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아내와 아이 둘을 필리핀으로 어학공부 보내고 기러기 아빠를 하던 때였습니다. 가족들은 필리핀의 일로일로라는 지역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만 필리핀으로 가면 해외가족여행이 되겠다 싶어서 보라카이 가족여행을 결정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마닐라를 거쳐 보라카이로 가고, 다른 가족들은 일로일로에서 보라카이로 이동해서 보라카이에서 가족여행을 즐기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즈음에 태풍이 필리핀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여행을 취소할까 망설이다가, 태풍으로 보라카이를 못가게 되더라도 가족이라도 보겠다는 심정으로 결국은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른 아침 인천발 비행기를 타고 마닐라 공항에 도착했는데, 제가 예약했던 보라카이행 비행기가 태풍 때문에 결항이었습니다. 그래서 행선지를 보라카이에서 일로일로로 변경했습니다. 그런데, 마닐라에서 일로일로로 가는 비행기표도 구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결국은 윗돈을 주고 어렵게 세이부퍼시픽항공 비행기표를 구했습니다. 가족들이 있는 일로일로의 무한어학원 원장과 통화해서 어학원에서 일로일로공항으로 저를 픽업하러 오기로 약속했습니다. 일로일로공항에 저녁 8시쯤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공항에 도착하니 저를 픽업하기로 한 사람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한참 서성이고 있는데, 한 한국사람이 다가와서 저한테 한국 사람이냐고 묻더군요. 한국사람이라고 대답했더니, 현재 상황을 설명해 주더군요.
그 분은 일로일로에 있는 또 다른 어학원인 보람어학원의 원장이었습니다. 6시간 전에 자기 어학원 학생을 픽업하러 일로일로 공항에 왔는데, 그 사이에 주변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공항이 고립되어 공항에서 6시간째 못 빠져 나가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러한 상황에서도 비행기 한대가 일로일로공항에 도착한 걸 보고 놀랐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 "이 망할놈의 필리핀 항공사, 공항이 홍수로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운항을 해. 고립된 공항에 승객들을 내려 놓으면 그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참으로 어이없는 상황입니다. 보람어학원 원장은 저 외에도 한국사람을 몇 명 더 자신의 RV차에 태우고, 공항을 빠져나가기로 했습니다. 공항을 빠져나가는 길은 공포스러웠습니다. 주변이 온통 물에 잠겨, 어디가 도로이고 어디가 밭인지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죽은 소도 떠내려 가고, 차량 바퀴의 대부분도 물에 잠기고, 도로위에 차 있는 물이 강같이 흐르고 있고, 아무리 차고가 높은 RV차지만 너무 위험하여 포기하고 다시 공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원장은 이미 3번을 공항탈출을 시도했다가 결국 다시 공항으로 돌아 왔다고 하더군요. 공항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공항에 식당은 없고, 매점은 이미 먹을거리가 다 떨어졌습니다. 한 여학생은 공포에 질려 울더군요.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공항에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그나마 편한 잠자리인 차내 잠자리는 여자 등에게 양보하고, 일부는 공항청사내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그나마 나은 잠자리는 누군가 이미 차지하고 있고,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자야 했습니다. 졸지에 국제 노숙자가 됐습니다. 아침이 되어 물이 좀 빠진 뒤에, 공항에서 빠져나와 일로일로 시내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뉴스에 수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도 되었던 태풍피해였습니다.
계획했던 보라카이 여행은 가지 못했지만, 그 동안 못다했던 가족간의 정을 일로일로에서 4일간 나누고 저 혼자 한국으로 다시 돌아 왔습니다. 한국에서부터 전 인원이 출발했던 일반적인 해외 여행이라면 더 많이 속 상했을텐데, 저 혼자만 한국에서 출발했던 것 이었기에 그나마 덜 속상했습니다. 저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나중에 따로 보라카이를 갔다 왔습니다.
참으로 어이 없었던 것은, 공항이 홍수로 이미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운항을 한 필리핀 항공사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것은, 공항에서 보람어학원 원장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 분은 저 외에도 전혀 초면인 한국사람 몇 명을 도와 주셨습니다. 아마 그 분이 없었다면, 저를 포함한 다른 한국 사람들도 일로일로 공항에서 더 공포스러운 밤을 보내야만 했을 것입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해외여행이었습니다.
첫댓글 정말 고생 하셨네요... 저도 필리핀 처음 갔을때.. 한 10년쯤 됐었는데... 태풍이 와서 마닐라 공항이 정전이 되더라구요... 그래도 명색이 국제 공항인데.. 자가 발전기도 없고 시스템이 안돼서 거의 한시간을 그냥 줄서서 기다렸던 기억이 나네요... 오랫동안 잊을수 없는 기억입니다...^^
여행은 역시 날시가 좋아야... 그런점에서는 사이판이 역시 최고 ㅋㅋㅋ
와,,,,, 글로 읽어도,,, 정말 급박했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정말 여행중에 이런 상황이라면 다시는 비행기 타고 싶지 않을 듯 하네요...
정말 힘드셨겠어요.... 그 어학원 원장님...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세상에.... 얼마나 짜증나고 속이 타셨을까요...
헉...저도..저런거 겪으면 해외여행 못 갈듯한데요. 가족분들도 걱정에 밤 지새우셨을테고..누가 필리핀으로 연수간다면 보람어학원 추천해야겠어요~^^;;
정말정말 고생하셨군요... 진짜 공포스러웠겠어요...ㅡ.ㅜ 그래도 좋은 분 만나셨고 가족분들도 만나보셨으니 다행이에요...
읽으면서 무서웠다는.. 진짜 고생하셨네요...
고생 많으셨네요.. 고생은 다 잊으시고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만 기억하세요~ ^^
생각만해도 너무 끔찍하고 무서워요...ㅠ.ㅠ 고생 정말 많이 하셨네요...
고생하셨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