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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일
호 丹山, 시인, 홍익생명사랑회, 양명회, 다물흥방단, 구산의숙.
세계 평화 새날의 영혼을 위하여
-2025년 〈위령제례〉의 시대적 의미
〈조선 러시아 통상조약 140주년 기념〉
〈고려인 러시아 이주 160주년 기념〉
〈안중근 의사 하얼빈의거 115주년 기념〉
지구문명사에서 변화 전환기였던 1800년대로부터 현재에 이르러 더욱 발전된 문명의 시대, 2000년대에 실존의 감격을 누리고 있는 우리 세계인, 그 중에서도 오늘까지 영광과 고난을 극명하게 겪으면서 우뚝 서 있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오늘날 지구 문명 문화의 새로운 방향과 비전을 눈부시게 세계에 보여주고 있는 대한민국. 세계 신문명 시대의 앞서 나가는 위용은 드디어 세계가 주목하게 되었으니 대한의 대경사임에 틀림없다.
오늘의 이 행사는 특별함이 있다. 140년 전의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 놓은 대 주제가 있다. 이것을 말해 보며 실천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로 그 무게감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인류 평화와 세계 시민의 행복, 상생 조화를 위한 지난 세계사적 격동 속에서 벌어졌던 반인륜적 대참사에 대한 반성, 참회를 통해 그 고난 고통의 시대를 정리하는 과정의 하나로 이 행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당시 피해를 입고 고통을 겪었던 지난 역사를 당사자인 대한인이 해원시켜야 한다는 대의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한강, 남산 아래 명동의 조선호텔에서 이 역사적인 자리를 만들게 된 것이다.
청淸, 일본日本, 러시아[露西亞]에 포위된 조선
1800년 당시 극동의 강국이었던 청, 일, 러의 각축장이 되었던 조선은 마치 태풍 속에 휩싸여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위난의 시간대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좌충우돌했던 인물들이 방황 속에 휘몰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활로를 찾아 헤매는 필사의 몸부림, 그 장면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맺은 조약이 〈조러밀약〉이었다. 그 숨어서 치룬 약조의 실체는 뒷날 역사에 암운을 드리우는 비극으로 양국 간에 예측불허의 시대 상황을 맞게 되었는데 그 당시로는 전혀 감지할 수가 없었던 엄혹의 시간대였다.
뒷날 명성황후의 삶이 비극적으로 마감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 것도 여기로부터 기인한바 조선 대한의 역사는 처절함과 피눈물 시대의 확장이었으니, 그 고난 고통은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지난 시대를 다시 상기해내는 오늘의 우리 대한인의 마음자리는 결코 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자제심을 가지게 하는 오늘의 대한인의 자강自强도 말해 보는 것이다.
대한의 영웅 안중근安重根
대한 조선인에게 안중근 의사義士는 천고에 빛나는 대장부다.
그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6시경 겨울이 시작되는 만주 ‘하얼빈’ 역에서 대한국의 의병 참모중장 자격으로 대한의 적괴인 ‘이등박문’을 저격한다. 그 총성은 동북아시아의 땅과 하늘을 진동시키고 세계로 퍼져나간 대한 장부의 기상을 보여준 세계사적인 울림이었다.
대한의 원수 일본제국을 저격한 대사건이었다. 이 행동은 이후 대한조선인 모두에게 생과 사에 크나큰 동력기운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렇게 대한독립 투쟁의 산맥으로 큰 영웅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날 아침 5시경에 ‘우덕순’은 ‘차이저거우’ 역에서 이등박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기차는 이 역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다음 역이 하얼빈 역이었고, 안중근이 역에 나와 있었다. 기차에서 내려선 이등박문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안중근. 이 일은 세상을 경천동지한 세계사적 이인 전쟁이었다. 그리고 승리였다. 그렇게 대한 사람이 세계를 진동시킨 것이다. 그것은 대한인의 독립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안중근이 하얼빈 법정에서 최후 진술로 발언한 내용은 세계인을 놀라게 하고 감동을 주었다. 이등박문과 일본의 죄목을 낭낭한 목소리로 상세히 열거하였던 것이다.
그의 확고한 애국의 신념과 정신이 그대로 담겨져 있는 내용은 식민지 대한 조선인과 세계인들에게 큰 각성을 안겨준 독립, 자존, 자유정신이 담겨진 선언이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죄악 15개조〉
- 첫째,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이토는 대한제국 황비 살해를 지시했다.
- 둘째,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이토는 무력으로 5개조 조약을 체결했는데 그것은 모두 한국에 매우 불이익한 조항이다.
- 셋째,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이토가 체결한 12개조의 조약은 모두 한국에 군사상 대단히 불이익한 것이다.
- 넷째, 이토는 기어이 한국 황제의 폐위를 도모하였다.
- 다섯째, 이토는 한국 군대를 해산했다.
- 여섯째, 조약 체결에 한국민이 분노하여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토는 이들 한국 양민 다수를 죽였다.
- 일곱째, 이토는 한국의 정치, 기타의 권리를 약탈하였다.
- 여덟째, 한국의 학교에서 사용하는 좋은 교과서를 이토의 지휘 하에 소각하였다.
- 아홉째, 한국 인민의 신문구독을 금지시켰다.
- 열째, 전혀 충당할 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성품이 바르지 않은 한국 관리에게 돈을 주어, 한국민에게 아무것도 알리지 않고 제일 은행권을 발행하였다.
- 열한째. 한국민의 부담으로 돌아갈 국채 2천 3백만 원을 모집하여, 이를 한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그 돈을 관리들이 제멋대로 분배하였다고도 하고, 또는 토지를 약탈하기 위해 사용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한국에 대단히 불이익한 일이다.
- 열두째, 이토는 동양의 평화를 깨뜨렸다. 러일전쟁 당시부터 “동양평화를 유지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서도 한국 황제를 폐위하고, 당초의 선언과는 모조리 반대되는 결과를 보기에 이르러 한국민 이천만이 모두 분개하고 있다.
- 열셋째, 한국이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는 한국 보호라는 명분으로 한국 정부의 일부 인사와 결탁하여 한국에 불이익한 시정을 펼치고 있다.
- 열넷째,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현 일본 왕의 부군父君을 이토가 살해했다. 그 사실은 한국민 모두가 알고 있다.
- 열다섯째, 이토는 한국민이 분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왕이나 기타 세계 각국에 한국이 무사하다고 전하며, 사실을 숨기고 있다.
이상의 죄목에 의해 이토를 사살했다고 법정에서 세계를 향해 당당하게 밝혔던 것이다.
안중근의 애국 애민정신
안중근은 여순 감옥으로 마지막 면회 온 두 아우 정근, 공근에게 유언한다.
“내가 죽으면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우리의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이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해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 해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이 죽었다. 두 아우는 시신을 모시고자 감옥 밖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일본은 끝내 이들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안중근의 시신은 대한인들과 세계인 누구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는 죽어서도 온전히 누울 자리 어디에도 없이 오늘까지 떠도는 영혼으로 남아 있다.
이등박문의 무덤은 일본에 남아 있다. 이등박문이 죽자 경성에는 조문소가 차려졌고 그의 사진이 경성 거리를 누비게 하였고 그를 기리는 ‘박문사’라는 사당까지 지어 놓게 했으니 조선인의 가슴에 또 다른 분노의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의 죽음에 대한 왜곡된 역사가 남아있는 것은 무슨 곡절인가. 일본의 역사가들은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그리고 대한의 역사가와 우리도 아직까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서울의 효창공원의 허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날까지 이런 사실을 상당수 일본인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일본의 젊은 세대들 다수가 역사를 모르거니와 교육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할린 쿠릴열도의 징용 조선노동자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사할린도 일본의 식민지화가 된다.
1905년 섬의 남부에 철도가 개설되고, 북부 지역은 1월이면 섭씨 영하 20도의 열악한 풍토로 폭풍, 폭설이 강한 지역으로 개발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현재는 섬의 중북부지역은 삼림이 우거져 백양나무 등이 무성하다. 이 지역에는 석탄과 천연가스가 많다.
일본은 식민지 사할린을 1907년부터 개발, 조선인이 식민지 정책으로 개발, 주민으로 이주되면서 1870~1880년 어부로 종사 67명, 이 섬의 러시아 인은 남부 코사크에 거주 하다가 → 두만강 → 연해주 → 블라디보스톡 → 아무르 강을 건너서 이주해 왔다. 조선인 이주 통로도 이와 같았다.
1925년 소련이 이 섬을 장악, 일본 군대가 철수했고 잔류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기아선상에 놓이게 되었다.
섬에 남게 된 조선인은 소련으로 기울었다. 1929년 석유개발에 종사 124명, 오차에 거주하던 조선인도 1940년 탄광업과 어업을 위해 사할린으로 이주했다. 이후 1945년 전쟁말기 일제가 징용으로 동원한 일부 조선인은 저임금 계약 노동자들이었다.
조선인들의 수난과 시련을 그대로 연장시킨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만주, 연해주의 중앙아시아의 조선인들 일명 고려인들이라 불렸다. 이들도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시대의 조류에 휩쓸려 강제이주를 당하는 민족 수난을 겪으며 끝내 살아남아 자신들의 고난의 역사를 증언한 용기에 대해 오늘 그들의 한과 실존을 함께 얘기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낯선 땅 사할린-섬에서 더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쿠릴열도에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1940-45)의 막바지에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은 이 섬에 상륙한다.
그들은 일본의 야망이 극명하게 드러났던 전쟁의 기지인 사할린에서 지하갱도의 차디찬 곳으로, 청춘을 태평양 해풍 속으로 매몰 수장시킨 슬픈 역사의 인물들이 되었다.
오늘 그들의 알려진 이름만이라도 다시 세상에서 불러 모시는 것이다. 이 사실도 세상에 알려진 것이 오래되지 않았다.
KBS가 취재한 귀한 자료 - 조선인 징용 노동자 1200명 명단
2018년 가을 KBS 도쿄지사 특파원이었던 이승철 기자가 쿠릴열도를 취재했다. 이때 참으로 중요한 자료를 알게 된다. 그리고 기사를 올렸다.
조선인 징용 노동자 1200여 명의 명단을 찾아낸 것이다. 그 기사는 이렇다.
〈앵커〉
태평양 전쟁말기 다급해진 일본이 강제 징용자를 가장 많이 동원한 곳이 일본 규슈와 홋카이도, 그리고 쿠릴열도 등인데요. 하지만 쿠릴열도는 구, 소련이 점령하면서 징용자 동원규모 등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는데, KBS가 일본군 기록에서 1천 2백명 가까운 사망자 명부를 확인했습니다.
[리포트]
일본 홋카이도 북부에서 캄차카 반도까지 뻗어 있는 쿠릴열도. 태평양 전쟁말기 대규모로 강제 징용자를 동원한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 시라이토/강제징용 연구자 : “(쿠릴열도에서) 작업의 대부분은 비행장 만들기였습니다. 북 쿠릴열도 부근에서 (일본군이)작은 비행장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처음으로 공개되는 일본군이 작성한 쿠릴열도 징용자 사망 명부입니다.
‘유인복’이라는 이름이 선명합니다.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출신으로, 1944년 7월 9일 숨졌습니다. 같은 날 숨진 사람만 모두 180여명. 강원도와 황해도 일원에서 징용돼 배로 쿠릴열도로 가던 중 ‘어뢰’ 공격을 받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 뒤에도 9월에 579명, 10월에도 312명이 한꺼번에 숨졌습니다. 모두 징용선에 타고 있다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 여름이지만 잠깐만 발을 담가도 온몸이 떨려올 정도로 차가운 이 오호츠크 바다에서 수많은 징용자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망 기록이 남아 있는 쿠릴열도 징용자는 모두 1,189명입니다.
20만 명이 징용됐던 홋카이도에서 2,600명 정도가 숨졌던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이가 희생됐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쿠릴열도는 가는 길부터 험난했던 징용자의 지옥이었습니다.
- 다케우치/강제 징용 연구자 : “(홋카이도 탄광에서) 도망쳤다가 잡혀, 맞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지 않은 사람은 쿠릴열도로 보냈다는 기록이...”
사망 기록이 일부 공개됐지만 쿠릴열도의 전체 징용 상황은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홋카이도에서 KBS 뉴스 이승철입니다.〈2018년 8월 16일, ‘KBS 뉴스’ 기사〉
200년전 러시아 예언가 - 21세기 대한민국을 위한 헌사
“동방의 선지자들을 찾아서 만나라” 러시아의 영성 예언가가 제자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이다.
이반 미르슈니코프(1802~1902)는 모스크바에서 출생했다. 23세에 교회에서 기도 중 하늘의 소리를 들은 후 신앙인이 되어 카톨릭 사제 예언가로 활동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때, 볼세비키에 의해 1917년, 러시아가 붕괴된다는 예언을 했는데 그대로 적중, 이후 러시아가 8개 나라로 쪼개진다는 예언도 적중했다.
그의 말년인 1902년에 미래의 세상에 대한 예언이 있었는데 러시아와 동아시아에 일어날 내용이었다.
그는 영국, 일본, 조선 민족에 대해 말했는데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 미국과 일본의 세력 확장, 그리고 조선의 러시아 교류, 인류문명의 대전환기가 오면 극동지방에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삶을 제시하는 〈신성한 별의 민족〉이 반드시 나타나고, 이 민족은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폭정으로 끊임없이 억압당하던 민족이지만 그 과정을 거친 후 본래의 기운을 되찾아 세계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안전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 나라를 찾아서 그 민족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온 힘을 다해 도우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사후 1946년 그의 제자 9명이 이끄는 무리가 극동으로 출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뒤의 행적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내용에 관하여 일본인의 심층연구도 있었다.
1986년 일본 역사인지학회 ‘사카다 마츠히로’는 러시아, 일본, 한국의 문헌을 찾아보다가 〈신성한 별의 나라〉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 역사학계의 대표적 학술지 《일본역사》에 이 내용을 발표했다.
알렉산드로 니콜라이 막사코프(1832~?)도 있다.
러시아 심령 연구자로 유명하며, 당시 유럽에서 유명했던 영지주의자《스웨덴 보리의 예언서》를 러시아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한국에 관한 예언을 했는데, 한국인의 우수성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러시아 혁명, 세계대공황 세계대전, 한국남북전쟁 예언, 특히 한국통일에 관해서도 말했는데 “새 회방의 지도자가 나와 통일을 하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예언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한국문화의 위상도 말했다고 한다.
21세기 세계 문명의 전환기 대한大韓의 역할
러시아의 이들 영성가들의 당시 예언이 극동에서 실현된다면 그 시기가 21세기 현대에 가능해 보이는 오늘날, 우리나라로 보아서는 매우 희망적인 예언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의 극동지역 진출은 이미 예견된 것으로 세계 평화를 위한 현재의 대한민국의 노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이번 행사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적인 흐름으로 보아서도 대한민국의 비약적인 발전과 그 영향력에 더욱 긍정적 전망이 가능해진 현실이다.
이럴 때 대한민국의 국민들, 북한 동족이 합심하는 대변화의 자유, 평화, 통일 시대를 앞당기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이 학술대회, 〈위령제례〉도 그런 시대의 한 장면인 것이다.
행사1부 : 위령제
〈추모 위령 祭文〉
오늘, 저희들 〈조선 러시아 통상조약(수교) 140주년 기념〉, 〈고려인 러시아 이주 160주년 기념〉, 〈안중근 의사 하얼빈의거 115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있는 이 순간 온 마음을 천지天地 안에 두고 엎드려 고하옵나이다.
2024년 10월 대한의 초가을 청명함 아래 1884년에서 14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동양 4국 이웃나라에서 벌어졌던 대한인大韓人의 애증과 용서와 사랑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이 자리를 허락해 주신 하늘의 선조님 신령님께 감사드리옵나이다.
세계 역사 속에서 전 세계가 요동치기 시작한 지난 1800년대부터 1900년을 거치고 지구 문명의 대변혁기인 2024년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대한인은 수많은 시련과 고통의 역사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 세계를 열어 가도록 하늘의 거룩한 선조님들께서 우리들에게 힘과 지혜와 용기를 주심에 감사드리옵나이다.
그리하여 2000년대 세계 인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대한인에게 주어진 시대사적 책무를 다하려는 현재, 대한인의 지난 역사의 반추 속에서 그 시대 역사의 중심에 계셨던 선조들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다시 회상하며 오늘 저희들의 이 추모 위령제에 임하는 심정을 지켜보아 주시옵고, 세계 인류를 위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는 이 절대의 시간 새로운 지혜를 주시어 대한인과 세계인의 조화로운 생활의 광명을 드러나게 이끌어 주시옵기를 천지신명님, 선조님께 간절히 원하옵나이다.
이제 대한인의 지난 역사를 돌아봄이니, 1909년 대한 조선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험난한 세계사적 고난의 미래를 암시한 ‘새로운 시대의 여명기’였으니, 이 나라 운명의 엄혹한 수난 국치의 시절이었음이라!
오늘 돌아보면 원통, 비통함을 그칠 수 없는 격동의 시대, 백성들 생사를 허공에 걸어 둔 청맹과니 몰골이었지만, 시대의 의인 선각자들, 당신들 구국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 대한인의 애국 행동의 강인한 기개가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절망을 딛고 일어선 지사, 열사, 의병, 민중들이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을 강화시켜 이것을 무기로 삼아 일제에 맞섰으니 대한독립 투쟁으로 중국, 만주, 일본, 러시아, 미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선구자들의 구국 일념, 생사 초월의 투쟁이 이어졌음을 우리는 잊지 못함이라!
오늘 이 자리에 모신 그 중의 큰 인물,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애국충정 대의결행은 동양 4국의 각축장이었던 만주 하얼빈[哈爾濱]을 한순간 세계사의 전면으로 부상시켰음이니!
일본 초대 총리 ‘이등박문’을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경천동지의 대역사였으니 오늘 우리들의 가슴에 그대로 녹아 살아있음이라!
이 자리에서 당신을 모시고 잔을 들어 올리는 우리의 제의를 받아 주시옵고, 이로서 세계조화 동양평화의 세상을 갈망하는 그 인류애를 다시 만방에 드러나게 함이라!
1938년 세계가 전쟁의 비극 참화 속으로 들어가는 시대,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서 조선인을 식민 무력의 나라 백성으로 만들어 전선의 강제징용 노동 사지死地로 몰아넣었으니!
그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떠밀려서 더는 나아가지 못한 채 바다에 막힌 섬, 사할린 쿠릴열도가 그중 하나였음이니!
이곳에서 무명의 유랑민 처절한 몸부림으로 생명을 버렸으니 그로부터 87년이 지났음이라!
지난 그 고통의 시절, 천지간 해풍 속으로 사라져간 1천 2백여 그대들, 무국적 실향민으로 떠돌며 육신은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렇게 오늘 이름만으로 조국 품에 안겼으니, 그 한 맺힌 세월, 고통, 원한 모두 풀어내려 놓으시고 하늘나라 온전한 평안의 자리에 드시옵소서!
오늘 이 시대의 현실로 조국이 남북통일 되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경제 선진국과 문화 선도국이 되었음이니, 2000년 새 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들 늦은 참회로 송구함 일심으로 모두어, 1800년 후반으로 시작된 대한 조선의 고난시대, 만주 하얼빈에서 구국 선구자이셨던 안중근 의사, 사할린 쿠릴열도에서 강제 노동 징용자였던 조선 민중 1천 2백여 당신들의 거룩하고 고귀한 성명을 불러보며 추모 위령제를 올리오니 이 성심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 이 자리는 더 나아가 대한인의 위상, 위력이 동양의 번영과 상생 평화 조화가 세계인의 자유, 평화, 행복의 생명사상을 품고 살 수 있는 현실을 만들어 내는 대의 대업에, 이웃 나라 러시아와 상생조화 미래를 위한 활동에 온 정성 집중하여 다짐하는 한마음 저희들의 결심의 자리이며, 장차 사할린 쿠릴열도에 우리 대한인의 정성 기운 넘치는 활동이 조화롭게 펼쳐지길 소망하는 첫걸음의 기원하는 자리이오니, 영령들께서 살펴 도와주시옵소서!
오늘 저희들 일심 정성 의식을 받아 주시옵고, 하늘의 처소에 항상 평안함을 누리시옵소서! (2024. 10. 28)
대한민국 서울 추모, 〈위령제례〉 봉행위원장 정 우 일 봉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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