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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子의 잉태
창 50:1-26
天子. 하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황제들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제 자리에 어떤 명분과 타당성을 만천하에 설득시키고 공포할 때에 내가 하늘의 아버지다 라고 호칭을 사용 하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야말로 천자, 하늘의 자녀들이 잉태되어지는 하나님의 자궁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임신을 하시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대체 하나님이 아이들을 잉태하셨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창세기 50장을 보면서 특별히 출애굽기와의 연관성 하에서 창세기 50장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창세기 50장에서 출애굽기로 넘어가는 이 과정, 이 의미가 도대체 연관성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서 은혜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는 타락 이후에 수없이 많은 백성과 민족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그 민족 중에는 탁월한 문명을 발생시킨 그런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탁월한 문명의 창조자라고 여겨지는 그런 나라와 민족과 백성들을 선택하시지 않고, 부락민으로 살게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고 야곱의 열두 아들을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로 삼으시고 또 그들을 통해서 영적인 믿음의 씨가 만천하에 하늘의 별처럼 이 지구의 티끌처럼 많은 자손들이 생겨날 수 있게 하기 위한 구원의 역사를 이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보잘것없는 가계를 선택을 하시고 그 가계로부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모습들로 발전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발전의 역사는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이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져서 그의 열두 아들 시절로 와서 그들은 애굽생활을 하게 됩니다.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로 살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애굽에서 나오는 것이 출애굽이고 광야생활을 하게 되는 그러한 이야기가 출애굽기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출애굽기와 연관성을 통해서 창세기 마지막 부분을 볼 때 애굽으로 내려가서 야곱의 12아들이 살게 된 이야기를 그동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이 무엇을 말하느냐? 하나님이 당신의 자궁에다가 자기의 자녀들을 잉태하게 된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생활 430년 동안 정말 장정만 60만명이 한 나라를 이룰 수도 있는(전체 인구는 약 250만~300만명 추산) 거대한 민족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그 애굽에서의 노예생활은 하나님의 자궁 속에서 하나님의 아이기 잉태되어서 아이의 모습을 갖춰서 출애굽 시절이 되면 그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내용적으로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우수한 민족과 나라가 고대 문명을 발생시키고 있을 때에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궁 속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천자입니다. 모든 다른 이방 세계에서의 천자는 황제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성경을 통해서 볼 때 천자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하늘의 아들들이라면 하나님의 피가 흘러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뱃속에 잉태된 이 하나님의 아이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피가 흘러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피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가 구분할 수가 있습니까?
창세기 49장 마지막에 야곱이 죽으면서도 그랬지마는 야곱의 유언을 50장 앞부분에 요셉이 바로왕 앞에 반복해서 알려지게 합니다. 가나안 땅으로 나를 매장하라고 야곱이 유언했다 그리고 자기도 죽음을 예언하면서 자기가 죽거든 자기 시신을 매고 가나안 땅으로 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것이 400년 뒤에 이루어지는 부탁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약속해 주셨다는 단 하나의 약속이 430년에 걸쳐서 300만 명으로 번성해가는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는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단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나안 땅으로 인도되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어 내시어 가나안 땅으로 가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이 단 한 문장에 걸쳐서 쓰여지는 이 하나의 약속이 300만 명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요소였고, 하나님이 우리 백성을 그래서 그 백성 중에 속한 나를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실 거라고 하는 이 언약의 생각이 바로 핏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으로 부여잡고 있는 상태 이것이 핏줄입니다. 생각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그리고 실제가 아닌 심리적인 상태로 머물러 버리는 자기 최면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실제는 영입니다. 그 영이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생각 속에 머무시는데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있는 그 생각,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 가실 거야 라고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는 그 생각의 핏줄 안으로 하나님의 영이 피처럼 흘러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30년 동안 애굽에서 지금 노예생활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뱃속에 잉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민족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 그 여호와로부터 이렇게 구체적인 지상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약속을 갖고 있었던 민족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씨가 온 천하에 모래알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으로 붙잡고 있는 사람들 그 생각이 핏줄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이 피가 되어서 흐를 그 자손들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도 가나안 땅의 약속을 붙잡고 죽습니다. 가나안 땅을 못 가졌습니다.
요셉도 가나안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그 땅에서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가나안 땅을 약속해주신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붙잡을 것뿐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살지도 못했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잡기 위한 미끼입니다. 하나님을 붙잡을 길이 없지 않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붙잡습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이 미치질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이라고 하는 이 지상에서의 보이는 대상을 향해서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주실거야 라고 생각하는 그 약속에 강조점이 어디 있느냐면 하나님이라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은 결국은 가나안 땅에 살지 못하고 이국 땅에서 죽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 핏줄이 형성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보이는 사물을 통해서 하게 되는 겁니다.
가나안 땅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가나안 땅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하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약속 해주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생각이 하나님이 영이 들어오는 핏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사건을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우리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출애굽은 광야생활이 주입니다. 출애굽은 430년 동안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붙잡고 있는 생각을 형성하게 되는 그래서 하나님의 피가 흐르는 천자들의 뱃속에서의 모습 갖추기였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은 태어납니다. 태어나서 광야생활을 하게 합니다.
이 광야생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아기가 처음 엄마의 배속에서 태어나면 그 아이는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고, 자아의식도 없고, 그러면서 하루 이틀 지나며 계속해서 보게 되는 분은 엄마요 아빠입니다. 첫 번째 관계를 맺게 됩니다. 기존의 아무런 관계가 없이 핏덩어리로 태어나서 첫 번째 관계를 맺는 분이 엄마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출애굽 광야생활은 430년 노예생활을 통해서 언약을 붙잡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핏줄이 흐르는 그런 아이로 잉태해서 자궁 속에 컸고, 이게 그 아이가 해산합니다. 출애굽입니다.
광야 40년의 의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었던 지식, 경험 이것들이 다 zero가 되어 버립니다. 광야에서 어떤 지식을 가지고 어떤 경험을 활용하면 40년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물 한 모금,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죽음의 땅 사막에서 40년을 지내게 되면서 이 세상에서 갖고 있었던 지식과 경험과 내 계획들이 다 zero 가 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한다니까 이상적으로 보이십니까? 구름기둥이 한 달 동안 머물고 일년 동안 머뭅니다. 그러면 꼼짝도 안하고 서 있습니다.
가고오고 하는 인생의 모든 나의 계획이 zero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갓난아기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알고 있었던 사람들을 다 마음에서 버리고, 오직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살려주시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갓난아이가 엄마를 처음 관계하듯이 하나님을 그렇게 관계하는 겁니다.
이것이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광야생활은 갓난아기로 태어난 아이를 엄마와의 관계에서 자아의식을 갖게 하는, 즉 처음으로 ‘너’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나라는 자아의식을 가질 때 처음으로 엄마와의 관계를 통해서 갖는 것처럼, 광야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살리십니다. 남편이 돈 벌어서 나를 살리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는 겁니다. 아빠 때문에 아이들이 살아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 때문에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나를 찾게 만드는, 나라는 생각을 갖게하는 첫 번째 관계를 갓난아이와 엄마와의 관계처럼 ‘나’를 광야에서 갓난아이로 만들어 하나님으로 ‘너’로 삼게하는 과정이 출애굽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이런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야곱이 죽고나니 요셉의 형들은 자기를 팔아먹은 우리를 죽이지나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이 걱정을 전해듣고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그 악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다”고 말을 합니다.(15-21절)
요셉은 꿈을 꾸는 사람입니다.
꿈을 통해서 약속을 붙잡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입니다. 요셉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 모습은 그대로 주님의 십자가로 옮겨집니다.
가룟 유다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이나 율법사와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악을 바꾸어 만민을 구원하는 대역사를 이루시는 사건으로 전환시키십니다. 내 계획과 내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주실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디자인하고 계실 것이라고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가는 자들에게는 나를 향한 악을 모두 바꾸셔서 내가 살 뿐만이 아니라 만민이 살 수 있는 그런 삶의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이게 천자들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엄마로서 아들을 키운다면 아들이라는 계기, 딸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실 것이라는 그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항상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리라는 그 약속을 믿고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으로 그 약속을 핏줄 삼아서 하나님의 영이 생명으로 들어오시고, 그 후에 우리에게 향한 모든 도전들을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시고 생명의 역사로 바꿔 나가시는 것 이것이 바로 천자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경험이 나를 움직여 갈 수 있습니다. 지식이 나를 움직여 갈 수 있습니다. 내 판단력이 나를 움직여 갈 수 있습니다. 좋다 나쁘다 선악의 분별이 나를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다 없애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리라’.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리라...
그러므로 가나안 땅을 보았듯이 주님의 십자가의 약속을 붙잡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시기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계속 붙잡고 있는 자는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나안 땅의 약속을 붙잡듯이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그 언약을 붙잡는 자가 하나님의 천자요 이 땅에서 생명의 역사의 발판이 되는 자들입니다.
[기도]
하나님,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붙잡고 그러나 가나안 땅에 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붙잡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된 야곱과 요셉처럼 또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오늘 하루 살아갈 때에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며 그들에게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는 약속만을 바라보는 자들 그들의 天子됨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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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필자 바룩의 심정으로 창세기를 마쳤습니다. 감사 드리며...
indeedpapa 님의 수고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샬롬~!
대체 어떤분이신지 너무 궁금하고 또 너무 감사합니다. 녹취작업이 결코 쉽지만은 않을텐데 말입니다. 제게는 이렇게 정성스레 올려 주시는 녹취가 정말 큰 도움이 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