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몸으로 4.19혁명 대열에 뛰어들었다가 숨을 거둔 진영숙>
진양은 4.19날 어머니 앞에 "남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있는데 내가 어찌 편안히 있겠습니까.
내가 안 돌아오더라도 슬프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라는 내용의 유서까지 써놓고 뛰어나가 데모대에 뛰어들었다
미아리 고개에서 무분별하게 쏘아대는 총알에 맞고 숨진 것이다.
그의 어머니 김명옥씨는 죽은 딸의 사진을 쳐다보며 시종 눈에 손을 대고 울기만 했으며 "가슴이 메어 말을 못하겠다" 고 했다.
-경향신문-
<"그날의 악몽 아직도 생생" 김주열 군의 어머니>
김주열군은 19년 전 당시 마산상고 1학년의 몸으로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데모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
4월11일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이 불씨가 되어 민중의 분노가 다시 터졌고 결국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게 된 것이다.
권 여사는 전북 남원의 넉넉한 농가에서 살고 있었으나 주열이의 죽음과 그에 충격받은 아버지의 별세로 집안이 기울기 시작했다.
권 여사는 서울로 집을 옮겨 하숙을 치고 과자 도매상을 하는 등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 남은 세 아들을 뒷바라지해 왔다.
-동아일보-
아, 4.19! 혁명의 태동과 역사의 현장
[1960. 02. 28] 대구 2.28 학생 데모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 장면 씨의 선거연설이 열릴 무렵인 28일 대구고교 경북여고 3시 반 남대구서 앞
학생 1,200명은 열을 지어 도청으로 몰려들어 '신성한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말라' 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 학생들은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전원을 등교케 한 학교 당국의 지시가 장면 씨의 강연을 못 듣게 할 목적 하에
정치적인 영향을 받은 처사라고 지적하고 있다.
-동아일보 1960.2.29-
[1960. 03. 15] 3.15 부정선거
최인규는 검찰의 심문에서 "내가 어떠한 수단 방법을 써서라도
자유당 공천 정·부통령 입후보자들을 당선시키라"고 지시했음을 자인하고 3인조나 9인조 편성을 지시한 일은 없다" 고 진술했다.
또한 '최'는 "내가 부정선거를 지시한 외에 내 위에 어떤 사람도 부정선거 감행에 사주한 사람은 없다" 고
진술하고 있는데 검찰은 '최'를 철야 심문 중이다.
-경향신문 1960.4.20-
[1960. 04. 11] 마산 3.15 의거 김주열 열사 시신 발견
부산지방 검찰청에서는 13일 하오 4시 30분부터 11일 마산시에서
시체로 발견된 김주열 군의 검안에 착수하여 이날 하오 7시에 끝마쳤다. (중략)
김군의 눈에 박힌 그 최루탄의 형태를 보면 인위적으로 박은 것 같은 흔적이 있어
그에 대한 검찰 해명이 지극히 어려운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가 하면
죽은 시체가 바다 속에 제 발로 걸어 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다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문제는
어쨌든 확실히 밝혀져야 할 문제이어서 검찰은 이 시체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상당한 고민에 빠질 것 같다.
-동아일보 1960.4.14-
[1960. 04. 18] 서울·부산·청주서 대규모 데모
고려 대학교 학생 삼천여 명은 18일 하오 1시경부터 안암동에 있는 동 대학교의 교문으로부터 물밀듯이 밀려나와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 "민주 역적 몰아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대대적인 '데모'를 감행하였다.
머리에는 흰 수건을 둘러매고 각종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선 학생들은
안암동 입구 신설동 로터리 동대문 종로4가 화신 앞 광화문 네거리를 거쳐 국회 앞을 지나기까지.. (중략)
-동아일보 19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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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04. 19] 전 수도의 거리 뒤흔든 학생들의 노도
18일의 고대학생 데모에 뒤이어 19일에는 국립 서울대학교의 전 학생들과 성균관·동국·경기·중앙·연세·홍익 대학생 등, 약 십만 명이 대대적인 데모를 감행하여 수도 서울을 완전히 데모 분위기 속으로 휘몰아 넣었다. (중략) 경관은 본격적으로 실탄과 최루탄을 발사하여 일부 학생들이 현장에 쓰러지기 시작 이날 하오 5시경 경무대 어구부터 경찰은 데모대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총격을 개시. 수십 명의 사망자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부상자를 내었다.
.-동아일보 1960.4.20-
4.19 혁명의 현장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는 시위 군중
"정부통령 선거 다시하라"는 '플랜카드'를 든 여학생
50년간 이어지는 추모의 물결
대학생들 시가행진
4.19 묘역에 묻혀있는 아들을 찾아온 노모 오열
그 날을 되새기며 조국번영을 다짐하는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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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날입니다.
진작에 이 글을 쓰고 싶었지만 시험기간이라 못쓰는 섭섭함과 제가 쓰지 않아도 누군가가 한 줄이라도 써줄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하지만 셤이 끝나고 제가 이 글을 쓰는 시점에도 한 줄이라도 없다는 것은
우리도 반성해야할 자세인 것 같습니다.
구지 쓰지않았다고 4.19혁명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왠지 한번은 이글을 통해 다시 생각해보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으면 합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역시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일구어준 빛나는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김주열학생. 그 빛나는 이름의 묘비는 뒹굴고 있으며,
'그날의 상처'로 인해 26년간 병상에 있는 사람을 위해 하는 조치도 없을 뿐만아니라.
4.19 묘역은 그 많은 분들을 모시기엔 턱없이 부족하기만 합니다.
그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나..반성하고 고쳐가야할 시기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지울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기에 이것도 많이 줄인거랍니다!!) |
첫댓글 이 자랑스런날 조미애양은 태어났지요
ㅋㅋ더욱 감사히여겨야겠군요!!ㅋㅋ
이 몸은 결혼 했구여~
아핫!!!이런 기념일들이 있을 수 있던것 모두 우리의 소중한 조상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