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성모님, 생신 축하드립니다!
제 1독서 : 미카 5,1-4ㄱ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복 음 : 마태 1,1-16.18-23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탄생 축일을 지내는 분은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세례자 요한 이렇게 세 분이지요.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지내는 오늘 복음 말씀으로 신약성경에서 제일 재미가 없는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 번 보고 들어도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통 구분이 안될 뿐만 아니라 살펴보면 족보를 이어가는 인물이 거의 남자들로 짜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낳아 이어 가는 인물이 다 남자들이지요. 이렇게 무미건조한 족보가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의 서두에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면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신약성경의 첫째 권인 마태오 복음 그 첫 자리에 읽어도 잘 들어오지 않고 재미도 없는 족보가 죽 나열되고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성경 저자들이 별 생각 없이 집어넣었을 리가 없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죽 이어져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함께 하심과 때가 이르러 메시아를 보내셨음을 가르쳐줍니다. 다윗과 아브라함의 직계 후손인 예수님께서 약속된 나라를 세워 가시는 왕, 메시아이시라는 것이 족보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한 핵심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성경 저자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지금 태어난다는 것을 이렇게 족보를 통해서 밝히고 있지요.
그런데 비슷비슷하게 이어지는 족보의 내용 중에서 좀 색다른 구절이 보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1,16)
문맥의 흐름으로 보아 이 구절은 이렇게 되어 있어야 맞을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을 낳았고 요셉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요셉을 마리아의 남편 요셉으로, 또 요셉이 아닌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다고 표현하고 있지요. 이 족보를 통해서 우리는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마침내 성취되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마태 1,23)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그대로 마리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족보를 통해서 여실히 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독서인 미카 예언서에는 구원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신다고 예언되어 있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가장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족보에는 바로 이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요. 족보 뒷 부분에는 예수님의 탄생 경위와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던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해명이 되고 있습니다.
우선 처녀인 마리아가 임신하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는데 마리아의 인간적인 어려움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약혼자 요셉 또한 이 사건 앞에서 얼마나 난감하고 혼란스러웠는지가 사뭇 점잖게 표현되고 있지만 그 어려움은 능히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성모님의 탄신 축일인 오늘 복음의 중심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이고, 요셉의 혼란스러움과 그것을 다시 하느님의 뜻으로 확인시켜 주는 천사의 등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모 성탄 축일이지만 성모님에 대한 내용으로 특별한 것이 없지요. 결코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성모님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성모님의 사촌 엘리사벳은 유다 산골 마을로 자신을 찾아온 성모님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1,42)
우리는 하느님의 모친이 되신 성모 마리아가 가장 복된 여인임을 믿고 또 알고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께 축복을 받은 가장 복된 여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탁월한 능력이나 어떤 사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고 또 하느님의 그 은총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긴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성모님의 일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하고서도 성모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고 표현되어 있지요.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1,18)
놀랍게도 성모님은 약혼자 요셉에게 하느님의 뜻을 굳이 구차하게 설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요셉 역시 자신의 일을 떠벌리거나 드러내는 성품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
성모님과 요셉은 똑같은 성품으로 하느님 안에서 묵묵히 어려움을 감내하며 갈등하고 기도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면으로 심사숙고하면서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게 마련인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드러내주신다는 것이지요.
교회에서는 성모님을 그 탄생에서 승천에 이르기까지 기억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 삶을 본받기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성모님의 삶에서 분명한 것을 하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혹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했을 때 오해와 인간적인 시련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성모님은 부정한 여인으로 오해를 받을 수가 있었고, 요셉 또한 사람들로부터 바보로 취급을 받을 정도로 어리석게 비추어졌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있어서 문제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요. 오히려 쉽게 드러내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기도하고 간직할 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때를 택하여 적절히 드러내 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바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됩니다. 신앙 생활에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요.
우리 시대에 큰 불행 중의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없는 것까지도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해가며 드러내고 싶어하지요. 또 너나없이 자신을 설명하러 듭니다. 내 뜻대로 따라오기를 요구하고 내 뜻과 다를 때는 쉽게 비판하고 공격하지요. 오늘 성모 성탄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심성을 본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하느님의 뜻에 올바르게 응답하고 산다면 어떤 오해가 있어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또 조금 가슴 아픈 일이 있다고 그것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도 없습니다.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의 뜻은 때가 되면 드러나게 마련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너무나도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갈구합니다. 인정받고 싶어하고 알아주기를 원하지요. 바로 이것이 갈등이 생기는 요인입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연연해하고 좋은 의견만을 듣기를 원한다면 마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조각배처럼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쉴 새 없이 불안하고 작은 소리에도 상처를 받으며 스스로 부대끼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심지가 굳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의 그런 성품을 우리는 닮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가기를 노력한다면 설명하려들 필요가 없습니다. 주위의 작은 소리에 흔들릴 필요도 없지요. 성모 마리아와 요셉 성인이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참으로 큰 사건을 맞이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그렇게 담담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돌에 맞을 위험에도, 약혼 관계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두 분은 주위 사람들의 반응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살폈고 간직했으며 한결같이 기도하셨지요.
오늘 성모님 탄생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 탄생사화를 들었습니다. 성모님의 존재 의미는 전적으로 예수님에 의해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살았던 성모님의 바로 그 삶이 천주의 모친으로서 간택된 배경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 안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적인 반응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진실, 진리에 맞는 삶을 산다면 굳이 그런 반응에 상처받을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말 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혼란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매사를 하느님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자들에게도 성모님처럼 뿌리깊은 신앙이 자리 잡혔으면 좋겠습니다. 굳은 신뢰심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그 뜻을 묵묵히 실천하는 모습이 바로 성모님의 삶을 따르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