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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첫 이틀 동안은 관광지를 탐사하면서 시각적인 호강을 하는 것과 틈나는 대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미감까지 만끽할 수 있는 일정을 중심으로 계획을 짰다. 시각적인 호강이란 도시의 풍광, 예술품 등의 감상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뜻 밖에 거리를 활보하는 수 많은 매력적인 여성들로 인해 눈이 쉴 새 없이 호강하는 행복을 경험 했다.
패션에 관심 있는 한국 분들이 독일에 오면 “독일에서는 옷 장사로 먹고 살기 힘들 것“ 이란 이야기를 한다. 독일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매우 검소한 편이라 옷 매무시가 상당히 투박하다. 남자들은 더욱 심해 겨울엔 청바지에 검정색 점퍼를 입은 사람들이 마치 단복을 맞추어 입은 것처럼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에 비해서 상트페테르부프크의 패선은 서울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한국의 남대문이나 동대문의류상가는 없다지만 대형 쇼핑몰이 여러 개 있어서인지 옷 차림은 대체적으로 한국처럼 화사하고 센스가 있는 것 같았다.
밤 9시가 넘어서도 어둠은 저 멀리 있는 듯 했다. 그래도 혼자만의 저녁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모든 거리에는 없는 음식이 없을 정도로 선택의 폭이 다양했다. 특히 거리에 수 많은 일본식 퓨젼식당에서 직접 개발한 다양한 스시들이 꾀 많이 있었다. 하나의 음식 트랜드 인 듯 했다. 러시아 내륙지역 카스피해에는 상어알 즉, 캐비어가 있다면 이 도시가 접한 북해에는 연어가 꾀 잡혀 연어알이 많고 이를 북해산 카비어로 표현한다. 카스피해의 진짜 카비어가 아니니 너무 흥분할 필요가 없다. 가격이 싸고, 맛은 신통치 않았다. 소위 짝퉁 캐비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물론 프라하, 부다페스트 등과 같은 동유럽 대도시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2가지로 분류된다. 과거 사회주의체제하에서 교육 받고, 성장하여 서비스정신은 물론 외국인들에게 불친절한 모습을 종종 보여주는 중장년층과 적극적으로 외부 문물을 받아 들여 동화하려고 노력하는 청년층이다. 이젠 어디에서 출생하든 능력만 되면 EU 28개국 어느 국가에서나 일 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었기 때문인지 오늘 날 동유럽 청년들의 의식 수준은 20년 전과 극명히 다른 모습이다.
또 이번에 알게 된 것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언어가 러시아어라고 한다. 그 다음이 체코어인데 이는 각각 7격, 6격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가 주격, 소유격, 목적격으로 형성된 3격의 언어임을 감안하면 여간 어려운 언어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러시아어는 내게 너무 투박하고 어렵게만 들렸다. 하지만 맘만 먹으면 다른 언어들은 쉽게 배울 수 있는 장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둘 째 날은 Tour Bus를 타고 시내와 주요 관광지를 둘러 보고, 틈이 생기면 골목을 거닐며 무엇이든 감상하고자 했다. 우선 모스크바의 바실리카 성당을 모방하여 만든 부활교회를 비롯하여, 성 이삭 성당, 피터폴요새 등을 방문하고 카페와 식당은 물론 조그만 상점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 중, 러시아 성당 건축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 성 바실리카 교회당을 모방하여 건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리스도 부활성당은 전통적인 건축양식을 승화시켜 건립한 역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the Church of Resurrection of Christ in St. Petersburg)
사실 유럽의 유명한 성당과 교회를 둘러 봐도 이젠 큰 감흥이 없다.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내부 그리고 창가에 부착된 스테인그라스 조형은 어디에나 휘황찬란할 정도로 빛을 내고 있다. 천장을 찌를 듯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역시 내부의 화사함을 더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점들로 인해 내 개인적인 종교관이 조금씩 바꾸고 있다. 과연 종교란 얼마나 큰 권력을 갖고 있길래 이런 규모의 건물들을 수 없이 건립할 수 있었던 건가? 돈은 어디서 충당한 것일까? 그리고 아직도 반복되고 있는 종교전쟁은 기독교적 모순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은 아닌가?
나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어렸을 적부터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암기했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으며, 아직도 모든 예식을 기독교 관습에 따르고 있다. 그런 내가 점점 기독교에 대한 회의론자가 되는 이유는 바로 수 많은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내고, 감탄을 금치 않는 성당과 교회를 바라 보면서다. 이럴 때면 멘토에게 “예수님은 정말 부활 하셨나요?“ 라고 질문을 하곤 하는데, 그 분은 늘 하느님 한 분 만 바라보고, 중간에 얼룩진 다른 모습은 보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심적 혼란은 잘 정리되지 않는다. “하느님, 지금 어디 살고 계신가요?“
기행문을 쓰는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이다. 여행을 다녀 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어 가지만 틈틈이 메모한 것이 있어 이렇게 글을 정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글을 남기는 작업은 언제나 큰 의미를 부여한다. 내 자신을 뒤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겉 모습만 담고자 함이 아니다. 이 도시 이면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은 물론 과거의 영혼까지도 담고 싶었다. 그리고 개인의 흥미를 탐구하는 것에 더해 자아의 현 주소를 발견한다면 더 없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의 꽃은 네바강변에 위치한 호사스런 겨울궁전 내에 자리잡고 있는 에르미타주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이다.
휴일의 막바지를 향하고 있어서인지 유난히도 많은 인파가 입장대기를 하고 있었다. 입장하기까지 족히 1시간은 기다렸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이런 정도는 능히 감수해도 될 수준의 박물관이었다. 규모는 르부르, 대영박물관 다음 정도 될 만큼 컸고, 전시된 유물과 작품의 수준은 세계 여느 박물관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었다.
박물관 1층은 프랑스, 독일, 이태리 등의 유럽문화를 중심으로 아시아 및 고대 이집트, 로마, 그리스시대의 작품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유럽 문화재는 이미 틈틈이 해당 국가에서 살펴 본 적이 있고, 유사한 것들이 많아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더욱이 중국, 인도, 일본 국가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는 아시아관은 질적 측면에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것들이 많았는데 그마저도 불상과 묵화가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었다.
에르미타주박물관에도 어김 없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 로마, 이집트의 고대유물들이다. 이 중, 그리스, 이집트 유물은 대영박물관과 르부르박물관에서 구경한 것들이 실제로 그리스, 이집트 박물관에서 본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 많았다. 침략과 식민지시대를 통해 수 많은 문화재를 밀반출하여 자기네 박물관에 채운 꼴인데, 이는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우여서 늘 개운치 못한 박물관 구경을 하게 된다. 일제 강점기 때 유출된 수 많은 문화재들이 누군가의 창고에서 아직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슬프기도 하지만 여간 화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 나마 6.25 당시 미군에 의해 반출된 37개의 어보 중, 문정왕후 어보가 미국시립박물관으로부터 곧 반환된다고 하니 다행이다.
2010년에 이집트 카이로의 국립박물관을 관람한 적이 있는데, 이집트는 아직도 유물이 너무 많이 발굴되다 보니,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아 복도 한 가운데에 방치 한 경우를 목격할 수 있었다. 더욱이 습도는 물론 실내온도 역시 제대로 조절이 되지 않는 낙후된 시설에 전시돼 있었다. 또한 박물관 안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우리를 엘리베이터에 태워주고 돈을 요구한 적도 있는데, 이런 경우라면 미안하지만 오히려 환경 좋은 외국 박물관에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상식 밖의 생각을 하게 된다. 더욱이 요즘은 내전이 한창이라 수 많은 문화재들이 안전한지 걱정스럽다.
에르미타주박물관 2층은 주로 러시아 황실의 유품과 종교문명을 형상화한 성화들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많은 가구와 조각 그리고 도자기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러시아 가구와 조각 등은 대체적으로 이태리, 프랑스에서 봐 왔던 작품들과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아마도 그 쪽 지방에 주문, 제작된 것이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러시아 황실의 독특한 문양과 색상은 눈 여겨 볼 만큼 멋있었다.
소위 세계 4대 도자기라 불리 우는 것은 독일의 마이센 (Meissen), 헝가리 헤렌드 (Herend), 그리고 영국의 웨지우드 (Wedgwood), 덴마크 로얄코펜하겐 (Royal Copenhagen) 등이다. 하지만 러시아황실에 자기를 납품하던 임페리알 포세린 (Imperial Porcelain) 역시 빼어난 색상을 바탕으로 훌륭한 품질을 자랑하고 있어 어깨를 견줄만한 수준이다. 자기를 좋아하고, 수집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제품은 잘 알고 있을 것 같다 (www.imperial-porcelain.com).
서양은 식생활은 전식, 주식, 후식이라는 명확한 개념의 식생활이 정립되어 있고, 이에 맞추어 와인, 위스키, 보드카 등의 다양한 종류의 주류가 음식의 특색에 맞춰 제공되므로 그릇은 물론 술잔 역시 다양하게 구색이 갖추어져 있다. 일반적인 가정에서야 접시 하나에 음식을 덜어 먹는 서양 식습관을 연상하게 되지만, 상류층은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에 유럽의 유명 자기 수입을 추진하였는데, 이미 agent와 dealer들이 존재하고, 한국인들의 식습관과 너무 상이하여 판매가 부진 하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뜻을 접은 적이 있다.
서양은 의자에 앉아 생활하는 좌식방식이기 때문에 다양한 테이블, 의자, 침대 등과 같은 가구가 잘 발달된 것 같다. 동양에서는 중국이 유독 이런 문화 속에서 살아서인지 가구 측면에서는 한국보다 다양한 유물이 존재한다. 유럽은 질 좋은 침엽수들이 많아 아직도 북쪽은 목재가구를 많이 생산하고 있고, 스페인, 그리스, 이태리 지역은 대리석 위주의 가구가 많이 존재하며, 이는 유럽의 건축 양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의복의 경우는 더욱 흥미로운 대상이다. 때론 편리함을, 때론 화사함을 추구한 서양의 복식 구조는 내의, 정장에 이르기까지 고루 잘 발달한 것은 물론이고 구두, 벨트, 브롯지 등과 같은 악세사리 류 등도 다양하게 찾아 볼 수 있다. 더욱이 귀족들 의복이라면 반드시 부착된 휘장과 훈장도 의복을 한층 더 멋있게 연출하는 역할을 한다. 이에 더해 유럽의 황제들은 조선시대의 왕들과는 달리 대게 전쟁이 나면 참전을 했는데, 이때 착용하는 복장은 물론 함께 참전하는 말의 치장 역시 많은 신경을 썼다. 지난 해, 일본이 도둑질 해 간 조선시대 왕의 갑옷을 공개한 적이 있는데 기능과 멋을 떠나 그 것이 왜 거기에 있는지 알고 싶다.
살아 가는 방식의 차이는 미술작품에까지 적용된다. 유화물감이 textile 계통의 canvas에 사용되어 작품의 화사함은 물론 보존이 용이하다. 동양화가 한지 위에 묵으로 그려진 것과 비교하면 훨씬 유리한 조건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서양 박물관에 상당 부분이 그림으로 채워지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결국 생활방식과 생활의 형태가 문화 창출과 보존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동서양의 의식주 생활방식의 차이가 문화, 예술 분야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비교 논문이 얼마만큼 존재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로 인해 양산된 결과물을 감안하면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 인 것 같다. 최소한 서양박물관이 더 화려하고 더 다양한 유물과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 것은 삶의 방식이 예술을 접근하는데 있어 보다 유리한 것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에르미타주박물관 3층은 역대 황제들이 재정이 파탄 나는 지경에 이르러도 계속해 수집한 수 없이 많은 유화가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고흐, 모네, 피사로, 르노와르와 같은 인상파 거장들의 작품은 물론 세잔느, 고갱, 피카소, 마티스 등이 그린 근대 작품들이 한 층을 꽉 메울 정도로 많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유럽 내 박물관에서 2등 하라면 서러울 정도로 많다. 이렇듯 수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미처 못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월척을 낚은 듯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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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트페테르부르그를 같이 보는 듯한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