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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1926-1932)[3권 합본 1938]
브레이어(Emile Bréhier, 1876—1952)
제7권, 1850년후 19세기, 20세기,788-1021
* 둘째 시대 1890-1930
제8장 앙리 베르그송의 정신주의 - Le spiritualisme d'Henri Bergson 889
1절. 1890년경 철학의 각성- Le réveil de la philosophie vers 1890
1880년경에 통용되었던 철학적 견해들은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이 시기에] 단지 금지들, 부정들, 환원들 만을 보았다. 이것들은 지적 또는 도덕적 존재와 가치를 무화시키고 있었다. 먼저 금지란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의 금지이다. 이 금지란 정신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의 장벽[즉 불가지] 앞에 멈췄고, 이런 사유는 모든 형이상학을 단호하게 물리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정이란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의 비관주의에서 나온 부정이다. 이 부정은 모든 현존[상황]에서 생의 의지라는 똑같은 허망함(vanité) 드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환원이란 뗀(Hippolyte Taine, 1828-1893)의 철학에서 환원이다. 뗀은 심성적인 모든 사실들을 감각으로, 감각을 운동으로 환원하면서, 결국에는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실재성들을 일종의 무한소의 박동(pulsation)으로 분해로 분해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실재성들은 박동 자체로 무한정하게 구성되는 것들이다.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사실(사태)들은 미분적인 박동(또는 진동)들로 해명할 수 있다고 보는 물리적 실증주의를 인정한 것이다 - 베르그송은 이에 반박할 것이다] 이 위의 모든 것에 마주해서, 라슐리에(Jules Lachelier, 1832-1918)와 부트루(Emile Boutroux 1845-1921)의 의연한 사유를 제외하고는, 가녀리고 유약한 유심론이 있었다. 이 유심론은, 신성한 서약들(pia vota, 경건한 맹세들)에서처럼, 여전히 계속하여 의식과 자유의 환원불가능성을 주장하였다. 사람들은[이 부류들은] 환원불가능성을 무매개적 내적 관찰 위에 세웠다[세우고자 했다].
지성은 객관성을 근심하고 있으면서 우주의 통찰로[관점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듯했다. 그 우주의 통찰에서는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실재적 삶에게 부여된 대가와 가치의 모든 것이 이미 무화되고 있었고, 스스로 길을 잃어 실종되고 있는 중이었다. [우주를 파악하는 관점은 이시기에 점점 무의미하고 또한 그 가치를 잃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의식과 도덕성도 그만큼이나 착각에, “생의 거짓말”(mensonges vitaux)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연극과 니이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철학은 인간에게 이 착각들을 빼앗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은 이것은 고발할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이런 극한 귀결의 상황에서 르낭(Ernest Renan 1823-1892)의 정신상태가 도래할 것이다. 르낭은 착각들을 마땅히 고발해야만 하는 것이 진리에 대한 깊은 존경이라고 여기고, 이 존경으로부터 이 강요[당위]자체를 착각으로 다루는 월등한 아이러니로 나아갔다. 그리고 자신은 보수적 정신에 의해, 또는 추문의 단순한 두려움에 의해 거짓짓거리를 행하는 것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것은 지성이 자기 스스로를 삼킨 것이다.
그리고 나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종종 폭력적이고 무질서한 반동들이 나타났고, 이 균형을 그럭저럭 수립하도록 밀고 있는 생명적 본능도 나타났다. 이 때부터 그 당시에 부화하고 있었던 많은 학설들의 심한 비합리주의적인 특성들이 나오게 된다. 말하자면, 브륀티에르(Ferdinand Vincent-de-Paul Marie Brunetière, 1849-1906)의 요란한 선언들이 있는데, 그것은 과학이 파산했고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즉 신앙절대주의와 근대주의 운동이다. 다른 한편 바레스(Maurice Barrès, 1862-1923)의 국가주의이다. 그리고 인종들에 관한 고비노(Joseph Arthur de Gobineau, 1816-1882) 이론들이 독일에서 환호를 받았다. 즉 이런 선언들은 이 때, [입센, 니체, 르낭 등] 같은 정신의 그만큼 많은[다양한] 징후들이었다. 이런 발전[전개]가 낭만주의 운동과 유비적인 것이 없지 않다. 그 발달은 매우 걸출한 문학적 미를 띤 작품들로 낭만주의 운동만큼 풍부하고 혼합적이고, 그 운동만큼 기회적이었다. 그러나 또한 그 운동만큼 너무나 자주 진지함이 부족하거나 또는 협잡(charlatanisme)에 말려들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너무 쉽게 철학을 집단이익에 연결하는 위험에 빠졌다. 그 집단이익이 교회이든, 국가이든, 계급이든. 또한 진리의 탐구를 방어와 공격의 수단으로 형성하려는 위험에 빠졌다.
또한, 우리의 시대[20세기전반]에 까지, 불가지론의 흐름은 있어왔다. 그 흐름은 감정의 요구들과 지성의 요구들 사이에 선택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앙드레 크레송(André Cresson)이 쓴 철학적 사유의 불편함(Le malaise de la pensée philosophique 1905), 검증불가능(L'invérifiable 1920)과 같은 제목들이 의미하는 것도 그러하다. 이 작품들에서 크레송은 각각의 철학자가 자신의 기질에 따라서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양자택일의 필연성을 주장했다. 하나는 실증주의를 따르기를 애쓰거나, 또는 “과학들의 결정론의 암시들을 피하려는 수단을 발견하기” 힘쓰거나 이다. 후자의 경우에 왜냐하면, 그는 결정론들을 영혼의 도덕적 요구에 반대되는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가지론은 우리가 이 장과 다음 장에서 연구할 학설들과 매우 멀러져 있게 된다. [이제 곧] 이 학설들에 덕분에 양자택일[대안]을 해야 하는 필연성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과학적 정신의 가장 강한 성벽들 중의 하나는 생명의 기계론적 이론이었다. 이것은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 이래로 필수불가결한 것 같았다. 그런데 독일에서 드리쉬(Hans Driesch 1867-1941)가 유기체의 철학(Philosophie des Organischen)(2권, 1909, 1921)에서 확정했던 생기론의 재탄생은 이 영역에서 매우 생생한 반작용의 의미를 지닌다. 옮겨심기(transplantation), 유전, 재생, 개체의 과거 전체에 의해 조건 지워진 유기적 행동 등은 기계적 유기체의 이론에 반대로 이루어진 그만큼이나 많은 증거들이었다. 살아있는 존재는 “등전위적(等電位的, équipotentiel) 조화의 체계이며, 다시 말하면, 만일 조직의 일부들을 임의적으로 들어낸다고 하더라도 동일성을 유지하게 조직화된 세포들의 집합이다. 하나의 절대자로서 파악되는 생명의 개념은 우리시대에 많은 학설들의 기초에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 철학자 로스키(Nicolas Lossky 1870-1965)는 직관, 물질, 생명(L'intuition, la matière et la vie 1928)에서 세계의 유기적 개념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모든 탐구들은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학설에 속한다. 그는, 정신을 초대하는 개종(conversion, 전환)의 종(種 l'espèce 새로운 인류)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철학적 사유의 조건들을 변형시켰다. (44PKE)
2절. 베르그송의 학설- La doctrine bergsonienne 891
이 부정적 학설들 중에서, 1870년경부터 프랑스에서 라슐리에(Lachelier, 1832-1918)와 부트루(Boutroux 1845-1921)에서 유심론적 실증주의의 매우 생생한 사유를 제외해야만 했다. 유심론적 사유는 계속되어 주장되었으며, 베르그송의 학설에서 아주 다른 정신에서 이루어졌다. 부트루는 자연법칙들의 우연(Contingence des lois de la nature 1874)의 결론에서 이렇게 썼다. “ 우리 자신들의 가장 깊은 심층(深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그리고 만일 가능하다면 우리 존재를 우리의 근원 속에서 파악하기 위하여, 사물들을 고정되고 경계있는 실재성들로서 나타난다고 하는 외적 관점을 포기하고서야, 우리는 자유가 무한한 권능(puissance)임을 발견한다”(156쪽). 모든 부정적 철학들은 반대로 생각한 것 같다. 이 철학들은 내적 경험의 자료들이 외적 경험과 동일한 전형이라고, 또 이 자료들이 계산할 수 있는 양이라고 생각한 것 듯하다. 그리고 심리학적 실재성은 정확한 법칙에 따라서 연결되는 요소들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런데 의식은 양적인 뉘앙스들의 놀이와 비결정적인[비규정적인] 외양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다. 이러한 착각에서 해방된 심리학은 자연과학이 될 것이다. 베르그송의 첫째 저술, 즉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1889)이 제시하는 바는 이러하다: 우리가 내밀한 경험의 자료들을 구축(des constructions)이란 수단을 통하여 [우선] 통속적 언어로 그리고 나서 과학적 언어로 표현하게 되는데, 만일 우리가 그 내밀한 경험의 자료들을 구축된 것들에서 벗어나게 한다면, 즉 우리가 이 자료들을 무매개적으로 파악한다면, 우리는 그 자료들에서 더 이상 양이 아니라 순수한 질을, [또] 구별된 항들의 다수성을 허용하지 않는 질적인 다양체(multiplicité)를, [또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 연결되는 구별된 사건들의 계속이 아니라 연속적인 진행(progrès)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유심론이 내적 의식에게 일상적 호소(l'appel 소환)를 반복하는 것보다 이 책에서 더 잘 하고 있다. 결국 그는 우리들이 무매개로 회귀에서 멀어진 이유들을 설명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는데 극단적인 난점들을 제시한다. 그의 학설은 [아일랜드계 영국철학자]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와 [스코틀랜드계 영국철학자] 브라운(Thomas Brown 1778-1820)의 학설과 동일한 맥락(la veine, 영감)으로부터 나왔다. [베르그송의 어머니가 아일랜드계 유태인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전통적 유심론에서처럼, 내적 정신집중에 방해하는 도덕적 해이(dissipation)에서 문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성의 본성에 기인하는 족쇄에 문제된 것이다. 우리 지성은 측정한다. 그 척도는 동질적 공간 밖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성은 여전히 한 공간과 다른 공간을 일치하게 하는데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시간을 측정하는 물리학자는 어떤 공간을 측정한 단위로서 삼는다. 여기서 그 공간은 규정된 물리적 조건들에서 동체가 지나간 궤적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의식 상태들 속에, 이 상태들을 측정할 수 있는 동질성을 도입하고자 애쓴다. 그런데 언어를 수단으로 해서 이들에게 이름 붙이면서, 우리는 마치 단어들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상태들이 서로 분리된 채로 모습들을 그린다. 그리고서 우리는, 마치 하나의 긴 선처럼, 서로 서로 이어져서 줄서 있는 것으로 이들을 상상한다. 이로부터 자유의지(le libre arbitre)에 관련된 난점들이 나온다. 우리는 동인들(les motifs, 발단들)을 서로 서로 구별된 사건들로서 보고, 이들의 협력이 마치 한 점에 적용되는 여러 힘들의 협력처럼 상상한다. 이 협력은 작용(l'acte)을 생산하는데, [지성주의자의 경우에] 자유란 무로부터 생산된 다른 힘이 보태진 것으로 가정하게 될 것이다.그러나 실제로는 자유작용(l'acte libre)의 진행에서, 즉 자라고 성숙하여 우리자신 전체가 취하는 결단에서는, 구별된 힘들의 협력과 같은 공간의 은유(métaphore)일 뿐인 것과 비슷한 어떤 것도 없다. 이런 큰 오류는 시간을 공간으로, 계속을 동시성으로 번역하는데서 기인한다. 순수 지속은 동질적이고 서로 일치할 수 있는 부분들의 조합(composer)도 아니다. 게다가 이 지속은 순수 질이며, 진행이다. 지속은, 마치 역학의 공간화 된 시간에서처럼, 우리의 내적 삶의 옆에서 무차별적이고 유일한 형태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지속은 [한 인간의] 생애 자체이고, 성숙하고 늙어가는 그 진행과 일치한다.
“철학은 직관의 자료들에로 회귀, 의식적이고 반성적 회귀일 뿐이다.”(물질과 기억, p.III.) 이 말은 의식의 무매개적 자료들에 관한 시론에서 적용된 방법을, 다음에 나올 두 권에 책에서 확장한다는 것이다. 물질과 기억(1896)과 창조적 진화(1907)가 그것이다. 거기에는 신비가들의 직관과 같은 갑작스레(ex abrupto) 도달하는 특별한 인식 능력에 호소는 없다. 오히려 반성에 호소가 있다. 즉 그는 이 반성을 통해 “사유 노동(le travail)의 습관적 방향을 전환하기를 요구한다.” (「형이상학 입문」, 형이상학지, 1903, 27쪽.) 이리하여 양식(le bon sens)이 진행한다. 이 양식 있는 절차는, 정식들과 일반성들 저너머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것들(정식과 일반성)을 현재로서 주어지는 언제나 새로운 상황들에 적응하기 위해, 이것들에게 부여해야만 했던 가벼운 수정(inflechissement, 굴곡)을 파악하고 있다.
기억의 문제는 방법의 적용에서 특별하게 분명한 기회를 제공한다. [한편으로] 관념연합론의 심리학이 구축한 것은 더 잘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문제는 전혀 문제가 아니다. 일반인은 이미지들을 구별된 사건처럼 표상하지 않는다. 그 사건의 각각은 의식에서 사라진 후에도 뇌의 재량에 따라 보존되고, 그리고 의식에 현재있는 다른 이미지와 연합에 의해 새로이 떠오른다. 재인식과 이미지의 위치화(localisation, 뇌의 저장소)는 다른 연합적 놀이들에 의해 일어난다. 다른 한편 정신의 베르그송식 개념화는 무매개적 자료들에서 알려준 대로 해결해야할 어려운 문제를 내민다. 즉 이웃하는 정신적 삶의 연속성은 망각이 도입한 분명한 파편화와 화해할 수 있는가? 망각의 문제, 이것은 베르그송, 플로티누스, 라베송과 동일한 전형의 사상가들에서, 근본적인 문제이다. 물질과 기억의 「서문」이 지적했듯이, 이것은 베르그송이 출발했던 문제인 것 같다. 만일 지각과 기억이 순수 인식의 작용들이라면, 난점은 해결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만일 지각과 기억이 정신 속에 불연속을 도입하는 경우라면, 이 작용들 속에서 행동하는 중에 있는 한 지표(un indice)가 있다. 이 지표는 지성이 조각으로 된 어떤 것이며, 무매개적 자료들에 묘사된 어떤 것이다. 결국, 정신적 연속성은 의식의 생에서 매순간에 그의 과거일체가 그에게 현재하고 있기를 요구한다. [과거전체는 항상 현재에 닿아있다.] 만일 우리가 순수하게 사색적 존재들, 즉 순수 정신들이었다면, 이 현전은 충만될 것이고 쇠퇴하지 않을(indéfectible)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체들로 되어 있고, 다시 말하면 기관들의 집합으로 되어있다. 이 기관들은 신경체계 덕분에 적응된 반작용들에 의해[신체의 습관에 의해] 밖에서 온 인상들에 응대하게 된다. 우리의 주의는 과거의 심층 깊이 속에서 흩어지거나 묽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의식에 의해 지배된다. “현재에 주의”는 매 순간마다 우리를 반작용으로 인도한다. 이 “현재 주의” 없이는 삶(la vie)이 불가능하다. 잠에서 현재의 주의가 사라지자마자, 현재 상황에 완전히 조화롭지 못했던 꿈들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침입한다. 신체 없는 인간은 영속적으로 꿈꾸는 자일 것이다. 신체는 정신이 격차를 내는 것을 막는 [무게]추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체는 과거 속에서 유용한 이미지들을 선택하는 선별도구(un instrument de sélection)와 같다. 유용한 이미지들이란 현재를 해석하거나 이용하는데 우리에게 적합한 경우이다. 이 유용성의 원리가 기억 속에서 불연속성을 생산한다. 플로티노스는 엔네아데스(IV, 3, 11)에서 이미 “사람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기억을 간직한다는 것은 필연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유용한 이미지들의 선별은 [관념] 연합 메카니즘의 고정성과 전혀 관계가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기억은 여러 다른 평면들[층위들]에 위치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불러온 이미지들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가 위치하는 의식의 수준에 있다. 추억은 결국 극단의 두 한계 사이에서, 즉 연출하는 추억과 꿈꾸는 추억 사이에서 일어난다. 연출하는 추억 즉 습관적 추억은 획득된 운동들의 반복이며, 예를 들어 자신의 역할을 다시 암송하는 배우와 같다. 꿈꾸는 추억 즉 순수 추억은 구체적 강도와 유일한 성격을 지닌 과거 사건의 이미지이다. 예를 들어, 이전의 암송의 이미지이다. 이 두 극한 사이에는 몽상과 행위 사이에 미개적인 다양한 평면들이 위치한다. 각 평면에서 과거의 기억은 전체로서 거기에 있으나, 이것이 “연출하는(joué) 기억”에 더 가까이 감에 따라 더욱 창백해지고 더욱 지워진다. 소위 말해서 마치 이미지들이 구별된 본질들이나 되는 것처럼 다른 추억들을 희생시켜가면서 몇몇 추억들을 선택하는 것은 없다. 단지 나의 여러 가지 태도들만이 있다. 나의 태도는 과거 속에서는 얼마간 이어져 있듯이 현재로부터 얼마간은 떨어져있다.
이런 이론은 자연히 수많은 문제를 제기한다. 특히 실어증에서 뇌의 위치화의 문제를 제기한다. 실어증에 관하여 1896년에는, 구별된 이미지들의 현존이[위치가] 뇌에서 따로 떨어져 있는 지역들로 되어있다고 의미할 수 있다고 여기던 시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어증에서 뇌의 손상의 경우에는, 구심부위[구심신경]에서 원심부위[원심신경]의 뇌[신경]의 유도체[신경]의 중단이외에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은 위치화의 도움이 없이도 뇌의 이미지 손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행동의 가능하게 함으로써, 사라졌던 이 행동[뇌의 구심에서 원심 운동]에 관계하는 이미지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첫 두 작품이 제기한 문제를 창조적 진화(Evolution créatrice, 1907)가 해결할 것이다. 지성이 사물과 우리 자신 사이에서 취하는 관점에서 끊임없이 불연속성을 도입하러 오는데, 자연 속에서 이 지성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을 해결하기 위하여 베르그송은 생명의 본성과 진화의 본성을 총괄적으로 연구했다. 지성의 주제에서 보면, 서양 철학에서 두 가지 전통이 있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잘 통용되는 전통, 그것은 지성을 순수하게 관조적 인식능력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능력은 존재들의 영원한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다.이 전통에서 지성과 이 지성이 태어난 생명체와 연관을 표상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베르그송은 순환논증의 오류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지성을 밖으로부터 생명체에 들어가게 했다.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의 경우에, 그는 살아있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대상으로 만들어서 다른 물질적 존재들과 같은 자격을 주었고, 그래서 보편 메카니즘의 일부로 만들었다. 그 때문에 영혼과 신체의 통일에 대해서는 불가사의로 만들었다. 다른 전통에 따르면, 지성은 생명에 연결되어 있으나, 매우 다른 두 개의 의미(sens, 방향)이다. 즉 비오스(βίος,) 즉 실행하는 삶(vie pratique)의 의미에서, 또는 조에(ζωή) 즉 생명 원리(principe vital, 정령, 혼)의 의미에서이다. 첫째 의미에서 그리스 회의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지성은 이론적 인식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천적 용도에서 만들어졌고, 지성은 삶의 수단이지 실재에 도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니체(Nietzsche, 1844-1900)의 경우에서도 우리는 동일한 주제를 보게되고, 실용주의자들에게서도 동일한 주제를 재발견하게 된다. 둘째 의미에서 네오플라톤학파 사람들은 전생명(la Vie, 전자연)을 전진(procession)과 역전(conversion)이라는 이중 운동을 고안했다. 전진에 의해서 전생명은 순환하고 흩어지고, 역전에 의하여 전자연은 자신이 유래했던 통일체(Unité)로 스스로 집중하고 또 회귀한다. 지성은 전진의 첫 국면을 고안했으며, 사물들을 통일성 속에 싸안을 수 없는 통찰이지만, 사물들을 수많은 세부사항들로 나열하는 조각 조작으로 만들 수 있는 통찰[미분하여 배열할 수 있는 인식은 지성의 인식, 즉 가하를 산술로서 배치 직선 좌표로 만들 수 있는 인식능력은 지성이다] 따라서 지성은 생명과정의 내부에서 생산된다. [지성을 한편으로 도구적 실행이라 하는 쪽과 생명의 분산에서 생긴다는 쪽이다. 그런데 둘 다 물체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은 같다. 직관 또는 일자의 집중은 다른 하나의 인식이다. 이런 인식을 베르그송이 중요시 한 것이다.(44PLD)]
창조적 진화가 재발견한 것은 이 둘째 전통이다. 이 전통의 두 의미에서, 둘째 장에서, 지성은 실천적 기능이다. 셋째 장에서 지성은 생명의 진화의 산물로서 제시된다. 이 둘의 내밀한 연결은 그의 학설의 독창성이다. 제2장의 본질적 주제는 도구인(homo faber)과 지성인(homo sapiens)의 동일성이다. 따라서 지성은 우선 다른 딱딱한 것들에 작용하기 위해 견고한 도구들을 제작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지성은 불연속적이고 무기력(타성적)인 존재들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지성은 연속성과 진행 속에 있는 생명을 이해할 수 없다. 지성은 자연히 타성적 물질에 일치되어 있다. 지성은 기계적인 물리학의 작자이며, 지성은 생물학을 이런 물리학으로 귀착시키려 헛되이 애쓰고 있다. 따라서 지성은 대상들로부터 비례들, 형상들, 일반도식들 만을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지성의 본성 속에는 불가사의한 파라독스 같은 것이 있다.지성은 제작을 위해서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이론을 탐구한다. [이 이론의 탐구는 생명이 아니라 제작의 도면, 상징, 즉 추상의 방향이다. 우리는 이를 지성의 도구를 넘어서 상징으로서 정신의 방향이라 불렀다. 생명은 전자연의 이해이며, 이를 개체 안에서 전개체를 이해하는 것이 본능이고, 이를 종의 차원에서 인격성을 이해하는 것이 직관이며, 이런 전생명의 이해와 공감으로서 특이성의 존재가 지닌 것이 영혼이다. 특이성의 존재는 정신과 영혼의 이중성을 지녔기에 한편으로 정신의 작업으로 착각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영혼이 자기 길에서 추상과 대립에서(파라독스하게) 분열증을 일으킨다. 추상이 먼저 주어지지 않으면, 분열증이 없을 것인데, 추상이 앞에 놓여서 본질처럼 행세를 하는 경우에 분열증이 온다. 신경증은 지성이 작업에서 잘 이루어지 않는 경우이다. 그것은 물질의 고유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지, 생명과 연관 때문이 아니다. 그래서 신경증에는 신체의 습관과 더 연관이 많고 분열증은 영혼이 정신의 착각을 벗어나 전자연, 전생명의 이해해야 함에도 정신(추상)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영혼에게 강요하는 데서 유래한다.] [그런데] 지성은 대상들 속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마치 “지성은 자신이 발견할 수 없는 것을 찾는 것”처럼, 자신이 완성한 행동을 끊임없이 넘쳐난다. [이 넘어서는 것이 물체에 대한 측량과 셈을 넘어서 추상으로서 수(mumero)와 기하 이며, 상품에 대한 가치로서 화폐와 황금을 넘어서 추상으로 자본이다. 이들은 지성에서 정신의 현상으로 가는 길이다. 영혼의 현상은 내재성과 합일이라 방향과 의미가 다르다.] 여기에 일상적 문제를 뒤엎는(le renversement, 전복하는) 하나의 문제가 있다. 어떻게 사색적인 지성이 실천적이 되느냐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지성이 어떻게 사색적이 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러한 사정은 동물들의 본능에서 성공했다. 본능도 또한 물질에게 행동한다. 도구를 매개로 하지 않고, 자신의 기관을 수단으로 행동한다. 본능은 그 대상에 대한 완전하고 직관적인 인식을 가정한다. 그러나 그 유일한 대상에 대해서만 이다.지성은 대상에 대한 불완전한 인식이나 오히려 진행하는 인식이다.
지성의 본성과 기능은 밝혀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지성을 전생명(la Vie)에 연관하여 생각한다면. 이 전생명은 가능한 모든 의식의 잠재성을 지니는 의식 자체를 고안한다. [전생명과 전의식은 공연적(coextensif)이다.] 우리는, 의식은 살아있는 존재들로 조직화하려 애쓰는 물질 속에서만 이 [전]생명을 인식한다. 의식은 [그 살아있는 존재의 조직화 속에서] 에너지 저장고를 한 점 위에 축적했다가 갑작스레 소모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생명도약의 형식으로, 즉 보다 충만한 생명으로 향한 도약의 형식으로, 동물 종들을 통해서만 의식을 인식한다. 식물, 동물, 인간을 통해서, 의식은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한다. 또 의식은 그 물질에 생명을 불어넣고 또 그 물질 속에서 소멸하지만, 의식자체의 온전한 소유를 재발견하려고 노력한다. 의식은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한다. [하나] 본능과 [다른 하나] 지성이다. 본능은 완전하지만 좁은 영역으로 제한되어 있는 인식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지성은 반대로, 지성은, 물질에 예속되어 있는 정신을 자유롭게 하면서, 보다 완전한 직관을 위해 정신을 사용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베르그송을 지성의 경멸자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를 안다. 진실은 이러하다. 지성이 일종의 절대[절대자]로서 간주되었던 지난 3세기 후에 사람들은 신적 예지(un intellect divin, 신인합일의 신지의 경지)로 지성을 성인품계로 올려놓았고, 그리고 사람들은 순수 이성 비판을 가지고서 지성[이성raison pure]을 우리 인식에 접근할 수 있는 실재성의 실체로 만들었는데, 베르그송은 쇼펜하우어(Schopenhauer, 1788-1860)에 의해서 진행되었던 한 방향에서 지성의 형이상학적 문제로 되돌아 왔다. 그는 지성 속에는 보다 폭넓은 범위의 실재성 가운데 있는 하나의 실재성이 있음을 보았다.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지성은 전환을 준비하는 진행이다. 이 전환이 곧 종교이고, 종교는 성자 속에서 신비가 속에서 생겨난다.
본능의 선은 결국에는 막시류들의 완전하고 안정된 사회들에 귀착한다. 그러나 지서의 선은 끝내 불완전하고 진보하는 인간의 사회들에 이른다. 이 인간 사회들에서 베르그송의 마지막 저술의 목적이 되는 도덕과 종교가 나타난다. 즉 그 저술은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Les deux source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1932)이다. 이 책의 본질적 주제는 도덕적 강요와 영웅과 성자의 도덕 사이의 대립이다. 전자의 강요도덕은 간단히 말하면 규제(règlement)로서, 우리가 속하는 사회집단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후자의 도덕은 소크라테스(Socrates)와 이사야(Isaïe)의 도덕이며, 동포애의 도덕, 인권의 도덕이다. 후자의 사회는 벌들의 사회처럼 자연적이고 닫혀있으며, 그리고 마치 서로 적대적인 사회들이, 즉 보수적 사회들이 인류애로 확장될 수 있기나 한 것처럼, 사람들이 둘째 사회 속에서 첫째 사회의 단순한 발전을 보는 것은 잘못이다. 확실히 생명은 인간에게 “우화적 기능”(fonction fabulatrice)을 부여하면서 생명자신이 창조했던 사회들을 선호하고 유지한다. 이 우화기능은 사회적 응집을 구출해 낼 역할이외 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신화들과 종교적 제의들을 발명한다. 이리하여 “정태적 종교”가 생겨나고, 이 종교는 닫힌 사회의 종교, 닫힌 영혼의 종교이다. 그러나 만일 대생명(la Vie)이 생명의 도약을 위대한 신비가들의 정신 속에서 다시 자리잡지 않았다면, 그 대생명은 안정된 형식들 속에 파묻히게 되었을 텐데. 이 신비가들은 직관에 의해 모든 사물의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동태적 종교”의 기원에, 즉 선지자들과 예수[크리스트]의 종교 기원에, 이르게 된다. 이 동태적 종교에서는 인간을 사회적 삶의 제한된 순환 속에 묶어 두었던 모든 정신적 충력들이 생겨난다. 베르그송의 도덕론은 본질적으로 종교철학이며 [종교철학으로 확장되며], 그리고 역사철학에서 완성된다. 이 역사관은 숙명론자도 낙관론자도 아니고, 오히려 위험을 충분히 감수하고 악영향을 넘어서는 충분히 찬탄할만한 명철함이 있다. 중세의 “금욕적 열망”(la frénésie d'ascetisme)에 대립되는 “근면한 열망”(la frénésie industrielle)이 명민함을 우리 문명[발전]으로 치닫게 하기 때문이다.
신플라톤주의 형이상학이 인정했던 유일한 실재적인 구별들은 다소 완전한 여러 정도들의 단위(unité)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의 차이는 모든 실재성들이 서로 침투하는 일자(l'Un)에서부터 충만한 분산으로 되어 있는 물질에까지 이다. 베르그송은 그 존재들에 대해 [신풀라톤주의와]동일한 관점(la meme vision)을 취한다. 그러나 완전히 독창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그는 지속의 직관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연속적인] 통일화[단일화]는 그에게 있어서 긴장(la tension)이 되고, 긴장의 정도는 지속의 집중과 같은 것이다. 물질 속에 510조 진동으로 분산하는 그 동일한[일체를 이루는] 사물이 인간 정신 속에서 나트륨(sodium, Na)이란 노란빛의 감각이다. 그 실재성의 최고 정상에는 신이, 즉 완전히 집중화된[압축된] 지속을 갖춘 영원하고 창조적인 존재가, 있다. 이완(détente) 또는 긴장(tension), 이완은 물질성의 방향으로 가는 것이고, 긴장은 정신의 방향으로 가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근본적인 실재성들이다.
사람들은 다음 장들에서 베르그송의 깊은 영향의 표시들을 발견할 것이다. 베르그송 다음으로는 이른 바 우주의 과학적 개념화가 더 이상 가능하지 못하다. 그 가능하지 못한 개념화란 스펜서(Spencer, 1820-1903), 다윈(Darwin 1809-1882), 텐(Taine, 1828-1893)을 조합한 영향아래서 1880년경에 매우 넓게 퍼져있었던 개념을 말한다. 스공(Joseph Segond 1892-1954, 프랑스 수필가)의 작품, 기도(La prière, 1911), 베르그송의 직관(L'intuition bergsonienne, 1913), 상상(L'imagination, 1932) 등과 같은 작품은 베르그송의 직접적 영향을 입었다. 그러나 베르그송주의는 특히 일종의 지적 해방으로서 표출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연구하게될 운동[철학의 조류]들을 가능하게 했고 또 강조하게 되었다. 즉 운동들[사조들]은 행동의 철학, 실용주의, 과학들의 비판 등이다. 그리고 베르그송 이후로 주지주의는 베르그송 이전의 주지주의와 매우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44PLH)
# 참고문헌 Bibliogrphie 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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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Delhomme(1911-1983), Vie et conscience de la vie, Essai sur Bergson,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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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r le centenaire de Bergson, Revue de métaphysique, 1959. (44PL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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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9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유태인 출신의 프랑스 본성내재주의 철학자. 훗설과 달리 현상보다 강도성의 근원에 대한 탐문을 철학의 주요 관심으로 보았다. 그는 철학의 방식은 (내재적) 체험의 정확성과 문제 제기에 있다고 보았다.
1874 띠보데(Albert Thibaudet, 1874-1936) 프랑스 문학 비평가. 벩송은 1936년 그에 대한 존경으로 장문의 보고서를 썼다. 벩송주의(Le Bergsonisme, 1924)(2권), 교수들의 공화국(La République des Professeurs, 1927) 비평의 생리학(Physiologie de la critique, 1930), <Me 1546-1553, 1583>.
1898 구이에(Henri Gouhier, 1898–1994)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제수이트의 영향을 입은 드라마 비평가. 1919년 ENS, 크리스트교[카톨릭?]의 영향을 받고, 1979년 아카데미 회원(어떻게 이 철학자가 선출되었을까?), 벩송과 복음의 크리스트(Bergson et le Christ des Évangiles, 1961), 서구 사상사에서 벩송(Bergson dans l’histoire de la pensée occidentale, 1989)
1901 베겡(Albert Béguin, 1901-1957) 스위스 작가 비평가, 편집자. / 테브나즈(Pierre Thévenaz, 1913-1955) 스위스 철학자. 공동 편집자. / 베겡과 테브나즈, 앙리 벩송: 수집된 시론들과 증언들(Henri Bergson, Essais et Temoignage recueillis, 1943),
1903 장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프랑스 철학자, 음악학자. 러시아계 유태인으로 1922년 ENS입학 철학을 공부, 그의 스승은 브랑슈비끄(Léon Brunschvicg (1869-1944)이며, 벩송과 1923년에 만났고 편지교환을 했다. 앙리 벩송(Henri Bergson, 1931)(Paris Alcan, 293쪽; 1959년 증보판) / 보뒥(Louis Beauduc(1903-1980)과 쟝겔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 1903-1985), 둘 다 1903년생, 1922년 ENS에 입학하여 같은 방을 썼다. 1926년에 쟝켈레비치는 교수자격 시험 1등, 보뒥은 2등이다. 둘은 57년 동안 편지를 교환했다. 전자는 플라톤처럼 관념론자이며 후자는 저술을 남기지 않고 리무쥬의 소크라테스처럼 살았다. 덕목론(Traité des vertus, 1949, 수정판 2권 1968-1972)에서 1923년 장켈레비치가 벩송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Me 1487, 1495>
1911 들롬(Jeanne Delhomme, 1911-1983), 생명과 생명의 의식: 벩송에 관한 시론(Vie et Conscience de la vie, essai sur Bergson, 1954), p. 195
1913 아돌프(Lydie Adolphe, 1913-1962) 프랑스 법률학자, 철학자, 사서직, 벩송 전문가. La dialectique des images chez Bergson, 1951. (57V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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