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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하나님의 시공간> -고성준-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때”, 또는 “하나님의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흐르는 ‘카이로스 시공간’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다. 보이는 세계만큼이나 실재하며, 보이는 세계만큼이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님의 시공간’이다. 이 카이로스의 시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인 시공간만큼이나 ‘원리와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곳이다.
PART 1. 기초
인간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동시에 속한 존재다. 보이는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보이는 세계의 원리를 이해해야 하듯이, 영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려면 영적인 세계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1장 실체와 그림자
성경은 두 세계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즉 물질세계와 영적 세계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두 세계의 차별적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보이는 것은 유한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고린도후서 4장18절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이야기한다. 보이는 것은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임시적인 것이다. 유한하다, 보이는 세계의 모든 것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는 유효 기간이 없다. 썩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하다. 그리고 이 두 세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모형과 그림자’다. 이 땅에서의 ‘나의 삶’은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있는 나’의 그림자이다. ‘나’는 이 땅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도 존재한다. 두 세계에 속한 존재인 우리는, 이 땅에 보이는 그림자를 옮기려 하지 말고, 하늘에 있는 본체를 움직여야 한다. 영적인 세계에 있는 본체를 옮기는 것이 바로 기도다! 영적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기도’인데, 기도에 영적인 것을 움직일 힘을 부여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비밀이 있다. 믿음의 영적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것이 보이는 세계에서 실체가 되게 한다. 복을 어디에 준비해두셨는가? 하늘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을 어떻게 보이는 세계로 가지고 올 수 있을까? 그렇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가져온다. 믿음은 하늘에 있는 것을 땅의 실체가 되게 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림자가 아니라 ‘본체’를 움직인다.
2장 인간, 두 세계에 낀 존재
인간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이 두 세계에 모두 속한 존재다.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두 세계에 모두 속한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하나님의 영을 불어넣으셨다.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인간의 신체는 흙을 이루는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이는 세상에 속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안에는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영이 있다. 인간은 영적인 세계에 속했다. 다른 어떤 피조물도 이렇게 지음 받지 않았다. 두 세계에 동시에 속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는 없다.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은 흙에 속했지만 동시에 영에도 속했기에 불멸의 존재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몸을 입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의 몸을 입고 그렇게 될 것이다. 인간은 소멸하지 않는다. 영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이다.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것은 ‘육과 혼’뿐 아니라 ‘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은 구체적으로 어떤 기능을 할까? 첫째, 인간의 영은 영적 세계와 소통하는 기능을 한다. 이 ‘영적 커뮤니케이션’의 기능으로 인해 인간의 영은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 외에 다른 영적 존재와도 소통할 수 있다. 둘째, 인간의 영은 단지 소통할 뿐 아니라, 마치 ‘그릇’과도 같아서 다른 영적인 존재를 인간의 영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영은 성령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세상의 영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인 세계-특히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을까?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기에 눈이나 귀 같은 오감을 가지고는 소통할 수 없다. 오감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을까? 중국의 위대한 크리스천이었던 워치만 니는 영적 소통의 중요한 두 가지 수단으로 ‘직관’과 ‘양심’을 든다. (1) 직관, 직관이란 말 그대로 직관이다. 오감으로 지각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우리 안에 직접 부어지는 계시적인 지식이다. (2) 양심, 영적인 소통의 두 번째 방법은 양심이다. 양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났을 때 그것을 교정하여 돌이키게 하는 역할을 하는 일종의 나침반이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양심이라는 영의 기능을 통해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양심도 ‘선한 양심’이 있고, ‘화인 맞은 양심’이 있다. 죄는 우리 영에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죄가 반복적으로 우리 삶 속에 들어오면 양심이 무뎌진다. 그래서 나중에는 ‘화인 맞은 양심’, 감각을 상실한 양심이 되어버린다. 성경은 “너희는 선한 양심, 청결한 양심을 지키기에 힘쓰라”고 권면한다. (3) 말씀-하나님의 계시, 직관과 양심 외에도 성경이 이야기하는 중요한 영적 소통 수단중의 하나가 말씀이다. 성경을 읽고 깨닫는 것은 혼의 작용이 아니라 영의 작용이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행위는 혼의 행위가 아니라 영의 행위다. 보이는 세계와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소통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느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영적인 행위다. (4) 믿음, 마지막 네 번째 영적인 소통 방법은 ‘믿음’이다. 믿음에는 놀라운 비밀이 있다. 분명 우리는 영적인 세계나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그런데 믿음은 그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같이 해준다. 믿음이야말로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며, 영적인 소통을 열어주는 열쇠다.
3장 영, 혼, 육의 질서
인간의 영과 혼과 육은 독립적으로 따로따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원래 계획하신 창조의 질서다. 우리 안에 이 질서가 유지될 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세기 1장 28절의 질서가 우리의 삶 속에서 확장되어 간다. 우리의 혼은 ‘영-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지배 아래 순종하도록 지음받았다. 성령님의 다스리심 아래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성령님의 보호하심 아래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들을 느끼고, 성령님의 강권하심 아래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행하는 자, 이것이 회복된 하나님의 아들들의 정상적인 모습이다.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질서가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혼(생각)은 영(성령)의 다스림에 잘 복종하는가? 당신은 마땅히 생각해야 할 바만 생각하는가?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혼은 생가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마음대로 생각하고, 느끼지 말아야 할 것에서 마음대로 쾌락을 느끼며, 감정에 따라 결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함부로 결정한다. 이것이 타락한 내 몸의 현실이다. 질서대로 안 된다. 분명히 구원받았는데 왜 그럴까? 영이 약해서 그렇다.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영이 약한 것이다. 영이 강해져야 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성령 충만이라 부른다. 영혼육의 강도에 따라 사람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육이 강한 사람이 있고, 혼이 강한 사람이 있으며, 영이 강한 사람도 있다. 첫째, 육이 강한 사람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은 마치 짐승처럼 육체의 욕구에 따라 산다. 짐승들은 이성적인 생각보다는 육의 욕구, 본능에 충실하다. 둘째, 혼이 강한 사람, ‘혼에 속한 사람’이 있다. 혼에 속한 사람의 특징은 끊임없이 ‘꾀’를 낸다는 것이다. 혼에 속한 사람은 영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꾀, 정신의 계략, 즉 혼의 생각에 따라 움직인다.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시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최선’인지”를 묻는다. 혼에 속한 사람의 대표적인 특징이 있다. ①자기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다. ‘자기에 대한 강한 믿음’은 자존심이 강한 것, 고집이 센 것, 교만한 것, 지나친 자신감 등을 말한다. ②자기보호 본능이 강하다. ‘자기보호’란 말 그대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③자기애가 강하다. 셋째, 영이 강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영에 의해 움직인다. 혼과 육이 뭐라고 해도, 영에 의해 움직인다. 영이 강하다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강하신 것을 의미한다. 영에 속한 사람은 영으로써 육의 행실을 죽이며,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믿는다. 성령을 따라 산다. 이런 사람의 삶의 모습은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경건하고 무엇에든지 옳고 무엇에든지 정결하고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다. 영이 우리를 지배할 때, 우리 삶은 이렇게 된다. 이것이 영에 속한 사람의 모습이다.
PART 2. 원리
2부에서는 고린도전서를 통해 영적 세계의 원리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적은 “영적 원리”를 담은 책이다. 고린도전서를 통해 영적 세계를 살아갈 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영적 원리들에 대해 살펴보자.
원리1. 영은 하나 되게 하고 육은 나눈다.
고린도전서에서 이야기하는 첫 번째 영적 세계의 원리는 “영은 하나 되게 하고 육은 나눈다.”는 것이다. 영은 마치 물방울 같다. 근처에 물방울들이 있으면 어느 순간 스르르 합쳐져서 하나가 되듯이, 영은 서로 끌어당겨 하나가 되게 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육은 다르다. 육은 분리하고 고립시키고 나누어지게 한다.
원리2. 영은 믿는 것이고 혼은 이해하는 것이다.
두 번째 원리는 영은 믿는 것이고, 혼은 이해하는 것이라는 원리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은 “이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 몸은 ‘이 땅’에 속했다. 지혜란 ‘이 땅의 것을 이해하는 기능’이다. 지혜는 이 땅의 것을 이해하는 기능이지, 영적인 것을 이해하는 기능이 아니다. 영적인 것은 혼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믿어야 한다. 이것이 원리다.
원리3. 육이 약해야 영적인 삶을 산다.
세 번째 원리는 “육이 약해야 영적인 삶을 산다.”는 것이다. 육이 약하다는 것은 몸이 허약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혼’ 즉, 자아가 약한 것을 말한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육’으로 살게 되고, 자아가 약한 사람(자아가 죽은 사람)은 ‘영’으로 살게 된다,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혼과 육’, 즉 ‘자아’가 성령 안에서 부인되고 약해져야 한다.
원리4. 영은 갈망이다.
네 번째 영적인 원리는 ‘영과 갈망’에 대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은 인간이 세상의 영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영’외에도 다른 많은 영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인간의 영은 독특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다른 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다른 영적인 존재-천사나 귀신들에서는 볼 수 없는 인간만의 특징인데, 아마도 ‘육체 안에 거하는 영’이라는 인간 존재의 독특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영으로만 존재하는 천사나 마귀는 다른 영을 받아들일 수 없다. 성경에 그런 기록이나 표현이 전혀 없다. 오직 ‘육체 안에 거하는 영’이라는 독특한 존재 방식을 가진 인간에게만 다른 영이 거할 수 있는 듯하다. 영은 “사람의 가장 깊은 것에 거하며,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근원적인 생명이다.” 영의 중요한 속성은 그것이 우리 안에 무언가를 향한 ‘갈망’을 준다는 것이다. 갈망이 있을 때 사람은 그 갈망을 향해 움직이게 된다. 영은 갈망하는 것을 주목하고, 찾고,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영은 ‘집착’이나 ‘중독’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음란의 영이다. 이 영은 ‘성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일으킨다.
물질의 영, 맘몬의 영은? 돈과 재물을 향한 갈망을 일으킨다. 권력의 영은? 권력을 향한 갈망을 일으키고, 그래서 권력을 잡는 것을 인생의 의미와 만족으로 여기게 한다. 하나님의 영도, 세상의 영도, 그것을 받는 열쇠는 당신의 ‘의지’다. 인간은 의지적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도 있고, 세상의 영을 받을 수도 있다. ‘세상의 영’이란 앞서 이야기했던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영들’, 즉 물질, 권력, 음란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 영들을 세상의 영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영이 일으키는 갈망들이 모두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에는 특징 있는데, 영이 ‘혼과 육’을 지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든, 세상의 영이든 이 속성은 같다. 영은 주목하여 보게 한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주목하여 보게 되고, 세상의 영을 받으면 세상의 것을 주목하여 보게 되고, 게임의 영을 받으면 게임을 주목하여 보게 된다. ‘영’은 ‘보는 것’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세상의 영이든, 하나님의 영이든, 영이 어떻게 우리 안에 들어올까? ‘보는 것’을 통해 들어온다. 어떻게 ‘게임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는가? 게임으로 봄으로! 어떻게 ‘음란의 영’에 사로잡히는가? 음란물을 봄으로! 이것이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식이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원한다면,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사소한 틈만 있어도 영은 물방울처럼 비집고 들어와 우리 마음에 역사한다. 에베소서는 악한 영을 상대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권면한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보호구를 착용하라는 것이다.
원리5. 도덕과 윤리의 기준은 영에 속했다.
다섯 번째 원리는 “도덕과 윤리의 궁극적인 기준은 영에 속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인가? 무엇이 해야 할 일이고 무엇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인가? 이 판단의 기준, 도덕과 윤리의 기준은 혼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도덕적 절대 기준이란 없다. 영은 인간에게 마땅히 살아갈 길 - 도덕과 윤리를 제공함으로, 인간의 삶을 의미 있고 질서 있게 한다.
원리6. 시기와 분쟁은 육에 속한 것이다.
여섯 번째 원리는 “시기와 분쟁은 육에 속했다.”는 것이다. 영에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의 근본을 이루는 속성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은 시기하지 않고, 영에는 분쟁이 없다. 그러나 육은 다르다. 육은 자기중심적이고, 육은 시기하며, 육은 경쟁한다. 육에는 너와 나의 구분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내가 밥을 먹으면 내 육이 배부르지, 저 사람의 육이 배부르지 않다. 육은 구분이 명확하다. 육은 나누어지게 한다. 그래서 육에는 ‘시기와 분쟁’이 있다.
원리7. 영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인다.
일곱 번째 원리는 “영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이다. 육은 자랑하고 싶어 한다. 높아지고 싶어 한다. 자기 자랑하는 사람은 육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구하지 않는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만 높인다. 하나님이 높아지시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드러나시면 즐거워한다. 그것이 영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드러나거나 자기가 높아지면 불편해하고 그 자리를 피한다. 자기가 높아지는 것에는 관심 자체가 없다. 그러나 육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다. 자기의 공로를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거나 자신이 한 일이 무시당하면 억울해하고 분노한다. 하나님이 무시당하거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분노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육의 특징이다.
원리8. 우리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육체는 독특해서 다른 영이 거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거룩하고 특별한 장소'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성전에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거룩‘이다. 성경을 찾아보면 ’하나님의 성전‘과 가장 많이 붙어 다니는 단어가 바로 ’거룩‘이다. 하나님은 죄가 있는 곳에는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몸은 거룩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우리 몸)을 멸하면(더럽히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멸하신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혼과 육‘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영적으로 중요하다.
PART 3. 두 종류의 시공간
3부에서 다루려고 하는 영적 원리들은 두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카이로스의 시공간’과 ‘크로노스의 시공간’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두 세계에 ‘낀 존재’이기에 당연히 두 개의 시공간, 하늘과 땅,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영적 세계와 자연 세계, 카이로스의 시공간과 크로노스의 시공간을 함께 살아간다.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보이는 자연 세계만큼이나 실제적이며 ‘실재’하는 세계다. 카이로스의 시공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하나님의 보좌와 그분의 능력이 있는 세계 속으로!
원리9. 카이로스의 시공간과 크로노스의 시공간
하나님은 두 세계를 창조하셨다. 첫째는 보이는 세계-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 시공간, 즉 자연 세계이고, 둘째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세계, 하나님이 계시고 천사들과 악한 영들이 거하는 영적인 시공간이다. 영적인 세계는 물리적 세계만큼이나 실재하는 세계이며, 실재하는 시공간이다. 성경은 두 종류의 시간을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크로노스이고, 둘째는 카이로스다. 크로노스란 흔히 말하는 물리적 시간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물리적인 시공간을 흐르는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영적인’ 시간이다. 카이로스의 시공간 속에는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시공간의 근원은 ‘만유인력’이다. 뉴턴이 발견했고, 아이슈타인이 새롭게 규정했던 시공간의 본질은 만유인력에 있다. 현대 물리학의 발견에 의하면, 크로노스의 시공간은 만유인력, 즉 중력이 만들어 내는 장, 즉 중력장이다. 좀 단순화해서 이야기하면, 만유인력이라는 중력의 힘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낸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은 ‘하나님의 능력이 펼쳐지는 장이다.’ 그곳에서는 불가능을 모르는 하나님의 능력이 편만하다. 하나님의 의지적 능력이 제한 없이 펼쳐진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다. 크로노스의 시공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크로노스의 시공간에서 죽음이란 되돌릴 수 없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시공간에는 이런 제약이 없다. 하나님의 능력, 불가능을 모르는 무소불위의 능력이 제약 없이 펼쳐진다. 크로노스 시공간의 본질이 중력이 만들어내는 중력장이라면, 카이로스 시공간의 본질은 ‘하나님의 능력’이 만들어내는 능력장이다.
원리10. 인간-위대한 게이트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크로노스의 시공산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 있다. 인간은 육체뿐 아니라 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두 세계에 낀 유일한 존재다. 그렇기에 인간 외에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시공간을 연결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접촉점 없이 평행을 그리는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크로노스의 시공간을 터치하며 흘러들어올 수 있는데, 그것은 언제나 그 통로가 되는 존재, 인간을 통해서다! 바로 당신이 카이로스의 시공간을 이 땅으로 가져오는 하늘의 문이다! 그렇다면 이 하늘의 문은 어떻게 작동할까? 카이로스의 시공간은 어떻게 크로노스의 시공간으로 들어올까? 첫 번째 열쇠는 ‘갈망하는 기도’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은, 성도들이 간절한 갈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열린다. 하늘의 문을 여는 두 번째 열쇠는 ‘거룩함’이다. 세 번째 열쇠는 ‘믿음’이다. 믿음은 하늘을 여는 강력한 열쇠다. 아무리 갈망이 있고 거룩함이 있어도, 믿음이 없이는 하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크로노스의 시공간으로 들어올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카이로스의 시공간의 영적인 임팩트가 크로노스의 시공산 속에 가해진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은 ‘하나님의 의지’가 지배하고 펼쳐지는 공간이이며, 그곳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이 있다.
원리11. When heaven touches earth.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크로노스의 시공간 안으로 들어올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의 임재’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받을 때, 스데반이 순교할 때, 바울에게 하늘이 열릴 때-하늘이 열리는 순간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다! 하늘이 열릴 때 일어나는 두 번째 현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이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을 지날 때 하늘이 열렸다. 하늘이 열리고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크로노스의 시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놀랍게도 거기에 예수께서 계셨다. 그리고 ‘말씀’이 임했다. 하늘이 열릴 때 일어나는 현상은 말씀이 임하는 것이다. 셋째, 하늘이 열릴 때 그곳에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있다. 순교 현장에서 스데반에게 하늘이 열린다. 스데반이 하나님의 영광과 그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 그리고 그곳에 하늘로부터 위로와 격려가 임한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열릴 때 일어나는 세 번째 현상은 하늘로부터 위로와 격려가 임하는 것이다. 또한 하늘이 열릴 때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함께 열린다. 애굽을 빠져나와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이 열리고 그곳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임했다. 이 기둥이 어디서 왔을까? 그렇다 하늘에서 왔다! 그것은 카이로스의 시공간에 속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었다. 그리고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인도했다. 카이로스의 시공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대면하게 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다다랐을 때 그곳에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이 주어졌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에 대한 회개가 있는 곳이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흘러들어올 때, 그곳에는 또한 ‘하나님의 승리’가 있다! 여호수아가 아모리 사람을 치던 때, 하나님께서 태양을 기브온 위에 멈추게 하시고 달도 아얄론 골짜기에 멈추게 하셨다. 왜? 승리케 하시려고!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임할 때 그곳에 ‘치유와 기적’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기 때문이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크로노스의 시공간으로 침투해 들어올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성경은 그것에 대해 수도 없이 기록하고 있다.
원리12. 영이 움직일 때 vs 혼이 움직일 때
카이로스와 크로노스의 시공간을 연결하는 문이 ‘사람’이기에, 그 문을 여는 열쇠는 ‘인격적인 것’, 즉 우리의 마음, 우리의 태도이다. 우리 안에는 두 종류의 마음이 있다. ‘영을 움직이는 마음’과 ‘혼을 움직이는 마음’이다. ‘믿음’이 있으면 그 마음은 분명 우리 ‘영’을 움직인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은, 그 문을 여는 사람의 마음이 ‘영을 움직이는’ 마음일 때 열린다. 이번 장에서는 영을 움직이는 생각과 태도가 무엇인지, 반대로 혼을 움직이는 생각과 태도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이 태도에 의해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할 것이다. 첫째, 두려움 vs 믿음 혼을 움직이는 태도와 생각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영을 움직이지 못한다. 두려워서 하는 행동은 그것이 무엇이든 크로노스의 시공간 속에서만 맴돌지, 절대 카이로스의 시공간을 움직이지 못한다. 두려움은 우리를 크로노스의 시공산 속에 붙잡아 놓는다. 두려움은 우리의 영이 아니라 ‘혼’을 활성화시킨다. 두려움이 들면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혼이 부지런히 움직이지 영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두려움으로 움직이는 사람은 ‘혼의 사람’이 되지 ‘영의 사람’이 되지 못한다. 두려움은 또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린다. ‘영’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극심한 두려움이 ‘육과 혼’까지도 마비시켜버린다. 골리앗이 나타났다. 골리앗은 두려움이다. 골리앗이라고 하는 두려움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잠식해버렸다. 이 블레셋 사람이 무려 40일을 밤낮으로 찾아와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욕보이는데도, 움직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얼음이 되어버렸다. 그렇다. 두려움 때문이다. 두려움은 영을 액티베이트 하지 못할 뿐 아니라, 혼과 육까지 마비시켜버린다. 영을 움직이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다. 두려움을 넘어서는 믿음이 영을 움직인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나는 두려울 것이 없다는 믿음! “내가 너와 반드시 함께하리라!” 이 믿음이 동기가 될 때 영이 움직인다. 하늘의 문이 열린다. ‘영이 움직이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이다.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몰아내야 한다. 믿음이 실재가 되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한다. 마음 안에서 믿음이 실재가 될 때,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크로노스의 시공간 안에서 실재가 된다. 혼을 움직이는 두 번째 태도와 생각은 ‘불안과 염려’이다. 두려움처럼 불안과 염려도 영이 아닌 혼을 움직인다.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불안과 염려는 ‘영’이 아니라 우리의 ‘혼’을 움직인다. 그래서 불안과 염려가 계속되면 어떠한 영적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셔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셋째, 혼을 움직이는 태도와 생각은 ‘분노와 미움’이다. 반면 영을 움직이는 태도와 생각은 ‘긍휼과 사랑’이다. 분노와 미움의 동기에서 행해지는 일은, 그것이 아무리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어도 영을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는 이 땅의 불의를 보며 분노한다. 악한 사람들을 보며 미워한다. 이 분노와 미움이 ‘에너지’가 되어 무언가를 행한다. 기억하라, 이렇게 행하는 일은 ‘영적인 일’이 될 수 없다. 분노와 미움에는 우리의 육과 혼만 반응하지, 영이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후회하는 마음은 영을 움직일 수 없다. 혼의 생각을 깊게 할 뿐이다. 영을 움직이는 마음은 후회가 아니라 소망과 비전이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에는 후회가 없다. 그렇기에 크로노스의 시공간에 후회가 가득하면, 그곳에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임할 수 없다. 맞지 않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불순종은 영을 움직이지 못한다. 영은 ‘순종’을 통해 액티베이트 된다. 마지막으로 부정적인 생각들에 기초한 기도는 영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한다. 긍정적인 생각에 기초한 기도만이 영을 움직인다. ‘안 될 거야!’, ‘이런 문제가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그 사람이 바뀔까?’, ‘위험하지 않을까?’, ‘재정이 채워질까?’, ‘내가 할 수 있을까?’ 이런 부정적인 생각들은 결코 영을 움직이지 못한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예수께서는 부정적인 것을 입에 담지도 못하게 하셨다! 그런 말은 하지도 말고 생각지도 말라는 것이다. 왜? 영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고 말하라! 괜찮다고 말하라는 것이다. 그 생각이 영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열리고, 이 땅에 하늘의 시공간이 임하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 통로가 되는 사람, 바로 당신 안에 먼저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임해야 한다. 당신 안에 임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와 통치! 그 임재로 인한 평강, 그 통치로 인한 거룩,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긍휼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믿음! 이 카이로스의 시공간이 먼저 그 ‘문’인 당신에게 임할 때, 당신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 이루어질 때, 그때 비로소 당신의 영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그 영이 하늘의 문을 연다. 그리고 당신의 영을 통해 열린 하늘의 문이 당신 주변으로 확장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