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국산 선풍기 75만원…
'한여름 구세주' 정부, 전기 부족 땐 "선풍기 사용 억제" 당부
'32년 만의 폭서'가 열흘째 이어지던 1978년 7월 26일, 아침 8시부터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가전제품 판매점에서 500여 명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됐다. 가게 셔터와 유리창이 부서졌고 판매원 1명은 손가락이 부러졌다. 소동은 선풍기 때문이었다. 찜통더위 속 선풍기가 품절된 가운데, 200대가 새로 판매를 시작하자, 서로 먼저 사려고 난투극을 벌였다(동아일보 1978년 7월 29일 자).
에어컨 시대가 열리기 전 '더위와의 전쟁'에서 선풍기는 첫 번째 무기였다. 언론은 '한여름의 구세주'라고도 표현했다. 날개 달린 이 물건은 정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가끔 품절이 됐다. 그럴 때면 판매점엔 새벽부터 장사진이 펼쳐졌다. 대기 순번표가 배부되기도 했다. '선풍기 대란'이 일어난 1978년엔 대기 티켓 한 장이 1만원(오늘 물가로 약 11만원) 안팎에 뒷거래됐다. 어떤 주부는 선풍기 하나 사려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전자상가의 모든 점포를 기웃거렸으나 빈손으로 돌아갔다.
선풍기가 대중적으로 보급된 건 1960년 국산품 생산이 개시되면서부터다. 처음엔 너무 비싸 서민들은 엄두도 못 낸 물건이었다. 국산 선풍기 첫 모델의 1대 값은 당시 화폐로 3만5000환(오늘의 약 75만원)이나 됐다. 월부로도 팔았다. 그토록 귀한 물건인 데다 운반도 편해서인지 1950~ 1960년대엔 여름마다 선풍기 도둑이 많았다. 1962년 8월 26일 밤엔 문교부 장관실에 있던 선풍기 2대도 도둑맞았다.
어렵던 시절엔 선풍기 바람도 충분히 쏘이기가 어려웠다. 공공건물, 대학 캠퍼스 등에도 선풍기 없는 곳이 많았다. 열차 객실과 철도역 대합실에 선풍기가 처음 설치된 건 1961년 7월 중순이다. 신문은 "교통부가 명랑 여행에 이바지하기 위해 선풍기를 달았다"며 '서비스 혁명'이라고 썼다. 하지만 선풍기는 '중요 열차'에만 돌아갔다. 콩나물시루 같은 3등열차 칸은 1970년대 중반까지도 선풍기조차 없어 여름엔 한증막 같았다.
1960년대에 가뭄으로 수력발전량이 감소하면 정부는 여름 전력 수요를 줄일 궁리를 했고, 그때마다 선풍기도 도마에 올랐다. 폭염이 절정이던 1962년 7월 4일, 상공부장관은 국민들에게 "전력 사정이 긴박하다"며 "TV, 냉장고와 함께 선풍기의 사용을 억제해 달라"고 요청을 했다(경향신문 1962년 7월 5일자).
이제 선풍기가 여름 가전제품의 왕이던 시절은 흘러갔다. 5대 가전제품으로는 TV,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김치냉장고가 꼽힐 뿐 선풍기는 끼지도 못한다. 이 에어컨의 시대에 뜻밖에도 특별한 선풍기 하나가 화제에 올랐다. 서울 삼양동 옥탑방에서 한 달살이를 진행 중인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선풍기 1대를 선물했다고 한다. 시장은 "신접살림에 전자제품 하나 장만한 것처럼 아내가 좋아서 어찌할 줄 모른다"고 했다.
선풍기를 '구세주'라 불렀던 50년 전이 생각나는 언급이다. 물론 선풍기조차 못 돌리는 서민이 아직 있다. 그렇다고 서울시장이 폭염에 선풍기만 쓰는 게 적절한 일인지 의문이다. 에어컨을 틀어서라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서민들 삶의 향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시장의 진짜 할 일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