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2장
직분자의 사랑으로 책망하고 용서하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
(찬송 289장)
2023-4-11, 화
맥락과 의미
고린도후서만큼 아름답고 실제적인 본문이 없습니다. 어렵지만 지혜가 많습니다. 사례를 중심으로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인 사이에 일어난 실제 예를 통해 가르칩니다.
바울은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에 디도를 보내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가 돌아와서 고린도 교회가 회개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을 다음에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2-7장은 디도를 기다리던 중 일을 회고하면서 사도의 직분은 무엇인가? 사도가 전하는 복음은 무엇인가를 다시 말해줍니다.
2장의 전체 내용은 사도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사랑으로 책망했다는 내용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완전히 용서하고 전에 지은 죄를 기억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를 잘 양육하기 위해 책망과 용서를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 사도가 한 것처럼 우리도 행하도록 배웁시다. 목사와 성도들이 어떻게 말씀을 전파하고 받아야 할지를 배웁시다. 가정과 직장에서 직분자로서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배웁시다.
1. 책망받아 고통받고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1-11절)
2. 에베소에서 드로아와 마케도니아로: 복음, 전파자의 능력(12-17절)
1. 책망받아 고통받고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1-11절)
1) 과거의 고통의 방문, 눈물의 편지: 사랑과 기쁨을 주기 위해(1-4절)
1절,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나아간다”는 방문한다는 뜻입니다. “근심”은 고통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고린도 교회를 급히 방문한 것을 말합니다(12:14, 13:1).
에베소에서 3년 동안 목회하던 중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있던 지혜에 대한 자랑, 음행, 분쟁, 사도 바울에 대한 비난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방문했습니다(고후 12:20-21). 그러나 고린도 교인은 완고하여 사도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고통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다시 그들을 방문할 때는 그런 고통스러운 일이 없기를 소원합니다.
근심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며 슬퍼하신 것과 같은 슬픔입니다(마 26:37). 단지 감정이 아니라 실제적 죽음과 같은 고통입니다.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즉 성도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고통이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후 다시 그들에게 환란과 애통 가운데 눈물로 편지를 써 보낸 것을 회고합니다(4절). “눈물로” 쓴 편지는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쓴 편지입니다. 그 편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잃어버린 눈물의 편지는 책망하는 편지였습니다. 음란과 분쟁 등을 책망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고린도 성도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넘치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었다(4절)고 차근히 설명합니다.
이제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사도는 앞으로 다시 방문할 때는 책망이 아니라 위로를 주기 원한다고 합니다(1절). 2절에서는 이번에 사도가 그들에게 다시 고통을 준다면 결국 사도와 그들 사이에 고통을 준 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묻습니다. 사도는 이번에는 격려하기 위해 가고 싶다는 마음을 전합니다. 디도가 고린도에서 돌아 교회가 회개하고 사도와 화해했다는 말을 전해주었기에 기쁨으로 이 고린도후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2) 성도가 권징을 받은 후에는 사랑으로 용서 위로하라(5-11절)
5절에서, 사도를 비난하며 교회와 사도의 사이를 나쁘게 한 그 교인은 사도 개인에게만 고통을 준 것이 아닙니다. 교회 전체에 고통을 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고통을 주었다고 말해서, 그 사람의 잘못을 부드럽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벌받는 것이 마땅하도다”(6절)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 때 그 사람의 말에 넘어가 사도 바울을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가 회개하고 그 사람에 대해 권징을 행했습니다. 그 사람도 권징을 달게 받은 듯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를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합니다(7절).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합니다(8절). 전에 사도에게 복종하지 않던 고린도 교회는 분쟁을 일으킨 성도를 사랑함으로써 사도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야 합니다(9절).
10절에서는 세 가지 용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셨다. 사도 바울은 목사로서 그 사람을 용서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 전체도 용서하라고 합니다.
11절,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단은 교회에 분쟁을 일으킵니다. 또 분쟁을 일으킨 사람이 변화되었는데도 교회가 용서하지 않는 마음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사단의 교묘한 행동(궤계)입니다.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교회는 죄에 대한 권징을 받고 회개한 성도의 과거 죄를 잊어버리고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목사가 사도 바울처럼 정직하게 책망하는 담대함을 갖도록 기도합시다. 또 죄를 지은 성도가 변화할 때 온 교회가 사랑으로 용서합시다. 가정에서도 자녀를 바로 책망해야 합니다. 따끔하게 책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언제든지 받아들여야 합니다. 깨끗이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책망해야 합니다. 화풀이하듯이 책망하면 역효과가 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책망하신 다음에 죄인인 우리를 용서한 것을 배웁시다.
2. 에베소에서 드로아와 마케도니아로: 복음, 전파자의 능력(12-17절)
12절,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드로아는 소아시아 지역, 현재 터키 북서부의 항구 도시입니다. 바울은 2년 반 혹은 3년간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 후 드로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복음의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초조해서 마케도니아로 갔습니다. 디도가 마케도니아로 올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디도를 기다리며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간 이야기를 12절에서 중단했습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에서 기다림이 끝날 때의 일을 7:5,6에 기록합니다.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안식을 얻지 못하고) 사방으로 환란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7:5,6)
디도가 마침내 마케도니아로 왔고 바울은 그를 만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회개가 일어났고, 또 죄 지은 성도를 권징했다는 변화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바울은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2:12에서 이어지는 내용을 7:5로 이어가는 것은 흥미로운 글쓰기 방식입니다. 그 사이에 2:14-7:4은 고린도 교회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릴 때를 회고하고, 다시 교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기뻐하면서 직분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2:14에서 마케도니아의 “우리” 직분자를 말합니다. 우리를 통해 승리하게 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게 합니다. 사도의 입을 통해 전한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나라가 승리하며 나가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니.”(15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16절). 말씀 전하는 직분자와 복음이 가진 두 가지 효과를 말합니다. 같은 복음이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메시지요,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멸망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17절). “혼잡”은 장사하는 사람들이 흥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지 않고 저항할 때 사도는 흥정하듯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사람의 입맛에 맞게 바꾸지 않았습니다.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절).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전해주신 그대로 순수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복음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 사도와 목사의 사명입니다. 그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사도 혹은 목사와 갈등을 일으킵니다. 사도가 순전하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가 회개했습니다. 교회 전체가 변화되었습니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 시대에도 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을 순전하게 전하도록 기도합시다. 성령께서 택하신 자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 동안에 목사는 심한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교회에 구원의 능력이 일어납니다.
우리 성도들도 가정에서 복음을 타협하면 안 됩니다. 자녀들이 힘들어 해도 예배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흥정거리처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한두 번 사랑으로 예외를 둘 수는 있지만, 원칙을 흩뜨려서는 안 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정직한 것, 땀 흘려 일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학업 성적이 좋지 않는 것은 용납해야 하지만 게으르게 사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직분자로서 내 감정이 상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마음이 상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자녀의 감정이 상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하면 자녀의 성숙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자녀들에게 상처를 준다 하더라도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칙대로 하면 복을 주십니다.
목사는 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성도는 삶으로 복음을 증거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말씀대로 살아갈 때 구원받을 자에게는 생명의 향기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는 죽음의 향기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우리를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쁘게 고난을 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뚝심을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울처럼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너희가 변한 것 때문에 기쁘다.” 참 기쁨을 위해 목사, 부모, 직장 상관으로서 직분자로서 살아갑시다.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우리가 살아가는 복음을 볼 것입니다. 이 복음을 받는 사람은 구원받고 구원에서 성장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멸망으로 나갈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의 고통을 느낄지라도 회개하고 변화되도록 복음적 삶을 살아갑시다.
관악교회가 복음을 순수하게 전하여 성도들이 회개하고 변화되는 교회로 자라도록 기도합시다. 한국의 모든 교회가 그런 교회로 자라도록 기도합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찬양합시다. 2.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에 순종하라 하십니까? (회개, 감사, 사랑, 섬김 등)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날 내가 타협하지 않고 붙들어야 할 복음의 원칙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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