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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경북성주 답사자료 |
* 일 시 : 2016년 1월 20일 (수요일) 07:30~18:30
* 답사지역 : 경북 성주
* 답사인원 : 45명
* 인 솔 : 회 장 : 고 명 천 010-3889-1288
간 사 : 김 인 국 010-3863-7570
* 일 정
마산박물관(07:30) ㅡ 세종대왕자 태실 ㅡ 선석사 ㅡ 동방사지 7층석탑 ㅡ (성주향교) ㅡ 점 심 ㅡ 2016년 정기총회 ㅡ
(쌍충사적비) ㅡ 성밖숲 ㅡ 회연서원 ㅡ 법수사지당간지주 ㅡ 법수사지 3층석탑 ㅡ 심원사 ㅡㅡㅡㅡ 마산박물관 (18:30)
마산박물관 문화유산 답사회
경북성주 답사자료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星州世宗大王子胎室)
지정별 : 사적 444호
위치 :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禪石山, 742.4m) 아래의 태봉(胎峰)정상에 소재하는 세종대왕자 태실에는 세종대왕의 적서(嫡庶) 18왕자 중 큰 아들인 문종(文宗)을 제외한 17왕자의 태실과 원손(元孫)인 단종(端宗)의 태실 등 모두 19기가 있으며,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 사이에 조성되었다.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엽대석(蓮葉臺石)을 제외한 나머지 석물은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은 즉위한 이후 별도의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웠다. 1977년에 태실을 정비하던 중 분청인화문개(粉靑印花紋蓋) 2점(경북대학교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 각 1점 소장), 분청인화문완(粉靑印花紋盌) 1점(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평저호(平底壺) 1점(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지석(誌石) 3점(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재질은 화강암이고 형식·구조는 연엽형의 개첨석(蓋石)[저경(底徑) 102㎝, 고(高) 42㎝], 구형(求形)의 중동석(中童石)[고(高) 26㎝, 하경(下徑) 80㎝, 상경(上徑) 75㎝], 방형(方形)의 연엽대석(蓮葉臺石)[변(邊) 125.5㎝ 고(高) 60㎝], 석함(石函)으로 이루어져 있다. 태실비문에 '○○(대)군명태장 황명정통연월일입석(○○(大)君名胎藏皇明正統年月日立石)이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세조가봉비 비문은 멸실(『실록』에 비문 수록됨)되었다. 세종대왕자 태실은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연구에 중요한 자료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 선석사(禪石寺)
• 구분 : 전통사찰
• 규모 : 8동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 정법료 등)
• 위치 :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태실로 616-33
• 선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692년(효소왕 1)에 의상(義湘)이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 창건하여 신광사(神光寺)라 하였으나, 현재보다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다.
1361년(공민왕 10)에는 나옹(懶翁)이 신광사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런데 당시 새 절터를 닦다가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 닦을 '선(禪)'자를 넣어 이름을 선석사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바위는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머리 부분만 땅 위로 나와 있다.
임진왜란 때 전소된 뒤 1684년(숙종 10)에 혜묵(惠?)·나헌(懶軒) 등이 중창하였다. 1725년(영조 1)에 서쪽의 옛터로 이건하였다가 1804년(순조 4)에 서윤(瑞允)이 신도들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고 대웅전·명부전·칠성각·산왕각·어필각(御筆閣)·정법료(正法寮)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세종의 왕자 태실(胎室)이 있는 태봉(胎峰)에서 약 2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던 이 절은 왕자의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영조로부터 어필을 하사받았다. 이 어필을 보관했던 어필각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칠성각·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이다.
* 선석사 대웅전 ( 禪石寺 大雄殿 )
• 구분 :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 113호
• 위치 :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217
선석사는 신라 효소왕(孝昭王) 1년(692)에 의상대사(義湘大師)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처음에는 지금의 자리보다 서쪽에 건립되었으며 “신광사(神光寺)”라 하였다.
고려 공민왕(恭愍王) 10년(1361)에 나옹대사(懶翁大師) 혜근(惠勤)이 신광사의 주지로 부임한 뒤 절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는데, 그때 새 절터를 닦던 중 큰 바위가 나왔다 하여 “선(禪)”자를 넣어 사찰의 이름을 선석사라 고쳤다 한다.
그 바위는 지금도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머리 부분이 지상에 나와 있다.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후 숙종 10년(1684)에 은현(?玄), 혜묵(惠默), 나헌(懶軒)이 중창하였다.
영조 1년(1725)에 옛터로 옮겼다가 순조 4년(1804)에 동파(桐坡) 서윤대사(瑞允大師)가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조선 후기적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라 할 수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기단은 장대석을2단 쌓고 그 위에 장대갑석을 돌렸는데, 전체 높이가 약 90㎝ 가량 되며, 자연석의 초석 위에 굵직한 원기둥을 세운형태로 되어 있다. 공포는 다포양식으로 되어 있고 맞배지붕이다.
선석사는 조선 초기에 근처에 세종대왕자태실이 조성되면서 태실의 수호사찰로서 유지된 듯 하며 영조로부터 어필(御筆)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현존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 정법료(正法寮), 산신각(山神閣), 요사(寮舍)가 있다.
* 성주 선석사 영산회 괘불탱
(星州 禪石寺 靈山會 掛佛幀)
지정별 : 보물 제1608호
재질 : 견본채색
수량 : 괘불탱 1점, 괘불함 1점
규격 : 464 × 675cm
제작시기 : 1702년(괘불탱), 1706년(괘불함)
연대 : 조선위치 :
성주군 월항면 세종대왕자태실로 616-33시대
이 괘불(掛佛)은 숙종 28년(1702)에 화원(畵員) 탁휘(卓輝)를 비롯한 법해(法海), 설잠(雪岑), 성징(性澄) 등 4명의 스님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그림의 내용은 화기(畵記)에 적힌 「영산회도(靈山會圖)」란 이름대로 석가모니불이 영축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모습이다. 화면 중앙에 크게 묘사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고, 화면의 상단에는 아난과 가섭, 2명의 제자가 합장한 모습으로 상반신만 표현되었다. 좌우협시는 본존불보다 한 발짝 앞서 겹쳐 표현하여 공간감과 입체감을 드러내고 있다. 본존 석가여래의 수인은 통상의 항마촉지인이나 설법인이 아닌 오른손을 어깨로 들어 연꽃가지를 들고 있다. 그림의 화기(畵記)에 「영산회도일부봉안(靈山會圖一部奉安)」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도상은 선종의 염화시중과 조선시대에 성행한 선교합일(禪敎合一)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이 작품은 현재까지 알려진 불화 중에서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내용을 표현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괘불탱은 제작 시기가 비교적 빠르고 연꽃을 든 석가여래 도상의 선구적 위치에 있다는 점, 이 그림을 모본으로 하여 예천 용문사 영산회 괘불탱(1705년, 보물 제1445호)이 현존한다는 점 등에서 불화도상의 계승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색채감각이나 필선이 매우 세련되고 뛰어나 18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괘불화이다
* 동방사지 칠층 석탑 (東方寺址七層石塔)
• 구분 :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60호
• 재질 : 석재
• 시대 : 고려시대
• 위치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269-10
이 석탑은 8세기말인 신라 애장왕(哀莊王) 때에 창건된 동방사(東方寺) 경내에 있었던 7층 석탑으로, 탑의 높이에 비해 기단이 작아 안정감이 떨어지는 등 전반적으로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방사는 절이 소유한 토지가 수십 리에 이르고 기거하는 승려가 수백 명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다 전하나 임진왜란 때에 전소된 후 복원되지 못하였고 현재는 논·밭으로 변한 절터만 남아 있다.
석탑은 10.2m 높이로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되어 있으며, 3층의 옥개석은 일부 훼손되었고, 2층 탑신까지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있으며, 3층 탑신부터는 우주만 표현되어 있다. 또한 1층 옥신에는 작은 감실(龕室)을 마련했고, 1층·2층·3층의 옥개석의 모서리에는 특색 있게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1층의 연꽃무늬만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석탑은 성주의 지기(地氣)가 냇물과 같이 빠져 나가는 것을 막는다는 일종의 풍수 지리설에 근거하여 세운 지기탑(地氣塔)이라고도 한다. 이 탑은 성주읍을 돌아 동쪽으로 빠지는 이천(伊川)에서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20년 경신(庚申) 대홍수 때 하천의 흐름이 바뀌어 탑과 하천과의 거리는 1㎞로 멀어졌다고 한다.
* 성주향교 대성전 및 명륜당
(星州鄕校 大成殿 및 明倫堂)
지정별 : 보물 제1575호
위치 : 성주읍 예산2길 36-12
이 건조물은 태조 7년(1398)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를 세울 때 건립된 성주향교의 중심건물로서 공자와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과 강학(講學)을 위한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다. 향교는 일반적으로 선현의 배향 공간을 우위에 두기 위하여 평지에서는 대성전을 앞에, 명륜당을 뒤에 두며, 구릉지에는 대성전을 높은 곳에, 명륜당을 낮은 곳에 배치하나 성주향교는 앞에서 볼 때 담을 사이에 두고 대성전이 우측에 자리하고 좌측에 명륜당이 위치하는 우묘좌학(右廟左學)의 보기 드문 배치 방법을 취하고 있다. 향교의 건물은 대성전, 동?서무(東?西?), 명륜당, 입덕문(入德門), 수복사(守僕舍), 고사(庫舍)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서재(東?西齋), 만화루(萬化樓) 등 일부 건물은 소실되고 남아 있지 않다. 대성전은 건립 연대가 명확히 밝혀진 17세기 초의 건물로,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한 부재인 공포의 형식이 그 사례가 드문 형태인 다포식으로 건축양식에서 당시의 모습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다포건축이면서 천장을 설치하지 않았고, 유교건축에 맞게 내부구성을 매우 간략하게 처리한 점 등이 특이하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퇴칸을 두고 가운데 마루가 깔린 전형적인 중당협실형의 평면구성으로 되어 있다. 온돌방 상부는 다락을 설치하여 수장공간으로 활용한 듯하며 창호의 구성에서 옛날방식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좌측 온돌방 측면에 문틀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쌍충사적비 (雙忠事蹟碑)
• 구분 :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61호
• 시대 : 조선후기
• 위치 : 경북 성주군 성주읍 심산로 89
쌍충사적비는 임진왜란 때 영남지방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과 싸우다가 성주성(星州城) 싸움에서 전사한 제말(諸沫) 장군과 진주성(晋州城) 싸움을 돕기 위해 출전하다가 전사한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업적을 새겨 정조 16년(1792)에 세운 비이다.
제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웅천(熊川)·김해(金海)·의령(宜寧)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공을 세웠으며 성주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제말의 조카인 제홍록은 숙부와 더불어 큰 전공을 세웠으며,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했다.
비는 전체 높이가 325㎝이며 높이가 216㎝·너비 79㎝·두께 37㎝ 규모의 비신을 받침돌 위에 올리고 이수를 얹은 모습이다. 이수에는 서로 엉킨 두 마리의 용이 머리를 맞대고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비문은 서유린(徐有隣)이 글을 짓고 이병모(李秉模)가 글씨를 썼으며, 성주목사를 지냈던 조윤형(趙允亨)이 전서했다.
쌍충사적비는 처음에는 지금의 성주초등학교 앞 길가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 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가 방치되었던 것을 1940년 경에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옮겨 세웠다.
* 성주 경산리 성밖숲(星州 京山里 城밖숲)
지정별 : 천연기념물 제 403호
수량 : 55주(왕버들, 수령 300~500년)
시대 : 조선시대
위치 : 성주읍 경산리 446-1
이 숲은 성주읍의 서쪽으로 흐르는 하천인 이천변에 조성된 마을숲이다. 현재 숲에는 나이가 약 300~500년 정도로 추정되는 왕버들 55그루가 자라고 있다. 성밖숲은 노거수 왕버들로만 구성된 단순림으로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가슴높이 둘레가 1.84~5.97m(평균 3.11m), 나무 높이는 6.3~16.7m(평균 12.7m)에 달한다. 성밖숲은 조선시대 성주읍성의 서문 밖에 만들어진 인공림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한 비보임수(裨補林藪)인 동시에 하천의 범람으로 인한 수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조성된 수해방비림이기도 하다. 또한 예전부터 주민들의 이용을 전제로 조성된 마을숲으로서 전통도시의 마을공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지금도 성밖숲은 자연유산으로서의 가치 외에도 성주군민은 물론 인근 대도시인 대구시민들도 많이 찾는 공원으로서의 위상도 여전히 유지하고 있어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성밖숲에 대한 기록은 성주의 옛 읍지인 『경산지(京山志)』 및 『성산지(星山誌)』 등에 수록되어 있다. 구전에 의하면 조선 중기 성밖마을에서 아이들이 이유 없이 죽는 일이 빈번하였는데, 한 지관이 말하기를 '마을에 있는 족두리바위와 탕건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재앙이 발생하니, 재앙을 막기 위해 두 바위의 중간지점인 이곳에 밤나무 숲을 조성하여야 한다.' 고 하여 숲을 조성했더니 우환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마을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밤나무를 베어 내고 왕버들로 다시 조성하였다고 한다. 성밖숲은 마을의 풍수지리 및 역사·문화·신앙에 따라 조성되어 마을 사람들의 사회적 활동과 토착적인 정신문화의 재현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마을 비보림(裨補林,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의 안녕을 위하여 조성된 숲)으로 향토성과 문화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 곳이다.
* 회연서원(檜淵書院)
• 구분 :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51호
• 규모 : 11棟3廓
• 시대 : 조선시대
• 위치 : 경북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
이 서원은 조선 선조 때의 대유학자이며 문신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그의 사후인 인조 5년(1627)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세원이다.
서원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선조 16년(1583)에 정구가 회연초당(檜淵草當)을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던 곳이다. 숙종 16년(1690) 현판·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국가로부터 서원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70년대에 복원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서원의 주향(主享)인 한강 정구는 외증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우주 공간의 모든 것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예학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대학자였다.
그는 평소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국가의 부름을 거절하지 못하여 부득이 관직에 나올 경우에는 주로 외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으며, 내직으로 우승지(右承旨), 공조참판(工曹參判),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사후에 문목(文穆)의 시호(諡號)가 내려 졌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구(舊)사당, 강당, 동·서재, 신(新)사당, 전사청(典祀廳), 견도루(見道樓) 등이 있으며, 정구가 직접 조성한 서원 앞뜰의 백매원(百梅園)에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으며, 그 밖에 한강 정구와 관련된 유물?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유물 전시관과 향현사(鄕賢祠), 관리사가 있다.
사당에는 한강 정구를 주향(主享),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종향(從享)으로 모시고 향현사에는 신연(新淵) 송사이(宋師?), 용재(容齋) 이홍기(李弘器),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 모재(茅齋) 이홍우(李弘宇), 동호(東湖) 이서(李) 등 한강 정구와 동년배로서 지역민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들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 한강 정구 신도비 (寒岡 鄭逑 神道碑)
• 구분 : 도 유형문화재 제412호
• 보유자 : 청주정씨문목공파대종회
• 재작연대 : 조선시대
• 규격 : 높이 390㎝, 비신 230㎝, 폭 106㎝, 두께 29.5㎝
• 위치 : 경북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이 비는 조선 성리학사에서 확고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신도비(神道碑)이다. 비석은 인조 11년(1633)에 수륜면 수성리 갓말마을 뒷산인 창평산 묘소 부근에 세워졌다가 한강 정구의 묘소를 성주읍 금산리 인현산으로 이장하게 되면서, 현종 9년(1668)에 현재의 위치인 회연서원(유형문화재 제51호) 경내로 옮겨 세워졌다.
신도비는 비신(碑身)·이수(?首)·귀부(龜趺)가 완전하게 잘 남아 있다. 이수에는 쌍룡문(雙龍紋)과 여의두문(如意頭紋)이 깊게 새겨져 있고, 귀부는 귀갑문(龜甲紋)이 양각으로 얕게 새겨져 있다. 신도비의 전체 높이는 390㎝이며, 비신의 높이는 230㎝, 정면 폭은 106㎝, 두께는 29.5㎝이다. 비신의 전면 상단에 전서(篆書)로 『문목공한강정선생신도비명(文穆公寒岡鄭先生神道碑銘)』이라 새겼는데, 글자의 크기는 가로 6㎝, 세로 9㎝이다. 비신의 4면에 걸쳐 가로 2㎝, 세로 2.2㎝ 크기의 글자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지었고, 글씨는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이, 전서는 수북(水北) 김광현(金光炫)이 썼다.
한강 정구 신도비는 조성연대가 오래되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동방 5현의 한 사람인 외증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워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으며, 학문의 연구대상을 온 우주의 공간으로 삼고 의학·역사·천문·풍수지리·예학 등 여러 학문에 통달한 대학자였던 한강 정구의 역사적 위상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 법수사지 당간지주 (法水寺址 幢竿支柱)
• 구분 : 도지정 유형문화재 제 87호
• 시대 : 신라후기
• 위치 :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316
이 당간지주는 신라 애장왕(哀莊王) 3년(802)에 창건된 사찰인 법수사의 당간지주로 폐사지의 석축 아래쪽으로 10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법수사 입구에 세워져 있지만 사찰 창건 때 같이 세워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현재까지 양 지주(支柱)는 거의 손상 없이 잘 보존되어 왔는데, 지주가 조금 기울어져 간격이 다소 벌어져 있다. 양 지주는 높이 370㎝·폭 74㎝·두께 51㎝ 규모의 장방형(長方形) 석주(石柱)이다.
지주의 안쪽 면은 장식 없이 수직으로 깎아 다듬었고, 상부에는 당구(幢口)를 마련했으며 바깥 면은 올라가면서 3단으로 구분하여 체감하도록 했고 상단은 크게 호형(弧形)을 그리면서 마감했다. 양 지주 사이에 당대석(幢臺石)이 남아 있다. 지주 밑에는 간(竿)을 받치기 위한 폭 82㎝의 원추형 간대석(竿臺石)이 남아 있으며 간대석 중앙에는 지름 20㎝·깊이 8㎝크기의 구멍을 내고 구멍 주위에는 연화문(蓮花紋)을 둘렀다.
법수사지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간결·단아한 지주로 당간지주 계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성주 법수사지 3층석탑
(星州 法水寺址三層石塔)
지정별 : 보물 제1656호
규 격 : 높이 5.8m, 지대석 폭 2.6∼2.9m
시 대 : 신라후기
위치 :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5-1
이 석탑은 신라 애장왕(800~809년) 때 창건된 법수사지(法水寺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지는 가야산 계곡을 석축으로 단을 조성하여 자리 잡고 있다. 사지는 주변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높은 위치에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전망이 아주 좋다. 대가람으로 전해지는 법수사(法水寺)는 임진왜란 이후 폐사(廢寺)되고 석탑과 금당(金堂)터의 거대한 석축,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 경순왕의 계자인 김황(金湟)이 승려가 되어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하고 법수사에 머물면서 해인사에 드나들며 산승(山僧)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사찰이 언제 어떻게 폐사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9개의 금당과 8개의 종각이 있는 거대한 사찰이었다고 『경산지(京山志)』 불우조(佛宇條)에 전한다. 석탑의 높이는 5.8m이며, 2중의 기단과 3층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 위로 엎은 그릇모양의 장식만이 남아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 비해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 9세기 후반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의 창건시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탑은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함께 법수사지의 제 위치를 지키고 있으며, 우수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크다.
* 심원사 (深源寺)
• 구분 : 전통사찰
• 규모 : 10동 (대웅전, 관음전, 문수전, 숭모전 등)
• 재작연대 : 8세기경
• 위치 :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식물원길 17-56
심원사(深源寺)는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가야산국립공원(伽倻山國立公園) 구역 내 백운동(白雲洞)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 성주출신의 명사(名士)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그의 기심원장로(寄深源長老)라는 시에서 '심원 옛 절은 가야산 속에 있는...'라고 하였으니, 심원사는 고려말에도 옛절(古寺)로 불릴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사찰이었다.
조선 중종 때 지원(智遠) 스님이 중수하여 크고 화려하였으나 임진왜란에 소실된 후 중창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 되었다가 18세기 말경에 폐사(廢寺)되었다.
근래에 이루어진 발굴조사결과 심원사는 남북 약 80m, 동서100m 정도의 대지에 4단의 계단식 축대위에 삼금당지(三金堂址)를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산지사찰(山地寺刹)이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한편 최근 심원사는 크게 중창사업을 별여 대웅전, 관음전, 문수전 등 전각 10동을 건립하는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또한 심원사 경내에는 길흉축월횡간 고려목판(보물 제1647호), 경백전기법(유형문화재 제444호),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116호), 석조유물(문화재자료 제525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다수의 비지정문화재가 있다.
* 심원사 삼층석탑 (深源寺 三層石塔)
• 구분 :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 116호
• 재질 : 화강암
• 시대 : 통일신라
• 위치 : 경북 성주군 수륜면 가야산식물원길 17-56
이 석탑은 통일신라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인 심원사(深源寺)의 사지에 위치하고 있는 석탑으로 폐탑(廢塔)상태로 있던 것을 1990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심원사는 가야산에 있었던 대사찰로 전하는 법수사(法水寺)와 같은 8세기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그의 시에서 '고사(古寺)'라 칭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사세가 번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중종 때의 승려 지원(智遠)이 중수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廢寺)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8세기에는 이미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은 외형상으로 통일신라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이중 기단 위에 쌓아 올린 삼층석탑으로 전체 높이가 450㎝, 지대석(地臺石)의 폭이 350㎝이다. 이중 기단은 장대석(長臺石)과 판석(板石)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신은 각 층이 단석(單石)으로 면석(面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를 두 개씩 모각(模刻)했다. 옥개석(屋蓋石) 역시 각 층이 단석이고 4단의 받침과 1단의 괴임을 모각했다. 상륜(相輪)은 완전히 없어지고 각 층의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은 잘 남은 편이다.
최근 심원사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사지(寺址) 복원이 이루어지면서 사지의 최상단 남서편에 있던 석탑을 대웅전 전면으로 이건하였고, 현재 심원사의 옛 모습을 되찾기 위한 복원공사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