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의 역사
연표
유도는 1882년 가노 지고로
사범에 의해 창시되었습니다.
가노 지고로 는 기존의 유술 각
유파의 뛰어난 부분을 모아 실전성이 떠러지는 부분을 제외하고 연구를 거듭하게되요, 그후 교육적인
관점을 담아 "講道館유도"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유술로서의 기법을 과학적으로 체계화 발전 시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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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 메이지9년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효고현(兵庫県)
미카게쵸(御影町)에서 태어난다.
<사진 오른쪽 가노 지고로 11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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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郷四郎(사이고 시로1863~1922) 「姿三四郎 스가타 산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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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5년3월13일 오다와라번(小田原藩)에서 유술을 가르치던 집에서
태어난 야마시타 요시아키 山下 義韶(やました よしつぐ)
는1884년 8월 "講道館"에
입문한다.
<야마시타 요시아키 1865.3.13 -
1935.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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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 13세의 가노 지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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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 메이지10년(明治10年) 가노 지고로우,
텐진신요류(天神真揚流 천신진양류)의 수행을 개시.도쿄대학에
입학한다.
가노는 이곳에서 급소 지르기기술(当身技-아테미 와자) 굳히기 기술, 조르기 기술을 중심 배우게
되었다.
<가노 지고로 18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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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 메이지12년 미국 제18대 대통령 시오도르 루즈벨트가 일본
방문때, 가노 지고로우가 유술을 소개한다
<시어도르 루즈벨트 Theodore Roosevelt, Jr. ,
1858年10月27日 - 1919年1月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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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 메이지14년 가노 지고로우, 22세에 기도류(起倒流)의 수행을
개시. 던지기 기술을 배우게 된다.
<대학생때 20대
무렵...>
<키토류 수련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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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 메이지15년 23세의 가노 지고로우, 강도관
유도(講道館柔道)를 창시 한다.최초의 입문자는 도미타 쓰네지로(富田常次郎).
도장은 시모타니마치(下谷町)
영창사(永昌寺).12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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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 메이지16년 도장이 코우지마치상(麹町上) 니반쵸(二番町)로
옮긴다.20첩.강도관이라는 이름이 정해진다. 토미타(富田),
사이고(西郷)가 최초의 초단(初段)이
된다.
<토미타 쯔네지로 1865~1937> 西郷四郎(사이고
시로1863~1922) 「姿三四郎 스가타 산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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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4월 요코야마 사쿠지로 (横山 作次郎)天神真楊流에서 강도관
입문 44세의 나이로 1912년 사망하기까지 유도보급에 노력했다.
<요코야마 사쿠지로 1864~1912よこやま
さくじ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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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 메이지17년 강도관의
설날식(元旦式)·경개식(鏡開式)·한연습(寒稽古)·월차 시합(月次試合)·홍백전(紅白試合)이 정해진다.
요즘부터1887년에 걸쳐 투의
(投の形)·고의 형(固の形)의 원형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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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 메이지18년 미시마 미치쓰네(三島通庸)의 요청으로 행해진
경시청 무술 대회(警視庁武術大会)에서 유도(柔道)가
제류유술(諸流柔術)에
압승한다.
<1885 년경, 제자에 가능 학원생들. 중앙 가노 지고로를
둘러싸고 토미타 常次郎, 사이고 시로, 야마시타 요시아키, 유아사 竹次郎 등의 얼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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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 메이지19년 강도관이 후지미마치(富士見町)의 시나가와
야지로저(品川弥次郎邸)로 옮긴다.40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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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 메이지20년 해군사관학교(海軍兵学校)에 유도과가
설치된다.케이오 대학(慶応大), 도쿄대(東京大)에서도 강도관 유도를
시작할 수 있다.유의
형(柔の形)·강의 형(剛の形)·5의 형태(五の形)가 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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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 메이지21년 경시청 무술 대회에서
토츠카파양심류(戸塚派楊心流)에 압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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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
메이지22년 本郷区 真砂町의 육군 시설을 빌려 70 다다미의 도장을 얻는다.上二番町에 강도관 麹町分場을
생긴다.
가노 지고로우, 궁내성
용무괘(宮内省御用掛)로서 1년간 유럽에 파견되어 유도를 소개.
(그 후,1938년까지
12회에 걸쳐 외유 해, 구미제국, 청나라등을 역방해 유도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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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 당시 일본 교육성 장관이 유도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정식으로
학교의 교육과정에 도임 시켰으며 가노 지고로우는 그 당시
유도 교육을 위한 부서의 부서장으로 자리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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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메이지24년 강도관 다시 上二番町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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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메이지26년 강도관에 첫 외국인인 영국인 에이치·M·휴즈
대위가 입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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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 메이지27년 강도관이 시모토미 사카쵸(下富坂町)로
옮긴다.100여첩부의 도장을 신축.
<下富坂 도장 시대의 연습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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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 메이지28년 대일본 무덕회(武徳会) 창설된다.5교(五教)의
기술이 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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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이선길(李鮮吉 1893~1971)
그는 1893년에 태어나 1971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유도인으로 한평생을 살아왔으며 이러한
공로를 인정, 1965년 대한유도회에서도 9단을 수여했다.
이선길은 1932, 1936, 1937년 세차례에 걸쳐 전일본선수권(일반장년부)을 차지함으로써 불멸의 금자탑을 세웠다. 이 당시
일본심판들은 처음 일본선수 편들기를 하다가 이선길의 실력이 워낙 출중하고 기력이 왕성하다는 점을 인정, 이선길의 승리를 판정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훗날 박정준은 은사 이선길을 추모하는 글에서 "제8회 전일본선수권대회에서 그의 기세는 그야말로 무인지경을 가듯 세번의 승부 시간을 합해
10분이 넘지않았다"고 했으며 "일본선수들은 그의 괴력을 무서워하여 손과 발은 댈수 없는 상황이 었다"고 저술 했다
우리 나라 유도계의 선구자인 이선길의 독사진이다. 이선길(李鮮吉; 1893~1971)은 1928년 일본 강도관(講道館)에 입관하여
유도를 수업하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 바 있는 우리 나라 유도계의 선구자이다. 1932년 제3회 전 일본유도선수권대회 일반 장년부에서 우승하고
1938~1939년에 개최된 제7회~8회 대회에서도 우승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치하에서 한국인의 기개와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체육인. 1928년 일본 고도관[講道館(강도관)]에 들어가 유도를 배우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 한국 유도계의 선구자이다.
1932·1936·1937년 등 3회에 걸쳐 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 일반 장년부에서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1965년에는 대한유도회의 공인 9단
자격을 획득하였다.
사진 : 전일본 유도선수권대회에서 3회 우승함으로써 당시 유도계에 신화를 창조한 한국인 이선길 선생(앞줄 중앙)
이선길(李鮮吉)에 대하여..
1893(고종 30)∼1971. 체육인.
1928년 일본 고도관(講道館)에 입관하여 유도를 수업하고 일본에서 명성을 떨친 바 있는 우리나라 유도계의 선구자이다.
1932년 제3회전일본유도선수권대회 일반 장년부에서 우승하고, 1938·1939년에 개최된 제7·8회 대회에서도 연승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치하에서 한국인의 기개와 잠재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1965년에는 대한유도회의 공인 9단 자격을 획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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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 講道館에 입문 : 마에다 미츠요 前田 光世(まえだ
みつよ、1878.12.18 - 1941.11.28) (7段)
브라질로 귀화 후 본명 : Conde
Koma
※닉 네임 콘데 코마(CONDE KOMA)는
그가 1908년 스페인에 왔을 때 붙여진 별명이다.
당시 마에다는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고 특히
재정적으로 몹시 궁핍한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이런처지를 표현하기 위해 심각한 문제에 빠졌거나 진퇴양난의 경우를 가리키는 단어인 "코마루"라는
일본어 어휘를 자주 구사했다. 그는 자신의 파이팅 네임을 마에다 코마루로 쓰다가 그 이름이 별로 세련되게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끝의 음절을
때어버리고 그냥 "코마"라고 지어버렸다.
스페인 언론은 그에게 백작을 뜻하는 "콘데(CONDE)"라는 별명을 지어주었고 그 때부터 그는
콘데 코마로 불리게 되었다.
세월이 흐른 후에는 이 별명이 그의 법적인 이름이 되고
만다.
<18세의 마에다 미츠요
167cm/68kg> 1878년 아오모리 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때 토쿄로 옮겨와 유도를 배우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그가 강도관에 입문한 것이 1897년 이었다고 한다.마에다는 유도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강도관에서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유도가로 대접받게 되었다.
<1904년에 마에다는 사범 중의 한명인 토미타
쯔네지로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범을 보인 장소는 웨스트 포인트에 있는 미 육군사관학교
였다. 웨스트 포인트에서의 시범은 뜻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토미타와 마에다는 카타(품새)를 시연해보였지만 미국인들은 그 두명이 하고 있는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마에다는 시범을 구경하던 학생 중 한명인 레슬링 챔피언에게 도전을 받았고 곧 이어 대결이 벌어지게
되었다
[사진 1910년(明治43年) 마에다 미츠요]
그 학생은 마에다를 누르기(레슬링 스타일의 누르기)로 제압했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레슬링을 처음 접해보는 마에다는 시합을 계속해 상대방에게 관절기술을 걸어 탭(Tap) - 항복의 표시로 바닥을 두드리는 행위 - 을 하게
만들었다.
마에다가 이기자 학생들은 이번에는 토미타가 싸우는 것을 보길 원했고 마에다의 사범인 그가 훨씬
대단한 실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토미타는 나이가 마흔이 넘었고 그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있었다. 그는 마에다와 함께
기술시범을 보이기 위해서 왔지 이런 식의 도전적인 시합에 개입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보다 훨씬 큰 미국인 학생이
덤벼들 때는 잠시 망설였다.
토마타는 그 거한의 몸무게에 짓눌려서 곧 항복하고 말았다.
시범이 끝난 후 둘은 갈라져 토미타는 서부 해안으로, 마에다는 당분간 뉴욕에 머물기로 했다.
마에다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파트 타임으로 유도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거기서도 몇번 도전을 받아 모두 승리했다. 마에다는 뉴욕에서도 유도를
가르쳤지만 미국인들은 일본식 수련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가 가르치던 학생들은 얼마 안 있어 도장을 떠나버리곤
했다.
수입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마에다는 이때부터 상금이 걸린 시합에 참가하게
된다.
강도관의 규정에는 문하생들이 다른 격투가 들과 대결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지만 마에다는 이 규정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으며 그의 파이터로서의 경력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마에다는 약 2000번의 시합을 치룬 것으로 알려져있지만 대부분의
기록은 남아있질 않다. 그는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도전해 오는 모든 사람들과 싸웠다. 그는겨우 165cm의 작은 키였으며 그와 싸우는
상대는 모두 그보다 훨씬 덩치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마에다는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격투기계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고 그의 이름은 일본인 이민사회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
<大野秋太郎(Sautaro Ono)、佐竹信四郎(Nobushiro
Satake))、伊藤徳五郎(Tokugoro Ito)、前田光世(Mitsuyo Maeda) 위 네사람은 15년간 고락을 함께하였다 또한 여러나라를
돌며 타유술과의 격투기를 하였다. 이토는 미국으로 오쿠라와 시미즈는 영국으로 향하고 미츠요는 1917년 브라질로 혼자 돌아와고 결혼을
한다>
1918 ~1919 년경 브라질 카포에라 유술가와의 결투,
1921년에, 브라질 최초의 유도 도장 Clube Remo을 열었다
00
카를로스 그레이시(엘리오 그레이시의 형)에게 유도를 전수하였다 마에다
미츠요의 유파 (그레이시 유술)를 확산 후 이종 격투기 경기를하고 1951년 유도가 기무라 마사히코와 싸우게되었다.
또한 그레이시 가족 이외에도 브라질에서 유도를 가르쳤다, 그 세력중
마에다 파는 브라질 유도 창세기 4 대 파벌 중 하나였다.
<당시 브라질 프랑스 대사인지..사업가인지의 딸이었던 아내 D ·
메이이리스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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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메이지32년 무덕회 유술 시합(武徳会柔術試合) 심판
규정(審判規定)이 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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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 메이지33년 강도관 유도 柔道乱捕시합 심판 규정이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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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메이지35년 야마시타 요시아키 유학(~1907)
한다.유학중,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에 유도를 지도 한다.
<山下 義韶(やました よしつぐ)1865.3.13 -
1935.2.26 : 강도관 4대천황의 한명으로서 최로 10단에 오른 유도가, 1904년 3월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제26대)에 유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05 년 1 월부터는 아나 폴리스의 해군 사관 학교에서 유술을 가르쳤다>
<야마시타 요시아키의 10단증>
1935년(쇼와 10년) 11월 야마시타의 장례식에서 카노 지고로 (당시 76 세)는 야마시타 요시아키 에게 講道館 최초의 '10단
"을 주었다. 2006년 1월, 3명의 유도가에게 추가로 10단 주어져 講道館의 10단 취득자는 총 15명되었다.
<1904년 아내와 미국인 제자>
<백악관에서 주3 회, 시어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유도를 지도했다 야마시타 요시아키. 워싱턴 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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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미후네 규죠(三船 久蔵) 강도관에 입문
생년월일: 1883연 4월 21일
출신지: 이와테현 쿠지쵸
십단
1903년 7월 강도관 입문
1904년 10월 초단
1905년 2월 2단
1906년 1월 3단
1909년 1월 5단 (위사진 5단일때..)
1917년 1월 6단
1923년 1월 7단
1931년 1월 8단
1937년 12월 9단
1945년 5월 10단
「센다이 제 2 중학」을 거쳐 「케이오 기쥬쿠 이재과」에 입학, 그 후, 1903년 7월에 강도관에 입문한다.
항상 기술의 연구를 열심히 임해, 「구석 흘리기」, 「뒤꿈치 반환」, 「비법」등이 새로운 기술을 짜냄과 동시에, 「도쿄 제국대학」,
「메이지 대학」, 「일본 대학」, 「국학원대학」, 「일본 체육회 체조 학교」, 「해군 경리 학교」 등, 수많은 학교에서 유도의 지도에 해당해,
후진의 육성에 다했다.
1956년에는, 유도의 연구에 대해 「자수포장」을 수상해, 또 지금까지의 공적을 칭해 1961년 11월에 「문화 공로자」가
수상되었다.
1965년 1월 27일에 미후네 규죠(三船 久蔵) 생애를 닫는다.향년 8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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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독일에 처음 유도가 전래되었다
아직 유도가 체계를 잡기 이전인 유술로서 독일에 북쪽 작은도시 Kiel(킬)에 일본의 선함이 정박하면서 부터였다.
당시
일본인 사범 한 사람이 빌 헬름 2세의 허락을 받은 후 독일에 유도를 전래 시키기에 이르렀고.
군과 경찰에서는 아주 빠른 속도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1910년 베를린 형사기동대(Erich RAHN/에리히 라한)이라는
경찰 간부에 의하여 경찰내 유도 보급이 활성화 되었으며, 1913년 RAHN이 베를린 군부대에도 유도를 보급 시켰다
그 이후 가노 지고로 처음 독일을 방문, 독일유도협회와 관계를 갖기 시작하였다.>
1914 제1차 세계대전은 이후 4년간 계속되었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되었으며,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이 당시 이미 일본 강도관 유도가 독일군과 독일 경찰에 보급되었습니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연합국들은 독인군의 육박전 실력에...놀라워하였다고 합니다. 연학국은 그 비결이 유도라는 것을 알았고
그후 유도를 적극 받아들이고..보급하게 됨니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 유도를 모방하여 삼보를 만들었습니다 프랑스는 오늘날 자국에서 축구다음으로 인기있는 스포츠로 자리잡았구요 미국의 경우
특수부대를 중심으로 보급된 유도가 전군에서 정식과목으로 교육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서 일본에서 유도사범을 영입하고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군방송에서도 미해병대 유도교관 훈련영상을 방영한적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특수부대와 해병대를 통해서 미국 FBI와 CIA에 많은 요원들이 유입되면서 이러한 기관들에서 유도를 기본으로
하고있게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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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 메이지39년 黑龍會(흑용회)의 창시자 内田良平(우치다
료헤이)에 의해서 조선에 内田道場(우치다 도장) 설립 이 것이
추후 강도관(講道館) 조선지부로 바뀐다.
<우치다 료헤이 :
1874~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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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미국 유도복급을 위해
토미타 츠네지로 富田常次郎(とみたつねじらう)와 마에다 미츠요(前田光世), 사타케 노부시로(佐竹信四郎)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감
<토미타 쯔네지로 1865~1937> <사타케
노부시로 ??? ~1936.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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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 메이지40년 시모토미 사카쵸(下富坂町)에207다다미의
대도장(大道場)이 완성.옛도장(旧道場)은
오오츠카
사카시타쵸(大塚坂下町)에 옮겨지어 개원 사카도장이 된다.이 해, 검도·유도가 중등 학교의 정과가
된다.대일본 무덕회가 투의
형(投の形)·고의 형태(固の形)를 제정한다.
<19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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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 메이지42년 강도관이
재단법인(財団法人)이 된다.본부는 오오츠카 사카시타쵸(大塚坂下町)의 가노의 사저, 下富坂도장이
강도관 제일 도장, 開運坂 도장이 강도관 제2 도장이 된다.가노 지고로우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국제 올림픽
위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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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이상재(李商在)선생의 "장사100명을 육성하라"는
지시로 유도반을 설치하여 그 지도를
무관학교 출신인 유근수 씨 에게 맡겼다가 곧 나수영씨로
교체되었다.
<황성기독교 청년회관, 이것이 한국인이 창설한 최초의
사설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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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황(李濟晃 1910~1981)
이제황은 1910년 1월4일 서울 후암동에서 출생, 북경대학을 졸업하였다.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당시 유도의 본산이었던 YMCA 유도부에
들어가1932년 유도부 정기 승단전에서 초단을 따낸 후 1939년 에 5단으로 승단하였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 일본 강도관 서울 지부 주최로
열린 경기에서 일본인 심판의 편파적인 시합운영으로 이제황이 활약한 YMCA유도팀은 서울의 일본인 유도팀에 참패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그 후
6년간 피나는 각고의 훈련 끝에 이제황이 이끄는 YMCA팀은 일본팀을 이기 고야 말았다.
이제황은 언제나 강인하고 끈기있는 한국인의 면모를 일본인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또 그것을 달성했다. 특히 그는 반일사상이 강하여
일제하 항일민족 활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일제말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기 전 여운형(呂運亨)을 흠모하여 독립운동의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그후 북경에서도 국내 항일단체와 중국에
있는 반일 운동단체의 중간 연락책으로서 활동하였고, 광복 후 선생을 따라 잠시 정치계에 몸담았으나 여운형이 암살되자 조선유도 연맹(현
대한유도회)의 운영에만 전념, 1948년에 대한유도회 이사장, 유도연구원장을 1953년에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유도의 기틀을 닦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1954년에는 석진경, 방영두와 함께 제1회 전국 유도순회강습회를 열어 유도의 보급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대한 유도대학교에서 후생을 양성하면서 유도의 이론정립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58년 동경에서 개최된 제13회 아시아 경기대회의 유도 감독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 서울신문사제정 체육상 지도상을 수상하였고,
1971년 4월에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저서로는 <유도의 정신> <7유도의 정신 과 화랑도> <7유도의 효율적 지도법><선유도>가
있으며 그중 <유도의 정신과 화랑도>는 스위스에서 독어와 불어로 번역, 출간되기도 하였다. 한국유도계의 거목 이제황은 1981년
12월 16일 한해가저물어 갈 무렵 7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으며, 대한유도회에서는 그를 추모하여 10단을 추서했다.
유도의 정신 서문
노자·공자를 비롯하여 동양의 선현들이 유와 강을 비교하여 말하기를 유는 득(得)이요 도(道)요 화(和)하고 기(氣)로운 것으로 통하고
강(强)은 적개심으로 통하여 언제나 유는 강을 승복하고 제압할 수 있는 것으로 논술하였고 또 유(柔)의 뜻을 물에다가 비기어 순리로울때에는
둥글고 모진데 어디에나 따르지만 물이 합하여 물결을 이루고 성낼때에는 그 힘이 거칠고 세어서 막을 길이 없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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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일본의 모든 중학교 교육과정에 유도가 필수과목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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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 메이지44년 7월 가노 지고로우, 일본 체육
협회(日本体育協会)를 설립해 초대회장으로 취임한다.
<일본 체육 협회가 입주한 연안 기념 체육
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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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타이쇼 원년 무술 전문학교(武術専門学校)가
설치된다.(1919년 무도 전문학교(武道専門学校)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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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경(石鎭慶 1912~1990)
한국 유도사상 최초의 10단. 세계 유도인가운데 10단은 일본의 고다니옹과 함께 두 명뿐. 그래서 유성(柔聖)으로
통한다.
선수로서의 경기력은 일찌기 일본 유도를 완전 제압한 이선길이 앞서지만 유단자의 권위로는 석진경씨가 더 높이 평가된다. 이제황씨와는
양대산맥을 이루면서도 용인대의 전신인 유도학교를 함께 창설했다.
1912년 태어난 그는 31년 배재고등보통학교, 36년 일본 리메이깐대학(立命館)법과를 졸업한뒤 일본 강도관(講道館) 6단으로
출발했다. 이어 47년 대한유도회 7단, 58년 8단, 65년 이경석,
한진희씨등과 함께 9단을 받은 뒤 25년만에 10단이라는 입신의 경지에 올라섰다.
그는 이에 앞서 광복 후 제주농업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이후 계속 교직생활을 고집해 왔는데 함흥 영생중 재직시의 제자중에는 이한빈 전
총리도 있다. 한편 61년 부산 동아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유도부를 창설한 그는 정삼현, 조재기, 하형주등 한국유도 중량급 선수를 키우는데
힘썼다.
지난 75년 뇌졸증으로 병석에 누워 하반신불구가 된 뒤에도 제자들을 격려하기를 거르지 않았다. 86년 서울아시아경기 때는 휠체어를 타고
경기를 지켜보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달려온 하형주를 부등켜 안고 눈물을 흘린 감동의 장면은 유도계의 일화로 남아 있다.
61년 대한유도회 회장, 국제연맹 부회장을 역임한 그는 서울올림픽에서 한국이 유도 종가임을 자랑하는 일본의 자존심을 꺾고 최강으로
올라서는 모습을 지켜본 뒤 1990년 78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대한유도회 회장을 역임한 석진경 선생(사진 좌측)의 입명관대학 졸업기념(1935년), 옆에 분이 석진경 선생님의 대학 선배이자
후견인이었던 석당 정재환(二榮 : 이영)박사(사진 우측). 석당은 명문사학 동아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을 역임했으며, 동아래학교에 유도부를
설치하여 석진경 선생으로 하여금 유도를 지도하도록 하였다.
YMCA 유도부 출신의 삼총사 좌로부터 석진경(石鎭慶) 선생, 이제황(李濟晃) 선생, 이원형(李元榮) 선생
(19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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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 타이쇼2년 도쿄 고등 사범 학교 체육과에 무도 전공과가
만들어져 문부성이 지도자 양성에 해당한다.
<고등 사범 학교 학생들에게 허리띄기(浮腰)을지도/ 잡기: 가노
지고로 사범 - 받기 : 야마시타 요시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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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 타이쇼3년 고등전문학교 유도(高専柔道) 대회
시작된다(~1942).
<6고(현재의 오카야마 대학)에서 개발한 앞 삼각
조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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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삼보 :
제정 러시아시대부터 각 지방의 독특한 격투기술을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A.하르란피에프가 정리하여 새로운 체계의
격투기를 만들었다. 원형을 러시아의 스포츠위원회가 새로운 경기로 인정, 승급규정·보급활동방침을 결정하고 1938년에 삼보라는 명칭을 붙였다.
1939년부터 전러시아개인선수권대회, 1949년부터 단체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고, 1968년부터 국제레슬링연맹의 정식 관리종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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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9월 10일, 기무라 마사히코 (1917년~1993년)는, 구마모토현에서 태어나, 75세인 1993년 4월18
일 폐암 사망했다.
그는 나이 10살때 유도 연습을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생이 됐을때, 이미 4단에 도달한다.
1935년, 전일본 대학생 선수권 대회 우승. 그의 첫 번째 우승이 시작되었다, 당시 그는 Kodokan에서 8명을 연속으로 상대를
물리 치는 総当(た)り(소와다리)를 하였고 5단을 수여받게 된다
29세는 7단에 오른다,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위대한 유도가이다. 이 당시 키 171cm 몸무게 84kg 였다.
그는 20세에 이미 무차별 전일본 선수권 우승자였으며 그 후로 13년 동안 타이틀을 유지한다.
1950년 유도계를 떠나 프로유도가 겸 프로레슬러가 되었다.역도산의 프로레슬링에 데뷔. 기무라는 역도산과 경기에서 패합니다.역도산이
당시 생활 형편이 어렵던 기무라에게 거액을 주고 경기를 성사 시켰다고 합니다. 당시에 기무라의 아내는 병약하여 치료비로 인해서 생활 형편이 좋지
못했던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이후 극진가라데 창시자 최영의(최배달)는 "내가 인정한 유일한 무도가도 황금 앞에선 광대가 되는구나..." 라는
말을 남기게 됨니다.
1957년7월 34세의 기무라는(6단) 110kg, 대학 챔이언 야마구치(5단)과 카토 와 함께 브라질에서 엘리오
그레이시(Helio Gracie)와의 경기를 한다
먼저 카토가 엘리오 그레이시 여러번 던졌으나 경기장의 로프에 걸려서 떨어지거나 하여서 충격이 감소된다
너무 쉽게 엘리오는 던지던 카토는 자만에 빠져 실수를 하게되는데..굳히기에서 엘리오의 조르기를 너무 가볍게 보고 그만 조르기로
기절하면서 패하고 만다
그후 엘리오는 야와구치와 기무라중에 둘중 한명에게 도전하게 됨니다. 결국 엘리오는 기무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기는...메치기,굳히기 모두에서 엘리오는 기무라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날 기무라가 사용한 기술은 한팔업어치기,밭다리후리기,삼각굳히기,팔얽어비틀기,누르기 였다.
엘리오는 12분간의 혈투에서도 항복하지 않는 끈기를 보여주었다. 기무라의 팔얽어비틀기에 항복을 하지 않고 버티다 결국 왼쪽팔이
골절된다.
그러나 엘리오는 팔이 뿌러진 상태에서도 포기를 몰랐고 결국 기무라는 엘리오의 손을 들어 엘리오의 승리를 선언해주었다
실제 경기에서는 기무라가 이겼지만. 포기할줄 모르는 엘리오 그레이시의 정신을 인정한것이었다.
경기장은 나오는 기무라는 2천명이 넘는 관중과 브라질 대통령등으로 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키무라 마사히코의 밭다리 후리기 /속칭:먼
밭다리후리기>
<엘리오 그레이시 vs 키무라 마사히코, 팔얽어비틀기를 시도하는 모습..결국 엘리오의 팔꿈치가 탈골하게 된다. 오른쪽 사진은
엘리오 그레이시에게 키무라의 팔얽어비틀기로 공격하는 모습, 이후로 그레이시 주짓수에서는.? 키무라초크 라고고 부르게 된다>
경기를 마친후.. 키무라 마사히코와 엘리오
그레이시(1913년10월1일~2009년1월29일)
온라인상에 보면...이 둘의 경기에서 기무라는 팔염치한으로 엘리오는 영웅으로 묘사하는 글들을 종종 볼수있습니다 기무라가 엘리오의 팔을
무리하게 골절시킨것 처럼 말하죠 실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골절된 정도는 크지않습니다 기무라는 항복을 받으려했으나 엘리오가 항복을 하지 않자
그냥 풀어줌니다 서서건 누워서건 엘리오는 기무라의 상대가 아니었고 기무라는 엘리오의 손을 들어 그의 승리다 선언하고 경기장을 나옴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일부 국내 주짓수인들이 거짓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어 안타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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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타이쇼9년 강도관 단급 규정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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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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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 타이쇼13년 메이지 신궁 국민 체육
대회(明治神宮国民体育大会)·유도 대회 시작된다(~1944).정력 선용 국민 체육이
고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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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임시정부 경호요원이던 김홍식(金弘植) 선생을 송도 교사로 초빙 개성 지역의 유지들이 세운 '광무관' 관장직을
겸임함. 방과후 '광무관'에서 유도부원들이 수련 실시
1929. 10 제1회 '전조선단체 유도대회'에 개성 광무관 단체팀으로 7명중 3명이 가담 출전하여 우승
1931. 7. 1 교내 제1회 유도대회를 개최하다(이후 매년 개최)
1932. 9. 4 유도 구내 도장 기공식
1932. 11. 1 유도장 준공
1938. 10 우천체조장 및 유도장과 운동장 계단의 증개축. 이후 유도 과목을 본교 필수 과목으로 정하여 매주 2시간씩 수업 의무화,
교과목은 엄점득 교사가 지도, 특별활동은 김홍식 선생이 지도.
1940. '전조선단제 유도대회' 독자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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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마에다 미츠요에게 일본 유술인 강도관 유도를 배운 카를로스 그레이시(1902년9월14일~1994년10월7일) 23세는 1925년 그레이시 주짓수 아카데미를 리오 데 자네이로에 창설하게 된다.
마에다 미츠요의 유파 (그레이시 유술)를 확산 후 이종 격투기
경기를하게되었다
미츠요는 그레이시 가족 이외에도 브라질에서 유도를 가르쳤다, 그 세력중
마에다 파는 브라질 유도 창세기 4 대 파벌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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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 쇼와 원년 강도관 여자부(女子部)
발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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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유도의 용어와 기술어가 한글로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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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동경 유학생 무도회 주최 전국 조선 중학교 유도대회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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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쇼와4년 御大礼記念 천황 관람 무도 대회(武道大会)
개최된다.동대회(同大会) 유도란포시합(柔道乱捕試合) 규정으로,
심판원 세 명제와
「우세승 優勢勝ち」(자세姿勢·태도態度·기술技術 등도 심판 기준에 포함한다)이 채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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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6월 지금의 연세대학교 연희전문학교에서 전 조선중등학교 대항유도 대회가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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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쇼와6년 전일본 유도선거사곤다이회(全日本柔道選士権大会)
시작된다(~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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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조선연무관이 이경석 선생에
의해 개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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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 쇼와7년 유도·검도(剣道)가 중학, 사범 학교에 필수과로서
채용된다.전국 중등 학교 유도 쟁패전(争覇戦)이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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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가노 지고로 와 토미타
토요시게(Toyoshige Tomi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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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 쇼와8년 510다다미의 대도장을 갖춘 강도관 水道橋도장이
완성.강도관 본부가 만들어진다.코사키 코우자(小崎甲子), 최초의 여자 초단(初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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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쇼와9년 황태자 탄생 봉축 천황 관람 무도
대회(皇太子殿下御誕生奉祝天覧武道大会)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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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 년 6 월 23 일 올림피아에서 IOC 총회 (아테네) 폐회
후 올림픽 최고 40 년 기념비 앞에서 기념 촬영.
향해 기념비 왼쪽 회장 바이 엘라 도구伯다음 앞줄 그리스 대표 보라나찌
씨는 다음 가노 지고로 다음은 네덜란드 대표.
1938 쇼와13년 가노
지고로우,IOC총회에서 도쿄 올림픽 유치를 결정 후, 귀국 도중에 죽음.향년 77세.난고 지로(南郷次郎)가
2대째 강도관장으로 취임.
<IOC 카이로 회의를 마치고
북미로 향하는 가노 지고로와 쿠베르텡 백작.>
<IOC 카이로 회의 후에, 도쿄 개최를지지하는 미국의 IOC
위원을 예방하고 밴쿠버에서 氷川丸를 타고 1983년 일본으로 출발 (출발 직후 패렴 쓰러졌다).> 그가 강하게 반대하던 전쟁을 선호하는 일본의 극우정당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기도 했다.
가노가 죽음을 맞이하였을때 일본내에는 약 100,000명의 유단자가
배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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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난고 지로가 제 2대 강도관 관장이 된다.
南郷 次郎(なんごう じろう、1876年12月21日 - 1951年3月5日)가노 지고로의 조카.
도쿄도 출신. 난고 시게미츠(南郷茂光)의 장남으로 출생. 학습원 해군 예과를 거쳐 1898년 (메이지 31년) 12월, 해군사관학교
(26기)를 졸업하고 1900년 (明治/메이지 33년) 1월 해군 소위 임관. 러일전쟁 제4정 대정(艇長)으로 출정하고, 제1정 대정으로
돌아섰다. 1905년 (메이지 38년) 12월 해병 간사에 취임. 해군대학교 종학생(海軍大学校乙種学生), 해군 수뢰 학교 고등과 학생으로 배우고
1907년 (메이지 40년) 9월, " 「初霜」첫 서리 " 구축함 이름입니다 " 「鹿島」가지마 " 수뢰(水雷/어뢰정)를 거쳐 1908년 (메이지
41년) 9월 해군 소령으로 진급 "「常磐」 조반 "수뢰장에 취임. 수뢰 학교 강사를 거쳐 1910년 (메이지 43년) 11월, 해군 대학교
(甲種/갑종 8 기)를 졸업했다.
1910년 12월 " 「薩摩」사츠마 "수뢰 장이되고, 해병 강사를 거쳐"「浅間」아사마 "부장으로 돌아서 1913년 (타이쇼 2년)
12월 해군 중령으로 진급. 1916년 (타이쇼 5년) 2월부터 히가시후시미궁(東伏見宮)의 히토시 황태자(依仁親王)부 무관(武官)을 맡아
1917년 (다이쇼 6년) 12월 해군 대령으로 진급.
1919년 (다이쇼 8년) 2월, "「春日」봄날 " 함장 에 취임한 이후 " 「香取」카토리 "함장, 군령부 부관 , 군령부 출사를
역임. 1922년 (다이쇼 11년) 12월, 해군 소장으로 이동 사세보 방비대(佐世保 防備隊) 사령관에 취임했다. 1923년 (다이쇼 12년)
12월 대기발령 되어, 1924년 (다이쇼 13년) 2월, 예비역으로 편입하였다.
이후 제2대 강도관(講道館)장으로서, 대일본 국수회(国粋会) 이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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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 전일본 유도 선 시현 대회의 정력 선용 국민 체육 연약한 식
상대 운동 연기
정력 선용 국민 체육 연약한 식 상대 운동의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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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 쇼와15년 황기2천6백년봉축 천황 관람 무도
대회(皇紀二千六百年奉祝天覧武道大会)·기원2천6백년 봉축 카시하라 신궁
봉납 무도
대회(紀元二千六百年奉祝橿原神宮奉納武道大会)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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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 유도가 초등학교 5학년 이상의 필수 교재가 된다.
1943 제1회 프랑스 유도 선수권 대회 개최.여자 유도 호신법이
제정된다.
1945 일본은.? 패전에 수반해, 학교에 있어서의 유도가 금지된다.
1945 8.15해방과 함께 10월 조선유도연맹이 결성되었고, 유도의 용어를 새롭게
정비하여 보급하였다.
1946 대일본 무덕회(武徳会)가 정식 해산한다.가노 리세이, 3대
강도관 관장이 된다.
<嘉納履正(かのう りせい 1900年11月25日-1986年1月13日 /가노 리세이 - 가노의
둘째아들>
카노우 지고로의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1938 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 대째 관장인 난고 지로(南郷次郎) 이후 1946 년에 講道館 제 3 대 관장에 취임 (1980 년까지), 1949 년 전일본
유도 연맹 초대 회장에 취임 (1980 년까지),全柔連이 국제 유도 연맹 에 가입한 1952년~1965 년까지이 연맹의 회장을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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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런던에서 유럽 유도 연맹이 결성된다.전일본 유도 선수권
대회가 개최된다(1948~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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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전일본 유도 연맹이 탄생한다.
1950년 체육 교재로서 유도가 다시 인정된다.
1951년 유럽 유도 연맹이 조직 바꾸어, 국제 유도 연맹(IJF)이
발족.가맹국18개국.제1회 유럽 선수권 개최.전일본 학생
유도 연맹 발족.전국 고등학교 체육 연맹에 유도부 발족.강도관 유도 시합 심판 규정 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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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957년7월
34세의 기무라는(6단) 110kg, 대학 챔이언 야마구치(5단)과 카토 와 함께 브라질에서 엘리오 그레이시(Helio Gracie)와의 경기를
한다. 먼저 카토가 엘리오 그레이시 여러번 던졌으나 경기장의 로프에 걸려서 떨어지거나 하여서 충격이 감소된다 경기장이 유도 경기장이었다면
엘리오는 불구자가 되었을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유도 경기장 이었다면.? 이부분은 이 당시 공식적인 경기가 열리는 유도 경기장은 권투링만큼이나
높게 설치가 되어 경기장 위험선에 나무로 표시를 하는 형태였습니다.실제 경기중에 사망 사고가 많았고 그러한 이유로 유도는 경기규정에 바꿔나가기
시작하게 됨니다.) 너무 쉽게 엘리오는 던지던 카토는 자만에 빠져 실수를 하게됨니다. 굳히기에서 엘리오의 조르기를 너무 가볍게 보고 그만
조르기로 기절하면서 패하고 만다. 그후 엘리오는 야와구치와 기무라중에 둘중 한명에게 도전하게 됨니다. 결국 엘리오는 기무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기는 메치기,굳히기 모두에서 엘리오는 기무라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날 기무라가 사용한 기술은
한팔업어치기,밭다리후리기,삼각조르기,팔얽어비틀기,누르기 였다. 엘리오는 12분간의 혈투에서도 항복하지 않는 끈기를 보여주었다. 기무라의
팔얽어비틀기에 항복을 하지 않고 버티다 결국 왼쪽팔이 골절된다. 그러나 엘리오는 팔이 뿌러진 상태에서도 포기를 몰랐고 결국 기무라는 엘리오의
손을 들어 엘리오의 승리를 선언해주었다. 실제 경기에서는 기무라가 이겼지만. 포기할줄 모르는 엘리오 그레이시의 정신을 인정한것이었다. 경기장은
나오는 기무라는 2천명이 넘는 관중과 브라질 대통령등으로 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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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 전유련이 국제 유도 연맹에
가맹.동시에 嘉納履正 강도관장이 국제 유도 연맹 회장으로 취임.제1회 전국
고등학교 유도 대회(인터하이)
개최된다(1952~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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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전 조선종합경기대회
유도경기 계회식 광경(195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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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한국유도를 이끌 중견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지금의 용인대학교인 대한유도학교가
古이재황 선생에 의해 설립되었다.
<1960년, 사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두번째
이제황(李濟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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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한국유도가 최초로 해외에서 사절단으로 진출한
것은 1955년 7월에서 10월까지 3개월간에 걸처 구라파지역 순방이었다.
단장으로는 박정준(7단), 감독 석진경(8단), 주무 방영두(7단), 현역 선수로는
권용우(5단),이석도(5단), 현동섭(4단)이 선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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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강도관 유도 시합 심판
규정 개정(절반 이후의 「누르기」25초 등이 정해진다).
1956년 제1회세계 유도 선수권이
개최된다(1956~현재).강도관 호신술이 제정된다.
1956년 재단법인 한국 유도원이 발족되었으며, 그 해 제1회 세계유도선수권대회가 도쿄에서
열렸다.
1958년 강도관이 분쿄구 카스가쵸(文京区 春日町)에
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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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IOC총회에서 유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다.
1961년 IJF에서 체중별 시합의
채용을 결정한다. 4계급제.
1961년 제3회 프랑스 파리
세계유도선수권대회에 참석한 한국선수와 임원진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 한호산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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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도쿄 국제 스포츠
대회(Pre- Olympic) 유도 경기 개최된다.체중별제 채용.
1964년 올림픽 도쿄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제1회 유럽 학생 유도 대회 개최된다.
1964년 제18회 동경올림픽대회 때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 실시되었고,
김의태(-80kg)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1위 오카노 이사오(일본)과 3위를 차지한 김의태 선수의 시상식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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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세계 대학 유도 선수권 대회 개최된다.제1회 전일본 선발
유도 체중별 선수권 대회 개최된다.
1966년 제1회 아시아유도선수권대회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계기로 아시아 유도가
발전하였다.
1967년 IJF시합 심판 규정이 제정되는·IJF체중 6계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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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U대회서 은메달 딴 김회장 김정행 회장은 첫 국가대표 출신 대한체육회 수장이다. 196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은메달을 딴 뒤 시상대에 선 김 회장(왼쪽). 동아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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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올림픽 멕시코 대회 개최된다.하지만 유도 경기는 채용되지
않고.
1969년 유니버시아드 도쿄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
1970년 전일본 신인 체중별 선수권 개최된다(1992년부터 전일본
쥬니어 선수권으로 변경).전국 중학교 대회
개최된다(1970~현재).
1972년 올림픽 뮌헨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
1972년 제20회 서독 뮌헨올림픽대회 때에 오승림(-80kg)선수가 은메달을
획득하였다.
<가운데 오승립 선수, 준우승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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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세계 쥬니어 유도 선수권
대회 개최된다(1974~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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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올림픽 몬트리올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동대회에서
「효과」가 채용된다.제1회 강도관배 개최된다.
(아래.)1976/07/29 유도
장은경, 몬트리올 올림픽서 <은>
올림픽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금메달의 쾌감을 맛 본 선수는 몇해 전 심장병으로 사망한 고(故) 장은경
선생님이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유도 라이트급에 출전한 장은경 선수는 결승전에서 쿠바의 헥토르 로드리게즈와 만났다. 처음에는 로드리게즈가
유효 3개를 빼앗으며 앞서 나갔다. 그러나 지구력이 강한 장은경은 맹렬하게 반격해 유효 2개에 버금가는 점수를 땄고 로드리게즈보다 더
공격적이었다.
이제 심판의 판정만 남았다. 주심은 장은경의 승리를 선언했고, 유도장은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딴 코리아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3분이나 지났을까? 주심은 판정을 번복했다. 로드리게즈가 이겼는데 잘못 판정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장은경은 3분 동안 올림픽 금메달, 그것도 건국 이후 첫 금메달리스트의 황홀감을 맛보았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유도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재일교포 박영철 선수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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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IJF체중별,8계급제가 된다.
1978년 전일본 여자 선발 체중별 선수권 대회 개시된다.가노
지고로우배 국제 유도 대회 개최된다.
1979년 전국 고등학교 유도 선수권 대회 개시된다(1979~현재).
1980년 가노 유키미츠, 4대째 강도관 관장이 된다.올림픽 모스크바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
세계 여자 유도 선수권
대회 개최된다.
<嘉納
行光(かのう ゆきみつ、1932年 - )가노 유키미츠/가노 지고로의 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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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강도관 시합 심판 규정·소년 규정」이
제정된다.
1983년 전일본 유도 연맹과 전일본 학생 유도 연맹의 대립 문제가
발발한다.후쿠오카 국제 여자 유도 선수권 대회
개최된다.
1984년 강도관 국제 유도 센터가 완성한다.올림픽 로스앤젤레스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야마시타 야스히로 6단이
국민영예상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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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유니버시아드 코베대학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
1986년 학생 유도연맹 문제가 타결을 본다.새롭게 일본 학생 유도
연맹이 설립되어 전일본 유도 연맹은 재단법인이 된다.
1988년 올림픽 서울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동대회에서 올림픽
무차별급 폐지.여자 공개 경기 개최.
1989년 중,고교에 있어서의 유도 수업의 운동 영역명을 「格技 격
기술」로부터 「武道 무도」라고 하는 것이 정해진다.
1992년 올림픽 바르셀로나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동대회에서 여자
유도가 올림픽 정식 종목에 채용된다.
1994년 월드컵 개최된다.
1995년 강도관 오사카국제 유도 센터(강도관 오사카 지부)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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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올림픽 아틀랜타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
1997년 전일본 유도형(形 KATA) 경기 대회
개시된다.IJF총회에서 컬라 유도복(청색)의 도입이 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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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IJF체중제 구분
변경된다(1998~현재).누르기의 포인트 규정 개정된다(25초에 한판, 이하 5초간격).
1999년 버밍함 세계 선수권으로부터, 여자의 검은띠(黒帯 흑대)의
백선이 없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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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올림픽 시드니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동대회 중량급 결승으로 시노하라의 허벅다리 비켜 되치기 의 판정을
둘러싸 오심 논의 일어난다.
2003년 IJF시합 심판 규정에
있어 골든 스코아 방식이 제정된다.
2003년 3월 Daum 카페에
유도장카페 개설, 다음해인 2004년 2월 NAVER 카페로 이전한다
2004년 올림픽 아테네 대회 유도
경기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