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학교 후배가 저에게 보내주신 이메일 중의 일부입니다. 꼭 권하고 싶은 나무이야기라 여기에 옮겨 싣습니다. 심후섭>
희말라야의 산림파괴를 멈춘 인도의 '나무 껴안기 운동'
1970년 7월 20일 희말라야 산맥의 난다데비 산봉우리(7천8백17미터)에 걸린 거대한 비구름이 무서운 장마비로 변해 쏟아지며 엄청난 양의 흙과 돌덩이, 그리고 뿌리채 뽑힌 나무들이 산비탈로부터 무너져 내려 계곡바닥에 쌓이며 계곡을 막고 댐을 만들었다. 삽시간에 불어난 계곡물의 힘을 못이긴 댐이 터지면서 갠지스강의 지류인 아라크난다 강이 넘쳐 흘렀고 교량 여섯 곳과 24대의 버스가 파손되었다. 또한 일개 부락이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6백여 채의 집들이 빗물에 휩쓸려 떠내려갔으며 2백여명이 희생되는 대형 재해가 발생했다.
이러한 산사태와 범람은 1960년대부터 아라크난다 강 유역에서 대규모 벌목이 실시되면서 매년 여름 연례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이 지역주민들은 힌두 전설에 나오는 시바신의 미리털에 해당하는 숲이 파괴되면서 강의 여신인 강가(Ganga)의 분노를 잠재우지 못해 일어나는 현상으로 해석하고 있다.
영국지배시기부터 파괴되어온 산림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에서는 벌목허가의 남발로 무자비한 산림파괴가 자행되기 시작했다. 특히 1962년 중국과의 국경분쟁을 치르면서 해발 5천 미터 이상 산간지역까지 전략적 목적의 도로망이 건설되었다. 도로망 구축으로 산사태나 토양유실이 더욱더 많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특히 벌목업자들이 이 도로망을 임도(林道)로 이용하면서 과거 접근이 불가능했던 지역까지 대대적인 벌목이 가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진정한 의미의 숲이 남아 있는 지역은 전국토 면적의 12%에 불과할 정도로 숲이 파괴되었다. 숲이 사라지면서 과거 인간의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에서 서식하던 수많은 사슴, 곰, 멧돼지, 표범, 식인 호랑이들도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도로변에 가끔 나타나는 원숭이 정도만 남아있을 뿐 대부분 멸종되었거나 멸종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산간지방 사람들은 과거 출몰하던 식인 호랑이들을 무서워했지만 이제는 산사태라는 훨씬 더 큰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나무 살리기 투쟁에 앞장선 여성들
남녀간의 역할이 뚜렷이 구분된 인도의 산간지방에서 여성들은 가사일 외에도 취사와 난방에 쓸 땔감을 구해와야 한다. 한때 나무들은 바로 집 앞이나 마을 주위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 인도의 사정은 그렇지 않다.
마을 인근에서 숲이 사라지면서 여성들이 나무하기 위해 걸어야 할 거리를 점점 멀어져 일부 마을의 여성들은 하루에 왕복 7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걸어 나무를 구해 오고 있다. 약 30킬로그램에 달하는 나무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3∼4시간을 걸어야 집으로 돌아오는 고역을 이기지 못한 일부 여성들은 자살하기까지 한다. 또한 여성들이 나무를 하거나 운반하는 과정에서 가파른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미끄러져 희생당하는 사고도 빈번히 발생한다.
공교롭게도 인도에서 나무를 살리기 위한 투쟁은 역사적으로 여성들의 관심사였다. 인도의 통치자가 백성들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던 몇 백년 전 인도 서부 라자스탄 지방의 조드푸르 공국의 왕이 어느 마을 근처의 한 숲을 베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 숲은 마을 사람들이 신성림(神聖林)으로 여기고 있던 숲이었다.
아미타 데비라고 불리는 여성의 인솔하에 마을 여성들은 숲으로 가 왕이 보낸 벌목꾼들에 대항해 팔로 나무들을 감싸 안았다. 왕이 중단시키기 전까지 데비와 3백62명의 마을 여성들이 벌목꾼들의 도끼질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세계 역사상 나무를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유일한 사건일 것이다.
그로부터 2백50년이 지난 1973년 3월 23일 갠지스 평야지방에 위치한 테니스 라켓 제조회사인 사이몬 사(社)에서 호도나무와 물푸레나무를 벌채하기 위해 산간마을 고페쉬왈로 벌목인부들을 보냈다. 이들이 베려한 나무들은 산림청에 의해 이 회상에 배정되어 산림관들이 고페쉬왈 마을 사람들에게 손도 못 대게 하던 나무들이었다. 가난한 산간지방 마을인 고페쉬왈 마을에서 남자들은 모두 평원지방으로 일하러 나갔기 때문에 여성들이 주동이 되어 벌목대상으로 표시가 된 나무들을 감싸안고 "나무를 베려면 나의 등에 도끼질을 하라"고 소리치며 시위를 벌여 벌목을 저지시켰다.
이를 계기로 이 마을 버스회사 매표원이었던 찬디 프라사드 밧트의 주도하에 힌두어로 '나무 껴안기'라는 의미를 지닌 칩코 안돌란(Chipco Andolan) 운동이 탄생되었다.
비폭력 간디정신과 닮은 칩코운동
고페쉬왈과 레니에서의 성공적인 벌목 저지 소문이 급속히 퍼지며 유사한 방법의 벌목 저지 시위가 곳곳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벌목 저지 시위가 성공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 운동이 인도인들의 정서 깊은 곳에 호소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즉 위대한 혼으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면서 사용한 비폭력 시위의 정신이 벌목저지 시위를 통해 바로 히말라야 산간지방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칩코운동 지도자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칩코운동을 처음 시작한 것은 찬디 프라사드 밧트였지만 그는 칩코운동을 시작할 때 이미 간디의 정신을 전파하던 순데랄 바후구나에 의해 모든 사람을 위한 공평한 복지사회를 건설하려는 사르보다야 사상에 크게 감화를 받은 상태였다. 순데랄 바후구나는 음악연주가들과 가수들을 대동하고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 히말라야 산간마을을 돌며 칩코운동의 정신을 전파해오고 있다.
인도 산림의 미래를 꿈꾸게 한 칩코운동
칩코운동은 1973년 탄생이래 급속한 속도로 확산되어 산간지방 곳곳에 칩코 환경캠프장이 설치되어 산간마을 주민들 뿐만 아니라 외부의 학생, 학자, 마을 지도자들을 위한 회합장소 및 교육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주로 산간마을의 초등학교 건물을 이용하고 있는 칩코 환경캠프에서는 수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마을까지 행진하여 인근의 채광계획을 반대하는 마을의 입장에지지를 보내거나 밀렵으로 멸종위기에 놓인 사향노루의 번식프로그램을 주도하고 있는 정부시험장을 견학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캠프장 주변의 산간마을을 방문하여 각종 임산물을 채취할 때 숲과 나무가 재생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채취해야 한다는 것과 이의 중요성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리는데 소비한다. 즉 지속가능한 산림이용의 철학을 전파하는데 가장 많은 노력을 들이는 것이다.
칩코운동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결국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칩코운동이 지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거나, 1976년엔 36만헥타르에 해당하는 산림에 대해 10년간 벌채금지명령이 내려지게 만드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칩코운동은 또한 백만 그루 이상의 나무를 심으며 인도내에서 가장 성공적인 조림사업을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단체가 되었다. 칩코운동은 외지의 기업이 아닌 마을주민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조림단지를 조성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예를 들어 송진을 생산하는 외부기업인들을 위한 소나무가 아니라 활엽수를 심어 산간마을 주민들이 사료로 쓸 수 있도록 요구하였다. 칩코운동은 산림황폐화의 거센 물결을 막고 그로 인한 많은 피해를 줄이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델리에서 산간지방으로 가는 길가에 즐비하게 늘어선 목재 야적장들이 이 나라의 번영과 발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도로변에 세워진 커다란 입간판에는 "자라나는 나무는 인도의 발전을 나타냅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