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슬강좌/ 출애굽기 32 장
출 32장.wma
아피스 만년필 (출 32:1-35)
한 때 졸업선물로 손목시계와 고급 만년필이 최고인 때가 있었습니다. 미제 파카 볼펜이나 외제 만년필 한 자루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던 시절이 있었지요. 이런 고급 외제 필기구를 대신하여 보통 사람들의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었던 한국산 만년필도 하나있었는데 바로 아피스 만년필입니다. 뜬금없이 왠 만년필 타령이냐구요? 오늘은 아피스와 만년필이라는 두 개념을 통해 본문의 안식일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아피스(Apis)는 고대 이집트신화에 나오는 신성한 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섬겼던 수많은 성수(聖獸)중 하나로서 숭배된 동물입니다. 이집트어(語)로는 '하피'라고 하는데, ‘아피스’는 하피의 그리스어 발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안하여 금송아지를 만든 사건이 나옵니다. 애굽인들이 섬기는 황소 신 아피스에 익숙하였던 그들이 참 하나님을 유형적으로 표현한 것이 금송아지 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라.”(8절) 사람들은 간혹 이렇게 딴죽을 걸 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번 사건에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 뭐 그걸 가지고 그렇게까지 진노하시느냐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어찌한다고 한들 하나님께서 격하되시는 것도 아닐 뿐더러 더구나 다른 이방신을 섬기겠다고 만든 것도 아니고 한 번도 보지 못한 여호와 하나님을 익숙한 대로 만들어 그 앞에서 즐거하고 기뻐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는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19절)버린 모세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너무 오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너그러움과는 달리 하나님과 모세는 이 사건을 결코 대충 넘어가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더 하나님다우신 것이며 무엇이 문제입니까?
성경에 보면 이 사건 이후로 이스라엘 배도의 역사 속에는 송아지 숭배가 줄기차게 등장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중 신앙에서 송아지는 가나안 족속의 영향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시되었고(왕하 17:16, 호 8:5)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배교하게 하는 주범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입니다. 결국 훗날 북방 이스라엘은 본문에서 자행된 것과 매우 흡사한 방식으로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선민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왕하 12:25~33) 왜 하나님께서 이들의 소행에 그토록 진노하시고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입니다. 어린 손자 녀석이 담배 한 개비 피어 물은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묵인하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아빠 앞에서 술에 취해 노래하고 재롱부리는 어린자식이 예쁘다고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신앙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습니다.
7~8절을 보면 그들이 하나님의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출 32:7-8)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들의 문제는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금수로 바꾸었다’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 송아지 숭배와 관련된 성구 앞에는 반드시 ‘자기를 위하여’라는 표현이 함께 나온다는 것입니다.(왕하 17:16) 오늘 본문 31절에도 모세가 “여호와께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를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이렇게 말합니다. 본질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자기를 위하여” 신을 만들고 섬기려는 미련한 죄성이 철저한데 이들이 지금 그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롬 1:23) 이 타락한 본성을 깨버리시려고 지금 출애굽을 시켰는데 그 수렁으로 다시 기어들어간 것입니다.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시고 그것을 우리가 받아 드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보다는 나의 생각을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는 금송아지가 훨씬 더 구미가 당기는 일입니다. 인간은 내 생각과 내 소원 내 판단을 고스란히 내 뱉고 싶고, 관철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스스로 다른 생각이 있고 잔소리하시는(?) 하나님이 본성상 싫은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소원과 욕망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말 못하는 금송아지로 대체 하는 마음의 동기가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제발 잔소리 좀 하지 마시고 내 부탁이나 좀 들어 주시지요”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금송아지표 아피스 만년필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책에서 다음의 글을 읽고 공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만년필이다. 나는 주인의 사용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가 나를 사서 내가 쉬도록 그의 심장 가까이에 포켓 속에 품는다. 때때로 나를 꺼내서 그의 아름다운 손으로 나를 부드럽게 붙들고 인류의 향상을 위해 그의 생각을 기록한다. 나는 내 생애의 유일한 의미인 나의 주인의 쓰임 받기를 원할 뿐이다. 어떤 때 나는 텅 빈 필요 없는 것이 되지만, 그는 나를 버리지 않는다. 그는 나를 다시 채우고 또 채워서 계속 유용하게 사용한다. 나는 지혜가 없지만 그분은 모든 지혜를 가졌다. 나는 힘이 없지만 그분이 나를 보충해 준다. 나는 나 스스로 채울 수 없다. 그가 나를 위해 채워주신다. 그가 나를 움직여 쓰실 때 나는 반항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주인의 사용을 위해 만들어진 도구이다. 나는 만년필이다.”
존경하는 청취자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기다림에 지친 선민들의 금송아지 신앙이 마치 지연되는 재림을 기다리다가 지쳐버린 기독교신앙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다들 마음으로는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믿고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만약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하나님께서 생각이 있으셔서 나에게 주신 상황입니다. 신앙은 그렇게 주어진 현실에 감사로 응답하며 내가 하나님의 유용한 만년필이 되든지 아니면 내 판단과 소원을 관철하고픈 욕망 때문에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아피스 만년필로 삼아 내 생각을 수정 없이 써내려가려고 하든지 둘 중 하나의 선택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성경은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아침 십자가로 나가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왜냐하면 십자가로 나아가 내가 죽어야 하나님이 나를 마음껏 사용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기다리다가 지쳐 금송아지 만들어 놓고 신이 난 사람들처럼 신앙 아닌 신앙을 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기 위하여 이 아침 십자가로 나갑니다. 오늘도 내 삶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존중합니다. 당신의 생각을 드러내기 위해 쓰임 받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010.7.9
Crossabbath Gospel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안식하세요,
내안에 임하신 성령께서 당신을 위한 소원을 이루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