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외동포, 우리는 왜 그들을 한국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가?" 이 기사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희망세상> 2007년 9월호에 실린 글을 편집진의 허락 하에 '민족문제연구소'가 기고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편집자 주>▲ 영주귀국하는 한인 사진= 사할린 새고려신문 제공 © 플러스코리아 |
|
“어휴, 그거 말로는 다 못해. 날마다 울었어. 날마다 술 먹고 고향가고 싶다, 고향가고 싶다고 하셨어. 그렇게 가고 싶어 하셨는데, 결국엔 한국 못 가보고 돌아가셨지.”10시가 되어서야 어두워지는 사할린의 밤, 민박집 주인 부부는 별 생각 없이 꺼낸 그들의 부모 이야기에 이렇게 말했다. 해방 이전 사할린으로 건너가 1988년 서울올림픽 중계에서 한국을 처음 보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셨다는 주인 부부는 으레 한국의 부모들이 그렇듯이 입버릇처럼 계속 음식을 권하셨다.
러시아 사할린, 인천에서 비행기로 단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 멀고도 가까운 이 동토에서 살아온 4만 7천 명의 한인들은 반세기 동안 고향만 생각하다 한 많은 세상을 떠나갔고, 이제는 단 3천 5백 명만이 남아 영주귀국을 기다리고 있다. 88올림픽을 통해 조국이 헐벗은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지도 이미 20년이 되어가지만, 사할린 한인들은 아직도 고향에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기다린 긴 세월 동안 바뀐 사실이 있다면, 이제 한국은 돌아갈 수 있는 고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입국 비자를 받아야 갈 수 있는 타국이 되어버렸다는 것, 그토록 우리말과 고향의 모습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건만, 한국 정부는 그들을 이제 러시아 국민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지구촌동포연대(KIN)의 국제워크숍을 통해, 지난 7월 7일부터 일주일 동안 사할린 방문에서 내가 가지고 온 것은 현실을 무시하고 탁상행정만 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분노와 지금까지 그들의 한을 모르고 살아왔다는 죄책감이었다. 한정된 지면에 한인들이 평생을 품어온 한을 어떻게 풀어놓을 수 있을까? 일본을 탓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문제보다는 현재의 문제, 즉 영주귀국 문제와 현지의 생계문제에 대해서 쓰는 게 현재의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이 아닌가 싶다.
이산의 땅, 사할린1938년 일제의 총동원령 당시, 사할린 지역에 징집된 조선인들은 고된 노동과 배고픔, 추위라는 삼중고를 겪고 있었다. 국권 상실 이후 일본 국적을 갖게 되었지만, 1945년 8월 러시아의 선전포고 이후 일본으로 귀환하는 일본인들의 틈에 낄 수 있는 자격은 없었다. 오히려 종전 이후 레오니도워나 포르자스코예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사건까지 있었고, 소련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일본인 귀환협정에서도 조선인들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일본은 1957년까지 사할린 내 일본인과 그 가족을 모두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 현지의 한인3세 사진= 임재현씨 제공 © 플러스코리아 |
|
고향을 잃은 조선인들은 고향이 아닌 일본으로 가는 배에 매달렸지만 3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만을 태우고 배는 떠났고, 남겨진 4만 7천 명의 한인들은 반세기 동안 고향을 머릿속으로만 그려야 했다. 대부분 남쪽 출신이었던 한인들은 북조선으로라도 귀국을 하면 걸어서라도 고향에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북조선으로 갔지만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식민지 시절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다시 징용을 당해 가족과 헤어지게 된 경우까지, 남쪽 부모를 떠나온 한인들은 북으로, 일본으로 가족을 보내고 철저하게 찢어진 이산가족이 되었다.
이 땅에 그들을 버려둔 건 일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은 지금까지 이들의 귀환을 요구하면서도 일본에 책임을 전가하기에 바빴고, 북한은 체제 선전을 통해 한인들을 데려가 고향에 보내주지 않았다. 물론 냉전시기 소련과 대화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의 귀환정책을 보면 ‘국민보호’라는 국가의 기본 의무를 한국이 얼마나 방관해왔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의 자국민 귀환사업 내용을 들여다보면 눈물겨울 정도다.
1950년 4월 소련 당국이 소련 내 일본인은 전범을 제외하고 전원 일본으로 송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일본 정부는 이에 반발해 상당수 일본인이 계속 소련에 있으며, 적십자사를 통해 잔류 일본인 송환 문제를 협의하자고 제의하였다. 1953년 소련은 2천 5백 명에 달하는 일본인 죄수를 송환하기로 하고, 1956년 국교회복을 거쳐 1957년까지 사할린 내 일본인과 가족 모두를 송환시켰고, 자국민의 유골까지 모두 본국으로 송환하였다. 또한 소련은 소식이 불분명한 일본인에 대하여 계속 조사하기로 합의하였다. 현재까지도 일본인 본국 송환이 진행되고 있으며, 직계자손의 가족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영주귀국의 함정1957년 귀환한 일본인 중에는 1천 5백여 명 정도의 조선인이 끼어 있었다.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들이 있었고, 일본어를 잘하는 소수의 조선인들은 일본인을 가장해 귀국선에 오를 수 있었다.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사할린에 두고 온 동포들의 귀국운동을 시작했다.
1958년 일본에 귀국한 조선인으로 결성된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는 한인 귀국문제를 공론화했고, 당시 징용된 조선인들이 일본 국적이었으니 한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정치권에서 논의되었다. 결국 1992년 일본의 제의로 양국 적십자사를 통해 한인 영주귀국이 시행되었다. 당시 영주귀국 원칙을 규정하는 법 하나 없이, 한일 양국 실무진들의 탁상회의를 통해 결정된 고령자 우선원칙, 자녀를 제외한 부부귀환 원칙으로 인해 수십 년 동안 러시아인과 결혼해 살고 있던 한인은 고향에 가기 위해 이혼하고 배우자가 죽은 한인들은 즉석에서 황혼 결혼을 하기에 이른다.
영주귀국사업은 당시 일본이 제공한 23억 엔으로 이루어진 사업인 만큼, 사업의 목적도 일본의 의지에 따라 정해진 듯하다. 일본이 정한 원칙에 따라 일본의 자금으로 일본이 실시하고 한국은 영주귀국 시설만 제공하는 상황이다 보니, 한국으로 떠나는 1세 노인들과 사할린에 두고 온 자식들은 또 이산가족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자로 한정하다 보니, 8월 16일에 태어난 한인은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고 8월 14일에 태어났으나 출생신고를 늦게 한 한인은 고국 땅에 돌아올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일본의 ‘당시에는 일본인이었으니 귀국시킨다’는 원칙에 따른다면, 한인들은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일인 1952년 4월 28일이 일본 국적이던 한인들의 국적을 박탈한 시기이므로 현재 한일 양국이 설정한 영주귀국 기준도 그리 타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또 현재 가족을 제외한 1세 부부나 독신끼리 반드시 짝을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 아닌 원칙 탓에 나타나는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적십자사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영주귀국은 합산연령을 기준으로 하며 1945년 8월 15일 이전 출생한 자라 하더라도 배우자가 귀국대상자가 아닐 경우, 귀국을 위해 다른 동반자를 찾아야 한다. 또 1세 노인이라고 하더라도 자식을 여의고 손자를 부양해야하는 경우 영주귀국 방법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 경기도 안산 고향마을에서 합의결혼으로 한국에 정착한 남편이 부인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16년째 사업을 진행하면서도 실제 귀국 한인들의 현실을 도외시하는 영주귀국 사업의 현주소다. 이 상황에서 한인들은 가족을 버리면서까지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영주귀국사업을 통해 지난 15년 동안 1천 7백 명의 한인들이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아직 3천 5백 명(사할린이산가족회, 2007년 8월 통계)의 한인 1세들이 영주귀국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정부는 귀국 당사자들이 원하는 바를 직접 들어야 한다. 80세, 90세에 달하는 고령자들이 고향에 돌아와 살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관련법 제정이 시급하다.지난 2005년 한명숙 의원이 발의한 ‘사할린동포귀국촉진 및 정착지원에관한 특별법안’은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아직까지 계류 중이다. 또 지난 6월 이화영 의원의 외교부 질의에 대한 답변에 따르면, 러시아 국적인 사할린 동포는 러시아 국민이므로, 2·3세는 영주귀국에 동반할 수 없다고 한다.
일본이 시행하고 한국이 보조하는 사업이니 사할린 한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일본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사할린동포지원특별법안도 조속히 통과되어야 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재외동포기본법이 제정되어야 한다. 이 법을 통해 재외동포에 대한 포괄적 정의, 국가의 기본적 책무, 장기적인 국가정책의 대강을 규정지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른바 선진국에 사는 동포들에게는 입국 비자를 쉽게 발급해주고 중국이나 구소련 지역 동포들에게는 외교 관계를 핑계로 입국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것은 정부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동포정책의 형평성에 맞지 않다.
독일의 예를 들어보자. 독일은 2004년까지 구소련 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계 러시아인 400만 명 중 230만 명을 본국으로 송환시겼고 현재도 조부모 중 한 명 독일계라는 것이 증명되면 귀국을 받아들이고 있다. 굳이 선진국을 예로 들지 않아도 헝가리, 이스라엘, 독일, 그리스, 핀란드, 스페인 등 많은 나라들이 자기 나라 재외동포의 본국 귀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
▲ 사할린 동포들이 모여사는 네벨스크의 아파트. 사진=임재현씨 제공 ©플러스코리아 |
|
사할린의 현재사할린에는 현재 140개 민족이 살고 있다. 인구도 전체 56만 명 중 5.5% 정도인 3만 1천 6백 명(2007년 8월, 사할린이산가족회) 정도가 살고 있다. 3세 청년들은 이제 러시아인과 섞여 모든 면에서 러시아인으로서의 삶을 꾸려가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조선교육을 받은 2세들은 여전히 쌀밥을 주식으로 고유문화를 지켜가며 살아가고 있다. 주로 연금(대략 한화로 20만 원 ~ 30만 원)으로 생활 하고 있는 2세들은 쌀농사가 불가능한 사할린에서 중국산 수입쌀을 주식으로 이용했으나 금년 초 사할린 검역당국이 중국쌀 수입을 금지하면서 식생활이 급격히 힘들어졌다.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가 현재 가격이 조금 내려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연금만으로는 생활이 불안정한 상태다.
영주귀국하지 못한 한인들의 생활에도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 1만 6천 명의 한인이 살고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와 같은 대도시의 한인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돌린스크 시 ‘브이코프 탄광촌’의 400명 한인들은 그야말로 1940년대 탄광촌 모습 그대로 살고 있다. 지난달에는 400명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네벨스크 시가 강진 피해를 입었지만, 의료진이나 복구장비가 턱없이 부족해 인도적 지원도 필요한 실정이다.
이제껏 한국이 경제발전과 민주화에 급급해 하느라 재외동포 문제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지만, 민주주의의 의미는 끝없이 확장되어야 하는 개념이지 않은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사는 한인들을 재외동포로 인정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자유출입국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국가는 그런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아닌가? 국권 상실기에 해외로 흩어진 한인들을 모두 불러올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이들을 동포로 바라보는 정책적 일관성을 수립하고 적극적인 역사청산의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진정으로 사할린 동포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포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사할린 한인들에게는 이제 그 대답을 들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글: 정진경 지구촌동포연대(KIN) 활동가 , 대한민국이 재외동포에게 조국보다 모국이 되는 날을 꿈꾼다.[사진제공 지구촌동포연대(KIN)]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6721§ion=section78§io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