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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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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 बोधिधर्म(Bodhidharma)
중국어: 菩提達磨(Pútídámó)[2]
영어: dharma[3]
1. 개요
중국 육조시대의 인도 승려로, 불교 선종(禪宗)의 창시자.[4]
범어로는 보디다르마(Bodhidharma)이며 한자로는 보리달마(菩提達磨)라 옮기는데,
보통 칭하는 달마는 그 약칭이다.
2. 생애
남인도의 향지국의 셋째 왕자라 하나, 기록이 많지 않아 무슨 일을 했는지 알기는 어렵다. 《전등록》에 따르면 반야다라(Prajnatara)[5]의 제자였다고 한다.
고대 인도의 전통무술 칼라리 파야트(Kalaripayattu)를 중국으로 가져와서 중국 권법의 시조가 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자료는 없다.
520년,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수련[6]을 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사람의 마음은 본래 청정한데, 오랜 수련을 통해서 이를 깨달을 수 있다는 주장을 세상에 펼쳤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이전의 경전 중심의 교종 불교에서 좌선 중심의 선종 불교를 주장한 셈이다.
보통 불가의 그림 가운데는 달마도라 하여 달마대사의 모습을 그린 화상이 많은데, 그림 속 달마가 눈을 무섭게 부라리고 있는 이유는 수련을 하던 중 졸음을 이기지 못한 눈꺼풀이 내려 앉자 이를 막기 위해 아예 눈꺼풀을 잘라버렸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잘라서 내어 버린 눈꺼풀이 차(茶)나무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때문에 차를 마시면 잠이 깬다는 전설이다.
구전되는 전설들에서 하나 같이 무언가 베어내거나 잘라내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에서 보듯, 무언가 "극"을 받는 모습을 상징하는 강렬한 모습을 한 것이 달마인데, 그래서 달마도를 집에 걸어두면 중국에서 자주 쓰는 관우 상 같은 풍수 기물이 되기도 하고, 또, 사주명리에서 말하는 물상대체[7]가 되므로, 소위 좋은 기운을 받는다 하여 부적 처럼 쓰이는 경우가 많다.[8]
어떤 이야기를 따르면, 본래 달마는 매우 미남이었으나 길에 커다란 죽은 구렁이가 널브러져 있어 그것을 치우기 위해 잠시 유체이탈을 한 사이 자신의 몸을 곤륜산 선인이 갈아타버려서 따질까 생각했지만 신선임을 감안해 결국 몸을 바꾸고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는 그는 더 흉악한 몰골을 지녔는데, 넘치는 선기(仙氣)로 인하여 비록 생긴 것은 못났어도 멋있는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는 체구가 크고 피부색이 어둡고 이목구비가 큼직한 인도인의 외모를 중국인들이 그렇게 해석한 듯.
혜가가 그의 제자가 되기를 갈망했지만 달마는 자신 앞에 쌓인 눈이 붉게 변할 때까지 받아주지 않겠다고 한다. 또는 흰 눈이 내리지 않을 때에 제자로 받겠다는 전승도 있다. (안 받아주겠다는 소리다.)
그래서 혜가는 팔을 잘랐다[9] 상처에서 흐른 피가 하얀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와중에, 달마가 혜가를 향하여 무엇인가를 던졌다. 혜가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팔을 잘라낸 뒤였다. 다만 '없는 팔로 무엇인가를 잡으려는 행위'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은 뒤 잘렸던 그의 팔이 도로 붙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거의 모든 전승에서 혜가는 외팔이로 묘사된다.[10] 혜가(慧可)에게 가르침을 물려주었다.[11]
이 이야기는 이후 달마 밑으로 6대를 더 전승되다가 그 힘을 잃었다.
그는 몇 번이고 그를 질투하던 다른 승려나 귀족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여유롭게 위기를 넘긴 일화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승려들의 건강과 안위를 위해 소림권을 창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사실 역사적 신빙성은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소림권이 달마를 기원으로 두고 있고 다른 많은 무술은 소림권을 기원으로 삼고 있어서 결국 중국 무술의 대부분은 달마를 기원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양무제(소연)를 방문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풍토병으로 입적하였다.
설화에 따르면, 달마는 절을 중건하는 일에 정력과 국고의 재물을 쓰는 양 무제의 위선을 비판했더니 격노한 양 무제가 그를 비밀리에 독살했다고 한다.
그 배후에는 광통율사 같은 교종 계열의 승려도 있었다고 한다.
설화에서 전하는 무제와 달마가 나눈 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무제: 짐이 지금까지 천 개의 절을 짓고 천개의 탑을 쌓고 2만여 스님들을 공양했는데 그 공덕의 크기는 얼마인가?
달마: 아예 공덕이랄 것이 없습니다(無功德[12]).
무제: 어째서 공덕이 없다 하는가?
달마: 이러한 것들은 속세의 인과응보에 불과할 뿐 진정한 공덕이 아닙니다.
무제: (이놈 봐라…)그러면 진정한 공덕이란 무엇인가?
달마: 청정한 지혜로 오묘하고 원만하여 본체가 본래 비어 있어 고요하니, 이러한 공덕은 현세와 속세의 법으로 구하지 못합니다.
무제: 좋다. 불교의 성스러운 교리 가운데 첫째 가는 것이 무엇인가?
달마: 전혀 성스러울 것이 없다니까요.
무제: (열이 오를 대로 오르며…)내 앞에 있는 그대는 누구인가?
달마: 알지 못합니다(不識).
해석에 따라서는 달마가 무제를 놀리거나 비판한 것은 아니며, 그저 진실만을 말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물론 득도하려 수행하고 덕을 쌓는 승려들에게 공양을 한 것을 운운하며, 본인의 공을 치하받고자 하는 무제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달마는 공덕을 위해 공덕을 쌓지 말라는 뜻으로 공덕이란 없다고 가르침을 주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달마는 무려 다섯 번의 독살을 피하였으나 그를 향한 여섯 번째 독살 시도를 그는 익히 알았으면서도 이를 담담히 받아들여 죽었다.[13][14]
담담함은 깨달음 사람들 전매특허인가 그의 유해는 웅이산(熊耳山)에 묻혔는데, 3년이 지난 뒤에 멀쩡하게 다시 살아나 부활하여 신발 한 짝만 지팡이에 꿴 채 길을 떠났다고 한다.
이를 안 양 무제가 그를 쫒아 추격군을 파견했지만, 그를 뒤쫒아 오는 병졸들을 본 달마는 갈대 잎 하나를 꺾더니 마치 수상 스키를 타듯 이것을 타고 강을 건너버렸다고 한다.[15] 강을 건넌 그는 그대로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인도로 도로 떠나버렸다는 말이다.
이 다음에 일어난 일을 전하는 기록이 없으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양무제의 치세 때 풍토병으로 병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양무제가 몇 차례에 거듭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 승려가 되려고 할 정도로 불교를 숭배하였는데[16] 이러한 강한 믿음에 한사코 동의하지 않은 것이 이유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17]
반면 양무제를 좀더 긍정적으로 묘사한 야사도 있다. 양무제가 달마를 죽이지는 않고 단순히 궁에서 내보낸다.
이후 당대의 고승인 지공(志公)을 만나 달마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사람을 보내 달마를 불러들이려 했으나,
지공이 '너무 늦었습니다. 모든 백성을 보낸다고 해도 결코 돌아오지 않으실 분입니다.'라고 만류해서 포기했다는 이야기이다.[18]
이 설화에 따르면 양무제가 달마 대사의 열반 이후 그의 깨우침을 기리며 친히 추모비를 세워줬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눈으로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고(見之不見)
맞이해서 만나고도 뜻을 맞지 못했으니(逢之不逢)
예고 지금이고(古之今之)
후회하고 한스럽구나(悔之恨之)
일설에 따르면, 달마가 중국에 이미 왔을 때 달마는 이미 한세기를 너끈히 살아낸 사람으로, 그는 이미 백 살을 훌쩍 넘은 나이였다고 전한다. 심지어는 그가 다섯 세기가 지날 때까지, 즉 500살까지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한 그 절반인 250살까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로 비추어 보아 정확하지는 않지만 달마가 오래 산 것은 사실인 듯하다.
독배를 들었다는 점에서는 소크라테스가, 부활했다는 설에서는 예수가 연상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3. 실존 인물인가?
선불교가 중심이 되는 북방불교계에서는 그를 선종의 초조로서 고승으로 추존하고 있으나, 정작 달마대사에 대한 갖가지 기록들은 신화적인 허구성이 짙고 불확실한 게 많아 신뢰하기 어렵고, 선불교 자체의 역사적인 문제도 결부된다.
흔히 불교계에서는 선불교의 유래로 <대범천왕문불결의경(大梵天王問弗決疑經)>에 실린 염화시중[19]의 기록을 근거로 드는데…
…문제는 이거 위경이다. 딱 잘라 말하면 석가모니의 기록이라고 거짓말한 책이라는 거다.[20][21]
실제로 학계에서는 선불교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도가철학과 결합되어 형성된 불교적 사상의 한갈래로 여기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의 어느 학계에서도 100% 인정되는 정설이다.
나아가 이러한 사상적 운동의 일부에 원효의 저술과 사상이 영향을 끼쳤다.[22]
그런데 이는 달마가 선불교를 전래했다는 기존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선불교의 창시 시기부터에 대한 기록에 문제가 있는데, 그 선불교를 가져와 중국에 소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에 당연히 문제의 소지가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달마라는 사람이 등장하는 최초의 문헌은 <낙양가람기>라는 책인데, 이 책에 실린 달마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서역에서 온 보리달마라는 사문이 있다. 페르시아 태생의 호인(胡人)이다. 멀리 변경지역에서 중국에 막 도착하여, 탑의 금반이 햇빛을 받아 빛나고, 광명이 구름을 뚫고 쏟아지며, 보탁이 바람에 울려 허공에 메아리치는 것을 보며 그는 성가를 읊조려 찬탄하고 분명한 신의 조화라고 말하며 그 덕을 칭송했다.
그는 나이가 150세로 많은 나라를 돌아다녀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이토록 훌륭한 절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부처의 나라를 찾아도 이만한 곳은 아닐 테다라고 말하며 '나무 나무(namunamu:歸依)'를 읊조리며 며칠이나 합장을 계속했다.(출처)
이는 그가 물질적인 공덕에 집착하는 양무제를 훈계하는 기록과는 전혀 다른 기록이다.
더욱이 달마대사가 9년간 면벽좌선했다는 소림사는 달마가 중국에 머무르던 당시에 그러한 절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연구결과가 중국에서 발표되었다.
달마라는 승려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우리가 아는 달마는 뒷날에 많이 윤색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점은 정설이다.
보리달마에 대한 많은 기록은 없지만 그의 행적을 규명하고자 함은 여러 사람의 관심 대상이었다. 이 단락은 사료가 부족하지만 가능한 그의 행적을 추정하고자 한다.
두가지 대립되는 설은 실크로드를 통해 왔다는 설과 남인도로부터 바닷길을 통해 왔다는 설이 있다.
최초의 관련 문헌인 냑양가람기에 따르면 보리달마는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향했다.
반면, 이입사행론에 의하면 보리달마는 서쪽의 남인도 사람으로, 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입사행론은 보리달마의 어록을 담고 있는 책이며 보리달마의 제자인 담림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입사행론 둔황본이 발견되면서 주목받았는데, 원효가 저술한 금강삼매경에도 유사한 내용이 있어서 어떤 책이 먼저 저술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23]
캄베 츠토무(神部 勉)에 따르면 당나라 시기의 문서에 인도 왕국의 이름이 香至(향지)로 기술되었는데, 香至는 당시에 Kang-zhi로 발음되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캄베 츠토무는 인도의 타밀나두(Tamil-Nadu)주에 있는 옛 왕국의 수도 Kanchipuram을 보리달마의 출신지로 추정하고 있다.[24]
첨언하면 이 지역은 인도의 크리슈나 강 이남 지역이다. 크리슈나 강 이남 지역은 과거에 대중부 불교가 성행했던 지역으로 소품반야경이 처음 유포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25]
소품반야경은 초기 대승불교에 있어 반야 사상의 시초가 되는 경전으로 선불교의 소의경전인 금강경도 반야부 계열의 경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