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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에는 바위글씨를 보러가자
귀록의 도봉산행과 겸재의 묘소를 찾아서
제3회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
글/심산(한국산서회)
사진/서영우(한국산서회)
2018년 5월 12일(토)에는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한국산서회와 함께 하는 인문산행은 본래 매월 첫째주 토요일에 진행한다. 하지만 5월의 첫 번째 토요일이 어린이날이었던 관계로 1주일을 늦췄는데 하루 종일 비가 온다니 난감하다. 신설동과 우이동을 연결하는 우이동 경전철 종점에 집결한 주최측은 참가자들이 산행을 포기하고 불참할까봐 전전긍긍이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의연했다. 쉬지도 않고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도착한 참가자들은 우회로를 운운하는 주최측의 제안을 마다하고 어서 산에 오르자며 발길을 재촉한다.
돌이켜 보니 우리가 오늘의 코스를 미리 다녀왔던 지난 4월 14일(토)의 사전답사 때에도 비가 왔다. 그날도 고어텍스 재킷만으로는 모자라 하루 종일 우산을 쓰고 돌아다녔던 기억이 선명하다. 이럴 경우에는 꿈보다 해몽이 중요한 법. 우리는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처럼 오늘의 우중산행에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한다. 아마도 귀록과 겸재가 잊혀져있던 자신들의 별서와 묘소를 찾아준 우리 후손들이 고마워 기쁨의 눈물을 흩뿌려주고 계신 것이 아닐까?
우중산행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분명한 특혜도 있다. 맑은 날에도 우리는 바위글씨를 보러갈 때면 수통에 물을 넉넉히 채워간다. 희미한 바위글씨 위로 물을 뿌려야 그 획들을 선명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도봉산의 남쪽자락의 이 계곡과 저 능선에 숨겨져 있는 바위글씨들을 보러간다. 빗물을 머금은 채 확연하게 자신을 드러낼 아름다운 바위글씨들을 만나기 위하여 빗줄기 속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다.
원통사의 ‘상공암’은 누구와 연관된 바위글씨인가
오늘 감상할 가장 웅혼한 바위글씨는 오늘의 산행코스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바로 암벽등반 대상지로 유명한 우이암 아래, 탁 트인 전망을 가진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 원통사다. 우이암(牛耳巖, 542m)은 도봉주능선 상에 우뚝 솟아있는데, 이 바위로부터 우이동이라는 동명(洞名)이 유래했다고 전해지지만, 아무리 사방팔방에서 뜯어보고 심지어 기어 올라가서 살펴보아도 도무지 소의 귀(牛耳)처럼 생겼다고는 보기 힘들다. 우리는 우이암의 봉명(峯名)에 대하여 이견을 가지고 있지만 상세한 논증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우이암에서 북한산우이역(경전철 종점) 쪽(남쪽)을 향하여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능선을 우이남능선이라 부른다. 오늘 우리는 우이남능선을 따라 원통사에 오른다. 오월의 신록에 맑은 빗방울들이 흩뿌려지며 신비한 운무들이 시야를 감싸니 선경 속을 헤매는 느낌이다. 반시간 정도 걸으니 벌써 고어텍스 재킷이나 우비 아래로 땀이 차고 흘러내려 더울 지경이다. 겉옷을 재정비하고 내처 걸으니 한 시간 남짓 지나서 원통사에 도착한다.
원통사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도열해 있어 언제 가봐도 장관이다. 본래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시내의 모습이 또한 장관인데 오늘은 운무가 끼어 보이지 않는다. 원통사 경내의 약사전이 올라서 있는 바위가 거북바위다. 그 바위에 굵고 힘찬 필치로 뚜렷이 새겨져 있는 상공암(相公岩) 바위글씨를 보러간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즈음 이곳에서 산신께 백일기도를 올렸는데, 기도를 마치던 날 “천상의 상공(정승)이 되어 옥황상제를 배알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여 새긴 글씨라고 전한다. 약사전에서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이성계가 기도를 올렸던 석굴이라는 나한전도 만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속전(俗傳)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학자 이이화는 그의 역저 [역사 속의 한국불교](역사비평사, 2002)에서 이런 종류의 스토리텔링을 ‘상징조작’이라고 명명했다. 즉 권력의 필요에 따라 민중들을 설득하고자 만들어낸 일종의 여론조작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권력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고, 특정 종파 혹은 특정 정파가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스토리텔링을 ‘불교마케팅’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홍보전략(마케팅)의 단골출연자들은 널리 알려진 대로 원효, 의상, 도선, 왕건, 이성계 등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이런 종류의 ‘상징조작’ 혹은 ‘마케팅’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생각이 전혀 없다. 스토리텔링은 스토리텔링일 뿐이며, 그 자체로서 나름의 존재의의를 가진다. 다만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거나 논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할 뿐. 그런 맥락에서 상공암 바위글씨를 이성계가 썼다는 저간의 스토리텔링은 잠시 잊자. 우리는 보다 명확한 근거를 가지고 이 바위글씨를 논하고 싶다. 그것이 우리가 이렇게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인문산행을 계속 하는 이유다.
영조 탕평책의 집행자 조현명이 남긴 자취들
관암 홍경모(1744-1851)는 그의 조부인 홍양호와 더불어 ‘우이구곡’을 경영하고 찬미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남긴 [상공암부(賦)]에는 이 바위글씨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전한다.
“도봉산 원통사에 있는 바위인데, 천길의 높이로 우뚝 서 있다. 수많은 골짜기들을 굽어보며, 위로는 가히 십 여 명이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읊조리면서 멀리 바라볼 수 있다. 대개 서명균, 조현명, 정이검이 여기에 놀러왔기에 그렇게 이름 지었다(巖在道峰圓通寺。壁立千仞。俯臨萬壑。上可坐十人。可以觴咏。可以眺覽。盖徐公 命均,趙公 顯命,鄭公 履儉 來遊於此故名).”
(국역 이수인, 한국산서회).
이 세 명의 인물들 중에서도 우리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귀록 조현명(歸鹿 趙顯命, 1690-1752)이다. 그는 지난해의 인왕산 인문산행에서도 이춘제의 [서원아회기] 및 겸재 정선의 [옥동척강] 속 주인공으로 한참 화제가 되었던 인물인데, 오늘 이렇게 또다시 마주치게 되어 새삼 반갑다. 우리가 “상공암 바위글씨는 조현명과 연관된 것”이라 여기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에 인용한 홍경모의 [상공암부]. 둘째, 조현명의 거주지가 이 산자락 아래 동네인 양주목 해등촌(海等村, 현재의 도봉구 방학동 일대)이었다는 것. 셋째,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정자인 명오정(귀록정)이 있었다는 것.
조현명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깊이 있게 풀어놓으려 할 즈음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점심 먹을 때가 된 것이다. 비를 피하여 법당 처마 아래 궁색하게 선 채로 도시락을 꺼내려는데 뜻밖에도 원통사 측에서 너그러운 제안을 해온다. 마침 요사채(定慧寮)가 비어있으니 모두들 그 안으로 들어와 식사를 하도록 허락해준 것이다. 따끈한 온돌방에 들어가 앉으니 비에 젖은 옷들이 금세 말라간다. 요사채 처마에 듣는 빗방울 소리가 소박한 식사에 그윽한 정취를 더해준다. 식사를 끝내니 원통사 측에서 따뜻한 보이차까지 아낌없이 내준다. 일행들은 빗길을 헤치고 올라온 덕에 부처님의 자비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며 해맑게 웃는다.
조현명의 귀록정터에 남겨진 바위글씨들
엉덩이는 온돌에 달구어져 따뜻하고 뱃속은 보이차에 덥혀져 따뜻하니 도무지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부슬부슬 하염없이 내리는 봄비를 바라보며 그렇게 한 동안 원통사에 머물던 일행들은 이내 배낭을 지고 일어나 하산길에 접어든다. 조현명이 54세가 되던 해인 1744년(영조 20년)에 지었다는 명오정(名吾亭)터를 둘러보기 위해서이다. 조현명의 호가 ‘돌아온 사슴’을 뜻하는 귀록이고, 명오(名吾)란 ‘나 자신을 이름한다’는 뜻이니, 명오정을 때때로 귀록정이라 지칭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이남능선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왼쪽의 방학동으로 빠지는 지능(支陵)이 있다. 동네사람들은 이것을 방학능선이라 부른다. 우이남능선과 방학능선 사이에 도톰하게 솟아있는 둔덕이 시루봉(122m)이다. 귀록정터는 바로 이 시루봉의 동남계곡에 있다. 하지만 아마도 초행자들은 이 자리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조현명이 자신의 시문에서 그토록 멋진 표현으로 노래했지만 실제의 계곡은 초라하다 못해 너무 하찮아 보일 지경이어서 그 곁을 지나간다 해도 눈길 한번 주기가 어렵다.
귀록정터에는 주춧돌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저 계곡 옆에 자그마한 정자 하나 들어설만한 공터가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곳을 귀록정터로 비정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바위글씨들 덕분이다. 공터 주변의 계곡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 위에 귀록계산(歸鹿溪山)과 와운폭(臥雲瀑)이라는 바위글씨가 선명하다. 우중산행 덕분에 계곡물은 제법 콸콸 소리를 내며 힘차게 흐르고, 바위글씨는 이제 막 인쇄라도 끝낸 듯 더없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참가자들은 이 멋진 야외예술작품들을 정성스럽게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조현명은 영조시대 최고의 권력자요 정치인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일찍이 경종 1년(1621년)에 시작된다. 연잉군(훗날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을 때 그를 가장 열성적으로 보호했던 인물이 바로 조현명이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조현명 형제를 요직에 발탁한 뒤 즉각 탕평책을 시행하게 된다. 조현명은 소론 집안 출신이었지만 노론계 인사들과도 깊은 교분을 나누고 있었기에 이러한 특명을 집행하기에는 적격인 인물이었다. 조선 후기에 정치가 가장 안정되고 문화예술이 꽃피웠다고 평가되는 영정조 시대가 열린 데에는 탕평책의 역할이 컸다. 그리고 그 탕평책의 가장 강력한 집행자가 당시의 영의정 조현명이었던 것이다.
이토록 한 시대를 호령했던 인물이건만 그의 내면은 의외로 맑고 소박했다. 그러니까 이 볼품없는 계곡에 작은 정자를 짓고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했으며, 틈만 나면 인왕산이며 도봉산의 바위에 올라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던 것이다. 그가 자호(自號)한 귀록(歸鹿) 자체가 그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낸다. 사슴이란 신선이 타고 다니는 동물이다. 속세에서는 정쟁에 몰두했으나 산 속에 들면 신선이 되고자 했다. 그 간절함이 오죽했으면 ‘사슴이 돌아오는 계곡과 산(歸鹿溪山)’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저리 깊이 새겼겠는가.
시루봉 기슭의 바위글씨들과 동악의 별서터
비는 그칠 기색을 내비치지 않는다. 일행들 역시 날이 개일 것이란 기대 따위는 접어둔지 오래다. 형형색색의 우비를 걸치고 우산을 든 일행들이 시루봉 자락의 산허리를 휘감아 도는 모습이 그 또한 장관이다. 산모롱이를 돌아드니 묘지들이 산재해있다. 대개 십자가가 그려져 있고 성(聖) 아무개라고 새겨져 있는 묘비석들을 갖추고 있다. 이곳의 공식명칭은 ‘천주교 혜화동성당 방학동묘원’인데 흔히들 줄여서 ‘천주교 묘지’라고 부른다.
앞서 걷던 조장빈이 돌연 멈추어 서더니 이 근처에서 바위글씨를 찾아보라 한다. 조금 전에 살펴보았던 귀록정터만큼이나 작은 물줄기가 졸졸 흘러내리는 곳이다. 독립된 계곡이라 부르기엔 규모가 너무 작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일행들이 포기를 선언할 즈음 조장빈이 한 바위를 가리킨다. 거기 거짓말처럼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 단아한 예서체가 빛을 발하는 연월암삼폭(延月巖三瀑)이다.
연월암이란 ‘달맞이 놀이를 하는 바위’라는 뜻이고 ‘삼폭’이란 물론 세 줄기의 폭포를 뜻한다. 이 바위글씨 아래로 작은 낙폭의 물줄기가 흐른다. 폭포라고하기엔 너무 초라하다. 나머지 두 줄기의 폭포도 위아래에 산재해 있다. 언제 누가 새긴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곳에서 조금 더 발품을 팔면 두 개의 바위글씨를 더 볼 수 있다. 바로 와폭(臥瀑)과 계수석(溪水石)인데, 계수석의 계(溪)자 부근 바위가 조금 부서져 있다. 역시 그 유래는 확인할 수 없다.
이곳 천주교 묘지 일대의 너른 땅은 본래 능성구씨의 소유였다. 양모(養母)를 여의고 난 다음 이곳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던 동악 이안눌(1571-1673)이 이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는다. 그의 양모가 능성구씨 출신이었던 것이다. 훗날 정조시대의 문신 서명응에 의하여 시신(詩神)이라고까지 칭송 받았던 동악은 성당풍(盛唐風)의 기조를 띠었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이자 문신이었다. 저 유명한 남산의 ‘동악시단’을 이끌었던 바로 그 동악이다.
우리는 천주교 묘지의 한 귀퉁이에서 동악 이안눌의 별서가 있었다고 추정되는 곳을 찾는다. 현재에는 일반 천주교신자였던 조요셉 님의 묘소가 들어서 있는 곳이다. 동악의 별서터임을 증명할만한 유물들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제작연대를 가늠할 수 없는 바위 바둑판만이 묘소의 한켠에 박혀있을 뿐이다. 바둑판에 새겨진 19칸의 금마다 종일 내리는 빗물이 그득하다. 옛사람들의 풍류와 세월의 무상함이 가슴에 저며든다.
이제 천주교 묘지를 벗어나 우향우를 한 다음 마지막 바위글씨를 감상하려 발길을 옮긴다. 바로 풍천장어로 유명한 ‘장어명가’와 ‘카페 306’ 아래의 자그마한 바위에 새겨진 명월동문(明月洞門)이다. 이 역시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금 전에 감상한 ‘연월암삼폭’과 연결하여 상상해볼 때 이 일대가 달맞이 명소로서 매우 유명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멋진 해서체로 휘갈겨 쓴 글씨는 누가 보아도 명필의 작품이다.
겸재 정선은 어디에 누워있는가
이번 인문산행의 단초를 제공해 준 것은 손암 정황(1735-미상)의 그림 [양주송추(楊洲松楸)](겸재정선미술관 소장)다. 손암은 누구인가? 바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손자다. 오래 전의 한 미술평론가는 이 그림을 두고 “경기도 양주의 송추에서 바라본 도봉산과 북한산을 그린 것”이라고 해설했다. 그리고 이 잘못된 견해는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어 정설처럼 굳어져왔다.
하지만 도봉산과 북한산의 지형지세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그림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림의 왼편에 묘사된 것이 북한산이고, 그림의 오른편에 묘사된 것이 도봉산이다. 인수봉의 귀바위는 북한산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형상이다. 그림의 왼편 바위 위에 그 귀바위의 모습이 뚜렷하다. 만약 이 그림이 “송추 쪽에서 바라본 도봉산과 북한산”이라면 귀바위가 그려진 북한산은 오른쪽에 묘사되어 있어야 한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그림과 같은 구도로 도봉산과 북한산을 바라보려면, 우리는 경기도 송추가 아니라 서울시 도봉구에 있어야 한다. 현재 덕성여대 캠퍼스가 들어서 있는 쌍문동 즈음이다. 그렇다면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견해의 오류는 무엇인가? 첫째, 양주를 너무 좁게 해석했다. 예전에는 양주의 범위가 넓었다. 현재의 도봉구도 대부분 양주에 속해있었다. 둘째, 송추란 현재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대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일반명사로서 ‘조상의 선영이 있는 곳’을 뜻한다.
송추(松楸)의 송(松)은 소나무이고 추(楸)는 개암나무 혹은 가래나무인데, 본래 묘지 부근에는 이 두 종류의 나무를 심는 것이 정석이다. 따라서 [양주송추]란 “양주에 있는 선영의 묘지”를 그린 것이다. 이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우리는 전율했다. 이 그림은 바로 손자인 손암이 조부인 겸재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를 그려놓은 것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4개의 묘소와 성묘를 마치고 돌아가는 일행의 모습도 보인다. 게다가 이 그림은 진경산수화이니 이제 겸재의 묘소를 찾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난 해 한국산서회의 월례회의에서 조장빈이 이 주제에 대한 연구발표를 한 이후 우리는 뻔질나게 도봉산 일대를 뒤졌다. 겸재의 사후 무려 250여년이 지난 다음, 그의 손자인 손암이 그린 [양주송추]의 진경산수화를 마치 보물지도처럼 손에 들고서. 그의 그림이 워낙 사실적이어서 묘소의 위치를 비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자부심에 가득 차서, 일반 참가자들에게 겸재가 마지막으로 누운 곳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그곳은 북한산둘레길의 왕실묘역구간과 가깝다. 현재의 우이그린빌라 위쪽의 작은 능선에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도봉구 쌍문동에 속한다. 우리가 비정한 묘소의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멋진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동네 사람들의 휴식처가 된 듯 허름한 의자들도 너댓 개 널려있는 아늑한 공간이며, 북한산을 바라보는 전망이 탁 트인 멋진 곳이다. 아마도 겸재 역시 살아생전에 자신의 유택을 이곳으로 정한 다음 흐뭇해했을 것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고 있는 비로 시야가 흐리다.
사전답사를 왔을 때 우리는 이곳에서 겸재에게 술을 한잔 올렸다. 그의 묘소를 찾게 해준 손자 손암에게도 연거푸 술을 올렸다. 언젠가는 이곳에 겸재를 위한 기념관이나 박물관이 들어섰으면 좋겠다는 단꿈도 꾸었다. 참가자들에게 우리의 포부를 전하자 모두들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궂은 날에도 아무런 불평 없이 여기까지 동행해준 참가자들 모두에게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준 것에 대하여 겸재가 표하는 기쁨의 눈물인양 빗줄기는 여전히 잦을 줄을 모른다.
월간 [사람과 산] 2018년 6월호
첫댓글 후기 감사합니다. 빗길에 나름 즐거웠고 6월 2일에 또 뵙겠습니다.
후기를 읽으며 다시 복습~~~ㅎㅎㅎ
자세히 후기를 적어 주신 덕분에 우중산행한 그날이 새롭네요 많은것을 배우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백데이터가 막강하네요~^^*
즐겁게 감상합니다. 수고 많았습니다.
맨 아래의 사진은 본문 내용에 나오지 않습니다
귀록정터에서 잠시 평지로 내려와서 들린 '간송옛집'입니다
최근에 일반에게 공개하였습니다
우이 그린빌라 위쪽에 있다는 4기의 묘터가 큰 길에서 멉니까? 언제 내가 현장에서 정밀조사를 해봐야 겠습니다. 누가 날짜를 잡아 안내 좀 해주십시오! 그 날 식사는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만약 겸재의 진영을 찾아낸다면, 실로 대사건입니다.
@半山 韓相哲 16년 연말에 산서회에서 발표했던 자료입니다. 4개의 원이 가족묘임을 족보에서 찾아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실제 묘는 현장에 없습니다. 추정지도 주택이 들어섯습니다.
다만, 묘소 추정지 바로 위쪽 능선이 아직 자연 상태 공간이 있어 이 근방으로 표석이라도 세웠으면 합니다. 여러 사람이 관심두고 있고 다시 학계 분들과도 상의해 보겠습니다.
사진 제6번 '연월암삼폭'은 참 잘 쓴 글씨인데요? 혹 영(迎-맞이할) 자가 아닌지오? 눈이 나빠 제대로 감별할 수 없습니다.
영이 아니라 연이 맞습니다
따로 사진을 올려드리려 하는데 잘 안 올라가네요
@심산 새로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현장 확인이 더 중요하지오?
延月이라는 용어는 잘 쓰지 않아,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달을 맞이한다'는 뜻이라면, 영월이 맞는데...
인터넷에도 延月巖이라고 되어있군요? 최초 번역자가 잘 못 하게 되면, 계속 오류를 범합니다. 서예가들이 민책받침(廴 )과, 책받침( 辶)가끔 혼용해 쓰기도 합니다만, 글 쓴 이의 의도로 보아서는 迎月巖 쪽을 지지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검색은 하되, 신뢰는 하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전고를 근거로 소신대로 풀이합니다.
한이사님 말씀 잘 새겨듣겠습니다
그런데 '연월암삼폭'은 인터넷에서 찾은 것이 아니고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기획하고 박경룡 이태호 이완우 이종묵 등이 전시자문을 맡았으며
사종민 박상빈 서주영 등이 진행했던
[바위글씨전] 도록(서울역사박물관, 2004)에서 확인한 것입니다
네! 박경룡(사, 서울역사문화포럼 회장, 같은 회원), 이종묵, 사종민 등 제씨를 저도 잘 알 뿐더러, 그 분들의 실력도 가늠하고 있습니다. 그들 역시 인터넷 상 잘못 된 글을 계속 인용합니다. 그 중 일부는(위글 말고도) 남의 글을 베끼면서, 마치 자기가 연구한 것인양, 강의, 발표하기도 합니다...
글자체가 전서인지 예선지도 잘 모르는데..ㅠ.
이사님. 영이던 연이던 공부는 의심에서 시작되니 새겨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위글씨와 예서 자전 용례 찾아 올립니다.
글씨는 100 % 예서체입니다. 오른 쪽 正자 비슷한 것으로 봐, 얼핏 延 자로 보이나, 迎 자 책받침 안, 병부 절 (卩) 자(부수)도 2획이라. 점 두 개로 대신합니다. 소장한 서도 '육체대자전'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저는 손가락에 장을 지져도, 맞을 '迎' 자로 확신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延月'이란 어휘가 그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半山 韓相哲 용례 보고 그려서 맞추는 것도 어렵습니다. ㅠ
고전 DB에 延月의 사용례는 延月樓 등 몇 보입니다.
이사님 의견 참고 하겠습니다.
@조장빈 혹 연월루 현판 사진이나, 시문이 있다면 전체를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없다면, 그 용례조차 불신합니다.
@半山 韓相哲 初秋索居漫詠
居士生涯有老妻。短簷低屋似鷄棲。散材自幸全樗櫟。麤飯何曾厭藿藜。積雨乘秋仍漠漠。晩涼 "延月" 乍凄凄。平生不作朱門客。免踏長安十日泥。
-출처:장유의 계곡집
양촌집에 "창 앞에 달 맞아 밤이 서늘하고 / 窓前夜涼延月華" 등 예가 있기는 합니다.
원문 또한 확인했습니다.
@半山 韓相哲 위 계곡집 시 원문의 "연"입니다.
@조장빈 하하! 조 이사는 문제의 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군요? 延 자 글자 하나의 출처는 아무런 의미기 없습니다. 모든 글자는 字典에 다 있습니다. '延月'이란 뜻이 과연 무엇이며, 그 용어가 어디에 어떻게 쓰였느냐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뜻도 모르고 쓰는 단어란 이 세상에 없지 않습니까? ㅋㅋ
@半山 韓相哲 연월의 사용 예는 위 두 시로 제시했고 계곡집 시의 "연"자 부분을 올렸습니다. 간혹 고전 DB도 원문과 국역 부분이 틀린 경우도 있어서요. 확실히 원전을 올린검니다요.
@조장빈 여기 시문에 나오는 延月의 뜻은 '달이 지나도', 혹은 '달을 넘기고도' 의 뜻입니다. "창 앞의 밤기운이 서늘함은 달이 지나도(달을 넘겨도) 빛나고"..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연월'이라는 의학용어는 있습니다. 달을 넘겨 태어난 아이, 혹은 달을 끌면서 질질 앓는 자 등. 그러나 암각문에 있는 '연월암삼폭'은 그런 뜻이 아니라 봅니다. 이제 끌 延 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지오? 그래서 더 더욱 延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전에 나오는 月은 '하늘의 달'이 아니고, 날짜의 기간 즉. 한 달, 두 달 등 세월을 의미합니다. 참고로 한국고전번역원의 오류를 여러번 지적했습니다.
@半山 韓相哲 그렇게 국역이 되니 시의 맛이 더 나는 것 같습니다.
계곡집은 "서늘한 저녁 떠오른 달 처량한 느낌 더하누나 / 晚凉延月乍凄凄"으로
아정유고에 "달을 맞아 이야기는 무르익네 / 延月話頭濃"로
문곡집에 "젓대를 불며 저녁을 전송하고 밝아 오는 달을 맞이하다(橫笛送晩延月明)로
"맞이하다"라는 국역에 대해 모두 다시 의미를 살펴야 겠네요.
고전 D/B의 국역예를 나열했습니다.
공부하는데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고전을 읽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념하겠습니다.
@조장빈 1. 서늘한 저녁은 (달을 넘기니. 세월이 지나니) 잠깐씩 서글퍼지고 2. 달을 끌(넘길)수록 화두(얘기)는 짙어지고 (무르익고)3. 문장구성으로 봐, 영월명(迎月明)이 맞습니다, 왜나 하면 앞 절에 송만(送晩)이 있기에. 시문은 이치에 맞아야 하고, 對(보낼 송, 맞을 영)가 있어야 합니다. 피리 불며 저녁을 송별하고(보내고) 맞이한 달 밝으리. 혹은, 밝은 달을 맞이하네 등으로 풀이...수강료 툭톡히 내야 겠습니다. ㅋㅋ
연 용례
영 용례
아니? 밤 사이에 이렇게 많은 댓글이!
한이사님 장을 지지실 필요까지야 없습니다 ㅎㅎ
한이사님 고견 충분히 받아들입니다
영월암으로 읽을 수도 있다...정도로 기억해두겠습니다
항상 좋은 의견과 격려를 해주시어 감사합니다!
손암의 '양주송추'도에 대해서는 이 그림이 세상에 알려진 80년대 초 부터 겸재의 묘역을 그린 그림이라는게 학계에 정설이구요. 송추(유원지)에서 그린 그림이라는 미술계 분이 어떤 분인지 궁금합니다. 그림이 세상에 알려진 즈음 현장을 방문하고 83년 정확하게 정선의 묘역도이고 현장을 방문했던 논문을 발표한 이태호 교수가 글과, 다시 40여년만인 2017년에 '서울 산수'에 실린 글을 보시면 도움이 되실듯...
형님. 오랜만입니다.
묘소일 것이라 추정한건 알고 있으나 동그라미 4개가 누구 묘소인지 정확하게 논문에 나와있나요. 논문 내용 올려주심 감사하겠습니다.
서울산수는 자세한 내용없이 추정이더만여.
@조장빈 옛 것을 찾으려는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고 앞서간 분들도 계시지요. 이런 것들이 모아져야하는데... 무려 35년전에 겸재의 묘역도이다 하는 걸 처음이다 하는 글이 보기 민망해 감히 글을 올렸네요.
몇년전 겸재묘 답사 시작할때 보내드린 논문 다시 보셔요. 부족하면 이태호 교수 다른 글도 보내드릴게요..
양주송추도가 누구나 탁보면 어딘지 아는 그림인지라 그리 찾으셨다는데...
굳이 찾으려 몇년을 헤맨 내용을 와운루 2호에 실었으니... 참고하시구요.
@홍하일 네. 댓글 감사합니다.
족보는 저도 봤구여. 논문 내용을 볼 수 없을까요. 아니면 논문 제목이라도...
@조장빈 http://news.joins.com/article/1699940
묘소 추정지는 서로의 의견을 이야기하면 될듯요. 여기다하는 거 말고... 인근 초암산처럼 발굴 조사하면 좋은데... 언제 보고 이야기하던지 글로 발표해주셔요. 와운루2호가 제 답입니다.
@홍하일 네. 고 이석우교수님 뵜을 때 말씀하시더라구여. 링크건 기사도 봤구여.
형님 말마따나 묘소 위치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제가 확인한건 동그라미 넷이 정선외 누구누구의 묘 임을 확인한 검니다. 추정과 논거 제시는 다른거라 봅니다.
이태호교수 뿐만이 아니고 학계에선 추정을 했지요. 족보에 계성리라고 나와 있고 동그라미가 묘일 가능성이 있다고요.
하지만 동그라미 네 개가 누구 묘인지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지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태호 교수 논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추정만했는지. 논거가 확실한지.
암튼, 글 감사합니다.
좋은 휴일 되세여.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동그라미 네개의 묘에 대해서 2016년 하반기쯤 산서회 모임에서 설명을 들었는대 정선묘 관련된 논문중에서 동그라미 네개의 묘소 주인관련 논문이 있다면 조장빈선배의 예전에 밝힌 내용과 더불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논증이 되겠네요~~ 정식논문이 있으면 겸재정선묘 복원계획에 큰힘이 되겠네요^^
연월암삼폭의 연이냐? 영이냐? 대화가 재밋네요.저 글자을 가지고 바라보고 해석하는 여러 쟝르나 문구 문장 글의깊이에 따라 연도 되고 영도 될듯 하네요~~ 타인의 글이나 남의 학문을 우선 긍정으로 생각해서 왜 저렇게 해석되지가? 먼저인것 같읍니다.서로 이견이 생기면 상대방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삼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논증해보면 더더욱 보는 재미가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