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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병
서론
그리스도교다운 의미에서의 죽음은 절대로 모든 것의 최후가 아니며, 모든 것을 포함한 영원한 생명의 내부에 존재하는 하나의 작은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다운 의미에서는 단순히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생명이 있다는 것보다도 더 많은 건강과 힘을 죽음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p.189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인에게, 죽음을 포함한 모든 지상의 것, 즉 세속적인 모든 것을 이처럼 초연히 생각하도록 가르쳐 왔다. 사람들이 흔히 불행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가장 큰 재앙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리스도교인이 이처럼초연히 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오만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정도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인간인 한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비참함이 현실에 있음을 발견했는데, 이 비참함이 바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pp.189~190
제1편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절망을 말한다
제1장 절망이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A. 절망은 정신병, 자기 자신에게 있는 병으로서, 거기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절망해서 자신이 자신의 소유자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즉, 본질과는 거리가 먼 절망).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지 않는 경우,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는 경우
본질적인 절망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게 된다. 먼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조정한 결과로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자기 자신이기를 바라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할 뿐인 것이다. p.192
오직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절망을 없애려고 한다면, 그때 그는 여전히 절망 속에 빠져 있게 되어, 자기로서는 전력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도 노력하면 할수록 그만큼 점점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어갈 뿐이다. p.192
B. 절망의 가능성과 현실성
절망은 장점일까? 단점일까? 변증법적으로 말해서 확실히 절망은 그 어느 쪽도 다 갖고 있다. p.193
이 장점은, 인간은 정신이라고 하는 무한히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병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동물보다 뛰어나다는 증거이다. ... ... 이처럼 절망할 수 있다는 것은, 끝없는 장점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요 비침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파멸이다. 보통 가능성의 절망과 현실성의 절망은 서로 다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것이 하나의 장점이라면, 저것은 현실에서 더욱더 큰 장점인 것이다. 즉, 현재 그러하다는 것은 그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비해 상승하는 관계에 있다. 이에 반해서 절망의 경우는 현재 그러하다는 것은, 그러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비해 하강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가능성의 장점이 무한이듯이, 하강 또한 마찬가지로 무한히 그 밑바닥이 깊은 것이다. p.193
절망이란 종합인 인간 그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이다. ... ... 종합 속에는 분열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만일 종합 그 자체가 분열한다면, 절망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때의 절망은 인간의 본성 안에 숨어 있는 어떤 것이 되고 말 것이다. p.194
절망은 어디에서 올까? 종합이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 ... 그 관계가 정신이자 자기이기 때문에 책임이 생기게 되는데, 모든 결정은 이 책임 아래에 있는 것이고, 절망이 있는 한 그 모든 순간은 이 책임 아래에 있는 것이다. p.194
분열이 지속하는 것은 분열의 결과가 아니고,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의 결과인 것이다. 즉 분열이 나타날 때마다, 또 분열이 현존하는 순간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 환원되어야 한다. p.195
절망의 모든 현실적 순간은 가능성으로 갈음할 수 있는 것이다. 절망하는 이는 절망하는 순간마다 절망을 스스로 계속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절망은 끊임없이 현재라는 시간에서 생겨난다. p.195
절망한다는 것이 정신의 규정으로서 인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에 관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원한 것에서 인간은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 p.195
절망이 분열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그 본디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관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그 자신과의 관계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 자기란 자기 자신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이는 결국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p.196
C.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만일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말의 죽음이고, 죽음이 결말인 것과 같은 경우의 병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 병이야말로 바로 절망이다. p.196
절망의 고뇌는 진실로 죽을 수 없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절망은 누워서 죽음과 싸우면서도 죽을 수 없는 죽을병에 걸려 앓고 있는 상태와 비슷하다. p.196
더욱 무서운 위험을 알게 될 때 사람은 죽음을 바라게 된다. 이렇게 해서 죽음을 희망으로 생각하게 될 정도로 위험이 클 때, 그때의 절망이 바로 죽을 수조차도 없다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절망인 것이다. 그러면 이 마지막이라는 의미에서의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p.197
절망이라는 것은 바로 자기를 녹여 없애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스스로가 바라는 것을 이룩할 수 없는 무력한 자기를 녹여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절망 스스로가 원하는 그것은 절망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 무력함이 자기를 녹여 없애는 하나의 새로운 형태가 된다. 그러나 이 형태에서의 절망은 그가 하고자 하는 것, 즉 자기자신을 녹여 없애는 욕망 앞에 무력하다. 그것은 절망의 곱절이며 제곱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것은 절망에 불붙이는 것, 또는 절망 속의 차가운 불길이며,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로 파고 들어가 점점 더 무기력해지는 자기 소모이다. pp.197
~198
절망하는 자가 무슨 일에 절망했다는 것은 사실 자기 자신에게 절망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p.198
자기에게 절망한다는 것,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모든 절망의 공식이다. 따라서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절망의 제2형태는 절망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제1형태로 환원될 수 있지만, 우리는 앞에서,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는 형태를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형태로 회귀시켰다. 절망하는 자가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면, 그는 본디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기를 바라지 않는게 아닌가. p.199
이렇게 해서 자기 내부의 병인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인 것이다. 절망하는 이는 죽음의 병에 걸려 있다. 보통 인간의 병에 대해서 일컫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됨으로써, 이 병은 인간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침범한 셈인데 따라서 그는 죽을 수 없다. 여기서 죽음은 병의 결말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끝없이 이어지는 마지막인 것이다. 죽음으로써 이 병으로부터 구원받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병과 그 고뇌는, 다시 말해 죽음은 죽을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읻. pp.200~201
그러므로 영원은 틀림없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큰 양보요, 무한의 타협이며, 동시에 영원성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201
제2장 이 병(절망)의 보편성
절망해 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인간은 적어도 그리스도교 외부에서는 일찍이 한 사람도 살고 있던 적이 없었고, 또 현재도 살고 있지 않다. 또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참된 그리스도교인이 되지 않는 한, 한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참된 그리스도교인이 되지 않는 한 결국 어떤 의미에서든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pp.201~202
절망은 완전히 보편적이다. 사람이 절망하고 있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이 진실로 절망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드문, 희귀한 일이다. ... ... 이 통속적인 고찰은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점은 완전히 놓치고 있다. 즉, 이 고찰은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것이 곧 절망의 한 형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p.202
사람은 절망을 가장할 수도 있고, 또 잘못 생각한 나머지 정신의 규정인 절망을 불쾌함이라든지 상심과 같은, 절망까지는 가지 않고 지나가 버리는 갖가지의 일시적인 기분과 착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심리학자라면 물론 그런 기분 또한 절망의 한 형태임을 알게 된다. p.203
인간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사랑스러운 것까지, 즉 평화와 조화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젊은 여성조차 절망이다. 이는 행복한 것이지만, 행복은 정신의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복의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의 깊고 깊은 내부에, 그것도 그 속 깊숙한 곳에는 절망 말고 또 불안이 살고 있는 것이다. 절망은 그런 깊숙한 곳을 즐겨 찾는다. 행복이 있는 깊숙한 곳, 이곳이야말로 절망으로서는 가장 사랑하고 간절히 바라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p.205
반성은 그의 함정을 무에서 만들어 내는 경우보다 더 확실히 목표물을 손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고, 또 반성은 자기가 무인 경우보다 더 자기 자신일 수는 없다. 무에 근거한 반성, 즉 무한한 반성을 견디어 낼 수 있기 위해서는 뛰어난 반성,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굳건한 신앙이 필요하다. p.206
제3장 이 병(절망)의 여러 형태
자유는 변증법적인 것으로, 가능성 및 필연성이라고 하는 규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절망은 의식이라는 규정 아래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절망이 의식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절망과 절망 사이의 질적인 차이이다. pp.208~209
의식이 증가하면 그만큼 자기도 증가하고, 자기 의식이 증가하면 그만큼 의지가 증가하고, 의지가 증가하면 그만큼 자기가 증가하는 것이다. 의지를 조금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자기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의지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만큼 또 많은 자기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p.209
A. 절망을 의식하고 있느냐 하는 점은 반성하지 않고 고찰된 경우의 절망, 따라서 여기서는 종합의 여러 계기만 문제로 삼는다.
a.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규정 아래에서 고찰한 절망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지 않는 한 자기는 자기 자신일 수 없고, 아직 자기가 가능성의 자기 자신일 수 없다고 하는 그것이야말로 절망이다. p.210
α. 무한성의 절망은 유한성을 자지지 못하는 것이다.
단순히 무한이고자 하는 순간순간은 절망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종합이고, 이 종합에서 유한한 것은 한정하는 것이고, 무한한 것은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한성의 절망은 공상적인 것이고 한계가 없는 것으로서, 자기는 정말 절망했다고 하는 그것 때문에 투명하게 신 안에서 자기 자신의 근거를 찾게 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건강하며 절망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p.210
β. 유한성(현실성)의 절망은 무한성(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일반적인 고찰은 언제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별에만 집착하고, 그러기에 마땅한 것이기도 하지만, 유일하게 필요한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또 편협함과 고루함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와 같은 것인데 그것도 무한한 것 속에서 희박하게 되기 때문이 아니고, 정적으로 유한하게 되는 것으로 해서, 다시 말해 하나의 자기가 되는 대신 하나의 숫자와도 같은 인간이 되어 이 영원히 일률적인 것에 가해지는 또 하나의 인간, 또 하나의 도돌이표가 되어 버리는 것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pp.213~214
b. 가능성과 필연성(명증성)의 규정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절망
아무런 가능성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기는 절망하고 있는 것이며, 또 아무런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기 또한 마찬가지로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p.216
α. 가능성의 절망은 필연성 결핍에 있다.
유한성이 무한성을 한정짓는 것처럼 필연성은 가능성에 맞선다. 자기가 유한성과 무한성의 종합으로 조정되어 지금부터 생성하기 위해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경우, 자기는 공상을 매개로 하여 스스로를 반성하는데, 그것으로써 무한한 가능성이 나타난다. 자기는 가능태로서 필연성인 동시에 가능성인 것이다. ... ... 자기가 자기 자신인 한 자기는 필연성이고, 자기가 앞으로의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인 한 자기는 가능성인 것이다. 그런데 가능성이 필연성을 뒤로 하고 혼자 달아나면, 자기는 가능성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된다. 이렇게 하여 자기가 돌아가야 하는 필연성을 갖지 못하게 되는데, 이것이 가능성의 절망이다. pp.216~217
가능성이라는 것은 어린애가 어떤 즐거운 일에 초대받은 것과도 같다. 어린애는 곧 그것에 정신이 팔린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는 부모가 그것을 허락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데 있다. 이때 부모에 해당하는 것이 필연성이다. p.218
가능성 속을 모든 방법으로 방황하고 돌아다닐 수 있는데, 그러나 본질적으로 두 가지 방법으로만 돌아다닐 수 있다. 하나의 형태는 갈망하고 희구하는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우울하고 공상적인 형태이다. p.219
가능성을 필연성으로 되돌리려고 하지 않고 그는 가능성의 뒤를 쫓아간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자기 자신이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p.219
β. 필연성의 절망은 가능성의 결핍에 있다.
인간의 생활에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을 때 그것은 절망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가능성이 결핍된 순간마다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인간은 특별히 풍부한 희망을 가지는 연령층이 있다고 생각한다. ... ... 그러나 이런 것은 모두 인간의 입버릇처럼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진실이 아니다. 이런 모든 희망이나 절망은 아직 참다운 희망도 아니거니와 진정한 절망도 아니다. p.219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간이 믿으려고 하는 지가 문제로 등장한다. 그러나 믿고자 한다고 하는 것은 지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나타내는 공식일 뿐이다. 믿는다는 것은 정녕 신을 알기 위해서 지성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p.220
가능성을 주면, 절망하는 이는 숨을 다시 쉬고 되살아난다. 왜냐하면 가능성 없이 인간은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이다. p.221
평범한 인간은 파멸보다는 즐거움을 바라고, 추측컨대 이러저러한 것이 어쨌든 자기 몸에 들이닥치지 않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들이 닥치면 그는 파멸해 버리고 만다. p.221
믿는 자는 인간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파멸할 것임을 알아챈다. 그러나 그는 믿는다. 그 때문에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믿는 자는 어떻게 해서 자기가 구원될 것이냐 하는 것을 완전히 신에게 맡긴다. 그리고 신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p.221
믿는 자는 절망을 영원히고 확실하게 없앨 수 있는 약을 갖고 있다. 그것은 가능성인데, 신들에게는 모든 순간에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앙이 주는 건강이요, 이 건강이 모든 모순을 푸는 것이다. 이런 경우 모순은 인간적으로 말하면 파멸이 확실하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p.222
한편 숙명론자 또한 절망하고 있고, 신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다. 신을 두고 있지 않은 자는 자기 또한 두고 잇지 않기 때문이다. p.223
기도하기 위해서는 신, 자기, 가능성이 존재해야 한다. p.223
속물근성은 무정신성이요, 결정론과 숙명론은 정신의 절망 또는 복종이다. 그러나 무정신성 또한 절망이다. 속물근성은 정신의 온갖 규정이 결핍되어 있고, 개인적인 것 속에서 시작해 끝 마치지만, 거기에는 가능성과 같은 것이 들어갈 여지가 아주 조금밖에 없다. 그래서 속물근성에는 신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이 결핍되어 있다. p.223
반대로 숙명론과 결정론은, 가능성에는 절망하지만 어쨌든 상상력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마침내 불가능성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속물근성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에 안주하고 있고, 그래서 잘살든 곤경에 처해 있든 똑같이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숙명론과 결정론에는 긴장을 완화하는 가능성, 필연성을 조절하는 가능성, 즉 완화 작용으로서의 가능성이 결핍된 것이다. p.224
B. 의식이라는 규정 아래에서 볼 수 있는 절망
의식이 증가하면 그만큼 절망의 강도도 증가하는 것이다. ... ... 악마의 절망이 최강도의 절망인 것은, 악마는 완전히 정신만의 것이며, 절대 의식이며, 투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악마 속에는 모호함이 조금도 없고, 그래서 악마의 절망은 절대 반항이며, 이것이 절망의 최고도인 것이다. p.225
의식성이 없는 것이 최고도인 경우에 절망의 정도는 가장 낮은 것으로, 그런 상태를 절망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한지 조차 의문이 들 수 있다. p.225
a. 자기가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절망 또는 자신이 자기라는 것을, 영원한 자기를 가지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 절망의 무지
이 상태가 절망이고, 또 절망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당함은, ‘좋은 의미에서의 진리의 독선’이라고 불려도 좋은 하나의 사례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진리는 그 자신과 허위를 구별짓는 지표다. 그러나 진리의 독선은 물론 사람들에게 그다지 주의를 끌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진실한 것과의 관계, 즉 자기가 진실한 것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결토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 오류 속에 있다는 것을 소크라테스처럼 가장 큰 불행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대부분의 경우, 감정적인 경우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pp.225~226
절망과 무지의 관계는 불안과 무지의 관계와 같다. 무정신의 불안은 무정신의상태에서 안심하고 있는 상태에서 무지라고 인정된다. 그럼에도 그 바탕에는 불안이 있고, 또 절망이 있는 것이니, 착각의 마력이 다하고 인간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할 그때에 밑바탕에 있었던 절망이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기가 절망하고 있음을 모르는 절망한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는 절망한 사람에 비하면 진리와 구제로부터 한걸음의 부정만큼 동떨어져 있는 것에 지나지않는다.절망, 그 자신은 하나의 부정성이고 절망에 대한 무지는 또 하나의 새로운 부정성이다. 그런데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온갖 부정성을 뽑아 나가야 한다. pp.227~228
무지하기 때문에 절망 속에 머부는 사람은, 이것이야말로 그 스스로의 파멸이지만, 절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어떤 작용으로 말미암아 지켜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절망의 손안에 몸을 맡긴 채 아주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p.228
b. 자기가 절망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절망. 이 절망은 인간 자신이 어떤 영원한 것을 간직하는 자신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서,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지 않는가, 아니면 절망하고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가의 어느 한쪽이다.
절망한 사람의 상태는 여러 가지 분위기는 갖고 있지만, 반쯤은 몽롱한 상태이다. 절망한 사람은 자기가 절망하고 있는 정도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자신이 몸에 병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 스스로 느껴서 아는 것처럼, 절망한 사람은 자신의 절망을 자기 스스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병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p.233
더 깊은 의미에서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기의 그런 행동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하는 것 등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다시 말해 온갖 모호함과 무지 속에서는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한 인식과 의지의 변증법적인 합주가 행해지기 마련이므로 인식에중점을 둔다든지, 의지에만 중점을 두든지 하면 인간의 이해는 잘못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pp.233~234
α.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원하지 않는 경우, 즉 취약함의 절망
제1의 형태는 이른바 여성의 절망이고, 제2의 형태는 남성의 절망이다. pp.234~235
1. 지상적인 것에 대해서, 또는 지상적인 어떤 개별적인 것에 대한 절망
이것은 순수한 직접성이다. 또는 어느 정도 반성을 조금 포함하는 직접성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자기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상태가 절망이라는 것에대한 자기의무한한 내적 의식은 종재하지 않는다. 절망은 단순한 수난이고 외부로부터의 압박에 굴하는 것이지 내부로부터 행동으로 아타나는 일은 없다. p.236
자기는 속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절망으로 떨어트리는 것은 외부에서 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절망은 단순한 수난이 된다. 직접인간이 그의 생명으로 삼고 있는 것, 그가 조금이라도 반성하고 있는 한 그가 특히 애착을 가지는 부분, 그것마저 어떤 ‘운명의 티격’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벗어난다. 결국 그는 불행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의 속에 있는 직접성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손상을 입는다. 그래서 그는 절망했다는 것이다. p.237
직접성 그 자체는 아주 약한 것으로서 조금이라도 ‘도를 넘친 것’이 직접성에게 내적 반성을 요구하면, 그 직접성은 즉시 절망에 떨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절망한다. 다시 말해 기묘한 전도로써 또는 완전한 자기 현혹에서 그는 그것을 절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p.237
직접적인 인간은 다른 방법에 호소한다. 즉 다른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p.239
직접성이 그 속에 반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 절망의 양상은 조금 달라진다. 거기에는 자기에 대한 의식이 어느 정조 늘어나고, 그에 따라 절망에 대한 의식과 또 그 인간의 상태가 절망이라는 것에 대한 의식도 얼마쯤 커지게 된다. 그런 인간이 자기는 절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도 의미가 조금 있다. 그러나 그 절망은 본질적으로 약함의 절망이다. 하나의 수동적 절망이고, 짐짓 자기 자신이고자 바라지 않는 것이 그 형태이다. p.240
그의 절망은 약함의 절망이요, 자기 자신에 의한 수동적 절망이고, 자기 주장에 저항하는 저항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상대적인 객관성을 띤 자기 반성의 도움을 빌려 자신의 자기를 지켜보려고 한다. p.241
그는 자기 자신이 모든 외적인 ‘추상‘에 의한 획득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자기는 외투를 즐겨 입는 직접성의 자기와는 반대이다. 벌거벗은 맨발의 추상적인 자기, 무한한 자기의 최초 형태가 있고, 그런 자기에게는, 현실적인 자기를 온갖 단점 및 장점과 함께 무한히 떠맡는 모든 과정에서의 추진력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절망한다. 그리고 그의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물론 그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p.241
세속과 관련된 것에 관한 절망, 또는 세속과 관련된 어떤 것에 관한 절망은 가장 일반적인 종류의 절망이다. 특히 어느 정도의 부분적 자기 반성만을 동반한 제2형태의 직접적인 절망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절망이 반성된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런 절망은 차츰 드물게밖에 볼 수 없고, 또 그런 절망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도 점점 드물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은 특히 깊은 절망에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지, 그들이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pp.243~244
노인의 절망과 청년의 절망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은 본질이 아닌 아주 우연한 것이다. 청년이란 미래 속에 현재를 두듯이 미래의 것에 절망한다. 거기에는 그가 자기 몸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미래의 것이 있어서, 그 때문에 그는 ‘그’자신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노인은 과거 속 현재를 두듯이 과거의 일에 절망하지만, 그 일은 점점 더 과거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 pp.247~248
그런데 그런 청년의 절망과 노인의 절망은 본질적으로는 같다. 그들 중 어느 쪽도, 자기 내부의 영원한 것을 의식하여 절망을 좀더 높은 형태에 까지 높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신앙으로 인도하든지 하는 싸움을 일으키는 식으로 형태가바뀌지는 않는다. p.248
2. 영원한 것에 대한 절망,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
세속과 관련된 것에 대한 절만, 또는 세속과 관련된 어떤 특성의 것에 대한 절망이 절망인 한, 사실 그런 절망들은 또한 영원한 것에 대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기도 하다는 것은,이것이 모든 절망의 정식이기 때문이다. p.249
전자의 형태가 약한 의식을 마지막 의식으로 가지고 있는데 비해, 이 경우의 의식은 그 의식에 근거해 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의 약함을 의식한다는 새로운 의식으로 강화되고 있다. ... ... 그런데 그는 자기가 약한데도, 거기에서 방향을 절망에서 벗어나 신앙으로 바르게바꿔 신 앞에 무릎을 꿇으려고는 하지 않아 더욱 절망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자기의 약함에 절망하는 것이다. p.250
그래서 바로 이런 결과가 그에게는 그가 영원한 것과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하는 절망적인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승이 있다. 먼저 자기 의식의 상승이 있다. p.250
이 절망은 앞에서 말한 절망보다는 질적으로 더 깊은 것으로서, 세상에서는 드물게 보는 절망에속한다. 앞에서 배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장막 이야기를 하였지만, 이런 절망 상태에 놓인 자기야말로 정말 철저하게 보이지 않는 장막이며 그 배후에 자기가 앉아서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데 시간을 보내느라 열심인 것이다. 게다가 그 자기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의 자기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밀폐라고 부른다. ... ... 이것은 직접성의 정반대이며, 특히 또 사고방식으로 볼 때에는 직접성을 크게 경멸하는 것이다. p.251
β.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욕구하는 절망-반항
α의 2항에서 서술한 절망은 자기의 약함에 관한 절망이었다. 다시 말해 절망한 사람이 자기 자신이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p.256
최초에 세속과 관련된 것, 또는 세속과 관련된 어떤 것에 관한 절망이 있고, 다음으로 영원한 것,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것에 관한 절망이 온다. 그런 다음에 반항이 나타난다. 이것은 영원한 것의 힘을 의식한 절망이기 때문에, 이 반항은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그런 자기가 자기 속의 영원한 것을 절대적으로 남용하는 것이다. pp.256~257
절망하는 자기가 행동적인 자기일 경우, 만일 그가 무엇을 계획하든 그 어떤 큰 것을, 그 어떤 경탄할 것을 끈기 있게 계획한다 하든, 자기는 본디 언제나 오직 실험적으로만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 자기는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기에게는 결국 진지함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p.258
이 자기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요,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다. p.259
이 절대적인 지배자로서의 자기는 영토없는 국왕임을 곧 알게 된다. 그는 사실상 무엇하나 통치하고 있는 것이 없다. p.259
이렇게 해서 절망하는 자기는 끊임없이 그저 공중누각을 지을 뿐이고, 계속 쓸데없이 허공에 칼을 휘두르고 있을 뿐이다. p.259
절망하는 자기가 수동적인 자기일 경우에도, 절망은 짐짓 절망하며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 이경우에는 절망해서 자기 자신이고 자 하는 실험적인 자기로서, 구체적으로 자기 속에서 미리 방향을 정하고자 하는 동안 아마 어떤 어려움에 부딪칠 것이다. ... ... 아무튼 그게 무엇이든 뿌리부터 장애에 부딪칠 것이다. 자기의 무한한 형태인 부정적인 자기라면 아마도 그런 장애를 간단히 정리해 버리고서, 마치 그런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자기는 그런 것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가장하려고 들 것이다. p.260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불합리한 힘에 의해 그것을 기대하는 것 등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도움을 바란다는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도움을 청할 정도면 차라리 그는 온갖 지옥의 고통을 겪을지언정 기꺼이 자기 자신으로 남기를 바랄 것이다.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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