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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세 | 파 | 인 명(자, 호) | 이력, 주요 직책 |
11 | Ⅰ-2 응교 | 정흥문(鄭興門) 경백(敬伯) (1562~1631) |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벼슬을 버리고 나이 들어 용인 파담으로 돌아와 지냈다 棄歸終老於龍仁琶潭
아들 집(䌖)이 수 가의대부 되어 증 호조참판(贈 戶曹參判) |
11 | Ⅰ-2 응교 | 정창문(鄭昌門) 경선(慶先) 송암(松岩) (1565~1604) | 선교랑(宣敎郞) 증손 선(敾)이 수 동지가 되어 증 사복시정(贈 司僕寺正)
문학의 재질이 이름났으나 일찍 별세하였다. 가전되던 유집이 있었는데 여러 번 실전되어 평생 업적을 상고할 수 없으니 영원히 자손들의 한이다 文學才望擅名一時不幸早世 家傳遺集累失回祿 平日志業今無可考 永爲子孫之恨矣 |
11 | Ⅰ-2 응교 | 정영문(鄭榮門) 경중(慶仲) (1574 ~ ?)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영사공신으로 증 호조참의(以寧社原從勳 贈 戶曹參議)
* 영사공신 : 인조반정으로 유배되었던 전 승지 유효립이 1628년 몰락한 대북파의 여당들과 제휴하여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 공(仁城君珙: 宣祖의 5남)을 추대하려다, 거사 하루 전에 전 정언 허적(許)의 고변으로 탄로가 나서 주모자가 처형되었다. 역모를 평정한 공로로 허적·홍서봉(洪瑞鳳)·황성원(黃性元) 등에게 내린 공신 칭호 |
11 | Ⅰ-2 응교 | 정광문(鄭光門) 경보(慶甫) (1579~1637) | 장릉참봉(章陵參奉) 조산대부(朝散大夫, 종4품)
1637년 1월 17일 병자호란(丙子胡亂)시 부부가 전화(戰禍) * 장릉(章陵) :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있는 조선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과 그의 비 인헌왕후 구씨의 능. 사적 제202호. 원종의 묘는 처음 양주에 있던 것을 1627년 김포에 개장하여 흥경원이라 하였고, 1632년 능으로 봉하여 장릉이라 하였다. |
11 | Ⅰ-2 응교 | 정진문(鄭振門) (1582 ~ ?) | 습독(習讀) * 습독(習讀) : 훈련원(訓練院)의 종9품(從九品) 무관직(武官職) |
11 | Ⅰ-3 지평 | 정여장(鄭汝璋) | 참봉(參奉) |
11 | Ⅰ-3 지평 | 정지감(鄭之鑑) |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
11 | Ⅰ-4 자의 | 정지승(鄭志承) 효원(孝源) (1605 ~ ?) | 통덕랑(通德郞) |
11 | Ⅰ-5 능파정 | 정은수(鄭訔秀) 경헌(景獻) 미능재(未能齋) (1567~1612) | 참봉(參奉)
이율곡 문인으로 임진왜란에 부친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쟁터를 전전하였으나 부친이 청주에서 순절하시자 대신 병을 통솔하여 경성에 이르렀다. 군자감 정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반장하여 나주에 머물며 여묘하였는데 묘 옆에 호랑이가 와 같이 지키니 기이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묘 앞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켜 “충효송”이라 불렀다. 그 행적이 「금성지」, 「호남절의록」에 실렸다
李栗谷門人 宣祖壬辰 從父倡義轉戰 淸州親竟歿節 代領其兵直到京城 除軍資監正不就 反葬羅州居廬墓側 有虎來同守之異 鄕人稱其墓前松曰忠孝松 事載「錦城誌」及「湖南節義錄」 |
11 | Ⅰ-6 승지 | 정여주(鄭礪㕀) 배달(培達) | 여산군수(礪山郡守) |
11 | Ⅰ-6 승지 | 정민식(鄭敏軾) 여첨(汝瞻) (1568~1628) | 진사(進士) |
11 | Ⅰ-6 승지 | 정민철(鄭敏轍) 여유(汝由) 남은(南隱) (1572~1634) | 1591년 진사(進士)
문장과 덕망이 높아 동년에 학교에 모시어 스승으로 삼았다 文章德望名重當世 舘伴同年侍而宿師 |
11 | Ⅰ-6 승지 | 정민효(鄭敏孝) 백원(伯源) (1630 ~ ?) | 1657년 진사(進士) |
11 | Ⅰ-6 승지 | 정민구(鄭敏龜) 극도(極道) 송헌(松軒) (1618~1668) | 성균생원(成均生員) |
11 | Ⅰ-6 승지 | 정민용(鄭敏龍) 치도(致道) (1621~1672) | 승사랑(承仕郞) |
11 | Ⅱ-1 참봉 | 정눌(鄭訥) 인묵(仁默) | 선교랑(宣敎郞) |
11 | Ⅱ-2 선무랑 | 정희윤(鄭希尹) 상경(商卿) (1582 ~ ?) | 1603년 진사(進士), 평택현감(平澤縣監) |
11 | Ⅱ-3 판서 | 정도립(鄭道立) 자수(自修) | 송화현감(松禾縣監) |
11 | Ⅱ-4 정랑 | 정희설(鄭希卨) 순보(舜輔) (1581 ~ ?) | 1606년 진사(進士), 참봉(參奉) |
11 | Ⅱ-4 정랑 | 정희직(鄭希稷) 우경(虞卿) (1577 ~ ?) | 1603년 진사(進士), 사산감역(四山監役) |
11 | Ⅱ-5 청백리 | 정희망(鄭希望) 주경(周卿) | 승의부위(承議副尉), 용양위부사용(龍驤衛副司勇)
* 承議副尉 : 조선시대 정팔품(正八品) 서반(西班) 무관(武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이다. 해당 관직으로는 오위(五衛)의 사맹(司猛), 선전관청(宣傳官廳)의 선전관(宣傳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좌시직(左侍直)·우시직(右侍直) 등이 있었다 * 부사용(부사용) : 오위에 딸린 종9품(從九品) 무관(武官) |
11 | Ⅱ-7 참판 | 정보(鄭堡) 자완(子完) | 통덕랑(通德郞) |
11 | Ⅱ-7 참판 | 정중(鄭重) | 참봉(參奉) |
11 | Ⅱ-7 참판 | 정규(鄭奎) | 교수(敎授) |
11 | Ⅱ-7 참판 | 정지(鄭至) | 주부(主簿) |
11 | Ⅱ-9 성재 | 정전창(鄭展昌) 자전(子展) 율탄(栗灘) (1631~1685) | 1662년 진사, 1665년 광릉참봉(光陵參奉), 1668년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1682년 돈녕부봉사(敦寧府奉事) 1685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우암 송시열 선생께서 바다 섬으로 귀양 가심에 공께서 시를 지어 올렸다
상담천리 귀양길 고난에 눈물짓고 도의 꺾어짐에 하늘도 슬퍼하고 의로운 길은 폐허가 되었구나! 옛 성은 입은 향기가 아직도 흩어지지 않아 지절의 호소십언이 태양처럼 빛나네! 외로운 충정 의심하니 천주(하늘의 기둥)를 거스르네! 모든 일이 상처 되니 언월당이로구나! 금년에 대의를 결의하고 조정이 밝아지면 원앙처럼 노니세!
언월당 세 글자로서 시정잡배가 크게 어지럽히니 은거하여 벼슬에 나기지 아니했다
尤庵宋先生 謫遷海上 公呈詩曰 “湘潭*千里泣風霜 道屈堪悲義路荒 貂拜舊恩香未末 志言新什日爭光 孤忠自擬警天柱 萬事從傷偃月堂* 最是當年結大義 明廷整笏摠鴛行” 以偃月堂三字大忤時輩屛跡不仕
* 언월당(偃月堂) : 이임보는 당 현종 때의 재상으로 간신(奸臣)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서재인 언월당(偃月堂)에서 깊게 생각을 하면 누군가가 주살(誅殺)되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 |
11 | Ⅱ-9 성재 | 정동창(鄭仝昌) | 찰방(察訪) |
11 | Ⅱ-9 성재 | 정덕창(鄭德昌) 앙숙(卬叔) (1623 ~ ?) | 진사(進士) |
11 | Ⅱ-9 성재 | 정수창(鄭壽昌) 덕여(德餘) (1602 ~ 1638) | 1633년 생원(生員), 참봉(參奉) |
11 | Ⅱ-9 성재 | 정익창(鄭壽昌) (1627 ~ ?) | 통덕랑(通德郞) |
11 | Ⅱ-9 성재 | 정유창(鄭維昌) | 장사랑(將仕郞) |
11 | Ⅱ-9 성재 | 정유(鄭瑜) 자휘(子輝) (1627~1694) | 1660년 생원(生員) |
11 | Ⅱ-10 봉사 | 정종창(鄭宗昌) (1708~1758) | 동몽교관(童蒙敎官) |
11 | Ⅲ-3 판관 | 정만영(鄭萬榮) (1668~1762) | 진사(進士) 수승 동지중추부사(壽陞 同知中樞府事), 수(壽) 95세 배 경주정씨(1668~1763), 수(壽) 96세 * 증손자 세명(世命) 1743년생, 현손 익택(益澤) 1762년생 |
12 | Ⅰ-1 응교 | 정적(鄭績) 여응(汝凝) (1585 ~ ?) | 성균생원(成均生員) |
12 | Ⅰ-2 응교 | 정집(鄭鏶) 자장(子章) 귀래정(歸來亭) (1588~1673) | 광해군 떼에 폐모를 주장하는 자를 배척하여 고향으로 귀향하여 다시 한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인조 무인년(1638년)에 이조판서 정경세와 예조판서 서성이 천거하여 동몽교관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光海時 斥絶主廢母論者盡室歸鄕斷跡城闉 仁祖戊寅 吏判 鄭經世 禮判 徐渻 薦授 童蒙敎官 不就
1640년 빙고별좌(氷庫別坐) 1641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643년 산음현감(山陰縣監) 1650년 합천군수(陜川郡守) 거사비(去思碑) 1653년 평산부사(平山府使) 불부(不赴) 1659년 병조가참지(兵曹假參知 : 병조참의) 1667년 수승동지(壽陞同知) 1670년 특명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상) 1673년 졸(향년 86세), 부음을 듣고 부의와 제물을 보냈다(顯宗訃聞致賻賜祭)
천성으로 효가 지극하여 어머니 병환에 다리를 베어 진혈하고 상을 당하여 3년간 죽으로 끼니하고, 아버지 상을 당하여 나이가 연로하여 쇠약함에도 여묘하며 조석으로 곡을 하니 향당에서 그 효에 감복하였다
天性至孝侍母夫人疾刺股進血及丁憂啜粥三年 遭外艱年已衰邁而居廬墓側朝夕上哭鄕黨服其孝 |
12 | Ⅰ-2 응교 | 정작(鄭綽) 중유(仲裕) |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 광해군의 혼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증손 내봉이 수동지가 되어 사복시정에 추증되었다 時當昏朝棄官歸鄕 以曾孫來鳳貴贈司僕寺正 |
12 | Ⅰ-2 응교 | 정유(鄭維) 지세(持世) (1593~1654) | 광해군 무오년(1618년) 생원
사마시험 치룰 때 적신 이이첨(李爾瞻)이 사마 급제자를 부추겨 장차 폐모의 소를 올리려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그러한 불의한 자와 영화를 누리느니 바름을 지키고 죽는 것이 낫다. 또 아비가 없고 군주가 없는 사람과 사대부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다”고 하며 대과를 보지 않고 나주의 고향으로 내려왔다. 인조반정으로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재상이 되자, 최우선으로 공을 천거하였다
光海 戊午 司馬時 賊臣李爾瞻 嗾新榜 將上廢母疏 公曰 與其不義而榮寧守正而死 且無父無君之人 士大夫不可同席而立遂不應榜遯歸羅州故庄 仁廟改玉申象村欽以冢宰首薦公
1634년 전의현감(全義縣監) 1636년 병자란에 안무사(按撫使) 박횡(朴橫)의 종사관으로 근왕병(勤王兵)을 통솔하였다. 1641년 구례현감(求禮縣監) 1648년 백천군수(白川郡守)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부친상을 당하여 나이 들어 기력이 쇠약한데도 죽을 먹으며 항시 소리 내어 우는 것이 돌아가신 날(1652년)과 같았다. 3년 탈상을 5개월 앞두고 돌아가셨다. 순조 임오년(1822년)에 대신 김재찬과 한용구가 임금의 면전에서 충효를 아뢰니 정려를 내렸다. 8대손 제인이 묘 앞에 정려각을 짓고 기문을 세웠다
天性篤孝及丁外艱年己衰而啜粥呼泣常如袒括之日隔終祥五月而孝宗甲午(1654년)卒 純祖 壬午(1822년) 大臣 金載瓚 韓用龜 以忠孝筵奏命旌閭 八代孫濟寅建閣于墓前而延旌 |
12 | Ⅰ-2 응교 | 정시형(鄭時亨) 숙하(叔夏) 반주(盤洲) (1619~1699) | ㅇ효종 정유(1657) 진사 1658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667년 호조정랑(戶曹正郞), 1668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669년 공산판관(公山判官), 1672년 부평부사(富平府使) 1675년 해주목사(海州牧使), 1680년 原州牧使(원주목사) 7邑元,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임천에 내려가 강산을 유람하며 지냈다(遯于林川優遊江山之間) 1698년 수승 동지중추부사(壽陞 同知中樞府事) * 족보에는 수 첨지중추부사로 되었으나, 이미 정3품의 목사 직책을 2번이나 맡으셨고, 수 81세에 이르셨으므로 수 동지가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 |
12 | Ⅰ-2 응교 | 정육(鄭䋭) 여욱(汝郁) (1603~1681) | 1646년 생원(生員) 1646년 강릉참봉(康陵參奉), 1648년 章陵參奉(장릉참봉) 문장과 행의가 뛰어나 칭송받았다(文章行誼見稱於時) |
12 | Ⅰ-3 지평 | 정연(鄭練) | 진사(進士) |
12 | Ⅰ-4 자의 | 정색(鄭繬) 율보(律甫) (1611~ ?) | 통덕랑(通德郞) 증손 오채(五彩)가 귀하게 되어 증 사복시정(贈 司僕寺正) |
12 | Ⅰ-6 승지 | 정섬(鄭暹) 자휘(子輝) (1603~1672) | 헌릉참봉(獻陵參奉)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2 | Ⅱ-2 선무랑 | 정술(鄭艹+術) * 풀초변+술 여형(汝馨) | 참봉(參奉), 한성부 남부도사(漢城府 南部都事)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2 | Ⅱ-2 선무랑 | 정연(鄭艹+衍) * 풀초변+연 여형(汝馨) | 봉직랑(奉直郞) * 종5품(從五品) 상(上)의 문관(文官) 품계(品階) |
12 | Ⅱ-5 청백리 | 정어(鄭艹+御) * 풀초변+어 중성(仲盛) | 승의부위(承議副尉), 용양위부사용(龍驤衛副司勇) * 승의부위 : 정8품 무관 |
12 | Ⅱ-7 참판 | 정원형(鄭元亨) 사형(士亨) | 1644년 통덕랑(通德郞) |
12 | Ⅱ-7 참판 | 정원복(鄭元復) | 통덕랑(通德郞) |
12 | Ⅱ-7 참판 | 정원겸(鄭元謙) | 통덕랑(通德郞) |
12 | Ⅱ-7 참판 | 정원정(鄭元鼎) 사주(士周) (1658 ~ ?) | 통덕랑(通德郞) |
12 | Ⅱ-7 참판 | 정원유(鄭元有) 사수(士守) |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과천현감(果川縣監)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2 | Ⅱ-7 참판 | 정원항(鄭元恒) | 통덕랑(通德郞) |
12 | Ⅱ-7 참판 | 정원익(鄭元益) | 통덕랑(通德郞) |
12 | Ⅱ-7 참판 | 정원리(鄭元履) | 통덕랑(通德郞) |
12 | Ⅱ-7 참판 | 정원함(鄭元咸) 사성(士誠) 만성당(萬醒堂) | 통덕랑(通德郞) |
12 | Ⅱ-7 참판 | 정원절(鄭元節) 사의(士義) (1679~1742) | 통덕랑(通德郞) |
12 | Ⅱ-7 참판 | 정인제(鄭仁濟) 수보(壽甫) | 진사(進士) |
12 | Ⅱ-9 성재 | 정치상(鄭致相) 퇴경(退卿) 허주(虛舟) (1658~1722) | 음직(蔭職) 1706년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 1706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716년 군자주부(軍資主簿), 1717년 하양현감(河陽縣監) 문장이 뛰어나고 덕행이 높아 세상의 명망이 높았다 文章德行見稱於世 |
12 | Ⅱ-9 성재 | 정규상(鄭奎相) 맹장(孟章) (1682~1727) | 1727년 성균생원(成均生員) |
12 | Ⅱ-9 성재 | 정사상(鄭思相) 매경(梅卿) (1682~1766) | 1723년 생원(生員) |
12 | Ⅱ-9 성재 | 정태상(鄭泰相) | 통덕랑(通德郞) |
12 | Ⅱ-11 사간 | 정제상(鄭濟相) 여홍(汝弘) (1670~1725) | 장사랑(將仕郞) |
13 | Ⅰ-2 응교 | 정수종(鄭壽宗) 효승(孝承) | 통덕랑(通德郞) |
13 | Ⅰ-2 응교 | 정수익(鄭壽宗) 익지(翼之) | 진사(進士) |
13 | Ⅰ-2 응교 | 정수원(鄭壽元) 원지(元之) | 통덕랑(通德郞) |
13 | Ⅰ-2 응교 | 정수선(鄭壽先) 선지(先之) (1625 ~ 1671) | 1651년 생원(生員), 1661년 사재감참봉(司宰監參奉) 1664년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 1668년 동몽교관(童蒙敎官) 1670년 통례원인의 겸 한성부참군(通禮院引儀兼漢城府軍), 현감(縣監) 진휼낭청(賑恤郎廳)에 천거 받아 당하관 근무 중 직소에서 졸하시어 특별히 은전(恩典)과 부의를 하사(賜賻) * 현감 기록 : 사위 묘갈문에도 참군으로 기록되었고, 졸 당시 기록도 참군이며, 승정원일기도 참군 기록만 있고 현감기록은 없다
< 1671년 왕조실록 : 현종 12년 5월 13일 > 좌참찬 민정중이 아뢰기를, "한성 참군(漢城參軍) 정수선(鄭壽先)은 진휼청 낭청으로서 마음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여역에 걸려 죽었으니, 매우 불쌍합니다. 낮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초기(草記)로 우러러 진달하지 못합니다." 하니, 상이 장례 물품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
13 | Ⅰ-2 응교 | 정수징(鄭壽徵) 태수(台叟) (? ~ ?) | 1698년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 수승 동지중추부사(壽陞 同知中樞府事), 향년 86 |
13 | Ⅰ-2 응교 | 정시한(鄭時罕) 노경(老卿) 덕봉(德峰) (1614~1683) | 장사랑(將仕郞) |
13 | Ⅰ-2 응교 | 정시설(鄭時卨) 우경(虞卿) 목눌자(木訥子) 반곡(盤谷) (1621~1681) | 1650년 생원(生員) 희릉참봉(禧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노년을 나주 반남의 ‘안우산’에서 지냈다. 훌률한 가문의 사람들도 공을 존경하였다 終老於羅州潘南遊安牛山 邦俊門爲諸公推重 |
13 | Ⅰ-2 응교 | 정시열(鄭時說) 몽경(夢敬) (1629~1677) | 통덕랑(通德郞) |
13 | Ⅰ-2 응교 | 정시주(鄭時周) 성경(聖敬) (1636~1697) |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수직이면 생몰년 확인필요 |
13 | Ⅰ-2 응교 | 정시경(鄭時卿) 차주(次周) (1627~1697) | 1662년 생원(生員) 1665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1675년 군자주부(軍資主簿), 1676년 강서현령(江西縣令) 1678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679년 금천군수(金川郡守) |
13 | Ⅰ-2 응교 | 정시일(鄭時一) 계도(季道) (1632~1671) | 1660년 진사(進士) 1667년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 1670년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
13 | Ⅱ-1 참봉 | 정수원(鄭壽元) 원길(元吉) (1615~1688) | 선무랑(宣務郞) * 종6품(從六品) 문관(文官)의 위계(位階) |
13 | Ⅱ-3 판서 | 정연광(鄭演光) 휘보(輝甫) | 통덕랑(通德郞) |
13 | Ⅱ-4 정랑 | 정시교(鄭是僑) 예중(禮仲) | 분교관(分敎官) * 어린이의 교육을 담당하던 동몽 교관(童蒙敎官) |
13 | Ⅱ-5 청백리 | 정익성(鄭翊成) 군익(君翼) | 통덕랑(通德郞) |
13 | Ⅱ-5 청백리 | 정익선(鄭翊宣) 군한(君翰) | 선교랑(宣敎郞) * 문관(文官)의 종6품(從六品)의 품계(品階) |
13 | Ⅱ-9 성재 | 정숭기(鄭嵩基) 군산(君山) (1678~1742) | 통덕랑(通德郞) |
13 | Ⅱ-9 성재 | 정화기(鄭華基) 성잠(聖岑) 무하당(無何堂) (1693~1770) | 통덕랑(通德郞)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으며, 문장이 빛나고 아름다워 성망이 높아 선비와 벗들이 받들었다 孝友純至文章華邵 聲望蔚然士友推重 |
13 | Ⅱ-9 성재 | 정후기(鄭垕基) 중진(重震) 육오와(六汚窩) (1674~1747) | 숙종34년(170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1732년 숭릉참봉(崇陵參奉) 1733년 평시서봉사(平市奉事) 만년에 무송정을 짓고 장암 정호가 제액을 썼다. 증손 희승이 수승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복시정에 증직되었다. 아들 희주가 가장을 짓고, 손자 진사 국휘가 행장을 쓰고, 지평 김일주가 묘표를 쓰고, 5대손 일수가 무송정 유허비를 세웠다
晩築撫松亭 丈岩鄭澔*題額 以曾孫姬升貴贈司僕寺正 姬柱述家狀 孫進士國輝述行狀 持平金日柱撰墓表 五代孫一洙立撫松亭遺墟碑
* 정호(鄭澔) : 1648∼1736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냄 |
13 | Ⅱ-9 성재 | 정최기(鄭最基) 군선(君善) (1723~1793) | 1777년 성균생원(成均生員) |
13 | Ⅱ-9 성재 | 정시주(鄭時冑) 성균(聖均) | 통덕랑(通德郞) |
13 | Ⅱ-10 봉사 | 정윤제(鄭允濟) (1737~1808) | 성균생원(成均生員) 증손 재수(載洙)가 귀하게 되어 통례원 상례에 추증되었다 * 재수 공이 대한제국 시종인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임명되어 추증된 것으로 보임 |
13 | Ⅱ-11 사간 | 정태기(鄭泰基) 내백(來伯) (1691 ~ ?) | 통덕랑(通德郞) |
13 | Ⅱ-11 사간 | 정계기(鄭啓基) 내백(來伯) (1706 ~ ?) | 통덕랑(通德郞) |
14 | Ⅰ-2 응교 | 정치(鄭致) | 부사과(副司果) |
14 | Ⅰ-2 응교 | 정서(鄭敍) 천거(天擧) | 부사과(副司果) |
14 | Ⅰ-2 응교 | 정미(鄭敉) 사안(士安) (1646~1724) | 통덕랑(通德郞) |
14 | Ⅰ-2 응교 | 정시한(鄭時罕) 노경(老卿) 덕봉(德峰) (1614~1683) | 장사랑(將仕郞) |
14 | Ⅰ-2 응교 | 정효(鄭斅) 학반(學半) 청파(靑坡) (1641~1707) | 1679년 전설별제, 사헌감찰(典設別提·司憲監察) 1699년 우구리만호(牛仇里萬戶) 1709년 兔山縣監(토산현감) |
14 | Ⅰ-2 응교 | 정선(鄭歚) 원백(元伯) 겸재(謙齋) (1676~1759) | 화성(畵聖) 1721년 하양현감(河陽縣監) 1729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733년 청하현감(靑河縣監), 1740년 양천현령(陽川縣令) 1756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772년 증좌참찬, 한성판윤 (贈 左參贊(정2품) 漢城判尹例兼) |
14 | Ⅰ-2 응교 | 정휘(鄭徽) 미재(美哉) (1639~1704) | 1682년 진사(進士) 1684년 정릉참봉(貞陵參奉) 1686년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1689년 장악원주부(掌樂院 主簿) 1692년 적성현감(積城縣監), 1694년 청산현감(靑山縣監) |
14 | Ⅰ-2 응교 | 정창(鄭敞) 사앙(士昻) (1653 ~ ?) | 통덕랑(通德郞) |
14 | Ⅰ-2 응교 | 정전(鄭敟) 사범(士範) (1657~1707) | 통덕랑(通德郞) |
14 | Ⅰ-2 응교 | 정엄(鄭儼) (1649~1667) | 통덕랑(通德郞) |
14 | Ⅰ-2 응교 | 정조(鄭肇) 시숙(始叔) (1679~1734) | 통덕랑(通德郞) |
14 | Ⅰ-3 지평 | 정광제(鄭光濟) 태여(泰汝) (1712~1784) | 통덕랑(通德郞) 부 수 자헌대부(壽 資憲大夫) 시익(時益) |
14 | Ⅰ-3 지평 | 정광린(鄭光麟) 공서(孔瑞) 남일재(南一齋) (1715~1784) 은사(隱士) | 통덕랑(通德郞) 부 수 자헌대부(壽 資憲大夫) 시익(時益)
수양하고 공손함이 도가 있었다. 좌명은 효제요, 가훈은 근검이며, 선대의 행적을 기록하여 보장하였다
修齋有道 座銘曰孝悌 家訓曰勤儉 撰先世遺事藏于家 |
14 | Ⅰ-5 능파정 | 정치복(鄭致復) 덕이(德以) (1730~1797) | 1753년 성균진사(成均進士) 1773년 생원(生員) * 생진구중(生進俱中)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돈독하였으며 문학의 성망이 높았다(孝友純至文學贍富) |
14 | Ⅰ-6 승지 | 정태영(鄭泰英) 준경(俊卿) (1686~1768) |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 향년 83세
* 직장 : 조선시대 각 관아에 두었던 종칠품(從七品) 관직 * 의영고 : 호조(戶曹)의 속아문(屬衙門)으로, 기름·꿀·밀(黃蠟)·채소·후추 등의 조달·관리 등의 일을 맡아보았다. 의영고는 진상(進上)에 관련되는 기관이라 하여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사도시·사재감(司宰監)·사포서(司圃署)와 더불어 공상6사(供上六司)라 하였으며, 궁중에서 쓰이는 후추 등은 왜상인(倭商人)과의 교역으로 조달하였다. |
14 | Ⅰ-6 승지 | 정덕립(鄭德立) 명중(明仲) (1638~1675) |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 승 통정대부(陞 通政大夫)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4 | Ⅰ-6 승지 | 정희창(鄭熙昌) 성여(聖汝) 한강(寒岡) (1672~1742) | 1696 성균진사(成均進士)
도의와 문장으로 명망이 드높았다(道義文章著名當世) |
14 | Ⅱ-3 판서 | 정언득(鄭彦得) | 통덕랑(通德郞) * 부 윤광(潤光) 무과, 나주영장 |
14 | Ⅱ-5 청백리 | 정온(鄭馧) 문원(聞遠) (1668 ~ ?) | 통덕랑(通德郞) |
14 | Ⅱ-6 양촌 | 정득천(鄭得天) 건명(健明) (1677~1740) | 음직으로 서사에 나갔다(蔭筮仕) 1717년 천문학교수(天文學敎授) 1730년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 1734년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 1734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
14 | Ⅱ-6 양촌 | 정명천(鄭明天) 중명(重明) (1683 ~ ?) | 통덕랑(通德郞) |
14 | Ⅱ-6 양촌 | 정운천(鄭雲天) 유룡(幼龍) (1692~1752) | 통덕랑(通德郞)
글과 문장의 재주가 뛰어나 세간의 칭송을 받았다 文翰才諝見稱於世 |
14 | Ⅱ-9 성재 | 정희망(鄭希望) 공망(公望) (1712~1752) | 통덕랑(通德郞) |
14 | Ⅱ-9 성재 | 정태주(鄭台柱) 중윤(仲尹) (1721~1752) | 통덕랑(通德郞) |
14 | Ⅱ-9 성재 | 정한주(鄭漢柱) 시중(時仲) (1731~1792) | 통덕랑(通德郞) |
14 | Ⅱ-9 성재 | 정곤(鄭㫻) 중진(仲晋) (1693~1766) | 1717년 진사(進士) 1728년 생원 정곤, 직부 회시(之次生員鄭㫻直赴會試) * 문과에 초시가 면제 되어 복시응시자격을 받음 1746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1749년 조지서별제(造紙署別提) 1750년 문의현령(文義縣令) 1763년 성수 추은가자 오위장(聖壽 推恩加資 五衛將) 1765년 정3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15 | Ⅰ-2 응교 | 정오준(鄭五俊) 사걸(士傑)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오준(鄭五俊) 사걸(士傑)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내창(鄭來昌) 성여(盛汝) (1680~1710) | 생부 휘(徽),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내길(鄭來吉) 사걸(士傑) (1698~1754) |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 |
15 | Ⅰ-2 응교 | 정내혁(鄭來赫) (? ~ 1756)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내길(鄭來吉) 사걸(士傑) (1698~1754)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만익(鄭萬益) 겸중(謙仲) (1657~1710)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만적(鄭萬迪) 혜중(惠仲) 관란재(觀瀾齋) (1660~1711) | 통덕랑(通德郞) 글과 글씨가 뛰어나 이름이 높았다. 문집이 전한다. 文章筆翰名於當世 有文集 |
15 | Ⅰ-2 응교 | 정만철(鄭萬喆) 안숙(安叔) (1666~1717)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만협(鄭萬協) 화중(和仲) 성헌(省軒) (1661~1723)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만우(鄭萬羽) 운장(雲章) 청암(淸岩) (1690~1751)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만복(鄭萬福) 자수(子綬)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만교(鄭萬僑) 자윤(子允) (1724 ~ ?) | 통덕랑(通德郞) * 부 겸재(謙齋) 공 |
15 | Ⅰ-2 응교 | 정오행(鄭五行) 사건(士健) (1672~1731) | 통덕랑(通德郞)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어 칭송이 자자하였다 孝友而聞 |
15 | Ⅰ-2 응교 | 정오덕(鄭五德) 윤보(潤甫) (1690~1756)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오득(鄭五得)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오돈(鄭五敦) 여일(汝一) (1682~1757) | 통덕랑(通德郞) |
15 | Ⅰ-2 응교 | 정오훈(鄭五薰) | 통덕랑(通德郞) |
15 | Ⅰ-5 능파정 | 정택엽(鄭宅燁) 성후(聖厚) 초암(楚岩) (1778 ~ 1859) | 지조를 행함이 굳건하며 문장과 글이 여유가 있었다. 만년에 초산에 은거하며 유연자적하였다. 철종 무오년(1858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좌승지에 이르렀다. 수 82세
操履堅確 文詞贍富晩隱楚山悠然自適 哲宗戊午(1858년) 以學行薦至左承旨 |
15 | Ⅰ-6 승지 | 정한주(鄭翰周) 중로(仲老) (1700~1767) | 통덕랑(通德郞) |
15 | Ⅰ-6 승지 | 정광지(鄭光祉) 덕순(德順) (1725~1784) | 음 영릉참봉(蔭 寧陵參奉) *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되지 않음 |
15 | Ⅱ-5 청백리 | 정유일(鄭惟一) 집중(執中) (1699~1765) | 통덕랑(通德郞) |
15 | Ⅱ-6 양촌 | 정항섭(鄭恒燮) 자유(子柔) (1709~1765) | 현감(縣監)
여선량이 지은 만사에서 덕행을 칭송했다 呂善良撰輓詞稱德行 |
15 | Ⅱ-6 양촌 | 정항철(鄭恒喆) 지숙(智淑) (1712 ~ ?) | 통덕랑(通德郞) |
15 | Ⅱ-6 양촌 | 정항길(鄭恒吉) 사적(士迪) (1715~1772) | 통덕랑(通德郞) |
15 | Ⅱ-7 참판 | 정항순(鄭恒淳) 보여(甫汝) (1781~1844) | 통덕랑(通德郞) |
15 | Ⅱ-9 성재 | 정덕휘(鄭德輝) 사술(士述) (1731~1779) | 통덕랑(通德郞) 증손 인수가 귀하게 되어(수 자헌대부) 사복시정에 추중되었다(以贈曾孫麟洙貴 贈司僕寺正) |
15 | Ⅱ-9 성재 | 정익휘(鄭益輝) 술보(述甫) (1723~1789) | 통덕랑(通德郞)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가 깊었다. 글과 학문 또한 높았으며 선대의 행적을 본받았다
孝友文學克趾先美 |
15 | Ⅱ-9 성재 | 정두휘(鄭斗輝) 계칠(啓七) (1737~1805) 晉人楷體書法 | 통덕랑(通德郞)
경서에 밝고 덕행이 높아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 서법에 정진하여 진나라 해서체 분야에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經術德行爲世推重尤精於書法沈得晉人楷體 |
15 | Ⅱ-9 성재 | 정국휘(鄭國輝) 숙빈(叔賓) (1752~1813) | 1789년 생원(生員) |
15 | Ⅱ-9 성재 | 정득휘(鄭得輝) 덕능(德能) (1749~1789) | 통덕랑(通德郞) |
15 | Ⅱ-9 성재 | 정내휘(鄭來輝) 여복(汝福) (1753~1822) | 통덕랑(通德郞) |
15 | Ⅱ-11 사간 | 정찬휘(鄭纘輝) 계술(季述) (1745 ~ ?) | 통덕랑(通德郞) |
15 | Ⅱ-11 사간 | 정석휘(鄭碩輝) 계윤(季潤) (1766~1843) | 통덕랑(通德郞)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