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30일 목요일
[김용호] [오전 2:10] 굿모닝~~ 하나님 보시기에 멋진 설 연휴를 위해 화이팅!!!
휘석형제와 통화했습니다. 고통 가운데 시달리면서도 예전과는 달리 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답니다. 실제로 제가 느끼기에도 목소리에서 에너지가 느껴지더군요. 건강한 옛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군요. 축하한다고 했습니다. 환경에 취해 정신없이 사는 건강한 옛사람보다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고통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고자 몸부림치는 건강한 옛사람이 더 바람직한 옛사람이니까요.
신앙생활을 언제 시작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육에 속한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휘석형제 같은 타입에게는 무의미한 일이니까요. 신앙생활을 하든 안 하든 결국 실존의 벽에 부딪힐 때부터 본론이 시작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했더니 그때 절대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면 교회에 나오게 될 것 같다고 하더군요. 잘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휘석 형제가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올 때에는 우리 모두가 기쁘게 맞이하게 된 상태에서 올 것 같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답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것 같습니다. 휘석형제가 계속 답을 찾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확인하니 흐뭇했습니다. 물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몸부림이지만 그 정도도 어딥니까.
[김용호] [오전 11:25] 김창구 형제님에게 새해 인사말을 보내고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김용호 : 멋진 명절 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모든 부분에서 진정한 답을 찾으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창구 : 감사합니다. 진정한 답. 찾고 또 찾아도, 늘 답은 피하고 찾아와 주지 않네요. 하루는 그게 답이었는데 다른 하루는 그 답이 아닌 것 같고, 이 답이다 싶으면 아니기를 바라는 나를 봅니다. 진정한 답, 끊임없이 찾으면 찾으려나요.
김용호 : 죽을 때까지 찾는 것이 진정 살아볼만한 참된 삶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성경의 더 깊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이 다 이루었다는 것이 아니고 푯대를 향해 달려갈 뿐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 이루어진 듯 기뻐하고 있는 크리스찬들을 보면 참 안타깝지요. 내일이면 또 눈물콧물을 쏟을 자들이 말입니다. 진도는 비록 느릴지라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수 있는 푯대를 발견했다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김창구 : 늘 부러운 마음입니다.
김용호 : 그래서 정집사님이나 제가 제발 함께 가자고 형제님 손을 잡아끄는 것입니다.
김창구 : 그래서 답답합니다. 끄는 대로 가지 못하니...
김용호 : 더 세게 끌어볼까요? ^^ 내일부터 갑오년이 시작되니 전봉준처럼 혁명적으로 끌어보겠습니다. 혁명 대열에 강제로 끌어들일게요. 혁명을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은 결국 떠나고 맙니다. 혁명이 없으면 안 될 상황까지 간 사람들만이 끝까지 함께 가게 되지요. 저는 형제님의 상황이 혁명이 절대 필요한 지점까지 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꼭지까지 차야 화산처럼 폭발하게 되지요. 이제 다 무르익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더 머뭇거리시면 강제로 참여시키겠습니다.^^
김창구 : ㅋ.
[정진호] [오후 12:36] 지난주 설교 내용 중 앞선 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고 보여주는 거라는 내용이 와 닿습니다. 보여줄게 없으면 이론으로 끝나는 거니까요. 그래서 오늘 아침도 간절히 기도했네요. 올해는 하나님께 받은 것이 진짜 많아서 그걸 설명해주고 보여주는 제자 되게 해 달라구요. 구원이라는 것이 한마디로 죄인이었던 내가 의인 되는 건데 의인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공허한 말만 난무하는 거니까요. 물론 성경에서 죄인 된 삶이 어떻고 의인의 삶이 어떻다는 건지를 조직신학적으로 더 명확하게 해야 할 거구요. 상대방이 빛으로 나오게 되는 것도 나의 말로는 단지 이해시키는 정도고 설득 당하게 되는 건 결국 의인 된 내 모습을 통해서겠구나 생각했어요.
[김용호] [오후 12:45] 그렇습니다. 죄사함이 하마르티아를 압히메이 받았다는 말의 번역인데 이 압히메이가 덮어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해방의 의미가 큽니다. 즉 지은 죄를 덮어준다는 의미보다는 죄성에서의 해방이라는 의미를 더 크게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조심스럽게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 죄성에서 해방된 실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증인이지요. 확인되지도 않는 죄 용서를 떠들고 다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진호] [오후 12:47] 다 알던 내용이었는데 오늘 새롭게 다가오네요.
[김용호] [오후 12:48] 주류 기독교의 죄사함의 교리는 구약의 속죄 제사의 의미와 마찬가지인데 과연 신약을 그렇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싸르크스, 죄성, 인성에서 실제로 해방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증인이지요. 비록 오락가락하더라도 말입니다. redemption, 구속은 아플뤼트로시스의 번역인데 이 또한 해방의 의미입니다. 이미 저지른 죄에서의 해방이냐, 아니면 올무와 같은 싸르크스, 죄성에서의 해방이냐..... 당연히 싸르크스에서의 해방으로 보아야 합니다. 주류 기독교는 구속과 죄사함을 모두 지은 죄의 용서라는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우리는 존재 차원의 해방으로 보는 것이지요.
메시야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용서하러 오신 분이냐, 아니면 우리를 죄성에서 해방시키러 오신 분이냐....사실 논란거리조차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본질적인 차이로서 선지서에서 이미 예언된 일입니다.
[정진호] [오후 12:56] 지은 죄의 용서는 단지 양심의 가책에서의 해방 정도 아니겠어요?
[김용호] [오후 12:56] 그 효과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유효 기간도 짧구요. 곧 또다시 똑 같은 짓을 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하니까요. 좀비들 사이에서 좀비처럼 살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지요.
예수님처럼 살 것이냐, 아니면 인간처럼 살 것이냐의 갈림길로 내모는 것이 추상과 같은 성경 말씀인 것이지요. 그런데 서구 기독교는 예수님처럼 착한 인간으로 살자는 것... 이게 말이여 막걸리여? ㅎㅎ 보수나 진보나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오류입니다. 착한 것이 무엇이냐에서 세부적으로만 다를 뿐이지요.
[정진호] [오후 1:02] 그 말은 예수님이 착한 인간의 본으로 세상에 왔다고 하는 거네요. 예수님 전에 그런 사람이 과연 없었을까요?
[김용호] [오후 1:04]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머니, 법 없이도 살 분들, 공자 맹자 등등 많지요.
[정진호] [오후 1:04] 인간성으로 치자면 구약의 요셉도 만만치 않잖아요.
[김용호] [오후 1:04] 그렇습니다. 그러니 설교에서 구약의 인물들을 따르자고 그렇게들 소리를 지르는 거지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살자는 주장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구요.
[정진호] [오후 1:10] 성경에서 치밀하게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자기가 내린 답을 성경에서 필요한 내용으로 보강하는 거지요.
[김용호] [오후 1:10] 맞습니다. 결국 선악체계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인간의 선악체계 속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오류지요. 뱀이 참 대단한 놈입니다.
[정진호] [오후 1:16] 그러고 보면 인간의 선이라는 게 행복추구 자유추구 미덕추구 잖아요. 기독교도 행복을 추구하는 기복주의 기독교, 자유를 추구하는 진보기독교, 미덕을 추구하는 도덕주의 기독교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김용호] [오후 1:17] 바로 그렇습니다.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들 세 부류가 각자 입맛대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이지요. 서구 주류 기독교를 물속에 세워진 교회, 좀비들이 만든 기독교라고 규정하는 이유입니다. 물고기 종류에 따라, 좀비 종류에 따라 기독교가 달라집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