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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의상
@ 한국불교에 접근하기 위해 거쳐가야 할 두 인물이 있다. 원효와 의상이 바로 그들이다.
여기 그들의 출생배경과 그들이 성장하며 도를 찾아 구도의 길을 가는 여정, 그리고 자기를 찾아 떠난 그 여정을 결과, 그들은 어떤 사상을 이 땅에다 세우려 하였는가? 발췌한 글들을 짜깁기 하여 풀어본다.
나이는 원효가 여덟 살이나 더 많지만, 두 사람은 친구처럼 지내며 함께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떠나기로 했어요. 그러나 원효는 여행 도중 해골 물 사건을 겪고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한 채 신라 땅 곳곳을 떠돌며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온 힘을 쏟았어요. 반면에 의상은 원효와 헤어진 후 당나라로 들어가서 불교 종파 중 하나인 화엄종을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러고는 귀국하여 신라 땅에 화엄종을 널리 유포시키며, 왕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다스리는 데 큰 도움을 주었어요.
원효 vs 의상
心外無法
심외무법
“진리는 마음 밖에서 따로 찾을 수 없다.” -원효
誓死無退
서사무퇴
“끝까지 가서 배우겠다.” - 의상
한 사람은
마음 하나에서 모든 법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법계 하나에서 모든 존재의 상즉상입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을 경쟁자로 보기보다,
7세기 신라불교가 중국불교를 수용하는 두 가지 위대한 방식
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元曉(원효) — 독자적 내면화와 종합
義湘(의상) — 직접 유학과 창조적 전승
이 두 길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신라불교가 단순한 중국불교의 아류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인 사상 전통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元曉(원효) — 독자적 내면화와 종합
義湘(의상) — 직접 유학과 창조적 전승
이 두 길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신라불교가 단순한 중국불교의 아류에 머물지 않고 독자적인 사상 전통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1. 가장 직접적인 출전은 《송고승전》이다
송나라 찬녕(贊寧, 찬녕, 919–1001)이 편찬한《宋高僧傳》송고승전
Song Biographies of Eminent Monks
에는 원효전과 의상전이 각각 실려 있습니다.
그중 〈唐新羅國黃龍寺元曉傳〉, 당 신라국 황룡사 원효전에는 매우 결정적인 문장이 있습니다.
원문
嘗與湘法師入唐,慕奘三藏慈恩之門。
상여상법사 입당, 모장삼장 자은지문.
“일찍이 의상 법사와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현장 삼장의 자은사 문하를 사모하였다.”
여기서
湘法師(상법사) = 의상(義湘)
奘三藏(장삼장) = 현장(玄奘, Xuanzang)
慈恩之門(자은지문) = 대자은사(大慈恩寺)를 중심으로 한 현장의 학문적 문하입니다.
그러므로
“원효와 의상이 당으로 가려 했던 처음 목적 가운데 하나가 현장 삼장의 새로운 불교학을 배우려는 것이었다.”
는 이야기는 단순한 민간 전설이 아니라 《송고승전》 원효전에 명문으로 나타납니다.
다만 이 기록은 현장이 죽은 뒤 약 300년 뒤인 송대에 편찬된 승전이라는 점은 기억해야 합니다.
2. 당시 현장의 위상과 매력은?
현장(玄奘, 현장, Xuanzang, 602–664)은 645년 인도에서 귀국한 뒤 막대한 산스크리트 불전을 번역하면서 당대 동아시아 불교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그가 번역·소개한 신학문은 특히
唯識(유식, Yogācāra / Consciousness-only)
法相(법상, Dharma-characteristics)
瑜伽行派(유가행파, Yogācāra)
계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7세기 신라의 젊은 승려에게 장안은 사실상 오늘날 말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불교학 연구센터
였습니다.
원효와 의상이 중국으로 향하려 했다는 것은 단순한 성지순례가 아니라 최신 불교학을 직접 배우려는 유학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송고승전》은 이를 아주 압축해서
慕奘三藏慈恩之門
모장삼장 자은지문
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3. 그런데 《삼국유사》는 전혀 다른 첫 번째 입당 실패를 기록한다
일연(一然, 일연, 1206–1289)의 《삼국유사》 권4 〈義湘傳敎, 의상전교〉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원문
遂與元曉道出遼東,邊戍邏之爲諜者,囚閉者累旬,僅免而還。
수여원효 도출요동, 변수라지 위첩자, 수폐자 누순, 근면이환.
“마침내 원효와 함께 길을 떠나 요동으로 나갔는데, 변방 순라군이 간첩으로 여기어 수십 일 동안 감금하였다가 겨우 풀려나 돌아왔다.”
이 기록에는 해골무덤도, 깨달음도 없습니다.
즉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효와 의상의 첫 번째 중국행은 육로였습니다.
대략 구조는 이렇습니다.
新羅 신라
→ 遼東 요동
→ 고구려 국경
→ 간첩 혐의
→ 수십 일 감금
→ 신라로 귀환
한국 고대사 DB의 주석도 이 부분의 원자료가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의상전》과 원효의 《행장》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두 자료 모두 지금은 완전한 형태로 전하지 않습니다.
4. 그러면 ‘해골무덤의 깨달음’ 전거는?
바로 《송고승전》 의상전입니다.
여기서는 원효와 의상이 함께 중국으로 가던 중 큰비를 만나 길가의 토굴 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잤다고 합니다.
다음 날 보니 그곳은
古墳骸骨旁
고분 해골방
“옛 무덤의 해골 곁”
이었습니다.
비가 계속 내려 그곳에 다시 머물렀는데 밤에 귀신 같은 현상에 시달립니다.
그 순간 원효가 결정적인 깨달음을 얻습니다.
《송고승전》은 다음 핵심 문장을 전합니다.
心生故種種法生,心滅故龕墳不二。
심생고 종종법생, 심멸고 감분불이.
“마음이 생기므로 갖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감실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그리고 곧이어
三界唯心,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삼계는 오직 마음이며, 만법은 오직 식이다.”
그리고 원효가 결정적으로 말합니다.
心外無法,胡用別求?我不入唐。
심외무법, 호용별구? 아불입당.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겠다.”
이것이 바로 원효 귀환담의 가장 중요한 원문입니다.
5. ‘해골물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원문에 없다
여기서 대단히 중요한 문헌비평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원효가 밤에 목이 말라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맛있게 마셨다. 아침에 그것이 해골물이라는 것을 알고 토하다가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
그런데 《송고승전》 원문에는 해골의 물을 마셨다는 장면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비를 피함
무덤인 줄 모르고 잠
아침에 해골을 발견
다음 밤 귀물에 시달림
마음에 따라 동일한 장소가 다르게 경험된다는 깨달음
입니다.
따라서
해골무덤 전승
은 비교적 이른 문헌에 있고,
해골물 이야기
는 후대에 극적으로 구체화된 설화적 장치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6. 원효의 깨달음은 무엇이었는가
흔히 원효의 깨달음을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짓는다.”
라고 표현합니다.
내용적으로는 원효의 체험을 잘 요약하지만, 《송고승전》의 이 장면에 실제로 쓰인 문장은 ‘一切唯心造’가 아닙니다.
실제 문장은
心生故種種法生
심생고 종종법생
心滅故龕墳不二
심멸고 감분불이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心外無法 胡用別求
심외무법 호용별구
입니다.
이 네 문장을 함께 읽어야 원효의 깨달음이 훨씬 분명해집니다.
7. 왜 원효는 중국으로 가지 않았는가
《송고승전》의 답은 놀라울 정도로 명료합니다.
心外無法 胡用別求
심외무법 호용별구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밖에서 따로 구하겠는가?”
입니다.
원효가 중국을 폄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唐나라 → 현장 → 최신 불교학 → 진리
라는 학문의 노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서의 체험을 통해,
진리를 얻기 위해 반드시 공간적으로 중국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전환이 일어났다고 《송고승전》은 묘사합니다.
즉,
求法於外
구법어외 밖에서 법을 찾는 단계
에서
返照自心
반조자심 자기 마음을 돌이켜 비추는 단계
로 이동한 것입니다.
8. 반대로 의상은 왜 계속 갔는가
《송고승전》은 원효가 돌아서는 순간 의상을 아주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湘乃隻影孤征,誓死無退。
상내 척영고정, 서사무퇴.
“의상은 이에 홀로 외로운 길을 가면서, 죽음을 맹세하고 물러나지 않았다.”
굉장히 강렬한 표현입니다.
원효는
我不入唐
아불입당
나는 당에 가지 않겠다.
라고 하고,
의상은
誓死無退
서사무퇴
죽더라도 물러서지 않겠다.
라고 합니다.
후대 전기작가는 두 사람의 불교적 길이 갈라지는 장면을 이렇게 극적으로 대조한 것입니다.
9. 의상은 곧바로 현장에게 갔는가
아닙니다.
《송고승전》 의상전은 의상이 중국에 도착한 뒤 결국 이렇게 갔다고 기록합니다.
徑趨長安終南山智儼三藏所,綜習華嚴經。
경추장안 종남산 지엄삼장소, 종습화엄경.
“곧 장안 종남산의 지엄 삼장에게 가서 《화엄경》을 종합적으로 배웠다.”
여기에 바로
智儼
지엄
Zhiyan, 602–668
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時康藏國師爲同學也
시 강장국사 위동학야.
“그때 강장국사[법장]가 동학이었다.”
즉
의상 ↔ 법장
이 지엄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사실까지 연결됩니다.
10. 그런데 “현장 문하에 들어가지 못해서 지엄을 찾아갔다”는 기록은 없다
여기가 가장 중요한 역사적 교정입니다.
현재 확인되는 사료에는
“의상이 현장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또는
“현장의 문하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또는
“현장에게 배우려다 실패하여 지엄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라는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역사적 사실처럼 말하면 곤란합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송고승전》 원효전은 원효와 의상이 현장 삼장의 자은사 문하를 사모하여 입당하려 했다고 전합니다.
둘째, 실제로 중국에서 의상이 찾아간 스승으로 기록되는 인물은 현장이 아니라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입니다.
그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사료가 침묵합니다.
11.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배경 —
의상이 입당했을 때 현장은 살아 있었다
현장은 664년에 입적합니다.
의상의 실제 입당연도는 학계에서 대체로 661년으로 봅니다. 부석사본 비문 계통의 661년 기록이 가장 신뢰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한국 고대사 DB도 이 견해를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661년이면
현장 59세 전후
의상 36세 전후
였고 두 사람은 동시대인이었습니다.
따라서 물리적으로 “현장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의상이 지엄에게 갔다”는 설명도 틀립니다.
현장은 살아 있었습니다.
12. 다만 당시 현장은 이미 장안 자은사를 떠나 옥화궁에 있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정황이 하나 더 있습니다.
현장은 659년 무렵 방대한 《대반야경》 번역에 전념하기 위해 장안을 떠나
玉華宮
옥화궁
Yuhua Palace
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664년 그곳에서 입적합니다. 661년에도 현장의 번역 활동은 옥화궁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의상이 661년 중국에 도착했을 때,
현장 = 이미 옥화궁에서 대규모 번역사업의 말년에 있음
지엄 = 종남산에서 《60화엄》을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가르치고 있음
이라는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이것이 의상이 지엄을 선택한 직접적인 이유였다는 사료는 없습니다.
정황으로만 참고해야 합니다.
13. 《삼국유사》는 의상의 입당을 더 다르게 설명한다
《삼국유사》 〈의상전교〉는 해골무덤 이야기를 넣지 않습니다.
그 대신 첫 실패 뒤 의상이 따로 배를 타고 중국에 들어간 것으로 기록합니다.
會唐使舡有西還者,寓載入中國。
회당사선 유서환자, 우재입중국.
“마침 당나라 사신의 배가 서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있어, 거기에 편승하여 중국에 들어갔다.”
그리고 양주를 거쳐
尋往終南山至相寺,謁智儼。
심왕종남산 지상사, 알지엄.
“곧 종남산 지상사로 가서 지엄을 배알하였다.”
이 기록에는 훨씬 명료한 의상의 유학 노정이 보입니다.
新羅
신라
↓ 육로
遼東
요동
↓ 간첩 혐의·감금
귀환
↓ 다시 해로
揚州
양주
↓
長安·終南山
장안·종남산
↓
至相寺
지상사
↓
智儼
지엄
↓
華嚴學
화엄학
입니다.
14. 지엄은 의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 《삼국유사》의 아름다운 전승
《삼국유사》에는 지엄이 의상이 오기 전날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바다 동쪽에서 거대한 나무가 자라 중국까지 그늘을 드리웠고, 그 위에 봉황 둥지가 있었으며 그 안에
摩尼寶珠
마니보주
Maṇi jewel
가 빛났다는 꿈입니다.
그래서 의상이 도착하자 지엄이 말합니다.
吾昨者之夢,子來投我之兆。
오작자지몽, 자래투아지조.
“어젯밤 내가 꾼 꿈은 그대가 나에게 올 징조였구나.”
그리고
許爲入室
허위입실
즉 “입실제자로 허락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入室(입실)은 단순히 방 안에 들어갔다는 말이 아니라
스승의 깊은 가르침을 직접 전수받는 핵심 제자가 되었다
는 전통적인 표현입니다.
15. 원효와 의상의 길은 이렇게 갈라진다
元曉 원효
義湘 의상
중국행 시도
중국행 시도
현장 문하 지향 전승
현장 문하 지향 전승
무덤 체험
중국행 지속
心外無法
誓死無退
심외무법
서사무퇴
내면으로 귀환
외적 유학 지속
신라에서 독자적 교학
지엄에게 화엄 직접 전수
화쟁·일심·기신론
법계연기·법계도
직접 중국 유학 없이 대성
중국 화엄을 신라에 전승
그런데 이것을
원효 = 선(禪)
의상 = 교(敎)
처럼 단순하게 나눠서는 안 됩니다.
원효 역시 엄청난 경론 연구자였고, 의상 역시 매우 강한 관법·선적 성향을 지닌 화엄가였습니다. 현대 연구도 원효와 의상 모두 중국 화엄 형성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했지만, 원효는 《대승기신론》과 신유식학을 독창적으로 수용했고, 의상은 지엄의 화엄을 직접 배우면서도 선적·지론종적 요소를 강하게 발전시켰다고 봅니다.
16. 사료의 진실성과 신뢰성은?
여기서는 단일 사료를 “100% 역사적 사실”로 선택하면 안 됩니다.
《송고승전》
찬녕, 988년경 완성
장점은 원효·의상 공동 입당 + 현장 문하 지향 + 무덤 각성 + 의상의 지엄 수학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건보다 약 300년 후 자료입니다.
《삼국유사》
일연, 13세기
더 늦은 문헌이지만 일연은 지금은 사라진
최치원의 《의상전》
원효의 행장
부석사 계통 자료
등을 활용한 흔적을 남깁니다.
특히 첫 입당 실패가 요동에서 발생했다는 기록은 구체적입니다.
17. 그래서 오늘날 가장 신중한 역사 복원은
대략 다음 정도입니다.
① 원효와 의상이 함께 중국 유학을 시도했다.
이것은 여러 전승이 공통적으로 인정합니다.
② 첫 시도는 요동 방면 육로였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는 간첩으로 오인되어 귀환했다고 기록합니다.
③ 두 사람이 현장의 새로운 불교학을 배우려 했다는 전승이 있다.
이것은 《송고승전》 원효전에 명시됩니다.
④ 원효의 무덤 각성담은 《송고승전》에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해골물을 마셨다는 내용은 없다.
⑤ 원효가 역사적으로 정확히 그 사건 하나 때문에 중국행을 포기했는지는 증명할 수 없다.
이는 승전 문학이 원효의 唯心(유심) 사상을 극적으로 표현한 장면일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⑥ 의상은 실제 중국 유학을 했다.
661년 입당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습니다.
⑦ 의상이 실제로 배운 스승은 지엄이다.
이 점은 전승상 매우 확고합니다.
18. 이 두 사람의 선택에는 더 깊은 사상사적 의미가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역설이 있습니다.
원효는 현장에게 직접 배우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라에 돌아와 현장 신역의 유식학을 누구보다 깊이 연구했습니다.
즉 원효의
“心外無法, 마음 밖에 법이 없다.”
는 말은
“책도 필요 없다.”
“중국의 학문도 필요 없다.”
는 반지성주의가 아닙니다.
원효는 귀국 뒤에도
유식(唯識)
중관(中觀)
여래장(如來藏)
기신론(起信論)
화엄(華嚴)
열반(涅槃)
등 당대 최고 수준의 불교학을 종합합니다.
그에게 귀환은 학문의 포기가 아니라 학문의 독립이었습니다.
19. 반면 의상의 중국행은 ‘외국 유학’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상은 중국에 가서 중국 화엄을 그대로 복사하지 않았습니다.
지엄에게 배운 뒤 668년
《華嚴一乘法界圖》
화엄일승법계도
를 완성합니다.
그리고 신라에 돌아와 의상계 화엄이라는 독자적 전통을 만듭니다.
따라서 의상의 노정은
中國華嚴
중국 화엄을 배우러 감
→
智儼
지엄에게 직접 수학
→
法界圖
법계도 창안
→
新羅華嚴
신라 화엄으로 재창조
입니다.
[출처] 新羅佛敎의 양대산맥 (元曉원효와 義湘의상)[一心(One Mind)一法界(One Dharmadhātu)]《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작성자 natural priest
| 원효를 시기하는 승려들이 많아 왕이 유명한 승려들을 초대하여 불법을 듣는 자리인 ‘백고좌회’라는 강연회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 왕실과 지배층을 중심으로 화엄종을 신라 사회에 널리 퍼트렸다. |
| ‘원효학’이라는 학문이 만들어질 정도로 깊이 있는 불교 철학 서적을 다수 남겼다. | 후세에 뚜렷하게 남을 정도의 학문적 업적은 없었다. |
|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고, 승려의 몸으로 요석공주와 사랑을 나누어 설총을 낳을 만큼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 제자 양성에 힘써 많은 제자에게 존경받았으며, 신라 지배층과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화엄종을 발전시켰다. |
원효와 의상의 어린 시절
원효는 진평왕 시대에 승려가 된 사람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에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원래 성씨는 설씨로, 원효라는 법명은 새벽에 태어났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해요. 원효의 ‘曉(효)’ 자가 새벽을 뜻하는 한자예요.
원효가 불교에 입문1) 한 것은 아주 어릴 때였어요. 승려가 된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라 왕실의 적극적인 불교 장려책 속에 스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요. 하지만 말이에요, 당시 신라 사회는 진골 귀족에 의해서 운영되던 신분제 사회였기에, 원효와 같은 지방 출신들은 제아무리 똑똑해도 출세에 제한이 있었어요. 따라서 신분의 한계 때문에 일찌감치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2) 할 수는 없어요.
반면 의상은 귀족 출신이에요. 선덕여왕 13년인 644년 경주 황복사에서 승려가 되었는데, 그는 661년에 바닷길로 당나라에 들어가서 지엄 대사3) 를 스승으로 삼아 화엄종을 깊이 연구했어요. 그 후 670년에 귀국, 해동 화엄종을 창시하여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어요.
당 유학을 위해 길을 나서는 원효와 의상
원효와 의상이 한창 불법을 공부하던 때는 신라가 통일 전쟁을 치르던 태종 무열왕4) 시대였어요. 이 시기 신라 승려들에게는 당나라로 불교 유학을 가는 것이 일생일대 소원이었는데, 원효와 의상도 그러했어요.
두 사람은 처음에는 육지길로 당에 가기 위해 고구려 땅으로 몰래 숨어들어 요동 지방까지 올라갔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고구려 군사에게 붙들려 죽을 고비를 넘긴 끝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간신히 신라 땅으로 되돌아왔어요.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찔러야지, 뭔 포기가 그리도 빠르냐고요? 두 사람은 결단코 포기하지 않았어요. 고향 땅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당나라로 떠날 준비를 했어요. 둘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여 이번에는 바닷길로 가기로 했어요.
만반의 준비를 갖춘 두 사람은 경주를 출발하여 지금의 충청남도 천안 부근에 당도했어요. 밤은 깊어 가는데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져 참으로 난감한 처지에 빠졌어요. 원효와 의상은 부득이하게 무덤 안에서 하룻밤 머무는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워낙 피곤하여 무덤인데도 자리를 잡자마자 꿈나라로 깊숙이 빠져들었어요. 원효는 한밤중에 심한 갈증이 일어 비몽사몽간에 머리 위에 놓인 물병에 든 물을 마셨어요.
아침 해가 쨍쨍 무덤 위로 솟구쳤어요. 눈이 번쩍 뜨인 원효의 뇌리에 어젯밤 맛나게 먹은 물맛이 불현듯 떠올랐어요. 원효는 급히 물병을 찾았어요. 아! 아!! 아!!! 그러나······ 물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병이 아니라 해골바가지였어요. 갑자기 몸속에 있던 모든 것이 위로 밀고 올라왔어요. 한참을 토악질하고 난 후에야 진정이 되었어요. 그 순간 원효의 머리를 무언가가 비수처럼 꿰뚫고 지나가며 마음 문이 활짝 열렸어요.
“세상의 모든 일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더니,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5) 의 이치가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원효는 단박에 불법의 진정한 이치를 깨닫고 말았어요. 이제 그에게 당나라 불교 유학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았어요.
“스님, 나는 당에 가지 않겠소. 세상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는데, 내가 여기에 있은들 깨우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소. 나는 이곳에 머물겠으니, 스님 혼자 다녀오시오.”
결국 원효는 당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 혼자 당으로 건너갔어요.
불교 대중화에 나선 원효 대사
원효는 경주로 돌아온 뒤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며 불교를 전파했어요. 원효는 가는 곳마다 극락 세상을 주관하는 아미타부처님과 그의 조수인 관세음보살만 열심히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의 이러한 포교술은 신라 땅 곳곳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울려 퍼지게 했는데, 이 경구는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내 몸을 의지합니다’라는 뜻이에요.
불교 교리에 정통한 원효가 이것만 반복해서 외우면, 어려운 불경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 누구나 극락 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하니, 어느 누가 이걸 외우지 않겠어요? 하루 종일 일에 매달려도 먹고살기 힘들어 끙끙대던 농부나 어부까지도 일하는 틈틈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렸어요. 그러면서 불교는 귀족들만 믿던 고급 종교에서 민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대중 종교로 확산되었어요. 불교가 원효 덕분에 대중화되었지요.
한편 원효는 당나라에서 수입해 온 불교 경전 『금강삼매경』을 능수능란하게 번역 · 해설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그 해설서가 바로 원효의 대표 저서 『금강삼매경론』이에요. ‘론(論)’은 알기 쉽게 풀어 쓴 해설서를 말해요. 여기에 대승불교 개론서 『대승기신론』을 번역 · 해설한 『대승기신론소』를 지어 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주었으며, 『십문화쟁론』에서는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부처님의 제자이니, 싸우지 말고 협력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자는 화쟁(和爭)사상을 주장하기도 했어요. 이처럼 원효는 많은 승려들이 유행처럼 떠났던 당나라 유학을 가지 않고도 독자적인 철학 세계를 구축하여 불교를 백성과 가깝게 했으며, 여러 불교 철학 서적을 발간하여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불교계를 기름지게 만들어 주고 있어요.
해동 화엄종을 창시한 의상 대사
의상은 당나라로 들어가 화엄종을 열심히 공부했어요. 화엄종이 뭐냐고요? 천태종6) 과 함께 중국 불교를 대표하는 불교 종파예요. 의상이 유학을 떠난 당시에는 화엄종 제2대 교조 지엄 대사가 당나라 종남산에 있는 지상사에 살면서 제자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치고 있었어요. 의상은 먼 길을 걸어 종남산까지 찾아가 지엄 밑에서 화엄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지엄은 의상을 자신의 애제자로 인정했어요. 한편 그가 공부하는 과정에서 만든 ‘화엄일승법계도’는 화엄종의 핵심 사상을 정리한 도표로 현재도 널리 인정받고 있어요.
스승이 입적7) 하자 의상은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선진 불교 종파인 화엄종을 공부한 의상이 돌아오자 왕실부터 귀족까지 많은 사람이 의상 밑으로 들어와 화엄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신라 불교 자체가 한 단계 더 성장했어요.
신라 땅에서 유행한 화엄종은 삼국 통일 전쟁을 막 끝낸 신라 지배층에게 통합의 명분을 제공해 주기도 했어요. 아니!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화엄사상이 통일 명분까지 돼 줄 수 있었냐고요? 화엄종 교리 속에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사상이 들어 있어요. ‘하나인 것이 많은 것이요, 많은 것이 하나인 것이다’로 해석되는 이 사상은 삼국 통일 이후 새롭게 신라 사람이 된 고구려 · 백제 유민도 신라 백성이라는 통합 명분을 제공해 줄 수 있었어요.
원효와 의상. 한 사람은 선진 불교 유학을 중도에 포기했지만, 무지렁이 농민도 믿을 수 있는 불교사상을 신라 땅 곳곳에 전파하여 신라 불교를 대중화했어요. 반면에 의상은 당나라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신라 땅에 화엄종을 수입한 이후에 이 사상을 널리 퍼트리며 삼국 통일 이후 자칫하면 혼란스러웠을 신라 사람들에게 통합의 명분을 제공해 주었어요.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득도하여 신라를 불교 국가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어요. 원효와 의상 모두 빼어난 승려인 셈이지요.
화쟁사상和諍思想
우리 나라 불교의 저변에 깔린 가장 핵심적인 사상이다. 불교교단의 화합을 위한 화쟁과 불교교리의 화쟁으로 대별된다. 교단의 화합을 위한 화쟁은 불교의 계율에 잘 나타나 있다.
불교 교단을 뜻하는 상가(saṅgha, 僧伽)는 화해, 화쟁의 의미가 있다. 우리 나라의 승려들이 구족계(具足戒)로 받는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 중에서도 두번째 군(群)에 속하는 승잔계(僧殘戒)에 화합을 깨뜨리는 것을 경계한 몇 가지 조목이 보인다. 이들 소승계에서는 화합을 깨뜨린다 하여 승려의 직을 박탈하는 바라이죄(波羅夷罪)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승의 보살들에게 주어지는 보살계에는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죄를 바라이죄로 다루어 엄히 다스리고 있다. 보살의 십중대계(十重大戒) 중 제6인 ‘사부대중(四部大衆)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不說四衆過]’, 제7인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지 말라[不自讚毁他]’, 제10인 ‘삼보(三寶)를 비방하지 말라[不謗三寶]’ 등의 3계가 이에 해당한다. 신라의 고승들은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는 이들 계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크게 노력하였다.
특히, 원효(元曉, 617-686)는 보살의 십중대계 중 자찬회타계를 범하는 것을 가장 큰 허물로 보았고, 승단의 불화합이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므로 특히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비구계와 비구니계에서는 쟁론을 없애는 일곱 가지 멸쟁법(滅諍法)을 두었다. 승단에서 쟁론이 일어날 때는 그 해결점을 국법이나 속인에게 맡기지 않고 이 멸쟁법에 의해서 다스리게 되어 있다.
내용은 ① 본인이 있는 데서 잘못을 다스려라, ② 쟁론이 있을 때 잘못을 기억하게 한 뒤 죄를 다스려라, ③ 정신착란으로 논쟁을 일으켰으면 정상으로 회복된 뒤에는 묵인하라, ④ 마땅히 본인의 자백에 의하여 죄를 다스려라, ⑤ 마땅히 죄상을 추구하여 죄를 다스리되 반드시 다수결에 의하여 단죄하라, ⑥ 승단 내에서 파당싸움이 벌어져 잘잘못을 오랫동안 가리지 못할 때는 풀로 땅을 덮듯 불문에 붙여라 등이다.
더 나아가 승가교단의 단체생활의 화합을 위한 보다 적극적인 육화경(六和敬)이 제정되어 실천되고 있다. 육화경의 덕목은 신화경(身和敬)·구화경(口和敬)·의화경(意和敬)·계화경(戒和敬)·견화경(見和敬)·이화경(利和敬) 등이다.
신화경은 함께 예배하여 몸의 업을 닦는 것이고, 구화경은 함께 찬영(讚詠)하여 구업(口業)을 닦는 것이며, 의화경은 같은 신심(信心)으로 의업을 밝혀가는 것이고, 계화경은 똑같이 불계(佛戒)를 실천하여 불법을 함께 따르는 것이며, 견화경은 함께 모든 법의 공(空)한 이치를 바로 보고 실천하는 것이고, 이화경은 의식을 함께 하여 이익을 고르게 나누는 것이다.
이 육화경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선종을 중심으로 새롭게 제정되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에서도 승단의 화합이념으로 크게 신봉되었다. 이것을 살펴보면 몸으로 화합함이니 함께 머물러라[身和共住], 입으로 화합함이니 다투지 말라[口和無諍], 뜻으로 화합함이니 함께 일하라[意和同事], 계로써 화합함이니 함께 닦아라[戒和同修], 바른 지견(知見)으로 화합함이니 함께 해탈하라[見知同解], 이익으로써 화합함이니 균등하게 나누어라[利和同均] 등이다.
교리의 화쟁은 우리 나라 불교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화쟁사상은 신라의 원광(圓光, 542-640)이나 자장(慈藏, 590-658)에서부터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원광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정할 때 불교의 승려이면서도 유교를 비롯한 그 시대의 상황에 맞는 윤리관을 제시하였으며,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신라에 이익이 돌아오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원융(圓融)의 바탕 아래 무쟁(無諍)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자장은 종파분립을 초월한 통화불교(統和佛敎)의 길을 걸음으로써 우리 나라 불교를 중국 불교와는 다른 독특한 불교로 이끄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계율생활을 엄히 다스려 교화에 진력하였지만, 계율종(戒律宗)이라는 종파를 따로 개종(開宗)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엄사상이나 신라불국토사상(新羅佛國土思想)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섭론종(攝論宗)이나 정토교(淨土敎)에도 적지않은 관심을 가짐으로써 종파의 분립 없이 통화불교로 교화에 진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원광과 자장에 의하여 싹이 튼 화쟁사상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원효에 의하여 집대성되었고, 일찍이 그 어떤 불교인도 이루지 못하였던 화쟁의 논리를 확립시켰다.
원효는 많은 글을 썼지만 문자나 형식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강조하는 한편,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깊은 철학과 함께 항상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평등 가운데 차별이 있으며 차별 가운데 평등이 있다는 화엄(華嚴)의 사상을 쉽게 풀이한 <무애가(無碍歌)>를 지어 뭇 사람의 관심을 끄는 가운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큰 표주박을 두드리면서 노래하며 이 거리 저 마을에 나타남으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평화와 화합이 깃들인 신라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원효는 대중과 함께 살고 고락을 같이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더 많은 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가에 마음을 기울였던 것이다. 화쟁의 원리에 입각하여 행동하였던 그는 저술활동에 있어서도 화쟁사상의 천명에 큰 힘을 기울였다.
불교사상에 관한 것이라면 대승·소승을 막론하고 무엇이든 읽고 연구하면서 사색과 체험을 통하여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그 이해한 바를 남김 없이 글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경전마다 종요(宗要)를 지어 그 경전의 특징적인 요지와 함께 다른 경전과도 서로 화합할 수 있는 화쟁의 원리까지 제시하였다.
불교의 이론은 대체로 연기론(緣起論)과 실상론(實相論)의 둘을 바탕으로 해서 무궁무진하게 전개되어 인도에서는 부파(部派)를, 중국에서는 많은 종파가 성립되어 각각의 종지(宗旨)를 고집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원효는 그 어느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도 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분석하고 비판하고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하여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았다. 모순과 대립을 한 체계 속에 하나로 묶어 담은 이 기본구조를 가리켜 그는 ‘화쟁(和諍)’이라 하였다. 통일·화합·총화·평화는 바로 이와 같은 정리와 종합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하였다.
화쟁은 그의 모든 저서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기본적인 논리이다. 마치 바람 때문에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지만 그 파도와 바닷물이 따로 둘이 아닌 것처럼, 중생의 일심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그렇지 못한 무명(無明)이 둘로 분열되고는 있으나, 그 진여와 무명이 따로 둘이 아니라 하여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화쟁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성질을 지니고 있으므로 다같이 성불(成佛)할 수 있다고 하는 한편, 악한 짓만을 일삼는 무리인 일천제(一闡提)는 성불할 수 없다고 설하였다. 중국의 법상종(法相宗)이 일천제의 성불을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하여, 원효는 폭을 넓혀 마음의 핵심인 아뢰야식(阿賴耶識)에는 본시 부처가 될 요소인 무루종자(無漏種子)가 있는 것이라 함으로써, ≪열반경종요≫에서는 일천제도 성불시키는 화쟁의 솜씨를 보였다.
원효가 화쟁에 자주 사용한 방법의 하나는 차원 높은 은밀문(隱密門)과 보다 차원이 낮은 현료문(顯了門)의 두 문을 설정하는 일이었다. 불교수행에 있어서 근본적인 장애를 가져오는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煩惱障) 등 이장을 끊는 일은 매우 중요하므로 ≪대승기신론≫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도 다같이 이 문제를 다루었지만 그 견해는 서로 달리하고 있다.
이에 원효는 ≪이장의(二障義)≫를 지어 대승기신론과 유가사지론의 두 논설을 각각 현료문과 은밀문으로 설정하고, 현료문에 의해서는 은밀문의 소지장을 설명할 수 없어도 현료문의 이장은 번뇌장을 가지고 능히 설명된다고 함으로써 두 논설을 하나로 묶었다. 원효가 주창한 화쟁사상의 근본원리는 인간세상의 화(和)와 쟁(諍)이라는 양면성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화쟁은 화와 쟁을 정(正)과 반(反)에 두고 그 사이에서 타협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합(合)이 아니라, 정과 반이 대립할 때 오히려 정과 반이 가지고 있는 근원을 꿰뚫어보아 이 둘이 불이(不二)라는 것을 체득함으로써 쟁도 화로 동화시켜 나간다. 천차만별의 현상적인 쟁의 상태도 그 근원에서 보면 하나로 화하는 상태에 있을 뿐임을 체득한 원효는 이 원리에 따라 진망(眞妄)·염정(染淨)·이사(理事)·공유(空有)·미오(迷悟)·인과(因果) 등을 불이의 화쟁론으로 전개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원효의 화쟁사상은 이후의 우리 나라 승려들에 의하여 계승되었음은 물론, 중국의 법장(法藏, 643-712)과 징관(澄觀, 738-839)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일본에서도 크게 신봉되어 (善珠, 723-797)·명혜(明恵, 1173–1232)·응연(疑然, 1240–1321) 등은 그의 설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을 계승하여 널리 선양한 고려시대의 고승으로는 의천(義天, 1055-1101)이 있다. 그는 원효의 화쟁사상이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과 그 맥을 같이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천태종(天台宗)을 창종(創宗)하여 화엄을 비롯한 여러 교학과 선을 일치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는 화엄종에 속한 승려였지만 당시 화엄종과 법상종에서 각각 성(性)과 상(相)의 문제를 놓고 오랫동안 쟁론을 계속하였으므로 성상융회(性相融會)를 내세워 이들을 화쟁시키고자 하였다. 나아가 지관(止觀)의 수행을 중시하는 천태종을 창종하여 선종과의 화쟁도 꾀하였던 것이다. 그의 교관병수사상(敎觀幷修思想)은 화쟁의 원리를 가장 잘 채택한 것으로, 우리 나라 불교의 한 전통적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의천이 교의 입장에서 선을 수용하려고 하였던 데 반하여, 지눌(知訥, 1158-1210)은 선을 중심에 두고 교를 통화하려 하였다. 그는 참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별하였으나 그것이 둘이 아님을 잊지 않았고, 선종의 승려로서 평생을 참선에 몰두하였지만 틈틈이 불경을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눌은 부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선이요 부처의 말을 깨닫는 것이 교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과 교는 서로 떨어질 수 없고 함께 닦아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당시 세상사람들이 부처의 참뜻을 모른 채 선종이니 교종이니 하고 싸우는 것을 막고자 하였고, 그 무의미한 논쟁을 매듭지어 참다운 수행의 길을 걷게끔 하기 위하여 일생 동안 노력하였다. 오늘날 지눌을 선교합일(禪敎合一)의 주창자요 정혜쌍수(定慧雙修:선과 교리를 같이 닦음)의 구현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화쟁정신에 입각한 것이다. 그 이후 우리 나라 불교는 선과 교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의 전통을 계속 유지하게 되었다.
또, 조선 초기의 고승 기화(己和, 1376-1433)는 불교 내의 화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교와 불교와의 화쟁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유불의 논쟁은 고려 때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었지만,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기 때문에 논쟁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억불정책으로 불교를 핍박하자, 기화는 ≪현정론(顯正論)≫·≪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등을 저술하여 억불의 부당성과 함께 유불도 3교의 회통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현정론≫의 첫머리에서 유교의 오상(五常:五倫)과 불교의 오계(五戒)를 비교하면서 불살생(不殺生)은 인(仁)이요, 부도(不盜)는 의(義)며, 불음(不淫)은 예(禮)요, 불음주(不飮酒)는 지(智)며, 불망어(不妄語)는 신(信)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교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은 주로 정형(政刑:정치와 형벌)으로 정형적 교육에는 상벌이 따르고 상벌은 일시적인 복종만을 조장시키는 데 반하여, 불교는 인과법을 가르치기 때문에 각자가 스스로 깨닫고 자각적으로 심복(心服)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그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어서 상벌로 지도해야 할 사람들도 있고 인과법으로 지도해야 할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유교나 불교가 둘 다 필요하다는 화쟁론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불교의 중흥조라 일컬어지는 휴정(休靜, 1520-1604)은 지눌의 정혜쌍수를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선과 염불의 일치를 주장하여 선과 교와 염불의 조화를 정착시켰다. 그 뒤 조선시대에는 이 셋을 함께 공부하는 사상적 조류가 계속됨에 따라 우리 나라 불교는 종파를 중심으로 한 사상적 논쟁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조선왕조 500년의 억불책 속에서도 불교가 그 혜명(慧命: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전승할 수 있었던 것도 이 화쟁사상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왕실과 유생들의 탄압을 쟁으로 맞서기보다는 화의 정신에 입각하여 쟁을 이겨나갔고, 오히려 쟁을 화로 승화시켜 그들을 교화시켰던 것이다. 화쟁사상은 절대자유와 평화완덕(平和完德)을 그 이상으로 삼은 것으로, 석가모니 이후 우리 나라 불교에서 꽃피우게 된 금자탑으로 평가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