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번째 머리 로마제국의 식민 통치 시대와 초대 교회 2부
글쓴이 : 카이로스
1).AD.54년경-AD.305년경 로마 시대의 기독교 박해가 최고조로 극악 했던 10명의 황제들 ①AD.1세기와 AD.2세기.AD.3세기 동안 로마 황제들은 한결같이 기독교을 박해하였으나 ②그중에서도 극악하게 기독교을 박해힌 통치자 10명의 악독한 로마 황제들이 있었다 ③박해의 방법이 악독하기는 무더기로 상상할수없는 갖가지 방법으로 고통속에 참살을 시키는 형태였다
(1)AD.1세기, 기독교 박해 ①제 5대 네로 황제 (AD.54년 - AD.68년) ②제11대 도미티안황제 (AD.82년 - AD.96년)의
(2).AD.2세기.기독교 박해 ①로마 제13대 황제 트라이아누스 (AD.98년 - AD.117년) ②로마 제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 (AD.117년 - AD.138년)와 ③로마 제16대 황제 마루크스 아우델리우스 (AD. 61년- AD.180년) ④로마 제20대 황제 쎌티미우스 세베누스 ( AD.191년- AD.211년)의 박해 였다
(3).AD .3세기.기독교 박해 ①로마 제25대 막시미누스 트락스 (AD.235년 - AD.238년) ②로마 황제 데키우스 (AD.249년-AD.251년) ③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 (AD.253년-AD.260년) ④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AD.284년 - AD.305년)
(4).AD.4세기 기독교 공인 ①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AD.306년 - AD.337년) 기독교의 공인 시대 개막 ②황제 등극과 정책의 변화 (종교의 자유권) ③AD.312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서방의 황제에 즉위하다. ④AD.313년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공인하다
[1].AD. 33년.-AD.313년. 초대 교회의 순교와 박해의 시대 가).로마 통치하에 기독교의 박해시대 AD. 33년.-AD.313년. (AD.1.2.3세기) 나).로마 통치하에 기독교 공인된 황제 콘스탄티누스1세 시대 (AD.4세기) ①로마 통치하에 황제의 명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니케아 종교회의 ②기독교의 성경의 논증시대 (삼위일체 대한 논증)
{1}.AD.1세기 초대교회 시대상 1.AD.33년경-AD.100년경 로마의 통치시대 속에 초대교회의 선교 1).AD.1세기. 복음 전파의 순교와 박해 속에 초대 교회 설립 가). 초대교회의 최초의 복음 전파의 첫 시작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의해 유대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되여 예루살렘 가정교회 모임부터 시작된후 이방지역으로 확대되여 퍼져나갔다 ①AD.33년경-AD.41년경 예루살렘에서 오순절날 공동체의 모임으로 시작된 예루살렘의 교회에서 공회의 핍박과 박해로 유대 사마리아 전지역과 아라비아 .리비아 .알렉산드라까지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②AD.42년경-63년경 이방지역의 시리아 안디옥교회가 설립되고 이어서 시리아 안디옥교회에 시작된 바울의 복음 전파는 유랑인 헬라파 유대인과 현지의 이방인 해당한 전도로서 1차.2처.3차.4차 전도여행이 로마에서AD.64년경 네로황제의 탄압으로 바울의 순교할때까지 이루어졌다 ③세계 각처 이방지역에서 1차.2처.3차.4차 전도여행으로 설립된 초대 교회들은 로마정책에 의한 박해와 현지인들의 반기와 동족인 유대교의 유대인들의 핍박 가운데 은밀한 장소의 집의 모임에서 시작되여 점차 발전하게 된다 ④초대 기독교인들이 복음 전파을 하기 위해 유대교 유대인들과 로마 당국의 핍박과 박해를 끝까지 이겨내던 시기를 말한다. ⑤박해와 탄압의 수위는 지역에 따라 달랐으며 카타콤(지하교회)이나 회당에서도 모이기도 했지만 가장 왕성한 모임장소는 집이었으며. 이 모임이 가정교회였다 ⑥초기 기독교의 가정교회는 나누어져 약 20~40명 정도 모임을 가질 수 있었고, ⑦다락방이 있는 집은 최대 100명까지 모일 수 있었다. ⑧사도행전의 전도여행 당시 초대 가정교회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집(행 12:12), ⑨루디아의 집(행 16:15),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롬 16:5), 빌레몬의 집(몬 1:2)에서 시작되었다. ⑩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를 영접한 이후 자신의 집을 오픈하여 가정교회를 시작했다. ⑪초기의 가정교회는 적은 숫자만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 세례(침례)식을 거행할 공간이 없었다.
(2).AD.42년경-63년경 바울의 전도여행 당시 발달된 육로 교통 의한 활발한 복음의 이동경로 (로마 제국은 합병 통일한 헬라 식민지의 교통 육로의 개발) ①로마 제국이 점령한 지중해 근동의 메소포타미아. 애굽 . 소아시아 . 마케토니아 등 광량한 지역을 역사적으로 한때는 바벨론 제국 지역이였으며 한때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역이였으며 바로 이전에는 헬라 제국의 지역이였더 지중해 근동의 전지역을 로마 제국의 한 통치권으로 통합하였다 ②로마 초대 황제시대에는 기독교의 복음 전도여행의 기간과 맞물린 시대에는 당시 여러 국가들의 부족 간의 갈등을 종식시키고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함으로 교통과 이동은 복음전파의 최대로 편의 하였다 ③ 도로 발달이다. 로마제국은 견고한 도로를 만들어 부국의 기초를 닦았는데, 도로발달은 자연스럽게 도시 발달, 상업 발달, 군사 발달을 이끌어 강력한 로마를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이런 도로 발달은 복음이 쉽고 빠르게 전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④지중해 모든 세력권에 헬라어 통용이다. 당시 헬라어는 문학 언어, 사교언어, 상업 언어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BC 4세기 알렉산드리아 대왕의 헬라 세계 건설은 헬라어가 헬라권 전 지역에 통용되도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고, 훗날 선교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 ⑤디아스포라이다. 로마제국 당시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디아스포라가 로마 인구의 7%를 차지해 이방 선교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바울, 바나바, 마가로 복음이 확장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 AD.42년경 시리아 안디옥교회 설립 이후 부터 시작된 그리스도 이방지역을 향한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 파송시 지중해 근동 지역에 거주한 헬라파 유대인(디아스포라)의 분열 ①헬라파 유대인이란? 디아스포라- 방랑의 유대인 ②헬라파 유대인이란 바벨론 제국시대에 포로시기(BC.605-BC.535년)에 본국으로 귀환하지 못하고 당시 바벨론 제국 통치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을 말한다. ③소위 디아스포라들이다. 당시 디아스포라의 분산에 관해 “이런 민족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나 그들이 소유하지 못한 지역은 한군데도 없을 정도다”고 언급될 만큼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 유대교을 지향하며 회당을 짖고 율법을 지키고 살았다 ④바울 전파시대에는 모든 각지역의 회당과 함께 퍼져있는 헬라파 유 대인들은 두부류로 나누어졌다 ⑤첫째 그리스도 회심하는 헬라파 유대인들 그리스도교로 회심한 헬라파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열과 성의를 다했다 ⑥둘째 유대교을 지키는 헬라파 유대인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와 반감으로 경계하며 핍박하였다
(4),고대 역사속에 이스라엘 왕국은 멸망하여 사라졌지만 끊질긴 민족성의 방랑의 유 대인들 BC.538년경 바벨론 포로 석방시에 바벨론에 남은자들의 이스라엘 후손과 BC.250년경 애굽 알렉산드라시에 이주한자들의 이스라엘 후손을 방랑의 유대인이라 했으며 다섯 번째 머리 헬라시대의 통치지역으로 식민화 되었기에 신약 시대 이르러 헬라파 유대인들이라 일컬었다 ①바벨론 제국이 멸망한후 포로석방시 본국으로 귀향하지 않은 유대인들로 바벨론에 500년 이상을 거류한 자손대대로 이어온 방랑의 유대인들이였다 ②바벨론제국의 70년 동안 고통과 굴욕의 바벨론 포로시기를 보냈고 페르시아시대을 거처 알렉산더 대왕(BC 356-323년)이 헬레니즘 제국을 건설하여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울 때는 문학, 철학, 언어, 상업 등 다양한 분야를 습득한 그곳에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았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선교하는 대 쓰임을 받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5).AD.47년경 이후 .로마 헬라 지역으로 전도여행의 파송된 복음 사역자들은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 뿐아니라 헬라 언어와 문명에 대한 탁월한 능력자였다 ①헬라어에 능통한 자들로 헬레니즘 문화의 문학, 철학, 언어, 상업 등 다양한 분야를 습득한 그곳에 태어나고 교육받고 살았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복음 전도할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에덴 아골라 시민들의 철학논쟁) ②바울이나 바나바 마가 누가 등은 히브리어 능통할 뿐아니라 히브리어나 헬라어 성경의 대한 구약과 그리스도의 복음까지 능통했다 ③바울과 바나바과 디모데(첫 열매, 아들 디모데라고 표현)에바브라,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 스데반 빌립등 일곱집사등 수많은 헬라파 협력자들은 상당한 고급 인력의 헬라파 유대인들이였다
(5).AD.66년경-AD.73년경 유대 전쟁은 전쟁터로 변한 유대 예루살럼 (성전 파괴와 유대 멸망) ①전쟁이후 유대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유대을 떠나 세계 도처로 뿔뿔이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길로 향하였다 ②특히AD.70년경 예루살렘 성전 디도 장군의 총공격이전에 그리스도 유대인들이 유대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디아스포라 유대인 되었다 ③유대전쟁에 유대가 멸망하자 로마 당국은 수많은 전문직 유대인들이나 젊은 유대인들을 노예로 강제 압송했다 ④결국 AD.73년 이스라엘 멸망 이후 오늘날 이스라엘 독립하기까지 1000년간 이스라엘 후손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였다 ⑤특히 선대로 내려오던 회당 중심으로 이루어진 유대교의 헬라파 유대인들중 일부는 복음 전파자들에게 극악하게 박해하는 탄압자의 헬라파 유대인들이 되었다
2).AD.1세기의 예수님의 12 제자들과 전도자들의 순교 시대 (1). 야보보 처형(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이며 형제 사도 요한) ①AD.42.년경 야고보 처형 ②로마 황실로부터 팔레스타인 대왕으로 임명된 헤롯 아그립바1세 (헤롯대왕의 손자)는 조부의 숙청을 피하여 ③로마 황실로 망명 하여 보호 받고 자람으로 로마황실의 배려와 혜택으로 유대 예루살렘을 통치할수 있는 통치권 왕권으로 임명받았다 ④아그립바1세가 유대인들에게 민심과 신임을 얻기위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12제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일이였다 ⑤처음 체포된 제자가 야고보와 베드로 였다 (베드로는 곧 탈옥하게 된다) ⑥AD.34년경. 스데반 집사가 예루살렘에서 공회로부터 돌로 살해된지 9년만에 사건이였다
(2).빌립 ①AD.54년경 그는 채찍에 맞았으며 감옥에 갇힌후 54년경 처형되었다
(3).마태 ②그는 파티아와 에디피아에서 사역을 하였고 에디오피아에서 박해 받았으며 AD.60년경 나다바에서 미늘 창으로 살해 당하였다
(4).작은 야고보 (알패오 아들) ①94세때 그는 유대인들에게 구타 당하고 돌로 맞아 결국 뇌에 손상을 입고 순교했다
(5).맛디아 ①맛디아는 다른 제자들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다 이스카리웃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임명되었다 ②그는 예루살렘에서 돌매질을 당하였으며 후에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했다
(6).안드레 ①안드레는 많은 아시아 국가들에게 복음 전파 하였다 예데사에서 붙들려 십자가에서 처형 되었는데 땅에서 십자가의 두끝을 수직으로 못박혀 죽었다
(7).베드로 ①주님을 배반하고 저주했던 그는 주님의 놀라운 용서를 체험한후 머리가 땅으로 다리가 위를 향하는 자세로 즉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 ②그는 이렇게 주님과 같은 자세로 죽을 만큼 자신이 고귀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8).바돌로매 ①바돌로매는 여러나라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전했고 포악한 우상 숭배자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9).도마 ①도마는 디두모라고 불리며 파티아와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고 ②이곳에서 이교도 제사장들을 격노케 하였다 그래서 그는 창으로 몸이 관통되어 죽었다
(10)시몬 ①시몬의 다른 이름은 젤로 이다 그는 아프리카 마우리타니아에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영국에서도 선교하였다 ②AD.74년경 영국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11).요한 ①이 사랑받는 제자는 큰 야고보의 형제이다 ②예베소에서 로마로 강제 송환 명령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기름이 끓은 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었다 ③그러나 끓는 기름 가마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해을 입지 아니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그후 도미티안은 그를 밧모섬을 추방하였고 요한은 그 곳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였다 ④도미티안이 후계자인 네르바가 요한을 재송환하였다 그는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참혹한 죽음을 피한사람인 셈이다
3).1세대 사역자들 (1).마가 ①마가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의 우상인 세라피스를 기리는 웅장한 종교의식을 할때 순교 당하였다 ②그는 무자비한 처형 방법으로 몸이 ?기며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2).유대 ①그는 AD.72년 에데사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다
(3).바울 ①처음에는 사울은 유대 바리새파의 박해자로 나선후 다메섹에서 회심하여 바울로 개명한뒤 그리스도의 복은 전파하기 위하여 숭고한 희생과 말할수 없는 수고를 치룬후 역시 네로의 박해아래서 순교하였다 ②로마 병사들에 의해 바울은 마을 밖 사형 집행장으로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바울은 기도를 마치고 칼에 목이 베어 순교 당했다
(4).누가 ①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기록자이며 복음 전파자이다 그는 바울과 함께 많은 나라에서 선교했으며 영국에서 선교하였다 ②AD..74년경 그는 영국에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5).바나바 ①바나바는 사이프러스 출신이며 유대인 자손이다 시리아 안디옥교회 초장기 감독을 하였으며 ②제1차 전도여행시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하기도 했다 ③그는 약AD.73년경에 순교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6).BC.1 세기의 순교자 ①무려 7명의 제자들이 그 끔찍한 십자가 처형을 당한것은 성령의 능력 주님의 능력으로 어떤 일을 할수 있는지 보여준다 ②내가 죽어 주님의 뜻을 이룰수 있다면 죽으라 ③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매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것처럼 ④한 영혼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주님을 사랑을 하는가 그분을 위해 목숨을 버렷던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역자들의 밀알로 말미암아 그열매는 수천년동안에서 오늘날까지 셀수없는 모래알같이 많은 열매가 되었다
2,AD.1세기 .역대 로마황제와 기독교의 악순환 관계 1).BC.4년경-AD.100년경. AD.1세기중엽의 로마는 초대 황제부터 4대 클라우디스 황제까지 유대 종교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①로마 제1대(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 BC.27년 - AD.14년,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황조)통치시대 로마 제 2대 황제 티베리우스 통치 시대 (AD.14년 - AD.37년 ) 로마 제3대 황제 칼리굴라 통치시대 (AD.37년 - AD.41년 ) 로마 제4대 클라우디우스 통치시대 (AD.41년 - AD.54년) ②로마의 4명의 황제들의 통치하는 기간에 식민지 유대와의 관계는 총독 정책속에 유대안에 일어나는 문제와 독립에 대한 갈등일 뿐 기독교든 유대교든 종교적 문제에서는 로마가 개입하지 않았다
2).종교 문제에 개입한 폭군. 로마 제5대 황제 네로 (AD.54년 - AD.68년)통치 시대의 혼란 (유대 전쟁의 발발) (1).로마 본토에서 일어난 네로의 통치기간의 기독교의 탄압 ①로마 제5대 네로 황제 통치시대 에는 로마 본토의 바울의 제4차 전도여행으로 본격적인 기독교의 복음전파 확산 되었으며 로마 교회설립되어져간 시기였다 ②로마는 황제 네로 말엽에 본격적으로 극심한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③로마의 초대 교회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되었다. ④네로는 과대망상증 광기로 인해 AD 64년 6월 18일 로마에 불을 지르도록 명령했다. 네로는 크리스천들에게 짐승의 가죽을 씌워서 개가 물어뜯게 했고, 십자가에 못박히게도 했고, 횃불 대신에 사람의 시체에 불을 붙이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바울이 참수형을 당하였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2).네로의통치기간. 로마의 식민지 (팔레스타인) 유대 예루살렘에서 반란의 유대전쟁 ①네로황제가 로마 본토 유대인들의에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하며 로마 사회마져 혼란에 빠지자 ②로마에서 임명받고 유대 예루살렘에 내려온 로마 파견된 총독들 마져 부패하며 총독 임기 동안의 재산을 글어 모으려고 유대 예루살렘에 식민 통치의 정사을 돌보지 않고 유대인들을 착취하기 급급했다 ③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 예루살렘 성전의 성금인 금을 도둑질하는 지경까지 부패하자 유대인들의 무장 폭동으로 이어졌다
(3).AD.68년경의 로마는 네로가 암살된후 행운아 베스파시아누스 유대 진압군 사령관 ① 네로 황제가 암살된후 로마의 당국은 1년6개월간 혼동속에 3명의 장군들의 쿠테타가 이어졌다 (로마 6대 갈바(AD.68년 - AD.69년). 7대 오토 (AD.69년), 8대 비텔리우스(AD.69년) ) ②로마 장군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 진압군 사령관으로 유대 파견 되었다가 진압군 장악권의 군세력으로 로마을 장악 한뒤 제9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AD.69년 - AD.79년)에 등극하는 천하을 얻는 행운아가 되였다 ③그의 아들 장남 티투스는 아버지를 따라 유대 진압군 지휘 부장 장군으로 지휘하다가 아버지가 황제로 등극하는 행운으로 유대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등극하여 유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며 막강한 성전의 금을 탈취하며 로마의 개선문등 원형경기장을 짓는 기금을 마련하며 로마 제10대 황제에 오른 통치기간에 봄페이 화산 폭발이 일어난다(티투스 AD.79년 - 성경사에 디도 장군)
(4).로마 제11대 황제 도미티아누스 (AD.82년 - AD.96년)의 악명높은 기독교 탄압 ①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둘째아들이며 전임 티두스황제의 친 동생 도미티아누스
②로마 황제들 악명 높은 기독교의 10대 박해 사건의 황제들중 도미티안은 두 번째 인물이 된다 첫 번째 박해자 제 5대 네로 황제(AD.54년 - AD.68년)의 박해에 이어 두 번째 박해자 제11대 도미티안황제(AD.82년 - AD.96년)로 기록에 남았다
③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탄압으로 소아시아 있던 사도 요한의 투옥과 밧모섬 유배 도미티안 황제의 박해는 15년 동안 통치하면서 황제 숭배에 박차를 가하면서 이를 어길 시에는 대역 죄인으로 취급하여 타지역으로 추방, 재산 몰수, 맹수와의 결투를 하게 했다. 이때 사도 요한이 도미티안에게 밧모섬으로 유배당하였다. ④로마 제12대 황제 네르바 (AD.96년 - AD.98년 ) 요한 계시록 성령의 계시로 기록 된다
{2}.AD.2세기 초대교회의 시대상
1.AD.98년경-AD.211년경 로마의 통치시대의 탄압속에 초대교회 1).AD.2세기는 AD.70년경 유대 멸망과 세계 각지로 흩어진 유대인들의 복음 전파 (1).유대 전쟁으로 유대을 탈출한 그리스도의 유대인들의 복음 전파 ①유대교 유대인 되었든 그리스도 유대인이 되었든간에 이 민족들은 나라을 잃고 세계 도처을 방랑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방랑의 유대인)으로 한 많은 민족으로 민족의 혈통을 이어가게 된다 ②인류 역사상 민족들이 번성하며 국가을 세우지만 국가가 멸망한후 나라없는 민족들은 400년이 흐르면 점령국에 포함하여 희석 혼합되여 민족이 혈통이 사라지는것이 인류사였지만 유독 유대인들은 오늘날까지 독립의 꿈을 버리지 않고 견디며 이스라엘이란 나라을 세웠다
(2).예루살렘 성전과 전쟁의 원인의 의의 ① 유대는 멸망 하였으며 유대라는 나라는 예루살렘이란 성지만 있을 뿐 유대.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없다 ②유대 이스라엘이 남긴것은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두가지의 종교국 모체로 .남게 되었으며 ③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지는 예루살렘이 되었다 ④유럽의 기독교 예루살렘 성지의 전쟁은 중세기의 아랍과 유럽의 십자군 원정으로 인류 오명을 남겼으며 ⑤ 이 성전의 전쟁은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지구 종말역시 예루살렘의 제 3성전의 건축으로 제3차대전의 유브라데 전쟁의 예언의 계시가 남아 있을뿐이다
(3).AD.2세기는 로마 황제의 탄압에도 소아시아 지역에 교회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시기 ①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7개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빠르게 확산되어 소아시아 중심으로 유럽 마케토니아와 마케토니아 북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소아시아 중심으로 곡과 마곡의 땅인 지금의 소련의 주변국가들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②애굽 알렉산드리 중심으로 리비아 북아프리카 지역에도 교회가 일부 세워졌다. ③로마의 중심으로 (바울의 4차전도여행으로) 로마 본토 복음 전파 후에 서유럽의 프랑스 일부 지역까지 확장되었고, ④로마로 중심으로 서유럽 이었으며 소아시아 중심으로 북유럽과 북러시아 였으며 시리아 중심으로 마케토니아 였으며 이스라엘 중심으로 애굽과 아라비아 리비아 순으로 사방으로 복음전파가 되었다
(4) .초대교회 가정교회의 주된 사역 ①초대교회 가정교회의 사역은 말씀이고,말씀은 주제식보다 강해식 설교가 주류였고 ②식탁교제는 두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아가페라 불리는 애찬식과 주의 만찬식이다. 애찬식에는 그야말로 각기 다양한 사람들이 참석하여 가정교회를 오픈한 집주인의 지극한 사랑과 섬김을 경험하게 되었다. 주의 만찬식은 아주 특별했다. ③초대교회 당시 상하부구조가 확실하고 신분 이동이 불가능한 시대에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더 이상 차별이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을 거행하는 것이 바로 주의 만찬이다. 그야말로 혁신적인 예식이었다.
2).AD.2세기. 기독교 박해가 최고로 극악한 4명의 로마 황제 명단 (1).로마 제13대 황제 트라이아누스 (AD.98년 - AD.117년)의 박해 ①비밀결사대 조직 황제숭배강요 집회불허 투옥시키며
(2).로마 제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 (AD.117년 - AD.138년)의 박해 ①그리스도인들을 극도로 증오하였으며 철저하게 박해 하였다
(3).로마 제16대 황제 마루크스 아우델리우스 (AD.161년-AD.180년) ①질병과 흉년 고문리옹교회와 베일교회에 박해 ②저스틴 .폴리캅 순교
(4). 로마 제20대 쎌티미우스 세베누스 황제( AD.191년-AD.211년)의 박해 ①폭악무도입교금지령 ②이레니우스 오리겐순교
3).AD. 2세기 박해와 순교의 역사 가).AD. 2세기 로마 황제들의 박해의 기록과 순교에 관한 기록 자료는 많다 나).신자들의 자세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록도 많다 다).알일히 다열거할수는 없지만 그중에 몇몇을 열거함으로 시대상을 비추어본다
(1).로마 제13대 트라이아누스황제 (AD.98년 - AD.117년)의 영을 받은 소아시아 비두니아 총독 풀리니 ①로마 12대 네르바 황제는 자녀가 없었기에 트라이아누스 장군을 지목하여 정권이양을 했다 ②트라이아누스 황제의 명에 의한 기독교의 극심한 박해 시대에 소아시아 비두니아 파견된 플리니 총독은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 ③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순교하면서 지키려는 신앙의 이야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④총독 플리니는 기독교인을 정확하게 바라보았고 그는 트라이아누스 황제에게 편지를 쓰게 된다 ⑤이편지가 플리니 서신이였다
(2).로마 제13대 황제 트라이아누스(AD.98년 - AD.117년)의 박해 대한 법령 ①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 이르러 더욱 극심했다. ②이시대에 신규의 로마 법령이 발표되었는데, 로마 통치지역에서는 기독교인만 아니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흉악범이나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극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었다. ③순교자 저스틴(유명한 변증가였던 저스틴 마터 AD.165년 로마에서 순교)자신의 저서인 변증론에서 “기독교인이라는 단어는 곧 죽음이라는 단어의 대명사가 되었다.”라고 증언했다. ④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점점 극심해져서 심지어는 그들을 산 채로 소금에 절인 때도 있었고, 길가의 높은 나무에 매달아 밤새도록 불로 태워 죽인 일도 있었다.
(3).AD.111년경 소아시아 북쪽 비두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플리니의 기독교 업적 ①로마 속주 통치 지역 소아시아 비두니아 까지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독교 박해는 터키 북쪽 해안의 비시니아(비두니아) 지방 총독이던 플리니(AD.111년에 총독으로 임명됨)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사건으로 인하여 크게 완화되었다. ②AD.112년 소아시아의 비두니아 지방 총독 플리니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을 시행하는 와중에서 로마의 법치주의와 종교적 현실이 대립하게 됨에 따라 갈등을 느꼈다. ③총독 플리니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 문제를 문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4).AD.112년,소아시아 비투니아 총독 플리니 갈등속에 재판 요지 (총독의 재판과 판결에 의한 처형) ①플리니가 비시니아 지방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우상 신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의 고발 ②당시 비투니아 지역에는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어 이교도들의 신전들은 텅텅 비게 되었고, 제물로 쓰인 짐승들의 고기는 매매를 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③풀리니가 총독으로 막 부임했을 때 기독교를 증오하는 우상의 신전을 지키는 자가 새로운 총독에게 ④황제의 명이 있던차에 총독의 환심도 사고 득을 얻기 위해 기독교인들의 명단을 고발했다. ⑤새로운 기독교을 금하는 사형집행의 엄한 로마의 법령은 기독교인들은 인정하면 사형을 집행했다 ⑥총독은 황제의 명에 의한 기독교가 불법 이기에 신속히 조사에 들어갔다. ⑦이때에 소환 체포된 자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또는 과거에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현재는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⑧플리니 총독은 독실한 기도교인들의 순교의 정신을 잘았다 ⑨진실 확인의 재판은 너무나 쉬웠다 그들로 하여금 황제의 신상에게 향불을 피운 후 절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라고 했다. ⑩총독은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와 같은 배교 행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⑪이때에 소환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 자들은 총독이 하라는 대로 한 후에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판정을 받고 석방되었다. ⑫그러나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은 목숨을 버릴지언정 배교 행위를 하지 않았다. ⑬플리니 총독은 그들에게 간곡히 세 번의 구명 기회를 주었으나 그들은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총독은 그러한 자들을 처형했고, 그 중에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은 로마법에 따라 처결하기 위하여 로마 법정으로 이송했다. 당시에 로마 시민은 오직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어 있었다.
(양식있는 플리니 총독의 지혜와 갈등)①당시 플리니총독은 두 가지의 의문을 갖게 되었다. ②하나는 ‘과연 기독교인들이 종교로 범죄한 내용이 무엇이길래 불합리하고 합당치 않은 법령을 시행해야 하는지를 ③다른 또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종교가 얼마나 소중하기에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포기하는지 플로니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정말로 충격적 이였다 .
(양식있는 플로니총독의 기독교의 신앙생활을 연구조사 하였다) ①플로니 총독은 기독교인들의 신조와 신앙생활을 자세하게 추적하여 조사 했다. ②플로니 총독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범죄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모범적인 삶을 살고 너무나 신선한 종교였기에 감탄과 충격이였다
(로마 본토와 온 로마 통치지역에는 기독교의 소문은 악행의 종교로 퍼져있었다) ①급작스럽게 기독교의 확장은 이도교들에게 무한한 반감을 일으켰으며 자신들의 생활권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다 (이교도들과 우상을 지키는자들의 생활권이 상급층에서 빈곤층계급 으로 낙후되었다) ②플리니 총독들은 기독교는 소문대로 인육을 먹거나 영아를 살해하여 제물로 바치거나 하지 않았으며, 근친상간을 비롯한 부도덕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③그들은 다만 동이 트기 전에 함께 모여서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찬양하고 그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④이들은 또한 과거에는 공동 식사를 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으나 로마 당국이 비밀 집회를 금지한 후로는 그 모임도 중지했다.
(소아시아 플리니 총독의 기독교에 대한 재조사와 확증) ①플리니 총독은 1차조사의 결과에 만족할 수 없었다. ②기독교에 대한 소문과 실지 기독교에 대한 1차 조사 결과가 너무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④플리니 총독은 이러한 진실을 알아내기 위하여 2차조사을 더욱 철저히 분석조사했다 ⑤거짓 된것을 조사하려고 두 명의 여신도들을 심하게 고문해 보았다. ⑥그러나 결과는 1차조사와 2차 조사는 동일하였다. 설마했던 총독은 매우 당황했다. ⑦아무런 실정법의 범죄도 저지르지 않고 오히려 사회에 유익한 모범적 삶을 사는 자들을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사형을 시키면서까지 처벌한다는 것은 ⑧로마의 법 정신에 위배되는 일이거니와 의회의 정치을 하는 문명의 로마가 야만적인 법령에 대한 현실부각된 로마의 정의로움에 크게 위배된다는 것이 그의 개념이었다. ⑨총독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처벌 문제를 일단 중지시킨 후 황제의 의견을 알아보기 위해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
(로마 제13대 황제 트라이아누스에게 보내는 비투니아 총독 플리니의 공문 ) 황제 폐하 ! ①비투니아 총독 플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로마 신규 법령을 어떻게 적용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②누구든지 기독교도가 되면 꼭 그렇게 처형되어야만 합니까? 그들은 실제로 무슨 나쁜 일을 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입니까? ③만일 피고들이 스스로 기독교도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를 놓아주어도 되겠습니까? ④스스로 그리스도인임을 시인하는 자들에 대해 저는 그들이 로마 시민일 때에는 로마로 보내도록 하고 로마 시민이 아닐 경우에는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⑤허나 저는 그들은 고집이 너무 세기 때문에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⑥저는 재판 과정에서 그들이 폐하의 제단에 분향하고 그리스도를 욕하면 살려주려고 세 번이나 기회를 주었습니다. ⑦1차 와 2차 걸쳐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제가 거느리고 있는 노예중 기독교 집사라고 불리는 여자 노예들이 몇 명 있는데, 저는 그들을 고문했습니다. ⑧저는 그들에게서 몇 가지 미친 생각들 이외에는 나쁜 것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어리석은 것에 감염되어 우리의 신전은 거의 텅 비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비두니아 총독의 질의 공문에 대하여 트라야누스 황제의 교묘한 답신) (황제의 답변을 요약) ①로마 통치 영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은 로마의 법령에 따라야 한다. ②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처벌에 관해서는 별도로 규정한 법이 아직은 없다. ③기독교인들을 특별한 죄를 범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색출해낼 필요는 없다. ④그것은 시간과 국력을 낭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발된 자들은 로마법대로 처벌하라. ⑤재판에서 황제 신상에 분향하고 예를 올리는 자는 방면하되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은 처벌하라. ⑥그러나 익명으로 고발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은 로마의 법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답신의 평가) ①트라야누스 황제의 칙령은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으로 답변을 했다 ②로마제국과 황제의 위신과 자존심을 세우면서 무질서한 고발과 무질서한 체포와 재판과 사형의 무모함을 보류하는 내용이였다 ③계속되는 기독교인들과의 마찰을 피하여 반란의 소요을 방지하며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였다. ④트라야누스 황제의 칙령은 비시니아 총독에게만 전달되었을 뿐이지만 ⑤모든 다른 지역에는 전달되지 않았으나 황제의 명의 공평성으로 다른 지역으로도 확산 적용되었다. ⑥이로써 로마 식민 통치 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게 되었다. ⑦기독교인들의 신앙이나 그들의 신앙적 삶이 국가나 사회에 어떤 위험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때문에 ⑧기독교를 적대시하던 자들이 오히려 기독교에 입문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울러 기독교에 대박해도 당분간은 주춤했다. ⑨이 시기에 시므온이 120세에 십자가에 처형되고, ⑩시리아 안디옥교회 2대 감독이었던 이그나티우스가 AD 107년에 로마제국에 의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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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대사와 구약사 원문보기 글쓴이: 카이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