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액젓 / 김덕임
추자도 앞바다가 펄펄 끓는다. 수천 마리 멸치가 장작불 가마솥에서 녹아내린다. 가느다란 멸치 떼는 잿빛 파도가 된다. 풀어진 살점들이 뜨거운 물마루 끝에 솟았다가 솥 바닥으로 내리꽂힌다.
봄부터 미뤄왔던 젓장을 내린다. 산들바람이 불쏘시개가 되어 아궁이의 장작불이 활화산 같다.
시어머니가 정갈하게 가꾸던 장독대 맨 끝에는 항상 젓갈 항아리가 자리했다. 작년 여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독대 청소를 하다가 그 항아리를 열어보았다. 역시나 어머니의 손끝이 함께 버물어진 멸치젓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 익은 것 같았지만 혼자서 젓장 내리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해 봄에나 내리려고 뚜껑을 덮고 말았다. 그러던 것이 봄이 지나고 여름도 지나갔다.
며칠 전 시골집에 가서는 작심하고 그 항아리를 다시 열었다. 곰삭은 멸치젓 냄새가 코를 훅 찌른다. 주걱으로 헤집어 잿빛 웃기를 젖힌다. 멸치의 형태는 있으나 흐물흐물한 분홍빛 속살이 주걱 끝에서 버그러진다. 속살이 분홍빛이 나는 것은 멸치가 잘 곰삭은 것이다. 냄새 또한 식욕을 돋운다. 사람도 잘 곰삭은 노년은 곰삭은 인정내로 그득하리라.
함지에 푹 퍼서 마당가 한데 솥에 부었다. 잘 익은 간장도 두어 바가지 떠 부었다. 한소끔 끓으면 장작불을 죽이며 서서히 더 끓인다. 액젓이 넘치지 않게 끓여야 하는 가장 긴장된 순간이다. 한 손엔 키다리 주걱을 들고, 한 손으로는 아궁이 불 조절을 한다. 내 손은 생전의 어머니 손처럼 재바르지 못하고 두 손이 자꾸 엇박자를 탄다. 아궁이에 장작 한 개비를 더 넣으면 젓국이 부르르 끓어 금방 넘칠 듯하고, 한 개비를 끄어내면 끓는 것이 시원찮다. 제대로 달여질까 싶다. 멸치 젓갈과 졸이는 마음을 함께 달인다.
마침내 뻑뻑하던 젓갈이 누그름해진다. 항아리 안에서 보이던 멸치의 형태는 가뭇없이 사라졌다. 버그러지던 살점을 다 내려놓고 까끌한 가시들만 주걱 끝에 서걱거린다. 채에 받치니 말간 액젓이 자배기에 고이기 시작한다.
매년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필 때쯤이면 여수항에서 바로 싣고 온 추자멸치 트럭이 광암 동네 고샅을 순회했다. 트럭이 도착하면 마을회관 앞 사거리는 파시처럼 왁자지껄하다. 추자도 멸치는 남녘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알아주는 멸치가 아닌가 싶다. 펄펄 뛰는 파란 생멸치는 잘쭉한 몸매에 살집이 오동통했다. 반짝이는 눈은 바다에서 금방 건져 올린 듯했다. 푸른 멸치는 화물칸 가장자리에 파리떼처럼 달라붙어 사람들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어머니는 그걸 서너 상자씩 천일염에 버무려 단지에 꾹꾹 눌러 담곤 했다. 3년은 삭아야 액젓 맛이 제대로 난다고도 했다.
어머니와 함께 하던 기억을 되짚어가며 액젓을 내린다. 커다란 자배기에 어머니의 손때 묻은 쳇다리를 걸친다. 올이 밴 채를 쳇다리에 올린다. 다글다글 끓인 멸치젓을 채에 받친다. 쳇다리의 요긴한 쓰임새가 이리도 절묘할 수 있을까. 삼발 난 나뭇가지 하나가 이렇게 맞춤으로 쓰이다니. 만물의 존재에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말간 액젓이 처마 끝 낙수 같다. 어릴 적 무명저고리 섶에 묻었던 땡감물 같은 진갈색이다. 어머니가 달이던 액젓 색깔이다. 가을 전어구이 냄새처럼 구수하다. 손가락 끝으로 찍어본다. 혀끝에 닿는 맛이 생갈치 조림 같이 쌈박하다. ‘그래, 이 맛이야.’ 이순(耳順)에 다다라서야 남도 여인이 되는 것인가. 이게 바로 남도의 맛이다. 액젓은 전라도의 밥상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쓰인다. 김장은 물론이고 갖가지 나물을 무치고, 생선 조림을 할 때도 무에 액젓으로 밑간을 하여 생선 밑에 깐다. 생멸치가 폭 삭아 숙성된 액젓 맛을 어느 장맛도 따라올 수 없다.
시댁 광암마을에서는 김장을 앞둔 늦가을이면 집마다 젓갈 달이는 냄새가 울을 넘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고소한 냄새가 먼저 다무락을 넘는다. 아랫말 고샅마다 저녁 이내처럼 스민다.
어느새 채에는 액젓이 다 빠지고 까슬한 가시만 남아있다. 잔가시를 뒤적여보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깨알 같은 것들이 희끗희끗 많이 섞여있다. 설마 멸치 알집이라도 터진 것은 아닐 테지. 그것들은 멸치 알이 아니고, 석회석처럼 삭아버린 하얀 눈알들이었다. 팔팔 살았을 때 반짝이던 눈알은 어디 가고 윤기 없는 하얀 눈알이라니. 지금 제법 총기 있는 양 반짝거리는 내 눈도 생의 소실점에선 저리 될 것이다.
멸치들이 거친 파도에 숨이 막힐 때는 청람빛 물결을 젖히고 간간이 별들을 우러렀을지도 모른다. 깨알 같은 하얀 눈 속에 반짝이는 잔별들에서 별밤의 정기를 읽는 듯하다.
멸치는 비록 곰삭아 소멸되었지만 액젓이라는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자배기에 남실거리는 말간 액젓 위에 뻐꾸기 소리 간간이 법문처럼 얹힌다. 한 철 살다 가는 매미 같은 나는 그 소리에 이끌려 내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번뇌초 헝클어진 나와 다소곳이 손을 잡는다. 초가을 한나절 액젓 달이는 아궁이 앞에서 삭아가는 나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