 매우 비쌌지만 그는 리스트의 연주를 잠깐 듣고 홀딱 반해 무보수로 교육을 맡았다고 한다. 체르니의 가르침을 받아 눈에 띄게 실력이 좋아진 리스트는 2년후 비인에서 음악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후 유럽 각지에서 연주회를 열어 신동 리스트의 이름을 유럽 각지에 떨쳤다.
소년 리스트와 부친 아담은 연주 여행으로 세월을 보내느라 자리에 있을 틈이 없었는데, 리스트가 16세 되던해 아담은 사랑하는 아들의 간호를 받으며 파리에서 급사했다. 아담은 죽는 순간에도 고통스런 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프란츠, 나는 여자문제가 걱정이다. 네가 만날 여자들이..."
흔히 자식을 보는 눈은 아버지를 따라갈수 없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예감은 정말로 예리하여 아담이 걱정했던 것처럼 리스트가 생애를 통해 가장 고뇌했던 것은 바로 그의 여자 관계였건 것이다.
리스트는 쇼팽처럼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이었으므로 항상 사교계의 중심인물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그를 둘러싼 여성은 헤아릴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가 일생동안 진실한 연애를 경험한것은 세번이었다.
최초의 상대는 그가 17살때 피아노를 가르친 카를리느 드 생크리크였다.
그녀는 프랑스 통상대신을 지낸바 있는 생 크리크 백작의 딸로 당시 16살 이었다. 그녀는 피부가 매우 희고, 부드러운 금발과 푸른눈이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카를리느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게 되자, 곧 그녀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장래를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 신분이 낮았던 애송이 음악가와 귀족의 딸의 사랑이 인정 받았을리 없고, 카를리느의 부친 생 크리크 백작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불과 2개월 만에 종말을 고했다. 당시 귀족 여성과 사랑에 빠진 많은 음악가들 처럼 리스트도 신분의 차이라는 두터운 벽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실연은 그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그 충격에서 벗어나는데는 실로 3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이때 경험한 귀족사회의 냉혹함을 그 후에도 몇번인가 맞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