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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33권
7. 변현성품⑤
7.6. 무학위(無學位)[3]
5) 아라한의 6종성(種性)
① 6종성의 아라한
유학위에 예류과 등 다수의 차별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아라한과에도 역시 많은 종류의 차별상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역시 [많은 종류의 차별상이] 있다.
[그 차별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라한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퇴법에서 부동법에 이르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앞의 다섯 가지는 신해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그 모두를 ‘시해탈’이라 이름한다.
마지막의 것은 ‘불시해탈’로서
이전의 견지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계경 중에서는, 아라한에는 종성(種性)의 차이로 말미암아 여섯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첫째는 퇴법(退法)이며,
둘째는 사법(思法)이며,
셋째는 호법(護法)이며,
넷째는 안주법(安住法)이며,
다섯째는 감달법(堪達法)이며,
여섯째는 부동법(不動法)이다.
그런데 또 다른 경에서는 무학에 아홉 가지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처음의 것은 퇴법이고 마지막은 구해탈(俱解脫)이다.1)
그러나 그 경에서의 불퇴법(不退法)은 여기(6종성의 아라한)서의 부동법에 포섭되며,
그 경에서의 두 가지 해탈(즉 혜해탈과 구해탈)은 모두 이러한 여섯 종성에 포섭되기 때문에, 아비달마(阿毘達磨)에서는 [아라한과에는] 오로지 여섯 가지만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여기서 퇴법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그가 이와 같은 종류의 근기[根]를 획득하고서 이러한 근기에 안주할 때, 퇴실(退失)의 인연을 만나면 바로 획득된 과위로부터 물러나게 되지만, 퇴실의 인연을 만나는 일이 없으면 곧 바로 반열반하게 되는 아라한을 말한다.
혹은 어떤 이가 부지런히 정진하여 수승한 종성을 획득하였을지라도 [퇴실의] 인연을 만나면 대개 물러나기 때문에 퇴법이라 이름하였다.2)
사법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어떤 이가 이와 같은 종류의 근기를 획득하고서 이러한 근기에 안주할 때, 염(念)의 힘이 견고하여 대개는 염관(厭觀)에 머물면서 수승한 공덕을 상실할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다잡아[策] 대개는 자신을 해치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법이라 이름하였다.
호법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어떤 부류는 항상 시애심해탈(時愛心解脫)에 계박된 마음[繫念]이 현전하여3) 오로지 한결같이 방호(防護)에 힘쓰며 방일함이 없이 머물기 때문에 호법이라 이름하였다.
안주법이란,
이를테면 수승한 퇴실의 인연을 떠난 이로서, 비록 스스로 방호하지 않더라도 역시 능히 물러나지 않는 이를 말한다.
즉 뛰어난 가행을 떠나고 역시 또한 근기를 단련[練根]하지 않더라도 대개는 처중(處中, 물러나지도 승진하지도 않는 상태)에 머물기 때문에 안주법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감달법이란,
이를테면 능히 감당할 만한 공능[堪能]이 있어 즐거이 연근(練根, 근기의 단련)을 수습하여 신속하게 부동법에 도달하는 이로서, 예리한 근기를 바로[親] 증득할 수 있기 때문에 감달법이라 이름하였다.
부동법이란,
이를테면 어떤 부류는 근기의 성품[根性]이 수승할 뿐더러 의지가 겁약(怯弱)하지 않아 획득된 공덕이 수승한 퇴실의 인연을 만나더라도 필시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부동법이라 이름하였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시 이러한 여섯 아라한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여섯 종성 중의 앞의 두 가지(퇴법과 사법)는 일찍이 유학위에 있으면서 항시(恒時)와 존중(尊重)의 가행을 결여한 이로서, 무학위에 이르면 사법은 조금 더 부지런히 힘쓴다.4) 그리고 호법은 오로지 항시의 가행만이 있을 뿐이고,
안주법은 오로지 존중의 가행만이 있을 뿐이며,
감달법은 두 가지 가행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바로 둔근이며,
부동법은 이근으로서 두 가지 가행을 모두 갖추고 있다.”5)
어떤 이는 이같이 말하였다.
“퇴법은 반드시 물러나며, 나아가 감달법은 반드시 부동법에 도달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 같은] 명칭으로 설정한 것이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즉 그는 주장하기를,
“욕계에는 여섯 종성이 모두 존재하지만, 색계와 무색계 중에는 오로지 안주법과 부동법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그곳에서는 퇴실(退失)과 자해(自害)와 자기방호[自防]와 근기의 단련[練根]을 수습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두 가지만이 존재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6)
이치상으로 볼 때 [6종성은] 실로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7)
즉 응과(應果, 아라한과)에서 물러나는 것은 오로지 일찍이 [획득한] 것에서 물러나는 종성이 물러나는 것이며,
나아가 부동법에 도달하는 것은 오로지 거기에 도달하는 것을 감당할 만한 공능에 의한 것으로,8) 퇴법 등의 명칭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6종성의 아라한은 3계에 모두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6종성 중에서 앞의 다섯 가지는 신해(信解)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이들을 ‘시애심해탈(時愛心解脫)’이라고 이름하니, 항시[一切時] 마음의 해탈을 애호(愛護)하기 때문이다.9)
역시 또한 이들을 설하여 ‘시해탈(時解脫)’이라고도 이름하니, 말하자면 때를 기다려 [수승한] 처소와 보특가라와 자구(資具) 등과 화합하게 될 때 비로소 해탈을 획득하기 때문이다.10)
즉 [해탈의] 의지(依止)가 되는 공덕이 적고 저열[薄劣]할 경우, 요컨대 [그것이] 수승하게 될 때를 기다려 비로소 해탈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한 일체의 수승한 선정이 현전하려면 요컨대 수승한 때를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시(時)’의 의미이다.
그리고 [번뇌의] 계박을 떠났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이(시해탈)는 바로 ‘때를 기다려[待時] 해탈하는 자[解脫]’라는 뜻이지만,
‘타락죽 항아리[酥甁]’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앞의 말(즉 ‘待’)을 생략하였기 때문에 [‘시해탈’이다].11)
[본송에서는] 부동법의 종성을 설하여 ‘마지막의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을 ‘부동심해탈(不動心解脫)’이라고도 이름하니, 그의 마음의 해탈은 더 이상 번뇌에 의해 동요되지 않기 때문이다.
역시 또한 ‘불시해탈(不時解脫)’이라고도 이름하니, 때를 기다리지 않고 해탈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한 어떤 처소에서든, 어느 때든, 어떤 인연을 만나든 원하는 바에 따라 수승한 선정이 바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뇌의] 계박을 떠났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이름하였다. 즉 [불시해탈이라고 함은] ‘때를 기다리지 않고 해탈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유여사는 이러한 두 가지 해탈의 차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여 말하였다.
“잠시(暫時) 해탈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시해탈’이라고 이름하였으니, 그 후 물러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능히 필경(畢竟, 궁극)의 해탈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불시해탈’이라고 이름하였으니, 그 후 물러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부동법)은 유학위의 견지(見至)의 종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② 6종성의 선천성과 후천성
이상에서 밝힌 여섯 아라한의 종성은 이전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후에 비로소 획득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12)
일정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종성도 있으며
후에 연근(練根)하여 획득된 종성도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퇴법의 종성은 필시 이전부터 존재하였지만, 사법 등의 다섯 종성은 역시 또한 후에 획득된 경우도 있다.
즉 이전부터 사법 내지 부동법의 종성인 경우도 있고,
이전에는 퇴법의 종성이었지만 [후에] 근기를 단련[練根]하여 사법이 되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부동법 등의 다양한 종류의 차별에 대해서도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13)
③ 아라한과 유퇴론(有退論)
이와 같은 여섯 종성의 아라한 가운데 오로지 앞의 다섯 종성만이 물러나는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누가 어디로부터 물러난다는 것인가?
종성으로부터 물러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과위(즉 아라한과)로부터 물러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네 가지는 종성으로부터, 다섯 가지는 과위로부터
물러나지만, 일찍이 [획득한] 것에서는 물러나지 않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동법의 종성은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오로지 앞의 다섯 종성에만 물러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 중에서도 뒤의 네 가지는 종성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지만, 퇴법의 한 종류만은 종성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이 종성은 가장 하위(下位)이기 때문이다.14)
그리고 다섯 종성은 모두 과위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들 종성이] 비록 다 같이 물러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일찍이 획득한 것(종성과 과위)에서는 물러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무학위 중에 있으면서 연근(練根)의 행(行)을 닦아 퇴법의 종성으로부터 사법 등의 종성으로 바꾸어 성취하였을 경우,
이러한 네 가지 종성(사법ㆍ호법ㆍ안주법ㆍ감달법)은 모두 종성과 과위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있으며,15)
퇴법의 종성은 비록 필시 일찍이 획득된 것이라 할지라도 이는 바로 퇴법이기 때문에 과위에서 물러날 수 있다.
[또한] 온갖 유학위 중에 있으면서 연근의 행을 닦아 퇴법의 종성으로부터 사법 등의 종성으로 바꾸어 성취하였거나 [승진하여 다른] 유학의 과위를 획득하였을 경우에도 [종성과 과위에서] 모두 퇴실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온갖 무학의 성자로서 일찍이 유학위 중에서도 머물렀던 종성이라면, 그는 이러한 종성으로부터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유학과 무학의 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기 때문이다.16)
[또한] 온갖 유학의 성자로서 일찍이 범부위 중에서도 머물렀던 종성이라면, 그는 이러한 종성으로부터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세간도와 출세간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기 때문이다.17)
나아가 선행된 두 계위(유학위와 범부위) 중에서 사법 등의 종성으로 머문 경우에도 이것에 의해 획득된 과위(무학위와 유학위)에서는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이러한 종성은 두 가지 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어서 견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유학)가 연근의 행을 닦아 사법 등의 종성으로부터 호법 등의 종성으로 바꾸어 획득하였을 경우에는 오로지 종성에서만 물러날 수 있으며,
바꾸어 획득한 종성에서 승진하여 [다른] 유학의 과위를 획득하였을 때에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있으니,
이러한 종성은 두 가지 도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어서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18)
만약 네 가지 [사문]과에 근거하여 과위에서 물러나는 것에 대해 분별하면 [이러하다].
비록 다섯 종성은 모두 과위(아라한과)에서 물러날 수 있을지라도 일찍이 획득한 과위에서는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
이를테면 네 가지 과위 중에서 일찍이 획득한 것, 즉 예류과 등의 앞의 세 가지(즉 현관 제16심에서 최초로 획득되는 예류과와 초월증의 일래ㆍ불환과) 중의 어느 한 가지도 이러한 일찍이 [획득한] 과위로부터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이는 바로 견혹을 끊음으로써 획득된 과위이기 때문이며, 성자가 견혹(見惑)을 끊으면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19)
어떠한 연유에서 성자가 견혹을 끊으면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인가?
그것(견혹)은 ‘집착된 것[所執事]’을 [직접적으로] 반연하지 않기 때문이다.20)
이를테면 견소단의 번뇌로서 아견(我見)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현행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러한 번뇌는 모두 아견을 근본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견혹은 ‘집착된 것’을 [직접적으로] 반연하지 않는다고 한 것으로, [견혹에 의해] 집착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기[無體] 때문이다.21) 그렇더라도 소연은 존재하니, [4]제를 경계대상으로 삼기 때문으로,22) 그것(견혹)에 의해 ‘집착된 것(즉 자아)’은 어떠한 경우에도 종자(種子,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즉 [견혹은] 소연의 경계(즉 4제)에 지극히 상반되고 위배[乖違]되는 것이기 때문에,
성자의 상속에는 참된 비아(非我)의 승해(勝解)가 항상 수반되고 있기 때문에,
비록 잠시 실념(失念)할지라도 필시 다시금 이를 바로 자아라고 집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 견소단의 번뇌는 ‘자아라는 실체[我事]’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성자는 그것을 끊고 나서 필시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수소단의 번뇌는 비록 [견소단과 마찬가지로] 전도되어 일어난 것일지라도 [그것의 소연이] 종자(種子,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 [그것에 의해] ‘집착된 것[所執事]’은 [실]유이다.23)
이를테면 색 등에 대해 염착(染著)ㆍ증배(憎背, 증오하여 등짐)ㆍ고거(高擧, 거만함)ㆍ불요(不了, 알지 못함)의 행상이 일어날 때에도 색 등에 대해 약간의 정묘(淨妙, 청정 미묘함)ㆍ원해(怨害)ㆍ고하(高下)ㆍ심심(甚深)[의 행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소연의] 경계(즉 4제)에 지극히 상반되고 위배되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성자라도 어느 때 실념하여 정묘 등의 행상에 집착하여 물러나면, [다시] 수소단의 혹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또한 견소단의 번뇌는 진리의 이치[諦理, 즉 4제]에 미혹하여 자아[我] 등의 행상에 집착하는 것이지만,
‘[자아 등의 행상이] 진리의 이치 중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치상 결정코 의지할 만한 것[可依]이기에 성[혜]로써 관찰하기만 하면 물러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수소단의 번뇌는 거친 실체[麤事, 탐 등의 대상이 되는 색]에 미혹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현상의 실체[事, vastu]’는 변이하여 의지하기 어렵기[難依]에24) 실념하여 물러나는 일이 있는 것이다.
또한 견소단의 번뇌는 요컨대 자세히 살펴 생각[審慮]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성자가 자세히 살펴 생각할 때에는 필시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수소단의 번뇌는 자세히 살펴 생각하여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자라도 실념할 때에는 물러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25)
바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일찍이 [최초로] 획득되는 과위(예류과와 초월증으로서의 일래ㆍ불환과)에서는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보건대,
이러한 무학의 퇴법종성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근기를 [단련하여 사법 등으로] 증진하는 자이며,
둘째는 물러나 유학위에 머무는 자이며,
셋째는 자신의 계위[自位]에 머물며 반열반하는 자이다.
사법종성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세 가지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며,
여기에 다시 한 종류 즉 [사법에서] 물러나 퇴법종성에 머무는 자를 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밖의 세 가지에는 순서대로 다섯 가지와 여섯 가지와 일곱 가지가 있으니, 뒤의 것일수록 한 가지가 더 증가하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26)
어떠한 연유에서 [퇴법이었지만] 근기를 단련하여 사법 등을 성취한 자가 그러한 응과에서 물러나 유학위에 머물 때, 이전의 퇴법의 종성에 머물게 되는 것인가?27)
물러나게 된 자는 [일찍이 유학위에서] 사법 등의 도를 획득하였다가 지금 [그것(응과의 사법)을]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유학위에서 사법 등으로 바꾸어 성취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응과(應果)를 획득할 때 비록 [일찍이] 획득한 유학의 사법 등의 도를 버렸을지라도 응과에서는 사법 등의 종성으로 머무니, 이 경우(물러날 때)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例)는 양쪽 모두에 적용[齊]되지 않으니, 그것(응과를 획득할 때 버린 유학의 사법 등의 도)은 유학도에 포섭되는 것으로, 그러한 무학도를 등류과(等流果)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학위에서 버려지는 사법 등은 이러한 유학도에 동류인(同類因)이 되어 능히 유학의 사법종성 등을 인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일찍이 퇴법이었다가 무학위에 이르러 근기를 단련하여 사법 등을 성취한 자가 응과에서 물러날 때에는] 마땅히 일찍이 버렸던 종성(유학의 퇴법)으로 물러나 머문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유여사(有餘師)는 이에 대해 별도의 다른 증인(證因)을 세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물러날 때의 종성으로 물러나 머문다고 한다면,28) [퇴법보다] 뛰어난 종성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승진한 것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29)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증인이 아니니,
만약 [다음의] 두 가지 뜻이 없다면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승진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과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뛰어난 종성을 획득한 것을 비록 ‘승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여전히] 혹(惑)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도] 역시 ‘물러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그의 힐난은 이치상 과실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물러남’은 열반을 장애하는 법을 일으키는 것으로, 성자는 성도보다 [반]열반을 훨씬 더 흔구(欣求)한다.
설혹 뛰어난 종성을 획득한 것일지라도 [반]열반에서 물러난 것이기 때문에 다만 마땅히 ‘물러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승진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④ 유학위와 범부위의 6종성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6종성의] 온갖 아라한 등은 유정지의 염오를 떠나 다 같이 후생을 받지 않는 것인가?
그들 중에는 번뇌의 불생법을 증득한 이(즉 부동법아라한)도 있지만, 일체의 [모든 아라한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근기[根]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지만,
이러한 해석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계경에서
“퇴법과 불퇴법은 근기의 품류가 동일하다”고 설하였기 때문으로,
“5근(信ㆍ勤ㆍ念ㆍ定ㆍ慧根)이 두드러지게 맹리하고 지극히 원만하기 때문에 구해탈(俱解脫)이라 이름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즉 구해탈이면서 퇴법의 종성도 존재하기 때문에, 근기가 수승하기 때문에 번뇌의 불생법을 증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종성의 차별로 말미암아 [번뇌의 불생법을 증득하게 되는] 것인가?
여섯 종류의 종성은 오로지 응과(應果)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그 밖의 다른 계위에도 존재하는 것인가?
연근(練根)은 오로지 무학위에서만 수습(修習)하는 것인가, 그 밖의 다른 계위에도 역시 수습하는 경우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유학과 이생에게도 역시 여섯 종성이 있지만
견도위에서만은 근기를 단련[練根]하지 않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학과 이생의 종성에도 역시 여섯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여섯 종류의 응과(應果)에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주하게 되는 종성의 차별로 말미암아 단혹(斷惑) 후에도 [번뇌가] 생겨나기도 하고 생겨나지 않기도 하는데,
결정코 어떠한 때에 끊어진 혹에서 불생법을 증득하게 되는 것인가?
이를테면 능히 이러한 종류의 번뇌를 지식(止息)하는 수승한 도를 획득할 때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러한 불생법은 바로 택멸로서, 비택멸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바로 비택멸이라고 한다면, 비택멸을 마땅히 도과(道果)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경우 성교에 위배되니,
[계경에서]
“결과[果法]가 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비택멸과 허공의 무[위]이다”라고 설한 바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불생법을 택멸이라 하여도 과실을 성취하게 될 것이니,
수승한 도가 일어나는 것은 이것(즉 불생법)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이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불생법은] 도과가 아니다.30)
지금 여기서 [수승한] 도에 의해 증득된 불생법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결정코 근기에 의해 [증득된] 것이 아니라―그럴 경우 모든 이가 다 [불생법을] 획득해야 하기 때문이다―다만 수승한 종성의 힘에 의해 증득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부동의 종성에게는 필시 혹(惑)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무학만이 근기를 [단련하여] 증진하는 것은 아니며, 유학과 이생에게도 역시 이러한 일이 있다.
그렇지만 오로지 견도위에서만은 능히 근기의 단련[練根]을 닦을 수 없으니, 이러한 견도위에서는 가행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견도위는 매우 빠르게 일어나[運轉] 그 중간에 다른 것(연근)을 닦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신해(信解, 즉 수도위)와 이생위 중에서만 무학위에서처럼 능히 근기의 단련을 닦을 수 있을 뿐이다.
⑤ 물러남[退]의 세 종류
예컨대 [계경에서는] 부동법은 현법락주(現法樂住)에서 물러난다고 설하였는데,31)
어떻게 부동법에 대해서도 역시 물러나는 일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는]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물러남에는 세 가지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이득(已得)과 미득(未得)과 수용(受用)에 의한 그것으로
부처님에게는 오로지 최후의 것만이 존재할 뿐이지만
이근에게는 중간과 뒤의 것이, 둔근에게는 세 가지 모두 존재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물러남에는 모두 세 종류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첫째는 이득퇴(已得退)로서 이미 획득한 수승한 공덕에서 물러나는 것을 말하며,
둘째는 미득퇴(未得退)로서 마땅히 획득해야 할 공덕을 아직 획득하지 못한 것을 말하며,
세째는 수용퇴(受用退)로서 이미 획득한 온갖 수승한 공덕이 현재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세 가지 물러남 중에서 앞의 두 가지는 비득(非得)을 본질로 하는 것이며, 세 번째 물러남은 오로지 그것(획득된 것)이 현재전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러한 세 가지 물러남 중에서 세존에게는 오로지 수용퇴 한 가지만이 존재할 뿐이니,
[그에게는] 결정적으로 지어야 할 [그 밖의 다른] 사업(事業)이 그의 마음을 견인함으로 말미암아 비록 그 밖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희유(希有)한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을 지녔을지라도 그것을 일으킬 만한(다시 말해 현전시킬 만한)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32)
불세존을 제외한 그 밖의 부동법(不動法)은 미득퇴와 수용퇴를 모두 갖추고 있다.
이를테면 수승한 무쟁정(無諍定) 등에서 마땅히 획득해야 할 공덕을 아직은 능히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미득퇴가 존재하는 것이며,33)
그 밖의 다른 지어야 할 사업이 그의 마음을 견인함으로 말미암아 이미 획득한 공덕을 일으킬 만한(다시 말해 현전시킬 만한) 겨를이 없기 때문에 수용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밖의 다섯 종성은 세 가지 물러남을 모두 갖추고 있으니, 역시 또한 이미 획득한 공덕에서 퇴실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는] 수용퇴에 근거하여 부동법도 현법락주에서 물러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부동법은 과위에서 물러나는 일이 없다는 사실과]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⑥ 퇴과(退果) 후의 재득(再得)과 그때 짓는 업
온갖 아라한은 과위에서 물러난다고 이미 인정하였으니,
다시 태어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태어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는 물러나는 단계에서 혹(惑)을 지닌다고 하였으니, 목숨을 마치고서 마땅히 다시 생을 받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온갖 [아라한은] 과위에 머물 때에 짓지 않았던 일(즉 업)을 물러날 때에는 짓는 것인가, 짓지 않는 것인가?
그는 이미 혹을 일으켰으므로 마땅히 [아라한]과에 위배되는 일을 다시 짓는 일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허물은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과위에서 물러나는 일체의 아라한은
목숨을 마치기 전에 반드시 [다시] 획득하며
과위에 머물 때 짓지 않았던 일도
부끄러움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짓지 않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아라한은] 과위로부터 물러나더라도 중간에 목숨을 마치는 일이 없으니, 물러나서는 잠시 후[須臾]에 반드시 다시 획득하기 때문이다.
만약 목숨이 막 다하려고 하는 자라면, 그는 필시 물러날 리 없으니, 실념(失念)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목숨이 남아 있어야 바야흐로 물러날 수 있으며, 물러나서는 오래지 않아 반드시 다시 증득하게 되는 것으로,
계경에서
“이와 같은 다문(多聞)의 여러 성(聖) 제자들은 정념(正念)에서 퇴실하더라도 물러남으로써 일으키게 된 것(즉 번뇌)을 능히 다시 신속하게 다하고[盡], 몰(沒)하고, 멸(滅)하고, 떠날(離) 수 있음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34)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범행(梵行)을 닦더라도 그 과보는 응당 안온하게 맡기고 믿을 만한 것[委信處]이 아니어야 하는 것이다.35)
또한 과위에 머무는 단계에서는 응당 짓지 않았던 과위에 어긋나는 사업(事業)은, 부끄러움[慚]이 증가하였기 때문에 비록 잠시 실념하여 번뇌가 현행하더라도 과위에 머물 때와 마찬가지로 필시 짓지 않으니, 이는 고귀한 족성(族姓)의 사람이 잠시 지위를 상실하더라도 범속한 사람들처럼 비천한 하등의 업을 짓지 않는 것과 같다.
⑥-1 퇴과(退果) 여설(餘說)
또한 누구에게 물러나는 일이 있으며, 누구에게 물러나는 일이 없는 것인가?
부정관(不淨觀)을 닦아 성도에 든 자는 퇴실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지식념(持息念)을 닦아 성도에 든 자는 필시 퇴실하는 일이 없으며,
지관(止觀)을 존중(尊重)하는 자와 무탐(無貪)ㆍ무치(無癡)가 증성한 자도 순서대로 물러나는 일이 있고, 물러나는 일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떠한 계(界), 어떠한 취(趣)에 물러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오로지 욕계 인취(人趣)의 세 주(洲)에서만 물러나는 일이 있다.
그런데 6욕천(欲天)에서 성과(聖果)를 획득한 자에 대해,
어떤 이는
“[그는] 이근이기 때문에 어떠한 경우에도 물러나는 일이 없으니, 수승한 지(智)로써 능히 마음을 제복(制伏)하고 미묘한 경계를 등지게 하여 성도에 들었기 때문이다”라고 설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같이] 설하였다.
“물러나는 자는 자구(資具)의 연을 결여하였기 때문이든지, 혹은 소의신이 평등(平等)하지 않기 때문이다.36)
그러나 6욕천에는 이러한 두 가지가 존재하지 않아 비록 둔근일지라도 수신행(隨信行)의 성품[性]이 그에게 생겨나 성[과](聖果)를 획득하였으면 역시 물러나는 일이 없다.”
물러나는 일이 있는 모든 이는 혹(惑)을 일으키고서 물러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 먼저 물러나고서 비로소 혹이 현전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혹 어떤 이는 혹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물러나게 된다고 하였다.37)
[그럴 경우] 『품류족론』과는 응당 어떻게 회통할 수 있을 것인가?
예컨대 그 논에서는 이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욕탐수면은 세 가지 경우에 의해 일어나니,
첫째는 욕탐수면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변지(遍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러한 전(纏, 즉 욕탐)에 수순하는 법(즉 경계대상)이 바로 현전하였기 때문이며,
셋째는 그것에 대해 비리작의(非理作意)를 바로 일으켰기 때문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38)
[어떤 이의 말과 『품류족론』의 설은]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번뇌의 현전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으니, 이미 끊어진 것과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의 차별이 있기 때문으로,39)
여기(『품류족론』)서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일어나는 것에 치우쳐 설하였다.
또한 번뇌가 일어나는 데에는 간략히 두 가지 갈래[門]가 있으니, 염오의 마음이나 염오하지 않은 마음과 무간에 일어나기 때문으로,40) 여기서는 염오한 마음과 무간에 일어나는 것에 치우쳐 설하였다.
혹은 번뇌가 일어나는 데에는 모두 세 가지 연(緣)이 있지만, 번뇌가 생겨날 때 근거[藉]가 되는 것은 일정하지 않으니,
혹 어떤 경우에는 오로지 경계대상의 힘에 근거하여 생겨나기도 하고,
혹 어떤 경우에는 경계대상의 힘과 원인의 힘에 근거하여 [생겨나기도 하며],
혹은 이와 아울러 가행의 힘에 근거하여 일어나기도 한다.41)
그러나 이것(욕탐수면)은 [세 가지 연에] 모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세 가지 경우에 의해”라고 설한 것이다.
혹은 혹(惑)을 일으킬 때 필시 세 가지 연이 갖추어지니, 비리작의가 바로 일어나 현전하면 끊어진 수면은 반드시 다시 성취되기 때문이다.
어떠한 마음과 무간에 혹(惑)을 일으켜 물러나게 되는 것인가?
먼저 무학위(無學位)로부터 혹을 일으켜 물러나는 자로서, 만약 색전(色纏, 즉 색계 번뇌)이나 무색전(無色纏)을 일으켜 물러나는 경우라면 오로지 자지(自地)의 순퇴분정(順退分定)과 상응하는 선심(善心)으로부터 무간에 [혹을] 일으킨다.
그러나 욕계에 머물면서 상지에 포섭되는 무부무기심이 현재전하는 경우는 그렇지 않은데, 오로지 통과심(通果心)만은 제외된다.
즉 그것(무학위)으로부터 물러나는 일이 없다면, 어찌 순퇴분정도 각기 자지에 대한 염오를 떠날 때 버렸다고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무학의 성자가 아직 물러나지도 않았으면서도 혹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인가?
그 같은 [무학의] 마음이 현전하는 것은 이치상 실로 이와 같다. 즉
순주분(順住分, 머무는 상태에 수순하는 마음)의 품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소순퇴(少順退, 물러나는 것에 약간 수순하는 마음)이며,
둘째는 소순진(少順進, 승진하는 것에 약간 수순하는 마음)이며,
셋째는 수자위(守自位,자신의 과위를 지키려는 마음)인데,
앞에서 말한 ‘자지의 순퇴분정’은 바로 순주분 중의 소순퇴로서, 물러나는 것에 약간 수순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순퇴(順退)’라고 하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42)
그렇지만 이러한 선정의 마음(順退分定과 상응하는 善心)은 수자위와 대개 상섭(相涉)하기 때문에 순주분에 포섭된 것이다.
즉 온갖 유정으로서 아직 순퇴분정을 상실하지 않은 자라면 그러한 마음과 무간에 번뇌가 현전하지만, 만약 그러한 [순퇴분정의] 마음을 버린 자라라면 이에 따라 순주분에 포섭된다.
[이처럼] [무학의 마음이] 소순퇴(물러나는 것에 약간 수순하는 마음)라면 번뇌를 일으켜 물러날 수 있기 때문에 문의(文義)상으로는 서로 모순되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학위로부터 혹을 일으켜 물러나는 자로서,] 만약 욕전(欲纏, 욕계 번뇌)을 일으켜 퇴실하는 경우라면 자지의 선과 무부무기의 두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모두 [혹이] 현전할 수 있다.
유학위(有學位)로부터 혹을 일으켜 물러나는 자가 색ㆍ무색계의 번뇌를 일으켜 물러날 때, 만약 일찍이 [이생위에서] 이러한 지(地)의 염오를 완전히 떠난 경우라면 오로지 이러한 지의 순퇴분정과 상응하는 선심으로부터 무간에 [혹을] 일으키지만, 만약 아직 이러한 지의 염오를 완전히 떠나지 않은 경우라면 이러한 지에 포섭되는 선과 염오의 두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모두 [혹이] 현전할 수 있다.
그리고 [유학위로부터 혹을 일으켜 물러나는 자가] 욕계의 전(纏)을 일으켜 퇴실할 때,
만약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계의 염오를 완전히 떠난 경우라면 자지의 선과 무부무기의 두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모두 [혹이] 현전할 수 있지만,
만약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의 염오를 완전히 떠나지 않은 경우라면 욕계의 선과 염오와 무부무기의 세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모두 [혹이] 현전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현전에서 청정(淸淨)한 정려와 무색정을 획득하지 못한 경우라면, 필시 능히 색ㆍ무색계의 전을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하는 일이 없으며―그러한 [색ㆍ무색계의] 혹은 그것(정려와 무색정)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욕계의 전을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할 뿐이다.
만약 현전에서 청정한 정려를 획득하였을지라도 아직 현전에서 청정한 무색정을 획득하지 못한 경우라면, 필시 무색계의 전을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물러나는 일은 없으며, 욕계의 전을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할 뿐이다.
만약 이미 현전에서 청정한 정려와 무색정을 획득한 경우라면, 욕계와 색ㆍ무색계의 전을 모두 일으켜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할 수 있다.
나아가 온갖 유정이 일찍이 획득한 [과위]에서 퇴실할 때,
만약 상계의 전(纏)을 일으켜 현전시킴으로써 물러난 경우라면 하계의 선을 상실하지 않으며, 하계의 혹도 성취하지 않지만,
만약 하계의 전을 일으켜 현전시킴으로써 물러난 경우라면 결정코 상계의 선을 상실하며, 결정코 상계의 혹도 성취하게 된다.
다시 어떤 이는 요컨대 먼저 물러나고서 그 후 경계에 대한 혹이 비로소 현전하게 된다고 하였다.43)
[그럴 경우] 『시설족론(施設足論)』의 논설을 응당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그 논에서는
“무색계의 세 가지 전(纏)이 하나하나 현기하면 무색계의 [단]진(斷盡)에서 물러나 색계의 [단]진 중에 머물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식신족론(識身足論)』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예컨대 그 논에서는
“무색계에 계박(繫縛)된 염오한 마음이 현전하면 무학의 선[심]을 버리고 유학의 선[심]을 상속하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무학의 마음에서 물러나 유학의 마음에 머무는 것(즉 번뇌를 일으키는 것)으로, 이는 다 같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니, 아는 순간[覺時]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이다.44)
이를테면 비록 일찍이 [번뇌를 일으키기] 전에 물러났을지라도 [그때는] 아직 [물러난 것을] 알지 못하였으며, 그 후 혹(惑)이 일어날 때 비로소 물러났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으로,
마치 어떤 이가 일찍이 네 『아급마(阿笈摩)』를 외우던 중에 오랫동안 그만두었을 경우 비록 잊어버렸더라도 그것을 알지 못하며, 그 후 [다시] 외우려고 하였으나 외울 수 없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잊어버린 것을 자각하는 것과 같다.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기 때문에 [본론(本論)의 설과]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마음에 머물러야 물러난 이후에 혹을 일으키게 되는 것인가?
욕계 중의 무부무기(無覆無記)인 위의로(威儀路)와 공교처(工巧處)와 이숙생(異熟生)의 마음에 머물러야 물러난 이후 비로소 능히 혹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욕계계인 무부무기의 마음이 3계의 번뇌 모두와 상위하는 것일 경우에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일어나더라도 물러나 3계의 혹(惑)을 획득하는 일은 없다. 혹은 다만 욕계와 색계의 번뇌와 상위하는 것일 경우에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일어나면 물러나 무색계의 혹을 획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혹은 다만 욕계의 번뇌와 상위하는 것일 경우에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일어나면 물러나 2계(색ㆍ무색계)의 혹을 획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혹은 3계의 번뇌와 상위하지 않는 것일 경우에는 이러한 마음이 바로 일어나면 물러나 3계의 혹을 획득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즉 [이러한] 일체의 모든 경우에서는 물러난 이후에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혹을 일으키게 되는데, 그것의 전[찰나]의 마음은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설 가운데에서 앞의 설(제1설 즉 ‘혹을 일으키고서 물러난다’는 설)이 보다 선설(善說)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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