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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十回 夫差違諫釋越 勾踐竭力事吳
제80회: 부차는 간언을 듣지 않고 월왕을 풀어주고, 구천은 힘을 다해 오나라를 섬기다.
話說,越大夫文種,蒙吳王夫差許其行成,回報越王,言:「吳王已班師矣。遣大夫王孫雄隨臣到此,催促起程,太宰屯兵江上,專候我王過江。」越王句踐不覺雙眼流淚。文種曰:「五月之期迫矣!王宜速歸,料理國事,不必為無益之悲。」越王乃收淚。回至越都,見市井如故,丁壯蕭然,甚有慙色。留王孫雄於館驛,收拾庫藏寶物,裝成車輛,又括國中女子三百三十人,以三百人送吳王,三十人送太宰,時尚未有行動之日,王孫雄連連催促。句踐泣謂群臣曰:「孤承先人餘緒,兢兢業業,不敢怠荒。今夫椒一敗,遂至國亡家破,千里而作俘囚,此行有去日,無歸日矣!」群臣莫不揮涕。
한편, 월나라의 대부 문종(文種)은 오왕 부차가 화친을 받아들이겠다는 허락을 받고 돌아와 월왕 구천에게 보고하기를, “오왕은 이미 철군했습니다. 대부 왕손웅에게 명하여 신을 따라 여기에 이르러 대왕의 출발을 재촉하도록 하고, 태재 백비에게 강가에 주둔하고 있다가 대왕께서 강을 건너기를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니, 월왕 구천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두 눈에 눈물을 흘렸다. 문종이 말하기를, “5월의 기한이 임박했습니다! 대왕께서는 속히 도성으로 돌아가 나랏일을 정리하셔야지 무익하게 슬퍼할 때가 아닙니다.” 했다. 월왕 구천이 즉시 눈물을 거두고, 월나라 도성으로 돌아갔다. 시가지는 예전과 변함이 없었으며 장정들은 그 표정이 숙연하고 얼굴에는 부끄러운 기색을 띠었다. 월왕 구천은 왕손웅을 관사에 머물도록 하고, 창고의 보물들을 수습하여 수레에 싣고, 또 나라 안의 여자들 330명을 뽑아 300명은 오왕에게 보내고, 30명은 태재 백비에게 보냈다. 그때 아직 움직일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왕손웅이 계속해서 재촉했다. 구천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내가 선왕께서 물려주신 위업을 이어받아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감히 게으르지 않았는데 오늘에 이르러 부초(夫椒)에서 한번 패해 마침내 나라는 망하고 가족은 깨어지게 되었소! 천 리 먼 곳에 포로가 되어 이번에 가면 돌아올 날이 없게 되었소!” 하니, 여러 신하가 눈물을 흘렸다.
文種進曰:「昔者湯囚於夏臺,文王繫於羑里,一舉而成王﹔齊桓公奔莒,晉文公奔翟,一舉而成伯。夫艱苦之境,天之所以開王伯也。王善承天意,自有興期,何必過傷,以自損其志乎?」句踐於是即日祭祀宗廟,王孫雄先行一日,句踐與夫人隨後進發,群臣皆送至浙江之上。范蠡具舟於固陵,迎接越王,臨水祖道。文種舉觴王前,祝曰:「皇天祐助,前沉後揚﹔禍為德根,憂為福堂。威人者滅,服從者昌﹔王雖淹滯,其後無殃。君臣生離,感動上皇﹔眾夫哀悲,莫不感傷!臣請薦脯,行酒二觴。」
문종이 나아가 말하기를, “옛날 탕왕은 하대(夏臺)에 갇혔고, 문왕은 유리(羑里)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한번 일어서자 천자가 되었습니다. 제환공은 거(莒)나라로 달아났고, 진문공은 적(翟)나라로 달아났으나, 한번 일어서자 방백이 되었습니다. 무릇 괴롭고 어려운 역경은 하늘이 천자와 방백으로 삼기 위한 것입니다. 왕께서 하늘의 뜻을 잘 받들어 스스로 일어날 기약을 하셔야지, 하필 지나치게 상심하여 스스로 그 뜻을 손상하려고 하십니까?” 했다. 구천이 이에 그날로 종묘에 제사를 지내고, 왕손웅이 하루 먼저 출발하니, 구천과 그 부인은 그 뒤를 따라 출발했다. 월나라의 여러 신하는 모두 절강(浙江) 가에서 전송했다. 범려도 고릉에서 배를 타고 와서 월왕을 영접하여 강가에서 전별연을 열었다. 문종이 술잔을 들어 월왕에게 바치면서 축수하여 이르기를, “하늘이 보호하고 도우시니, 처음에는 고생하더라도 뒤에는 일어나리라! 화는 덕의 근원이 되고, 근심은 후일에 복이 되리라! 남을 위압하는 자는 망하고, 복종하는 자는 창성하리라! 왕께서 비록 파묻혀 지체하더라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으리라! 군주와 신하가 생이별을 하니, 하늘의 상제도 감동하실 것이라. 여러 사람이 모두 슬퍼하니, 누구인들 마음이 아프지 않으리요! 신이 청컨대 안주와 함께, 두 잔의 술을 바칩니다.” 했다.
句踐仰天嘆息,舉杯垂涕,默無所言。范蠡進曰:「臣聞『居不幽者志不廣﹔形不愁者思不遠。』古之聖賢,皆遇困厄之難,蒙不赦之恥,豈獨君王哉?」句踐曰:「昔堯任舜禹而天下治,雖有洪水,不為人害。寡人今將去越入吳,以國屬諸大夫,大夫何以慰寡人之望乎?」范蠡謂同列曰:「吾聞『主憂臣辱,主辱臣死。』今主上有去國之憂,臣等之辱,以吾浙東之士,豈無一二豪傑,與主上分憂辱者乎?」於是諸大夫齊聲曰:「誰非臣子?惟王所命!」句踐曰:「諸大夫不棄寡人,願各言爾志:誰可從難?誰可守國?」
구천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고, 잔을 들어 눈물을 흘리면서 묵묵히 말이 없었다. 범려가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그윽한 곳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그 뜻이 클 수 없고, 근심이 없는 사람은 그 생각이 멀리까지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옛날 성현들은 모두 곤액의 어려움을 만나 용서할 수 없는 치욕을 겪었는데, 어찌 홀로 대왕뿐이겠습니까?” 하니, 구천이 말하기를, “옛날 요임금이 순임금과 우임금에게 정사를 맡겨 천하를 다스리게 할 때, 비록 홍수가 졌으나 사람들이 큰 해를 입지는 않았소. 과인이 지금 월나라를 떠나 오나라에 들어가면, 나라의 정사를 대부들에게 맡길 것이니, 대부들은 무엇으로 과인이 바라는 바를 위로할 수 있겠소?” 했다. 범려가 동료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주군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들의 치욕이고, 주군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들은 죽어야 한다.’라고 합니다. 오늘 주상께서 나라를 떠나는 근심이 있으니 이것은 신하들의 치욕이며, 우리 절강(浙江) 동쪽의 선비 중에 어찌 한둘의 호걸이 없어 주상의 근심과 치욕을 나눌 자가 없겠습니까?” 하니, 이에 여러 대부가 일제히 말하기를, “누군들 대왕의 신하가 아니겠습니까? 오로지 대왕의 명령이 있을 뿐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여러 대부가 과인을 버리지 않으니 각각 그대들의 뜻을 말하길 바라오. 누가 나와 고난을 같이 하고 누가 나라를 지키겠소?” 했다.
文種曰:「四境之內,百姓之事,蠡不如臣﹔與君周旋,臨機應變,臣不如蠡。」范蠡曰:「文種自處已審,主公以國事委之,可使耕戰足備,百姓親睦。至於輔危主,忍垢辱,往而必反,與君復仇者,臣不敢辭。」於是諸大夫以次自述。太宰苦成曰:「發君之令,明君之德,統煩理劇,使民知分,臣之事也。」行人曳庸曰:「通使諸侯,解紛釋疑,出不辱命,入不被尤,臣之事也。」司直皓進曰:「君非臣諫,舉過決疑,直心不撓,不阿親戚,臣之事也。」司馬諸稽郢曰:「望敵設陣,飛矢揚兵,貪進不退,流血滂滂,臣之事也。」
문종이 말하기를, “나라 안에서 일어나는 백성들의 일에 대해서는 범려가 신 보다는 못하고, 주군을 옆에서 모시고 임기응변으로 주선하는 일은 신이 범려보다 못합니다.”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문종이 스스로 이미 살펴보고 하는 말이니 주공께서는 나랏일을 그에게 맡기시고 농업에 힘쓰고 전력을 확충하게 하며 백성들을 친목하게 하소서! 위태로운 주군을 보필하며 치욕을 참으며 가서는 반드시 돌아와 주군과 함께 원수를 갚는 일은 신이 감히 마다하겠습니까?” 했다. 이에 여러 대부가 차례대로 각자의 각오를 말했다. 태재 고성(苦成)이 말하기를, “주근의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주군의 어진 덕을 밝히며 번잡스러운 것은 하나로 묶고 복잡한 것은 정리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직분을 알게 하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행인(行人 ;외교 담당) 예용(曳庸)이 말하기를, “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내어 분쟁을 해결하고 의심을 풀며, 나가서는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며, 들어와서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사직(司直) 호진(晧進)이 말하기를,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신은 간하여 그 잘못을 들어 의심나는 점을 깨닫게 하여, 곧은 마음으로 흔들리지 않으며 왕의 친척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사마(司馬) 제계영(諸稽郢)이 말하기를, “적군에 맞서 진지를 세우고 화살을 날리며 병장기를 쳐들고 앞으로 나아갈 뿐 피를 철철 흘려도 물러서지 않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司農皋如曰:「躬親撫民,弔死存疾,食不二味,蓄陳儲新,臣之事也。」太史計倪曰:「侯天察地,紀歷陰陽,福見知吉,妖出知凶,臣之事也。」句踐曰:「孤雖入於北國,為吳窮虜,諸大夫懷德抱術,各顯所長,以保社稷,孤何憂焉!」乃留眾大夫守國,獨與范蠡偕行,君臣別於江口,無不流涕。句踐仰天嘆曰:「死者,人之所畏,若孤之聞死,胸中絕無怵惕。」遂登船逕去。送者皆哭拜於江岸下,越王終不返顧。有詩為證:「斜陽山外片帆開,風捲春濤動地回﹔今日一樽沙際別,但時重見渡江來?」
사농(司農) 고여(皐如)가 말하기를, “몸소 백성들을 위로하고 죽은 자를 조상하고 병든 자를 살리며 음식은 두 가지 맛을 곁들이지 않으며 곡식을 저축하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태사(太史) 계예(計倪)가 말하기를, “하늘과 땅을 살피고 계절과 음양의 조화를 짚어 복을 발견하고 길한 일을 알아서 요망한 것은 쫓아내며, 흉조를 예측하는 것이 신의 일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북쪽의 오나라에 가서 곤궁한 포로가 되겠지만, 여러 대부는 덕을 품고 재주를 써서 각기 능한 바를 발휘하여 사직을 보존하면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소?” 했다. 이에 여러 대부가 남아서 나라를 지키게 하고, 홀로 범려 한 사람과 함께 떠나기로 했다. 군주와 신하가 강어귀에서 이별하는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구천이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죽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내가 만약 죽게 되더라도 마음속으로 절대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하고, 곧 배에 올라 길을 떠났다. 전송 나온 모든 신하가 강가에서 절하며 통곡을 했으나, 월왕 구천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시가 있어 증명하기를, “서산에 해가 지는데 외로운 범선이 출발하고, 바람은 봄 파도를 일으켜 땅을 흔든다. 오늘 술 한 동이로 백사장에서 이별하니, 어느 때 강을 건너 돌아와서 다시 볼까?” 했다.
越夫人乃據舷而哭,見烏鵲啄江渚之蝦,飛去復來,意甚閒適,因哭而歌之,曰:「仰飛鳥兮烏鳶,凌玄虛兮翩翩﹔集洲渚兮優恣,奮健翮兮雲間﹔啄素蝦兮飲水,任厥性兮往還。妾無罪兮負地,有何辜兮譴天?風飄飄兮西往,知再返兮何年?心輟輟兮若割,淚泫泫兮雙懸!」越王聞夫人怨歌,心中內慟,強笑以慰夫人之心曰:「孤之六翮備矣,高飛有日,復何憂哉!」越王既入吳界,先遣范蠡見太宰伯嚭於吳山,復以金帛女子獻之。嚭問曰:「文大夫何以不至?」蠡曰:「為吾主守國,不得偕來也。」嚭遂隨范蠡來見越王,越王深謝其覆庇之德。
월왕 구천의 부인이 뱃전에 기대어 곡을 하다가, 까막까치가 강가의 새우를 쪼아서 날아갔다가 다시 오는 것을 보고, 그 모습이 매우 한가해 보여, 울면서 노래 부르기를, “나는 새를 바라봄이여, 까마귀와 솔개로구나! 하늘을 넘나듦이여, 펄펄 나는구나. 모래톱에 모여서 노는 모습이여, 아주 자유롭구나. 힘차게 날갯짓함이여, 구름 사이에 있구나. 흰 새우를 부리로 쫌이여, 물도 마시는구나! 그 본성에 맡김이여, 갔다가 돌아오는구나. 나는 죄가 없는데, 이 땅을 등지도다.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하늘이 나를 견책하도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이여, 서쪽으로 가는구나! 다시 돌아올 것을 앎이여, 그 해가 언제인가? 괴로운 마음이여, 마치 찢어지는 듯하도다. 눈물을 줄줄 흘림이여, 두 줄기로 흐르는구나.” 했다. 월왕 구천이 부인의 원망하는 노래를 듣고, 마음속이 고통스러웠으나 억지로 웃음을 띠고 부인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높이 날 수 있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졌으니 높이 나는 날이 있을 것이오. 부인은 또 무엇을 걱정하시오.” 했다. 월왕 구천이 오나라의 경계에 들어서자 먼저 범려를 오산(吳山)에 주둔한 태재 백비에게 보내어 황금과 비단 및 미녀 30명을 바치게 했다. 백비가 묻기를, “문종은 어찌하여 오지 않았소?”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우리 주군을 위해 나라를 지키느라고 같이 오지 못했습니다.” 했다. 백비가 범려를 따라가서 월왕 구천을 만나니, 월왕 구천이 백비에게 덮어주고 비호해 준 덕을 깊이 감사했다.
嚭一力擔承,許以返國,越王之心稍安。伯嚭引軍押送越王,至於吳下,引入見吳王。句踐肉袒伏於階下,夫人亦隨之。范蠡將寶物女子,開單呈獻於下。越王再拜稽首曰:「東海役臣句踐,不自量力,得罪邊境。大王赦其深辜,使執箕帚,誠蒙厚恩,得保須臾之命,不勝感戴!句踐謹叩首頓首。」夫差曰:「寡人若念先君之仇,子今日無生理!」句踐復叩首曰:「臣實當死,惟大王憐之!」時子胥在旁,目若熛火,聲如雷霆,乃進曰:「夫飛鳥在青雲之上,尚欲彎弓而射之,況近集于庭廡乎?句踐為人機險,今為釜中之魚,命制庖人,故諂詞令色,以求免刑誅。一旦稍得志,如放虎於山,縱鯨於海,不復可制矣!」
백비는 있는 힘을 다하여 책임지고 귀국시켜 주겠다고 하자 월왕 구천의 마음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백비가 군사를 이끌고 월왕을 압송하여 오나라 도성에 이르러 오왕 부차 앞에 인도하였다. 구천은 웃옷을 벗고 계단 밑에 꿇어앉자 구천의 부인도 역시 따랐다. 범려가 보물과 미녀들의 명부를 부차에게 바쳤다. 월왕 구천이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동해에 사는 신하 구천이 자신의 힘도 헤아리지 못하고 변경을 어지럽혀서 죄를 얻었습니다. 대왕께서 그 깊은 허물을 용서하여 키와 빗자루를 잡게 해 주시니 참으로 두터운 은혜를 입어 잠깐 목숨을 붙여 주셨으니 감격을 이길 수 없습니다. 구천은 삼가 머리를 조아릴 뿐입니다.” 하니, 부차가 말하기를, “과인이 만약 선군의 원수를 생각했다면 그대가 지금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이다.” 했다. 구천이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신은 죽어 마땅하나 오로지 대왕께서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했다. 그때 오자서가 옆에 있다가, 마치 불붙는 듯한 눈과 벼락과 같은 소리로 나와서 말하기를, “무릇 구름 위에 나는 새를 잡으려 한다면 활을 힘껏 당겨 화살을 쏘아야 하는데, 하물며 뜰 안에 가까이 모여있는 것이겠습니까? 구천은 위인이 약삭빠르고 음험한 자라 지금은 솥 안에 든 고기 신세가 되어 목숨이 요리사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아첨하는 말과 꾸민 얼굴로 죽임을 면하려 합니다. 그러나 일단 뜻을 얻게 되면 마치 산에 풀려난 호랑이같이, 바다에 놓여난 고래같이 다시 제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했다.
夫差曰:「孤聞誅降殺服,禍及三世。孤非愛越而不誅,恐見咎於天耳!」太宰嚭曰:「子胥明於一時之計,不知安國之道。吾王誠仁者之言也!」子胥見吳王信伯嚭之佞言,不用其諫,憤憤而退。夫差受越貢獻之物,使王孫雄於闔閭墓側,築一石室,將句踐夫婦貶入其中,去其衣冠,蓬首垢衣,執養馬之事。伯嚭私饋食物,僅不至於飢餓。吳王每駕車出遊,句踐執馬箠步行車前,吳人皆指曰:「此越王也!」句踐低首而已。有詩為證:「堪嘆英雄值坎坷,平生意氣盡銷磨﹔魂離故苑歸應少,恨滿長江淚轉多。」
부차가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항복한 장수를 죽이고 복속한 자를 살해하면 그 화가 3대에 미친다고 했소. 내가 월나라를 사랑해서 죽이지 않는 게 아니라 하늘에 허물을 얻을까 두려워서요!” 하니, 태재 백비가 말하기를, “오자서는 일시적 계략에는 밝지만, 나라를 편하게 하는 도리는 모릅니다. 대왕의 말씀은 참으로 어진 사람의 말입니다.” 했다. 오자서는 오왕 부차가 백비의 아첨하는 말을 믿어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부차가 월나라에서 바친 공물을 받아들이고, 왕손웅을 시켜 합려의 묘 옆에 석실을 짓게 하여 구천의 부부를 그 속에 들어가게 하여, 의관을 모두 벗기고 머리를 풀어헤치고 더러운 옷을 입혀 말을 기르게 했다. 백비가 몰래 음식을 보내어 겨우 굶주림에 이르지는 않았다. 오왕이 매번 수레를 타고 나들이를 할 때마다 구천은 수레 앞에서 말채찍을 잡고 걸었다. 오나라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하며, “저자가 월왕 구천이다!” 했다. 구천은 머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시가 있어 증언하기를, “어쩌나 영웅이 구덩이에 빠졌으니, 평생의 의기는 모두 녹아 없어지고, 혼은 고향을 떠나 돌아가기도 아득한데, 한은 긴 강물을 채우고 눈물이 되는구나.” 했다.
句踐在石室二月,范蠡朝夕侍側,寸步不離。忽一日,夫差召句踐入見,句踐跪伏於前,范蠡立於後。夫差謂范蠡曰:「寡人聞『哲婦不嫁破亡之家,名賢不官滅絕之國。』今句踐無道,國已將亡,子君臣並為奴僕,羈囚一室,豈不鄙乎?寡人欲赦子之罪,子能改過自新,棄越歸吳,寡人必當重用。去憂患而取富貴,子意何如?」時越王伏地流涕,惟恐范蠡之從吳也。只見范蠡稽首而對曰:「臣聞『亡國之臣,不敢語政﹔敗軍之將,不敢語勇。』臣在越不忠為信,不能輔越王為善,致得罪於大王,幸大王不即加誅,得君臣相保,入備掃除,出給趨走,臣願足矣。尚敢望富貴哉?」
구천이 석실에 있은 지 두 달이 지났다. 범려가 아침저녁으로 구천의 곁에서 한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고 모셨다. 어느 날 갑자기 부차가 구천을 궁궐로 들어오라고 불렀다. 구천이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범려는 그 뒤에 섰다. 부차가 범려에게 말하기를, “과인이 듣기에 ‘지혜로운 아녀자는 망한 집안에 시집을 가지 않으며, 이름난 어진 사람은 망한 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는다.’ 했다. 지금 구천이 무도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됐는데, 그대 군주와 신하가 모두 노복이 되어 한 방에 갇혀 있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은가? 과인이 그대의 죄를 용서하려고 하는데 그대가 능히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져서, 월나라를 버리고 오나라에 귀의한다면 과인이 마땅히 중용하겠다. 힘들고 걱정스러운 신세를 버리고 부귀를 누리게 되니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했다. 그때 월왕 구천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오직 범려가 오나라에 귀의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범려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에, ‘망한 나라의 신하는 감히 정사를 논할 수 없으며, 싸움에서 진 장수는 감히 용기를 말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월나라에서 충성을 믿게 하지 못하고 월왕을 보좌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하여 대왕께 죄를 짓기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대왕께서 저희들을 죽이지 않아서 주군과 신하가 서로 보호하여, 들어서는 소제하고 나가서는 옆에서 종종걸음치게 하시니 신은 만족할 따름입니다. 어찌 감히 부귀를 바라겠습니까?” 했다.
夫差曰:「子既不移其志,可仍歸石室。」蠡曰:「謹如君命。」夫差起,入宮中。句踐與范蠡趨入石室。越王服犢鼻,著樵頭,斫剉養馬。夫人衣無緣之裳,施左關之襦,汲水除糞灑掃。范蠡拾薪炊爨,面目枯槁。夫差時使人窺之,見其君臣力作,絕無幾微怨恨之色,終夜亦無愁嘆之聲,以此謂其無志思鄉,置之度外。一日,夫差登姑蘇臺,望見越王及夫人端坐於馬糞之旁,范蠡操箠而立於左,君臣之禮存,夫婦之儀具。夫差顧謂太宰嚭曰:「彼越王不過小國之君,范蠡不過一介之士,雖在窮厄之地,不失君臣之禮,寡人心甚敬之。」伯嚭對曰:「不惟可敬,亦可憐也。」
부차가 말하기를, “그대가 뜻을 굽히지 않으니 다시 석실로 돌아가라!”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삼가 대왕의 명대로 하겠습니다.” 했다. 부차가 일어나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구천은 범려와 함께 석실로 돌아와서 잠방이를 입고 베 두건을 쓰고 여물을 썰어 말을 돌보았다. 구천의 부인은 장식 없는 치마에 소매 짧은 저고리를 입고 물을 긷고, 말똥을 치우며, 물을 뿌려 청소를 했다. 범려가 땔나무를 하고 불을 지피느라 얼굴이 여위었다. 부차가 때때로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그 군주와 신하가 힘껏 일하고 결코 조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밤에도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뜻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하루는 부차가 고소대(高蘇臺)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월왕 구천과 부인이 말똥 무더기 옆에 단정히 앉아 있고, 범려는 채찍을 들고 구천의 왼쪽에 서 있었다. 군주와 신하가 예를 지키고, 부부도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부차가 태재 백비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저 월왕은 작은 나라의 군주에 불과하고, 범려는 일개 신하에 불과한데, 비록 궁핍하고 불행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군주와 신하의 예를 잃지 않았으니 과인은 마음속으로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소!” 하니, 백비가 대답하기를, “존경할 만도 하지만 또한 가련합니다.” 했다.
夫差曰:「誠如太宰之言,寡人目不忍見。倘彼悔過自新,亦可赦乎?」嚭對曰:「臣聞『無德不復。』大王以聖王之心,哀孤窮之士,加恩於越,越豈無厚報?願大王決意。」夫差曰:「可命太史擇吉日,赦越王歸國。」伯嚭密遣家人以五鼓投石室,將喜信報知句踐。句踐大喜,告於范蠡。蠡曰:「請為王占之。今日戊寅,以卯時聞信,戊為囚日,而卯復克戊。其繇曰:『天網四張,萬物盡傷,祥反為殃。』雖有信,不足喜也。」句踐聞言,喜變為憂。
부차가 말하기를, “진실로 태재의 말대로 과인이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소. 만약 그들이 옛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롭게 된다면 또한 용서해도 되겠소?” 하니, 백비가 대답하기를, “신이 듣기로, ‘덕은 돌아오지 않는 일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대왕께서 성왕의 마음으로 외롭고 불쌍한 사람을 가련하게 생각하시어 월나라에 은혜를 베풀고자 하니 월왕이 어찌 두터이 갚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뜻을 결정하십시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태사에게 길일을 택하게 하여 월왕을 사면하여 귀국시키시오.” 했다. 백비가 몰래 가신을 시켜 오경(새벽 4시경)에 석실에 가서 그 기쁜 소식을 구천에게 알려 주었다. 구천이 크게 기뻐하여 범려에게 알리니, 범려가 말하기를, “대왕을 위하여 점을 쳐 보기를 청합니다. 오늘이 무인(戊寅) 일이고 묘시(卯時)에 그 소식을 들었으니, 무(戊)는 갇히는 날이나 묘(卯) 또한 무(戊)와 상극입니다. 그 점괘에 이르기를, ‘사방이 그물에 덮였으니 만물이 모두 상하고 상서로움이 도리어 재앙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비록 좋은 소식이긴 하나 아직 기뻐하기는 이르다고 하겠습니다.” 했다. 구천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던 마음이 다시 근심으로 변했다.
卻說,子胥聞吳王將赦越王,急入見曰:「昔桀囚湯而不誅,紂囚文王而不殺,天道還反,禍轉成福,故桀為湯所放,商為周所滅。今大王既囚越君,而不行誅,誠恐夏殷之患至矣。」夫差因子胥之言,復有殺越王之意,使人召之。伯嚭復先報句踐,句踐大驚,又告於范蠡。蠡曰:「王勿懼也。吳王囚王已三年矣。彼不忍於三年,而能忍於一日乎?去必無恙。」句踐曰:「寡人所以隱忍不死者,全賴大夫之策耳。」乃入城來見吳王,候之三日,吳王並不視朝。伯嚭從宮中出,奉吳王之命,使句踐復歸石室。
한편, 오자서가 오왕이 장차 월왕을 사면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오왕을 뵙고 말하기를, “옛날 하나라의 걸왕은 탕(湯)을 잡아 가두었으나 죽이지 않았고, 상나라의 주왕(紂王)은 문왕을 잡아 가두었으나 죽이지 않아서, 천도(天道)가 돌아와 뒤집어지고, 화가 바뀌어 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걸이 탕을 방면하여 하나라가 상나라에 망했고, 다시 주왕(紂王)이 문왕을 풀어주어 상나라는 주나라에 의해 망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월나라의 임금을 이미 잡아 가두었으나 죽이지 않으시니 진실로 하(夏), 상(商=殷)의 환란이 다시 이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부차가 오자서의 말로 인하여 다시 월왕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게 되어 사람을 시켜 구천을 불러들이게 했다. 백비가 먼저 구천에게 알려주니, 구천이 크게 놀라, 또 범려에게 알렸다. 범려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왕 부차가 대왕을 가둔 지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오왕이 3년 동안이나 차마 죽이지 못했는데, 능히 하루 만에 차마 죽이겠습니까? 가 보아도 무사하실 것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과인이 참고 죽지 않은 것은 오로지 대부의 계책을 믿었기 때문이오.” 하고, 이에 궁성으로 들어가 오왕을 뵙고자 사흘을 기다렸으나. 오왕은 조회도 보지 않았다. 백비가 궁중에서 나오더니 오왕의 명을 받들어 구천으로 하여금 다시 석실로 돌아가게 했다.
句踐怪問其故,伯嚭曰:「王惑子胥之言,欲加誅戮,所以相召。適王感寒疾不能起,某入宮問疾,因言『禳災宜作福事。今越王匍匐待誅於闕下,怨苦之氣,上干於天。王宜保重,且權放還石室,待疾愈而圖之。』王聽某之言,故遣君出城耳。」句踐感謝不已。句踐居石室,忽又三月,聞吳王病尚未愈,使范蠡卜其吉凶。蠡布卦已成,對曰:「吳王不死,至己巳日當減,壬申日必全愈。願大王請求問疾,倘得入見,因求其糞而嘗之,觀其顏色,再拜稱賀,言病起之期。至期若愈,必然心感大王,而赦可望矣。」
구천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그 연고를 물으니, 백비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오자서의 말에 현혹되어 왕을 죽이려고 불렀습니다. 마침 감기가 들어 일어나지 못해서 제가 입궁하여 문안을 드리면서, ‘재앙을 물리치려면 마땅히 복된 일을 해야 합니다. 지금 월왕이 기어들어 와서 궁궐 아래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니 원한과 괴로움의 기운이 하늘까지 뻗친 듯합니다. 대왕께서는 마땅히 보중하시어, 잠시 그를 석실로 돌아가 있도록 하셨다가 병이 낫기를 기다려 논의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왕께서 나의 말을 듣고 왕을 도성에서 나가게 했습니다.” 했다. 구천이 백비에게 감사해 마지않았다. 구천이 돌아와 석실에서 생활한 지 다시 석 달이 되었는데도 오왕의 병에 차도가 없다는 소식을 듣고, 범려에게 그 길흉을 점치게 했다. 범려가 점괘를 얻어서 대답하기를, “오왕은 죽지 않겠습니다. 기사(己巳)일이 되면 병이 차도가 있고 임신(壬申)일이면 반드시 완쾌될 것입니다. 원컨대 대왕께서 오왕의 문병을 청하여 만약 뵙게 되면 그의 대변을 구하여 맛을 보고, 색을 살핀 후에 두 번 절하며 축하하고 병이 나을 시기를 말씀하십시오. 그때가 되어 만약 병이 나으면 틀림없이 오왕이 대왕에게 감동하여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句踐垂淚言曰:「孤雖不肖,亦曾南面為君,奈何含污忍辱,為人嘗泄便乎?」蠡對曰:「昔紂囚西伯於羑里,殺其子伯邑考,烹而餉之,西伯忍痛而食子肉。夫欲成大事者,不矜細行。吳王有婦人之仁,而無丈夫之決,已欲赦越,忽又中變,不如此,何以取其憐乎?」句踐即日投太宰府中,見伯嚭曰:「人臣之道,主疾則臣憂。今聞主公抱痾不瘳,句踐心孤失望,寢食不安,願從太宰問疾,以伸臣子之情。」嚭曰:「君有此美意,敢不轉達。」伯嚭入見吳王,曲道句踐相念之情,願入問疾。夫差在沉困之中,憐其意而許之。
구천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못났지만, 또한 일찍이 남쪽으로 향해 앉아서 임금 노릇을 했소. 어떻게 더러운 것을 머금고 치욕을 참으며 남의 대변을 맛보겠소?” 하니, 범려가 대답하기를, “옛날 은나라 주왕(紂王)은 서백(西伯 ; 文王)을 유리(羑里)에 가두고 그의 장자 백읍고(伯邑考)를 죽여 삶아서 맛보게 하니, 서백이 고통을 참고 그 자식의 고기를 먹었습니다. 무릇 큰일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조그만 일을 괴로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왕은 부녀자의 인정을 가졌지만, 대장부의 결단력이 없어 이미 우리를 사면하고 싶은데 갑자기 다시 변할지 모릅니다. 이같이 하지 않으면 어떻게 그의 동정심을 끌어내겠습니까?” 했다. 구천이 그날로 태재의 부중에 들어가 백비를 보고 말하기를, “신하의 도리는 임금이 아프면 신하는 근심하는 것입니다. 오늘 대왕께서 병이 나셔서 낫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천의 마음은 외롭고 실망하여 침식이 불안합니다. 원컨대 태재를 따라 대왕의 병문안을 드려서 신하의 정을 표하고 싶습니다.” 하니, 백비가 말하기를, “군주께서 이같이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계시니 감히 그 뜻을 전달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백비가 입궐하여 오왕을 뵙고 구천이 생각하는 정을 자세히 말하여 병문안을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부차가 괴로운 중에 구천의 뜻을 기특하게 여겨 병문안을 허락했다.
嚭引句踐入於寢室,夫差強目視曰:「句踐亦來見孤耶?」句踐叩首奏曰:「囚臣聞龍體失調,如摧肝肺,欲一望顏色而無由也。」言未畢,夫差覺腹漲欲便,麾使出。句踐曰:「臣在東海,曾事醫師,觀人泄便,能知疾之瘥劇。」乃拱立於戶下。侍人將餘桶近床,扶夫差便訖,將出戶外。句踐揭開桶蓋,手取其糞,跪而嘗之。左右皆掩鼻。句踐復入叩首曰:「囚臣敢再拜敬賀大王,王之疾,至己巳日有瘳,交三日壬申全愈矣。」夫差曰:「何以知之?」句踐曰:「臣聞於醫師:『夫糞者,穀味也。順時氣則生,逆時氣則死。』今囚臣竊嘗大王之糞,味苦且酸,正應春夏發生之氣,是以知之。」
백비가 구천을 인도하여 부차의 침실로 들어가니, 부차가 억지로 눈을 뜨고 말하기를, “구천이 또 나를 보러 왔는가?” 했다. 구천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죄인 구천이 대왕의 옥체가 편안하시지 못하다는 소식을 듣고 간과 폐가 찢어지는 것 같아 한번 대왕의 안색을 뵙고자 할 뿐 다른 연유는 없습니다.”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차가 배가 부풀어 변을 보고 싶어 손을 저어 사람들을 나가라고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신이 동해에 있을 때 의술을 배운 적이 있어서, 사람의 대변을 보고 능히 병세가 나아지거나 악화되는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침실 문 앞에 시립하였다. 시종이 변기를 부차의 침상 가까이 가져가서 부차를 부축하여 변을 보게 하여 문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구천이 변기의 뚜껑을 열고 손으로 대변을 찍어 무릎을 꿇고 맛을 봤다.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코를 가렸다. 구천이 다시 들어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죄인 구천이 감히 재배하고 대왕께 축하를 드립니다. 대왕의 병은 기사(己巳)일이 되면 낫기 시작하여 3일이 지나 임신(壬申)일이 되면 쾌유되겠습니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니, 구천이 말하기를, “신이 의사에게 듣기를, ‘무릇 사람의 대변이란 곡식의 변한 맛이라, 시절과 기운에 순응하면 살아나고 시절과 기운에 역행하면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죄인 구천이 대왕의 변을 잠깐 맛보니 그 맛이 쓰고 시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봄과 여름의 발생하는 기운에 상응하는 것이라 그래서 대왕의 쾌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했다.
夫差大悅曰:「仁哉句踐也!臣子之事君父,孰肯嘗糞而決疾者?」時太宰嚭在旁,夫差問曰:「汝能乎?」嚭搖首曰:「臣雖甚愛大王,然此事亦不能。」夫差曰:「不但太宰,雖吾太子亦不能也。」即命句踐離其石室,就便棲止:「待孤疾瘳,即當遣伊還國。」句踐再拜謝恩而出。自此僦居民舍,執牧養之事如故。夫差病果漸愈,一一如句踐所刻之期。心念其忠,既出朝,命置酒於文臺之上,召句踐赴宴。句踐佯為不知,仍前囚服而來。夫差聞之,即令沐浴,改換衣冠。句踐再三辭謝,方纔奉命。更衣入謁,再拜稽首。
부차가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어질구나. 구천이여!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데, 누가 대변을 기꺼이 맛보아가며 그 병세를 살펴본단 말인가?” 했다. 그때 곁에 있던 태재 백비에게 묻기를, “그대는 이렇게 할 수 있겠소?” 하니, 백비가 머리를 흔들며 말하기를, “신이 비록 대왕을 매우 사랑하지만, 이런 일은 또한 할 수 없습니다.” 했다. 부차가 말하기를, “단지 태재뿐만 아니라 비록 태자라 할지라도 또한 그러지는 못할 것이다.” 하고, 즉시 구천에게 명하여 석실에서 나와 편할 대로 거처하라고 하고, “내 병이 낫는 대로 즉시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게 하겠다.” 했다. 구천이 재배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고 물러났다. 이로부터 구천 일행은 민가에서 거처하며 말을 기리는 일을 예전과 같이 했다. 부차의 병이 과연 점점 나아 하나하나가 구천이 기약한 것과 같이 되니, 부차가 마음속으로 그의 충성심에 감동했다. 이미 조정에 나오게 되자 문대(文臺)에다 술상을 차리게 하고 구천을 잔치에 불렀다. 구천이 짐짓 모르는 체하고 전에처럼 죄수복을 입고 왔다. 부차가 그것을 알고 즉시 명령하여 목욕을 시키고 의관을 갈아입게 했다. 구천이 재삼 사양하다가 비로소 명을 받들어 옷을 갈아입고 알현하여 재배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夫差慌忙扶起,即出令曰:「越王仁德之人,焉可久辱!寡人將釋其囚役,免罪放還。今日為越王設北面之坐,群臣以客禮事之。」乃揖讓使就客坐,諸大夫皆列坐於旁。子胥見吳王忘仇待敵,心中不忿,不肯入坐,拂衣而出。伯嚭進曰:「大王以仁者之心,赦仁者之過。臣聞『同聲相和,同氣相求。』今日之坐,仁者宜留,不仁者宜去。相國剛勇之夫,其不坐,殆自慚乎?」夫差笑曰:「太宰之言當矣。」酒三行,范蠡與越王俱起進觴,為吳王壽﹔口致祝辭曰:「皇王在上,恩播陽春﹔其仁莫比,其德日新。於乎休哉!傳德無極﹔延壽萬歲,長保吳國。四海咸承,諸侯賓服﹔觴酒既升,永受萬福!」
부차가 황망히 구천을 붙들어 일으키며 명령하기를, “월왕은 어질고 덕이 있는 사람이라, 어찌 오랫동안 욕을 보일 수 있겠는가! 과인이 장차 그를 감옥에서 석방하여 죄를 사면하고 돌려보낼 것이오. 오늘 월왕을 위해 북쪽을 향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여러 신하는 그를 손님의 예로써 대하기 바라오.” 했다. 이에 구천을 정중하게 손님의 자리에 앉히고 여러 대부는 모두 그 옆에 늘어앉게 했다. 오자서가 오왕이 원수를 잊고 적을 대접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자리에 앉지 않고 소매를 떨치며 나가 버렸다. 백비가 나아가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어진 사람의 마음으로 어진 사람의 잘못을 용서했습니다. 신은 듣기에 ‘같은 소리는 서로 어울리며 같은 의기는 서로 구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자리는 어진 자는 마땅히 머무르고 어질지 못한 자는 마땅히 물러가야 합니다. 상국께서 강직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지만, 자리에 머물지 않으시니 아마도 스스로 부끄러운 모양이지요?” 했다. 부차가 웃으며 말하기를, “태재의 말이 맞소!” 했다. 술잔이 세 번 돌자 범려와 월왕 구천이 모두 일어나 술잔을 들어 오왕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축사를 읊기를, “대왕께서 위에 계시니, 은혜를 펴심이 화창한 봄날 같구나! 인자하기가 비할 바 없고, 그 덕은 날마다 새롭구나! 오호라, 아름답구나! 그 덕을 세상 끝까지 전하시고, 만세까지 사시옵고, 오나라를 길이 보전하시며, 사해를 다스리옵소서! 제후들이 다 복종할지니, 이 술잔을 받으시고. 길이 만복을 누리소서!” 했다.
吳王大悅,是日盡醉方休。命王孫雄送句踐於客館:「三日之內,孤當送爾歸國。」至次早,子胥入見吳王曰:「昨日大王以客禮待仇人,果何見也?句踐內懷虎狼之心,外飾溫恭之貌,大王愛須臾之諛,不慮後日之患,棄忠直而聽讒言,溺小仁而養大仇,譬如縱毛於爐炭之上,而幸其不焦,投卵於千鈞之下,而望其必全,豈可得耶?」吳王咈然曰:「寡人臥疾三月,相國並無一好言相慰,是相國之不忠也﹔不進一好物相送,是相國之不仁也。為人臣不仁不忠,要他何用!越王棄其國家,千里來歸寡人,獻其貨財,身為奴婢,是其忠也﹔寡人有疾,親為嘗糞,略無怨恨之心,是其仁也。寡人若徇相國私意,誅此善士,皇天必不佑寡人矣。」
오왕 부차가 크게 기뻐하여 그날 한껏 취한 연후에 술자리를 파했다. 왕손웅에게 명하여 구천을 객관으로 모시라고 하며 말하기를, “사흘 안에 내가 그대들을 고국으로 보내 주겠다.”라고 했다. 다음 날 아침에 오자서가 입궐하여 오왕을 보고 말하기를, “어제 대왕께서 원수인 월왕을 마치 손님 접대하시듯이 하셨는데 그것은 과연 무슨 꼴입니까? 구천은 속으로 호랑이나 승냥이 같은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온화하고 공손한 모습으로 꾸미니, 대왕은 잠깐의 아첨을 사랑하여 훗날의 환란을 걱정하지 않고, 충직한 말을 버리고 아첨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작은 인정에 빠져 큰 원수를 기르니 비유하자면, 활활 타는 화로 위에 터럭을 올려놓고 타지 않기를 바라는 일과 같으며, 천근 아래에 계란을 던져 온전하기를 바라는 일과 같으니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니, 오왕 부차가 벌컥 화를 내며 말하기를, “과인이 병들어 석 달을 자리에 누워 있었건만 상국은 한 마디의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상국의 불충이오. 또한 한 가지 좋은 물건을 바친 것이 없으니 그것은 상국의 어질지 못함이오! 신하가 되어 어질지도 못하고 충성을 바치지도 않으니 어디에 쓰겠오! 월왕 구천은 나라를 버리고 천 리 길로 과인을 찾아와 그의 보화와 재물을 바치고 몸은 노비가 되었으니, 그것은 충성이오. 과인이 병들었을 때 친히 나의 대변을 맛보아 원망하는 마음을 대략 잊었으니, 그것은 인자함이라. 과인이 만약에 상국의 사사로운 뜻에 얽매어 이 훌륭한 사람을 죽인다면 하늘이 틀림없이 나를 돕지 않을 것이오.” 했다.
子胥曰:「王何言之相反也。夫虎卑其勢,將有擊也﹔狸縮其身,將有取也。越王入臣於吳,怨恨在心,大王何得知之?其下嘗大王之糞,實上食大王之心,王若不察,中其奸謀,吳必為擒矣。」吳王曰:「相國置之勿言,寡人意已決!」子胥知不可諫,遂鬱鬱而退。至第三日,吳王復命置酒於蛇門之外,親送越王出城。群臣皆捧觴餞行,惟子胥不至。夫差謂句踐曰:「寡人赦君返國,君當念吳之恩,勿記吳之怨。」句踐稽首曰:「大王哀臣孤窮,使得生還故國,當生生世世,竭力報效。蒼天在上,實鑒臣心,如若負吳,皇天不佑!」
오자서가 말하기를, “왕께서는 어찌하여 상반되는 말을 하십니까? 무릇 호랑이가 자세를 낮추는 것은 장차 먹이를 공격하려는 것이며, 삵이 몸을 움추리는 것은 장차 먹이를 취하려는 것입니다. 월왕이 오나라에 신하로 들어와 마음속에 원한을 품고 있는데, 대왕께서는 무엇을 아십니까? 그가 아래로 대왕의 대변을 맛본 것은 실은 위로 대왕의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왕께서 만일 이를 살피지 못하신다면 그 간교한 계책에 떨어져서 오나라는 틀림없이 그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했다. 오왕 부차가 말하기를, “상국은 이 일에 대해 말하지 마시오. 과인의 뜻은 이미 정해졌소!” 했다. 오자서는 간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답답해하며 물러갔다. 사흘이 지나자 오왕이 다시 사문(蛇門) 밖에 술자리를 차리라 명하고, 친히 월왕의 귀국 길을 전송했다. 오나라의 여러 신하가 모두 술을 따라 구천을 전송했으나 오직 오자서는 오지 않았다. 부차가 구천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의 죄를 용서하고 돌려보내니, 그대도 마땅히 오나라의 은혜를 생각하고 오나라에 대한 원한을 기억하지 마시오.” 했다. 구천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저의 외롭고 곤궁한 처지를 애처롭게 보아 고국으로 살아서 돌아가게 하시니 마땅히 언제까지나 힘을 다하여 은혜를 갚겠습니다. 푸른 하늘이 위에서 신의 마음을 지켜보고 만약 오나라를 배반한다면 하느님이 돕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夫差曰:「君子一言為定,君其遂行。勉之,勉之!」句踐再拜跪伏,流涕滿面,有依戀不舍之狀。夫差親扶句踐登車,范蠡執御,夫人亦再拜謝恩,一同升輦,望南而去。(時周敬王二十九年事也。)史臣有詩云:「越王已作釜中魚,豈料殘生出會稽?可笑夫差無遠慮,放開羅網縱鯨鯢。」句踐回至浙江之上,望見隔江山川重秀,天地再清,乃嘆曰:「孤自意永辭萬民,委骨異域,豈期復得返國而奉祀乎?」言罷,與夫人相向而泣,左右皆感動流淚。文種早知越王將至,率守國群臣,城中百姓,拜迎於浙水之上,歡聲動地。
오왕 부차가 말하기를, “군자가 말 한마디로 정했으니 그대는 그것을 실행하시오. 노력하고 노력하시오!” 했다. 구천이 두 번 절하고 꿇어 엎드려 눈물을 얼굴 가득히 흘리며 이별하기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차가 친히 구천을 붙들어 수레에 태워 주자, 범려가 수레를 몰고, 구천의 부인도 두 번 절하여 감사했다. 모두 함께 큰 수레에 올라 남쪽을 향해 갔다. (그때가 주경왕(周敬王) 29년(기원전 491년)의 일이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월왕은 이미 가마솥 안의 물고기가 되었다가, 어찌 죽지 않고 살아서 회계로 돌아갈 줄 알았겠는가? 가소롭다. 부차는 멀리 내다보지 못하여, 그물을 열어서 고래를 풀어주었다.” 했다. 구천이 절강 가에 돌아와서 강 건너 산천이 첩첩한 것을 바라보고, 천지가 다시 맑아서 이에 탄식하기를, “내가 지난날 월나라 백성들과 영원히 이별하여 이역 땅에 내 뼈를 묻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찌 다시 고국에 돌아와 사직에 제사를 받들 수 있게 될 줄 기약이나 했겠는가?” 하고, 말을 마치자 부인과 서로 쳐다보며 같이 눈물을 흘렸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문종은 월왕이 장차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나라를 맡아 다스리고 있던 신하들과 성안의 백성들을 이끌고, 절강 가에서 절하고 맞이하니, 환성이 땅을 진동시켰다.
句踐命范蠡卜日到國。蠡屈指曰:「異哉,王之擇日也,無如來日最吉。王宜疾趨以應之。」於是策馬飛輿,星夜還都。告廟臨朝,都不必敘。句踐心念會稽之恥,欲立城於會稽,遷都於此,以自警惕,乃專委其事於范蠡。蠡乃觀天文,察地理,規造新城,包會稽山於內。西北立飛翼樓於臥龍山,以象天門﹔東南伏漏石竇,以象地戶。外郭周圍,獨缺西北,揚言:「已臣服於吳,不敢壅塞貢獻之道」,實陰圖進取之便。城既成,忽然城中湧出一山,周圍數里,其象如龜,天生草木盛茂,有人認得此山,乃瑯琊東武山,不知何故,一夕飛至。
구천이 범려에게 명하여 점을 쳐 도성에 입성할 날을 잡게 하니, 범려가 손가락을 꼽아보며 말하기를, “이상합니다. 왕께서 입성하시는데 내일보다 좋은 날이 없습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빨리 달려서 점괘에 응하십시오.” 했다. 이에 말을 채찍으로 재촉하여 나는 듯이 달려 밤사이에 도읍으로 돌아왔다. 태묘에 귀국을 고하고 조정에서 조회를 한 것은 모두 말할 필요도 없다. 구천은 회계산의 치욕을 생각하여 회계에 성을 세우고 도성을 옮겨 스스로 경각심을 주려고 했다. 곧 그 일을 범려에게 맡겼다. 범려가 즉시 천문과 지리를 살펴 새로운 성을 회계산에 세웠는데, 성안에 회계산을 품었고 서북쪽 와룡산(臥龍山)에 비익루(飛翼樓)를 세워 하늘로 통하는 문을 형상하고, 동남쪽에 하수구를 내어 땅으로 통한 문을 상징하게 하였다. 바깥 성곽으로 주위를 두르고 오직 서북쪽은 비워두었다. 소문을 내어 말하기를, “이미 오나라에 복종하기로 했는데 감히 공물을 바치러 가는 길을 성벽으로 막을 수는 없다.” 했다. 그러나 사실은 오나라로 진격하기에 편하도록 은밀히 도모한 것이었다. 성이 이미 완성되자 갑자기 성안에 둘레가 몇 리나 되는 산이 하나 땅에서 솟아올랐다. 그 모양이 마치 거북이를 닮고 처음부터 초목이 무성했다. 어떤 사람이 이 산을 알아보고, 곧 낭야(琅琊)의 동무산(東武山)인데 무슨 까닭으로 하룻밤 사이에 날아왔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范蠡奏曰:「臣之築城,上應天象,故天降『崑崙』,以啟越之伯也。」越王大喜,乃名其山曰怪山,亦曰飛來山,亦曰龜山。於山巔立靈臺,建三層樓,以望靈物。制度俱備,句踐自諸暨遷而居之,謂范蠡曰:「孤實不德,以至失國亡家,身為奴隸,苟非相國及諸大夫贊助,焉有今日?」蠡曰:「此乃大王之福,非臣等之功也。但願大王時時勿忘石室之苦,則越國可興,而吳仇可報矣。」句踐曰:「敬受教!」於是以文種治國政,以范蠡治軍旅,尊賢禮士,敬老恤貧,百姓大悅。越王自嘗糞之後,常患口臭。
범려가 아뢰기를, “신이 하늘의 형상에 맞추어서 성을 쌓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이 곤륜(昆侖)을 보내어 월나라가 방백(方伯=霸者)이 될 것을 일깨어 준 것입니다.” 하니, 월왕 구천이 아주 기뻐하여 그 산의 이름을 괴산(怪山)이라고 불렀다가 다시 비래산(飛來山), 또 구산(龜山)이라고 불렀다. 그 산 정상에 영대(靈臺)라는 삼층 누각을 짓고 이 신령스러운 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제도를 갖춘 구천은 도읍을 제기(諸曁)에서 회계로 옮겼다. 구천이 범려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실은 덕이 없는 사람이라 나라를 잃고 집안을 망치며 몸은 남의 나라의 노예가 되기에 이르렀소. 진실로 상국과 여러 대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오늘이 있었겠소?” 하니, 범려가 말하기를, “이것은 대왕의 복이지 신하들의 공이 아닙니다. 단지 원하옵건대 때때로 석실의 고통을 잊지 않으시면 월나라를 일으켜서 오나라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겠소!” 했다. 이에 문종에게는 국정을 다스리게 하고 범려에게는 군사의 일을 맡겼으며, 어진 사람을 높이고 선비를 예절로써 대했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보살폈다. 월나라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월왕 구천이 부차의 대변을 맛본 이후로 항상 그의 입에서 냄새가 나는 병이 있었다.
范蠡知城北有山,出蔬菜一種,其名曰蕺,可食,而微有氣息,乃使人採蕺,舉朝食之,以亂其氣。後人因名其山曰蕺山。句踐迫欲復仇,乃苦身勞心,夜以繼日。目倦欲合,是攻之以蓼﹔足寒欲縮,則漬之以水。冬常抱冰,夏還握火﹔累薪而臥,不用床褥。又懸膽於坐臥之所,飲食起居,必取而嘗之。中夜潛泣,泣而復嘯,會稽二字,不絕於口。以喪敗之餘,生齒虧減,乃著令使壯者勿娶老妻,老者勿娶少婦﹔女子十七不嫁,男子二十不娶,其父母俱有罪﹔孕婦將產,告於官,使醫守之﹔生男賜以壺酒一犬,生女賜以壺酒一豚﹔生子三人,官養其二,生子二人,官養其一。有死者,親為哭弔。
범려가 성의 북쪽에 있는 산에서 즙(蕺)이라는 채소가 나는데, 그것을 먹을 수는 있으나 냄새가 조금 난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을 시켜 즙(蕺)을 캐와서 모든 신하에게 먹게 하여 구천의 입 냄새를 누그러뜨렸다. 후세 사람들이 그 산의 이름을 즙산(蕺山)이라고 불렀다. 구천이 오나라에 원수를 갚기를 서둘러서 몸과 마음을 밤낮으로 고달프게 했다. 두 눈이 피곤하여 감기려고 하면 눈을 찔러 졸음을 쫓았으며, 발이 시려 오므리면 찬물에 발을 담갔다. 겨울에 항상 얼음을 안고, 여름에는 오히려 뜨거운 것을 잡았다. 섶을 깔아 그 위에 누워 자고 침상과 요를 쓰지 않았다. 다시 앉고 눕는 곳에 쓸개를 달아 놓고 음식을 먹거나 기거할 때 반드시 쓸개를 맛보았다. 밤중에 몰래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회계(會稽)라는 두 글자를 입에서 떼지 않았다. 패한 이후에 월나라의 인구가 줄어서 구천이 즉시 명령을 내려 나이가 젊은 남자가 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을 금했고, 늙은 남자가 젊은 여인과 혼인하는 것을 금했다. 여자가 17세가 되어도 시집을 가지 않거나 남자가 20세가 되어도 장가를 가지 않으면 그들의 부모에게 모두 죄를 주었다. 임산부가 출산을 하게 되면 곧 관가에 고하게 하고 의사를 시켜 임산부와 아이를 보살피게 하였다. 남자아이를 낳으면 술 한 병과 개 한 마리를 주었으며 여자아이를 낳으면 술 한 병에 돼지 한 마리를 주었다. 사내아이 셋을 낳으면 관가에게 그 둘을 기르며, 사내아이 둘을 낳으면 관가에서 하나를 길렀다. 죽은 자가 있으면 구천이 친히 가서 곡하고 조문했다.
每出遊,必載飯與羹於後車,遇童子,必餔而啜之,問其姓名。遇耕時,躬身秉耒。夫人自織,與民間同其勞苦。七年不收民稅。食不加肉,衣不重采。惟問候之使,無一月不至於吳。復使男女入山採葛,作黃絲細布,欲獻吳王﹔尚未及進,吳王嘉句踐之順,使人增其封。於是東至句甬,西至檇李,南至姑蔑,北至平原,縱橫八百餘里,盡為越壤。句踐乃治葛布十萬疋,甘蜜百壜,狐皮五雙,晉竹十艘,以答封地之禮。夫差大悅,賜越王羽毛之飾。子胥聞之,稱疾不朝。夫差見越已臣服不貳,遂深信伯嚭之言。一日,問伯嚭曰:「今日四境無事,寡人欲廣宮室以自娛,何地相宜?」
매번 나들이할 때마다 반드시 밥과 국을 뒷 수레에 싣고 가다가 어린이를 만나면 반드시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이름을 물었다. 농사철이 되면 몸소 쟁기를 잡았다. 구천의 부인도 스스로 베를 짜고 민간의 아낙네들과 함께 노고를 같이했다. 7년 동안을 세금을 걷지 않고, 고기를 상에 올리지 않았으며 여러 색깔의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다. 오직 오나라의 부차에게는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문안을 여쭙는 사자를 보냈다. 다시 남녀 백성들을 산으로 들여보내 칡넝쿨로 황사세포(黃絲細布)를 짜서 오왕 부차에게 바치려고 했다. 그것을 아직 바치지 않았는데, 오왕 부차가 구천의 순종을 가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그 봉지를 더해 주었다. 이에 동으로는 구용(句甬)에 이르고, 서로는 취리(檇李)에 이르며, 남으로는 고멸(姑蔑)에 이르고, 북으로는 평원(平原)에 이르는 종횡 800여 리가 모두 월나라 땅이 되었다. 구천이 곧 갈포(葛布) 10만 필과 꿀 백 항아리, 여우 가죽 5쌍, 진죽(晉竹 ; 화살대)을 가득 실은 배 10척을 봉지를 더해준 은혜에 대한 답례로 바쳤다. 부차가 크게 기뻐하여 월왕에게 깃털 장식을 주었다. 오자서가 그 소식을 듣고 몸에 병이 들었다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부차는 월왕이 이미 신하로 복종하여 두 마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보고 마침내 백비의 말을 굳게 믿었다. 하루는 부차가 백비에게 묻기를, “지금 오나라의 변경에 일이 없으니 과인이 궁실을 넓혀 스스로 즐기고 싶은데 어디가 마땅하겠는가?” 했다.
嚭奏曰:「吳都之下,崇臺勝境,莫若姑蘇,然前王所築,不足以當巨覽。王不若重將此臺改建,令其高可望百里,寬可容六千人,聚歌童舞女於上,可以極人間之樂矣。」夫差然之。乃懸賞購求大木。文種聞之,進於越王曰:「臣聞『高飛之鳥,死於美食﹔深泉之魚,死於芳餌。』今王志在報吳,必先投其所好,然後得制其命。」句踐曰:「雖得其所好,豈遂能制其命乎?」文種對曰:「臣所以破吳者有七術:一曰捐貨幣,以悅其君臣﹔二曰貴糴粟槀,以虛其積聚﹔三曰遺美女,以惑其心志﹔四曰遺之巧工良材,使作宮室,以罄其財﹔五曰遺之諛臣,以亂其謀﹔六曰彊其諫臣使自殺,以弱其輔﹔七曰積財練兵,以承其弊。」
백비가 아뢰기를, “오나라 도읍에 경치 좋은 숭대(崇臺)가 있기는 하지만 고소대(高蘇臺)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선왕께서 지은 고소대는 크게 구경하며 즐기기에 부족합니다. 대왕께서 고소대를 증축하고 누각을 높여 백 리를 볼 수 있도록 하고 그 안에 6천 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크게 짓고, 거기에 노래하는 소년과 춤추는 소녀를 모으면 가히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부차가 그렇게 여겨, 이에 상을 걸고 큰 나무를 구한다고 했다. 월나라의 대부 문종이 듣고 월왕 구천에게 나아가 말하기를, “신이 듣기에 ‘하늘 높이 나는 새도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다 잡혀 죽고, 깊은 물 속의 고기도 향기로운 미끼를 먹으려다가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 오나라에 보복하려고 하시면 반드시 먼저 오왕이 좋아하는 것을 던져준 다음에 그의 목숨을 제어하십시오.” 했다. 구천이 말하기를, “비록 그가 좋아하는 것을 얻은들 어찌 능히 그의 목숨을 제어할 수 있겠소?” 하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신에게는 오나라를 깨뜨릴 일곱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재물을 주어서 오나라 임금과 신하를 기쁘게 해 줍니다. 둘째, 곡식과 여물을 비싸게 사서 그들의 창고를 비게 합니다. 셋째, 미녀를 보내서 그들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넷째, 솜씨 좋은 목공과 좋은 재목을 보내어 궁실을 짓게 하고 그 나라의 재물을 탕진하게 만듭니다. 다섯째, 아첨하는 신하를 보내어 그들의 계책을 어지럽힙니다. 여섯째, 직간하는 신하를 강압하여 자살하게 만들어 그 보좌를 약하게 합니다. 일곱째, 우리가 재물을 축적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그들의 폐단을 틈타는 것입니다.” 했다.
句踐曰:「善哉!今日先行何術?」文種對曰:「今吳王方改築姑蘇臺,宜選名山神材,奉而獻之。」越王乃使木工三千餘人,入山伐木,經年無所得。工人思歸,皆有怨望之心,乃歌《木客之吟》曰:「朝採木,暮採木,朝朝暮暮入山曲,窮巖絕壑徒往復。天不生兮地不育,木客何辜兮,受此勞酷?」每深夜長歌,聞者淒絕。忽一夜,天生神木一雙,大二十圍,長五十尋,在山之陽者曰梓,在山之陰者曰楠。木工驚睹,以為目未經見,奔告越王。群臣皆賀曰:「此大王精誠格天,故天生神木,以慰王衷也。」句踐大喜,親往設祭而後伐之。
구천이 말하기를, “훌륭한 계책이요. 지금 어느 방법부터 먼저 시행해야 하겠소?” 하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지금 오왕 부차가 고소대(姑蘇臺)를 개축한다고 하니 마땅히 명산의 신목(神木)을 골라서 바치십시오.” 했다. 월왕 구천이 즉시 목공 3천여 명을 시켜 산으로 들여보내어 신목을 찾으라고 했으나 일 년이 넘도록 소득이 없었다. 목공들이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모두 월왕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어 <목객지음(木客之吟)>이라는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아침에도 나무를 찾고 저녁에도 나무를 찾아, 아침마다 저녁마다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높이 솟은 바위와 깎아지른 골짜기를 헛되이 왕복하네. 하늘이 내지 않으니, 땅이 키우지 않은 것을, 목공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렇듯 고생을 심하게 시키는가?” 했다. 목공들이 매일 밤 길게 불러대는 노래는 듣는 자들의 마음을 처절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밤 갑자기 하늘에서 신목 한 쌍이 내려왔는데 둘레가 스무 아름에 길이가 50길에 달했다. 산의 남쪽에 있는 것은 가래나무였고, 산의 부쪽에 있는 것은 녹나무였다. 목공이 놀라 여태껏 보지 못했던 그 나무를 월왕에게 달려가 보고했다. 여러 신하가 모두 축하하기를, “이것은 대왕의 정성이 하늘에 닿아서 하늘이 신목을 내려주어 대왕의 충정을 위로한 것입니다.” 하니, 구천이 크게 기뻐하여 친히 가서 제사를 지낸 후에 그 나무를 베었다.
加以琢削磨礱,用丹青錯畫為五采龍蛇之文,使文種浮江而至,獻於吳王曰:「東海賤臣句踐,賴大王之力,竊為小殿,偶得巨材,不敢自用,敢因下吏獻於左右。」夫差見木材異常,不勝驚喜。子胥諫曰:「昔桀起靈臺,紂起鹿臺,窮竭民力,遂致滅亡。句踐欲害吳,故獻此木,王勿受之。」夫差曰:「句踐得此良材,不自用而獻於寡人,乃其好意,奈何逆之?」遂不聽,乃將此木建姑蘇之臺。三年聚材,五年方成,高三百丈,廣八十四丈,登臺望徹二百里。舊有九曲徑以登山,至是更廣之。百姓晝夜并作,死於疲勞者,不可勝數。
목공들이 쪼고 깎고 갈고 다듬어서 단청을 사용하여 오색의 용 그림을 그려 넣었다. 문종을 시켜 강물에 띄워 오나라에 가져가 오왕 부차에게 바치며 말하기를, “동해의 천한 신하 구천이 대왕의 힘을 입어 잠깐 조그만 궁궐을 지으려고 재목을 찾다가 우연히 큰 재목을 얻었습니다. 감히 제가 사용할 수가 없어서 저의 신하를 시켜 대왕의 좌우에 바칩니다.” 하니, 부차가 재목의 크기가 어마어마함을 보고 놀라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오자서가 간하기를, “옛날에 하나라의 걸왕은 영대(靈臺)를 세웠고, 상의 주왕은 녹대(鹿臺)를 세웠는데, 백성의 힘을 고갈시켜 마침내 멸망했습니다. 구천이 오나라를 해치고자 이렇게 큰 재목을 보냈으니 대왕께서는 받지 마십시오.” 하니, 부차가 말하기를, “구천이 이와 같은 좋은 재목을 얻고도 자기가 쓰지 않고 과인에게 가져다 바치니, 그것은 호의이지, 어찌하여 역심이라고 하시오?” 했다. 부차가 마침내 듣지 않고, 그 재목을 가지고 고소대(高蘇臺)를 지었다. 3년 동안 재목을 모으고 5년 만에 비로소 완성했다. 높이가 3백 장(丈)에 달하고 넓이는 84장이었다. 고소대에 오르면 사방 2백 리를 조망할 수 있었다. 옛날에 아홉 구비로 산에 오르던 길도 이에 다시 넓혔다. 오나라 백성들이 밤낮으로 일을 했으며 피로에 지쳐 죽은 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有梁伯龍詩為證:「千仞高臺面太湖,朝鐘暮鼓宴姑蘇﹔威行海外三千里,霸占江南第一都。」越王聞之,謂文種曰:「子所云『遺之巧匠良材,使作宮室,以盡其財。』此計已行。今崇臺之上,必妙選歌舞以充之,非有絕色,不足侈其心志。子其為寡人謀之!」文種對曰:「興亡之數,定於上天,既生神木,何患無美女。但搜求民間,恐驚動人心﹔臣有一計,可閱國中之女子,惟王所擇。」
후세에 양백룡(梁伯龍)의 시가 있어 증거가 된다, 시에 이르기를, “천길 높은 누각이 태호에 면했는데, 아침 종소리 저녁 북소리 고소대 잔치라네. 위세가 나라 밖 삼천리에 행해지니, 강남의 제일가는 도읍을 이루었구나.” 했다. 월왕 구천은 고소대가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문종에게 말하기를, “경이 말한 ‘솜씨 좋은 목공과 좋은 재목을 보내 궁실을 짓게 하여 그 재물을 탕진하게 한다.’라는 계책이 이미 시행되었소. 지금 숭대(崇臺) 안에 틀림없이 가무에 능한 여인들을 잘 골라 뽑아서 채울 것이오. 절세미인이 아니면 오왕의 사치심에 부족할 것이니, 경은 나를 위해 그 일을 도모해 주시오.” 하니, 문종이 대답하기를, “흥망의 운수는 하늘에 달려 있습니다. 하늘이 이미 신목을 내려 주었으니, 어찌 미인이 없음을 걱정하겠습니까? 다만 민간에서 미인을 찾자면 인심을 놀라게 할까 걱정됩니다. 신에게 한가지 계책이 있는데 가히 나라 안의 여인들을 보고 오직 대왕께서 선택하면 됩니다.” 했다.
不知文種說出甚計,且看下回分解。
문종은 무슨 계책을 말했는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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