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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80
요한계시록 20:11-15
생명책에 의한 심판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과연 나는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모든 사람의 목적은 오직 여기에 있기에 종교적 행위는 끊어지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들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의 행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에 끊임없이 기도나 주일성수, 봉사, 구제, 전도, 십일조 이런 것들로 하나님께 나아가 기쁘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본문 말씀에서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과 모순이 되는 것인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의미로 말씀하는 것일까?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11절). “앉으신”의 헬라어 ‘카데마이’는 왕으로서 심판하는 자리에 앉으셨다는 의미이다. “보좌”는 왕이 심판하는 자리인데 “크고”라는 말은 보좌에 앉으신 분의 권능, 영광, 거룩 그리고 위엄을 나타내며, “흰 보좌”란 순전한 진리의 말씀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왕으로서 심판하시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의로운 심판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보좌에 앉으신 분은 누구인가?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1-24)
십자가에 죽임당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시는 심판이고 자기 십자가에 근거하여 심판하신다.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으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가 된다. 그러면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에 사는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공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사 51:6)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의만 남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는데 하늘과 땅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셨다. 즉 바벨론에서 회복되면 하늘로 삼고 있는 눈에 보이는 건물 성전과 이 땅에서 행하는 율법적 행위가 모든 사라져 버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행위와 종교의 문자적 교리를 가지고 구원과 상급을 보증하던 것들은 이제 아무런 소용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7)
여기서 “이전 것”이란 하늘과 땅, 즉 건물 성전과 행위의 율법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혀 새로운 하늘과 땅을 주시는데 그것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벧후 3:10)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늘과 땅의 본질이 다 드러난다는 뜻이다. 여기서 “물질”이란 헬라어 ‘스토이케이온’은 ‘기본 요소, 원리, 기초’라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서는 많은 본문에서 “초등학문”이라고 번역하였다(갈 4:3-5, 9, 골 2:8, 20).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스토이케이온)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2-14)
결국 이 말씀은 처음 하늘로 삼던 건물로서의 성전과 땅에서 행하던 모든 율법적 행위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 안에 들어가게 된 것을 말씀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심판이란 형벌이나 파괴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이루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12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라고 하였는데 죽은 자의 두 모습을 언급한 것이다. 즉 죽은 자들 중에서 하늘의 말씀에 의해 거듭난 자를 “큰 자”라고 하였는데 곧 자기가 부인되고 십자가에 죽은 자들을 의미한다(참고 마 18:4, 눅 9:48). 또 하나는 그냥 육으로 살아 있다고 하나 죽은 자들을 “작은 자”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심을 받기 전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한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그러면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13:8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라고 하여 생명책만 언급하였는데 여기서는 소위 말하는 행위책이 등장한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만 받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늘에서 상급이 차이가 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또 다른 책”이라고 하였을 때 “다른”을 ‘알로스’를 사용하여 같은 것인데 다르다는 의미로 표현하였다(참고 요 14:16). 13:8에서 생명책을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되심을 의미하는 표현이라고 말씀드렸다. 그렇다면 여기서 행위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생명과 행위를 대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즉 생명은 구원이고 행위는 심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성경을 믿음으로 보면 생명책이지만 율법의 조항으로 보면 심판책이 된다. 율법을 하나님의 의로 보면 구원이지만 율법을 자기 의로 보면 심판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 은혜를 입은 자가 보는 것과 십자가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보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나무이기도 하고 선악의 나무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를 위한 선악의 나무로 취하기 때문에 선악 체계 속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하늘의 은혜를 입혀주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취하게 되는 것이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 3:17-21)
“13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13-14절). 죽은 자들을 내어 준다는 것은 죽었던 육체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 아니라 죽은 자들을 내어 주는 것은 바다와 사망과 음부인데 이는 사람들이 용의 생각과 정신에 속해 하나 되어 있다는 말이다. 즉 죄와 사망의 법이 사람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통치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죄와 사망의 통치는, 눈에 보이는 짐승과 음녀 곧 종교 지도자들과 거짓 교사들로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모두 문자적 행위를 강조하여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내어 준다는 것은, 종말이 되면 거짓 교사들에게 속해 있으며 통치를 받던 자들이 모두 죽은 자들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죽었던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라는 말씀은 그 누구도 자기 행위를 근거로 하여 생명을 누릴 수 없다는 뜻이다(참고 눅 9:60). 인간의 행위는 모두 심판 아래 있는 현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일곱 재앙을 반복한 것인데 자기 행위가 철저히 드러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백성은 재앙 가운데서 십자가 은혜로 남기시기에 자기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죄 용서함을 받은 은혜를 고백하게 된다.
“불못”이란 물 대신 불이 가득한 호수로 진리의 말씀이 없고 오로지 자기 행위의 의만 가득하여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물을 가장한 저수지라는 이름으로 있을 뿐이다. 말씀 신앙이 아닌 사람의 계명과 교훈을 지키는 종교 행위라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말씀이 없는 상태를 첫째 부활과 대조하여 “둘째 사망”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라는 말씀은 사망과 음부가 용과 짐승에게 속해 있는 것이기에 사망 그 자체에 있다는 뜻이다. 사망과 음부는 용의 생각과 정신이요 죄와 사망의 법이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5절). “기록되지 못한”이라는 표현은 ‘우 휴리스코’인데 ‘우’는 ‘~아 아니다’라는 뜻이고 ‘휴리스코’는 ‘찾다, 발견하다’라는 뜻인데 수동태로 표현되었으니 직역하면 ‘발견되지 못하였다’라는 말이다. 즉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라기보다 생명책에 발견되지 못한 자라는 뜻으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발견되지 못한 자란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지 못한 자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안에 발견되지 못한 자는 그 자체로 말씀이 없는 심판 가운데 있는 상태이다.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5-2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이 말씀이 내 안에서 날마다 성취되는 것이다(2024060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