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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독수리, 법과 양심에 따라 사냥하다
그해 여름, 사장터 큰소나무가 쓰러졌다. 태풍에 맞서 밤새 목 놓아 울은 큰소나무, 새벽녘에 그 큰 밑둥치가 부러져 벼랑에 굴렀다. 돌담 집이 무너질 때 나는 소리에 잠을 깬 동네 사람들이 볏단같이 누워 있는 큰소나무로 모였다.
큰소나무의 꺾인 밑동은 수수깡같이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임진왜란을 피해 숨어들어온 사람들과 함께 동네를 이룬 큰소나무는 푸르른 솔잎의 겉과 달리 속이 빈 대나무 같았다. 병자호란, 대동아 전쟁과 육이오의 청야견벽작전 틈바구니서도 살아남은 큰소나무가 봄을 앞둔 새벽바람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어른 여섯이 두 팔을 벌려 서로 손끝을 잡고 둥치 위가 달아난 밑동 둘레를 쟀다. 송진을 뺀 자국이 있는 당산 소나무보다 큰 가지가 몇 개나 되는지, 어른들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며 헤아렸다. 솔잎과 솔방울도 팔아 돈 살 궁리를 하듯, 초가집 서까래만 한 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도 함부로 손을 못 대게 했다.
이튿날 삼판 나무장수가 동네에 돈다발을 내밀고 꺾인 샛가지도 제무시 삼판 차에 실어갔다. 비로소 동네 사람들이 사자가 남긴 죽은 짐승의 마지막 살점을 독수리 떼가 뜯듯, 다투어 남은 솔가지를 쟁여 집으로 날랐다. 어른들은 솔방울을 까꾸리로 끔어 보리가마니에 담았다. 지게질을 할 수 없는 어린 나도 뒤늦게 솔방울을 밤 줍듯 주워 꼴망태에 담았다. 그리고 땅 밖으로 드러난 가지뿌리를 톱으로 썰어 나무를 했다. 끝내 곡괭이로 흙을 파 땅 속 실뿌리를 들추어 도끼로 찍었다.
큰소나무 판 돈맛을 본 어른들은 그해부터 농사일이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옆집 뒷집…, 하나둘 콩을 복고 감자를 삶아 보따리에 싸 서울로 부산으로 밤길을 떠났다. 큰소나무가 서 있던 자리에 누구도 어린 소나무를 심지 않았다. 주인 떠난 빈집 마당은 가을 달밤 메밀밭같이 하얀 망초 꽃이 눈치 없이 달빛 아래 목을 빳빳이 세웠다.
더는 큰소나무가 바람을 타며 나의 아침잠을 깨우지 않았다. 태풍이 불어도, 동네는 늘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몇 해 동안 할머니들이 돌아가며 사장터 언덕에 앉아 먼 길을 떠난 큰소나무를 생각했다. 땅과 맞닿은 큰소나무 밑둥치가 흔적 없이 사라질 때까지 깨쫑다리에 매달린 알록달록한 천이 바람을 탔다. 그리고 그 달집놀이가 있던 해가 논에서 볏짚 공을 찬 게 마지막이었다. 통통 뛰어 빠르게 굴러가는, 공장에서 만든 고무공이 나타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도 큰소나무가 서 있었던 곳을 힐끔힐끔 뒤돌아보며 공장에서 만든 큰 고무공을 사기 위해 동네를 떠났다.
나는 지금도 고무공을 더더욱 많이 손에 넣기 위해 바쁘다. 수많은 꿀벌이 자신들의 겨울 식량으로 여름날 모은 꿀을 따 팔기 위해, 마른 쑥 연기를 품어 벌을 쫓아낸 벌집을 둥근 통에 넣고 빠르게 돌린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가 말로는 법과 양심을 앞세워 내심 꿀벌 사양관리 하듯 나를 검사한다. 나는 가까스로 후루룩 삼킨 꿀을 멀미하듯 겨워내며 하늘이 노란 신세계에 오른다.
사장터 큰소나무 자리에 가시나무가 산발로 서 있다. 나는 낫을 휘둘러 가시나무를 베고 그 자리에 소나무를 심는, 그 흔한 법과 양심도 없는 모진 꿈을 꾼다.
가가 가다
함박눈이 사흘째 내렸다. 설이 지나고 달집 놀이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아침부터 감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마치 감이 돌에 떨어져 깨지듯, 하늘을 날아 언덕을 구르며 눈덩이로 몸집을 키우다 한순간에 개울 얼음장에 부딪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부서져 널브러졌다. 개울에 벌러덩 나자빠진 눈덩이 얼음은 꽃 피는 3월이 돼야 언 몸을 풀고 물이 되어 샛도랑 물꼬를 타고 논으로 흘러들 것 같았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눈이 내리고 땅에 소복소복 쌓여, 천지가 하얗게 변했다.
집 앞 언덕의 가죽나무를 베어 개울 양 둑에 걸치고 청솔가지로 덮어 그 위에 흙을 다져 만든 나무다리 건너 논두렁에서 구천이 들판을 등지고 동네를 바라보며 외쳤다.
“야~, 공차로 나와라!”
개울 언덕 덤불 눈 속에서 먹이를 찾다 놀란 뱁새 떼가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얼마 전까지 다리 바닥에 듬성듬성 난 구멍 사이로 흙이 흘러내린 집 앞 개울 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넜다. 설치레로 초가지붕을 이듯 꽁꽁 언 다리의 흙을 파 썩은 나무를 걷어내고 다시 새 나무를 걸치고 흙을 부어 다졌지만, 방정맞은 송아지같이 헐레벌떡 뛰다가는 한순간에 미끄러져 개울에 떨어져 물웅덩이에 처박힐 수 있었다. 나무하러 산에 가지 못한 채 집에만 처박혀 있던 친구들이 안산 당산나무 아래 부엉이배미 논에 하나둘 모였다.
먼저 온 석구와 삼용이가 무릎이 빠지는 눈밭을 개와 함께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을 찰 수 있게 눈을 밟았다. 한편에서는 볏짚을 쌓아둔 짚 누리에서 새끼를 꼬아 공을 만들었다. 푸른 솔잎이 많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와 골문 표시를 하고, 자기 집 방구들 막에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또철이를 논으로 불러냈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힘을 합하여 논두렁 아래의 구석에 쌓인 눈은 눈사람을 만들 듯 눈뭉치를 굴려 치웠다. 우리는 스스로 알아서, 각자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놀이 준비를 척척했다. 모두가 펄펄 내리는 눈을 머리에 하얗게 이고서 뿌연 입김을 내뿜었다.
“돼지 오줌보 보다 엄청 좋다.”
석구가 짚으로 만든 공을 두 손으로 움켜 들고 자랑했다.
“그래 잘 만들었다. 그럼 편을 나눠 놀자?”
“모두 열둘이니까, 여섯 명씩 나눠… 우리 쪽 할 사람 여기 여기에 붙어라.”
“그러지 말고, 가위바위보로 나누자.”
“제비뽑기가 더 좋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두 편으로 나눴다. 그런데, 편을 나누고 보니 덩치로 봐서 한쪽으로 기울었다.
“평평하게 갈라야 되는데, 우리가 이길 게 뻔해 보인다.”
“그런데 다리가 길고 덩치가 큰 돌석이 니와 삼용이 같은 한 편으로 몰렸네. 삼용이 저리 가고 니가 이쪽으로 오면 엇비슷하겠다.”
“야. 덩치만 크면 머하노. 공을 잘 굴려야지. 물을 혼자 독식해서 콩나물같이 웃자라면 새끼 까기 아니면, 만세 잘 부르는 선수 아이가. 작은 고추가 맵다카이. 가위바위보로 나뉜, 원래대로 하자.”
“그래. 공을 끝가지 차 봐야 안다.”
짚으로 꼰 새끼를 둘둘 말아 만든, 늦가을 비탈진 밭두렁에 매달린 늙은 호박만 한 공을 가운데 두고 만장일치로 두 편으로 갈라섰다. 그리고 공놀이에 지켜야 할 몇 가지를 가타부타, 탈 없이 시원하게 정했다.
“심판은 필요 없다.”
“그리고 배꼽 이상으로 족발을 올리면 반칙이다.”
“알았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알아서 하고, 요이 땡, 시작하자?”
“기다.”
그날, 우리는 눈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공놀이를 했다. 볏짚으로 동여맨 검정 고무신 안에 물이 고여 미끄러지고 넘어지며 발바닥이 퉁퉁 불고… 해를 넘겨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야 이놈들아, 동상 걸리면 발가락 짤라야 된데이. 개새끼들 같이 눈밭에 마구 뛰어다니노.”
개울 건너 산자락 아래 사는 응달 할매가 마당 끝에서, 우리가 공놀이를 끝내고 뱁새 떼 같이 우르르 몰려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혀를 끌끌 차며 나무랐다.
“할매, 조심할 깨요.”
용이 대답했다. 그리고 내일은 시합을 하자고 끄집어냈다.
“땔나무는 눈 녹을 때까지 며칠 못 할 끼다. 내일은 이른 점심 묵고 우리끼리 나무 내기 공이나 차자.”
“형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
나는 할배 방에 군불 때는 작은 방 가마솥에 소죽을 끓여 소에게 준 뒤 저녁을 먹고, 내일 있을 나무 내기를 꿈꾸다 곧장 잠에 곪아 떨어졌다.
닮았데이
“니 머리 우에 돌 하나 더 올리면 십층 석탑이가? 아니믄 돌열이가? 구 석돌, 니가 말해봐라.”
“새끼가, 돌열이 뭤꼬. 돌 석자에 열십자, 석열이다. 무식아, 구 석열이라 똑디 불어라.”
말끝에 주먹을 서로 주고받을 찰나였다.
“야, 싸우지 말고 말로 하래이.”
또철이가 어제 가지고 놀은, 새로 꼰 새끼로 꽁꽁 돌려 묶은 공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싸움을 말렸다.
“철이 니는 이철이가 좋나, 아니믄 또철이가 좋나?”
“이철이나 또철이나 그게 그거 아이가? 또 낳은 아들이 쇠같이 깡깡 한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아이가. 뭐, 그게 그거지만.”
“미애야, 니가 심판 좀 봐라.”
“난 니들 싸움에 끼어들기 싫다. 그런데 잘 봐달라고 야로를 줘도 나는 휘둘리지 않는다. 누가 머라 캐도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누구같이 왔다리 갔다리 않고 똑바로 볼기다.”
석구가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지. 엿장수 맘대로 엿가락 뽑듯 늘어트리고, 또 막무가내로 떼쓰면 안 되지.”
밤새 다시 내린 눈이 논바닥을 덮어 미끄럽지는 않았다. 설이 지나고 점차 날이 풀려 낮에 서서히 녹던 눈이 밤에 다시 얼고 그 위에 내린 눈이 무릎 높이로 쌓였다. 신자와 미애가 논두렁 감나무 아래서 싸움을 지켜보다 다시 말했다.
“서로 싸우면 콩이 나나, 팥이 생기나. 어서 공이나 신나게 차라.”
“그래. 석구 니가 참아라. 공이나 차자.”
미애의 말을 듣고, 삼용이 석구를 살살 타일렀다. 그러나 골이 잔뜩 난, 두 주먹을 굳게 쥔 석구 코에서 황소가 암내 낸 소 등에 오를 때 내뿜는 희뿌연 입김을 그가 숨 쉴 때마다 뭉텅뭉텅 뿜었다. 석구는 암소 등에 뛰어올라 단박에 깊숙이 내지르는 황소같이 여차하면 또철이 낯짝에 주먹을 날려 코피를 낼 품새를 풀지 않았다.
“이러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되고, 또 이웃끼리 동네 싸움으로 번지겠다.”
논바닥에 모인 친구들 가운데 가장 싸움을 잘한다는 두식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두식이 연거푸 말했다.
“석구면 어떻고 돌구면 어떻노. 그게 거기지. 또철이가 이철이고, 이철이가 또철이 아이가. 또또철이면 삼철이고 돌이 아홉 개면 석구, 열 개면 석열이다. 겉과 속이 다리면 문제지만 똑같으면 그만 인기라. 싸움질 그만하고 공이나 차자.”
“두식이 니는 가만히 있어라. 니는 머리에 가마가 두 개라고 두식이가? 지난번 내가 남몰래 준 군고구마 얼른 토해내거라.”
“너 정말로 야로 묵고 그동안 내 편인 척했단 말이가? 믿을 놈 한 놈도 없데이. 노름판 찾아다니며 이놈 저놈 똥구멍에 붙어서 개평이나 뜯는, 옛날에 한가락 한 퇴물 나으리가?”
“기추이 니는 가만히 있거라. 우리가 남도 아이고 해서 한마디 하마. 그동안 마이 해 묵었다 아이가.”
“그래. 묵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카더라. 이 판국에 못 묵는 놈이 등신이지.”
“새끼가 쪼매 유식한 말도 하네. 그 비린내 나는 말을 어디서 배웠노? 너거 아부지 노름방 따라다니며 배웠나. 아니믄 니 석구 똘마이로… 그래도 마, 대가리 쇠똥도 안 벗겨진 놈이 어른 숭내 내면 되겠나?”
그때는 노름방이 판을 키워 합법적 주식시장으로 탈바꿈할 줄 꿈에도 몰랐다. 지 돈 놓고 전 펼쳐 따 논 당상인 남의 돈 끝내 못 삼키고 노름방 대들보에 목 매달은 귀신을 그때 본 뒤 자본주의 시장의 꽃이라는 미끼를 월남 붕어같이 삼키지 않았고, 세상에 공짜는 없어 화석같이 굳은 발바닥 살을 지금도 벗긴다.
“말이야 다 옳거니 해도, 가까이 가서 보니 찬물 낀 논에 쭉정이를 매달은 시퍼런 벼 포기 같다. 누가 니 말만 믿고 바보같이 덜렁 찍고 따를 것 같나?”
“걱정 마라. 황새같이 부지런히 쪼사대면 참붕어도 잡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고, 문을 자꾸 뚜디리면 할미산성 아래 탑골 물이 모인 저수지보다 시퍼렇게 깊은 하늘나라에도 간다 안 카더나.”
“…”
어른들 같이 못 하는 말없이, 싸움은 마당 남새밭 고추가 밤새 점점 커지듯 했다. 그리고 지난여름 안산 넘어 새장터 언덕 칡넝쿨같이 얽혀갔다. 또 논두렁을 태우다 묏등 잔디로 번진 들불 같았다. 불을 끄려 소나무 가지를 꺾어 불붙은 잔디를 때릴수록 불씨가 사정없이 튀어, 묏등을 홀라당 태우고 불이 스스로 사그라질 때까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싸움도 그랬다.
엿장수 맘대로
옛날에 죄인을 목 매달은 사형장, 사장터라고도 하는 새장터 큰소나무가 우리를 지켜보며 소리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를 간지럽힐 정도로 솔잎이 낮고 가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솔방울이 우우웅… 급기야 쌩쌩 소리를 냈다. 솔잎과 솔방울이 번갈아 소리를 내자 소나무 가지가 벌벌 떨었다. 솔방울이 비 오듯 땅에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관솔 삭정이는 솔방울과 함께 불쏘시개로 안성맞춤이었다. 밤새도록 바람을 타 윙윙 울은 아침에는 망태를 걸머지고 큰소나무를 빙글빙글 돌며 떨어진 손바닥만 한 검붉은 껍질과 주먹만 한 솔방울을 주워 망태에 담았다. 큰소나무 왼쪽의 잘 얼지 않는 양지바른 벼랑에서 겨울마다 이른 봄 새순이 돋아날 때까지 칡도 캤었다. 서낭당 고개는 아니지만, 큰소나무로 올라가는 길옆 바위 아래 진달래 나뭇가지에 매달린 색색이 헝겊들이 사시사철 바람에 펄렁거렸다. 해마다 가장 먼저 새장터에 진달래꽃이 피었다.
“가시나 너그들은 새장터에 가서 큰소나무 가지를 주어 와라. 발이 시립다.”
“미친놈, 니가 가라. 작년 여름에 소나무 가지를 타는 뱀을 니그들은 못 봤나?”
“니가 여기 대장이가? 우린 니 머슴이 아이다.”
“참, 말 많네. 그라믄 나무는 남자들이 해오자. 벌써 노망났나? 겨울에는 뱀이 없다. 불은 니거들이 지피라. 집에 가서 부엌 성냥 좀 가지고 오고. 부탁이다.”
나도 단숨에 논두렁을 타고 가 새장터 큰소나무에서 떨어진 삭정이를 주워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미애가 성냥을 집에서 가져와 해마다 정월 보름 달집 짓는 곳에 불을 지폈다. 관솔에 불이 붙자 송진이 지글지글 끓고 시커먼 연기가 솔솔 피었다.
“연기가 내한테만 자꾸 온다. 연기 안 나게 푸른 솔가지는 넣지 마라.”
“연기는 불알이 큰 사람한테 간다고 하던데, 니도 크나?”
“그래. 오뉴월에 추우욱 늘어진, 너거 집 황소 불알만 하다. 됐나?”
“아이다.”
됐다, 로 석구의 됐나, 를 맞받았다면 곧바로 둘이 서로 안고 뒹굴며 싸웠을 것인데 이철이가 꼬리를 바로 내려 다행이었다. 이철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공은 언제 차고, 불만 쬐고 있을래?”
“오늘은 어제보다 춥다. 바람도 불고. 조금만 더 쬐자.”
“진 쪽이 이긴 쪽에게 나무 한 짐씩 각자 해 줘야 한다.”
“공도 차기 전에 싸워… 난 싫다.”
“니가 빠지면 한 명이 모자라 짝이 안 맞는다 아이가.”
“그러면 석구가 심판을 보면 되겠네. 심판 보는 게 정말 힘들다. 잘하면 본전, 못하면 뺨이 석 대라는 말 들어봤제.”
“누가 구슬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석구에게 두 개 줘라. 욕볼 긴데 구슬이 문제겠나.”
“나는 구슬은 싫다. 차라리 나무를 두 짐 해줘라. 그러면 내가 심판을 볼끼다.”
“나는 열 짐 줄께. 소금이 싹 나고, 우리 집 수송아지가 새끼 놓을 때에 주마.”
“다들 어떻게 생각하노? 두 짐, 나는 좋다. 좋으면 좋다고, 아니면 싫다고 바로 말해봐라. 삐잉 둘러말하거나 뒷북치면 앞으로 우리랑 못 놀 끼다.”
“그래. 누구맨치로 자꾸 새끼 치고 쪼개지고 분란만 일으켜 공도 못 차게 시간만 빼앗으면 탱자 씨 같이 볼가 내고 우리끼리 놀 끼다.”
그렇게 석구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호각을 목에 걸고 심판을 보기로 했다. 사실 석구는 심판보다는 공을 차서 꼭 이기고 싶었다. 석구가 목에 건 호각을 만지작거리다 갑자기 어깨를 들썩이며 모닥불 앞에 앉은 채로 호각을 입에 물었다.
“삐익, 삐~”
석구 옆에 있던 덕구가 벌쩍 일어나며 말했다.
“아이고, 귀창 떨어진다. 살살 불어라. 꼭 불고 싶으면, 저어기 가서 남 피해 주지 말고 니 맘대로 불거라.”
석구가 피식 웃으며 모두 자기 말을 들으라 했다.
“이렇게 한 번 불면 공을 세우고, 모두 내 말을 들어야 심판을 볼 수 있다. 두 번 불면 시작이고, 세 번 불면… 내가 정한 법을 지켜야 한데이.”
“야, 니가 지금 니만 묵는 밥을 끓이나 법을 짓나. 웃기지 마라. 도꾸에게 던져줄 개밥 타령 그만해라.”
“맞다. 무신 놈의 말이 많노. 말 많으면 빨갱이 간첩이다. 네가 알아서 양심대로 잘 불면 그게 법 아이가.”
“그래. 밥, 아니 법 이전에 양심 인기라. 맘 잘 묵고 똑바로 호각을 불면 누가 시비를 걸겠노. 여기 배 째라고 막무가내로 나뒹굴며 억지 부리는 나쁜 놈의 새끼는 없다.”
우리는 어른들로부터 엿듣거나, 동네에서 본 것들에 더하여 생각나는 대로 말을 주고받았다. 말을 하고 또 듣고 보니, 말마따나 그런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났다.
“니는 억지 부리는 어른들 못 봤나? 사실 우리 동네도 천지 삐깔로 많은 것 같더라. 술만 묵으면 헛소리 해 감치로 아 같이 길에 오줌 싸고, 심지어 맨 정신에도 수수깡 들고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좀 덜떨어진 아재 아지매들도 있다 아이가.”
“새 하늘땅에 올라간다며 대나무 잡고 밤새 헛소리하는 어디가 좀 모자란 사람들에 비하면 양반이제.”
“그라믄 니는 논에서 뽑은 피로 개구리 잡아봤나? 피 끝에 침을 탁 뱉어 개울 피래미 낚시하듯 들고 있으면 개구리가 폴짝 뛰어 문다 아이가. 여기 한 번 봐라. 철이 니가 개구리라 치고 폴짝 뛰어 물어봐라?”
“미쳤나. 내가 왜 니가 들고 있는 끝에 침 바른 꼬챙이를 무노.”
“그래. 앞뒤 좌우 돌아보지도 않고, 살랑살랑 꼬리 치는 껍데기만 보고 생각 없이 한 번에 확 물면 끝장인 기라. 사람도 개구리나 물고기 같이 낚시 꼬임에 넘어가면 살아도 평생 죽은 목숨 아이가.”
용구가 칠용이 말을 받았다.
“맞다. 그게 어른들이 말하는 공갈 사기다. 붕어낚시 잘하면 어른 되어 사기꾼 되기 십상인 기라. 사람이 바늘 끝에 미끼를 달아 붕어에게 공짜 먹이 준다고 공갈 사기 치는 게 바로 낚시 이치 인기다.”
“니 참말로 똑똑하네. 여름에 니 낚시 기술 좀 배워야겠다. 가르쳐 줄래? 나는 공부 안 하고, 어른 되면 낚시나 하고 살란다. 디비 누버 콩가루에 굴린 인절미 묵기보다 쉽겠다.”
“공짜로는 안 가르쳐준다. 나는 누구만치로 야로는 안 묵는다. 새경 같은 삯을 주면 생각해 보꺼마.
“아 새끼가 못 하는 말이 없노. 안 내려가는 중우 자꾸에 칠 초를 니 입술에 칠했나? 뭐든 매끌매끌하게 끌고 와 옮겨 붙이는 재주가 남다르네.”
“생각해봐라. 갖다 붙이는 재주가 진짜 재주다. 마이 알아도 옮겨 붙여 쓰 묵지 못하면 진짜로 아는 게 아이다. 공부 잘해도 어디 골목에서도 못 씨 묵으면 말짱 헛방이다.”
“그럼 이게 무신 글자고? 니 말해봐라.”
“ㄴ자 아이가. 내가 낫 놓고 ㄱ자도 모리는 까막눈인 줄 아나.”
“니는 낫질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글자도 아네. 바보야, 이건 ㄱ자다. 이렇게 엎어져 누부면 니가 말한 ㄴ자고.”
“그래도 재수 없게 아무 데나 갖다 붙이지는 마라.”
“그럼 니는 고래 심줄에 매달린 지렁이를 덜컥 물은 붕어 새끼로 평생 살아라.”
“…”
모두 돌아가며, 짚단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모닥불을 쬐며 한 마디씩 보탰다.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듯 이야기는 끝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머리에 내리 앉은 눈 녹은 물이 덕구의 양 볼을 타고 흘렀다. 사나흘에 한 번쯤 차가 다니는 신작로 먼지를 뒤집어쓴 성태가 코를 훌쩍 일 때마다 콧물이 오르락내리락 하여 코 밑에 쌍 갈래의 길이 났다.
“야, 니는 얼굴 좀 씻고 댕겨라. 땟국이 찔찔 흐른다 아이가. 더럽다. 코밑에서 숨 쉴 때마다 참숯을 싫은 차가 다닌다.”
“니도 뱃속에 똥 넣고 다닌다. 남이 사 벗고 다니든 말든, 오지랖도 넓다.”
“그라믄 오는 여름 개울에서 목욕할 때까지 씻지 마라. 까마귀로 살아라.”
“나는 하늘을 나는 새가 더 좋다. 니는 똥개나 해라.”
“새끼가, 니 죽을래. 내가 개같이 길 가서 똥 핥는 것 봤나?”
“야, 그만하고 공이나 차자!”
“그래. 말로 싸우지 말고, 축구로 누가 이기나 해보자.”
“바보 축구 같은 놈들. 축구가 축구한다고?”
“누가 누굴 보고 등신 축구라 카노. 니 지금 죽을래?”
우리는 엉덩이에 붙은 지푸라기를 틀며 논 가운데로 몰려갔다. 눈발이 바람에 날려 회오리쳤다. 눈 코 입 귀, 구멍마다 눈발이 파고들었다. 큰소나무에 촘촘히 매달린 솔방울이 귀신 소리를 내듯 울었다.
똑디 해라
“…”
“다 큰 어른들이 애들같이 싸워 동네 우사스러워 어찌 살라꼬 그라요. 그만 참으소.”
“애들 싸움이 어른 쌈 됐네. 당장 그만둬라. 나이만 먹었지 하는 짓은 아 보다 못한 놈들!”
할배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더.”
“그래, 애들은 내비 두라! 애들은 지들끼리 싸우면서 시상 사는 이치도 깨우치고 씩씩하게 큰다. 누구도 다친 데 없으면 됐다. 남이지만, 한 동네 살면 다 식구나 마찬가지인 기다.”
“할배, 봄이 오는데 칠성이 아배가 노름을 하지 않을지 모리겠십니더. 감자밭에 거름도 내고, 논갈이도 해야 올 가실에 쌀 구경을 할 터인데….”
“또 곡괭이로 노름판 방구들을 찍어 버릴 테니 염려 마라. 미꾸라지 같이 뺀질거리며 사리판단을 못하는 놈은 아니니 걱정마라. 일 해서 묵고 살 생각은 안 하고, 남의 전답 문서 탐내 화투장이나 만지는 놈은 사람이 아이다.”
“예. 할배.”
칠성이 토끼같이 귀를 쫑긋 세우고 어른들 말을 가만히 듣다 뜬금없이 끼어들었다.
“얼레리 꼴레리, 다 큰 어른이 얼라 마냥 싸움질이나 하고, 밥값도 못하는 멍멍 짖는 도꾸 새끼라네.”
“네 이놈, 너그 삼성이 셋째 형 어딜 갔는지 불러오너라.”
할배의 호통에 이 칠성은 송아지가 골목에서 오줌을 누다 싸리나무 회초리로 엉덩이를 맞은 듯 입을 쭉 내밀어 우물거리며 쪼르르 자기 집으로 내뺐다.
눈 덮인 새하얀 들판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빤짝빤짝 빛났다. 햇살에 흰 눈이 아주 조금씩 녹았다. 논두렁 양지바른 돌담 아래서 먼저 봄이 오고 있었다. 한바탕 뛰어다니다 지친 강아지들이 논바닥의 이불처럼 덮어쓴 눈을 헤집어 파란 보리 싹을 핥았다. 동네 개들은 삼삼오오 눈밭을 몰려다니며 봄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날에 수송아지가 암송아지 등에 오르듯, 서로 먼저 등에 오르기 위해 실랑이를 벌었다.
“야. 저기 큰소나무 아래 흰 눈밭에 멈춰서 있는 게 토끼가? 노루가?”
“어디? 난 안 보이는데.”
“그래? 가까이 가보자.”
구철이와 신도가 논두렁을 타고 눈밭 가운데 못 봤던 바위 같은 게 덩그렇게 서 있는 논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개다!”
석구가 언제 왔는지, 소리쳤다. 토끼가 먹이를 찾아 산에서 내려와 눈밭에 빠져 도망치지 못하듯, 개 두 마리가 엉덩이를 맞붙여 암놈은 동네로 석구 집의 수캐는 큰소나무 아래로 머리를 돌려 서로 팽팽하게 끌어당기며 멈춰서 있었다. 누가 이기나 줄다리기 싸움을 하듯 힘쓰고 있는 개들을 석구가 큰소리로 나무랐지만, 개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힘을 썼는지 되러 꼼짝도 못 하고 혓바닥을 늘어뜨려 헉헉거렸다. 잠시 지켜보던 석구가 눈을 뭉쳐 끙끙거리는 개에게 던졌다.
“야, 개를 왜 때리노. 데푸게 놔두라.”
석구가 다시 눈을 뭉치자 신도가 말렸다.
“암놈이 우리 집 개를 힘들게 한다 아이가.”
“우리 그만 가서 공이나 차자. 지들끼리 놀게 놔두고.”
석구가 말없이 눈물을 글썽이며 집을 향해 논들을 달렸다. 수캐도 덩달아 힘을 주자 암놈이 깨갱거리며 끌려갔다.
그날 오후 늦게 공놀이가 시작됐다. 그러나 애어른같이 제대로 공도 차기 전에 다툼이 났다. 어른들이야 먹고사는 일로 싸운다지만, 심심풀이 재미로 놀다 욕심이 목에까지 찬 어른같이 싸웠다.
“소금 묵은 놈이 물 씬다고, 야로 묵고 그따위 호각을 부나? 됐다. 때리 치와라! 누가 옳고 그런지 똑바로 따져 심판을 보라고 호각을 믿고 맡겠는데 믿은 내가 붕신이지.”
“오해다. 니들도 끼리끼리 마이 해 묵었다 아이가?”
“니들이 해 묵었다고 니 눈에는 남들도 지 같은 도둑놈으로 보이나. 구슬이나 고구마 주는 놈 편들라고 니 목에 호각을 걸어 준 게 아니다. 개폼 잡고 뻐기지 말고 당장 내놔라. 심판 본다고 챙겨주었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지가 대장 나린 줄 착각하고 우릴 개돼지로 보잖아. 새끼가 지 주머니에 구슬 들어오고 입에 떡고물 떨어지는 것 봐서 편을 들어야. 한 치도 못 되는 속을 몰라본 우리가 밤피 쪼다다.”
“그래 맞다. 머든 공평하게 봐야지, 자기 뒤에 줄 서면 봐주고, 그렇게 편파적이면 심판이 아니라 소판 개판인 기라.”
“…”
우여곡절 끝에 나무 내기 축구 시합을 시작한 지 얼마 못 가서 공이 논바닥에 멈췄다. 우리는 두 편으로 나뉘어 입씨름을 했다. 잠시 심판을 본 석구가 눈만 껌뻑 그렸다. 신도의 일장 설교를 듣고도 춘식이 석구 뒤로 갔다. 자연스럽게 누가 석구 패거리인지 밝혀졌다. 석구 편은 나란히 서서 하나같이 신도의 말을 못 알아듣는 척하며 주머니 속의 구슬을 자기 고추 만지듯 주물럭거리며 짝다리를 짚고 한쪽 다리를 떨었다.
“뼈대 골격도 없는 가분다리 같은 놈, 남의 피를 빨기만 하고 똥도 안 싸고 배 터져 죽을 놈. 심판을 본다고 했으면 양심대로 봐야지. 지 꼴리는 대로 호각을 불어야.”
“니는 무신 앙심을 품고 그런 말을 하노. 니는 내 편 아이가?”
“내 편 네 편이 어딨노? 어제는 네 편이었지만, 오늘은 아이다.”
“새끼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노. 앞으로 내 덕 볼 일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형들이 다 내 편인 것 니는 아나? 인간성 더럽게 굴지 마라.”
“머라꼬. 사돈 남 말하고 있네. 니는 인간성이 뭔지는 알고 씨부리나.”
“인간이 사람 아이가. 인간성은 사람성 이고, 개는 개성이다. 바보야, 그도 모리나.”
“그래. 니는 참 좋은 사람성을 가졌다 치자. 그런데 박 명이 형은 이제 힘 못 쓴다. 빨리 꿈 깨라. 차라리 너거 윗집 사는 순실이 누나 한데 꼬라 받치라.”
“그래도 옛날에는 난 사람…, 지금은 마 그래도.”
“더더, 더듬지 말고 말해라. 누가 거짓말이고 참말인지, 뭐가 옳고 안 옳고도 모리는 칠푼이 말이가.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 못하는 놈은 욕심도 많아 오로지 지 호주무이에 구슬 들어오고 지 입술에 떡고물이라도 떨아 주는 쪽에 붙어 옳거니 편들어주는 문디 양아치 새끼다.”
말싸움은 끝이 없었다. 꼭 어른들 같았다. 듣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났다. 간혹 알쏭달쏭한 말에서 끼어들어 물어보고 싶어도 입이 선 듯 열리지 않았다. 굿만 보고 떡만 먹듯, 가만히 지켜보며 구경만 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김 시민과 유 어준이 앞으로 나섰다.
“네 뒤를 잘 봐라. 누가 니 뒤에 줄 섰는지. 이제 다시 뭉쳐도 안 되는 기라.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우리가 아직도 바보, 개돼지 새낀 줄 아나. 우리도 다 생각이 있다. 우린 닭대가리 아이다. 하나둘, 하나둘…, 맨날 둘까지만 세는 부엉이 새끼도 아니다. 니 눈에는 우리가 니 발가락 새 낀 때만치도 안 보이나?”
“그래. 니 말이 맞는지 내 말이 맞는지 검새 한 번 해봐라. 소나무 대나무 잡고 춤 치며 비나이다 비나이다 오방정 떨지 말고, 단디 해라.”
“검새는 또 뭤꼬? 하늘을 날아가며 내 머리 위에 똥 싸는 새 말이가?”
“그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장육부가 검은 새를 검새라 안 카나.”
“들에 썩은 시체나 파먹고 사는 까마귀 말이가?”
“말싸움은 이제 그만해라. 알맹이 없는 껍데기 말만 뻔디기리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한 번 싸워 보자?”
“알았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두가 입을 앙다물고 손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처음에는 눈을 뭉쳐 서로 상대편 얼굴이며 머리에 던졌다. 눈을 던지고 막고, 쫓고 쫓기는 눈싸움이었다. 그러다 이내 눈밭에서 둘씩 부둥켜안고 여기저기서 뒹굴었다. 차가운 눈을 한 움큼 집어 상대의 옷 속에 밀어 넣고, 얼굴에 뭉개기도 했다. 그리고 주먹질도 주고받았다. 동네 개 싸움질 같았다.
“야, 코피다!”
“졌나?”
“졌다!”
그렇게 여러 싸움판이 동시에 멈췄다. 석구가 논바닥의 하얀 눈을 한 움큼 집어 코밑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눈밭 여기저기 붉은 피가 흩뿌려졌다. 덕배가 핏자국을 발로 차 눈으로 덮었다. 우리는 말없이 각자 집으로 흩어졌다. 볏짚 공이 논 가운데 덩그렇게 혼자 남아 밤을 새웠다.
넌 다 계획이 있었구나
우리 편은 동네 뒤를 감싸고 있는 대밭에서 찐 대를 공놀이 하는 부엉이 배미 논으로 끌고 왔다. 석구와 신도가 당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베어 낭떠러지에 굴렀고, 골태와 옴보가 길 아래에서 받아 논으로 옮겼다. 겨울 동안 소 식량인 볏짚은 구경 나오면서 집집마다 한 아름씩 안고 나왔다.
“대낄로 짓자.”
얼기설기 역은 대나무 뭉치를 잡고 석구가 웃으며 소리쳤다. 무당이 꽉 잡은 대나무가 징 소리에 파르르 떨 듯, 석구가 잡은 대나무가 흔들리자 신도가 석구 등을 밀어 넘어지지 않도록 거들었다.
“그래. 대나무를 빳빳이 세우고, 짚단을 삐잉 한 바퀴 둘러라. 잘한다. 솔잎이 위로 가게 소나무를 세워라. 소나무 둘레에 다시 짚단을 둘러….”
응달 할매가 뭘 잔뜩 싼 보따리를 가슴에 안고서 손짓을 하며 연신 주문했다. 달집 가운데 대나무 꼭대기에 매달은 가오리연과 헝겊들이 바람에 건들건들 날렸다. 달집이 모양을 갖춰가자 할매가 중얼거리며 보따리를 풀었다. 보따리에서 꺼낸 것들을 남들이 못 보게 집단을 헤집어 소나무 사이사이에 끼워 넣었다. 할매는 동지죽 새알 만들 듯 두 손을 달달 비비며 달집을 맴돌았다.
고깔 모양의 달집은 덩치가 개울 옆의 정자보다 컸다. 늦게 구경 나온 사람들은 감나무 아래 논두렁에 줄을 서 달집을 지켜봤다.
“달이 뜨면 불을 지를 기다. 어디서 달이 뜨는지 잘 봐라.”
“작년보다 훨씬 좋다. 지난해 액운도 태워 쫓고, 오는 가실 풍년도 빌고, 아푸지 말고… 공부도 잘하게 빌어라.”
“하모, 용구는 하나 더 보태 용열이 되고, 석구도 하나 더 보태 석열이 되고, 신도 니도 뭘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서도 이제 노총각으로 올해는 장갤랑 꼬옥 가거라. 가시나들은 시집을 잘도 가는데 머시마들은 장개를 왜 못 가노. 붕알이 딸랑거리고 고추가 닳도록 정성 끝 빌어라.”
웃음소리가 달집을 돌아 논두렁을 타고 당산 솔밭으로 치달았다. 어둑어둑한 밤, 나도 빨리 달이 환하게 웃으며 당산 꼭대기에 차오르기를 바랐다. 그때였다.
“달이다. 저 봐라. 엄청나게 크다.”
석구 손이 가리키는 곳을 우르르 바라봤다. 소나무 사이로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달은 순식간에 둥글넓적한 얼굴로 커졌고, 눈밭에 달빛을 쏟아부었다.
“어디고? 안 보인다. 거짓말 마라.”
“나는 보이는데. 눈이 삐었나. 저기, 소나무 사이를 봐라.”
“맴이 뱀 똬리 틀듯 꼬이면 해가 떠도 밤이라 우긴다 아이가.”
“앞으로 석구 니는 석열이라 불러야 되나?”
“석구나 석열이나, 다를 게 뭤고. 구층 돌탑과 십층 돌탑은 확실히 다르지만. 니 그만 석구보다는 돌열, 십층 석탑이 어떠노?”
“어라. 니 지금 죽을래.”
“징~.”
그때 징이 한 번 크게 울었다. 비로소 할매가 달집에 불을 지폈다. 나도 할매가 붙인 불을 퍼 달집 소나무 사이 짚단에 옮겼다. 뒤이어 꽹과리 치는 덕배 형을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달집을 빙글빙글 돌았다. 할매가 짚단에 묻은 주머니가 먼지 궁금했다. 징~ 징~ 징…, 징이 느리게 소리 질렀다. 동네로 곧장 줄달음쳐 뒷산에 부딪힌 징 소리가 다시 당산 모퉁이를 돌아와 달집이 불타고 있는 논들을 거처 큰소나무를 지나 들판으로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징이 앞장서고 꽹과리가 뒤따라 달집을 돌았다. 동네 개들도 달집을 빙빙 돌았다. 짚단이 탄 불꽃은 춤을 추듯 하늘을 날다가 곧 희뿌연 재가 되어 눈발처럼 날려 다시 논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눈 깜작할 사이에, 불기둥이 연을 매단 대나무 꼭대기로 치솟았다. 불이 대나무에 옮아 붙자, 대나무 마디가 뻥뻥 소리 내 터지며 깨알같이 작은 검붉은 불똥이 바람을 타고 무리 지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붉게 잘 익은 앵두 같은 불똥이 안산 당산나무 꼭대기를 뱁새 떼같이 넘었다. 동네 액운을 한꺼번에 태웠듯 큼직한 불똥은 당산 소나무에 걸려 솔밭에 앉아 산불을 낼 것만 같았다. 어른들도 손을 가슴에 모으고 숨죽이며 당산 먼당을 힘겹게 넘는 검붉은 불똥을 지켜만 봤다. 징소리도 멈췄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달집 가운데 대나무가 불구덩이에 주저앉으며 불꽃 알갱이가 뭉텅뭉텅 치솟아 하늘 높이 날았다. 먼먼 하늘로 올라간 불똥은, 마치 별이 무리 지어 밤새 하늘을 떠돌다 새벽녘에 어디론가 떠나듯 훌훌 사라졌다. 나는 다시 별밤 하늘을 헤아렸다. 땅의 소원들이 달집 불기둥을 타고 나비같이 날아올라 별이 된 듯,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 우물만 한 하늘에서 별이 총총 빛났다.
그때 꺼져가던 불구덩이에서 대나무 마디 튀는 소리가 따발총 쏘듯 났다. 알밤이 소죽 솥 아궁이 숯불에서 연달아 튀듯, 다시 온통 불꽃 범벅이 됐다. 사람들이 옷에 불꽃이 옮아 붙을 것만 같아 소 뒷걸음치듯이 뒤로 엉금엉금 몇 발짝씩 물러났다. 달집 불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가을 저녁노을같이 당산 앞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아가 안 보인다. 석구 이놈아, 어디 갔노?”
까만 재만 남은 달집 근방 하얀 눈밭을 검은 그림자가 달빛 아래 내달렸다. 큰소나무가 점점 크게 소리 냈다. 지난 설 연싸움 때 큰소나무 가지에 걸린 연이 도망치려는 듯 꼬리가 바람을 타고 발버둥 쳤다. 당산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후드득, 구천이 돌담을 넘을 때 나는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졌다.
“석구야, 올해는 이름을 바꿔 부르마.”
“당장 이리 나와라. 어미 속 씩이는… 세상천지, 이런 법이 없데이.”
“니가 마음을 똑바로 묵어야 니도 살고 나도 산데이.”
동네 앞 논들에서 아들을 부르는 소리가 골목골목을 날아다녔다.
“석열아, 석열아….”
달이 큰소나무 솔잎 속에 잠시 숨었다. 왜정 때 공출한 안산 당산나무 송진을 뺀 곰보 자국 속 깊숙이 박혔던 징 소리가 어둠 속에 울었다. 큰소나무도 울었다.
보름달이 큰소나무를 지나 서쪽 소룡산을 넘기 위해 하늘을 빠르게 미끄러졌다. 달빛이 힘을 잃자 별이 하늘 가장자리에서 스멀스멀 빛났다. 해가 뜨기를 바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