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개비 ㅡ 오정순
전복을 손질합니다. 오색 찬란한 껍질의 안에 비해 바깥은 거칠고 볼품없어 어느 손도 타지 않게 위장되어
있습니다. 마치 아름다운 여인이 남의 눈을 탈까 봐 검뎅을 묻히고 다니며 수덕한 끝에 성인품에 이른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것은 감추라는 것을 이들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별 먹이가 되지 못할 말미잘 같은
것은 눈에 띄기 위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는데 쓸 만한 것들은 속에 귀한 것을 감추고 있습니다. 손질하던
전복 앞에서 나는 마음의 집을 어떻게 꾸미고 사는지 나 자신에게 잠시 물어봅니다. 귀한 것을 잘 보존하기
위해 겸양의 양식을 취하는 전복이 보양음식이라는 것은 음식점의 식단표가 말해 줍니다.
나는 몇 해 전부터 여름정리가 끝나면 여름 송별식을 합니다. 햇굴과 육수로 미역죽을 쑤고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 껍질을 숫가락으로 대용합니다. 바닷가의 운치가 살아나고 솔바람이 느껴져 오는 맛에 시작하였는데
해마다 초대되는 사람이 다릅니다. ㅂ 은 구멍이 난 조개껍데기 자리에 나무를 꽂아봅니다. 영락없는 숟가락의
전신입니다. 모든 도구가 이렇게 하여 태어나는 것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시적인
재미로 돌아가는 인간의 마음을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본심의 회귀일 것입니다. 누구나 보기 좋은 것은
보관하고 싶고, 자주 보다 보면 어딘가에 응용하고 싶어집니다. 자개농도 그렇게 하여 개발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전복 껍데기도 잘 손질하여 두었다가 밥상에 재치 있게 써 보려고 손질을 하는데 만만치 않습니다.
손바닥만한 껍데기에 따개비가 대여섯 개씩이나 붙어 두드러기 난 피부처럼 볼썽 사납고 두껍게 보입니다.
그릇처럼 다듬어 놓고 싶어 한창 실랑이를 하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결국 손만 다치고 말았습니다.
요리를 해먹는 것을 잊고 껍데기를 반듯하게 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고 나니까 슬그머니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손 빠르게 육질을 도려내고 껍데기를 큰 접시에 엎어 두었습니다.
전복 죽을 쑤어 먹고 일부는 참기름에 소금을 뿌려 볶았더니 쫄깃쫄깃한 게 흔하지 않은 맛입니다. 다음날
아침, 부엌에 갔는데 꼬롬하고 비릿한 냄새가 나서 쇠수세미로 문질러 보았습니다. 전날 힘든 것에 비하면
허망하게 떨어져 내립니다. 너무나 쉽게 떨어져나가 이상하고 신기하여 껍데기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들이
생물이라는 것을 나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딱딱하여 나를 힘들게 할 뿐이라고만 생각하였습니다.
껍데기 속의 육질이 상해 냄새를 피우고 떨어진 것입니다. 살았기 때문에 흡착력이 강했고 전복이 죽었으므로
따개비도 따라 죽을 수 밖에 없는 같은 운명의 관계였습니다. 무언가 비장감이 들어 나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죽어야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달라붙은 인연 같습니다. 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 같기도 합니다.
큰 전복은 따개비를 두려워해서는 아니 될 운명인 것 같습니다. 붙을 만하니까 따개비가 붙었을 것이기에
수용하는 것이 전복의 잘 사는 방법일 것입니다.
늘 눈에 거슬리는 엄지발가락의 튀어나온 뼈도 따개비로 보입니다. 천날 만날 바라보아도 수술을 하지 않는
한 내가 죽어야 없어질 모양새입니다. 사는 데 마땅찮은 모든 것 모두 전복에 붙은 따개비입니다. 선택이
불가능 합니다. 따개비도 붙을만 하니까 붙었을 것입니다.
작든 크든 '따개비' 붙지 않은 인생 하나 어디 있습니까.(1998)
(오정순 <줄의 운명> 중에서)
창작비평
창작문예수필의 창작개념은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물 창조]라는 것이다.
오정순의 <따개비>는 "사는 데 마땅찮은 모든 것 모두 전복에 붙은 따개비입니다." 라는 비유적 형상물을
창조하고 있다. 이곳의 따개비는 전복에 붙은 자연의 그 따개비가 아니다. "사는 데 마땅찮은 모든 것" 의
비유적(은유) 형상물로서의 따개비다.
이 곳의 '따개비'가 어떻게, 왜 창작물이 되었는가를 구성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두 가지 각도로
작품을 분석 해 보기로 하자.
첫째로는 종결 문단의 "늘 눈에 거슬리는 엄지발가락의 튀어나온 뼈도 따개비로 보입니다."이하의 문단을
모두 지워 보자. 그리고 전체 작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그러니까 "늘 눈에 거슬리는 엄지발가락의 튀어나온
뼈도 따개비로 보입니다." 이전에서 작품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거기까지만 읽어보자는 뜻이다. 어떤가? 거기에서
작품을 끝맺었다 하더라도 기존의 수필쓰기의 한 편의 산문수필로 부족 할 것이 없지 않은가. "죽어야 관계를
끊을 수 있는 달라붙은 인연 같습니다."와 "붙을 만하니까 따개비가 붙었을 것이기에 수용하는 것이 전복의 잘
사는 방법일 것입니다." 만 가지고도 그런대로 주제 감각도 부각 되고 있으므로 산문수필의 종결문단으로 크게
상처 입었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 작품을 거기서 끝냈다면 한 편의 산문수필 작품은 될 수 있었겠지만 '따개비'가 "사는 데
마땅찮은 모든 것 모두 전복에 붙은 따개비입니다."의 창조적 은유로 탄생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만약 한 장의 백지에 "사는 데 마땅찮은 모든 것 모두 전복에 붙은 따개비입니다."라는 문장만 한 줄
쓰여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경우 말은 되지만 이 문장이 창조적 은유로 인식되기도 어렵거니와 이 문장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 의도하는 바도 분명치 않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따개비'가 "사는 데 마땅찮은 모든 것 모두 전복에 붙은 따개비입니다."의 은유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 앞의 전체 작품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그 앞의 전체 작품이 무엇인가? 바로
'따개비'가 "사는 데 마땅찮은 모든 것 모두 전복에 붙은 따개비입니다." 의 은유로 탄생할 수 있게 하는 구성
작업인 것이다. 그 구성 작업의 중요한 역할이 전날 잠을 자기 전에는 손까지 다치면서 떼어내려고 애를 썼는데도
안 떨어지던 '따개비'가 다음 날 자고 일어났더니 맥없이 떨어져 나가더라는 사건 전개다.
이 작품도 필자가 발굴해 내고 있는 다른 창작문예수필 작품들처럼 필자가 [창작문예수필이론서]를 내어
놓기 전에 창작한 작품이다. 그렇다면 작가 오정순과 그 외 창작문예수필 작가들은 어디서 창작문예수필 작법을
배웠기에 일정한 양식의 작품들을 창작해 낼 수 있는 것인가? 신기하지 않은가? 창작이란 일정한 형식이 있다는
것이 창작문학의 이론이다. 그래서 기존의 수필을 말 할 때 '수필은 일정한 형식이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수필은 창작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창작문학이기 때문에 '시'라고 하면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일정한 형식이 있고, 소설도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창작문예수필은 문학 양식 중에 그 존재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문학양식이다. 그런데
어떻게 현대문학 초창기 때부터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시대의 창작문예수필 작품들과 꼭 같은 일정한 양식의
창작 곧 [구성적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물]을 창작하게 된 것일까? 실로 놀랍고도 신기하지 않은가?
필자는 이 같은 발견을 '진화론'으로 밖에 설명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것에 [창작문예수필]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그 이론적 근거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우리 수필문학사에 이 같은 창작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발견된 일이 없었을 뿐이고, 또한 그것을
창작물이라고 논증해 줄 이론이 없었던 것 뿐이다. 그런 결과로 '수필도 문학이냐'는 조롱까지 듣게 되었던 것이다.
이 지경에까지 오게 되었는데도 왜 문학을 이론과 함께 해야 되는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그것도 이름 없는 작가가 아직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면 몰라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차세대 지도자론'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수필문학을 잡문 수렁에서 건져 낼 수 있는 사람은 창작문예수필 작가들 뿐이다.(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