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문학회 평창문예대학 제 7 호(2014.04.30.)
나눔 마당 - 名詩 ‧ 名文 감상
푸른 五月
靑磁빛 하늘이
육모정 塔위에 그린 듯이 곱고
연당 창포 잎에-----
女人네 행주치마에-----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 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같이 앉는 正午
계절의 女王 오월의 푸른 女神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 밀려드는 것을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데 하늘은 본다
긴 담을 끼고 외진 길을 걸으면
생각은 무지개로 핀다.
풀냄새가 물큰
향수보다 좋게 내 코를 스치고
청머루순이 뻗어나던 길섶
어디선가 한나절 꿩이 울고
나는 활나물 가잎나물 젓갈나물
참나물 고사리를 찾던-----
잃어버린 날이 그립구나 나의 사람아
아름다운 노래라도 부르자.
아니 서러운 노래를 부르자.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종달이 모양 내 맘은
하늘 높이 솟는다.
오월의 창공이여
나의 태양이여
이름 없는 여인 되어
어느 조그만 山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女人이 되고 싶소
草家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薔薇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慾心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오
汽車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山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女王보다 더 幸福하겠오
산나물
먼지가 많은 큰길을 피해 골목으로 든다는 것이 걷다 보니 부평동(富平洞) 장거리로 들어섰다. 유달리 끈기 있게 달려드는 여기 장사꾼 ‘아주마시’들이 으레, 또 “콩나물 좀 사 보이소. 예, 아주머니요, 깨소금 좀 팔아 주이소.” 하고 잡아당길 것이 뻔한지라 나는 장사꾼들을 피해 빨리빨리 달아나듯이 걷고 있었다.
그러나 내 눈은 역시 하나하나 장에 난 물건들을 놓치지 않고 눈을 주며 지나는 것이었다. 한 군데에 이르자 여기서도 또한 얼른 눈을 떼려던 나는 내 눈이 어떤 아주머니 보자기 위에 가 붙어서는 안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보자기에는 산나물이 쌓여 있었다. 순진한 시골 처녀 모양 장돌뱅이 같은 콩나물이며 두부, 시금치 들 틈에서 수줍은 듯이 그러나 싱싱하게 쌓여 있는 것이었다. 얼른 엄방지고 먹음직스러운 접중화를 알아봤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산나물들을 또 볼 수 있었다.
고향 사람을 만날 때처럼 반가웠다. 원추리-접중화는 산소들이 있는 언저리에 많이 나는 법이겠다-봄이 되면 할미꽃이 제일 먼저 피는데 이것도 또한 웬일인지 무덤들 옆에서만 잘 발견이 되는 것이었다.
바구니를 가지고 산으로 나물을 하러 가던 그 시절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던 일이다. 예쁜이, 섭섭이, 확실이, 넷째는 모두 다 내 나물 동무들이었다.
활나물, 고사리 같은 것은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만 꺾을 수가 있었다. 배암이 무섭다고 하는 나한테 섭섭이는 부지런히 칡 순을 꺾어서 내 머리에다 갈아 꽂아주며, 이것을 꽂고 다니면 뱀이 못 달려든다 하는 것이었다.
산나물을 하러 가서는 산나물만을 찾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산 저 산으로 뛰어다니며 뻐꾸기를 잡고 싱아를 캐고 심지어는 칡뿌리도 캐는 것이었다. 칡뿌리를 캐서 그 자리에서 먹는 맛이란 또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꿩이 푸드덕 날면 깜짝들 놀라곤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산나물을 뜯던 그 그리운 고향엔 언제나 가게 되려는 것이냐.
고향을 떠난 지 30년. 나는 늘 내 기억에 남은 고향이 그립고 오늘처럼 이런 산나물을 대하는 날은 고향 냄새가 물큰 내 마음을 찔러 어쩔 수 없이 만들어 놓는다. 산나물이 이렇게 날 양이면 봄은 벌써 제법 무르익었다. 냉이니 소루쟁이니 달래는 그러고 보면 한물 꺾인 때다.
산나물을 보는 순간 나는 이것을 사가지고 오려고 나물을 가진 아주머니 앞으로 와락 다가서다가 그만 또 슬며시 뒤로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각을 해 보니 산나물은 맛이 있는 고추장에다 참기름을 치고 무쳐야만, 여기다 밥을 비벼서 먹을 맛도 있고 한 것인데 내 집에는 고추장이 없다. 그야 아는 친구 집에서 한 보시기쯤 얻어올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고추장을 얻어서 나물을 무쳐서야 그게 무슨 맛이 나랴. 나는 역시 싱겁게 물러서는 수밖엔 없었다.
진달래도 아직 꺾어보지 못한 채 봄은 완연히 왔는데 내 마음 속 골짜기에는 아직도 얼음이 안 녹았다. 그래서 심경은 여지껏 춥고, 방 안에서 밖엘 나가고 싶지가 않은 상태에서 모두가 을씨년스럽다.
시골 두메 촌에서 어머니를 따라 달구지를 타고 이삿짐을 실리고 서울로 올라오던 그때부터 나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내쫓긴 것이다. 그리고 칡 순을 머리에다 안 꽂고 다닌 탓인가, 배암은 내게 달려들어 숱한 나쁜 지혜를 넣어주었다.
10여 년 전 같으면 고사포(高射砲)를 들이댔을 미운 사람을 보고도 이제는 곧잘 웃고 흔연스럽게 대해 줄 때가 있어, 내가 그 순간을 지내놓고는 아찔해지거니와 풍우난설(風雨亂雪)의 세월과 함께 내게도 꽤 때가 앉았다. 심산(深山) 속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연의 품에서 그대로 퍼질 대로 퍼지고 자랄 대로 자란 싱싱하고 향기로운 이 산나물 같은 맛이 사람에게도 있는 법이건만 좀체 순수한 이 산나물 같은 사람을 만나기란 요즈음 세상엔 힘 드는 노릇 같다.
산나물 같은 사람은 어디 없을까? 모두가 억세고 꾸부러지고 벌레가 먹고 어떤 자는 가시까지 돋쳐 있다.
어디 산나물 같은 사람은 없을까?
─ 1953.3.25. 부산 피난지에서
<한국의 명문장 100선에서>
노천명(1912.9.2~1957.12.10.) 황해도 장연(長淵) 출생. 진명학교(進明學校)를 거쳐, 이화여전(梨花女專) 영문학과를 졸업. 이화여전을 다닐 때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 졸업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每日申報)》 기자, 8·15광복 뒤에는 《서울신문》 《부녀신문》에 근무. 6·25전쟁 때는 미처 피난하지 못하여 문학가동맹에 가담한 죄로 부역 혐의를 받고 일시 투옥.
이화여전 재학 때인 1932년에 시 〈밤의 찬미(讚美)〉 〈포구(浦口)의 밤〉 등을 발표, 그후 〈눈 오는 밤〉 〈사슴처럼〉 〈망향(望鄕)〉 등 주로 애틋한 향수를 노래한 시들을 발표. 1938년 초기의 작품 49편을 수록한 제1시집 《산호림(珊瑚林)》을 출간. 1945년 2월에 제2시집 《창변(窓邊)》을 출간하였는데, 여기에는 향토적 소재를 무한한 애착을 가지고 노래한 〈남사당(男寺黨)〉 〈춘향〉 〈푸른 5월〉 등이 수록되어 있음. 제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에는 부역 혐의로 수감되었을 때의 옥중시와 출감 후의 착잡한 심정을 노래한 시들을 수록. 그밖에 수필집으로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生活白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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