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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맑은 물 흐르는 곳 (나들목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들풀처럼
패거리주의와 겉치레 없는 정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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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스벤 베커 (Sven Becker) · 디르크 쿠르브유바이트 (Dirk Kurbjuweit)
페터 뮐러 (Peter Müller) · 마르셀 로젠바흐 (Marcel Rosenbach)
메르린트 타일레 (Merlind Theile) <슈피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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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 페이스북·트위터를 달고 사는 사람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자서 무언가를 하는 친구들. 이들이 주로 해적당의 당원이거나 지지자들이다. 나서기보다는 숨기를 좋아했던 이들이 정치로부터 국민을 떼어놓은 기존 정치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정강도, 정책도 아직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유권자들이 정치에 참여해 틀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은 굳건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의 정치 환경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해적당, 관심을 두고 지켜볼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_편집자
끊임없는 토론과 당원 피드백으로 만들어가는 집단지성의 실험
해적당은 독일 국민에게 더 많은 정치 참여와 투명성을 상징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 엉성하지만 순수하고, 또 열정을 지녀서 기존 정치에 식상한 유권자들의 지지가 쏠리고 있다. 그들이 경직된 기존 정치 시스템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까?
마리나 바이스반트(24)는 이제 정치가 어떤 것인지 실감했다. 정치는 고통스러울 수도, 한 인간의 기력을 모두 빼놓을 수도 있다. 지난 4월20일 목요일 밤 한계에 도달했다. 순환 조절 기능 붕괴로 인한 쇼크로 쓰러진 그는 TV 출연 스케줄을 취소하고, 독일 베를린의 자선병원으로 실려가야 했다.
독일 해적당의 정치국장이던 바이스반트는 이미 새로운 정치의 가혹함, 즉 자신이 속한 정당인 해적당에서 가혹함을 경험했다. 그는 거친 논쟁을 견뎌냈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글을 썼다는 이유로 인터넷상에서 심한 욕설을 포함한 공격을 당했다.
그리고 그 목요일 밤, 바이스반트는 기존 정치권의 가혹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파인 기독민주당(CDU·기민당) 당원인 미셸 프리드만이 진행하는 TV 토크쇼에 초대손님으로 나왔다. 프리드만은 바이스반트에게 해적당이 나치와 인종차별주의자, 그리고 반유대주의자들을 보호하는 당이라고 비난했다. 독일 정치권에서 이보다 더 심한 비난은 없다.
일부 해적당원이 과거에 네오나치 정당인 국가민주당(NPD) 당원이었고, 나치 과거사에 대해 부적절한 언행을 보인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바이스반트는 이를 전혀 변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판에 동참했지만 프리드만을 전혀 진정시키지 못했다. 방송이 끝난 뒤에도 프리드만은 계속해서 "부끄러운 줄 알라"며 광분한 듯이 소리를 질렀다. 프리드만은 "해적당은 아예 존재해서는 안되는 당"이라고 말했다. 이런 공격을 당한 뒤 바이스반트는 다음 스케줄인 메이브릿 일너 토크쇼에 출연하기 위해 이동했지만, 방송이 시작하기 직전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절한 그녀는 병원으로 실려갔다. 바이스반트는 수많은 규칙과 금기를 지닌 경직된 독일의 정치 시스템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경험했다.
지도부 위주의 경직된 독일 정치 시스템
이런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해 나선 집단이 독일 해적당이다. 이들은 기존 정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규칙을 정착시키려 한다. 하지만 지금 해적당은 난관에 부딪쳤다. 기존 정치 시스템의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해적당이 몇몇 극우 성향 당원으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자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다. 꼬투리가 없어도 공격할 판이었는데 고맙게도 빌미를 스스로 제공해준 것이다.
이 때문에 당 수뇌부들은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한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는데도, 작은 사건이 잇따라 터지면서 마음껏 즐길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해적당은 독일 유권자 13%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좌익당과 우파 자유민주당(FDP)의 지지율을 넘어 녹색당의 지지율과 비슷한 수준이다. 해적당은 거의 모든 정당의 지지자들을 흡수하고 있지만, 주된 지지 계층은 기존에 투표를 거부했던 사람들이다.
해적당의 등장은 한 편의 동화를 연상시킨다. 컴퓨터광과 인터넷 중독자들의 정당, 정치적 초심자들의 정당이 잠들어 있던 독일 대중을 깨어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추어 환영!"(Avanti Dilettanti!) 독일 대중은 정치가 개선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아준 이 아마추어들을 환영하고 있다. 독일 국민은 큰 불만과 함께 큰 소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슈투트가르트 중앙역 '21계획'(모든 노선을 지하화하고 지상에 상가를 짓는 대규모 공사)에 대한 반대 시위로도 표출됐다. 대다수 독일 국민들은 기존 정치가들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그들이 보여주는 정치쇼에 짜증을 내고 있다. 독일 국민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어떤 일이 왜 일어났는지 알고 싶어 하며, 같이 참여하고, 자신들의 의견이 정치에 반영되기를 바란다.
바로 이것이 국민이 해적당에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이다. 투명성과 신선함, 일반인들의 정치적 참여, 때로는 하룻강아지처럼 순진하고 정신없이 혼란스럽게 느껴지는 색다름을 가지고 패거리주의와 겉치레 없는 정치를 해보려는 것이 해적당이다.
왜 지금 해적당이 성공을 거두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독일의 양육수당 문제만 봐도 충분할 것이다(기존 육아보조금과 달리 2013년부터 2∼4살 자녀를 국공립 보육기관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부모가 돌보면 첫해인 2013년에는 한 아이당 매월 100유로를, 두 번째 해인 2014년부터는 매월 150유로를 국가가 현금으로 지급하는 제도). 연립정권의 한 축인 기독사회당(CSU·기사당) 당수 호르스트 제호퍼가 양육수당 도입을 제안하자, 기민당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즉각 실행한 것이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국회의원들 중 많은 수가 이 정책을 개인적으로 반대했지만, 당 지도부의 결정이기 때문에 표결에서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묵인과 상명하복, 이것이 낡은 정치의 심각한 악습이다. 국민은 이 시스템이 바뀌기를 바라고 있다.
해적당의 정계 진출은 독일 의회에 참여하는 정당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것뿐만 아니라, 독일 정치권 자체에 관한 문제를 의미한다. 정치가 앞으로도 지금 같은 모습으로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개혁될 것인가?
하지만 독일의 정치 형태는 63년간 지속됐고, 그 기간에 효과가 입증된 시스템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방어와 동시에 흡수도 한다. 정치 시스템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시스템이 자기 안에 파고들어, 그가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자신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해적당이 시스템을 변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시스템이 해적당을 변화시킬 것인가? 이것이 현재 독일 정치의 거대한 테마다.
영화감독이자 독일 해적당원인 요하네스 포나더가 5월17일 긴축 반대 시위를 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시청 앞으로 가고 있다. 뉴시스 REUTERS 정치 도구는 인터넷과 컴퓨터
해적당의 정치 도구는 인터넷과 컴퓨터다. 해적당을 이해하려면 먼저 이들이 어떻게 서로 소통하는지 알아야 한다.
베를린 주의회 의원 크리스토퍼 라우어(27)는 연방 당대표단의 임기를 1년에서 2년으로 연장하자는 제안을 했다. 당 지도부의 업무 연속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당대회에서 이 안에 대해 표결할 예정이었지만 라우어는 표결 전에 당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의사 형성 소프트웨어 '리퀴드 피드백'에 자신의 제안을 제출했다. 투표 권한을 가진 것은 등록된 해적당원들이다.
제안에 대한 토론은 '해적 패드'라고 부르는, 누구나 같이 쓸 수 있는 온라인 문서에서도 함께 이루어진다. 라우어는 트위터에도 그의 제안을 올렸다. 현재 1만4천여 명의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읽고 있다. 마리나 바이스반트는 그의 트윗 멘션을 즉시 그녀의 팔로어들에게 리트윗했다. 그녀의 팔로어 수는 2만5천 명이 넘는다. 이렇게 라우어의 제안은 단 몇 번의 클릭을 통해 당원 대다수에게 전달된다.
'버트씨'라는 별명의 당원도 이 발의에 대해 알게 되었다. 버트씨는 대표단의 임기를 2년으로 연장하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을 리퀴드 피드백에 제출했다. 열띤 토론이 시작돼, 대표단의 조기 사임 같은 문제를 두고 당원들이 논쟁을 벌였다.
한 달간 토론한 뒤 이 발언에 대해 표결할 때 해적당원 마르틴 하제는 라우어의 제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밤베르크에 사는 불문학 교수 하제는 '슈퍼 위임권자'라 불리는 당원 중 한 명이다. 리퀴드 피드백에서는 해적당원들이 자신의 투표권을 다른 당원에게 위임할 수 있다. 하제는 현재 당내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평당원일 것이다.
라우어는 하제에게서 59표의 찬성표를 받았다. 여기에 클라우스 포이커르트가 34표, 모니카 벨츠가 36표를 더했다. 단 3명의 당원이 425표의 찬성표 중 129표를 행사한 것이다. 라우어의 제안은 리퀴드 피드백에서 72%의 찬성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것으로 토론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해적당 전당대회에서 다시 한번 의결해야 한다. 리퀴드 피드백의 결과는 구속력이 없다. 전 베를린 지역당 대표 게하르트 안거는 여전히 대표단 임기 연장을 반대하고 있다. 안거는 "좋은 대표단은 1년의 임기가 끝난 뒤 분명히 다시 선출된다"고 말한다. 바이에른 지역당 대표 슈테판 쾨르너 역시 이 안건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저 4년에 한 번씩 투표소에 가서 ×표를 하는 것이 지긋지긋해서 우리 당을 찾아왔다. 현재 단계에서 임기 연장은 실수라고 본다."
이런 식으로 토론은 끊임없이 진행된다. 지속적인 기초 당원에게서의 피드백은 해적당을 다른 모든 정당과 다르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모든 당원은 메일링 리스트, 위키 혹은 트위터로 자신의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회 선거(5월13일)에서 해적당은 인터넷에서 선전 포스터를 함께 디자인하고, 주 전당대회를 위한 장소를 같이 찾고, 함께 정책을 만들았다. 이들은 이런 원칙을 '크라우드소싱'(Crowdsourcing)이라고 부른다. 이 원칙은 집단지성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완성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적당에서도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라우어의 제안에 대한 표결에 참여한 사람은 639명뿐이었다. 이 사람들이 다른 2만5천 명의 당원에게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까? 리퀴드 피드백에 미치는 슈퍼 위임권자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결국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당이 움직이는 방향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슈퍼 위임권자들도 선거에 의해 선출된 사람이 아니다.
해적당 의원들은 어차피 자신의 양심에 대한 책임을 질 뿐 리퀴드 피드백을 통해 그 어떤 것도 강제할 수 없다. 해적당이 연정에 참여한다면 장관들은 수시로 기초 당원들의 피드백을 받아야 하고, 연정 파트너의 요구와 당의 요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다른 경쟁 정당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해적당의 경우에는 더욱 힘든 문제가 될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기초 당원의 의견 청취는 정당 활동을 둔화시킬 수 있다.
해적당의 대규모 필드 테스트는 2011년 9월18일 베를린에서 이루어졌다. 이날 주의회 선거에서 8.9%의 지지율을 획득한 해적당은 처음으로 당원 15명을 주의회에 진출시켰다. 그중 하나가 마르틴 델리우스(27)다. 선거 전까지 그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했다. 지금은 베를린 주의회 해적당 원내 대표다. 베를린 겐트아르멘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한 카페에서 <슈피겔> 기자와 만나기 전에 델리우스는 이곳에서 언론과 인터뷰한다는 사실을 트위터에 올렸다.
해적당 지지자들이 5월13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원 선거 결과가 발표되자 환호하고 있다. 뉴시스 AP
의원들, 당론 구속받지 않고 표결
"우리에겐 현실정치와 당을 연결하는 창구가 되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반대 주장만 펼치면 이는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를 변화시키려면 세상에 혼자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는 없다. 우리는 전통을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한번 그것에 대해 의심을 가져보려는 것뿐이다."
이 말은 해적당이 시스템을 변화시킨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시스템이 해적당을 변화시킨 듯하다. 처음 며칠간 해적당 출신 주의회 의원들은 다른 정치가들과 마찬가지로 좋은 사무실과 의장단 자리를 원했고, 친구들에게도 직업을 알선해주려 했지만 곧 기초 민주주의에 대해 그들이 걸고 있는 기대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었다. 법률가 마인하르트 스타로스틱을 주 헌법재판관으로 추천한 것도 큰 잘못으로 여겨지고 있다. 당은 후보자를 추천할 권리가 있었지만 이들은 이것을 공개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당은 일련의 밀실회담 뒤 스타로스틱을 추천했다.
델리우스는 "우리는 협상 포지션을 지켜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의 어투는 기민당이나 중도좌파 사회민주당(SPD·사민당)의 다른 정치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해적당은 베를린 주의회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까? 델리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의회 업무에는 딱히 변한 것이 없다." 그는 눈을 천장으로 돌렸다. "아니, 한 가지 생각났다. 의장은 이제 더 이상 당 단위로 찬반을 가르지 못하고 각 의원의 개별적인 반대 의견을 고려해야 한다." 해적당에서는 정당 단위의 강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의원은 모든 안건에서 자신의 의견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대화를 마치면서 델리우스는 "해적당의 성장은 1928∼33년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나치)의 성장만큼이나 빠르게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발언에 놀란 듯했지만 투명성을 위해 이 첨예한 비교를 인정했다. 대화가 끝난 직후 델리우스는 이 말을 트위터에 올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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