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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56권
5. 변수면품 ⑫
5.6. 변지(遍知)
1) 지변지(智遍知)와 단변지(斷遍知)
모든 이계(離繫)의 각각의 상태를 ‘변지(遍知)’라고 말할 수 있는데, 수승한 것에 따라 설정하였기 때문이다.31) 변지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변지(智遍知)이며, 둘째는 단변지(斷遍知)이다.
지변지의 본질은 바로 혜(慧)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이것(지변지)은 유루와 무루 모두와 통한다. 유루혜(有漏慧)란, 이를테면 승해(勝解)ㆍ작의(作意)와 상응하는 혜를 제외한 그 밖의 세간의 [혜로서], 법성을 분별하여 능히 제법의 자상과 공상을 취하는 것이니, 문(聞)ㆍ사소성(思所成)의 혜와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 등의 수소성(修所成)의 혜가 바로 그것이다. 무루혜(無漏慧)란, 이를테면 출세간의 견도ㆍ수도ㆍ무학도의 혜가 바로 그것이다.
즉 앞의 유루혜도 무루지에 따라 현관하는 것[現觀性]이기 때문에 역시 ‘변지’라고 말할 수 있으니, 계경에서 ‘내가 이와 같이 참답게 생각[如理思]하였을 때 진실의 현관이 생겨나 노사(老死)는 생(生)으로 말미암아 존재함을 알았다’고 설한 바와 같다. 또한 말하기를 ‘어떠한 법에 대해서도 [통]달하지 못하고 두루 알지[遍知] 못한 이라면, 나는 [그러한 이는] 능히 괴로움의 끝[邊際]에 이를 수 없다고 설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무루혜도 일체법을 두루 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변지는 역시 유루혜와도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종의에서 올바른 뜻으로 인정하는 것은 “오로지 무루혜만을 지변지로 여긴다”는 것이니, 예컨대 “아직 현관하지 않은 법에 대해 현관을 일으키는 것이 [무루혜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32) 문소성 등의 세속의 혜[俗慧]로써 취온(取蘊)을 사유하여 예류향 내지 아라한과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계경에서] “예류향 등은 아홉 가지 근(根)으로 획득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33) 또한 『전법륜계경(轉法輪契經)』 중에서도 “무루혜로써 고(苦) 등을 변지한다”고 설하였으니, 이는 바로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 보살(菩薩)께서 “진실의 현관이 생겨났다”고 말한 것은,34) 세간의 혜에 대해 일시 ‘현관’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던 것으로, 그것의 행상은 현관과 유사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법에 대해서도 통달하지 못하고……”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만약 “이러한 법에 대해 고(苦)의 멸진을 장애하는 것임을 두루 알지 못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은밀히 설한 것이다”고 한다면, 과실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결정코 무루혜에 대해서만 바야흐로 ‘변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단변지의 본질은 바로 이계로서, [이는] 능히 두루 안 것(즉 지변지의 결과)이기 때문에 ‘변지’라고 이름한 것이니, 바로 지변지의 이명(異名)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단’이라 이름하게 된 것인가?
이는 바로 지변지의 결과이기 때문으로, 마치 업의 결과와 해(解)의 결과를 [‘업’이라 하고 ‘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계경에서 설하기를 “6처(處)를 업이라 이름하니, 바로 업의 결과이기 때문이다”고 하였으며, 또한 설하기를 “무위의 응과(應果, 아라한과)를 [세간]해(解)라고 이름하니, 바로 ‘해’의 결과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변지를 ‘단’이라 이름하여도 과실이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인(忍)의 결과는 변지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35)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모든 ‘인’은 다 지(智)의 권속이기 때문에 ‘인’에 의해 지어진 것에 대해서도 ‘지’가 지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이는 마치 신하(왕의 권속)가 지은 일을 역시 또한 왕이 지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36)
[이에 반해] 유여사는 “모든 해탈도(즉 ‘智’)는 획득된 ‘단(斷)’에 대해서도 역시 공능을 지니니, ‘단’의 득(得)을 능히 임지하기 때문이며, 온갖 계박의 ‘득’으로 하여금 더 이상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忍,즉 무간도)의 결과(즉 ‘斷’)도 역시 지(智)의 결과라는 뜻을 갖는 것이다”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니, “온갖 [번뇌의] ‘단(斷, 끊어짐)’은 바로 온갖 무간도의 이계과(離繫果)이며 사용과(士用果)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금강유등지(金剛喩等持)와 상응하는 무루의 밝은 지혜[叡智, 즉 盡智]의 힘은 능히 온갖 ‘단’에서 무루 이계의 ‘득’을 모두 일으키기[總集] 때문이다.37) 즉 ‘인’의 결과는 그 때 ‘지’의 결과도 역시 성취하니, 점차적으로 과위를 획득함에 있어 다 같이 일래와 불환의 인(忍, 즉 무간도)의 결과인 무위를 획득하고 나서 지(智, 즉 해탈도)의 결과를 성취하기 때문이며, 유신견 등의 세 가지 순하분결(유신견ㆍ계금취ㆍ疑)이 영원히 끊어진 무위도 ‘지’의 결과라고 말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며, 응당 그 밖의 세 가지(유신견ㆍ계금취ㆍ疑의 택멸의 ‘득’)는 바로 ‘지’의 결과라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2) 9변지의 설정
[그렇다면] 단대치(斷對治)의 도에 의해 획득된 각각의 이계(離繫)를 각기 하나의 변지로 설정해야 할 것인가, 단대치의 도에 의해 획득된 일체의 이계를 전체적으로 하나의 변지로 설정해야 할 것인가?38)
두 가지 모두 옳지 않으니, 그럴 경우 지극히 번잡하고 지극히 간략한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단변지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욕계의 처음 2부(部)의 끊어짐이 그 하나이고
다음 2부의 끊어짐에 각기 하나씩 있어, 합하여 셋이 되며
상계의 세 가지도 역시 그러하다.
斷遍知有九 欲初二斷一
二各一合三 上界三亦爾
그 밖의 5순하분결과
색애와 일체 결의 끊어짐의 세 가지가 있다.
餘五順下分 色一切斷三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끊어짐[斷]에 모두 아홉 종류의 변지를 설정하니, 오로지 아홉 종류만을 설정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마땅히 뒤에서 분별하는 바와 같다.39)
무엇을 일컬어 아홉 종류의 변지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3계에 계속(繫屬)되는 견제소단(見諦所斷)의 번뇌 따위의 끊어짐에 여섯 변지를 설정하였다.40) 이를테면 욕계에 계속되는 처음 2부(部)의 끊어짐에 하나의 변지를 설정하였으니, 여기서 ‘처음의 2부’라고 하는 말은 바로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을 나타낸다. 다음의 2부의 끊어짐에는 각기 하나의 변지를 설정하였으니, ‘다음의 2부’란 말은 견멸소단과 견도소단을 나타낸다.
욕계에 세 가지 변지를 설정한 것과 마찬가지로 상계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이를테면 색ㆍ무색의 2계에 계속되는 번뇌 따위의 끊어짐에도 역시 처음 2부의 끊어짐에 하나의 변지를 설정하고, 다음 2부의 끊어짐에도 각기 하나의 변지를 설정하여 도합 세 가지가 된 것이다.41)
그 밖의 3계에 계속되는 수도소단의 번뇌 따위의 끊어짐에 세 가지 변지를 설정하였다. 즉 욕계에 계속되는 수도소단의 번뇌 따위의 끊어짐에 한가지의 변지를 설정하였으니, 이는 바로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五順下分結盡遍知]’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앞의 끊어짐도 함께 설정하였기 때문이다.42) 색계에 계속되는 수도소단의 번뇌 따위의 ‘끊어짐’에도 한 가지의 변지를 설정하였으니, 이는 바로 ‘색애가 다하는 변지[色愛盡遍知]’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색계에 계속되는 수도소단의 번뇌 따위의 끊어짐에도 한 가지의 변지를 설정하였으니, 이는 바로 ‘일체의 결이 영원히 다하는 변지[一切結永盡遍知]’로서, 이 역시 앞의 끊어짐을 함께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수소단의] 세 가지 변지와 앞에서 [설한 견소단의] 여섯 가지를 [합하여] 9변지라고 하는 것이다.
견도 중에서는 오로지 견소단의 번뇌 따위의 끊어짐에 대해서만 ‘변지’라고 이름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수도 중에서도 역시 수소단[의 번뇌 따위의 끊어짐]에 대해서만 ‘변지’라고 이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한 가지(색애가 다하는 변지)는 오로지 수소단과 통할 뿐이지만, 두 가지는 견소단과 수소단 모두에 통하는 것이니, 이미 “앞의 끊어짐도 함께 설정하였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마땅히 “두 때(견혹이 끊어지는 때와 수혹이 끊어지는 때)에 변지를 일으킨다”고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와 ‘일체의 결이 영원히 다하는 변지’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색ㆍ무색계의 경우, 어떠한 이유에서 견소단법의 끊어짐에 대해서는 [하나로] 합하여 변지로 설정하였으면서, 수도소단[의 끊어짐]에 대해서는 각기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43)
예컨대 대치도가 일어나는 대로 [변지를] 설정하였기 때문이다.44) 이를테면 색계의 제온(諸蘊)이 무아(無我)이듯이, 무색계의 제온이 무아인 것도 역시 그러하다. 즉 그러한 [색ㆍ무색계의] 견소단은 [그에 상응하는] 소연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無事]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에,45) [색ㆍ무색계는] 다 같이 소의신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대치도도 역시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무색계의 등지(等至)가 수승한 것처럼, 색계의 등지는 그와 같지 않다. 즉 그러한 [색ㆍ무색계의] 수소단의 경우, 소연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대치도가 동일하지 않다. 그래서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3) 도과(道果)로서의 9변지 분별
이상과 같이 설정된 아홉 종류의 변지에 대해 마땅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 중에 몇 가지가 어떠한 도의 결과인가?46)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 중에 인(忍)의 결과는 여섯 가지이며
그 밖의 세 가지는 바로 지(智)의 결과이다.
於中忍果六 餘三是智果
미지정의 결과는 일체의 변지이며
근본정의 결과는 다섯 가지, 혹은 여덟 가지이다.
무색계 변정(邊定, 즉 근분정)의 결과는 한 가지이며
세 가지 근본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未至果一切 根本五或八
無色邊果一 三根本亦爾
세속도의 결과는 두 가지, 성도는 아홉 가지
법지의 결과는 세 가지, 유지는 두 가지이며
법지품의 결과는 여섯 가지이고
유지품의 결과는 다섯 가지이다.
俗果二聖九 法智三類二
法智品果六 類智品果五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9변지 중에서 바야흐로 먼저 인도(忍道)와 지도(智道)의 결과가 되는 변지의 차별부터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인’의 결과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3계에 계속되는 견제소단법의 끊어짐[斷]인 여섯 종류의 변지가 바로 그것이다. ‘지’의 결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순하분결과 색애(色愛)와 일체의 결(結)이 다하는 변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이 같은 세 가지 변지는 바로 수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47)
이에 따라 견도와 수도의 결과에 대해서도 이미 분별한 셈이다.
정려지(靜慮地)의 결과가 되는 변지의 차별은 [이러하다].
미지정려의 결과는 9변지 모두이니, 말하자면 이에 근거하여 일체의 번뇌(3계의 견ㆍ수소단)를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정려의 결과에는 다섯 가지, 혹은 여덟 가지가 있다. 다섯 가지라고 말한 것은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로서, [그들은] “근본정려는 욕계의 단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고 설하였다.48) 여덟 가지라고 말한 것은 존자 묘음(妙音)의 설로서, [그는] “근본정려도 역시 욕계의 단대치가 되기 때문에 ‘5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만을 제외하니, 그것은 오로지 미지정의 결과이기 때문으로, [근본정려에서는] 그러한 단대치를 닦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49) 그리고 중간정려의 경우는 근본정려에서 설한 것과 같다.
(1) 근본정려도 욕계의 단대치가 된다는 묘음(妙音) 설 비판
“어찌 [온갖 유정으로서 일찍이 욕계의 염오를 떠난 자가] 근본정려지에 의지(依止)하여 견제(見諦)에 들 때에도 역시 미래 미지지(未至地)에 근거하여 욕계의 단대치의 도를 닦게 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근본정려에서도 욕계의] 단대치를 획득하기 때문에 역시 마땅히 그러한 욕계 견소단법의 끊어짐에서도 무루 이계의 ‘득’을 증득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근본정려에서 오로지 다섯 가지 결과(즉 변지)만을 획득한다고 하겠는가?”50)(묘음의 입장)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그 때(미래) 닦을 미지지에 근거한 단대치라고 함은 오로지 색ㆍ무색계의 단대치이기 때문이다. 근본[정려]지의 도는 이미 욕계의 단대치가 될 수 없다고 하였거늘, 그것이 현기한 상태에서 어떻게 욕계의 단대치의 도를 닦을 수 있을 것인가? 그것(근본정려)으로 말미암아 닦아야 할 미지지의 단대치의 도는 오로지 상계[의 번뇌]만을 대치하기 때문에 그것의 결과는 오로지 다섯 가지 변지뿐인 것이다.
다시 [근본정려에 의지하여] 그 밖의 다른 대치도(욕계의 단대치)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정려지에 의지하여서는] 필시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을 수 없으니, 종의로서 설한 바이기 때문이다. 즉 일찍이 색계 염오를 떠나 견제(見諦)에 든 자에 대해 사택(思擇)하면서, 수도위 중에 이르러 ‘색애가 다하는 변지’를 획득하거나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 이와 같이 [정려지에 의지하여서는 필시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을 수 없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미 ‘공무변처[空處]의 염오를 떠날 때에도 역시 미래 온갖 정려지[의 단대치]를 닦게 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근본정려에 의해서도]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을 수 있다’고 이미 설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51)”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진실한 논증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무변처의 [염오를] 끊고서 정려를 닦을 때에는 다만 미래 무색계의 대치만을 닦을 뿐 색계의 대치를 닦는 것이 아니다”고 설하여야 [진실한] 논증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이것이 [근본정려에 의지하여서는]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이같이 설하였다.
“이러한 논증은 모두 이루어질 수 없으니, 견도와 수도 중에서는 닦아야 할 상(相)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제4정려에서 견도가 현전하면, 오로지 미래 여섯 지(地)의 견도만을 닦게 되지만, 수도가 현기할 때 닦아야 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또한 견도 중에서 일 찰나의 무간도는 8지(색ㆍ무색정의 8지)[의 번뇌]를 단박에 끊지만, 수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또한 그것(견도와 수도)에 의해 닦여지는 동분(同分)과 부동분(不同分)은 지(智)의 행상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견도와 그러한 수도에서 닦아야 할 상은 각기 다른 것이다.
또한 수도위 중에서도 역시 그 밖의 다른 대치도가 현전하는 상태에서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는 경우가 있으니, 예컨대 욕계를 떠날 때 온갖 유지(類智)를 닦고, 색ㆍ무색계를 떠날 때 고(苦)ㆍ집(集)의 법지(法智)를 닦기 때문으로, 견도위에서도 이치상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또한 근본정려도 역시 능히 욕계를 대치하니, 세존께서 ‘여섯 가지 출리(出離)의 소의인 희(喜)를 원인[因]과 근거[依]와 머무는 곳[住]으로 삼아 능히 사리(捨離)하며, 여섯 가지 출리의 소의인 우(憂)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설한 바와 같다.52) 즉 여기서 ‘사리’라고 하는 말은 욕계 염오[欲染]를 떠나는 것을 설한 것으로, 종의(宗義)에서는 변지(邊地, 즉 미지정)에 희근(喜根)이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근본정려에서도 능히 욕계를 대치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極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정려지의 결과에는 여덟 가지 변지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다시] 다른 어떤 이는 이와 같이 배척하였다.
“현기하지 않은 단대치의 힘이 [미래] 능히 무루 이계의 ‘득’을 인기하여 낳는 것에 대해서는 ‘변지를 획득하였다’고 말하지 않으니, 사문과(沙門果)의 경우와 같다. 예컨대 세속도로써 두 가지 과위를 획득[하려고] 할 때, 비록 미래 무루의 단대치를 닦게 될지라도 ‘사문과를 획득하였다’고는 말하지 않듯이,53) 이와 마찬가지로 근본정려지가 현전할 때, 비록 미래 욕계의 단대치의 도를 닦게 될지라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이계의 ‘득’을 인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근본정려지에서는] 여덟 가지 변지의 결과를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깊은 이치가 없으니, 성위(聖位, 즉 사문과)의 경우 세속도로써 온갖 염오를 떠날 때 무루와 세속의 두 가지 이계의 ‘득’을 획득한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며, 세속과 무루의 두 가지 지(智)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래 무루도의 힘에 의해 능히 무루 이계의 ‘득’을 인기하여 낳는 것이기에, 그것은 사문과가 아니다”고 한 것 역시 [자신의] 논증을 성취할 수 없으니, ‘인과관계로 설정하는 것’과 ‘무루 이계의 득을 획득하는 것’은 이치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세속도로써 두 가지 과위를 획득[하려고] 할 때에는 사문과라고 이름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은 바로 현재[의 상태]로서, 그러한 미래 결과[의 상태]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루단(즉 택멸)의 ‘득’이 [세속도의] ‘득’의 끊어짐을 장애하였기 때문에 이 때에도 필시 무루단의 ‘득’을 일으켜야 하지만, [그에 의하면] 이러한 무루단의 ‘득’ 역시 미래 무루[도]에 의해 인기되는 것이거늘, [이것으로] 어떻게 [자신의] 논증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54)
또한 “세속도로써 두 가지 과위를 획득[하려고] 할 때에도 역시 [미래] 획득될 것을 ‘사문과’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니, 미래의 무루 해탈도 등도 역시 ‘사문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속도로써 두 가지 과위를 획득[하려고] 할 때, 미래의 무루 해탈도 등이 [세속도의] ‘득’이 끊어지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그것(미래 무루도)의] ‘득’은 모두 다 지금 바로 일어나고 있으니, 그것을 어떠한 사문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바로 현재와 미래의 사문의 결과이다. 이를테면 세속도가 현전할 때 무루의 ‘득’이 존재하면, 현재의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세속]도의 등류과(等流果)이며, 역시 또한 미래 [무루]도의 사용과(士用果)이니, 상응인과 구유인은 3세에 통하기 때문이며, 그것(미래 무루도)은 사용과를 결과로 삼기 때문이다.55)
모든 무위법은 3세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문과’라고 이름한 것이거늘, 어떠한 이치로 이를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이(다른 어떤 이의 배척)에 의할 것 같으면, 그(앞서 언급한 ‘어떤 이’)가 주장한 “근본정려의 결과에는 여덟 가지 변지가 있다”는 이치가 도리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로 그의 논증도 이루어질 수 없으니, 올바른 이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먼저 그는 “이를테면 제4정려에서 견도가 현전하면, 오로지 미래 여섯 지(地)의 견도만을 닦지만, 수도가 현기할 때 닦아야 하는 것은 이와 다르다(그렇지 않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으로는 [자신의] 논증을 성취할 수 없으니, 이를테면 닦아야 할 지(地)가 비록 동일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다 같이 오로지 상계의 대치도만을 닦기 때문이다. 비록 닦아야 할지가 약간 다르다고 할지라도 어떠한 이치에서 [미래에]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게 된다는 것인가? 유정지(有頂地)를 떠나는 대치도를 일으킬 때, 비록 미래 9지에 근거하여 [무루]도를 닦게 될지라도 그것으로 닦아야 할 도가 다르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즉 [어떻게] 그가 능히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게 된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다시 말해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는다고 한다면), 그는 마땅히 세속도도 닦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견도 중에서 비록 일 찰나에 8지[의 번뇌]를 단박에 끊을지라도 [그것은 결국 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8지의 대치도를 닦는 것이지 그 밖의 다른 대치도(즉 욕계 대치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끊어야 할 지(地)가 적든 많든 항상 동일한 대치도를 닦는 것이다.
또한 [그는] 동분과 부동분을 닦음으로 말미암아 견도와 수도 중에서 닦아야 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견도에서는 미래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그 이치가 잘 성립하니, 견도에서 닦아야 하는 것은 오로지 동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집(集) 등의 인(忍, 즉 集法智忍 등)이 현전할 때와 같은 것으로, 비록 일찍이 이미 고(苦) 등의 인(忍)과 지(智)를 획득하였을지라도 [그 때] 견집(見集) 등의 소단(所斷)은 대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상태(견도가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능히 그것(수도?)을 닦을 수 없지만, 그 밖의 다른 지(地)의 도는 이러한 상태에서 능히 닦을 수 있으니, 이러한 상태의 도와 동일한 대치도이기 때문이다.
혹은 견도위가 [현전하면] 비록 미래 무량의 공덕을 닦게 될지라도, 인위(忍位, 무간도)에서는 ‘인’을 닦을 뿐 그 밖의 다른 도를 닦지 않으며, 지위(智位, 해탈도) 중에서는 오로지 능히 ‘지’만을 닦을 수 있을 뿐이다. 이렇듯 [다 같이 견도인] 인위와 지위에서조차 서로를 닦지 않거늘, 하물며 미래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게 된다는 뜻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수도위 중에서도 역시 그 밖의 다른 대치도가 현기(現起)하는 상태에서 그 밖의 다른 대치도를 닦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지만, 결정코 그러한 일은 없다. 비록 욕계를 떠날 때 온갖 유지(類智)를 닦고, 색ㆍ무색계를 떠날 때 고(苦)ㆍ집(集)의 법지(法智)를 닦을지라도, 그것은 단대치가 아니니, [수혹을] 대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를 닦는 것은 어떠한 연유에서이며, 닦으면 [어떠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장양되는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변지품(辯智品)」 중에서 널리 나타내게 될 것이다.
또한 그가 인용한 『의근행경(意近行經)』은, 가행 중에 우(憂)ㆍ희(喜)의 상(相)을 바로 관찰하고서 대치하였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다.56) 혹은 관(觀, 즉 毘鉢舍那)을 닦는 자는 일찍이 탐기(貪嗜)의 소의인 우(憂, 근심)가 능히 핍박하고 괴롭게 하는 것임을 바로 관찰하고서, 그 후 이러한 예에 따라 그러한 출리(出離)의 소의인 우행(憂行)에 대해서도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시 핍박하고 괴롭게 하는 것임을 관찰함으로써 마침내 초정려에 기뻐하는 미묘한 희(喜)가 현전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우’를 끊는 대치도를 부지런히 닦기 때문에 “‘희’로 인해 능히 ‘우’를 사리(捨離)한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혹은 출리(出離)의 소의인 ‘우’의 단대치와 무간에 초정려의 미묘한 ‘희’가 현전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에, 이 같은 사실을 마음에 품고서 은밀히 “현재 출리의 소의인 ‘우’와 ‘희’가 근[행](近行)하면 능히 서로를 대치한다”고 설한 것이니, 출리의 ‘우(근심)’에 직면[遇]하여 핍박되고 괴로워하는 이를 위로하여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근본정려는 그것이 어떠한 종류이든 결정코 능히 욕계의 단대치가 되는 일은 없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 세 가지 사문과를 증득하고자 낙행(樂行)을 버리고 고행(苦行)에 근거하여 부지런히 닦을 것인가?
이상과 같은 이치로 말미암아 비바사사(毘婆沙師)는 근본정려에서의 변지의 결과는 오로지 다섯 가지라고 설한 것이다. 나는 능히 이에 대해 더욱 널리 결택할 수 있지만, 본래의 뜻에서 멀어질까 염려되어 여기서 그만 마치기로 한다.
4) 도과(道果)로서의 9변지 분별(續)
무색정 지(地)의 결과가 되는 변지의 차별은 [이러하다].
무색정 변지(邊地, 즉 공무변처의 近分地)의 결과에는 오로지 한가지만이 있으니, 이를테면 공무변처의 근분지의 도에 근거하여 ‘색애가 다하는 변지’의 결과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즉 성자가 세속도에 의해 온갖 염오를 떠난 상태에서 획득할 [무루]단(斷)의 결과도 역시 ‘변지’라고 말할 수 있으니, 무루 이계의 ‘득’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세 근본정(공무변처ㆍ식무변처ㆍ무소유처)의 결과도 역시 오로지 한 가지뿐이니, 이를테면 무색정의 앞의 세 근본정에 근거하여 ‘일체의 결이 영원히 다하는 변지’의 결과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려와 무색정의 결과로서 전체적으로 획득되는 변지의 많고 적음의 차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세속도(즉 유루도)와 성도(즉 무루도)의 결과가 되는 변지의 차별은 [이러하다].
세속도의 결과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세속도의 힘은 오로지 ‘순하분결과 색애가 다하는 변지’의 결과만을 능히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57) 성도의 결과는 아홉 가지이니, 이를테면 성도의 힘은 능히 [욕ㆍ색의] 2계와 유정지(有頂地)를 초월하기 때문이다.58)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아홉 가지 변지 중 두 가지(순하분결과 색애가 다하는 변지)는 바로 세속도와 성도에 공통되는 결과이지만, 일곱 가지는 공통되지 않는 결과이니, 오로지 성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법지(法智)와 유지(類智)의 결과가 되는 변지의 차별은 [이러하다].
법지의 결과는 세 가지이니, 법지의 힘은 3계의 수소단의 번뇌를 능히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유지의 결과는 두 가지이니, 유지의 힘은 색ㆍ무색계의 수소단의 번뇌만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59)
법지품(法智品)과 유지품(類智品)의 결과가 되는 변지의 차별은 [이러하다].
법지품의 결과는 여섯 가지이니, 이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법지(法智)와 법지인(法智忍)에 의해 획득되는 여섯 가지의 결과가 바로 그것이다. 유지품의 결과는 다섯 가지이니, 이는 바로 앞에서 언급한 유지(類智)와 유지인(類智忍)에 의해 획득되는 다섯 가지의 결과가 바로 그것이다.60) 즉 여기서 ‘품’이라는 말은 지(智)와 인(忍)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지품의 결과인 여섯 가지 변지 중에서 네 가지는 [법지와 법지인에] 공통되지 않는 결과이니, 세 가지는 법지인에 속하는 결과이고, 한가지는 법지에 속하는 결과이며,61) 두 가지는 바로 공통되는 결과이니, 최후의 두 가지(색애와 일체 결이 다하는 변지)는 법지와 유지의 두 종류에 모두 속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유지품의 결과인 다섯 가지 변지 중에서도 세 가지(색ㆍ무색계의 세 견혹을 끊는 변지)는 공통되지 않는 결과이니, 모두 유지인에 속하는 것이며, 두 가지는 바로 공통되는 결과이니, 이를테면 최후의 두 가지로서, 앞에서 해석한 바와 같다.
5) 변지로서 아홉 가지만을 설정한 이유
어떠한 이유에서 각각의 대치도에 의해 획득된 [번뇌의] 단(斷)을 각기 하나의 변지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영원히 끊어진 때를 변지로 설하였기 때문으로,62) 계경에서 “나는 지금 그대들을 위해 변지에 대해 널리 설하리라.……(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여기서 무엇을 일컬어 변지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탐’의 영원한 끊어짐, ‘진’의 영원한 끊어짐, ‘치’의 영원한 끊어짐이 바로 그것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 즉 ‘영원한 끊어짐[永斷]’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무루도에 의해] 획득된 ‘단(斷)’을 나타내는 것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따라 계박함[隨縛]이 없는 것’을 바야흐로 ‘변지’라고 이름하였다.
무엇을 일컬어 ‘따라 계박함이 있는 단[有隨縛斷]’이라고 하는 것이며, 무엇을 일컬어 ‘따라 계박함이 없는 단[無隨縛斷]’이라고 하는 것인가?
세 종류, 혹은 네 종류의 조건[緣]을 갖춘 ‘단’을 ‘따라 계박함이 없는 단’이라고 말한 것이며,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않은 ‘단’을 ‘따라 계박함이 있는 단’이라고 말하였다.
이를테면 혹 어떤 ‘단’의 경우, 비록 이계의 ‘득(得)’을 획득하였을지라도 그 밖의 ‘득’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영원히 버리는 수도 있다.
또한 어떤 ‘단’의 경우, 그 밖의 ‘득’이 생겨났을지라도 견고한 생사의 근원[首]을 아직 깨트리지 못하였으니, 일찍이 8지의 염오(번뇌)에서 벗어났을지라도 능히 그것(有頂地)을 깨트리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이 경우 다시 악취의 지옥으로 떨어지는 수가 있다.
또한 어떤 ‘단’의 경우, 비록 그것도 역시 깨트렸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번뇌의 계박이 제거되지 않아 아직 ‘영원한 끊어짐’을 원만하게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어떤 ‘단’의 경우, 그 밖의 [다른 번뇌의] 계박 역시 제거하였을지라도 여전히 소속된 세계[界]에서 능히 초월하지 못하였으니, 동류의 혹(惑)이 남김없이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 역시 ‘영원한 끊어짐’을 원만하게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은 온갖 ‘단’을 ‘따라 계박함이 있는 단’이라고 말한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단’에 대해서는 변지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 오로지 아홉 가지만이 세 가지와 네 가지의 조건을 갖춘 ‘따라 계박함이 없는 단’이기 때문에 변지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조건을 갖추었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루 단(斷, 즉 이계)의 ‘득’을 획득하고
아울러 제일유(第一有, 즉 有頂)를 깨트렸으며
두 원인을 멸하고, 계(界)를 초월하였으니
그래서 아홉 가지를 변지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得無漏斷得 及缺第一有
滅雙因越界 故立九遍知
논하여 말하겠다.
견소단법의 ‘단’은 세 가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변지로 설정한 것이며, 수소단법의 ‘단’은 네 가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바야흐로 변지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견소단법의 ‘단’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함은, 이를테면 무루 이계의 ‘득’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며, 유정지(有頂地)를 깨트렸기 때문이며, 두 가지 원인[雙因]을 멸하였기 때문이다.63) 이 중에서(각각의 번뇌의 ‘단’을 획득한 이 중에서) 이생도 역시 8지의 염오를 떠나고, 두 가지 원인을 멸한 경우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그의 ‘단’은 변지가 아니니, 그 밖의 두 가지 조건을 결여하였기 때문이다.64)
견성제위(見聖諦位, 즉 4제 現觀位)의 경우, 제2찰나와 제3찰나의 온갖 ‘단’은 비록 무루 이계의 ‘득’을 획득하였을지라도 그 밖의 두 가지 조건을 결여하였기 때문에 변지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65) 제4찰나와 제5찰나의 온갖 ‘단’은 비록 [무루 이계의 ‘득’을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정지도 역시 깨트렸을지라도, 두 가지의 원인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변지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니, 견집소단의 [변행]인이 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법지(集法智, 즉 제6찰나)의 ‘단’은 욕계의 2부(견고ㆍ견집소단)가 끊어져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변지’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며, 그 후의 다섯 찰나(멸류지에서 도류지)에 걸친 법지(法智)와 유지(類智)의 ‘단’도 세 가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모두 ‘변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수소단법의 ‘단’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추었다고 함에 있어, 세 가지 조건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며, ‘계(界)를 초월하는 것’이 네 번째 조건이다.66) 이를테면 온갖 계 중에서, 성자가 아직 지(地)를 초월하지 않았다면, 그가 획득한 ‘단’은 오로지 두 가지 조건(즉 이계의 ‘득’을 획득하고 두 가지 원인을 멸한 것)만을 갖추었을 뿐이며, 만약 이미 지를 초월하였을지라도 아직 계를 초월하지 못하였다면 그가 획득한 ‘단’은 여전히 한 가지 조건을 결여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계를 초월한 때라면, 네 가지의 조건이 비로소 갖추어져 그러한 ‘단’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변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여기에 이구계(離俱繫) 즉 ‘함께 계박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을 더하여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67)
[이에 대해] 다른 어떤 이[有餘]는 설하기를 “이는 바로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이나 ‘계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조건과 동일하기 때문에 별도로 설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68)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계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조건을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니, ‘계를 초월하는 것’도 역시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과 ‘함께 계박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은 비록 동일한 사실[物]에 근거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계박[繫]과 원인[因]은 그 뜻이 각기 다르니, 말하자면 5부(部)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을 원인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능히 속박시키는 것을 계박이라고 한다. 예컨대 고지(苦智)가 생겨나고 집지(集智)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면, 2부[의 번뇌]는 비록 서로를 일으키게 하는 힘은 갖지 않을지라도 전전(展轉)하며 능히 [서로의] 원인(즉 변행인)이 되는 성질은 갖는다. 그러나 견집소단의 번뇌는 본래대로 계박의 뜻을 갖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견고소단의 번뇌에는 계박의 뜻이 없다. 따라서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이 바로 ‘함께 계박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은 아니다.69)
또한 원인을 바로 계박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 무루연의 혹은 다른 취(聚)를 계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우리의 종의에서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설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본론)서 설하지 않은 것은, 다만 “이것(‘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을 설하면 그것(‘함께 계박하는 것에서 떠나는 것’)은 저절로 성립되기 때문이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양자는 의미상]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그 자체의 뜻(적용범위)이 넓기 때문에 바야흐로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을 설한 것이다.
그리고 비록 계(界)를 초월하는 온갖 단계에서는 모두 두 가지 원인을 멸할지라도, 두 가지 원인을 멸할 때에는 모두 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 원인을 멸하는 것’이라는 조건 이외에 ‘계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조건을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즉 3지(地, 상2계의 하 3지)의 두 가지 원인을 멸하였을지라도 변지로 설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70)
6) 변지를 성취하는 유정
그렇다면 누가 몇 가지의 변지를 성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견제위(見諦位)에 머무는 자는 성취하는 일이 없든지
혹은 한 가지에서 다섯 가지를 성취하고
수도위에서는 여섯 가지와 한 가지와 두 가지를 성취하며
무학위에서는 오로지 한 가지만을 성취한다.
住見諦位無 或成一至五
修成六一二 無學唯成一
논하여 말하겠다.
이생위 중에서는 비록 염오를 능히 떠날 수 있고, 나아가 8지(욕계 미지지에서 무색계의 무소유처지)의 [염오를 떠날지라도] 변지를 성취하지 않는다.71)
성자위의 경우, 미지정에 의해 견제(見諦, 성제 現觀位)에 든 자로서 첫 찰나(즉 苦法智忍)로부터 집법지인(集法智忍)에 이르기까지의 계위에 있는 자도 역시 변지를 성취하는 일이 없다. 집법지(集法智)와 집류지인(集類智忍)에 이른 자는 오로지 한 가지 변지(욕계 見苦ㆍ見集斷遍知)만을 성취하지만, 집류지(集類智)와 멸법지인(滅法智忍)에 이른 자는 두 가지 변지(앞의 변지와 상계의 見苦ㆍ見集斷遍知)를 성취하며, 멸법지(滅法智)와 멸류지인(滅類智忍)에 이른 자는 세 가지 변지(앞의 두 변지와 욕계의 見滅斷遍知)를 성취하며, 멸류지(滅類智)와 도법지인(道法智忍)에 이른 자는 네 가지 변지(앞의 세 변지와 상계의 見滅斷遍知)를 성취하며, 도법지(道法智)와 도류지인(道類智忍)에 이른 자는 다섯 가지 변지(앞의 네 변지와 욕계의 見道斷遍知)를 성취한다.
그리고 근본정에 의해 견제에 든 자로서 [첫 찰나로부터] 집류지인에 이르기까지의 계위에 있는 자도 역시 변지를 성취하는 일이 없으며, 그 이후의 계위에 이른 자에 대해서는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참답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수도위에 머무는 자의 경우, 아직 욕계를 떠나지 않은 자로서 도류지(道類智)에 이른 자를 비롯하여 [이생위에서] 욕계의 염오를 완전히 떠나지 않은 자와, 아울러 욕계의 염오를 떠났다가 물러난 자는 모두 여섯 가지(앞의 다섯 변지와 상계의 見道斷遍知)를 성취한다.72)
욕계를 완전히 떠난 자로서 욕계의 제9품의 혹(惑)을 떠나는 해탈도에 이른 자를 비롯하여 색계의 최후(즉 제4정려의 제9품)의 혹을 떠나는 무간도에 이르기까지의 계위에 있는 자와,73)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를 떠난 자로서 도류지로부터 나아가 색애가 다하는 도(불환의 勝果道)를 일으키기 전까지의 계위에 있는 자는 오로지 한 가지 변지만을 성취하니, 이를테면 ‘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가 바로 그것이다.74) 그리고 색애를 다하였거나 무학위에 있던 자가 색계의 번뇌[色纏]를 일으켜 거기서 물러날 때에도 역시 한 가지 변지를 성취하니, 앞에서와 같다.
색애를 갖은 자의 경우, 색애를 영원히 다하는 때로부터, 일찍이 [이생위에서] 색애를 떠난 자의 경우, 색애를 다하는 도를 일으키는 때로부터 아직 무색애를 완전히 떠나기 전까지는 5하분결이 다하고 색애가 다하는 두 가지 변지를 성취한다.75) 그리고 무학위로부터 물러나 무색계의 번뇌[無色纏]를 일으키는 자도 두 가지 변지를 성취하니, 그 명칭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무학위에 머무는 자는 오로지 한 가지 변지만을 성취하니, 말하자면 ‘일체의 결이 영원히 다하는 변지’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근본정에 의해 정결정(正決定, 正性離生의 見道位를 말함)에 든 자라면, 도류지(道類智)가 일어날 때 거기에 존재하는 ‘단(斷)’도 역시 ‘순하분결이 다하는 변지’라고 이름할 수 있거늘, 어찌하여 근본정의 결과로서 오로지 다섯 가지 변지만을 인정한 것인가?76)
오로지 색ㆍ무색계의 견소단법의 ‘단’에 대해서만 그러한 [근본정의 결과가 되는] 변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으로,77)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 오로지 이러한 [색ㆍ무색계의 견소단법의] ‘단’에 대해서만 그같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인가?
점차로 불환과를 획득한 자(즉 차제증)의 경우에는 이러한 ‘단’에 대해서만 그러한 명칭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월증의 경우] 일찍이 세속도에 의해 끊어진 순하분결을 지금의 성도의 힘이 영원히 생겨나지 않게 하기 때문으로, 그것(세속도)에 의해 획득된 [순하분결의] ‘단’을 일시 이것(근본정)의 결과라고 설할 수 있을지라도 실로 지금의 [성도가] 욕계의 단변지를 획득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마땅히 [‘단’과 ‘변지’의 관계를]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장차 ‘단’을 획득하는 자라면, 역시 또한 장차 변지도 획득하는 것인가?
혹 장차 ‘단’을 획득할지라도 장차 변지는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계위 중에서 장차 획득될 ‘단’이면서, 그러한 ‘단’을 변지로 설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혹 장차 변지를 획득할지라도 장차 ‘단’은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일찍이] 욕계를 떠나지 않고서 견제(見諦)에 들었을 경우, 집법지인(集法智忍)이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正滅位] 중에서 욕계의 견고소단법의 ‘단’이 바로 그러한 경우로서, 장차 변지를 획득할 모든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며, 장차 획득할 ‘단’은 일찍이 이미 획득하였기 때문이다.78) [또한] 집류지인(集類智忍)이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 중에서79) [상] 2계의 견고소단법의 ‘단’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그러나] 일찍이 [이생위에서] 욕계 [염오를] 떠난 이로서 만약 근본정에 의해 견제에 든 자라면, 뒤의 세 가지 유지인(類智忍, 즉 집ㆍ멸ㆍ도류지인)이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 중에서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그러한 일찍이 끊어진 색ㆍ무색계의 견소단법의 ‘단’과 그러한 욕계 견소단법과 수소단법의 ‘단’은 [그러한] 일체의 상태(뒤의 세 가지 유지인이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에서 장차 ‘단’을 획득하지 못하니, 일찍이 이미 획득하였기 때문이며, 장차 변지도 획득하지 못하니, 이것(세 가지 유지인)은 그것(근본정)의 대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미지정에 의해 견제에 든 자라면, [뒤의] 세 가지 법지인(法智忍)과 유지인(類智忍)이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 중에서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그러한 일찍이 끊어진 욕계와 색ㆍ무색계의 견소단법의 ‘단’이 바로 그러한 경우(장차 변지를 획득할지라도 장차 ‘단’은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나아가] 수도위에서는 욕계의 염오를 떠나는 제9 무간도가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 중에서 3계의 견소단법과 욕계 8품의 수소단법의 ‘단’과, 제4정려를 떠나는 제9 무간도가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 중에서 앞의 세 정려의 9품과 제4정려의 8품[의 ‘단’]이 그러한 경우이며, 일찍이 색계를 떠난 자 경우 4지(근본정려의 4지)의 9품의 수소단법의 ‘단’과, 금강유정(유정지 9품의 斷道)이 막 멸하려고 하는 상태 중에서 앞의 계위에서 끊어진 일체의 법의 ‘단’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80)
혹 장차 ‘단’을 획득하고 역시 또한 장차 변지도 획득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온갖 계위 중에서 장차 획득될 ‘단’이면서, 역시 또한 그러한 ‘단’을 변지로 설정하는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여기서 ‘온갖 계위’라는 말은 무간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무간도] 자체에 의해 끊어진 법의 ‘단’은 장차 변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일찍이] 욕계 [염오를] 떠나지 않고서 견제에 든 [자의] 경우, 집법지인이 바로 멸하려고 하는 상태 중에서 욕계 견집소단법의 ‘단’과, 집류지인이 바로 멸하려고 하는 상태 중에서 [상] 2계의 견집소단법의 ‘단’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나아가 도류지인이 바로 멸하려고 하는 상태 중에서 [상] 2계의 견도소단법의 ‘단’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일찍이 염오를 떠나고서 견제에 든 자의 경우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도위 중에서는 욕계와 제4정려와 유정지의 염오를 떠날 때, 제9 무간도에 의해 끊어질 법의 ‘단’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혹 장차 ‘단’도 획득하지 못하고 장차 변지도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것과 같은 온갖 상(相)을 제외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7) 불환과 아라한의 경우 한 가지 변지로 총괄한 이유
어떠한 까닭에서 불환과(不還果)와 아라한과(阿羅漢果)의 경우에는 온갖 번뇌의 ‘단’을 모두 모아[總集] 한 가지 변지로 설정하게 된 것인가?81)
게송으로 말하겠다.
계를 초월하고, 과위를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두 가지 경우에는 변지를 한 가지로 총괄한 것이다.
越界得果故 二處集遍知
논하여 말하겠다.
두 가지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획득된 ‘단’을 모두 모아 한 가지 변지로 설정하게 된 것이니, 첫 번째는 계를 초월하는 것[越界]이며, 두 번째는 과위를 획득하는 것[得果]이 바로 그것이다.82) 즉 여기서 ‘모은다[集]’는 말은 바로 ‘합일(合一)’의 뜻이다.
만약 무색계에 대해 [말한다면], 염오를 부분적으로 떠났기 때문에 예류과를 획득하게 되었고, 염오를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아라한과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만약 욕계에 대해 [말한다면], 염오를 부분적으로 떠났기 때문에 일래과를 획득하게 되었고, 염오를 완전히 떠났기 때문에 불환과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색계에 대해 [말한다면], 염오를 부분적으로 떠나든 완전히 떠나든 어떠한 경우에도 과위를 획득하지 않는다. 오로지 두 가지 경우에만 두 가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과위를 획득하는 때가 바로 계(界)를 초월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라한과 불환과의 경우에만 획득된 ‘단’을 [모두] 모아 한 가지 변지로 설정하게 된 것으로, 그 때 일미(一味)의 ‘득’을 모두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밖의 두 가지 과위(예류과와 일래과)를 획득할 때 ‘득’은 비록 일미일지라도 ‘계’를 초월하지 못하며, 색애가 다할 때에는 비록 ‘계’를 초월할지라도 일미의 ‘득’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계위에서는 변지를 [한 가지로] 모으지 않은 것이다. 요컨대 두 가지 조건을 갖출 때, 비로소 [온갖 ‘단’을] 모두 [한 가지 변지로]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8) 변지의 획득과 상실
누가 몇 가지 종류의 변지를 버리고 획득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한 가지와 두 가지와 다섯 가지와 여섯 가지를 버리며
획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나 다섯 가지만은 제외된다.
捨一二五六 得亦然除五
논하여 말하겠다.
‘한 가지 변지를 버린다’고 함은, 이를테면 무학과, 색애가 다한 상태[色愛盡]와, 욕계의 혹에서 완전히 떠난 상태[全離欲]로부터 물러나는 경우를 말한다.83)
‘두 가지 변지를 버린다’고 함은, 이를테면 온갖 불환이 욕계의 전(纏)을 일으켜 색애가 다한 상태로부터 물러나는 때와, 아울러 그가 아라한과를 획득하는 때와, 일찍이 욕계를 떠난 이로서 근본정에 의해 견제에 든 자가 도류지인(道類智忍)에 [이르렀을] 때이다.84)
‘다섯 가지 변지를 버린다’고 함에 대해 경주(經主)는 “이를테면 일찍이 욕계를 떠난 자가 [그 후 견제(見諦)에 들어] 도류지(道類智)에 이를 때이다”고 해석하여 말하였는데,85) 여기서는 다만 ‘도류지인(道類智忍)에 이를 때’라고 말했어야 할 것이니, 도류지에 이를 때 그것을 이미 버렸기 때문이다. 대저 획득과 상실은 ‘장차[將] [일어날 것]’에 근거하여 설해야 하기 때문이다.86) 또한 마땅히 ‘미지정(未至定)에 의해 견제에 든 자’라고 분별하여 말했어야 할 것이니, 만약 근본정(根本定)에 의해 견제에 들었다면, 욕계의 ‘단’에서 무루 이계의 ‘득’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에 욕계의 견소단법의 ‘단’에서 세 종류의 변지를 획득하지 못하니, 일찍이 획득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금 버린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87)
‘여섯 가지 변지를 버린다’고 함은, 이를테면 [일찍이] 욕계에 존재하는 [번뇌를] 떠나지 못한 성자가 불환과를 획득할 때이다.88)
[본송에서] ‘획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고 함은, 이를테면 한 가지를 획득하고, 두 가지를 획득하고, 여섯 가지를 획득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한 가지 변지를 획득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승진위(勝進位)인 집류지인(集類智忍) 등의 아홉 종류의 계위에 있을 때와, 무학이 색계의 전(纏)을 일으켜 [무학위로부터] 물러날 때이다.89)
‘두 가지 변지를 획득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무학이 무색계의 온갖 ‘전’을 일으켜 그것으로부터 물러날 때이다.90)
‘여섯 가지 변지를 획득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불환과로부터 물러나는 때이다.91)
그리고 [본송에서] ‘다섯 가지 변지를 획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은, 이치상 허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일찍이 욕계의 염오를 떠난 이로서 미지정에 의해 견제(見諦)에 든 자는 도류지인(道類智忍)에 이를 때 다섯 가지 변지를 버리고 불환과를 획득하기 때문에, 만약 이 과위에서 물러나는 경우라면 다섯 가지의 변지를 획득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불환과는 물러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다섯 가지 변지를 획득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92)
승진(勝進)하여 성자의 과위를 획득할 때, 온갖 무위에서 다시금 뛰어난 ‘득’을 일으키는 것을 바로 ‘획득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을 어찌 ‘변지를 버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인가?93)
‘단(斷)’에 근거한 경우에는 실로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항상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바야흐로 “9변지 중의 다른 명칭을 획득하면 본래의 명칭은 상실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버린다’고 말한 것으로,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다.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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