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양 이씨족보서〔興陽李氏族譜序〕
나는 일찍이 선조 문장공(文莊公)께서창석(蒼石)선생이 지은흥양이씨가첩(興陽李氏家牒)에 쓴 발문을 삼가 읽고 그 세덕(世德)과 가풍이 매우 평범하지 않음에 감탄하였다. 시험 삼아 대략 몇 가지를 꼽아 보면,위위공(衛尉公)이 힘써 싸워 충절에 죽은 것과찬성공(贊成公)이 아름다운 명망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것과대헌공(大憲公)이 성대한 재주로 빼어난 행동을 한 것과전주 부윤공(全州府尹公)이 청렴한 지조로 은혜로운 정사를 편 것과집의공(執義公)이 유일(遺逸)로 천거되고 풍재(風裁풍도(風度))를 지닌 것으로 말하면 어찌 그리도 크게 빛나고 융성하게 드러났단 말인가.
대저 그 세덕(世德)이 이미 이와 같으니, 이에 신령하고 빼어난 기운을 기르고 잉태하여 우리월간(月澗)ㆍ창석(蒼石) 두 선생을 낳았다. 그 도학이 이른 바의 덕행과 학업, 문장과 풍모가 성대하게 백세(百世) 뒤에 흠모하게 될 것이 또 어찌 저같이 성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개 나의 선조 문장공(文莊公)은 두 선생과 도의로 교유하여 서로 성(姓)은 달라도 형제라 일컫는 정도에 이르렀다. 그런 까닭으로 이 발문을 지어 이미 그 선대의 아름다움을 일컫고 서술하였으며, 추허(推許)하고 권면하는 뜻으로 이은 것이 매우 정성스러웠고, 또 이제부터 이씨의 경사가 다하지 않아 흥양(興陽) 이씨의 가첩(家牒)이 만들어지는 것이 장차 이 편(編)에 그칠 뿐만이 아닐 것이라고 하셨다. 과연 월옹(月翁이전(李㙉))의 후손으로는사축공(司畜公) 형제,삼휴당(三休堂),생원공(生員公),해남공(海南公)같은 이가 있으며, 창옹(蒼翁이준(李埈))의 후손으로는통례공(通禮公) 형제,신와공(新窩公) 조손(祖孫)그리고유간공(酉澗公)이 있으니 모두 빼어나고 남다른 자질과 고매(高邁)한 행실로 혹 어버이와 스승의 기대하는 바가 되거나 혹 이름난 선비들이 칭찬하는 바가 되어 찬란하게 선대의 아름다움을 답습하여 집안의 명성을 이었다. 비록 근세(近世)로 말하더라도 그 효행(孝行)과 의범(懿範)이 우리 유림에서 일컬어지는 것을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으니,동복공(同福公)이 정사(政事)에 통달했으며, 지금 상사(上舍)승배(升培)군과지헌(持憲),경(坰) 형제가 문학의 우수함에 있어서도 또 모두 모범이 아직 남아 있음을 보기에 충분하다.
나의 선조가 이른바 ‘경사가 다하지 않았다’라는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더욱 믿지 않겠는가. 유독 그 가첩(家牒)을 계속 만드는 것을 오래도록 할 겨를이 없었으나 지금 이씨가 또 번성하여 그 세보(世譜)를 편찬하여 세 권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 무릇 족파(族派) 가운데 먼 곳에 사는 사람도 또한 수록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집안의 어른인요복(堯福)씨가 단정한 선비인학배(學培)를 보내 나에게 서문 한마디 말을 구하였다. 스스로 생각건대 보잘것없고 또 문장에도 익숙지 않으니, 감히 맡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선대의 정의(情誼)가 지극히 두텁고 여러 세대 동안의 교제가 즐거웠으니, 그 부탁받음이 이와 같음에 의리상 사양하지 못할 점이 있어 마침내 절하고 삼가 다음과 같이 쓴다.
천하에 가장 숭상할 것이 도학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 동방의 사대부 집안에 혹 덕행과 학업으로 이름난 사람도 있고, 혹 문장과 절의로 이름난 사람도 있다. 세상에서 더욱 중시하는 바가 반드시 도학 명현의 집안에 있는 것은 저 도학이 운수에 대한 것을 겸하여 가질 수 있고 그 보존한 바를 따라 모두 선을 완전히 다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우리 영남으로 말하자면, 퇴도 부자(退陶夫子)의 집안 같은 경우는 오래되어 말할 것도 없고, 그 밖에는 모두 퇴계 문인의 집안인데, 두 선생은 실로 사숙(私淑)한 어진 이가 되니 그 집안은 세상에서 중시하는 바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직 그 중시함이 다른 집안과 다른 까닭으로 그 완비되기를 요구하는 것도 또한 다른 집안과 다르다. 조금이라도 불선(不善)함이 있으면 “그 집안사람이 이와 같다.”라고 하며 시끄럽게 비판하니 이는 어찌 매우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옛말에 “평범한 사람의 후손이 되기는 쉬우나 어진 사람의 후손이 되기는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이씨 집안에 두 선생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지금까지 세상에 전해짐에 대하여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또한 이미 지난 일을 믿고 더욱 그 정성을 지극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컨대 이씨들은 오직 두 선생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르고 학문에 종사하여 실제로 자신에게 체득할 수 있다면 오직 남들이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 이른바 ‘운수’라는 것에 대해서도 또 겸하여 가질 수 있어 더욱 세상이 중시하는 바가 될 것이다. 훗날 족보에 나열되어 기록될 사람이 또 장차 이 세 권에 실린 것에 그칠 뿐만 아닐 것이니, 이씨들은 힘쓸지어다.
대저 두 선생 이전의 세덕과 가풍으로 또 두 선생의 도학이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드리운 것과 여러 후손들이선조를 닮지않음이 없음을 아울렀기 때문에 그 덕의 쌓임이 더욱 두터울수록 그 흐름이 더욱 멀리 갈 것이니, 이는 그 상서로움이 모인 바가 반드시 다시 세상에 이름난 사람을 배출하여 선조의 덕을 계승하여 조술함을 잘하게 될 것임에 의심이 없다. 그러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에 만약 족보를 본다면 효도와 공손함의 행실을 돈독히 함은선조의 자취를 잇는것 중 한 가지 일이 됨에 불과한 까닭으로 이에 생략하고 다만 비루한 견해를 위와 같이 쓴다.
[주-D001] 흥양 이씨:
흥양은 전라남도 고흥군 일원의 옛 지명이다. 시조 이언림(李彦林)은 고려 의종 때에 병부 상서(兵府尙書), 공부 상서(工部尙書),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 후 흥양에 낙향하여 살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흥양으로 하였다.
[주-D002] 창석(蒼石):
이준(李埈, 1560~1635)으로,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82년(선조15) 생원시를 거쳐 1591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34년(인조12) 대사간을 거쳐 이듬해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창석집》을 남겼으며, 〈형제급난지도(兄弟急難之圖)〉를 편찬하였다.
[주-D003] 흥양이씨가첩(興陽李氏家牒)에 쓴 발문:
《우복집》 권15 〈흥양이씨가첩발(興陽李氏家牒跋)〉을 말한다.
[주-D004] 위위공(衛尉公):
이양승(李陽升, ?~1216)으로, 시조 이언림(李彦林)의 손자이며, 1216년(고종3) 거란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몽골에게 쫓겨 고려를 침공하자 장군으로서 이들을 장흥역(長興驛)에서 격파하였다. 그러나 적이 다시 서경(西京)으로 침공해 오자 이를 위주성(渭州城) 밖에서 맞아 싸웠으나 패전하여 1,00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주-D005] 찬성공(贊成公):
이서원(李舒原)을 말한다. 시조 이언림(李彦林)의 7세손으로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을 지냈다.
[주-D006] 대헌공(大憲公):
이은(李垠, 1436~1498)으로, 이서원(李舒原)의 아들이며 초명은 치(致)이다. 사헌부 대사헌을 지내고 경주 부윤 재임 시 세상을 떠났다.
[주-D007] 전주 부윤공(全州府尹公):
이언(李堰)으로, 자는 심원(深源), 호는 낙빈(洛濱)이며, 이은(李垠)의 아들이다. 성품이 청렴하고 강직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일찍이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는데, 치적이 가장 우수하다 하여 세조가 교지를 내려 승직(陞職)으로 포상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물러나 선산(善山)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의흥(義興)의 나계서원(羅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주-D008] 집의공(執義公):
이수천(李壽川)으로, 성종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었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다.
[주-D009] 월간(月澗):
이전(李㙉, 1558~1648)으로, 자는 숙재(叔載)이다. 창석 이준(李埈)의 형이며,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에 포위된 동생을 데리고 탈출에 성공하였는데, 이를 그린 〈형제급난지도〉가 전해 온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배향되었다.
[주-D010] 사축공(司畜公) 형제:
사축공은 월간의 맏아들인 이일규(李一圭, 1592~1651)로, 자는 경여(敬與)이다. 형제로는 아우 이덕규(李德圭, 1598~1671), 이신규(李身圭, 1600~1681) 등이 있는데, 모두 정경세의 문인이다.
[주-D011] 삼휴당(三休堂):
일규(一圭)의 2남인 이재박(李在博, 1614~1694)으로, 자는 이학(以學)이며, 삼휴당은 그의 호이다.
[주-D012] 생원공(生員公):
덕규(德圭)의 2남인 이재용(李在容, 1619~1671)으로, 자는 이능(爾能)이며, 1651년(효종2)에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주-D013] 해남공(海南公):
이증록(李增祿, 1658~1727)으로, 자는 천여(天與), 호는 무하당(無何堂)이다. 월간의 현손으로, 1708년(숙종34)에 문과에 급제하고 해남 현감을 지냈다.
[주-D014] 통례공(通禮公) 형제:
통례공은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를 지낸 창석의 2남 이원규(李元圭, 1597~1661)로, 자는 기성(器成), 호는 서곡(鋤谷)이다. 형제로는 형인 이대규(李大圭, 1586~1654)와 아우인 이문규(李文圭, 1600~?), 이광규(李光圭, 1607~1652) 등이 있다.
[주-D015] 신와공(新窩公) 조손(祖孫):
신와공은 이재관(李在寬, 1620~1689)으로, 자는 휘언(徽彦)이며, 호는 신와이다. 대규(大圭)의 아들이며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손자는 이증엽(李增曄, 1674~1742)으로, 자는 회백(晦伯), 호는 칠와(漆窩)이다.
[주-D016] 유간공(酉澗公):
이성지(李性至, 1663~1743)로, 자는 중약(仲若), 호는 유간이다. 광규(光圭)의 손자이며, 창석의 증손이다. 저본에는 ‘西’로 되어 있으나, 족보에는 ‘酉’로 되어 있다. 흥양 이씨가 임진왜란 이후 유천(酉川달내)으로 옮겨와 세거하였기 때문에 ‘酉’로 고쳤다.
[주-D017] 동복공(同福公):
이화국(李華國, 1728~1787)으로, 초명은 인원(仁遠), 자는 유기(由己)이며, 유간공의 손자이다. 1765년(영조41) 생원시에 합격하고 호조 좌랑과 동복(同福) 현감을 지냈다.
[주-D018] 승배(升培):
이승배(李升培, 1768~1852)로, 자는 대언(大彥), 호는 수계(修溪)이며 월간의 7세손이다. 상주(尙州) 청리면에 거주하였으며, 정종로의 문인이다. 1834년(순조34)에 생원에 입격하여 학행으로 참봉을 제수받았다.
[주-D019] 지헌(持憲):
조선 시대에 시정(時政)을 논집(論執)하고 백관(百官)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고 원억(冤抑)을 풀어 주는 일 등을 맡았던 사헌부(司憲府)에 소속된 지평(持平)의 다른 이름이다.
[주-D020] 경(坰) 형제:
이경(1765~1815)과 그의 아우 이연(李𡋺, 1772~?)으로, 월간의 8대손이다. 이경의 자는 시응(時應), 호는 서고(西皐)이다. 1789년(정조13)에 과거에 합격하고 정자(正字)를 지냈다.
[주-D021] 요복(堯福):
이요복(李堯福, 1744~1783)으로, 자는 응삼(膺三), 호는 매애(梅厓)이며, 월간의 6세손이다.
[주-D022] 학배(學培):
이학배(李學培, 1759~1831)로, 자는 이열(而悅), 호는 천제(川濟)이며, 창석의 7세손이다.
[주-D023] 선조를 닮지:
원문은 ‘식곡사언(式穀似焉)’인데, 《시경》 〈소완(小宛)〉에 “언덕에 콩이 있거늘, 서민들이 거두도다. 명령이 새끼를 두니 과라가 업어 간다. 네 아들을 잘 가르쳐 선으로써 너와 같게 하라.[中原有菽, 庶民采之. 螟蛉有子, 蜾蠃負之. 敎誨爾子, 式穀似之.]”라고 하였다.
[주-D024] 선조의 자취를 잇는:
원문은 ‘승무(繩武)’로, 선조의 발자취를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 〈하무(下武)〉에 “선조의 도가 이렇게 밝으니, 후세에 선조의 발자취를 계승한다면, 아, 만년토록 하늘의 복을 받으리라.[昭玆來許, 繩其祖武, 於萬斯年, 受天之祜.]”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숭호 (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