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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민 대표시 104편
《1》 가을 노래
《2》 거울
《3》 국화
《4》 그 이후
《5》 그대 마음 훔쳐 싣고
《6》 기도
《7》 난(蘭)
《8》 내 유년의 보리밭에는
《9》 단풍
《10》 대나무
《11》 도망친 암소
《12》 또 하나의 직함
《13》 미세먼지 공화국
《14》 민들레꽃
《15》 바다
《16》 바닷가에
《17》 바람꽃 해후
《18》 바람이 떨어뜨린 쪽지
《19》 버리는 연습
《20》 봄 비
《21》 빈 바다
《22》 빗속의 계절 여행
《23》 빗속의 연가
《24》 사는 방법
《25》 사랑의 언어 1
《26》 산사풍경
《27》 삶의 자투리
《28》 새길
《29》 선언
《30》 소라
《31》 수박밭 며느리
《32》 승부시대
《33》 아내 바보
《34》 어떤 고해성사
《35》 엄마
《36》 연꽃
《37》 열매
《38》 우리 부부는
《39》 인생 통장
《40》 인생론 (1-10)
《41》 일기
《42》 자연의 아들
《43》 중생에도 법어가
《44》 지구가족
《45》 진달래꽃
《46》 징검다리 건너
《47》 착각
《48》 판도라 상자
《49》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50》 행복합니다 (노래가사)
《51》 흑백사진 한 장이
《52》 마음이 몸에게
《53》 시간은행
《54》 국민
《55》 지는 벚꽃이 더 아름답다
《56》사랑의 빛
《57》밤꽃 피는 밤
《58》두릅나무의 한(恨)
《59》민화 한 폭
《60》이장님 말씀은
《61》부부
《62》멸 치
《63》가을 산
《64》깡 통
《65》4월에
《66》5월밤 연가(戀歌)
《67》가을 사랑
《68》첫눈 오는 날
《69》눈 내리는 날
《70》돌고 싶은 풍차
《71》명퇴 면장 우리 덕배 씨의 하루
《72》물구나무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73》밤과 같이
《74》수통골 연달래
《75》순이는 여승의 딸
《76》피력(披 瀝)
《77》가을비 곱게 내리는 저녁나절에는
《78》주민등록증을 갱신하며
《79》바람 일기
《80》동물농장에서 온 편지
《81》독도
《82》충청도
《83》그대 마음 훔쳐 싣고
《84》저울산 밑의 풍경화
《85》바람꽃 해후(邂逅)
《86》계룡 단풍
《87》빛바랜 사진첩
《88》의원님의 자격 요건
《89》꽃신 사오셨네
《90》마누라 미투
《91》비무장지대
《92》스님은 행복도시로 내려갔지
《93》품격
《94》가위 바위 보
《1》 가을 노래
전민
출발이
잘못이었다면
결과는 진실이 아니다
진실은
가두려 할수록
몸밖으로 삐져 나온다
가을밤
영혼의 깃발을
펄럭이는 계절풍
사색은
삶의 원동력
삶은 사색의 열매
기다림은
시간이 길수록
아픔이 깊을수록
그 가치의 농도가 짙다
마음 아파 본 이는
거짓 사랑에도
가슴을 열고
자선을 베푼다
추억은
유년의 텃밭에
---
《2》 거울
전민
웃는 사람 보며 울지 않았고
우는 사람 향해 웃지 않았다
너 안에 내가 있어 행복했던
한 번도 배반하지 않은 친구
《3》 국화
전민
내 너를 좋아하는 연유는
사라지는 계절의 뜨락에서
삶 자체가 표현이기 때문
눈물겨운 가식과의 전쟁이
그대만의 색깔과 향기만이
마음밭 풀숲의 한 모퉁이에
의미다운 꽃으로 피기 때문.
화려한 보상을 꿈꾸지도 않고
픙성한 열매를 목표하지도 않고
짧은 세상 살아가는 것이
세속적인 잔치도 아닌 것이
마음과 가슴의 텅 빈자리에
고집스런 삶의 향기론 의미로
꽃답게 다가와 피어주기 때문
《4》 그 이후
전민
1
막차가 떠난 철길
반대쪽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꽁무니에서 내뿜던
매캐한 애증도
북풍받이 언덕에서
훔쳐본 뒤통수의 매무새도
원점에서 멀어질수록
그늘 짙게 깔려오는데
칠팔월 복중에도
어김없이 찾아들던
오슬오슬 살 추위.
2
때로는 앞보다도 더
뒤를 돌아보았다
때로는 빈자리
메꾸며 마냥 서있었다
얼마고 서있었다
꽃불 난 봄 동산
불사르는 사르비아꽃 여름
타고 남은 재 알 모으던 가을
텅 빈 가슴 불타고 있는 두 장작
모든 것 다 버리고 나도
더욱더 세게 불어오던 바람
세월과 거래하지 않으며
삥삥 돌아오던 바람.
《5》 그대 마음 훔쳐 싣고
전민
새벽 봄비 발자취에
선잠 깬 이른 아침에는
막 목욕 후 머리 빗고 있을
고향 언덕 청보리 밭
배동 오르고 있는 新婦가
야리리 풋살 내음 품기며
하루의 쟈크를 열고
비 맑게 갠 뒤
옛 그림자 , 아침햇살 타고
닦아놓은 내 마음의 창에
파도처럼 밀어닥칠 때
화사한 찔레꽃 덩쿨
곱게 덮어 가는
유년의 뒷동산에 올라
풀피리 늴리리, 저기에
하얀 드레스 자락 날린다
소장산 연달래 꽃불
저녁노을에 옮겨 붙어
바라보며 뒤는 가슴 깊이
연분홍 꽃물 스며들 때
지켜오던 자리 용수철처럼
빈손 탁탁 털고 일어서
역류하는 물살따라
그대 마음 훔쳐 싣고.
《6》 기도
전민
왕이 아닙니다
황금도 아닙니다
지위나 권력도 아닙니다
당신의 노예가 되어도
밟고 뭉개려 하지 않고
촌스럽고 못났어도
외면하며 따돌리지 않고
모자란 사람처럼 보여도
지청구 자주 하지 않고
반가와서 내민 손을
쓸쓸히 다시 넣지 않게
잠자리에 들어와서
남모르는 눈물 흘리지 않게
베풀고도 남은 당신의 뜻을
마지막 나의 선물이
될 수 있게 살펴주소서.
《7》 난(蘭)
전민
한 세상
욕심 채워 살면
못할 일 뭔가
모래 섞인 물에
눈부신 빛 막아 줄
벽 하나 있으면 되지
짧은 생애
광내며 살려면
못 살 거 뭐 있나
곧은 줄기
있어서 흐뭇한 친구
꿈의 향기 찾아주면 고만이지
젊은 문지기가
아무도 모르게
공주님의 머리에
꽂아준 선물
난초꽃
《8》 내 유년의 보리밭에는
전민
내 유년의 풋보리 밭에는
꿩알 주우러 아침에 들어간
동네 친구 철이가
점심 때가 넘어 저녁
다시 몇 밤, 몇 달
몇 해가 지난 여직까지
억새꽃 나비 되어
노을 밭 서성여도
깜장 고무신 뒤꿈치 한 쪽
내보이지 않고
내 유년의 청보리밭에는
숨바꼭질 놀이 하다가
짚 더미 넘어간 술래
숫자 세어가는 목소리
들려올 듯, 말 듯
앞머리 뒤통수 덮어
꿈결에서 챙겨봐도
긴 머리칼 한 올
넘어오지 않고
내 유년의 갈보리 밭에는
길찬 장다리 꽃밭에서
밀려온 노랑나비 한 쌍이
날개깃에 묻힌 보리깜부기
서로 털어다가
호랑나비가 되어
마음속 사래 긴 밭
돌고 돌아 찾아봐도
풀피리 소리 한 잎
돋아나지 않고
《9》 단풍
전민
지천명의 텃밭을
튀어나간 불씨 하나
가을 산을 태운다
잎도 태우고
줄기도 태우고
뿌리까지 태운다
석양에
추억만, 그대처럼
가슴속에 숨어있다.
《10》 대나무
전민
나에게는
한 송이 화려한 꽃도
한 알의 튼실한 열매도
약속되어 있지 못합니다
언젠가 에는 꽃이 필 수 있고
정말로 언제쯤엔 열매가 열릴 수 있는지
자신도 모르며 살아오고 있는 오늘
비바람이 씻고 지난
몇 십 년 후에는
꼭 한 번 쯤
사랑의 꽃 몽올도
믿음의 열매 알도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른다며
잎 떨어져 가는 아픔을
마디마디에 숨기고 있는
인고의 긴 세월
기도의 내 시간.
《11》 도망친 암소
전민
내가 무슨 큰 죽을죄를 지었나요
가해자를 들이받고 도주한 정당방위인데
가산 늘려주려고 아기 낳아 주었고요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온갖 힘든 논밭 쟁기질 혼자 다 하며
한평생을 주군에 충성을 다 바쳤는데
나이 들어 기력이 좀 떨어졌다고
돈벌이 아이도 낳을 수 없을 거라고
형장으로 무작정 끌고 가 , 토사구팽
목숨 보전하기 위해 도주한 죄의 대가를
인간들의 맛 감으로 갚으려 하고 있어요
새소리와 물소리만이 내 친구인 숲속에서
인간악마가 쏜 저주의 마취 총에 맞아
정신은 몽롱해지고, 푸른 하늘은 노랗고.
《12》 또 하나의 직함
전민
아내는 달걀장사 사모님
나는 수박장수 선생님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양계장 집 아줌마 좀
도와주며 살고 싶다며 몇 번 거들더니
아내는 아파트 통로의 달걀장사 사모님이 되셨고
트럭운전수와 눈 맞아 도회지로 줄행랑친
수박밭 며느리의 홀시어머니 사정이 하 딱해서
스무나문 통 남짓 사다가 인심 좀 썻더니
그 이틑날 부터 나는 수박장수 선생님이라는
또 하나의 직함을 달고 다니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의 젊은 주부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최고만 찾기 때문에
알이 굵은 계란과 조금 싱싱한 수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뽑혀서 나가고
작은 것, 깨진 것, 꼭지 빠져 시든 것만 남아
중년 부부인 우리들의 마지막 차지가 된다
사실은 가정에서도 매한가지다.
《13》 미세먼지 공화국
전민
우리가 살고 있는 온 세상이
언제 어디서부터인가
흑백텔레비전 속으로 피난 나갔다
높고 파란 하늘도
도시의 건물과 거리까지
울창한 숲과 맑은 시냇물을 몰고서
세상 구경나온 사람들을 유혹하여
어제까지 말짱하던 대낮이
아침부터 어둑어둑 물들어오고
사람들의 폐 속에서
심장과 머리통까지 붉은 먼지가
핏줄에 업혀 핑핑 돌아가고 있으니
숨쉬기 힘든 공화국에 태어난
간난 아기가 빨강 오줌똥 싸며
어른으로 커갈까 참 걱정이다.
《14》 민들레꽃
전민
맨발로 짓밟아 다오
차라리 뿌리 채
뽑히고 싶어라
나는 앉은뱅이 꽃
이제사
두고 온 하늘 그리며
눈물 짜 어쩌잔 말이냐
외옴드레, 민들레야
햇살 터 이슬 마를 때
정성껏 피워 보이고
짙은 어둠 덮어 올 때
곱게 접어 숨으며
날 좋아 받은 날
하얀 속살 빼내
네 혼(魂) 쒸워
오월 하눌 찾고 싶은.
《15》 바다
전민
삶의 무게에 짓눌려
가슴이 답답하여 올 때
야위여 가는 오늘의 그믐달을
어제의 보름달로 잘못 바라보다가
고향 냄새가 못내 그리워 올 때엔
태초의 태양과 시원한 바람을 잉태한
영혼의 태반, 어머니, 저 바다로 가자
바다 해(海)자에는 어미 모(母)자가
바닷속에는 자비의 손결이 있다
일렁이는 파도를 첫아이처럼
돌보는 바다에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의 다소곳 여민 가슴속에는
높은 하늘과 깊은 바다가 있다
천지가 하나로 만나는 수평선 위에는
사랑과 은혜가 점선으로 그어져 있다.
《16》 바닷가에
전민
미역 냄새 해초 내음 갯골 타고
촉촉이 불어오는 솔숲 언덕에다
행주치마 너비만 한
초집 한 채 오뚝이 마련하고
둘이는 하나처럼 살겠네
토방 위엔 세파에 깎인 조가피와
천년 씻긴 조약돌이 가득하고
나는 철없는 내 아이들처럼
맨발로 모래밭을 휘젓다가
개흙이 묻은 손끝으로
원고와 책들을 매만지며
책갈피 작은 바다 파도 따라
갈매기 되어 나를래
뭍을 떠난 꿈의 통통선
피안에 와닿을 때
밤 파도 소리는 일기 시작하고
비워둔 또 하나의 방에는
상현 달빛 외줄기
멀리서 들려오는 영혼의 속삭임을 부르며
가냘픈 맨살을 창틀에 부벼대며
제 몸 앓고 있을 걸세.
《17》 바람꽃 해후
전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애인
아도니스의 상처에 키스를 하자
바람 따라 피었다가 지고 마는
사랑과 이별의 다채색 무늬 결
피고름 헤집고 꽃이 피어났네
결 따라 피고 다시 지는 魂, 꽃.
남과 북, 틈 사이, 반세기만에
찾아내 대어본 따스한 실핏줄
봄 꽃몽올 터 오는가 했더니
새순을 또 흩날려 버렸나
치솟는 눈물 안으로 감추며
또 다른 상처의 바람꽃 해후.
장승처럼 굳어버린 사랑과 한을
이 가슴에 묻고 반 백년 살다가
바람 따라 와 만난 것도 잠시
구름으로 또 흩어져야만 하는가
두 몸통 속에 한 색깔로 녹여놓은
신화보다도 더 찐한 바람꽃의 해후.
《18》 바람이 떨어뜨린 쪽지
전민
캄캄한 밤보다는
대낮이 더 무서워요.
맹수보다는
인간이 더 무서워요.
자연 파괴범이 들어왔어요
못된 인간들이 몰려와
하늘이 내려다보고
가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어린 풀꽃의 목과
나뭇가지를 비틀어 꺾으며
나의 온몸을 더듬고 있어요
치마폭을 헤집고 있어요.
《19》 버리는 연습
전민
살아온 나이
살아갈 나이보다
중간은 넘었다 생각되면
차지하는 것보다는
이제 버리는 연습으로
마음을 비워가야 할 때다
어깨 끈을 짓누르던
잡다한 삶의 방정식과
애증의 찌꺼기와 분노를
걸어온 길을 돌아보다
지나간 시간을 새겨보다
잔직하고 싶은 것 하나
내 남은 생애 속에
쉼표 하나를 찍어두고
숨 고르는 연습하는 거다
《20》 봄 비
전민
미나리꽝 몸 푸는 기지개
안개는 버들강아지를 품고
속살 깊이 스며드는 봄 향기
귓불을 간지럼 태우는 봄비
눈꽃 가지에 숨겨놓았다가
봉긋이 기어 나오는 홍매화
화신을 꿈꾸는 꽃술 머리에
봄의 숨결 한 움큼 뽑아내
폭죽 터지듯 꽃망울 톡톡
눈시울 뜨거워지는 한 몸
겨울 나뭇가지의 봄노래
휘감겨 오는 축제의 행진
꽃씨 하나 묻어놓지 못한
고희의 문 윙크하며
은신을 곱게 벗어놓는 봄비
연초록 보따리 풀어놓았네
《21》 빈 바다
전민
물 빠진 갯벌엔
파도를 그리는 빈 배가
한 폭의 그림으로 머물고
목이 쉰
갈매기 두어 마리
고향을 부른다
빈 바다는
알 살 홀딱
드러내놓은 여자
일, 그 후에
곤히 잠에든 아내
썰물이
훑어줄 속살을
고이 어둠으로 입는다.
《22》 빗속의 계절 여행
전민
봄비 갠 뒤
타는 저녁놀은
연분홍 영산홍
라일락 꽃내음
포도빛 그림자
여름비 갠 뒤
바라본 하늘은
하늘하늘 치마폭
선보인 꽃당혜
드러난 외씨버선 코
가을비 촉촉한
내마음의 뜨락은
그네줄 잡은 손
힘차게 잡아당기자
비상하는 새
겨울비 촉촉히
그대 머무는 곳
울리지 않는 종소리를
캔버스에 담아 그리고 있는
눈먼 화가의 순정
《23》 빗속의 연가
전민
바이칼호수일까
갠지스강 상류이거나
세느강 혹은 나일강 일지도
아니면 아주 가까운 곳인
대청호수이거나 금강일 수도
모태는 강과 호수의 심원
그리던 하늘로 비상하다
산등성이와 나무가 가로막고
골바람의 등쌀에 못 이겨
산줄기와 해안선을 따라서
지상으로 낙하하는 천사의
고향은 마음속의 수중궁궐 .
《24》 사는 방법
전민
산이 좋아
산과 함께 살다보면
산사람 되어
들꽃 향기 아쉽고
들이 좋아
들과 함께 살다보면
들사람 되어
솔바람 소리 그립고
어제는
산을 올랐고
오늘은
들로 내려오는 참이다
비슷하게 사는 방법 없을까
이 세상 어딘가엔
두 팔 뻗고 노래 부를
그러한 곳이 있다는데
이 세상 어딘가엔
아까운 것 다 털고 일어서도
부러운 것 하나 없는 곳도
정말로 있다던데
황금 나팔을 불며
달려오는 쌍두마차는
내 차지가 아니라 해도
간간히 흐르는 실구름 한 점
얻어 두었다가
참참히 나르는 산비둘기
들 멧새 날개 깃 하나
빌어 두었다가
저 딴 세상 얘기
훔쳐 들으며
살아도 좋은.
《25》 사랑의 언어 1
전민
1
누에는 제 몸을 뽑아
껍질을 직조(織造)하지만
사랑은 영혼을 뽑아
진실을 가두는 자선을 베푼다.
2
내어주는 아량보다
베풀어 받는 은혜의 색깔
잃은 것을 그리워하기보다
아까와만 하는 그물에
밀물이 썰물을 덮쳐
네 마음 걸려 들어오고.
3
바랐던 것, 실뿌리
잎마디 숨소리까지
보듬고 가꾸기를 원했던 것은
네가 나의 봉오리로
여직껏 머물러 준
고마움 때문이었다.
4
돌개바람이었다
산파도 소리 때문이었다
외로운 님의 무덤 가에
영혼 되어 돌고 돌다가
남은 것은 알갱이
빈 껍데기만 날아갔다.
《26》 산사풍경
전민
저녁노을 침묵으로
나비 되어 산사에 내려앉고
외진 승방 감아 도는
스님의 독경소리에
외지에서 찾아온
수녀 한 분이
동양화 한 폭으로 머물러 있다
-석가여래상과 동안의 이 수녀님은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을까
도수 높은 안경을 눌러 쓴
무척이나 키가 큰 스님 한 분
다갈색의 바리때 닦아들고
승방 안쪽 문을 들어선다
수녀님과 스님의 두 눈 빛은
한 점에 멈춰 포개지고
무섭게도 조용한 시간은
어둠처럼 덮여가고
불교학원을 나와
수녀가 된 그녀와
수도원을 나와
스님이 된 그이의 그 이후는
서로가 말하지 말자는
오직 하나의 그 무엇으로
화석 되어 굳어져 가고 있었다
저녁노을 나비 되어
동양화 한 폭에
말없이 내려앉는……
《27》 삶의 자투리
전민
조그마한 화단 안의 풀꽃들과
눈싸움을 즐겼다
때로는 고집스러운 담벼락을 뚫고
나는 새의 깃에
하늘 가슴 깊이 안겨도 보고
떠나간 사람들의 얼굴 위에
또 다른 무게로 내려앉는 상(像)
눈물의 한 올을 찾아 백두산 천지로
한라산 백록담에서 캐낸 기쁨의 한 올로
숨겨둔 보물 상자를 찾아가듯
삶의 자투리를 찍어내며.
《28》 새길
전민
길이 한 줄 새로 생기면
사람들은 한동안 그 길로 가지만
옆으로 다른 길이 또 생기면
하나같이 새 길로 모여 든다
새 길을 다시 선택하고
다른 새 길이 생길 때까진
하나같이 자기 길로 믿는다
삶에는 최선의 길이 없단다
삶 자체가 모두 길이기 때문
앞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
걸어가야 할 내 길은 진정 어디인가
내 길을 찾기가 힘든 세상
눈과 가슴을 단번에 이어주는
가장 가까운 길은 왜 나에겐 없는가.
《29》 선언
전민
낡은 의식의 꼭지로
빨아 마시던 도회의 숲
고정관념의 뜰을 벗어나
그리움의 깊이 가슴 한 복판에
한 줄기 물꼬를 트고 싶다
일상의 틀에 녹쓴
세월의 빗장을 제치고
굳어버린 위선의 각질을
벗기고 씻기워
잠겨있는 삶의 물길 깊이보다
떠내려온 목표의 위치보다
더 깊게 , 멀리 흘러보내고 싶다
나 추워 하나 걸치고
남 부끄러워 또 주워입고
관객 눈치보다 불어난
삐에로의 패션무대
베르린장벽의 써치라이트
조명되어 다소곳해질 때
모두 벗어 내던지고 싶다
설원으로 달려간
겨울나무의 순수처럼
싸락눈 휘몰아 쌔리는
세태의 허허벌판에서
겹겹으로 껴입은 가식과
마지막 숨긴 변명까지
벗어 버리고, 내품어
태초의 나이고 싶다.
《30》 소라
전민
궁둥이가 앗 뜨거워
깊은 잠에서 깨어 난
대천 앞 바다의 소라는
청계천 굴다리 밑 손수레
포장마차 낡은 가스통 위
양은 냄비 속 끓는 물이
찾아온 밀물인지도 모르고
봄바람에 흔들리는 산과
출렁이는 파도를 그리며
껍질 밖의 세상에 취해
우리는 하늘 아래 한세상
흘러가는 새털구름이요
몰아가는 샛바람이라며
밤새워 긴 목만 움추린다.
《31》 수박밭 며느리
전민
봄 나비, 가을 고추잠자리로
꽃과 나무, 창공이건 바위거나
싫도록 앉았다 마음껏 날고파서
말라 비틀어져 가는 세월
역류하는 물줄기 되돌려 놓고
동굴 빠져 불빛 따라 왔어요
토끼 같은 자식, 능구렁이 남편
여수 같은 시어머니, 호랑이 시아버지
헌신발작 엎어놓듯 해놓고
보름달 바라보며 헛간 기둥 부여잡고
삼백 예순 닷새 그 어느 하루인들
뼛속 깊히 찾아드는 전율, 그 추위
그 누구 하나 알아주면 덮어줄까
2.5톤 트럭에 내 인생 모두 싣고
망 뚫고 나온 까투리처럼
들판 지나 숲, 비탈진 언덕에
장승처럼 서 있어요
산 아래 저 쪽에 불빛이 보여요
내 아직은 잘 몰라요
한 세상 박수 치며 살아가는 법
민들레꽃은 밤에 활짝 피고
설익은 수박도 달빛 받아
분홍빛 속살 더욱 돋아나고
한낮 땡볕 받아 세상사는 맛
찾아내는 것이 삶이 아니겠어요
삶의 답은 모범답이 따로 없고
오답이 더 정확할 때도 있거든요.
《32》 승부시대
전민
자선을 베풉니다
원하는 분은 모이시오
소낙비 몰고 올 먹구름처럼 모이시오
받으려는 욕망은 베풀려는 의욕보다
한 발 치 앞에 서 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돌아보지 못하는 땅은 하나도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전투에서 이긴 자에게는 권리가 있습니다
권리는 하나의 완벽한 몫을 부여 합니다
몫이 없는 자에게는 이름이 없습니다
빼앗긴 이름은 꽃이 필 수 없습니다
이름이 붙여진 꽃은 청구서를 내시오
자선사업에 나타난 청구서의 위력을 아십니까
돌아서는 지성에는 노래가 없습니다
왼쪽 날개에 붙은 불꽃은 비상이 될 수 없습니다
갈대밭에 파닥이는 날개를 찾으셨습니까
고정관념의 줄을 잡은 구원의 손에 갈증 품은
연대의 화살촉이 날라 갑니다
양보는 패배보다 더 약한 권리입니다.
《33》 아내 바보
전민
나는 아내를 위한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나는 아내를 죽도록 사랑한다
고로 나와 아내와 가족이 함께한다
이 세상에서 아내를 빼놓고 보면
산과 들에 꽃이 없는 것과 같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퇴직한 후부터는 부엌을 인수하여
평일에는 집 밥상을 손수 차린다
주일에는 미사를 같은 차로 가며
시간만 허락되면 운전기사가 된다
아내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지
생각하기 전에 내가 아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우선 생각한다
아내가 어떤 요구를 하기 전에도
미리 알아서 내가 먼저 실행한다
아내의 아내에 의한 아내를 위한
남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내의 변해가는 모습은 추억이고
성숙한 자태는 존경하는 표상이다
귀엽다 ,매력적이다, 늘 존경한다
붉은 장미꽃처럼 아름다운 여자
오월 아카시아 꽃의 향기를 품고
때로는 목련꽃처럼 우아하다가도
진달래꽃처럼 귀여운 여자로 알며
가장 예쁜 꽃과 향기가 아내이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심히 부는 날
첫눈에 추억이 섞여 내리는 날에는
흩날리는 머리칼을 곱게 바라보며
5월 나비 되어 날아든 아카시아향
옛 추억을 쓰다듬어 다독여 본다
《34》 어떤 고해성사
전민
신부님 제가 백주 대낮에
눈먼 할머니 혼자 사는 집에
눈 뜨고 몰래 들어가서
말린 고추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지만
양심이 널을 뛰어
잘못했음을 고해하러 왔습니다
회개 하십시오
십계명에 도둑질하지 말라 했지요
도둑질은 형제님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는 것입니다
순간의 잘못으로 큰 실수를
다시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는 실수를 하지 말아야지요
깊이 반성하며 흔적을 지우겠어요
할머니가 볼 수 없을 거라 믿고
고추를 지고 나오며 남긴 발자욱을
성사 끝내고 가서 지워야겠어요
오점을 닦아야겠어요
아멘
《35》 엄마
전민
화재에 휩싸인 닭장에서
수탉들은 다 빠져나갔는데
병아리를 품속에 꼭 껴안은 채
어미 닭만 까맣게 모두 타 죽었다
사람이나 동물나라에서도
가장 뜨겁게 달아오르는 말
나직이 말하며 듣기만 해도
가슴이 물컹해지는 엄마, 어머니!
《36》 연꽃
전민
고향은 진흙탕 세상에
뿌리내려 자라왔을망정
파란 하늘이나
흐르는 개울물
통 굵은 넝쿨이나 가지도
넘나보지 않고
너무 화려하지도
아주 촌스럽지도 않게
텅 비워둔 속내
올곧은 양심의 줄기
잎을 흔들어 대는
솔바람 결 따라
수줍어 붉게 물든 볼
《37》 열매
전민
한 알의 꼬마 우주가
손바닥에서 숨쉬고 있다
탄생의 기쁨과 설레임이
욕망의 화려한 용틀림이
폭풍우 속의 천둥소리와
긴 가뭄을 이겨낸 시련이
어떻게 계절의 의미로 피어
작은 우주로 열매 맺었는가
우리에게도 베풀어주는가를
따스한 가슴에서 머리에 받아
고개 숙이게 하는 작은 우주.
《38》 우리 부부는
전민
마주보며 서있거나
살을 맞대고 누워 있어도
영혼을 섞으며 살아간다 해도
내가 아내일 수 없고
아내가 내가 될 수 없고
오직, 하늘과 땅처럼이나.
잠시 떨어져 있거나
생각하면서 가고 있는 길
비록, 똑같지는 않다 해도
나만이 혼자일 수 없고
아내만이 따로 일 수 없는
마치, 나무와 물처럼이나.
《39》 인생 통장
전민
내 인생의 수입과 지출은
고희를 막 넘기고 나서야
어느 정도 셈 할 듯도 한데
여생의 잔고는 통 알 수 없네
흐른 물은 다시 역류하지 않고
지난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데
추억의 카펫을 뒤밟아 가며
세월 속에 더 밀리어 떠나는 길
저축한 시간의 용돈이 앞으로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만
아침에 일어나 항상 확인하고
잠자리에 들면서 점검해 볼 뿐
《40》 인생론(1-10)
전민
용돈을 쓰듯
많이도 써버렸다
반은 썼을까
그 이상을 써을지도
남은 생애
존졸히 써봐야 할 텐데
누가 보태 줄 것도 아니고
누가 잘못 썼다고
나무랄 것도 아니고
인생은 용돈
인생론. 2
신호등
같은 것, 人生은
남보다 빨리 갔어도
남보다 좀 늦었어도
빨강, 파랑, 노랑 색깔에
보폭의 너비를 맡겨야 하고
오거리의 신호등 순서에
온몸의 방향을 바꿔야 하고
밥 먹듯이 하루에도 몇 번씩은
삶의 속도와 방향을 따져봐야 산다.
인생론. 3
운동 중에서
야구와도 같은 것, 人生은
시작인가 했더니 끝
끝인가 했더니 또 시작
성급히 이겼다 할 수도
조급히 패했다 할 수도 없는.
샴페인을 터트릴 것인가
고배의 쓴잔을 기울인 것인가는
서산에 붉은 해 넘어 가 깜깜해지듯
삶의 방망이를 내 던질 때 봐야 안다.
인생론. 4
산을 오르고
다시 내려오는 여정
땀을 흘리며, 물 위를 걷듯
동네 야산을 오르는
최고의 정상을 정복하는
보통 사람이나 별난 사람도
함께 살아가는 산 아래에서
다시 만나 일상사에 섞이면
그 누구도 가려지진 않는다
오르는 길을 따르지 않았느냐
왜 끝까지 오르지 못했느냐고
아무도 말하려는 사람은 없다.
인생론. 5
용龍을 그리려다 실뱀을
꽃뱀을 그리려다 용을
잘못 그리었을지도 모르는
내 인생의 캔버스 풍경에
무슨 색깔을 다시 칠해볼까
무지갯빛을 칠하려다
물을 뿌려, 번져 버렸을지도
하얀 눈밭 위에 연탄재
애시당초에 하얀 것을
검정 색깔로 바뀌었을지도.
인생론. 6
인생은 가설 곡마단
우리들은 무대 위에서
오늘의 독백을 풀어야 한다
희망의 꼬리를 물고
일어서는 하얀 그림자
총알처럼 관통해 버린 가슴
번데기처럼 말라버린 시간
고통을 따라 바람이 간다
바람 따라 낙엽도 진다
바스락대는 세월을 밟으며
팬터마임에 부끄러워하는
무대 위의 광대, 우리 모두는.
인생론. 7
가을밤 하늘의
별을 헤어보듯
발자국 수를 세어본다
맞추고 맞추어 보아도
어긋나 버린
인생 대차대조표
매듭도 풀지 못한 채
좀스러운 생각에 엉켜
밤잠을 설치던 세월
어깨를 누르는 세월의 무게
얼굴에 내려앉은 피곤의 두께.
인생론. 8
내 아주 어려서 세월의 의미에 감 못 잡을 때
꼬까신에 때때옷을 그리며 즐기려던 마음으로
양손가락을 하루에도 몇 번씩 곱아 세가면서
잔치 집에 가신 할머니 곶감을 기다리듯했지
중량이 더해질수록 가속도가 붙어버리는 나이
엊그제까지만 해도 40에서 50을 놓고 달렸는데
시침은 초침을 밀어내며 재촉해 핑핑 돌아가고
지금부턴 버거운 인생길, 60 킬로로 달려야 한다
스펀지에 물 스며들 듯 연륜 속에 철도 들어와
영혼의 무지개 색깔 찾아 여기저기 허둥댈 때
나이의 시침은 분침으로 바뀌어 돌기 시작하고
삶의 궤도를 따라 해와 달도 함께 돌고 있었지.
인생론. 9
인생의 생명은
호흡조절에 있다
달려가는 도중에도
파란 신호등일 땐
백지에 쉼표를 찍듯이
빨간불에 막혔으면
속도를 재촉하다가
완급만은 조절하자
가야 되느냐
멈춰 서야 하느냐는
정지선 밖에서 결정하자.
인생론. 10
인생은
TV 채널이다
기아에 울부짖고 있는
바로 이웃 채널에서는
배 터져 죽어가는 부자들
스님의 독경소리에 섞여
목사님의 찬송가도 들리고
신부님의 옷자락도 펄럭이고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돌리 듯
가슴으로 눈을 조금만 돌려봐도
인생은 바보 세상에 총천연색이다.
《41》 일기
전민
오늘 한 일들이 생각나지 않는다
희미한 껍질 한 쪽
들어와 차지 않는다
안개 낀 거리의 골목도
겨울비를 맞으며 걷다가
목노에 앉아 입술을 마주치던
따스한 유리컵의 촉각도 되살아나는데
화단에 꽃씨를 묻고
기다리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몇 년 전 사귀었던
안경 쓴 여자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바람 부는 날
내 속 깊이 일렁이던
파도 너비가 떠오르지 않는다.
여직껏 미뤄온 중대발표의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42》 자연의 아들
전민
지구는 어머니의 태반입니다
숲 속에 피어나는 풀꽃 한송이
그 위를 찾아주는
고마운 벌과 나비
산토끼 모는 살쾡이
비둘기 채어간 독수리 까지도
흙에서 태어나, 흙에서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의 피붙이, 형제 자매 입니다.
희롱하지 마셔요
짓밟지 마셔요
산허리를 끊어 문명의 심을 박고
대지의 동맥을 막아 생살이 썩어가고
처녀림에 인공의 말뚝에 박혀
회한의 사생아만 잉태하고 마는
갓 태어난 물고기가 죽어가고
막 피어난 꽃송이가 시들어 갑니다
자연은 인간을 넘보지 않고
자연은 인간을 배반하지 않아요
소낙비 막 씻고 간 솔숲
영혼의 속삭임, 시냇물
새 생명의 약속, 새싹
신비로운 탄생, 꽃봉오리
맛갈스러운 향내음, 열매
좁쌀만한 하루살이에서
바위덩이 같은 불곰까지도
한솥밥을 먹으며
호흡을 함께하고 있는
지구속의 대가족입니다
인간은 지구가 낳은 자연
자연의 아들입니다.
《43》 중생에도 법어가
전민
하늘 아래
산
산 그 아래
나
바다 저 아래에서
움 돋는 빛이여.
바다 위애
너
너 그 위에
하늘
저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여.
빛과 소리는 하나다
하늘과 바다도 하나다.
《44》 지구가족
전민
반짝이는 호수 위, 은빛 바람
이름 모르는 들풀과 산나무들
안으로만 노래하는 생명체들
빛나는 솔잎, 피어나는 골안개
땅속의 벌레들, 하늘을 나는 새
매일 만나는 정겨운 이웃사촌
땅은 인간에 예속된 것이 아냐
인간이 지구에 편입된 것이지
지구는 한 가족으로 맺어 주는
핏줄과도 같이 연결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한 지구가족이다.
꽃의 향과 열매는 자매들이다
벌, 사슴, 고라니는 형제들이다
발밑에 흐르는 물은 대지의 핏줄
숲속 벌레, 도마뱀도 가족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이 땅을
괴롭히거나 더럽힐 수가 없다
인간은 땅의 ,땅은 인간의 살갗
땅이 겪는 아픔이 인간에겐 진통
땅에 뱉은 침은 가슴에 못을 친다
지구는 어머니의 품안이기 때문에.
《45》 진달래꽃
전민
샛바람 불면
젖꼭지 간지러워
길가 언덕
맴도는
연달래
꽃불 난
앞뒤 산
두견새도
밤잠 잊었나
북으로는
고구려의 만주 벌판
남으로는 신라의 한라산
몸으로 지켜온
정 5품(正 五品)의 그 절개
난(蘭)달래
진달래꽃.
《46》 징검다리 건너
전민
내 예까지 걸어온
반평생은 맨발에 자갈길
뒤돌아보면 가시밭길
한발 헛디디면 빠져버릴
한 치 아래 수렁 길
징검다리 건너 저쪽엔
뭉게구름 꿈처럼 피어나고
논두렁 물소리, 숲속의 새소리
저녁놀 받아 불타는 사르비아꽃
보름달 마중 나온 가로수
해 돋는 곳, 달 뜨는 곳
그대 찾아 수십 년
징검다리 건너 새로운 길엔
땀에 젖은 작은 이마 씻어 줄
새색시 기다리고 있다네
지나온 길벗 삼아 노래하며
오는 세월 악수해줄 수 있는.
《47》 착각
전민
신부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저는 하루에도 여러 번씩
거울을 보고 또 보면서
저의 미모에 자만해서 우쭐했습니다
제 교만한 죄를 용서해 주십시요
어떤 중년 부인이 고해성사를 했다
생각은 죄가 아니고 착각일 뿐이지요
혹간 착각을 죄로 착각하는 분도 있지요
자매님은 걱정 안하셔도 되겠네요
부인의 고해성사를 경청한 신부님은
칸막이 커튼을 조금 들어 올려
그녀를 훔쳐보며 이제 안심하시라고 했다
《48》 판도라 상자
전민
제우스가 판도라에게
건네준 선물상자 속에는
절대로 열어서는 안 되는
인간의 모든 죄악과 재앙이
여직껏 보석처럼 숨겨 있었지
호기심을 참지 못한 채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는
정품으로 포장되어 쌓였던
폭력, 부패, 기아, 전쟁 등이
바람 따라 온 세상을 덮어가고.
맨하탄의 아침
인류의 최고 자존심
쌍둥이 건물이 날아가자
하얀 터번과 콧수염을 찾아
카불의 밤은 반딧불 폭격 먼지만 일었지
우리는 이제
열린 판도라 상자를 덮고
힘에 눌려 튀어나오지 못한
사랑과 용서, 자유와 평화를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수 있을까.
《49》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전민
천둥 번개 칠 수 있는 말
간지럼 타는 속삭임
시대 따라 사람 쫓아
구분해 쓸 줄 알고
머릿속은 하늘 끝까지
깃발 되어 펄럭여도
코밑부터는 마른 땅에
깃대로 꽂혀 있어야 한다
아귀다툼 해야 할 때에는
손과 발도 함께해야 하고
요란떨고 다닐만한 곳에
속속들이 종종걸음 쳐
단단하게 다져 놓아야 한다
자네 머리에 쓰고 있는
빨강색 고깔 모자가
한 손에 끼고 있는 흰 장갑이
반쯤 벗어버린 고무신 축이
나와 세상과 친구의
숨바꼭질놀이를 어렵게 하며
담벼락으로 가로막고 있다네.
《50》 행복합니다 (노래가사)
전민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아침저녁 저녁 끼니 거르지 않고
눈과 비 막아줄 비바람 가려줄? 집이 있고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이 바라보고 있고
나는 행복해 내세울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해도
부족해도 나는 행복해 비교하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느껴질지라-도 반평생 이상을
나-라 위해 나라 위해 힘써 일했고
그 은덕으로 큰 걱정 없이 살아 왔으니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세상 살아오며 만-난
만난 사람들 다 좋았고 같은 맘 가진 고마운 벗들
세상사는 참 이야기 주고받으며 좋은 글 읽으며
쓰고 싶은 시 쓰면서 나는 행복해
내세울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해도 부족해도
나는 행복해 비교하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느껴질지라도 반평생 이상을- 나라 위해 힘써 일했고
그 은덕으로 걱정 없이 살아왔으니 난 행복합니다
난 행복합니다
《51》 흑백사진 한 장이
전민
내 나이 아주 어려
철 아직 나지 못했을 때
내 나이 조금씩 더해
턱수염 까칠까칠해 올 때
내 나이 한참 들어
고향 박차고 뛰쳐나올 때
한 장의 흑백사진에 그려진
숨은 그림은 그대로의 명암(明暗) 밖에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고 숨어버렸지
내 나이 혼자는 어려워
아내 얻어 같이 섞을 때
내 나이 이제는 부끄러워
어린것들 마주보기 민망할 때
내 나이 올해로 마흔 넷
돋아나는 새치 자꾸 덮고 싶을 때
묵은 책갈피 속에서 뛰쳐나온
흑백사진 한 장의 숨은 그림이
총천연색 활동으로 돌아가며
가슴 촉촉이 젖어들고 있음은?
《52》 마음이 몸에게
전 민
산에 가자하면
가뿐하게 따라나서거라
좀 힘들고 어려워도
바다에 가자하면
어깨동무하고 춤추며 가자
몸과 마음은 평생 동지다
진흙 자갈밭 피해 가며
꽃향기 머무는 인생길
내 몸이여 마음 쫓아서
《53》 시간은행
전 민
방황하던 자투리 시간 잡아
저축하며 늘려 쓸 수도 있고
살아가면서 여유 시간 만났을 때는
생명줄 환자에게 대출해 주며
베풂의 시간 나누어 줄 수 있기도
흘러가는 석별의 시간 멈추어
찐 생명과도 포옹할 수 있고
처지에 맞는 삶의 정답에다
달콤한 사랑 찾은 쉼터 공간에
시간 은행 하나 마련했으면 좋겠다
《54》 국민
전 민
할인 상품이 아니요
헐값으로 팔지 마시오
가판대 위에 내어놓고
국민이 원한다면 하면서
간 빼놓고 할인 행사하는
정치인들, 시위대 무리들
국민은 땡처리로 가볍게
함부로 세일 상품이 아니요
이제 특상품이 장사치들을
교체 떨이 할 작정이라오
《55》 지는 벚꽃이 더 아름답다
전민
절정에
사정하고
한꺼번에만
거두어주는 너
누가
사꾸라라
이름 불렀나
하얀 꽃 태워
깜장 믿음 버찌
품지 못할 향기는
탐내지 않는 거란다.
《56》 사랑의 빛
전민
누에는 제 몸을 뽑아
껍질로 비단을 짜지만
사랑은 영혼을 뽑아
진실로 자선을 베푼다
베풀어 받은 은혜의 빛
아쉬워만 하는 그물에
밀물이 썰물을 덮치어
네 마음 걸려 들어오고.
《57》밤꽃 피는 밤
전민
오뉴월 어스렁 달밤을
헤엄쳐 나온 밤꽃 향
돌담 넘는 들고양이
청상과부 순덕이 댁
안방 창문에 곰실곰실
밤꽃은 밤에만 핀다
밤꽃향은 가시가 있다
밤새껏 뒤척이는 잠자리
짓누르던 밤파도 소리
달빛 섞인 밤향 가시로
허벅지를 콕콕 찍으며
세월 빛 촘촘히 박음질.
《58》두릅나무의 한(恨)
전민
유혹하려거든
온몸에 가시나 없던지
가시를 품었으면
유혹을 하지 말든지
가시도, 향기도 탐내고서
전생에 무순 지은 죄(罪)가 많아
새순, 미래마저 몽땅 털린 채
봄만 오면 오돌오돌 살 추위
《59》민화 한 폭
전민
보름 달빛 곱게
색동옷 받쳐 입고
세월 나들이 나선
백두대간 암호랑이는
계룡 장터 구경 나온
숫총각 하나 낚아
등 위에 들러 업고
가을 하늘 아래 첫 동네
처녀 하나 어금니로 찍어
새벽달 목 넘어갈 때까지
추억 속 대바구니에
과거의 다슬기 줍기.
《60》이장님 말씀은
전민
색시야 진짜 아다 아니지?
나 진짜 오리지널이라고 하던데
누가 색시를 천연산이라고 판정 했는데....
결혼식 전날 밤 이장님이 먼저 체크해보시고
나야말로 전혀 손이 타지 않은 동정 그대로랬어
그랬구나, 우리 이장님 감정평가, 그건 틀림없어 .
《61》부부
전민
늘 가까이 있을 땐 눈에 잘 보이지 않다가도
주변에 없으면 허전하여 찾아야 마음이 편한
같이 있을 때는 존재의 가치를 잘 모르지만
곁에 안 보이면 목이 빠져라 둘러보는 벽시계
별생각 없이 두 몸이 한 몸인 양 착각하다가
너무 가깝다면서 경계선이 점선으로 그려지는.
《62》멸 치
전민
체구는 비록 왜소할지라도
넓고 푸른 바다에서
더 약한 물고기를 어르며
상어등에 업혀 호가호위하지 않고
사기 쳐서 등쳐먹진 않았다
머리통부터 똥뱃살까지
몸통 전부를 아낌없이
인간에 베푸는 뼈대가 있고
족보가 있는 어(魚) 가문
척추동물의 왕시조다
《63》가을 산
전민
산 같은 가을 산들은
언제인가, 눈길 주던 사람들에
정복되고 만다는 진리를
받아들여 몸매 가꾸며 산다
계절 따라 시간 맞춰
잠옷 빛깔이 달라지고
화장 범위도 좁아졌다 넓어지고
속옷과 겉옷도 입었다
벗어 벼렸다간.
《64》깡 통
전민
빈 깡통은 아무리 흔들어봐도
전혀 정답이 나오지 않는다
아는 것이 없는 사람에겐
야호에 대답할 메아리가 없다
속이 가득 찬 깡통은
흔들어도 소리를 안 낸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꼭 할 말이 아니면 입을 닫는다
소리 나는 깡통 속에는
정답과 오답이 조금씩 차 있다
아는 답이 머리에 조금만 있어도
참지 못해 입을 박차고 나온다
《65》 4월에
--
전 민
--
봄비 씻고 간
푸른 물결
춤추는 청보리밭
--
연분홍 젖꼭지
간지러워
불타는
사월 산 연달래
--
가시나무새
가슴 찍어
핏빛 라일락 향 뽑아
대지를 적시고
--
선잠 깬
어린 싹들의 왕기지게.
《66》 5월밤 연가(戀歌)
--
전 민
--
노을꽃
막 지고 나면
밤꽃몽올 다시 피어나는
오월밤 달무리
--
철없는 불나비
눈부신 불빛 따라
무작정 찾아온 것도
큰 죄가 되나요
--
새 생명
싹 터 올라
천상에서 지상으로
울려 퍼지는 사랑의 음률
--
개골, 개골골, 개골개골
대덕테크노벨리
공사장 빈터마다는
오월밤의 연가(戀歌)만이.
《67》가을 사랑
전 민
눈을 맞추며 바라다본
그대 모습은 참 아름답다
쪽빛 가을 하늘
불타는 가을산 단풍
은은하게 몸에 배어든
들국화의 향내음
아침 햇살 한 포기
영롱한 이슬방울 한 줌
빈자리에서 태어나
큰 욕심부리지 않고
계절도 다 털어버린 채
뿌리만 지키는 활엽수
눈을 감고 젹셔본 그대
뒷모습은 한결 더 아름답네.
《68》첫눈 오는 날
--
전 민
--
전화벨이 울렸다
--
잠시 후 다시 울렸다
--
몇 번 망설이다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어요
--
낯익은 반백 년 전의 그 목소리
조금은 목소리 나이테가 굵어진
--
답답한 세월의 회전문을 열어젖히자
창밖에는 추억을 찾으러 집 나간
오십 년 전의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
그때 소녀의 머리에 내리던 함박눈이 .
《69》눈 내리는 날
--
전 민
--
첫눈 내리는 아침
둘이는 처음으로 만났지요
하얗게 덮인 눈밭을 바라보며
이 세상 그렇게 살아가자고
꽃은 보는 것, 꺾는 것이 아니고
눈은 받는 것, 밟는 것이 아니고
동정은 갖는 것 , 주는 것이 아니고
--
그 후로는 그때처럼 그렇게
하얀 눈이 내리지 않았지요
성스럽게 보지를 못했는지
정결한 눈을 찾을 수 있는
아름다운 눈이 저당 잡혔었는지
내리는 눈도, 보는 눈도
예전 그대로인데
그를 둘러싼 빛이
본래의 자기 빛이 못 되었는지
--
훨씬 그 후에
둘이는 새처럼
다른 길로 날아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나무 빈가지에 꽃이 되었지요
눈이 참 아름답다고
아름다움을 찾는 눈은 더 아름답다고
그러나 고통이 될 수도 있다고
고통은 후회를 낳지 말아야 한다고
태어난 후회는
뿌려진 씨앗을
썩힐지도 모른다고
--
싸락눈이 내리는 날 저녁
둘이는 말없이 돌아 섰지요
세월이 罰이 되었듯이
순간이 罪가 된다는 가정을
가슴 깊이 묻으며, 다독이며.
《70》돌고 싶은 풍차
--
전 민
--
눈에 들어와 채이는 것은 건물 숲이고 지나치는 바람은 하나같이 돌아가고 있는
시겟바늘인데 대전직할시 본정통 번화가 홍명상가 건너 목척교 다시 빠져나와
한미은행 지하차고 입구 그려도 채색되지 않은 숲 속에 울먹이다 멈춰있던 해시계
초침이 서녘 그림자를 거꾸로 떠밀고 있다.
--
바다를 그리는 강물처럼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새벽열차 가뿐 숨 내뿜고
평행선 가로질러 뛰는 사람 정답은 저당 잡히고 흘린 삶 낱알로 주워 살아가는데
새마을호 지붕 위에 앉아 나는 듯 떠나버린 속셈 빠른 제비 뒤꽁무니 처다보다
무지개꿈 피우고 싶은 성남동 굴다리, 평화시장 입구 태워도 불붙지 않는 가슴 한복판에
고장 난 신호등이 겁먹고 서성대는 궤도 속의 세월을 조각상처럼 붙들고 있다.
--
날개 돋쳐 날아간 신도안 할아버지의 갓, 알 망건 위에 아라비안 터번 대신 눌러쓰고
한줄기 햇살 찾아 참빛 얼레빗으로 삼베 껍질 벗겨가듯 하루를 맞아도 졸고 있는
쌍룡시멘트 낡은 빈포대 위엔 푸른 머리칼 하나 주인 돼주지 못한다.
빛바랜 종민동 새마을회관 낙성식 보자기 위에 겨울비만 뚝뚝 떨어지고 있다.
《71》명퇴 면장 우리 덕배 씨의 하루
전 민
샘골 호두나무집 셋째 아들 덕배 씨는 세월 밖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천둥소리 섞인 거친 숨결을 그믐달빛처럼 몸 안으로 받으며 팽개친 막장에서 갈탄 캐다 나온 늙은 광부의 검푸른 이마 같은 구겨진 몰골로 붉은 껍질 벗겨놓은 오징어 흰 뱃살처럼 세월을 미리 찾아 날아온 바람에 일상의 지폐를 날려본다.
디스 담배 한 가치를 안 호주머니에서 꺼내 반쯤은 질겅질근 어금니에 문 채, 눈먼 새앙쥐 찾아 헤매는 암고양이처럼 손바닥만 한 안뜨락만 서성이다가 숨소리는 태산준령을 넘어가다 호수 위를 새처럼 낮게 날아가고 진양조, 중모리, 자진모리, 마파람 치다 산파도 멈춘 소나무숲.검은 포장 내리는 동해의 겨울바다로..
봄의 단꿈은 이제서 막 끝났나? 고향의 풀피리 소리가 멈추었다. 꿈의 소리는 떠나가 버린 걸까? 열어 놓고 있던 이 귀가 막힌 걸까? 다시 새로운 탄생의 소리로 스며든 걸까? 푸른 하늘 높이 오늘을 큰소리치다 우주 밖으로 퇴출기업 약속어음 되어 돌개바람에 황사와 함께 날아갔다.
샘골 호두나무집 셋째 아들 ,명퇴 면장 우리 덕배 씨! 다시 새벽이 되었습니다. 심장 위로 떠오르는 맑은 아침 햇살은 희망이라는 장난감 선물로 오늘을 살맛 돋게 하였지만 유리창 닦듯 가꿔온 세월은 고향으로 회귀하던 남대천의 어미 연어처럼 망각의 늪 속에 분해되어 새끼의 하루 끼니가 겨우 되었을 뿐.
《72》물구나무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면
---
전 민
--
돌아버린 사회에서 맨정신을 가진 사람은 어쨌든 간에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만 정상인으로 취급받을 수 있지. 암.수 돌쩌귀가 하나같이 제 정신이 아닌 듯 돌아갈 때 저 혼자만 정신 똑바로 차리며 하늘처럼 높게 살려면 왕자도 왕따가 되어야만 하고 외톨이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사뭉치는 톱니 틀을 오늘에 맞추며 미친 세상에 물들어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만 살 수 있지.
--
아주 먼 옛날 하늘신이 천둥과 벼락에 부탁하기를 저 하늘 아래 인간 세상에서 제일 탐욕스럽고 흉악무도한 딱 한 사람만을 본때로 골라 쳐 죽여 위엄을 보이라 명하였는데 하늘 아래 이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니 왕따 한 사람만 빼놓고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날벼락을 맞아야 할 판이라서 시절 같은 한 사람만을 솎아내 벼락을 쳐 죽인 후 이 세상은 물레방아 핑핑 돌아가듯 아주 잘 흘러간다는 얘기.
--
물구나무로 서 바라본 세상에서 제정신을 찾은 사람은 어쨌든 간에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만 정상인으로 인정받는다. 암.수 돌쩌귀가 하나같이 정신을 잃고 홀로 돌아갈 때 저 혼자만 정신 똑바로 차리며 하늘처럼 높게 살려면 왕자도 왕따가 되어야만 하고 외톨이의 아픔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사뭉치는 톱니 틀을 오늘의 궤도에 맞추며 미친 세상에 물들어 미치광이 노릇을 해야 하는 거짓 자정운동을 한다.
《73》밤과 같이
-
전 민
-
사람들과 헤어져
처음으로 나를 맞는다
차디찬 바위 위에
오두막이 앉은 새처럼
--
캄캄한 주위가
동굴처럼 조금씩 뚫려 올 때
양 겨드랑이 가렵다
죽지 빠진 한쪽 날개가
돋아나려는 것일까
왼쪽 한 날개마저
내려앉는 아픔일까
-
나는 내 차지한
이 조그만 공간을
수없이 밀려 닥치는
물음으로 틀어막으며
-
날아오는 돌팔매를 주워 모아
밤과 같이
몇 조각의 답으로
성을 쌓는 석수장이가 된다
《74》수통골 연달래
전 민
싸락눈 내리듯
쏟아져 내리는
푸른 별빛이
여린 가슴을
빗질해 가는 그믐밤.
---
온몸에
열꽃이 난 수통골의
열아홉, 진달래는
인고忍苦의 아픔을
분홍빛으로 뽑아내는.
---
산 아래 마을
골목골목마다
흥건히 적셔놓은
지난밤 대자연의
흥겨운 잔칫상
---
붉은 피.
《75》순이는 여승의 딸
전 민
하얀 백합을 빼어 닮은 얼굴에
그림자 한 번 내린 적이 없는
3 학년 팔 반 사십팔 번 순이는
공부는 물론, 친구들과 잘 어울려
우리 반에서 그야말로 짱이었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학교에
여승 한 분이 바람처럼 스쳐와
담임인 나와 보호자의 자격으로
한 시간쯤은 귓속말도 나누다가
뭉게구름처럼 사라지기도 하고.
이승 떠나기 전, 한 노파로부터
제 품에 안겨진 핏덩이 순이는
열일곱 해를 곱게 자라주었지요
아직도 저만을 제 어미로 알며…
이 모두가 부처님 큰 뜻이지요
앞으로 몇 년이 안 지나서라도
우리 딸 순이가 천생배필을 만나
어미 곁을 떠나는 결혼식장에서는
꿈속에서도 만나 본 일이 없는
두 남녀가 지켜보고 있을 걸요
지금의 순이 나이에 순이를 낳은
중후한 한 여인의 미혼모 마음과
지구를 반 바퀴쯤 단숨에 달려온
교포사업가인 과거의 대학생이
가슴에서 눈, 눈에서 가슴을 오가며.
《76》배나무 골의 배 서방은
전 민
천년 냇가에
은밀히 숨겨놓은
솜털 구름 속을
가을 나비와 피라미는
하늘 천 따지
속절없이
숨바꼭질을 즐겨도
아내와 딸년마져
도회의 불나비로
떠나버린 뒤
배나무 골의 배 서방은
배반의 반세기를
오늘도 어김없이
가슴속 깊히 못 박고 있지
박힌 못 피와 함께
세상을 떠돌고 있지.
《77》피력(披 瀝)
전 민
1.
산초 열매 반쪽 벙글어
별빛 채워 아무는
백양나무숲 개울가
조약돌 씻는 마음에서
손 탐 없이 지켜온
풋머리 산 그림자
비린내 채 가시지 않은
무지기 소녀
일곱 층 끝 단
참새 떼 날아와
노란 햇씨를 뿌린다.
2
비 갠 잔디밭
풀잎마다 열린 무지개
미끄럼 타며 노는 물방울
휘파람 곱게 불면
일제히 水液을 펌프질하는
나무들의 행진
화강암 굴 바닥에
솟아오르는 돌순처럼
톡톡 솟아나오는 샛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와 같이 나를 위하여
童貞을 지키듯
잃지 않은 눈매
마음밭 깊은 곳엔
사철 푸른 소나무가
다른 방에는
때가 고조된 아내가
나를 기다리듯
고향 따라 뻗어가는 싸리순
고향 하는 지켜주는
그녀와의 눈맞춤.
《78》 가을비 곱게 내리는 저녁나절에는
전 민
고향 뒷동산 장수바위에 올라
소 꼴 뜯기던 앞 냇둑 잔디 위에 누워
유년의 하아모니카를 불고 싶다
흘러내리는 베잠방이 쥐어 잡고
옥수수대 단물 씹던 옛 추억
흘러가는 뭉개구름 마냥 쫓아
산 넘고 물도 건너 어디든 가고프던
그때 그 동심 호흡으로 다시 몰아
이 빠진 하아모니카에 넣어주고 싶다
지금쯤은 중년의 문턱에 서있을
소꼽놀이 함께하던 동네 계집애들
자치기 딱지치기 같이하던 머슴아들
통학 버스 안에서 눈맞춤 하던 단발머리
눈이 커 꽤 예쁘던 자주색 가방까지
이름 석 자마저 아름아름해오니
기억의 내 사전에서 빠저 버리기 전에
겉봉 없는 긴 편지라도 쓰고 싶다
교외선 완행 밤 열차를 타고 싶다
길게 매달린 객차 칸칸마다
창문은 열려 불빛은 쏟아지고
솔바랍소리 대신 들어와 차는데
저 멀리 반딧불빛도 간간이 보이고
토담 위에 흰 박덩이 달빛에 정겨운 밤
긴 머리칼 정결히 매만지며
독서삼매경에 빠진 소녀와 만나
하늘과 바다를 노래하며
작은 별을 바라보고 싶다.
《79》주민등록증을 갱신하며
전 민
현주소를 찾으러 동사무소에 갔다
모처럼만에 흘러 거슬러 가본 수 십 년.
밤꽃 향기 음악 되어 흐르는
가난해도 흡족한 내 고향, 금국리
깜장 고무신짝에 파닥이던 피라미는
지금도 솔밭 건너 긴 모랫벌
겨울 소나무 내품는 깊은 소리
산파도 몰고 오는 쌍류(雙流) 골짜기
여름밤 돌 틈에 가재 찾아가듯
꺼져가는 추억 속에 불 붙여 들고
남의 부인이 되어 버린 옛 여자를 잠시 훔쳐
희미해져가는 자욱들을 찾아보고도 싶고.
달빛 쫓다 키가 너무 커진 미류나무
물소리 새소리 뒤섞인 몇 아름의 의미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면사포 쓴 신부를 간음하는 주례처럼
발아(發芽)하는 싹눈을 떼어가는 꽃샘바람
쌀집 뒷방에서 꿈꾸던 무지개꽃
길가 옆 문간방, 고개 넘어 김 과부댁 건넌방
부표 되어 떠다닌 수십 년
가난으로 무디어 피지도 못한 채
꽃보무라지 옛 모습 그대로 화석 되고.
내가 혼자에서 둘로 셋으로 넷으로
세포 분열 하여가며 하나가 아님을 느낄 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면서
성장의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지
오고가는 사람 선별하지 않고
대문 없이 통하는 유리창, 미닫이문
닫힌 듯 열어 두었던 해미
보이지 않는 바다에서도 바닷바람은 불어오고
고리대금 하다 새벽에 떠난 목사부인
전세값 올려주고 살던 집 빼앗아간
계산속 환한 수학선생 사모님
부인에 비해 꽤 인정 많아 반갑던
정년퇴임 면서기 한 계장 아저씨
그러나, 읍성을 돌며 찾은 깊은 뜻
심어줄 값진 보물 하나 얻어 길렀어
현주소를 챙기려 동사무소에 가
수줍음 타는 새 각시의 젖을 만져가듯이
엣 주소를 은밀히 더듬던 나
현실 앞에 소스라쳐 놀랐다.
“나는 범인이 아닙니다”
“도피자도 아닙니다”
“거센 삶의 파도를 타고서
바람 쎄지 않은 순한 곳을 찾아
돛이 없는 배를 수 십 년 저어왔을 뿐입니다.“
주소 기입란이 벅차게 살아온 날들
한 번도 눈 돌리지 않고 지켜온
맨 위 본적지, 내 고향 금국리 376 번지
그 아래로 쓰인 주소 마르기도 전에
다시 쓰여 지고 또 지워진 일곱 개의 주소
세상물정 모르면서
흙먼지 뒤범벅이 되어 뛰놀던
나의 어린 것들은 그래도 지워진
그 때 그곳들이 좋았단다.
강물은 바다의 어데로
얼마만큼 차지해 흐르고 있나
새 주민등록증이 나왔다
아파트 4층 내가 앉을 자리에는
어린 것들과 장난감 로버트가
양지 바른 묏 기슭 내가 놀던 그 자리에는
낯모르는 아이들이
깨끗하게 새로 쓰여진 현주소
하늘과 땅의 힘이 맞닿아
줄다리기 하는 가운데 지점.
《80》바람 일기
전 민
바람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여름밤 하늘의 별처럼
6.25 사변 통에
아들 잃고 딸마저 빼앗겨
화병이나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되어
한곳에 머물러
자리 잡지 못한다
바람은 정이 많아
더웁혀진 가슴 속에
깃발로 펄럭이다가
고향의 짙은 냄새며
날아간 그리움의 날개깃을
쫓아나서 보기도 하고
바람은 첫정을 심어놓고
자취를 숨기어 버린
그녀의 현주소를 찾아
함석 대문도 흔들고
유리 창문도 두드려 본다
《81》동물농장에서 온 편지
전 민
숨이 가빠요
힘이 빠지네요
하늘빛마저 노랗고
무지개는 목을 조릅니다
물려받은 습성 그대로
우직하게 살아온 죄로
복부에는 쇠파이프가 박히고
심장은 펌푸질 당하며
네 발바닥이 스프로 녹아버릴 때 까지
알사탕 받아먹으며
대신 내어주는 생 쓸개즙
황금에 불꽃 핀 주인님
긴 줄 속에 차례 기다리는 보신족
쓸개 빠진 환웅 자손 벗어나
인간성 동물로 환생하여
쇠창살 속 의형제나 맺읍시다
태풍 불어 여름 휩쓸어 가는 날
복부를 수술 받은 아기 곰이.
《82》독도
전 민
막내는 밤새껏 추워서 떨었다
망망대해 파도치는 곳에서
엄마 품이 그리워서
형제자매들이 보고파서
밤새워 뒤척이던 악몽을 토하며
괭이갈매기와 함께 을었다
어제도 오늘도 흐느껴 울었다.
아침의 동해에
해가 떠오르며 파도도 가라앉고
지나온 과거의 아픔을
현재에 의젓하게 삭이며
이제부터는 응석만 부리지 말고
투정만 부리지 말고
영원한 미래 조국의 영토임을
《83》충청도
전 민
입술 꼭다문 채
참아온 일천 삼백 사십 년
햇살 터져
꽃몽올 피어나는
한반도의 심장
가슴 뜨거운 충청도여.
칠백년의 금빛 역사도
찬란했던 백제의 왕조도
낙화암 절벽 아래
삼천궁녀 되어
순간처럼 묻혀 버리진 않았다.
비단강 물줄기
다시 모여 서해 바다
계룡산 정기 뻗어
웅진, 사비, 한밭 뜰
불타는 용광로여
빚어내는 역사여
무령왕릉 금관
아침마다
금술 하나씩 더해가고 있다.
《84》그대 마음 훔쳐 싣고
전 민
새벽 봄비 발자취에
선잠 깬 이른 아침에는
막 목욕 후 머리 빗고 있을
고향 언덕 청보리 밭
배동 오르고 있는 新婦가
야리리 풋살 내음 품기며
하루의 쟈크를 열고
비 맑게 갠 뒤
옛 그림자 , 아침햇살 타고
닦아놓은 내 마음의 창에
파도처럼 밀어닥칠 때
화사한 찔레꽃 덩쿨
곱게 덮어 가는
유년의 뒷동산에 올라
풀피리 늴리리, 저기에
하얀 드레스 자락 날린다
소장산 연달래 꽃불
저녁노을에 옮겨 붙어
바라보며 뒤는 가슴 깊이
연분홍 꽃물 스며들 때
지켜오던 자리 용수철처럼
빈손 탁탁 털고 일어서
역류하는 물살따라
그대 마음 훔쳐 싣고.
《85》저울산 밑의 풍경화
전 민
청둥호박 밀가루 범벅
쑥 개떡 호밀 수제비
대대로 이어 받아
통사발 쭉쭉 빨고 있는
안산 넘어 거인
풋보리 열무김치
홑바지 베 등걸
포만(飽滿)의 용트림으로
코를 골고 있는 저울추는
만져도 깨워도
할미 젖통처럼
입 다문 새 각시처럼
동네 처녀, 아낙, 할멈
도라지 캐러 산에 가고
남자들은 막장에 나가고
뒤 처진 남정네들
국수내기 뽕 치러 주막 가고
사립문안 남은 아이들마저
시엉, 잔대 캐려 빠져 나오고
댓돌 위에 강아지만 졸고 있는
들마루 위엔 수탉만 활개 치는
글방 훈장도 하고
갱엿도 고아 파는
웃뜸 김선상댁, 상뜸 조씨네
큰 아들 서울 나가
미장공 되어 까딱없는 방서방 댁
속바지 속속 깊이
고린 지전(紙錢) 숨겨 있을 거라고
냉천 빨래터 뛰뚝이는 바윗돌 위
윤초시 맏며느리는
깊은 한숨 꺼내 휑궈빨다가
구 구장 만나러 지나가는
면서기 박주사 자전거 뒷바퀴 따라
굴렁쇠 되어 쫓고 있었다.
산밭에 몸 파는 이웃들
참도 안되 밭둑으로 길옆으로
오뉴월 갯벌에 능정이처럼
사카린 탄 단물에다
질커덩이 삶은 보리감자
꺼진 삶 임시 속일지라도
일평생에 단 한 번
자식은 공부시켜
붓대 잡은 월급쟁이
검은 양복에 흰 칼라
면서기, 조합서기 되는
꿈으로 채워 가는.
새경으로 받은 암송아지
뼛골 팔아 키운 금송아지
읍내 장터에 내다 팔던 날
허리춤 깊이 감춘 돈 뭉치
두 손을 떼지도 못한 채
삼 십리 길 단숨에 달려와
옥양목 세 폭 깊이 싸
빈 뒤주 속에 감춰놓고
맷돌을 올려놓고
도구통도 엎어놓고
맏아들 예쁜 이마 위
가운데 중(中)자 별처럼 반짝이는 날
어렵게 넘어가던
목 부러진 성황당 고개 위의
헹가래 치던 뭉개구름
송이송이 꽃송이
송이구름 피어나고 있었다.
잎담배 엮어 가는 사랑방
눈 맞춘 이씨 댁과 머슴이
파리 빠진 팟죽
이 빠진 밑둥
건져내면 그만이고
다시 나면 닥상인 도회물결 타
온 몸 휘감겨 뒤틀고 있을 때
방에서 쫓겨난 아이들은
깎아놓은 생고구마
새크맣게 물들도록
옆집 골방에 숨어
꺾어온 갈대꽃으로
깊은 몸 벗은 살에
은은한 간지럼치기 놀이
별 뜻 없이 우물 파다 건진 흙
뽑아낸 돌 뭉치
뫼 흙 파다 밥 짓고
잔듸풀 빤질빤질
병사공 문중묘지 위에서
미끄럼 타던 몇몇 애들은
북새풀 긁어모아
성냥불을 켜댄다
콧구멍이 새크맣게
머리칼이 뽀얗게
밭 갈던 산지기 김씨
쟁기 놓고 작대기 들고
칠팔월의 뇌성병력
몰이꾼에 밀리는 산토끼
총소리에 놀란 장끼
솔포장 사이 새로
독수리에 쫓기는 병아리들.
무수 밭으로 가자
배차 꼬리 도리러 가자
잘생긴 장대 무우 하나 덥썩 뽑아
딸려 나오는 흙
발바닥에 툭툭 털고
옆구리에 쓱쓱 문질러
엄지손톱으로 겉껍질 돌려 벗겨
어금니 깊이 깨물며
단지, 베속것 땀 젖어
벗고 잔 댓가로
꿀 찾다 얻은 맹물
덤으로 쌓인 자갈밭.
산비탈 말 타는 녀석
맨손으로 짱아 잡는 녀석
갈아입은 솜바지 조끼
몽땅 적셔 볕에 벗어 말리는 녀석
오들오들 떨고 서 있는 녀석
유별난 남자애들은
전봇대 위에 맨발로 기어올라
철사줄을 몰래 끊어다가
미끈한 생소나무 중대가리 마구 베어다가
쓰깨또를 마련하고
새침뜨기 계집애들은
굴뚝 밑 양지 뜸에
깨어진 새금파리 바가지 쪽
헤어진 고무신짝 모두 모아
찰흙으로 떡 빚고
사랑방으로 모이자
여물 솥에 보리감자
군불 지펴 삶아 놓고
아랫목 짚북데기
북석북석 달아오를 때
웅크린 다리 맘껏 뻗고
묵은 달력 뒷판에 윷판 그려
도, 개 , 걸, 윷, 모
무나물에 생명태국
해위쌈에 달걀부침
기다리던 조씨네 밤 제삿밥
소식 감감하자
굴뚝에다 살그머니
메꾸리 덮어 애먹이고
닭서리 나간 녀석들
도둑고양이 되어
개울뜸 넘어 헤집다가
달빛 받아 맑은 물에 세수하고
제집 닭 하나 목 비틀어 오면
흰 연기 검게 피어
보름달 뒤덮는 밤
김과부댁 솔가지동
샛서방 모르게 동이나도
저울산
저울산 밑의 풍경화는
만져도 깨워도
할미 젖통처럼
입 다문 새각시처럼.
《85》바람꽃 해후(邂逅)
전 민
사랑의 女神 아프로디테가 애인
아도니스의 상처에 키스를 하자
바람 따라 피었다가 지고 마는
사랑과 이별의 다채색 무늬 결
피고름 헤집고 꽃이 피어났네
결 따라 피고 다시 지는 魂, 꽃.
남과 북, 틈 사이, 반세기만에
찾아내 대어본 따스한 실핏줄
봄 꽃몽올 터 오는가 했더니
새순을 또 흩날려 버렸나
치솟는 눈물 안으로 감추며
또 다른 상처의 바람꽃 邂逅.
장승처럼 굳어버린 사랑과 恨을
이 가슴에 묻고 반 백년 살다가
바람 따라 와 만난 것도 잠시
구름으로 또 흩어져야만 하는가
두 몸통 속에 한 색깔로 녹여놓은
神話보다도 더 찐한 바람꽃의 邂逅.
《86》계룡 단풍
전 민
연다홍 갑사치마
살금살짝 걷어올린
동학의 쎈 바람
드러나는 신비
보이는 속살
암용추
숫용추
사이로
석간수(石間水).
먼발치에서
그대 모습 바라보며
그믐달빛 한 올을 뽑아
가을 밭 계룡 치마 폭 속에
연거푸 방사해댄다
찢기우는 초승 밤
타오르는 시월상달.
《87》빛바랜 흑백 사진첩 속에는
전 민
한 대낮에도
꼬리가 열두 개 달린
불여우가 살짝 내려와
장닭을 물고 달아나던
유년의 흐릿한 기억
두메산골 내 고향
나즈막하게 흙벽돌로
쌓아올린 담머리엔
별빛 찾아와 내려앉은
하얀 박꽃과
숭숭 엮은 싸리나무 사립
반쯤은 허물어 내린 굴뚝이
보름달빛에 더욱 정겹고
아침 일찍 나가보면
저녁마다 알알이 알밤이
새벽별들과 함께 소복이
쏟아내려 고여 있던
달빛 가득 담긴 장독대.
떡갈잎 따다가
댓돌 위에 펼쳐놓고
찰흙으로 빚어 만든 송편
깨어진 사금파리는 숟갈
사나대 꺾어다 젓가락 만들어
나는 신랑, 순이는 내 각시.
한 가족에 끼지도 못한
지금쯤은 손자 손녀도
서넛쯤은 족히 보았을
코흘리개 내 친구 석구는
밥상을 발로 차버리며
심통을 자주 부려댔었지.
《88》의원님의 자격 요건
전 민
여의도 국회 의사당에 나가
격투하실 의원님을 찾습니다
발은 빠르지 않아도
손과 간은 될 수 있는 대로 커
거두어 잡수실 것 챙기시고
잡아당긴 넥타이 놓치지 말아야 하며
허리 껴안아 업어 칠 수 있는
유도도 좀 배워두었어야 합니다
삿대 잘 젓는 분
목소리 유난히 크신 분
방망이 날렵하게 잘 치시는 분
한 번 응모해 보시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자격요건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던지기 잘 하시는 분 중에서
명패 정확히 던져
목표물에 적중하실 수만 있다면
훨씬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금뺏지 차실만한 애국자는
곳곳에서 다 뽑혀 들어가셔서
새로운 인물 찾기가 어려우니
여의도 광장의 진기록 갱신은
세금을 조금 더 올려 세비나 내드리고
기다려봐야 할려나 봅니다.
《89》꽃신 사오셨네
전 민
시골 장날 고추 팔러 갔다가
꼬까신 사가지고 오신다던
자상한 삼십 초반 우리 아빠
한 많은 세월 65년 전의 약속
가슴에 묻어둔 채 꿈꾸시다가
백 살이 다 된 할아버지 되어
꿈길 따라 휠체어 타고 오셨네
오른쪽 신에는 그리움 가득
다른 한쪽에는 눈물겨운 사연
세월 섞어 꽃신 가득 담아 들고
일곱 살 꼬마가 칠십을 꺾은 딸과
가슴으로 나눈 정, 불과 이틀 뒤
남과 북으로 세월의 벽을 넘어
민들레 홀씨 되어 흩어져 버렸나
《90》마누라 미투
전 민
쌍방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잖아요
엊그제도 그렇고
오십 년 전은 물론이고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망정이지
일방적으로 넘어트려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생기고
반백 년을 참으며 살아왔어요
좋았을 때는 나도 잘 몰랐어요
위력에 의한 반복 행위란 것을
하지만 젊음도 해마다 시들어가
황혼빛이 스멀대니 이젠 억울해요
꽃다운 내 청춘 무참히
짓밟아 엉망으로 망가트려놓고
전혀 책임질 생각도 않는 가해자
남편을 오는 세월에 미투 합니다.
《91》비무장지대(DMZ)
전 민
6월의 산하에는 멧돼지와 산양, 고라니 가족들과 기러기떼만 날고
산 능선 따라 동의나물. 산딸기와 평야의 초지엔 크고 작은 야생초
돼지풀, 개망초 ,양지꽃. 원추리, 양지 언덕엔 할미꽃, 노랑 제비꽃
계곡습지에는 무당개구리 알알이, 산 복판엔 싱싱한 습지 식물들과
땅과 물 사이에 작은 생명체들이 6월의 사연을 담아 꽃으로 피어난.
갈까마기 몇 마리만 자유롭게 날고, 연어는 남북을 지나 태평양으로
음지가 된 민통선 이남에 핀 양지꽃, 꼬리 조팝나무. 벚꽃, 복사나무
늪지, 건습초원 ,관목습지, 산림습지, 유월의 총탄에 유린당한 국부엔
자궁을 지켜온 토종 생명체는 숨고 외도로 유입된 외국산 동.식물들이
외아들 바친 할머니, 새신랑 보낸 새새댁 가슴밭을 글로벌화 해 가고.
《92》스님은 행복도시로 내려갔지
전 민
시장에서 만난 불자가 스님에 물었다
스님의 바랑에는 무엇이 들어있나요
개고기 좀 삶아 먹으려고 사서 넣었지
아니, 스님께서도 개고기를 드시나요
고기를 먹고 싶어서가 아니네 절에 술이 있어
술안주로 좀 하려고 조금만 샀다네
그럼 스님께서는 술도 드시나요
중이야 술을 안 먹지만 손님 대접은 해야지
어떤 손님이신지 귀한 분이 오셨나 보군요
귀하다마다. 오랜만에 장인이 오셨다네
아니, 스님의 장인이라고 하셨습니까
장인뿐인 줄 아나 장모도 함께 와 있다네
스님의 장인과 장모가 오신 게 정말입니까
절에 좀 시끄러운 일이 있어 찾아오셨지
산중의 절에도 시끄러운 일이 있나요
마누라하고 첩하고 싸움이 붙었지 뭔가
장인 장모가 담판을 내겠다고 찾아 왔지
개고기, 술, 장인 장모, 마누라, 첩이라고요
이 사람아, 누가 첫째 첩 가지고 그러는가
얼마 전에 얻은 둘째 첩이 또 말썽 부리네
지금도 대판으로 싸우고 있을지 모르니
나는 세종, 행복도시로 내려 가봐야겠네.
《93》품격
전 민
미숙한 공작새는
날개 대신 종아리로 유혹하고
품격이 낮은 사람일수록
금으로 학식과 인품을 덧칠한다
《94》가위 바위 보
전 민
시골 어느 동물농장에서
의좋던 닭, 오리, 강아지가
특식 선취 경쟁을 벌이다가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결국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했다
닭은 강아지만 빠지면
오리는 이길 수 있다 하고
오리는 닭을 제외하자 하고
강아지는 닭발은 자신 있으나
오리발은 어렵다고 말했다
셋이 모여 조합을 이루면
승부를 가리기 힘에드니
잔머리 잘 돌리는 인간들처럼
승부수 있는 약자만 골라
게임놀이하며 살기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