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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마태복음 제 21 강 메시지_아산UBF
천국의 비밀
말씀 / 마태복음 13:24-58
요절 / 마태복음 13: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마태복음 13장에는 일곱 개의 천국 비유가 담겨 있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첫 시작이었다면, 오늘의 여섯 비유는 하늘 나라의 여러 모습들을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나라는 로마를 무너뜨리고 단번에 임하는 영광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그들의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악인들은 여전히 활개 치고,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확장은 누룩처럼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나라인가? 나라가 임했다면 왜 세상은 그대로인가?” 오늘 비유들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들은 지금은 감추어져 있고 작아 보이지만,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나라는 전부를 팔아서라도 사야 할 보화요, 극히 값진 진주임을 알려주십니다. 마지막 그물 비유는 이 나라에 반드시 결산의 날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각 사람이 하늘 나라의 참 모습을 깨닫고, 발견하는 은혜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I.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24-30, 36-43)
24절에서 30절까지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24-30)
한 집 주인이 좋은 씨를 밭에 뿌렸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습니다. ‘가라지’는 독보리 입니다. 독보리는 자랄 때 밀과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이삭이 패고 열매가 맺힐 때에 드러납니다. 그 낟알에는 독성이 있어 사람이 먹으면 어지럽고 구토를 일으킵니다. 고대 로마법에는 원수의 밭에 독보리를 뿌리는 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비유는 당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묻습니다.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27). 많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왜 세상에 악이 있습니까? 왜 교회 안에조차 거짓과 상처가 있습니까?” 주인의 대답은 명료합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28). 가라지가 있는 것은 주인의 일을 훼방하는 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곳에는 그것을 훼방하는 영적 대적이 실재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종들은 즉시 행동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28). 종들의 열심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대답합니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29-30). ‘가만 두라’는 내버려 두라, 허용하라는 뜻입니다. 주인이 가라지를 그대로 두는 이유는 곡식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독보리와 밀은 자랄 때 구별이 어렵고, 뿌리가 서로 엉켜 있어서 가라지를 뽑으면 곡식까지 함께 뽑힙니다. 주인에게는 곡식 한 포기를 지키는 것이 더 소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악이 최종적으로 제거되는 심판은 추수 때인 세상 끝까지 유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한 밭에서 함께 자랍니다. 알곡 같은 성도와 인간적인 야심가가 교회 안에 함께 있고, 하나님의 자녀와 악을 행하는 자들이 한 세상에서 함께 살아갑니다. 이런 시대에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심판이 미루어진 시간은 가라지 같던 사람이 회개하여 알곡이 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교훈은 성급한 판단과 인간적인 정죄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에는 가라지를 뽑겠다고 나섰다가 곡식까지 뽑아 버린 아픈 역사들이 있었습니다. 사람은 밀과 독보리를 정확히 구별하지 못합니다. 오늘 완악해 보이는 사람이 내일 회개할 수 있고, 오늘 열심 있어 보이는 사람 속에 위선이 자라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비유가 금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사울은 교회를 잔멸하던 사람이었지만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바울이 되었고, 어거스틴은 방탕한 청년이었지만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 끝에 교회의 위대한 교사가 되었습니다. 추수 때까지 오래 참으며 탕자같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주인의 마음을 배우는 종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가셨고, 제자들이 나아와 가라지 비유를 설명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36절부터 43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37-43)
예수님의 해설은 비유를 하나씩 밝혀 줍니다. 씨 뿌리는 이는 예수님 자신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입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입니다. ‘세상 끝’은 역사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종착점을 뜻합니다. 역사는 순환하거나 우연히 흘러가지 않습니다. 역사는 추수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날에 인자께서 천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실 것입니다. 지금은 심판이 유보된 시대일 뿐입니다. 해설의 핵심은 43절입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다니엘 12장 3절,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는 말씀에 기초 합니다. 성도의 삶은 세상의 눈에 초라해 보이고, 때로는 가라지가 더 무성해 보입니다. 추수 때가 오면 모든 것이 뒤집어집니다.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결말을 믿어야 합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가라지 곁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알곡의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해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말씀으로 맺으셨습니다.
II. 겨자씨와 누룩 (31-35)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하늘 나라의 ‘성장’을 보여 줍니다. 31절부터 33절을 보십시오.“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31-33)
겨자씨는 지름이 1밀리미터 정도 입니다. 이 작은 씨가 팔레스타인에서는 3미터 넘게 자라나, 새들이 깃들이는 나무가 됩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당시 사람들의 메시아 왕국 기대를 교정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장엄하게 임하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보이는 예수님의 나라는 갈릴리 목수 출신 랍비 한 분과, 어부와 세리 출신의 열두 제자가 전부였습니다. 이 겨자씨가 자라 세계를 덮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나무에 헬라인과 로마인과 야만인, 땅 끝의 한국 사람들까지 깃들이게 되었습니다.
이 비유는 작은 시작을 부끄러워하거나 조급해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숫자가 크고 성장이 빠른 것이 성공이라고 배웁니다. 하늘 나라의 실체는 다릅니다. 한 사람 속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자라면, 그 사람을 통해 가정이 변하고 캠퍼스가 변하고 민족이 변합니다. 스가랴 선지자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슥 4:10). 라고 하였습니다.
겨자씨 비유가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을 보여 준다면, 누룩 비유는 속에서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한 여자가 누룩을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었습니다. ‘가루 서 말’은 약 22리터에 이르는 많은 양으로, 백 명 이상이 먹을 빵을 만들 수 있는 분량입니다. 잔치를 준비하는 분량의 가루 전체가, 작은 누룩으로 인해 전부 부풀게 됩니다. 누룩은 반죽 속에 들어가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반죽 전체를 변화시키며, 그 작용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는 이렇게 임합니다. 요란한 정치 혁명이나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간 말씀이 그 사람의 전 인격을 안에서부터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임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들어간 복음은 그의 생각을 바꾸고, 생각이 바뀌면 언어가 바뀌고, 언어가 바뀌면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변화된 한 사람이 가정과 일터라는 반죽 속에서 다시 누룩이 됩니다. 초대교회가 로마 제국을 변화시킨 방식이었습니다. 전염병이 돌 때 버려진 환자들을 돌보고, 여성과 노예를 형제자매로 존중하고, 원수를 축복하는 그들의 삶이 제국을 안에서부터 부풀게 했습니다.
누룩은 반죽과 분리되어 있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누룩이 누룩끼리만 모여 있으면 어떤 반죽도 부풀지 않습니다. 누룩의 생명은 반죽 속으로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직장에서, 연구실에서, 강의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누룩으로 심겨 있습니다. 우리의 정직한 일 처리 하나, 험담에 가담하지 않는 침묵,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 공동체를 바꾸어 갑니다.
III. 보화와 진주: 전부를 팔아 살 만한 나라 (44-46)
예수님은 무리를 떠나 집 안에서 제자들에게만 세 가지 비유를 더 들려주십니다. 44절부터 46절을 보십시오.“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44-46)
한 사람이 밭에서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은행이 없던 고대 세계에서 사람들은 전쟁이나 재난을 만나면 재산을 땅에 묻었습니다. 주인이 돌아오지 못하면 그 보화는 땅속에 남았습니다. 본문의 사람은 남의 밭에서 일하던 일꾼이었을 것입니다. 쟁기 끝에 무엇인가 걸려서 파 보니 보화가 나왔습니다. 그는 보화를 찾아다닌 적이 없습니다. 어제와 똑같은 밭에서 똑같은 일을 하다가, 뜻밖에 인생 전체를 바꿀 보화를 만난 것입니다. 반면에 진주 장사는 정반대의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 좋은 진주를 구하러 다닌 전문가였습니다. 수많은 진주를 감별하며 살았고, 마침내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진주 앞에서 그는 지금까지 모은 진주가 빛을 잃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화를 찾을 생각조차 없이 살다가 천국을 만납니다. 친구 따라 우연히 들어온 성경공부 자리에서, 군대에서 누군가 건네준 성경책에서, 인생의 가장 평범한 날에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진주 장사처럼 오래 찾아다닙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종교를 순례하고 성공을 쌓아 보지만 목마름이 가시지 않다가, 마침내 그리스도 앞에서 걸음을 멈춥니다.
보화 비유의 사람은 보화의 가치를 즉시 알아보았고, 진주 장사는 오랜 안목으로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좋은 진주들을 이미 여럿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진주 하나 앞에서 그 모든 소유를 처분했습니다. 좋은 것 여럿을 가지는 것과 가장 좋은 것 하나를 가지는 것은 다른 인생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좋은 것들을 수집하여 삽니다. 학위도 좋고 자격증도 좋고 인간관계도 좋고 취미도 좋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들이 아무리 쌓여도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마음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 자리는 극히 값진 진주 하나, 곧 그리스도만이 채우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도 진주들이 있습니다. 동역자들의 인정, 공동체 안에서 얻은 자리와 이름, 형제자매들 사이의 따뜻한 교제, 사람들이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즐거움. 이것들은 다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좋은 것들이 극히 값진 진주 하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하러 모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받을 것을 구하러 모이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러 왔다가 공동체를 소비하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지혜는 많은 것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빼앗기지 않을 한 가지를 택하는 데 있습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는 보화를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집을 팔고 나귀를 팔고 겉옷까지 파는 그를 보고 이웃들은 미쳤다고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눈은 팔아 곧 얻게 될 보화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치른 값이 아무리 커도, 그가 얻을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의 경제학입니다. 천국을 발견한 사람에게 헌신은 손해가 아니라 남는 장사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되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보화를 얻은 기쁨이 사라지면 신앙생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첫째, 말이 많아집니다. 보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끊어지면 그 빈자리를 합리화가 채웁니다. 둘째, 사람의 관심을 구하게 됩니다. 보화에게서 받아야 할 것을 다른 데서 받아 내려고 합니다. 인정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돌보아 주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이러면 나이가 들어도 신앙의 어른으로 자라지 못합니다. 셋째, 섬김이 무거운 의무가 되고, 영혼을 향한 발걸음이 끊어집니다. 그리고 넷째, 그 내면의 공허가 기어이 밖으로 새어 나와 공동체 안에 크고 작은 갈등을 만들어 냅니다.
주일을 지키느라 쓰는 시간, 헌금하느라 드리는 돈, 세상 즐거움을 절제하느라 잃는 재미를 계산하며 신앙을 무거운 짐으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아직 보화를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보화를 본 사람에게는 계산의 방향이 뒤집어집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세상이 부러워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발견한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자 함이니”(빌 3:7-8). 억지로 버린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보았기에 이전 것들이 저절로 배설물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들고 왔다가 이 땅에 묻힌 젊은 선교사들의 무덤이 양화진에 있습니다. 그들이 조국의 안락한 삶을 판 것은 조선이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 곧 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뿌린 겨자씨 덕분에 오늘 우리가 그 나무 가지에 깃들어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값진 보화가 성경 말씀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청년의 때를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IV. 그물 비유와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47-52)
일곱 비유의 마지막은 그물 비유입니다. 47절부터 50절을 보십시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47-50)
여기서 그물은 배 두 척이 넓게 펼쳐 바다 밑바닥까지 훑으며 끌어당기는 큰 그물로, 그 안에는 각종 물고기가 가리지 않고 들어옵니다. 어부들은 그물을 끄는 동안에는 고기를 고르지 않습니다. 물가로 끌어낸 후에야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립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세상 끝의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의 그물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을 향해 펼쳐져 있고, 그 안에는 각종 사람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물가에 앉아 갈라내는 날이 반드시 옵니다.
이 비유는 그물 안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할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것과 그릇에 담기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형식적인 신앙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 맺는 참된 믿음에 이르러야 합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방향이 조용히 뒤집히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물을 던지는 사람이기를 그치고, 그물에 담긴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그물 비유는 우리 전도의 자세를 넓혀 줍니다. 후릿그물은 ‘각종’ 물고기를 모읍니다. 복음의 그물도 사람을 가려서 던지는 그물이 아닙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마음속으로 사람을 골라 놓고 전도할 때가 있습니다. 말이 통할 것 같은 사람, 배경이 비슷한 사람, 성실해 보이는 학생에게만 다가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물은 세리와 죄인과 창기와 이방인까지 품었습니다. 우리 캠퍼스의 그물도 그렇게 넓어야 합니다. 누가 좋은 고기인지는 던지기 전에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 끝 날 물가에 앉으실 분의 몫입니다.
일곱 비유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제자들은 “그러하오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51). 그들의 깨달음은 온전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 대답을 받으시고 그들의 정체성과 사명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5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 서기관은 본래 율법 전문가들의 호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호칭을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하늘 나라의 비밀을 배운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서기관, 말씀을 맡아 가르치는 사람이 됩니다.
새 서기관은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오는 집주인’과 같습니다. 옛것은 구약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 새것은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하늘 나라의 복음입니다. 천국의 서기관은 옛 언약 말씀을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롭게 깨달아,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먹이는 사람입니다.
곳간은 하루아침에 채워지지 않습니다. 추수 때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쌓아 두어야 필요한 날에 내올 것이 있습니다. 양은 꼴이 있는 곳에 머뭅니다. 양이 성경공부의 자리에 앉았는데 목자의 곳간에서 나오는 것이 살아 있는 말씀의 꼴이 아니라 진부한 지식과 사람의 이야기 뿐이면, 그는 다시 오지 않습니다. 매일의 말씀 묵상, 매주의 소감 쓰기, 일대일 성경공부의 준비로 먼저 내가 말씀을 먹고 내 곳간을 채우는 것입니다. 곳간이 채워진 사람은 불안해하는 후배에게, 흔들리는 어린 양에게 꼭 맞는 말씀을 꺼내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천국의 서기관으로 자라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귀하게 여겨 소감을 쓰는 시간은 들은 말씀을 내 곳간의 언어로 쌓는 시간입니다. 말씀이 내 삶의 자리에서 소화되고 내 언어로 표현될 때 비로소 내 곳간의 양식이 되고, 필요한 때에 남에게도 내어 줄 수 있게 됩니다. 매주 소감 한 편이 잘 쌓이면, 그 사람은 어떤 인생의 질문 앞에서도 새것과 옛것을 내어 오는 부요한 집주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53절부터 5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그 곳을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53-58)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놀라움에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걸려 넘어졌습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배척한지라’는 말씀은 걸려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보화가 스스로 빛을 드러 냈는데도 ‘목수의 아들’이라는 흙으로 도로 덮어 버렸습니다. 5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은혜의 강물이 흐르는데 불신앙이 그 물길을 막은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이 보편화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변함이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은 영적인 통로, 믿음을 통하여 부어 주십니다. 혈루증 여인이 옷자락만 만져도 나으리라는 믿음으로 나왔을 때 능력이 흘러갔고, 백부장이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했을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보지 못한 믿음이라 칭찬하시며 역사하셨습니다.
우리는 선교회입니다. 하지만 선교의 열매, 새로운 영혼이 말씀 앞으로 나아 오고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라나는 열매가 우리 가운데 희미해져 있다면, 오늘 비유들은 그 이유가 시대환경 문제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보화이신 그리스도를 얻은 기쁨이 식으면 시선이 사람에게로 옮겨 가고, 시선이 사람에게로 가면 양들에게 내어 줄 곳간이 비고, 곳간이 비면 양을 먹일 것이 없고, 양을 먹이지 못하면 그물을 던질 자신도 사라집니다. 그 빈자리에서 말과 갈등만 자라납니다.
오늘 비유들은 복음역사를 훼방하는 가라지 역사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어떠 하여야 함을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오늘 비유들은 예수님의 복음이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 알려줍니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없이 역사하십니다. 오늘 비유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검증과 구분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몸은 교회를 들락거리고 있지만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인지 나의 중심이 성령에 속한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 비유의 말씀의 교훈을 더 축약하여 본다면, 인간적인 관점이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라지가 왜 존재하는가? 이것은 왜 있는가? 에 대한 인간적인 관점, 복음역사의 성장에 대한 인간적인 관점, 교회에 있으나 생각과 중심이 인간적일 때 그것은 구분되고 결국 버려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이 영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늘 생각하여야 합니다. 항상 생각이 사람이면 그것은 성경을 보고 회개하고 바꿔야 합니다. 이 목자님이 이렇게 말했다. 이해할 수 없다. 저 목자님이 나에게 이렇게 한다. 문제가 있다. 이 환경이 나에게 이렇게 불리하다. 이 상황이 내가 볼 때 불합리하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의 내용은 상황과 관계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런 생각이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능력을 보여주실 수 없습니다. 성령이 가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관념, 인간적인 관점을 가진 곳에서 성령의 능력의 통로가 세워지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인간적인 것은 반드시 말로 나타납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영적인 것처럼 말했을지라도 어딘가에 가서 저 사람에게는 인간적인 말을 하는 법입니다. 이 말이 저리 옮겨졌다 어쨌다 따질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관점이 결국 밖으로 드러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적인 관점 인간적인 말, 인간적인 중심 위에서 성령의 능력은 드러내주시지 않습니다.
불리한 환경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어려움 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믿어야 합니다. 틀린 말을 하여도 그 말에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창세기 요셉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무엘서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다윗이 자기를 해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불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상황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충분히 배웠습니다. 우리는 문제가 있는 관계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하나님께로 가야 하는지 사무엘서의 한나를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창세기의 요셉을 통해서 사도행전의 사도 바울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자기를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자기 봐달라고 하였던 사울왕이 어떤 최후를 맞이 하였는지도 배웠습니다. 우리는 다윗 왕국에 기여하였으면서도 이해관계를 섞어가며 유익을 구한 요압의 결말이 어떠하였는지도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불리한 상황 어려운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말을 멈추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일대일을 하고자 도전하여야 합니다. 일대일을 일방적으로 자기 말하는 시간으로 만들지 말고 말씀이 잘 심겨 지도록 준비하여 감당하여야 합니다. 보화 비유와 진주 비유를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고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내면에 보화로 얻고자 관심과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항상 생각을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 어떻게 하여야 예수님을 배우는 길이 될까 고민하는 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고 목자로 부름 받았다고 안심하지 말고 나는 센터와 집에서의 모습이 다르면서 다른 사람은 정죄하고 나는 목자와의 대화와 친구와의 대화가 다르면서 다른 사람은 비판하는 위선과 불성실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예수님께 상급받는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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