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aser Head 1978) : 1970년대 컬트영화의 대명사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감독
1970년대의 가장 흥미진진한 영화 현상은 컬트영화의 등장이다. 심야극장의 영화광들은 <럭키 호러 픽쳐 쇼>를 계기로 해서 컬트영화 신드롬을 만들어냈으며, 세상에서 가장 기괴하고 이상한 영화들을 차례로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8년에 드리어 자기 세대의 컬트 영화 감독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데이비드 린치였다.
미술을 공부하고 애니메이터로 일하던 데이비드 린치는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살려서 장편영화인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를 찍었고, 그 결과 초현실주의 회화와 실험영화가 결합한 악몽 그 자체의 영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단숨에 컬트영화의 명단에 올라간 이 영화는 꿈과 현실, 천국과 지옥이 모두 끔찍하게 뒤틀린 세상의 풍경을 보여준다. 방전된 것처럼 머리털이 곤두선 헨리는 움직이는 닭요리를 먹고, 운행에 문제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해초 더미가 자라나는 방에서 산다.
헨리는 강경증에 걸린 여자 매리(그의 할머니는 살아 있는 시체 같고, 아버지는 한쪽 팔이 마비되어 있다)와 결혼하여 기형아를 키우게 된다. 매리의 주변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의 세계인데, 그는 헨리에게서 정충처럼 보이는 것을 빼내어 기형아를 만들어낸다. 다른 하나는 라디에이터 속에 살고 있는 소녀의 세계이다.
“천국에서는 모든 일이 잘 된다”고 노래하는 소녀는 춤을 추면서 정충처럼 보이는 것을 발로 밟아 터뜨려버린다. 라디에이터를 바라보며 마음의 안식을 얻던 헨리는 아내가 버린 기형아를 가위로 찔러 죽이고, 그 세계로 들어가서 소녀의 품에 안긴다.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매리라는 이름을 성모 마리아로 생각하고, 기형아의 모습에서 털을 벗겨낸 어린 양을 떠올린다면(매리의 어머니가 헨리에게 매리와 성관계가 있었느냐고 추궁할 때,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화상을 입은 남자는 신으로 해석된다. 그는 원자 폭탄과 공해에 찌들어 기형아를 만들어내고, 낙태로 무수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세상의 신으로서 침묵으로 일관한다. 폐허 같은 건물들과 썩은 물이 고여 있는 거리,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은 또한 산업사회의 악몽이다(헨리의 직업은 인쇄공이다).
헨리의 가족은 오이디푸스 가족 내부의 콤플렉스를 드러낸다. 끊임없이 울어대며 부모에게 쉴 틈을 주지 않는 아이는 가정의 행복이 언제라도 불행의 씨앗으로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매리는 헨리의 손길을 피하고, 헨리는 매리의 배에서 탯줄 같은 것을 꺼내 벽에 던진다. 그들의 절망적인 몸짓에는 성관계의 공포와 아버지가 되는 두려움이 배어 있다. 그러나 무수한 퍼즐 조각으로 가득 찬 수수께끼 같은 영화는 이 모든 해석을 무색하게 만든다.
데이비드 린치는 <엘리펀트 맨>과 <블루 벨벳>으로 아카데미 영화제의 감독상 후보에 지명되었고, 곧장 제도권으로 진입했다. 그는 텔레비전 시리즈 <트윈픽스>를 제작하면서 컬트 영화의 감수성을 일반 대중에게 확산시켰으며,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광란의 사랑>으로 그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작가주의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레이저 헤드>에서 <광란의 사랑>까지, 데이비드 린치가 걸어간 길은 또한 영화 신드롬의 운명이 되었다.
ㅡ김경욱
줄거리
젊은 헨리 스펜서(Henry Spencer: 잭 낸스 분)는 산업화된 도시의 황폐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의 여자 친구 메리 X(Mary X: 샤롯 스튜어트 분)는 임신한 상태이다. 그는 아파트를 나와 여자 친구와 그녀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 그녀의 아버지는 화학 식품에 집착하는 병적으로 활동적인 사람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성적 매력 때문에 극도로 불안해하는 사람이다. 할머니는 부엌에 앉아있는데 아마 죽은 것으로 보인다. 메리는 헨리와 함께 들어와 그들의 아기를 돌보는데, 그 아기는 형태가 완전하지 않고 티슈 덩어리나 껍질을 벗긴 양 같이 보인다. 메리는 아파트 밖으로 나가고 헨리만 아기와 함께 남는다. 우연한 비극적인 사건 이후, 헨리는 영화가 시작될 때부터 그의 현실 세계의 경계선에 존재하고 있던 악몽 속으로 던져진다.
상세 줄거리
<이레이저 헤드>는 1977년에 개봉된 미국의 초현실주의 영화로서, 데이비드 린치의 장편 데뷔작이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영화 일을 시작했다. 미국 영화 연구소에서 후원받은 1만 달러를 가지고 1971년에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이레이저 헤드>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를 완성하기에는 예산이 부족했기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첫 장면까지만 1년 반이 소요됐고, 주연배우 잭 낸스는 이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4년여 동안 고수해야 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예산을 모으기 위해, 여러 가지 잡역을 했고, 친구와 가족들로부터 돈을 끌어 모으기도 했다. 이때 돈을 빌려준 친구 중에는 영화배우 씨씨 스페이식의 아내인 미술 감독 잭 피스크도 있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이러한 노고 끝에 5년 만에 영화를 완성시킨다.
<이레이저 헤드>는 뉴욕 영화제에서 상영이 거절당했고, 첫 상영 당시 관객 수는 단 24명뿐이었다. 영화 평론가와 관객들 사이에서 평이 양분되었고, 소수만이 영화를 지지했다. 이후 소수의 열광적 지지에 힘입어 컬트영화의 대명사로 인정받으며 유령처럼 세계에 퍼져나갔다. 2004년에는 미국의회도서관으로부터 “문화적, 역사적, 미적으로 중요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고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영구 보존되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은 스스로 “어둡고 기분 나쁜 꿈” 같은 영화라고 평하며, 자신의 가장 영적인 작품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배경은 산업화된 어느 이름 없는 황량한 도시이다. 헨리 스펜서(잭 낸스)는 휴가 중인 인쇄공이다. 영화는 어느 행성에서 기이한 남자(잭 피스크)가 창문 밖을 보면서 거대한 레버를 만들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헨리의 입에서 채찍 모양의 이상한 생물체가 나와 날아간다.
다시 무대는 도시로 돌아온다. 헨리는 식료품 봉지를 든 채 음침한 아파트로 들어간다. 그러던 중, 옆집 여자(주디스 안나 로버츠)를 만난다. 헨리는 그녀로부터 여자친구인 메리 X(샤롯 스튜어트)가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고 전해 듣는다. 헨리는 집으로 들어간다. 날카롭고 이상한 소리(아마 라디에이터일 것이다)가 끊임없이 들리고, 바닥에는 잘린 나무가 있고, 침대 옆 탁자에는 흙더미에 심어진 죽은 묘목이 있고, 벽에는 핵폭발 사진이 걸려 있다. 하나밖에 없는 창문으로는 옆 건물의 벽밖에 안 보인다.
그날 저녁, 헨리는 여자친구 메리의 집에 간다. 메리의 엄마(잔느 베이츠)의 어색한 말투와 메리의 이상한 모습에 헨리는 불안해한다. 저녁 식사 중 메리의 아빠(알렌 조셉)가 횡성수설하자, 메리의 엄마는 화가 나고, 헨리는 당황한다. 저녁 식사로 나온 닭고기를 건들자, 검은 액체가 쏟아져 나온다. 식사 중의 대화는 부자연스럽고 어색하다. 식사 후, 메리의 엄마는 헨리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키스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선 메리가 조산했다고 말한다. 메리는 울면서 그녀가 낳은 게 아기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말한다. 메리의 엄마는 아기가 맞으며, 헨리가 메리와 결혼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메리는 아기를 데리고 헨리의 아파트로 이사 온다. 아기는 소름끼칠 정도로 기형적이고 비인간적인 형상을 하고 있다. 목은 길고, 눈은 머리 옆쪽에 있으며, 귀는 없고, 팔다리가 없는 미끈미끈한 몸은 붕대로 싸여 있다. 아기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저녁 내내 기괴하게 운다. 어느 밤, 메리는 끊임없는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친정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아기가 조용해지자 헨리는 온도계로 아기의 온도를 재본다. 그러더니 아기의 몸은 염증으로 뒤덮이고, 아기는 숨을 헐떡인다. 아이와 함께 남겨진 헨리는 계속해서 이상한 일들을 겪는다. (영화에는 그 일들에 대한 어떠한 부가 설명도 없다).
이를테면 기이한 형상을 한 ‘라디에이터 속의 여자’(로렐 니어)를 본다던지, 옆집 여자와 성관계를 맺는 일들이 일어난다. 기괴하게 큰 볼을 가진 ‘라디에이터 속의 여자’는 무대에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헨리는 꿈을 꾸는데, 꿈에서 헨리의 머리는 터져서 날아가 버리고 머리가 있던 자리에 아기의 머리가 솟아난다. 헨리의 머리는 웅덩이로 떨어진다. 어느 소년이 헨리의 머리를 연필 공장으로 가져간다. 그곳에서 헨리의 머리는 연필 지우개의 재료로 쓰인다.
꿈에서 깨어난 헨리는 옆집 여자를 찾지만, 그녀는 집에 없다. 아기는 조롱하듯이 낄낄댄다. 잠시 후, 옆집 여자가 어떤 남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헨리의 머리는 아기의 머리로 바뀌어 있다. 그걸 본 여자는 기겁한다. 실망한 헨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아기가 다시 울기 시작하자, 헨리는 가위를 찾는다. 그리고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히 아기의 몸을 감싸고 있는 붕대를 자른다. 그러자 아기의 내장이 보인다. 아기가 고통스러워하자, 헨리는 겁에 질려 아기의 내장을 가위로 찌른다. 아기는 죽기는커녕 고통에 떨며 경련을 일으킨다. 헨리는 도망친다. 아기의 내장에서 이상한 액체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곤 이내 거품이 아기의 몸을 뒤덮는다. 헨리는 겁에 질려 그 모습을 본다. 아기의 목은 영화의 시작부에서 나온 채찍 모양의 생명체처럼 길어진다. 거대해진 머리는 헨리에게 접근해온다. 전기가 나가고, 거대한 머리는 ‘행성’으로 바뀐다. 행성의 구멍으로 얼굴이 불타고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헨리는 ‘라디에이터 속의 여자’를 껴안는다. 백색 소음이 커지고 화면이 암전되면서 영화는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