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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불교와 기독교의 파아나두라 대논쟁(3)
토론의 개요
스리랑카에서1865년부터 1873년에 걸쳐, 불교와 기독교 교단간의 합의하여 종교적 합리성과 본질에 대하여 대규모의 토론이 군중을 대상으로 공개적으로 다섯 번 거행되었다. 스리랑카의 종교적 도시 다섯 곳에서 이루어진 토론은, 민주적이며 비폭력적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들 일련의 논쟁을 판차 마하 와다야, 즉 5대 논쟁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는 1865년 2월 스리랑카 남부 밧데가마(Baddegama)에서 벌어진 논쟁, 두 번째는 같은 해 8월, 스리랑카의 옛 수도였던 콜롬보 근교인 와라고오다(Waragoda) 논쟁, 세 번째는 1866년 2월 중부 지방인 우단비타(Udanvita) 논쟁, 네 번째는 1871년 6월 같은 중부 지방인 감폴라(Gampola) 에서 논쟁이 있었다. 이 같은 네 번에 걸친 논쟁을 총결산하는 형태로서 다섯 번째의 대론은 콜롬보에서 가까운 해안의 어촌 파아나두라 (Panadura)에서 열렸다.
계속된 논쟁 중에서, 다섯 번째 대론, 즉 1873년 8월26일과 8월28일 양일간에 걸쳐 파아나두라에서 행해진 파아나두라 논쟁은 논쟁의 핵심을 이루고 있으며, 이 토론의 결과로서 스리랑카내의 불교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불교에 대한 새로운 중흥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역사적인 이틀간의 논쟁에는, 불교 측에서 모호티와테 구나아난다(Mohot.t.iwatte Gun.ananda) 비구가 참가했고, 기독교 측에서는 첫째 날에는 데이비드 데 실바(David De Silva) 목사, 둘째 날에는 시리만나(Sirimanna) 전도사가 토론자로서 참가했다. 청중은 첫날 5천 명, 두 번째 날은 1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 앞에서 행해진 종교적 논쟁은 타 종교와 융화(融和)와 공생(共生)을 목적으로 한 우호적인 대화가 아니고,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의 우위와 정당성을 주장하며, 승부를 가리려고 치열하게 다툰 논쟁이었다. 그러므로 양 진영에서는 대론자 외에도 양측 종교를 대표하는 장로와 유력자들이 배석했다. 불교 측에서는 스리랑카 불교의 대지도자인 스망갈라(Sumangala) 장로를 비롯해서 구나라타나(Gun.aratana) 장로 등 4명이 임석했고, 기독교 측에서는 런던(London) 목사를 비롯한 세 명의 목사와 의사, 변호사 등 당대를 대표하는 저명 인사들이 임석했다. 그들은 이 토론에서 감시위원인 동시에 목격자 역할을 했다.
이 대론의 성격을 특징지을 수 있는 것은 전체 진행 규정을 엄밀하게 정하고, 그 규정에 따라 엄숙하게 양 종교 교리의 우열을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논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종교 간 대화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아도, 또 오늘날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아도 대단히 획기적이었다.
첫번째 토론의 요약
1873년 8월 26일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2시간에 걸쳐 실바 목사가 지적한 불교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한 구나난다 스님과 실바 목사간에 있었던 논쟁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대론에 나선 실바 목사는 이 토론의 규정에 따라 먼저 불교의 허위성을 폭로하고자 불교 교리에서는 영혼이 존재치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윤리 도덕이 성립될 수 없지 않은가? 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불교 측의 구나난다 스님은 만약 기독교가 설하는 것과 같이 영원 불멸의 영혼이 존재한다면 살인을 범했다 해도 별문제가 없다는 데에 귀결된다.
예컨대 사람을 죽인 것으로 말미암아 육체가 파괴되어 버린다 해도 영혼은 불멸하기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인간들에게 불멸의 생명 또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생각함으로써 거꾸로 윤리 도덕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라고 되받아 쳤다.
영혼 불멸론이 도덕 성립을 위해서 절대 필요한 조건이라고 하는 실바 목사의 잘못된 전제를 비판한 것이다.
또한 구나아난다 스님은 <개신교 계통의 성서(聖書)에서 성서 본래의 가르침의 어떤 부분을 삭제하고 있다>, 또는 <저희 멋대로 변형 시켰던가 혹은 삭제해 버렸다> 라고 지적하며 구약성서 《레위기》 17장의 기술이 삭제된 부분을 지적했다. 기독교인들이 이같이 자의적으로 성경을 멋대로 고친 태도를 비난했다. 그러고 나서 기독교 하나님의 본성에 관해서 역시 구약성서 《출애급기》 제20장 5절의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Jealous God)이므로> 를 인용해, 기독교의 하나님은 질투심이라는 중대한 결점을 소유하고 있는 이상 전지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고, 구제의 하나님도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또 절대 유일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성경이 각 지역에서 신앙하고 있는 신들의 이름을 빌려 임기 응변식으로 번역되어 하나님의 유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틀간의 논쟁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도 이 하나님의 유일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구나난다 스님의 반론
1873.8.26/오전 09시 부터10시까지 계속된 ,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의 이론에 대한 모호티왓테 구나난다 스님의 대론을 석오진 스님의 저서의 기록에서 인용한다.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가 발표한 불교의 비판은 처음부터 인정될 수 없는 반론이라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청중들이 그의 반론을 듣고 진정으로 이해를 했는지는 저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가 반론으로 제기한 불교 경전의 인용문에 대해서 큰 착오가 있었음을 미리 밝혀 두며 인용한 문장의 의미, 혹 사상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중 한 예를 든다면,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개의 부분은 사람이 죽을 때 그 움직임을 중지하게 되며, 그 때문에 죽은 후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똑같은 사람이 아니고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러한 의미가 아닐까 하고 여러분들 중에 몇 분께서는 벌써 알고 계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저도 똑같은 생각이며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서 반론하고자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금세(今世)와 내세(來世)에 오온으로부터 물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오고 가지 않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여기의 오온으로 부터, 죽는 사람과 함께 내세에 아무 것도 가지 않지만, 죽은 자 대신에 저 세상에 태어나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죽은 자 그 자신인 것입니다 오온에 대한 가르침은 대단히 난해하며 그것은 파알리(Pali)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인용한 데이비드 데 실바 목사는 파알리어를 잘 모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파알리어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불교의 가르침을 오해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는 아무 가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파알리어에 대한 그의 무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의 저서인 <그란타세카라(Grantha-sekara)>라고 하는 책을 보기로 합시다. 이 책에서 신약성서의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만든 4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파알리어의 문장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단어를 단 4개밖에 사용하지 않은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틀린 문법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 문장은 <티와나모 파칫토호투(tava namo pachitto hotu)>라는 문장으로서, 파칫토(pachitto)라고 하는 파알리어의 단어는 없습니다. 그것은 파윗토(pavitto)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와나모(tava namo)라고 남성명사를 사용한 것도 틀린 것입니다. 그러한 짧고 단순한 문장도 정확히 쓰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어느 정도로 파알리어에 대해서 무지한지를 능히 짐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문법에 틀림에 대해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지 못하시더라도 여기에 배석하시고 계신 유명한 파알리어 학자이신 스님들은 이미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파알리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온에 대한 가르침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대단히 가소로운 일아 아닐까요?
오온이라고 하는 것은 색온(色蘊, Rupaskandha, 육체), 수온(受蘊, Vedanaskanda, 감각, 지각), 상온(想蘊, Sanna-skandha, 인식, 견식), 행온(行蘊, Sankharaskanda, 식별력), 그리고 식온(識 , vinnanaskandha, 외면적 자각)을 말하며, 색온은 우리들의 눈으로 보이는 육신이라는 의미이며, 수온이라는 것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께서는 사람이 죽은 후 육체적인 형체는 남는 것이라고 믿고, 그것을 묘지까지 가지고 가서 묘를 만드는 것도 잘 아실 것입니다. 즉 수(受)는 다시 말해서 고(苦)와 락(樂)을 의식하는 동작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저 세상에서는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대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남이 아닌 그 자신인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혼(魂)이 육신에서 빠져나가 다시 태어난다고 하면 천국에 있는 것은 모두가 인간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의 안에 있는 혼은 인간의 영(靈)이라고 우리들은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인간의 영혼이 육체를 이탈해 천국으로 간다면 천국에 거주하는 영은 반드시 인간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계신 목사님이 이 장소를 떠나서 웰라왓타에 간다고 합시다. 그는 그곳에 간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웰라왓타에서도 그는 그곳에서 알려져 있는 똑같은 이름으로써 불리워 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이 만약 육체를 이탈해 천국에 간다면 천국에 있는 것은 모두 인간이라야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는 또 하나의 증거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이 손에 들고 있는 성경책은 모세(Moses)와 그 외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께서 보시는 이 손에 든 성경책은 모세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한 본래의 성경책으로부터 전혀 다른 책으로 변형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변형된 성경으로부터 수많은 변형과 변형을 거듭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물론 내용에 관해서는 크게 변함이 없으리라 봅니다만 이 성경책 본래의 글자나 페이지 수 등은 변형되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본질은 그대로이나 그 이외의 것은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죽은 후 이 사람의 영혼으로부터 어떤 부분 혹은 몸의 어느 일부분이 저 세상으로 가지 않아도 죽은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자신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가 있으니 잘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오고 가는, 즉 윤회(transmigrate)하는 인간은 동일한 인물인가, 그렇지 않은가? 동일한 영혼(identical soul)이 어떤 것은 인간으로 윤회하고 혹은 신으로 또는 천신과 다른 존재로 윤회하는가? 만약 동일한 인간이 이 세상에 죽어 저 세상으로 윤회한다면 죽음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죽음도 없는 것이며 살생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살생을 해도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지 않는가.(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가 이 세상에서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는 그는 이미 이 세상에서 죽은 그와 동일한 사람 혹은 생명체의 존재 물이 아닌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임.)
이 인용은 파알리 삼장(三藏) 중 논장(論藏)의 하나인 <아비담마 피타카(Abhidhamma pitaka)> 카타왓투(Ka-thavatthu, 論事)에 있는 것입니다.
이상의 인용으로 미루어 볼 때, 만약 이 세상을 떠나서 천국에 다시 태어난다면 천국에 체재하는 것은 우리들 인간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이것에 반해서 만약 천국에 있는 자들이 모두 신(God)이라 하면 인간이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틀린 논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보아 기독교가 말하는 인간의 영혼이 천국에 간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천국에는 하나님과 같은 영혼이 존재할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만약에 인간이 이 세상을 떠난 즉시 직접 천국에 가는 불멸(不滅)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라도 살인 범죄와 살생을 저지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에게 불멸(不滅)의 생명 혹은 그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한 순간 죽어 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히 죽는 죽음입니다. 마음속의 모든 사고방식은 순간적으로 생(生)하고 또한 순간적으로 멸(滅)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일어난 생각이 사라진 뒤에 일어나는 생각은 결코 처음에 생각했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생각이 일어나며 또한 소멸되는 것을 순간적인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물질적인 육신은 이와 같이 순간적으로 생하며 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서른 두 가지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일주일에 반 인치 정도 자라는 머리카락이며, 머리카락은 자라면서 흩어져 없어지기도 하고 뽑히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빠르게 자라는 머리카락을 자르기도 하고 혹은 자연히 빠지고 하는 것이 없이 오직 자라기만 하고 빠지지 않는다고 하면 1년에 자라는 머리카락의 길이는 상당히 길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머리에 있는 머리카락은 결코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 있던 그 머리카락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 전체의 다른 부분도 생(生)하고 자라며 또한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색온에 포함되는 부분 혹은 물질적인 육신은 순간적인 죽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늙은 후 혹은 육체의 모든 감각 기관이 힘을 전부 써 버린 후에 일어나는 현상을 극히 자연적인 현상이 죽음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그 옛날의 심식(心識)은 다 없어지고 또 다른 새로운 심식이 생기게 되는데, 다시 태어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식은 쇠사슬의 고리(link)와 같이 중간에 끊이지 않고 계속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멸하지 않는 영혼을 갖는다고 하면, 그리고 이 영혼이 천국으로 모두 간다고 하면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영혼일까요? 그것은 자른 통나무와 같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과일과 같은 것일까요? 혹은 계란과 같은 것일까요? 이러한 것들은 우리 기독교의 목사께서 자세하게 설명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하고 저는 생각하는 바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납득이 될 만한 설명을 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자체가 저 세상을 가는 영혼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계신 목사님은 인간이 이 육체에서 떠나서 천국으로 가는 불멸의 보배, 혹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말씀하신 영혼이 바람과 같은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다른 곳과 함께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것을 정지시키는 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면 되는가를 저는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죽어 가는 사람을 금속으로 만든 용기에 넣어서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통조림통과 같이 한다면, 그 속에 있는 영혼은 그 용기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곳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는 다른 좋은 방도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영혼이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간다고 한다면, 이러한 것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영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죽은 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영혼은 없다는 것이 됩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불타께서는 <자기 자신도 아니고 타인도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인용에 의하면,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며 죽어 가는 사람들이 무엇인가 변화되지 않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죽어간 사람 그 자신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세상에서 일어난 착한 행위 혹은 나쁜 행위의 결과를 저 세상에서 보은(報恩) 혹은 벌(罰)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올바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에 관해서 더 많은 증거로서 증명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만 그것은 금후 다시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계속) (9월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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