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
이 글은 수십 년 동안 폭력과 빈곤으로 낙인 찍힌 도시에서 성장한 인물-광주대단지 키드-들이 사회의 차별과 배제의 기억을 운동역량으로 동원하여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지역 정치세력으로 성장했으나 결국 기억의 고착과 운동의 퇴행으로 고립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연구이다. 그러나 거꾸로 경기동부연합의 특성, 나아가 비례대표 사태의 원인을 광주대단지 기억으로 환원시키려는 주장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이 연구의 특징은 지역 정치세력의 형성 과정을 집단기억의 측면에서 문화적으로 접근하고, 집단기억이 실체화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가 갖는 역사적 변화와 정치세력의 성장을 상호관계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데 있다.
차별과배제의기억: 광주대단지
1970년대와 1980년대, 서로 다른 두 개의 ‘광주’에서 그 시대 최대 규모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하나는 1971년 8월 10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중부면에 건설된 광주대단지에서 일어난 8‧10 사건이고, 또 하나는 1980년 5월 전라도 광주(光州)에서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이다. 각기 40여 년과 30여 년이 흐른 두 사건에 대한 기억의 공통점이 장소와 관련되었다는 데 있다면 차이점은 그 기억의 계승 여부에 있다. 광주민중항쟁의 기억이 청년․학생과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80년대 사회운동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면 8‧10 사건의 기억은 이후 사회운동으로 연결되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또 광주민중항쟁이 광주(光州)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면 광주대단지를 기반으로 하여 성장한 도시인 현재의 성남시는 도시의 정체성이 1971년 사건은 물론 광주대단지라는 이름과 연결되는 것을 거부하여 왔다. 성남시의회는 2011년 8․10 사건 40주년 기념사업비 6,592만 원을 삭감하고, 2012년에는 8‧10 사건 증언록 발간비 2,070만 원을 삭감했다. 그러나 광주대단지와 8‧10 사건은 공동체의 역사에서는 사라져 버렸지만 소수를 통해 기억이 전승되어 왔다. 기억의 내용은 차별과 배제였고 이유는 빈곤과 범죄였다.
광주대단지는 1960년대 말~70년대 초 정부의 철거민 강제이주 정책에 따른 최대의 집단적 희생양이면서, 박정희 정권 최초의 도시봉기가 일어난 지역이다. 또 광주대단지가 시로 승격하면서 탄생한 성남시는 광주대단지 시절 20평으로 분할해 놓은 필지로 인해 이후 수십 년 동안 저소득층에 한정된 전입‧전출이 이어지면서 도시 전체가 ‘못사는 동네’, ‘우범지역’으로 낙인찍혔다. 수천만 평이 넘는 지역에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한꺼번에 통틀어 ‘가난한 동네’, 가난하기 때문에 범죄가 많은 동네, 무서워서 가지 않고 기피하는 동네가 되어버린 것이다.
성남시 도시 전체가 도시빈민지역의 대명사가 된 까닭은 성남시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광주대단지 개발 시기 일괄적으로 구획된 20평의 분양지에 기인한다. 당시 원주민 대 이주민 비율이 4% 대 96%이었는데(대통령보고서 1971/10/14), 전체 가옥수가 23,988동이었으니 이중 4%를 제외한 23,028동 중 은행동 관사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20평이었던 셈이다. 8‧10 사건으로 정부가 철거민 위주 도시 조성계획을 철회하고 중산층을 유치키로 하면서 일반 주택단지가 조성되기 시작했지만 기존에 들어선 2만 필지 가량의 20평형 주택은 2013년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성남시의 경우 1970년대 고도성장 시기에도 도시 전체는 성장했지만 거주민들은 대지 20평에 건평 10평 남짓의 소형가옥의 도시 서민들로만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1971년 광주대단지사건 이후 대단지 건설 사업이 서울시에서 경기도로 이관되면서 1973년 성남시로 승격되었다. 시 승격과 더불어 도시는 급팽창했으나 광주대단지 시절과 마찬가지로 성남시는 가난하고 소외된 지역이었다. 대단지 시절 가파른 산비탈에 20평 규모로 지어진 ‘브로크집’(벽돌집)은 80년대 반지하층을 포함한 3층집으로 개조되었다. 70년대 방 하나를 세 놓았다면 80년대에는 아래위층에 세를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일렬로 늘어선 20평짜리 집들 사이의 골목길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2미터 남짓이다. 아래윗집에서 울리는 자명종 소리와 앞집의 텔레비전 소리도 그대로 들리고 있다.
1968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광주대단지가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서울시 외곽의 철거민 정착지와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서울시 경계를 넘어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지 조건은 이주민들이 일터로 가는 것을 어렵게 하거나 아예 차단하였고, 경제생활 외의 다른 부문에서도 주민들을 외부와 격리시키고 배제시키는 역할을 했다. 고도성장 시기 광주대단지 이주민만이 소득 상승은 물론 교육 기회까지도 차단당한 채 빈곤이 심화되고 재생산되었다.
광주대단지로의 이주가 첫 번째 차별과 배제였다면, 두 번째 차별과 배제는 1971년 8․10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단지 6시간 동안 일어난 사건에 불과했지만 3만~6만 명에 달하는 대단지 주민들이 참여하면서 정권을 깜짝 놀라게 했고 거꾸로 도시민 전체가 난동과 폭동의 주범으로 낙인찍히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광주대단지에 대한 폭력과 범죄의 이미지는 사건 이전부터 존재했다. 일간지에 “광주군 중부면 대단지 내에 29일 현재 폭력배들이 날뛰고 있어 10여만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경향신문 1971/06/17)”라고 보도되는가 하면 1970년 5월의 대통령보고서에는 “식생활에 쪼들린 나머지 대부분의 주민들은 신경질적이며 저녁에는 폭행 등 싸움사건이 많음(대통령보고서 1971/05/16)”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건이 만들어낸 더 큰 이미지는 ‘공포’였다. 사건은 당초 세상이 성남시에 대해 갖고 있던 폭력과 범죄의 이미지에 ‘공포’를 덧씌웠다.
사건 당시 광주대단지에는 ‘산모가 갓난아기를 삶아먹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문은 사실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서울로부터 격리되고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갈수록 먹고살기 힘들어진 광주대단지 사람들은 ‘아기를 삶아먹은 산모’ 이야기로 공포를 전유하고 있었던 것이다(임미리 2012, 257-258). 주민들이 느꼈던 공포는 사건 후 광주대단지 주민들에 대한 외부 세계의 공포로 바뀌었다. 대단지 사람들은 ‘아기를 삶아먹는’ 사람들이 되었고, 폭력과 범죄, 난동을 일삼는 사람들이 되었다. 1988년 대학 입학 초 나는 성남에 대한 전설 같은 소문을 들었다. 산모가 아기를 삶아먹었다는 바로 그 얘기였다. 공포를 전유하는 사람들에 대한 외부의 공포는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사건 17년 뒤 서울 어느 대학생의 귀에까지 전달된 것이다.
성남시와 주민들에 대한 세상의 공포는 추상적인 데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차별과 배제로 나타났다. 이력서에 주소를 성남시로 쓰면 취업이 잘 되지 않았고,(하동근 구술 2011/06/02) 사람들은 성남시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성남시 낙생면(현 분당구) 원주민이었던 최만순(1960년생)은 80년대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친구들에게 자기 집 과수원에 놀러오라니까 무섭다고 거절한 기억을 갖고 있다(최만순 구술 2012/06/21). 90년대 초반 강남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선 별은 “같은 반 친구가 부친의 사업이 망해 성남시로 이주해 누나와 함께 세를 살았는데 범죄 많은 동네라고 친구들이 가기를 꺼려했다”고 기억했다(선 별 구술 20120/08/01).
성남시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공권력 차원에서도 이뤄졌다. 사건 이후 정부는 대단지에 경찰병력과 정보․수사요원을 추가 투입했고 이주민들에 대한 일상적인 억압체계를 조성했다. 사건 다음날 작성된 대통령보고서에는 “집단적 행동에 대비하여 사전동향을 파악하고 진압부대 편성. 자체진압부대 103명 365개의 장비 보유, 인접 5개 지역 190명 및 서울 경찰기동대 492명의 지원체제 확립”이라고 되어 있다(대통령보고서 1971/08/11). 유신체제에서 막걸리간첩이 유행하긴 했지만 광주대단지에서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도 광주대단지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뒤 일상적으로 감시를 당하는 한 사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건 이후 대단지는 잔뜩 겁을 먹고 숨을 숙이는 동네가 되었던 것이다(임미리 2012).
8‧10 사건 이후 광주대단지가 성남시로 승격하면서 현재의 분당구가 성남시로 묶였다. 당시 농촌 지역이던 분당구에 1990년 이후 분당과 판교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이전과는 또 다른 차별과 배제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부터였다. 분당 사람들은 자신들을 성남시민이 아니라 분당시민으로 불렀고 “우리 애들을 어떻게 같은 학교에 보내느냐”(박봉준 구술 2012/08/16)고 항의하기 일쑤였다. 심지어 아파트 입주 직후인 1992년부터 분당을 성남시에서 분리시키자는 주민운동이 벌어졌다(디지털성남문화대전). 40년 전 대단지 주민들에게 가해지던 차별과 배제가 2012년 지금도 그대로 계속되고 있다. 아니 오히려 강화됨 셈이다.
광주대단지에서 성남시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사회적 차별과 배제는 이후 성남시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지역 거점화하는 배경이 되는 한편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지역 정치세력이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
경기동부연합의주도세력과형성과정
기억의호출: 광주(廣州)와광주(光州)의만남
언론에서 경기동부연합의 조직적 기원으로 본 터사랑청년회와 직접적 연관이 있는 단체는 1984년 재탄생한 성남시대학생연합회(성대련)으로 볼 수 있는데 1980년부터 활동하고 있던 같은 이름의 성대련이 성남시학우회연합(성우연)과 합쳐져 생겨난 단체이다. 성대련은 1987년 성남시학우회연합(성학연)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1990년 터사랑청년회가 되었다.
1980년의 성대련이 결성된 이유는 ‘5월 광주’였다. 성대련 초기부터 82년초 입대 직전까지 활동했던 서울대 79학번 이수열은 “1980년 5월 휴교령으로 서울의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이다가 자연스럽게 단체가 결성됐다. 지역 봉사활동을 하면서 세미나를 통해 사회의식을 키워나가는 게 목적이었다. 광주 문제는 주로 내부에서 논의되었으며 직접 홍보 활동에 나서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기억했다(이수열 구술 2013/03/19). “이전까지 YMCA 등 종교단체의 보호막을 활용해 활동했던 것에 비하면 성대련은 새로운 형태”였고, 뒤로 가면서 광주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더욱 많은 학생들이 결합했다(박우형 구술 2012/11/03).
성남시는 학생들이 홍보에 나서기 전 매우 이른 시기부터 광주 학살의 여파가 일고 있었다. 1980년 6월 9일 서울의 신촌네거리에서 ‘광주시민항쟁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유서를 남기고 노동자 김종태가 분신했다. 1971년 전태일 이후 첫 번째 분신이었으며 5월 30일 서강대 학생 김의기의 투신에 이어 두 번째로 광주 학살에 항의한 자결이었다. 1958년 부산 출생인 김종태는 서울의 미아초등학교를 다니다 1970년 광주대단지로 오면서 중퇴하고 2년 뒤 성남 수진초등학교에 복학했다. 성남의 공장에서 일을 하며 1978년부터 이해학 목사가 있던 주민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김종태는 방위병으로 군에 입대한 이듬해인 1980년 분신했다(주민교회역사편찬위원회 2003, 169-181). 성남에서 자라난 노래운동가 백창우는 1987년 김종태 분신 7주기에 ‘그대, 산자여’라는 노래를 만들었고, ‘푸른영상’은 2002년 ‘김종태의 꿈’으로 그의 삶을 영화화했다.
성남시가 광주 학살에 유독 민감했던 것은 광주대단지와 관련이 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때 전국에서 가장 먼저 병력이 배치된 곳이 성남시였다. 광주대단지 건설 목적의 하나가 서울의 도시 빈민을 소개해 유사시 적의 은신처로 제공되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었다(이해학 구술 2011/06/02). 더욱이 성남시는 현재까지도 ‘제2의 호남’으로 불리 정도로 호남 인구가 많다. 전남 진도 출신으로 1969년 9월 광주대단지 시절부터 1997년 6월 재무국장으로 퇴임할 때까지 39년을 성남시 공무원으로 재직한 박봉준의 증언을 들어보자.
“철거민 이주할 때는 전라도 사람이 본적을 많이 숨기는 일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본적이 이적이 되지 않아서 호적 등본에는 다 나타났는데 실질적으로 그 때 전라도 사람이 60프로 됐습니다. 철거민 중에는.”(박봉준 구술 2012/08/16)
1971년부터 1987년까지 인구 유입은 서울 48% 경기 41% 나머지 11%는 경남이다. 반면 인구 유출은 전남 23%, 전북 16%, 강원 21%, 충남 16%, 경북 14%, 충북 10%이다. 전남․전북이 각각 23%, 16% 유출된 데 반해 영남은 경북 14%만이 유출됐다(통계청 국내인구이동통계). 이를 통해 영남인의 몇 배에 달하는 호남인이 성남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볼 때 성남 출신 대학생들이 지역에서 광주의 진상을 알리는 일은 가족들에게 고향의 소식을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다. 광주대단지에서 비롯된 차별․배제와 호남인에 대한 차별․배제가 1980년 ‘5월 광주’를 통해 만난 것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저곡가 정책을 기본으로 한 산업화 정책은 농촌 경제를 몰락시키면서 농민들의 이촌향도(離村向都)를 촉진했고,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화는 그들이 도시로 순탄하게 편입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임금 탓에 도시 사람들 속에 섞여 살 만한 곳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천변이나 산동네에 무허가의 판잣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1967년부터 1970년 중반기까지 3년 6개월 동안 서울에는 140,598동의 판잣집이 세워졌다(김동춘 2011, 9) 광주대단지가 건설되기 시작한 1968년 서울시에는 총가구 75만여 중 집 없는 시민이 30여만 가구였고 13만여 동이 판잣집과 불량주택이었다(경향신문 1968/03/28). 판잣집살이는 불편하기도 했지만 위험천만했다. 1968년 경향신문에는 총 25건의 판잣집 화재가 보도되었는데 이 중에는 한꺼번에 65동이 전소하거나(경향신문 1968/03/04, 8면), 무려 80동이 전소하는 일도 있었다(경향신문 1968/12/20, 3면). 생명을 앗아가는 일은 화재뿐만이 아니었다. 산사태로 목숨을 잃기도 했고(경향신문 1968/08/23, 3면), 트럭에 받아 집이 박살이 나면서 사람이 죽는 일도 있었다(경향신문 1968/12/23, 7면). 그러나 생활의 불편과 생명을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판잣집살이였지만 이마저도 순탄치 않았다. 1968년부터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기 시작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도시미관을 위해 용산역 인근 등 철도 연변의 판잣집부터 철거하라고 지시했다(손정목 2005). 농촌의 고향에서 서울로 쫓겨온 사람들은 다시 쫓겨나야 했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대개는 서울 외곽의 정착촌이었고 그중 가장 열악하고 거대한 정착촌이 바로 광주대단지였다. 그리고, 농촌에서 서울의 판잣집으로, 서울에서 다시 광주대단지로 쫓겨나야 했던 사람의 상당수가 호남 사람이었다.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화에 의한 농촌에 대한 차별, 영남에 비해 호남에 대한 상대적인 차별, 무허가 판잣집에 거주하는 도시빈민에 대한 사회적 배제의 결과가 한 데로 모여진 것이 바로 광주대단지였다. 그리고 8‧10 사건에 따른 또 한 번의 차별과 배제로 인해 탄생한 세대가 1980년 ‘5월 광주’를 만나면서 생겨난 조직이 성대련이다. 대학가에 퍼졌던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론을 감안하면 이후 성남시의 청년학생운동이 NL 쪽으로 기우는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아래는 성대련 세미나팀장으로 활동하다 입대 후 1983년 12월 11일 자살한 한희철(서울대 79학번)이 서울대 가톨릭학생회 ‘날적이’에 남긴 글로 그의 이념적 경향을 알 수 있다.
“분명 민족(民族)은 살아있는 실체이다. … 그러나 이 한반도란 땅에는 이 민족에게 쇠사슬을 채우고 노예로 만드는 또 다른 실체가 있었다. … 잘린 민족의 현실적 아픔을 망각하게 하는 데 기여하는 자들! 분단으로 인한 모든 현실로 인해 편해진 자들! 통일을 향한 싸움이 전제되지 않고는 우리는 성화(聖化)될 수 없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369-376)
기억의승화: 차별과배제의기억에서운동의잠재력으로
1984년부터 현재의 경기동부연합 관련 인맥이 재탄생한 성대련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회장은 서울대 성남시학우회 회장으로 있던 박우형(서울대 83학번)이었는데 1985년 4월 12일 상대원시장 앞 연합시위를 주동한 책임으로 수배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성대련을 이끌어나갔다. 비례대표 사태 관련한 언론보도가 외대 용인에 머물렀던 것은 당직이 없던 박우형을 취재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박우형은 1996년 터사랑청년회 회장을 맡았고 민노당 수정구 지구당 초대 위원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6․8 보궐선거에는 경기도의원으로 출마해 무려 25.6%를 득표했다. 박우형이 당직을 갖지 않게 된 것은 2005년 성남시가 추진한 공원로확장공사의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부터다. 이 일과 관련해 그는 2009년 5월 징역8월에 집유2년을 받으면서 피선거권을 잃었다.
청소년 시절 박우형에게 성남시는 “깡패도시, 사고 치러나 가는 도시, 못사는 동네, 달동네, 유흥업소, 사회에서의 2류 인생들이 모여 있는 도시”였다. “초등학교 말부터 그런 느낌이 있었고, 중학교 때는 다들 그런 생각들이 있어서, 친구들끼리 모여 얘기해도 그런 얘기를 주로 했”다. 그러나 청년기 박우형에게 성남시는 ‘혁명의 도시’였다. “광주대단지는 사람에다 도시를 맞춘 게 아니라 사람들을 갖다버릴 곳으로 산비탈을 깎아놓고 쓰레기처럼 갖다버린 곳”이었다. 그러나 “71년 사건을 겪으면서 만들어진 변혁과 혁명의 잠재력” 때문에 “예전에 있던 사람들은 성남을 혁명의 도시라 했다.…그 당시 운동한 사람들은 그렇게 설명을 했고, 실제로 그런 것이 많은 영향을 미쳐 사람들이 운동을 하게 되었다.” 박우형의 세대에 와서 광주대단지부터 성남시에 이르는 차별과 배제의 기억은 부정이 아닌 긍정의 형식으로 내면화되어 운동 역량으로 동원된 것이다. 박우형은 4․11 총선 이후 이석기 국회의원의 특별보좌관을 했으며, 이석기 의원과는 성일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박우형은 성남시의 고교평준화 첫 세대로 1980년 성일고에 입학했으며 3년 선배인 이석기를 대학 입학 즈음에 알게 되었다(박우형 구술 2012/11/03). 이들은 성남시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이었다. 이렇듯 경기동부연합의 기원이 성남시에 대한 차별과 배제의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봤을 때, 이석기와 경기동부연합의 관계도 더욱 명확해진다. 언론에서는 이석기의 출신 대학에 주목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석기의 출신 지역이다. 1980년 성남 성일고등학교를 나온 이석기는 2년 뒤 82학번으로 외대 용인에 입학했다.
한편 이 시기 성남에서는 김종태, 한희철에 이은 또 한 명의 ‘열사’가 탄생했다. 1985년 9월 17일 경원대 2년생 송광영이 교내 집회 중 옥내에서 미리 온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 운동장으로 뛰어나오며 “학원안정법 반대”와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친 뒤 분신했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6, 257-262). 1986년 4월 대학생 분신으로 주목받았던 서울대생 김세진․이재호의 분신보다 앞선 일이었다.
기억의계승: 1987년 6월항쟁과용성총련의유입
성대련이 성남시학우회연합(성학연)으로 전화한 1987년 6월의 성남시는 어느 도시보다 뜨거웠다. 그때까지 성남시에는 8‧10 사건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1973년 설립된 주민교회와, 카톨릭계의 노동자쉼터‘만남의 집’(소피아 수녀, 1978년 설립), 산자교회(김해성 목사, 1986년 설립) 등이 운동권의 피난처이자 산실 역할을 하고 있었고 세 개의 공단을 중심으로 한 노동운동과 성대련 중심의 학생운동, 빈민운동이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성대련은 6월항쟁 기간 주로 국본에 결합해 활동했으며, 박우형은 정책팀 쪽의 고문을 맡았다(박우형 구술 2012/11/03). 1985년 박우형을 포함한 임원진이 구속되거나 수배되는 사태를 맞아 일시 약화되었다가 1987년 1987년 6월 26일 학우회 연합의 성격을 강화해 성남시학우회연합(성학연)으로 개칭하여 경원대에서 발족식을 가졌다. 이때부터 학우회 단위에서 개별 동아리로 활동 단위가 옮겨지게 되는데 1989년에는 성남 지역의 직장인, 즉 대학 안 간 청년들까지 포괄하면서 1989년 터사랑청년학우회로 바뀌었고, 1990년 현재의 이름인 터사랑청년회(이하 터사랑)로 개칭했다(이상훈 구술 2012/07/06).
6월항쟁 이후 대중운동이 발전하면서 전국적으로 대중적인 청년단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활동가 조직에서 대중단체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1988년 9월 나라사랑청년회를 필두로 부산, 광주, 대전 등에서 청년단체들이 결성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청년단체들의 연대가 모색되었다. 성남에서는 1988년 1월 성남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성학연이 터사랑청년학우회로 명칭을 바꾸기 1년 전의 일이다. 터사랑이 지역 출신 청년들의 모임이라면 성남청년회는 두 가지 흐름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하나는 평화민주당 외곽 조직인 평화민주통일연구회(평민연) 쪽이고 다른 하나는 터사랑과 같은 지역 청년들의 결합이었는데 이 때문에 성남청년회는 터사랑에 비해 민주당 정서가 강했다. 터사랑은 수정구를, 성남청년회는 중원구를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그밖의 청년단체로는 이해학 목사의 주민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성남EYC가 있었다(정형주 구술 2013/02/27).
광주대단지 기억을 공유하는 성남 출신들의 모임이 성대련과 이후 터사랑 및 성남청년회였다면 6월항쟁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기억을 계승시키면서 청년회 조직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6월항쟁을 전후해 성남시 인근 대학의 학생들은 재학 시에는 노학연대투쟁에 참여하면서 성남시와 관계를 맺었다가 졸업 후에는 성남공단으로 취업하거나 청년회에 참여해 활동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태년과 정형주를 들 수 있다. 김태년은 터사랑청년회에 결합했으며, 임수경 평양방북 건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나온 정형주도 “노동현장으로 가려던 당초 계획을 접고” 1989년 중순 성남청년회로 결합했다. 김태년은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탈퇴했다. 이와 함께 성학연 인맥을 통해서도 학생들이 유입되었는데 4․11 총선에서 정형주 대신 중원구에 출마해 당선된 김미희 국회의원이 대표적이다. 서울대 84학번인 김미희는 졸업 후 터사랑청년회에 결합해 활동했다. 언론보도에는 용성총련을 경기동부연합의 뿌리로 지목했지만 용성총련을 비롯해 외지 학생들이 성남시를 발판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87년 6월항쟁을 거치면서 기존에 이미 활동하고 있던 청년회에 결합하면서부터였던 것이다.
정형주가 졸업 후 성남행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외대 용인에는 서울 학생들이 많았는데 서울에서 용인까지 성남을 거쳐 등하교 하면서 자연스럽게 지역과 친숙해졌다. 노학연대활동을 성남서 했던 정형주는 서울 이문동 뚝방길의 무허가 판잣집에 살았던 경험 때문에 성남시가 더욱 친숙하게 느껴졌다.
“대학 때 윤흥길의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를 보면서 성남에 더 많은 애착을 갖게 됐어요. 주변에도 많은 사람이 봤지요. 지역 와서는 광주대단지 경험했던 사람들 만나 (아이 삶아 먹은 얘기도) 너무 많은 얘기를 들었고…그때를 거쳤던 사람들의 생각을 제가 느껴요. (그러나) 그걸 겪은 사람들과 저같이 뒤에 온 사람은 정서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얘기 하지요. 재개발 문제를 바라보는 문제도 그렇고…”(정형주 구술 2013/02/27)
1988년 대학 재학 시절 야학 활동차 성남에 왔던 김미희는 1992년 졸업 후 성남에 정착하였다. 정형주가 성남의 ‘서민성’에 이끌렸다면 김미희는 ‘운동성’에 매력을 느꼈다. 대단지 사건을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집단적으로 항거…도시의 운명 자체를 시민들이 바꿔낸 것”이라고 평가하는 김미희는 광주대단지 초기 이주해온 ‘진짜’ 성남 사람인 백승우(현 통진당 사무부총장)를 만나 결혼했다.
청년회뿐만 아니라 성남의 운동단체들은 광주대단지 기억을 공유하면서 성장했다. 특히 터사랑과 성남청년회는 동아리활동을 통해 역사교실이나 지역 탐방 활동을 일상적으로 전개하며 대단지 기억을 공유해 나갔고 1991년 8‧10 사건 20주년을 맞아서는 대단지 시절을 경험한 주민들 대상으로 광범위한 설문조사를 벌여 자료집으로 내기도 했다. 대단지 기억은 나중에 들어온 사람들에게도 공유되면서 기억의 두 주체, 즉 “원초적 사건의 직접적 희생자 집단과, 원초적 사건이 발생한 계기와 의의에 동의하고 이를 계승하는 데 목적을 둔 집단”(정호기 2004, 231)이 완성되어가기 시작했다.
또하나의기억: 경기동부연합의결성과자주․민주․통일운동
1991년 성남시의 청년단체들은 성남청년단체연합을 결성했다. 전국연합 산하 성남연합을 결성하는 과정에서 청년 부문으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1991년 출범한 전국연합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합법정당 논쟁’으로 이부영을 비롯한 일부 간부진이 사퇴하고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등으로 조직역량이 약화되자, 침체되었던 재야운동세력들이 다시 모여 1991년 출범한 단체이다. 해방 이후 최대의 연합조직이라 할 수 있는 전국연합은 이전의 민통련이나 전민련과는 달리 대중조직이 주도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이창언 2011, 24).
전국연합은 1994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범민련) 문제로 극심한 내분을 겪게 되는데 일명 ‘새통체’논쟁으로도 불린다. 1993년 출범한 문민정부가 화해․협력을 통한 점진적 통일로 나아가는 대북정책을 표방하는 가운데 문익환 의장은 범민련의 해체와 ‘새로운 통일운동단체’ 결성을 제안했다. 1993년 12월 북한의 공개적인 반대 후 한총련을 중심으로 하는 범민련 사수론과 민족회의 우호론이 맞서게 되지만, 새통체 건설은 1994년 7월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당시 성남연합은 새통체 지지는 아니었지만 통일운동의 대중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민족회의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전국연합의 직접적 분화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세력화에 대한 입장차에서 왔다. 1997년 6월 14일 전국연합 임시대의원 대회에서는 ‘우리’ 후보 방침을 결정되었으나 전국연합의 또 다른 자주계열(한총련 주류, 범민련 노선을 지지하는 지역연합, 전선강화론의 입장에 선 자주파)은 민주대연합에 입각한 대선 방침을 고수하면서 대의원 대회 방침을 거부하고 비판적지지론으로 선회했다. 여기서 정치세력화에 반대한 지역연합은 광주전남연합, 서울연합, 대구경북, 인천연합 등이다. 성남연합은 노동운동 기반이 강한 울산연합과 함께 정당운동에 가장 빨리 결합했고 이것은 나중에 민노당에도 가장 먼저 착근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이후 범민련 초기 주도자인 문익환, 이창복, 조성우 등은 전국연합을 이탈해 정치권으로 이동했고, 민청협의 후신으로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며 전국연합 내 담론을 선도했던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한청협)는 대선 패배 후 이탈하여 (한국청년연합회(KYC)를 설립했다. 전국연합 내 상층 지도부는 정치권으로, 하층은 시민운동으로 가면서 변혁운동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이다(홍진표‧이광백‧신주현 2010, 21-24; 이창언 2011, 41; 정영태 2012, 60-77).
이 시기 전국연합 중앙의 균열과 맥을 같이 해 성남연합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1992년 총선 때 성남연합은 민주당 후보인 이윤수와 조성준을 각각 수정구와 중원구의 범민주단일후보로 지원하여 당선에 기여했다. 1993년에는 이상락을 성남시의원 보궐선거에 시민단체 독자후보로 지원해 당선됐다. 그런데 1995년부터는 성남연합 내 입장이 갈리기 시작했다. 이상락 성남시의원이 당선 1년 만에 제명당하고 1995년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데 대해 민주당 입당과 무소속을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이 일로 김태년과 다수 회원들이 터사랑에서 탈퇴했고, 빈민 부문, 종교(기독교) 부문도 성남연합에서 탈퇴했다. 터사랑과 성남청년회에서 탈퇴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성남청년광장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다가 KYC에 결합하여 성남KYC를 설립했다(이상훈 구술 2012/07/06). 전국연합이 “민족해방운동 계열의 반제통일전선 건설 투쟁의 산물이자 추동엔진”(이창언 2011, 6)이라고 할 수 있었던 만큼 민주당 선호의 시민운동 세력이 떨어져나간 이후부터 성남연합은 NL계에서도 좀 더 급진적인 경향의 인물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공고화된 조직을 기반으로 1996년부터는 소위 경기동부연합의‘전설’을 만들기 시작했다. 북한에 수재가 났을 때 당시 성남연합에서 가장 먼저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전개했다. 회원 50여 명이 북한에 쌀보내기운동을 전개, 3개월 동안 무려 1만5천 가구를 방문해 5천5백 가구로부터 220가마의 쌀을 모았다(민중의소리 2003/11/12). 제도권에서 방기하고 있는 통일에의 꿈을 향한 그들만의 방식이자 의지의 표출이었다. 이듬해인 1997년에는 북녘동포돕기 범국민운동이 벌어졌는데 이즈음 성남연합은 용인․광주․하남․이천․여주를 포괄하여 경기동부연합으로 전환했다. 당시 성금 출연자 전체 명단이 한겨레신문에 게재되었는데 총 5회에 걸친 전국연합 게재분 중 3회가 경기동부연합 명단이었고 총 597명이 이름을 올렸다(한겨레신문 1997/05/06; 05/07; 07/29; 07/30; 07/31; 10/01). 1998년 IMF 이후에는 실업자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쌀모으기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호별 방문을 통해 실태조사를 하고 운영비를 마련했다. 경기동부연합의 이 같은 노력은 향후 선거에서 높은 득표율의 기반이 되었다.
경기동부연합의 전설적 활동은 공동체적 생활에 의해 밑받침되었다. “합숙하면서 새벽에 함께 기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또한 개인 소유가 없었다. 노동을 통해 돈을 벌어오면 공동체에 내놓았다.”(최홍재 인터뷰,송홍근 2012, 42) 생활을 위해서는 신문배달, 우유배달, 세차를 주로 했다. 밤늦게까지 퇴근하고 온 회원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새벽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정형주 구술 2013/02/27).
“6~7명 정도의 핵심간부들은 상근활동을 했기 때문에 새벽에 신문배달이나 우유배달을 해 생계비와 활동비를 충당했습니다. 대충 하루 일과는 새벽 3시~4시 사이에 시작되었고 새벽1시가 넘어서야 마무리 될 수 있었습니다. 최소한 1년에 절반은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자는 것은 양심에 찔리는 일이었습니다(우위영 인터뷰, 민중의소리 2010/02/19).”
자주‧민주‧통일 운동을 함께하는 실천가의 삶에 사적 욕망은 허용될 수 없었다. 경기동부연합은 운동 기풍(氣風)이 굉장히 강해 마치 묵가(墨家) 집단과도 같았다(최홍재 인터뷰,송홍근 2012, 43). PD에 비해 NL이 집단문화가 강하고 규율도 엄격하지만 경기동부연합은 다른 지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거의 군대를 방불케 하는 집단성과 일체감은 광주민중항쟁의 기억으로 단련된 남총련(전남총학생회연합)에 견줄 만했다. 경기동부연합은 개인의 삶을 철저하게 배제한 공동체적 삶 속에서 자주‧민주‧통일의 꿈과 함께 그들이 공유하는 기억의 내용과 시간을 더욱 강화시켜 나간 것이다.
기억의고착과경기동부연합의고립
NL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자주파의 노선과 조직 문화는 2008년 민노당 분당 사태를 통해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로 집약되었다(파벌 2012, 215-248). 자주파의 세 파벌인 울산, 인천, 경기동부연합은 종북주의와 패권주의에서 공통적으로 평등파의 비판을 받았지만 이념적‧조직적 폐쇄성에서 차이가 있다. 경기동부연합은 당권파의 핵심이었던 데에다 정식 당직을 가지지 않은 이너서클에서 집단의 정치적 행동을 결정하고 명령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더욱 문제시되었고(딴지일보 2012/03/21), 분당 사태의 계기가 되었던 일심회 사건과의 관련성도 좀 더 밀접했다(동아일보 2012/05/19). 울산연합의 경우에는 정도 차는 있었을지라도 1997년 정치세력화 논쟁서부터 최근까지 경기동부연합과 거의 유사한 노선을 걸어왔다고 할 수 있는데 2012년 비례대표 사태에서는 다른 선택을 했다. 비례대표 사태 당시 경기동부연합이 비타협적 선택을 했다면 울산연합은 정치적 판단을 중시한 것이다. 그리고 경기동부연합의 선택은 결국 고립화의 길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PD계의 주도로 민노당이 만들어졌을 때 경기동부연합은 울산연합과 함께 전국연합에서 가장 먼저 창당 준비과정서부터 개인 자격으로 입당하기 시작했다(정영태 2012, 65). 전국연합 전체 차원에서는 2001년 9월에서야 합류를 결정했고 2002년부터 전국연합 소속의 전농, 한총련, 그리고 민노총 국민파 등이 민노당에 조직적으로 입당했다(홍진표 외 2010, 173). 1990년대 중반 전국연합이 분열할 때에도 경기동부연합은 통일운동 대중화, 지역에의 투신, 정치세력화 측면에서 다른 파벌보다 앞서나가며 이후 당권 장악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이미 그때부터 다른 파벌과 구별되는 강한 독자성을 보였으며,자파 중심적 성격 또한 두드러졌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97년 성남연합에서 경기동부연합으로 전환할 무렵 단체명을 놓고 시비가 있었다. 주사파에서 뉴라이트 사무총장으로 변신한 최홍재에 따르면 “원래는 경기북부연합, 경기남부연합만 있었다. 김미희, 정형주가 경기동부연합을 조직하겠다고 나섰다. 조직부에서 ‘옳지 않다’, ‘승인 안 해주겠다’고 했고, ‘왜 안 해주느냐’는 실랑이가 일었지만 결국 경기동부연합으로 발족했다”(송홍근 2012, 42). 진보운동 정치세력화의 첫 걸음이라 할 수 있는 1997년 국민승리21 시절부터 패권주의 역시 강하게 나타났다. 성남시에서 진정추(진보정당추진위원회)와 경기동부연합이 동시에 지구당 설립을 추진하는 가운데 경기동부연합 측에서 직인을 절취, 선관위에 일방적으로 등록하는 일이 발생했다(레디앙 2012/05/27). 당비 대납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4‧11 총선에 이르러서 경기동부연합의 이 같은 패권주의는 자파 이기주의적 양상으로까지 치달았다. 야권 통합을 주도하면서 통일전선론의 실제화보다 헤게모니 장악에 우선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데 계급노선을 견지하지 않은 채 중간세력인 참여계와의 통합에 골몰했기 때문이었다. 또 민주통합당과의 협상 과정에서는 자파 위주의 지분 확보로도 눈총을 받았다. 이전의 선거와는 달리 의석 확보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에 나온 무리수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념이 다를 뿐 아니라 기존 ‘관행’에도 익숙치 않았던 참여계를 중심으로 비례대표 선거의 전모가 폭로됐고 경기동부연합은 안팎으로 고립되는 상황에 처했다.
운동의 퇴행과 조직의 고립은 기억의 고착과 관련이 있다. 통합진보당 당원들은 스스로를 자민통 대오라 지칭한다. 1990년 자민통 사건, 1996년 한총련 이적단체화 등으로 위축된 자민통은 스스로를 보전키 위해서라도 교조화‧지하화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당연히 기억의 고착을 초래하였다. 반민주와 반민족이 등치되던 시절, 자민통 운동은 민주화운동 전체를 견인하였다. 그러나 스스로의 손으로 이뤄낸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를 축소하고 1990년대 중반의 경제위기를 통해 드러난 북한의 실상을 외면하는 순간 그들은 과거의 기억에 고착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고착된 그들에게 남한 정부는 여전히 반민주‧반민족의 원흉이자 미제의 괴뢰였고 북한은 통일조국의 표상이었다. 한편 정보화시대 지식대중의 출현을 직시하지 못한 채 대중을 지도 및 포섭 대상으로 간주해온 행태는 그들의 기억을 더욱 과거에만 머물게 했을 수 있다. 조직의 고립과 이념의 교조화가 자주파 일반에 기억의 고착을 불러일으켰다면 경기동부연합은 여기에 더해 이너서클을 중심으로 한 조직 운영의 폐쇄성과 추모의례가 결합된 강력한 집단기억과 연대의식이 기억의 고착을 더욱 강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기억의 고착은 달리 말하면 시간의 현재화 현상이다. 경기동부연합은 집단기억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강화했지만 그러한 집단기억에는 함정이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어 과거와 현재 사이의 차이점을 인식하지만 기억에는 그러한 기능이 없다. 역사가 없이 반복적이고 무시간적인 기억만이 존재하는 유대 종족에서처럼 기억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나 단절은 사라지고 과거가 곧바로 현재화되는 것이다(안병직 2002, 186). 경기동부연합의 기억의 현재화 현상은 그들의 시원적 기억이라 할 수 있는 광주대단지 기억의 연장선상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성남시는 구시가지인 수정구, 중원구 총 72,384세대를 대상으로 3단계에 걸쳐 재개발사업을 추진 중이다. 이중 2단계 사업은 순환이주방식으로 추진해 3,607세대를 판교 순환용 주택에 우선 입주시킨다는 계획이었으나 현재 개발이 중단된 상태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개발이익이 없어진 LH공사가 사업 자체에서 손을 떼려는 게 이유다. 이에 따라 2009년 12월 준공된 판교 백현 3․4단지 3,696세대가 현재까지 3년 간 공가로 방치되어 있다(정형주․박우형 2012). 그런데 성남시가 추진하던 2단계 재개발사업의 중단은 “국가가 광주대단지에 이어 두 번째 우리를 버리는 일”(박우형 구술 2012/11/03)이었다. 광주대단지 시절 서울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지금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자식들이 또 쫓겨나야 하는 상황이 된 것”(정형주 구술 2013/02/27)이다. ‘산모가 아기 삶아 먹은’ 공포를 체험한 사람들의 눈에 사업 중단 사태는 단순히 시공사의 이기주의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다시 그들을 버린 주체는 대한민국이었고, 지켜야 할 것은 아파트 한 칸이 아니라 그들의 목숨이었다. 40년 동안 박탈된 가치에 대한 보상이 또 다시 좌절하게 되자 그들은 광주대단지 시절의 공포와 분노를 다시 불러낸 것이다. 40년 간 이어져온 차별과 배제의 기억이 20여 년 전 시간에 멈춘 자민통 운동과 만나 탄생한 그들은 비전향장기수에 비교할 만하다. 수십 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며 북으로의 환송을 기다리는 소년빨치산처럼 그들의 시선은 수십 년 전 그 순간에 멈추어져 있다.
경기동부연합의 패권주의와 자파중심주의는 기억의 또 다른 함정과도 관련이 있다. 집단의 덫에 걸린 것이다. 집단기억은 집단 내 지속성, 연속성, 동일성의 의식을 배양하면서 배타성을 강화시킨다. 개인이 가진 기억의 편차조차 평준화시켜 ‘전통’으로 통합시켜 버리기도 한다. 집단 정체성에 의해 구조화되는 기억은 당파적일 수밖에 없다. 집단 정체성의 핵심 메커니즘으로서의 기억은 사회의 권력구조에서 비롯되는 집단의 당파성을 대표한다. 그리하여 기억은 집단의 이익과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안병직 2002, 179). 한때 운동 역량으로 동원되었던 집단기억은 기억의 고착과 함께 집단의 덫으로 그들을 사로잡아 고립시키고 운동을 퇴행하게 만든 것이다.
비례대표 사태에서 경기동부연합은 <민중의 소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언론으로부터 비례대표 경선뿐 아니라 그간의 모든 역사가 부정당하는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사태의 비화와 여론에 의한 일방적인 매도 또한 자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직화‧세력화를 위해 집단의 보존과 강화에 골몰한 시간 동안 그들은 외부의 가치와 시선에는 무딜 대로 무디어져 버린 것이다. 훼손된 명예와 매도된 존재에 대한 분노로 ‘분신’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할 정도가 되었지만 세련되게 변명하고 항의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에 따르면 서발턴은 “스스로를 말할 수 없는 사람”, 설령 말하더라도 그것을 해석하는 타자의 시점과 언어에 의해 지워져버리고 마는 존재이다. 그들은 어느새 부정을 통해서만 자기를 인식하고, 폭력으로서만 자기를 드러내는 서발턴이 된 것이다. 최초의 적은 이명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이었으나 부정선거 사태가 발생하면서 최우선의 적은 유시민의 참여계가 되었고, 동지에서 적으로, 적에서 다시 동지로 변신한 새진보통합연대도 적이 되었다. 거기에 2000년 민노당 창당 이래 자주파의 또 다른 축으로 굳건한 연대를 이뤄오던 울산연합도 적이 되었고 마침내 국민 다수를 적으로 돌리며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만 것이다.
결론
경기동부연합은 두 가지 기억을 갖고 있다. 하나는 운동의 잠재적으로 승화된 광주대단지 기억이고 또 하나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개인적 삶을 유폐시킨 공동체의 기억이다. 그 기억들은 다시 두 가지 죽음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 하나는 공권력의 계획적 배제와 무책임 속에 굶주려 죽은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고 또 하나는 공권력의 부정의에 항거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전자를 통해 전유된 공포가 망각의 가능성을 약화시켰다면, 후자는 기억 의례의 원천을 제공했다. 경기동부연합은 두 개의 기억을 자산으로 집단의 정체성을 만들고 두 개의 죽음을 채찍질 삼아 일체감과 유대를 강화하여 온 것이다.
그들은 국가가 명명한 이름을 거부하고 그들이 선택한 이름을 부여했다. 1971년 광주대단지 사건에 난동과 폭동의 딱지를 떼고 혁명의 전통이란 훈장을 붙였으며, 국가보안법상 ‘적국’에는 ‘동포’의 이름을, ‘적을 이롭게 하는 행위’에는 자주‧민주‧통일 운동의 표찰을 붙였다. 승리한 지배자의 역사가 아니라 패배한 피해자의 기억을 선택한 것이다. 삶과 유리된 역사 대신 집단의 직접적 경험과 연계된 구체적인 기억을 집단기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집단기억에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 기억의 고착과 집단의 덫이다. 집단기억의 두 함정은 비례대표 사태에서 스스로를 사회적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그 결과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3월 17일 관악을 경선에서의 문자메시지 사건은 조직이 구성원에게 거짓말을 강요한 일이었으며, 5월 12일 중앙위원회의 폭력사태는 자파 아닌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였다. 그들이 단상을 점거하는 순간 세상과 그들 사이에 선이 그어졌다. 그러면서 경기동부연합은 스스로를 규정할 세 번째의 기억과 세 번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부정선거의 주범으로 몰리며 10여 년의 진보정당운동과 수십 년의 자민통 운동이 한꺼번에 부정당한 기억과. 스스로를 말하지 못한 채 분신한 박영재 당원의 죽음이 그것이다. 2013년 3월 현재 그들의 세 번째 기억은 “세계정당사에 유례가 없는 탄압 속에서도 동지애로 철통같이 무장하여, 그 탄압을 정면으로 뚫고” 나온 기억이 되었고, 세 번째 죽음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위하여, 동지를 위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마저 내던”진 사건이 되어, 통진당을 “활활 타올랐던 박영재 동지의 넋이 살아있는 정당”으로 만들었다.
경기동부연합과 세상 사이에 그어진 금에는 공범이 있다. 스스로를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경기동부연합의 인식은 다른 가치체계나 ‘종북’의 꼬리표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꼬리표에 수반되는 억압과 강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억압과 강제의 주체는 바로 ‘국가보안법’이다. 국가보안법은 ‘종북’의 꼬리표가 달린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생사여탈권을 쥔 저승사자와도 같고 그 앞에서는 꼬리표를 뒤로 감춘 채 침묵해야만 한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침묵을 강제당하고 스스로를 대변할 수 없게 되면서 그들의 기억은 서서히 고착되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임미리 2013, 124). 자기검열을 강제하는 국가보안법 아래에서 치열한 비판과 사투(思鬪)는 불가능하고 변화 역시 기대할 수 없다. 기억을 고착시킨 공범은 바로 국가보안법으로 사상의 자유를 금한 대한민국이다.
* 본 기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정성헌) 부설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펴내는 학술지 <기억과 전망> 2013년 여름호(통권 28호)에 실린 임미리(한국학 중앙연구원)의 논문 중 저자의 허락을 얻어 주요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입니다. 원문을 보시고자 하는 분은 이 곳(클릭하시면 다운링크로 이동합니다)에서 받으실 수 있습니다.
* 대문사진 출처: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all&arcid=0007514321&code=4112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