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은 신라 3대 보물 중 하나인 진평왕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찾고자 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이 옥대 위치는 경주 황룡사(皇龍寺) 노승이 알았다.
기록만으로는 진평왕 옥대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다.
다만 황룡사가 관리하거나 보관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신라삼보(新羅三寶) 중 나머지 두 개인 장육존상(丈六尊像)과 구층목탑도 황룡사에 있었다.
진흥왕(재위 540∼567)이 월성(月城) 동북쪽 늪지를 매립해 지은 황룡사는 이름만으로도 위세가 대단한 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황룡사 주지는 신라 최고 승관인 국통(國統)으로서 모든 승려와 승단을 통솔했다.
"신라인들은 황룡사와 분황사 사이에 용궁(龍宮)이 있다고 인식했는데, 진흥왕은 황룡사 건설을 통해 신비로운 용왕
의 기운을 받고자 했는지도 모른다"며 "사찰 명칭에 '황'(皇)을 사용해 왕실사찰임을 분명히 밝혔다"고 말했다.
"황룡사에는 나라 도다이지(東大寺)처럼 국가나 왕실 창고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황룡사는 평범한 사찰이 아니라
신라시대에는 국가사찰, 고려시대에는 호국사찰이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웅장함을 자랑한 황룡사는 고려시대 몽골 침입으로 건물이 모두 불탔다.
1976년 4월부터 1983년까지 터만 남은 황룡사를 발굴해 건물 배치를 확인하고 유물 약 4만 점을 수습했다.
사유지 1만8천500㎡를 매입하고 연인원 7만7천여 명을 투입한 대규모 조사였다.
높이가 1.8m에 이르는 황룡사 치미.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황룡사가 어떤 절이었는지 소개하고, 관련 유물 685점을 한꺼번에 선보이는 자리다.
목탑터 심초석(心礎石·기둥을 받치는 돌) 구멍에서 나온 사리외함처럼 일반에 최초로 공개되는 유물도 있다.
신장상을 새긴 사리외함은 1984년 발간된 황룡사 조사 보고서에 흑백사진만 실렸을 뿐, 실물이 전시한 적은 없다.
도굴꾼이 1964년 12월 17일 훔친 사리외함은 1966년 압수되면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첫선을 보이는 사리외함 근처에는 산산조각이 난 심초석 뚜껑돌도 이번에 처음으로 외부 나들이를 했다.
처음 공개되는 황룡사 목탑터 사리외함.
황룡사 위세는 지붕 용마루 끝에 얹는 장식기와인 치미로 확인할 수 있다.
황룡사 치미는 높이가 1.8m로 현존 유물 가운데 가장 크다.
위쪽과 아래쪽을 따로 만들었고, 몸통 옆면과 뒷면에 다양한 무늬를 넣었다.
사찰에 전한 신라삼보인 장육존상과 구층목탑은 사라졌지만, 높이가 4.5∼5m로 추정되는 장육존상은 꼬불꼬불한
나발(부처 머리카락)이 남았다. 신라에서 가장 높았던 건물인 구층목탑은 영상으로 만날 수 있다.
"장육존상은 일장 육척인 불상을 뜻하는데, 당시 인도에서도 만들지 못한 것을 신라가 처음 제작했다고 한다"며
"754년 만든 황룡사 종은 길이가 3.14m로, 성덕대왕신종보다 컸다"고 설명했다.
황룡사에서 출토된 소조.
화려한 유물이 많이 나온 까닭에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문화재도 있다.
흙으로 형태를 빚은 뒤 건조하거나 불에 구운 소조(塑造)가 그렇다.
황룡사에서 출토된 소조 10여 점이 신라와 백제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층목탑도 백제 기술 지도를 받아 건축했다고 알려졌는데, 소조로 인해 두 나라 사이 교류가 상당히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소조는 부여 정림사지, 구아리사지, 임강사지에서 많이 나왔다".
"황룡사 소조는 동금당터에서 발굴한 손가락 외에는 정확한 출토지를 알 수 없지만, 사찰 이곳저곳을 소조가 장식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형 변기인 급취(왼쪽)와 토기에도 브랜드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토기 조각.
황룡사가 어떤 과정을 거쳐 탑 하나에 금당 세 개를 거느린 사찰이 됐는지 설명한 자료도 흥미롭다.
창건 당시에는 회랑과 강당만 있었으나, 중건하면서 금당과 구층목탑이 들어섰다.
중금당에 이어 좌우에 동금당과 서금당을 세우고, 종과 불경을 보관하는 건물인 종루(鐘樓)와 경루(經樓)를 건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