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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요한복음]
6. 인간의 문제와 그 해결
2019. 6. 7. 이현래 목사
오늘 날짜를 잘못 잡아서 나는 어제 교회에서 청년부 집회를 했기 때문에 오늘은 김목사에게 맡긴다고 생각했다.
그 전달이 되지 않아서 재탕을 하게 되었다. 어제 청년부에서 한 말씀을 재탕을 하겠는데 재탕이 초탕보다 더 좋을 수 있다. 왜냐하면 차를 마실 때, 첫 번째 우린 것은 버리고 두 번째 것을 먹는데 두 번째 것이 제일 좋다고 한다.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것은 알고 보면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인류사적인 문제이다. 각 방면에서 자기들대로 대책을 가지고 인류에게 제시했다. 유교는 유교대로 불교는 불교대로 철학은 철학대로 그리고 그 외에도 무력을 통해서 천하를 통일하려는 경우도 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왔다. 인간문제가 왜 해결이 안 되는가? 인간문제의 근원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땅의 문제의 근원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여름 가뭄에 보면 땅바닥이 갈라지고 논바닥이 갈라지는데, 아무리 물을 펴서 채워도 매일 말라진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소나기가 오면 비가 조금만 와도 땅바닥이 갈라졌던 것이 아물어진다.
땅의 문제는 하늘에서 풀어야 풀어지지 땅에서 풀려고 하면 무지 노력을 하지만
그 효과가 별로 없다.
얼마나 심각하면 그 논에 물대기 하다가 옛날에는 싸워서 죽기도 했다. 왜냐하면 논이 타 들어가면 바싹바싹 마르니까 농부들은 속이 탄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된다. 비가 와야 해결이 된다. 왜 많은 선생들이 나와서 대책을 얘기했지만 안 되는가? 그것은 모두 땅의 문제를 땅의 문제로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안 된다. 땅의 문제가 원래는 하늘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니까 원천에 가서 고쳐야 된다.
성경은 그것을 창세기에서 원천적인 말씀을 했다. 사람의 문제는 어디서 생겼는가? 동산에서부터 생겼다. 하나님과 동거하는 영역인 동산에서부터 인간문제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은 전부 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알맞은 영역을 주었다. 그러면 사람도 사람에게 알맞은 영역이 있다.
아무나 싸돌아다니는 것이 아니고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을 벗어난 것이니까 평안이 있을 수 없다. 물개가 있는데 물에서는 얼마나 유연한가. 그런데 어느 수족관에 가니까 수족관을 청소하느라 물을 빼버렸다. 그런데 그 거대한 몸짓의 물개가 뒹굴고 있는데 안쓰럽고 불쌍해서 못 보겠더라. 물속에서는 얼마나 유연했는가. 물을 떠나니까 그렇다.
옛날 교회 찬송가에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해도 예수 떠난 영혼은 살수 없다는 그런 찬송가가 있었다.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은 자기 영역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편안할 수 없다. 성경에 보면 가시덤불이다. 이마에 땀이 흘러야 된다. 이렇게 표현했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표현이고,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영역을 벗어난 문제이다.
그 영역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일이지 바깥에 놔두고 별짓을 다해도 안 된다. 물개를 위로한다고 물을 퍼붓는다고 그것이 감질날 일이지 되겠는가? 물속에 넣지 않고는 해결이 안 된다. 인간의 문제도 그 동산으로 회복이 안 되면 해결이 안 된다. 아무리 해도 해결이 안 된다. 옛날에 비해서 지금 우리는 얼마나 부유한 시대를 사는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발달한 시대에 사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문제는 여전하다. 조금도 해결된 것이 없다.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해결했다.
질병문제나 이런 것은 거의 다 해결했는데,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그 문제는 아무리 해도 해결이 안 된다. 이 문제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교역자들이다. 교역자들이 땅에 있는 병을 땅에 있다고 해서 땅에 있는 것으로 다스리려고 하거나 치료하려고 하면 안 된다. 환자가 뭐라고 하든지 의사는 자기가 판단 해보고 의사의 생각으로 처방하는 것이다. 환자가 이것 달라 저것 달라 한다고 주는 것이 아니다. 나 아스피린 주시오, 나 다이아진 주시오, 한다고 해서 의사가 그냥 주는 것이 아니다. 의사의 판단에 따라 처방을 해서 약을 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무슨 문제가 있든지 간에 하늘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관점에서 약을 처방해야 한다. 종교가 처음에는 그렇게 출발하다가 시간이 가면 세상과 섞여져 버린다. 그러면 그것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아브라함도 잘 나갔다. 그런데 결국 이스마엘을 낳고 말았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땅의 것이 섞였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스마엘을 낳고 아무 계시도 없이 13년을 지나게 된다. 결국 100살이 되었을 때 하늘로부터 다른 소식이 왔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9)고 했다.
이것은 땅에는 없는 일이다. 땅에서 사라를 지금 젊게 하겠는가? 지금 현대 의학으로도 99세가 된 할머니를 처녀로 개선시켜서 아들을 낳게 할 수는 없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9) 그 말은 하늘에서 온 말이지 결코 땅에서 연구해서 만들어 놓은 말이 아니다.
땅에서 그것이 가능했으면 아브라함이 못했겠는가? 땅에서 가능했으면 했다.
그런데 불가능하기 때문에 13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포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포기할 때, 우리의 생각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이 찾아오실 수도 있다. 내 생각으로 가능할 때는 하나님이 오시지 않는다. 오신다 하더라도 이스마엘 밖에 못 낳는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봐서 아무것도 안 될 때, 내 힘으로 아무것도 안될 때,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해왔다. 그것이 내가 주의 손에 이끌린 노정이었다. 내가 어떻게 길을 알고 간 것인가? 아니다.
어떻게 주의 손에 이끌려가겠는가?
무수한 시행착오를 하면서 거기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니까 내가 그를 영접하고 받아들인 것이지 내가 미리 그 길을 알고 간 것이 아니다. “너는 너의 고향(본토)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1)고 했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다 오지 않았다. 그 말을 꼭 아브라함에게만 했겠는가? 바벨로 가는 모든 사람에게 그 말을 했지만 그 말을 알아듣고 따라온 사람은 아브라함뿐이라는 그 뜻이다.
예수님께서 깊은데 그물을 던져라. 그리고 베드로에게 이제부터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을 한 사람에게만 했겠는가?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받아들이고 온 사람은 베드로뿐이었다. 왜냐하면 베드로만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고기를 못 잡았다고 했다. 따라오라니까 왔지 잘 잡히는데 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고기가 잡히는데 따라오라고 따라 올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한다.
공연한 사람을 부르면 눈도 깜짝 안한다. 공연한 사람을 부르면 이 말 하고 저 말 한다. 여러분이 전도를 해보면 공연한 사람에게 전도를 해보면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얼마나 핑계가 많은지 모른다. 대학생들에게 캠퍼스 전도를 해보면 모두 하는 말이 시간이 없다고 한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제일 좋은 핑계이다.
왜냐하면 나는 공부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학생이 정말로 공부하는데 시간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가서 다른 짓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명분은 공부할 시간이 없다고 한다. 주일날 교회 나오라고 하면 시험이 내일 모레라고 하면 더 이상 오라는 말을 못한다. 그러면 시험 기간에 오라는 말을 못한다. 이것저것 다 빼면 오라고 할 시간이 없다.
핑계가 하도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은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모르니까 가서 쑤셔 보는 것인데, 하나님은 올 사람을 부른 것이기 때문에 후회함이 없다고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나에게로 이끌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해보니까 그렇다. 내가 아무리 설명을 잘하고 간절하게 말하고 기도하고 해도 올 사람이 오지 안 올 사람은 안 온다. 그렇다고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하는 것이다. 내가 대구에 처음 왔을 때, 학생들이 모두 처음 묻는 질문이 장로교에서 말하는 예정설을 어떻게 알았는지 다 그것을 물었다. 예정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것이 자기가 무엇을 알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설명해봤자 소용이 없다. 사람의 문제는 사람의 생각 속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생각으로 된 처방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은 그냥 문화교회, 이런 것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진짜로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 하늘의 사정을 알아야 복음을 전할 수 있다. 하늘에서 봐야 땅이 보이지 땅에서 보면 땅이 잘 안 보인다. 조금밖에 안 보인다. 그래서 현대 전쟁은 갈수록 공중전이 중요한 전쟁이 된다. 무기가 다 공중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미사일이 공중으로 날아가고 다 그렇다. 우리나라도 군대는 줄이고 군비를 개선시킨다고 엄청난 돈을 들여서 미국에서 비행기를 사 들이고 있다. 어떤 비행기는 북한 상공에 날아가면서 정보를 수집해도 전혀 레이더에 걸리지 않는 비행기도 있다. 이런 것은 돈이 엄청나게 들어가지만 그래도 그런 것을 사야한다. 왜냐하면 공중에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폭격을 해도 마찬가지이다.
공중에서 보고 폭격을 하면 정확하게 폭격을 할 수 있는데, 30리 밖에서 50리 밖에서 대포를 쏘면 제대로 맞겠는가? 포병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관측장교가 잘못하면 아군에 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관측장교는 목숨을 걸고 나가서 최전방에서 관측해야 한다. 땅의 문제는 하늘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왜 인간문제가 생겼는가?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살아야 할 영역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문제이다. 미국에 가보니까 나는 한국에 있을 때나 미국에 있을 때나 똑같은 사람인데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버린다. 한국 사람이 한국을 벗어나버리니까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서 말 한마디 못한다. 대한항공을 타는 이유가 조금 비싸도 타는 이유가 그것이다. 대한항공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타니까 말이 되고, 승무원이 다 한국 사람이니까 말이 된다. 미국 비행기를 타니까 말이 안 되니까 물 한잔 얻어먹으려고 해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나는 찬물을 잘 못 먹기 때문에 따뜻한 물을 달라고 했는데, 내가 아는 영어로 해봤자 못 알아듣는다.
Hot도 아니고 cool도 아니고 warm 한다고 했는데, 내가 발음하는 warm이 뭔지 모른다. 발음이 틀린 것 같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남의 땅에 가니까 갑자기 바보 멍청이 병신이 되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정해준 위치를 떠났기 때문에 생각지 않은 모르는 병이 생긴 것이다. 그 병을 고칠 방법이 없다. 동산에서 생겼는데, 동산에 가지 않고 해결이 되겠는가? 고기가 물을 떠나서 허덕거리고 있는데, 물 없이 해결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영역을 떠나면 고생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한국이 제일 좋다. 말이라도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미국에 가면 먹을 것도 많고 좋다. 그런데 말이 안 통한다. 더군다나 우리 2세들은 미국가면 한국말을 못한다. 한 집에 사는데 말을 못하니까 멍하니 보고만 있고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참 안됐다. 애들도 안됐고 나도 안됐고 한마디도 못했다. 미국에 가면 권*상형제 집에 가서 늘 있는데, 그 집 아이들과 말을 못한다. 그냥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멍청이가 아닌데 거기가면 그냥 멍청이가 된다. 사람도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여러 가지가 있고, 인간 문제가 다양한데, 왜 그런 다양한 문제가 생기는가? 그것을 상황별로 해결하려고 하면 상담사 밖에 안 된다. 상담사도 무슨 대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 말을 그냥 들어주라는 것이다. 내가 상담 교육을 1년간 받아 봤는데 결론은 아무것도 없다.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말을 잘 들어주라는 것이다. 그것이 방법이다. 자기가 실컷 말을 하고 나면 마음이 풀린다. 그것이 치료법이다.
땅에 있는 문제는 땅에서 해결할 수 없다. 왜 사역자가 필요한가? 하늘의 소식을 전하려니까 사역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하늘의 소식을 그냥 그대로 전하는 사람이 천사이다. 말 그대로 전하는 것은 천사이다. 말 그대로 전하는 것은 사역자가 아니다. 성경 읽어주는 것은 사역자가 아니다. 하늘의 것을 땅에 있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해석해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하늘의 일을 땅에서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해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셉이 꿈을 꾸고 묻는 왕에게 꿈의 해몽은 여호와께 있다고 하고 그 꿈을 해몽해 주어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다니엘서도 마찬가지이다. 도저히 자기들은 알 수 없어서 물어봤는데, 거기서 해답을 주더라는 것이다. 우리도 왕의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왜 이런지 모르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워보면 자기는 뭔지 모른다. 그냥 울기만 하고 떼만 쓴다. 자꾸 밖에 나가자 한다. 왜 그런가? 속에서 열이 나기 때문인데 자기는 모른다. 열이 나는지 뭔지 모르고 방안이 답답하니까 자꾸 나가자고 한다. 뭘 해주어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을 해주어도 저것을 해주어도 마찬가지이고, 기어코 나가자고 한다. 노련한 엄마들은 짐작하고 아이가 열이 난다고 병원에 데려간다. 그냥 과자 달라 한다고 해서 과자 주고, 장난감 달라고 한다고 해서 장난감 주고, 어떤 물건을 갖다 주어도 매 마찬가지이다. 키워 본 분은 알 것이다.
뭐 달라고 해서 주면 또 싫다고 한다. 뭐 달라고 해서 주면 버려 버린다. 왜? 자기에게는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속에서 열이 나니까 그것을 식혀 달라는 것인데 말을 그렇게 한다. 사람들도 이런 문제 저런 문제를 이야기한다. 왜 그런가? 속에 열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주면 해결이 되는가? 해결이 안 된다. 병든 사람을 고쳐주면 해결이 되는가? 해결이 안 된다. 사업이 안 되는 사람에게 기도해서 해결이 되면, 물론 그렇게도 안 되지만, 해결이 되면 되는가? 그것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이 내가 대구에 왔는데, 처녀가 상담을 하러 왔다.
효대 국문과 다니던 여학생인데 아주 점잖게 생기고, 교회생활도 열심히 하고, 아주 충실한 기독교인이다. 무슨 문제냐고 하니까 지금 의사와 결혼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혼의 목표를 세워 놓았다. 의사와 결혼한다는 이 목표를 세워놓고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대구 근처에 있는 기도원이 있는데, 거기 가서 철야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겠는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결혼을 정해놓고 기도를 하고 있다고 좀 도와 달라고 하는데,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되겠는가? 이것은 비근한 예지만 이런 것이 대부분이다. 말을 솔직하게 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대부분의 내용이다. 만유와의 관계가 비정상이 되었다. 사람이 사람의 위치에 있어야 만유와의 관계가 정상이 될 것인데, 자기 위치를 떠나니까 다 비정상화 된다. 우리는 같은 인간을 상대해도 비정상적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도 항상 경계한다. 혹시 사기꾼이 아닌가 두렵고, 혹시 누가 가난한 사람이 찾아오면 돈 달라고 오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부터 난다. 사업을 해본 사람은 알지만 돈 떨어지면 누구든지 돈 빌리러 가는 줄 안다.
친구가 친구 집에 찾아가면 돈 빌리러 왔나본데 어쩌지, 이 생각부터 나니까 반가워할 리가 없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가난할 때 친구 집에 가지 말라고 한다. 찾지 말라고 한다. 내가 그것을 경험해 봤는데 정말 민망하다. 나도 민망하고 상대도 민망하다. 돈이 있다고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서로가 민망하다. 얼굴을 안 보는 것이 편하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욱 얼굴을 안 보는 것이 편하다. 멀리 있는 사람, 나와 관계가 먼 사람은 봐도 괜찮다. 그런데 앞 뒤 집에 살면서 빤히 아는 사람은 얼굴 보기 어렵다. 면목이라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나는 아침을 먹고 바로 그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나가서 교회 뒤쪽 높은데 있는 예배당에 가서 하루 종일 있다가 왔다.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집을 떠나 나올 때도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인사 한마디 못하고 나왔다. 동네 멀리 있는 사람들만 아침 일찍 찾아가서 인사를 했다. 우습다.
가까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인사를 안 하고, 먼데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니까 바쁜 시간에 나는 그렇게 못하겠더라. 가까운 사람에게는 인사도 못하겠더라. 그러니까 혼란이다. 사람이 자기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어디 가서 내 말을 내 말대로 할 수가 없다. 정신과 환자들이 왜 정신과 환자가 되는지 아는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다. 전부 속에 불안이 있어서 누구한테도 자기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것을 양파 껍질 싸듯이 몇 겹으로 싸 놓았는지 모른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한번 그런 경험을 했다. 어떤 자매가 지금은 죽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그 자매가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가봤는데, 밥을 주면 거부한다. 왜 거부하는가? 밥맛이 없어서 못 먹겠다고 말을 하지 못한다. 이 밥에는 독이 들어서 못 먹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입에 넣어주면 뱉어 버린다. 그때 그 사람의 입 안을 보면 백태가 끼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 독이 들어서 먹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핑계이고 자기변명이다. 그렇게 변명해야 자기가 산다. 나는 지금 몸이 이래서 입안이 다 헐었다는 말을 부끄러워 못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정신과 의사를 하는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간에 그 사람 문제가 무엇인가를 발견해 내는 사람이다. 그 속에 구중궁궐에 숨어있는 그 사람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것을 못 찾아내면 상담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것을 찾아서 끄집어내면 얼굴이 밝아진다. 자기를 아는 사람이 있구나. 그것이 상담치료이다. 사람은 지금 비정상화되어 있다. 왜 나를 변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비정상적인 상태이다. 정상적인 상태이면 자기대로 말을 한다. 그런데 자기대로 말하는 사람이 없다.
다 돌려서 이야기한다.
특별히 문명이 발달했다는 서양 사람들은 말을 직설적으로 하는 경우가 없다. 다 돌려서 말을 하니까 우리가 알아듣기 어렵다. 트*프가 뭐라 하는 줄 아는가? 김*은과 나는 참 좋은 관계입니다. 아주 좋은 관계입니다. 아주 친한 친구 관계입니다. 그 말은 뒤에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문*인 대통령과 나는 참 좋은 사이입니다. 좋은 사이라는 말 뒤에는 다른 말이 들어있다. 그래서 하노이 회담에 갔는데 가니까 드러났다. 만나자 마자 헤어졌다.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우리는 잘 못 알아듣는다. 아주 좋은 관계입니다. 아주 좋은 친구관계입니다. 우리는 형제간 같습니다. 이렇게 트*프가 말을 했다. 그 뒤에 다른 말이 들어 있다. 다 비정상화이다. 비정상화된 사회에서는 비정상화된 사람끼리 통해야 한다. 정상화인 사람은 안 통한다.
예수님 때도 그랬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니까 네가 하나님과 동등이라고 하느냐고 이렇게 다르게 듣는다. 바로 듣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니까 동등이라고 한다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전부 왜곡해서 듣는다. 아무리 진실 되게 말해도 왜곡해서 들어버린다. 이것이 다 비정상화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죽음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정녕) 죽으리라.”(창2:17) 여호와의 증인들은 안 죽으니까 그것을 변명하려고 안 죽도록 지어 놓았는데, 죄를 지어서 죽게 되었다고 말하고 돌아다닌다. 그뿐인 줄 아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는데, 인류를 위해서 안 뛰어내린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그 말이나 여호와의 증인이 하는 말이나 똑같은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이 전달이 되겠는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일이 우리에게 바로 전달된 것이 아니다.
바로 전달되었으면 그렇게 안 산다. 나를 위해 죽었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살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모르겠더라.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도저히 모르겠더라. 나를 위해 죽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할 만큼 관계가 깊은 것도 아니다. 내가 그럴 만큼 잘못한 것도 아니고, 왜 나를 위해 죽었다고 하는지 모르겠더라. 여러분 생각해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생각해보라. 나를 위해 죽었는가? 안 죽었는가? 이것이 아주 기본적인 문제이다. 그래서 이것을 어디 물어볼 수도 없고 아주 난처한 문제이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도 나를 위해 죽기가 어려운데, 나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나를 위해 죽겠는가? 그것이 나에게 효과가 있겠는가? 아무 효과가 없다. 부모는 혹시 자식을 구원하기 위해 죽는 경우가 있다. 그것도 순간적이지 계속적으로 그런 것을 할 수 없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죽음이다. 끝났다는 것이다.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난다. ‘정령 네가 죽으리라.’는 말은 나와 너의 관계가 끝났다는 말이다. 영생이 없어졌다.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3:22)그래서 쫒아내고 화염검으로 막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영생이 없다. 영생이 없으니까 영생을 안 죽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어떻게 안 죽고 살 수 있는가? 영생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영생이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동산에 있으면 동산을 다 망쳐버린다. 그래서 못 있게 한 것이다. 교회를 시작할 때 맨 먼저 부딪힌 문제가 선악과이다. 우리 한 30명이 시작을 했는데, 조금 가니까 이 문제가 불거진다. 만날 선악과로 말미암아 싸운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 안에 있는 나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사탄은 왜 이것을 주었는가? 교회가 안 되게 하려고 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에 선악이 없는 데가 어디 있는가? 다 있다. 어디든지 가면 없는 데가 없다. 그러니까 영생이 없어졌다.
그리고 천사를 섬기고 있다. 천사 섬기는 사람이 없는 것 같겠지만, 천주교에만 있는 것 같지만 개신교도 마찬가지이다. 천사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섬긴다고 생각하는 그 속에 많은 것이 천사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끝없이 천사를 동경하고 있다. 왜? 천사는 죽지 않기 때문이다. 동산에서도 동경했고, 지금도 여전히 동경하고 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지 않을 수 없다. 성경에는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사랑하고 경배한다고 말했다. 바울도 그렇게 말했다. 심지어는 자기가 만든 것을 섬기기도 한다. 그런 것을 우리가 표면적으로 말할 때 우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이 별로 심각하지 않다. 문명시대에 오면 그런 것들은 다 없어진다. 천사를 섬기는 것은 없어지지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천사를 섬기고 있다. 신이라고 말하는 속에,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속에, 그것이 천사가 아닌가? 잘 살펴봐야 한다. 인간을 경계한다. 심해지면 적대한다. 만유에게 복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복을 주기 위해서 지어진 존재이다. 그런데 복을 주는가? 못 준다. 오히려 피해만 준다. 사람이 가는 곳마다 자연이 훼손된다. 자연이 덕 본 데는 아무데도 없다. 자연에게 인간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저 괴물 때문에 우리가 다 죽어간다고 말한다. 저것이 뭔지 모르겠다, 인간인지 괴물인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연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다 죽이는 것이다. 사람이 간 곳마다 자연은 훼손된다. 하나님이 원래 사람을 지으면서 축복해 놓은 모든 것이 다 비정상화 되어버렸다. 사탄은 이렇게 해서 다시 혼란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창세기 1장 2절은 사탄이 땅을 어지럽게 했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1절하고 차이가 있다. 1절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고 한다. 그런데 2절에 가서 갑자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고 한다. 하나님은 땅이 필요해서 땅을 지어놓았는데, 그 땅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혼란스럽게 했는가? 지금 보면 안다. 땅은 사람이다. 사람인데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 선두에 달린다고 하는 인간(인류)들은 이 혼란 속에서 모르겠다, 우리 좋을 대로 살자고 한다.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목표를 세우면 안 된다. 이것이 지금 교육의 목표이다. 요즘 학생들을 대하면 제일 어려운 것이 그것이다.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옳다 그르다 안한다.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뭐가 있느냐? 찾아봐야지요. 이것이 정말 말이 안 먹힌다. 여러분도 학생들을 전도해보라. 실컷 이야기해 놓으면, 꼭 그것이라고만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한다.
다 철학자들이 되어 버렸다. 기독교에서도 일부는 그렇다.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래서 그것에 대한 반동으로 아주 절대적으로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또 있다. 그것도 문제지만 저것도 문제이다. 절대적인 시대에는 히틀러도 나오고 무솔리니도 나왔다. 그 사람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세계대전을 겪고 난 후에 서구 사람들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자각이 왔다. 절대적인 지도자도 없다. 모든 것을 다 부정해버렸다. 거기는 토양이 그리스도가 오실 수가 없다. 아무리 그리스도가 온다고 하더라도 꼭 그렇다고만 할 수 있느냐 하는데 그리스도가 되겠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를 구원한다고 해도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면 뭐냐? 하면 없다. 없는데 꼭 그것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이가 생긴 것도 그래서 생겼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자. 결국은 꼭대기에 올라가면 다 하나가 아니냐. 꼭대기에 가면 다 하나이다. 이것이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을 도와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소식을 전하려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소식이 아닌 것을 전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복음은 하늘에 속한 것이다, 우리 속에는 복음이라는 것이 없다. 하늘에 속한 것만이 사람에게 복음이 된다. 사탄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갈수록 지금 더 혼란되어간다. 문명이 발전될수록 더욱더 혼란해진다. 인간의 길은 어디가 길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여기에 어디가 길이요? 하고 물으니까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해놓았으니 어찌 되겠는가? 길이 어디 있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했다. 이것은 하늘의 말이다. 땅의 것이 아니다. 땅에는 그런 것이 없다.
땅에 있는 선생 중에 누구도 내가 곧 길이라고 한 선생이 없다. 그렇게 할 수 없다. 공자님도 내가 곧 길이라고 하지 않았다. 석가모니도 내가 곧 길이라고 하지 않았다. 이런 길이 있으니까 열심히 따라 오너라고 했지 내가 곧 길이라는 말은 없다. 예수님에게 물으니까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한다. 아버지께로 가려면 어디가 길입니까? 물으니까 “내가 곧 길이요.”라고 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물으니까 “내가 곧 진리요.”(요14:6)라고 했다. 이런 말을 우리가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그냥 그대로 전달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제자들도 못 알아들었다. 뒤로 자기들이 경험하고 난 뒤에 쓴 책이니까 그렇지 그때 당시에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말이었다.
“내가 곧 길이요.”(요14:6) 이것이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뭐라고 묻는가?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라고 했다. “내가 곧 길이요.”라는 말에 답이 되었으면 물어보겠는가? 답이 안 되니까 또 물은 것이다. 그러니까 또 이르신다.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고 없어져 버렸다.
남은 것은 예수 한 사람 밖에 남지 않았다. 이것을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요14:11)고 했는데, 거기서 어떻게 아버지를 알겠는가? 이것은 하늘의 소식이기 때문에 내가 소화가 되어야 이 소식을 전할 수 있지 소화가 안 된 것을 전하면 생콩을 그냥 먹이는 것이다. 그것은 똥으로 그냥 나와 버린다. 요즘 다이어트 하는 방법 가운데 생콩을 그냥 물로 삼키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장을 운동시킨다. 장을 운동만 시키고 나가 버린다. 밭에 버리면 거기서 수박도 나오고 참외도 나온다.
밭에 가 보면 그런 것이 있다. 그것이 사람이 싼 똥에서 나오든지 아니면 새들이 물어다 놓은 것이다. 복음이라는 것을 통째로 먹는 것을 보면 옆에서는 참 부럽다. 어떻게 그렇게 믿는가? 나도 그랬다. 사람들이 잘 믿는 것을 보니까 나는 왜 믿음이 없는가? 늘 이렇게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까 생콩을 먹이고 다닌 것이다. 자기 몸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장만 움직이고 가 버린다. 나올 때 보면 콩이 퉁퉁 불어서 나온다고 한다. 하늘의 소식이니까 하늘의 소식을 그대로 전하면 그것은 생콩을 갖다 주는 것이다. 내가 그것을 씹어서 먹어봐야 한다. 예수님도 그냥 전하면 생콩을 전하는 것이다.
내가 씹어 먹어봐야 한다. 불경한 말이지만 씹어 먹어봐야 한다. 예수님도 이것은 내 살이니 먹으라고 했다. 내 살이니까 먹어라. 자기 살이니까 먹으라고 했다. 그래서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이 있고 내 살을 먹지 않는 자는 멸망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유태인들이 뭐라고 하는가? 자기가 누구기에 자기 살을 나누어 주겠다고 하는가? 했다. 제자들도 그것 참 감당하기 곤란하다. 어떻게 선생님 살을 먹는단 말이고? 그랬다. 그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했다.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을 알아듣겠는가? 역시 또 못 알아듣는다. 먹어봐야 알지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확실하게 씹어서 먹어 봐야 한다. 새들이 먹을 때 보면 씹지도 않고 삼켜버린다. 나는 무슨 맛으로 먹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 그놈들은 그냥 먹어도 맛이 있는가 보다. 그래서 꼭 자기가 먹을 것만 먹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삼켜 버리면 아무 맛도 모른다. 사실 소고기와 같은 육고기는 좀 잘기만 하면 덩어리째 먹어도 상관이 없다. 그것이 위에서 소화되기 때문에 들어가면 녹아 버린다. 위산에 녹아 버린다. 우리는 씹는다. 왜 씹는가? 맛을 보려고 씹는다. 그래서 소고기 맛 다르고, 돼지고기 맛 다르다. 그것을 음미 하면서 먹는다. 먹어보고 이것은 소고기구나, 이것은 돼지고기구나, 이렇게 안다.
같은 풀을 먹어도 염소고기와 소고기는 맛이 아주 다르다. 나는 염소고기가 냄새만 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잘하는 곳에 가니까 냄새가 안 났다. 고기가 아주 달다. 아주 맛있고 부드럽다. 양고기도 그런가 보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양고기는 늙어서 죽은 것이 들어오기 때문에 썩 좋은 것이 안 들어오는데 염소고기가 훨씬 낫다. 수입 양고기보다 염소고기가 훨씬 맛있다. 충주에 가면 참 잘하는 곳이 있다. 순회하러 갈 때는 항상 그 식당에 가서 순*형제와 둘이 염소 전골을 먹는다.
그것은 소고기와 비교가 안 된다. 아주 맛있다. 씹어 먹으니까 알지 안 씹어 먹으면 알겠는가? 예수도 잘게 씹어 먹을수록 맛이 다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그래야 우리가 예수와 관계가 생긴다. 씹어 먹어봐야 관계가 생긴다. 안 씹어보고는 관계가 안 생긴다. 통째로는 씹을 수가 없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구속하시고 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 한 것이다. 바벨로 가는 사람들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 되지 않는가? 안 된다. 불러내야 한다. 애굽에 있는 사람들을 그냥 거기 놓아두고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하면 되지 않겠는가? 바로가 여호와께 경배하려면 여기서 하라고 말했다. 모세가 아닙니다, 우리 여호와께 경배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말했다. 애굽에서는 여호와를 섬길 수가 없다. 거기서 여호와를 어떻게 섬기겠는가? 최고가 또 하나 더 있는데 여호와를 섬길 수가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 여호와를 섬겼다는 말이 하나도 없다.
어디 가도 없다. 다 나와서 성막을 지어놓고 거기서 예배를 했다. 하나님은 무조건 예배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계신 곳에 가야만 예배가 되지 그분이 없는데 무슨 예배가 되겠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셔서 동산에 두셨다고 한다. 그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게 했다고 하는데, 다스린다는 말은 경작한다는 뜻이다. 동산을 경작해서 뭘 하는 것인가? 거기서 과일도 나오고 이런 것들이 나오게 하는 것이다. 땅을 경작하면 뭐가 나온다.
동산 자체가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작할 자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이 가만히 있으면 경작이 안 되어서 씨로 그냥 있는 것이다. 그 씨는 땅에 심겨져서 경작을 해야 된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로 풍성해진다. 사람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경작이 되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그래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 결과와 예수가 하나님을 섬긴 결과가 다르다. 모세가 하나님을 섬긴 결과는 율법이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을 섬긴 결과는 은혜와 진리다. 요한복음 1장에 아주 중요한 말이 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고 한다. 하나님이 달라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대로인데 경작하기에 따라서 다르다.
인삼은 같은 인삼인데 조금씩 다르다. 풍기 인삼 다르고, 개성 인삼 다르고, 금산 인삼 다르다. 토질에 따라서 성질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이다. 풍기 인삼은 6년 근이 없다. 그 땅에서는 6년간 못 키운다. 회분이 많아서 풍기 인삼에는 회분이 많다. 6년을 키울 수 있는 땅이 따로 있다. 아무데나 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인삼이라도 6년짜리와 1년짜리는 차이가 많다. 1년 해서 솎아낸 것은 나물을 해 먹는다. 인삼 나물 이런 것 밖에는 안 된다. 6년 근이 되어야 홍삼도 만들 수 있다. 토양에 따라 다르고 경작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늘에서 키웠느냐 볕에서 키웠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하나님도 누구에 의해서 재배되었느냐에 따라서 맛과 향기가 달라지게 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경작했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달라진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겠는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경작된다. 그런데 이것이 한 사람만 아니고 많은 사람이 경작되어야 하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하다. 어느 한 사람이 인삼 맛을 다 개발할 수 없다. 다양한 토양에서 재배되어야만 다양한 성분이 나오게 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왜 교회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가? 동쪽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 서쪽 문으로 들어오는 사람, 새 예루살렘 성은 문이 열 두 개가 된다. 열 두 방면으로 들어온 사람들이다. 들어오는 것이 다 방면이다. 그 사람이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다. 문이 하나뿐이면 장로교 하나 뿐이 없을 것이다. 다른 것도 있는 것이 좋은 것인데, 다 한 개로 만들려니까 어려운 것이다. 장로교 문도 있고, 감리교 문도 있고, 다 따로 있다. 장로교에 안 맞는 사람은 감리교 가고, 감리교 안 맞는 사람은 성결교 가고, 이렇게 되어야 된다. 왜냐하면 그 토양에서 되는 것이다.
사방에서 온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개발된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풍성하시겠는가? 그래서 새 예루살렘성은 열 두 보석이 기초가 되어 있다. 열두 문이고 열두 보석, 열두 진주이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3*4=12이다. 무한히 퍼져가는 숫자다. 성은 그렇게 쌓여 있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는 벽옥 같더라. 물이 그렇다. 이렇게 보면 맑다. 아무 색깔이 없다. 그런데 많이 있으면 색깔이 푸르게 보인다. 벽옥의 벽자가 푸를 벽자인데 물이 푸르다는 뜻이다. 물 푸른색을 벽이라고 한다. 벽옥 같다는 말은 물색처럼 원래는 색이 없는데, 많이 모여 놓으니까 벽옥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얼마나 필요한가! 하나님은 구속받은 인간을 통해서 자기가 재배되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왜 구속이 필요한가?
구속받은 사람에게서 재배되어야지 구속받지 않은 사람에게서 재배되면 이스마엘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의 하나님이 되어버리고 만다. 하갈이 쫓겨나서 대성통곡하고 울다가 우물을 발견하고 그 우물을 뭐라고 했는가? “나를 살피시는(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창16:13)고 했다. 이스마엘을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이다. 모세를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이다. 예수를 통해서 알려진 하나님은 은혜와 실재이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이것을 합하면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그래서 교회는 많을수록 좋다. 획일화시키려면 많을수록 어렵다. 그런데 풍성하고 다양하다면 많을수록 좋다. 오늘날 교회는 수는 엄청나게 많은데 다양하지 못하다.
똑 같다. 장로교는 천 개, 만개, 10만 명이 있어도 다 똑 같다. 교회는 장로교도 아니고 감리교도 아니다. 하나님의 집이고 그리스도의 몸이다. 거기에는 다양한 것이 있어야 된다. 이름은 장로교라 하든지 감리교라 하든지 상관이 없다. 그 속에서는 다양한 것이 나와야 하는데, 다양한 것이 나올 수 없게 되어있다. 우리가 교회를 전파하는 것도 동산지기이니까 하나님이 풍성하게 개발되도록 전파해야 된다.
사람은 하나님 동산의 경작자이다. 하나님 성품을 경작해서 그것을 30배, 60배, 100배 경작해 내는 것이다. 이것을 비유로 하면 씨와 흙이고, 남자와 여자이다. 창세기 2장에 나와 있다. 씨와 흙으로, 남자와 여자로 이것은 하나님 문제이다. “사람(아담)이 혼자 사는(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2:18) 이 말은 누구의 말인가? 여호와의 말이다. 내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말을 차마 못해서 “사람(아담)이 혼자 사는(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한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서글프고 외로운 것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없으니까 달을 통해 말을 한다. 성경은 전부 시적인 말이다.
언어가 시적인 언어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이 말은 우리가 누구든지 알아듣는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외롭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내가 외롭다는 말과 똑 같다. 하나님에게는 배필이 필요한 것이다. 자기를 경작할 농부가 필요하다. 동산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함께 할 동산이 필요하다. 이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축복이 회복된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다 못 받았기 때문에 다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완성되는 날, 그 모든 풍성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된다. 고린도 전서 2장 9절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예비하신 모든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이라는 것이다. 모를 수밖에 없다. 동산 안에 준비해 두었는데 동산 밖에서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동산 안에 준비된 것을 동산 밖으로 나왔으니까 어떻게 그것을 알겠는가? 모른다. 우리나라 60년 70년대에 미국에서 온 사람들은 모두 초콜릿을 사 왔다. 우리는 초콜릿이 없을 때였다. 그런데 지금도 그때인줄 알고 미국에서 오면서 초콜릿을 사 오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가 사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정을 다 모른다. 동산 안에 있지 않기 때문에 모른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동산 밖에서 아는 것이다. 동산 안에서 아는 하나님과 동산 밖에서 아는 하나님은 다르다. 동산 안에서는 아버지처럼 보이지만 동산 밖에서 보면 무서운 사람처럼 보인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물으니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했다. 동산 밖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두렵다.
그런데 동산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면 두려운 것이 아니다. 얼마나 친근하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이런 말을 하시겠는가? 자기와 아담을 동일시해서 말한 것이다. 얼마나 친근하면 그렇게 말하겠는가? 둘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막10:9)고 말씀하셨다. 가를 수 없는 사이를 사탄이 와서 갈라놓은 것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 보좌에 앉는다. 우리가 보좌에 앉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함께’ 보좌에 앉히셨다고 했다. 항상 ‘예수와 함께’이다. 함께 왕 노릇한다.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예수와 함께, 왜 그런가? 그와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 안에 포함된 사람으로 나는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누릴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분과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내가 그분과 떨어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른다. 예수를 믿다 보니까 뭔가 항상 미진했다. 여러분도 경험하실 것이지만 뭔가 항상 미진했다. 확실하지 못하고 항상 미진했다. 그래서 죽어서 천당에 가면 다 해결되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죽어 천당에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예수와 연합해야만 해결될 문제이다.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나는 전에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모시려고만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모실 수 있는가? 그것이 참 어렵다. 예수를 모시려고 해 보신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예수를 모시기 어렵다. 시어머니 모시기보다 훨씬 어렵다. 걸핏하면 삐져서 나가 버리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아침에 기도할 때는 있는 것 같았는데, 점심때 시장바닥에 나가니까 어딜 가고 없다. 어떻게 찾아다니는가? 하나님을 모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고 너무 어렵다. 예수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모르고, 예수를 내 안에 모시려고 했으니까 얼마나 어려운가?
목회를 할 때는 그것도 몰랐는데 C.C.C.에 가니까 예수를 모시라고 했다. 마음속에 예수를 모시라고 했다. 여러분은 4영리를 보았을 것이다. 의자가 있다. 마음에 의자를 놓고 예수님을 거기에 앉히시라고 한다. 해 보니까 정말 어렵다.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려니까 너무 불가능하다. 그러면 나는 영원히 예수를 못 모시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 살아서는 못 모실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제 보니까 예수 안에 내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안에 내가 있다. 다른 데서는 없었다. 그런데 거기에 가니까 내가 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이 성경 구절을 왜 몰랐는지 모르겠다.
이 성경 구절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보면 실재가 없으니까 그 말이 안 들린 것이다. 늘 읽어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찾아다녀서 만나겠는가? 모시려 한다고 해서 모셔지겠는가? 우리가 예수를 모시면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랑할 수 없다. 기도할 때 있는 줄 알고 밖에 나가 자랑해버리면 미친놈이 되어버린다. 모시면 항상 계시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 안에 내가 있으니까 잠을 자도 되고, 시장에 가도 되고, 어디를 가도 나는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어디 가도 나는 그 안에 있다. 그분을 모시려 할 때는 그분이 늘 나가 버리는데 나는 그 운명 안에서 벗어나올 수가 없다. 뛰어내릴 수 없는 그분 안에서 나올 수가 없다. 아니다. 이것은 내자리가 아니다 하고 나올 수가 없다. 나갈 데가 없다. 그러니까 얼마나 안전한 자리인가! 그래서 우리가 예수와 하나가 되면 곧 바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하나님과 하나 되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다. 내가 예수 안에 있으면 된다. 그런데 내가 어찌 예수 안에 있겠는가? 내가 무슨 수로 거기에 들어가겠는가? 이미 벌써 그 안에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나를 이미 넣어 놓았다. 그래서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 나를 포함한 예수, 그가 십자가에서 죽을 때, 나를 포함하고 죽었다. 자기 혼자 죽은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하고 죽었다. 부활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기만 부활할 수 있는가? 그자기 안에 포함된 사람을 놓아두고 자기만 부활할 수 있는가? 우리가 예수 안에 있다는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는 이야기다. 거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축복이 회복되는 자리이다. 우리가 모르던 것, 전혀 모르던 것이 회복되는 자리이다. 사람들이 네가 예수 안에 있으면 뭐가 달라졌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대답하기가 참 어렵다. 뭐가 달라졌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가서 살아보면 달라진 것이 있다. 그 안에 있으면 나는 모르는데, 달라진 것이 있다. 내가 그 안에 있는 사람과 내가 그를 모신 사람은 천지차이다. 그를 모신 사람은 철야기도 해야 되고, 금식기도 해야 된다. 왜 그것을 또 하고 또 하고 해야 되는가? 기도할 때뿐이고 다른 때는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또 불러들이려고 기도한다. 그런데 내가 그 안에 있으니까 너무 쉽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1:30) 하나님이 나를 예수 안에 넣어 놓았다. 내가 거기에 있는 줄 모르고, 나 자신을 다른데 가서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팔이 하나밖에 없는데, 팔이 2개인 사람을 보니까 팔을 하나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똑 같은 것이다. 없는 팔을 만들려면 되겠는가?
예수 안에 없는 나를 내가 만들 수 있는가?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시 찾은 것이다. 잃었던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찬송가에도 그런 것이 있다. ‘잃었던 생명을 다시 찾고~~’ 그런 찬송가가 있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불렀다. 그것을 지은 사람은 무슨 경험이 있어서 했을 것인데, 우리는 가사가 좋으니까 모르고 불렀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2:9)고 했다. 우리가 모르던 일이다. 전혀 모르던 일이다. 우리가 전혀 모르던 일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전혀 모르던 것이 나타난다.
나도 잘 모른다. 그래서 나타나 봐야 안다. 똥이 냄새가 난다고 하는데, 직접 가서 냄새를 맡아봐야 알지 맡아보지 않고 똥 냄새가 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맡아보지 않으면 모른다.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 있는 나, 예수 안에 있는 나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왜 연합을 이야기 하는가?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4)고 말한다. 다른 생명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생명으로 살아봐야 한다. 살아봐야 나오지 안 살아보면 나오는가? 그것은 이론적으로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럴 때는 이렇게 나타나고, 저럴 때는 저렇게 나타나니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떠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보면 다르다. 다르지만 어떠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1:30) 그 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내가 예수 안에 있었구나. 원래부터 있었구나. 그것을 모르고 내가 멀리멀리 나가서 팔을 하나 더 붙여보려고 애를 쓰고 다녔구나. 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는 말씀을 이해하지 않겠는가. 내가 예수께로 간다고 뭘 쉬게 해 주겠는가? 예수 안에 가면 내가 거기에 있으니까 쉬게 되는 것이다.
내 팔을 만들러 다니는 수고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니까 안 될 짓은 안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