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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스인생 화물노동자’ 노조서 희망 찾다
돌쇠 같은 일꾼, 조성규 당원(광주 광산)
“오월의 희망으로 세상을 보라!”
28년 전, 광주 금남로를 밝혔던 민주의 횃불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로 다시 피어올랐다. 17일 저녁, 조성규 당원은 가족들과 함께 금남로를 찾았다. 아내 김정은 당원, 큰 아들 만강이, 둘째 장용이, 막내딸 현이도 촛불을 들었다. “아빠, 소는 풀 먹여 키워야 하는데 왜 고기 먹인 소를 우리보고 먹으라는 거야”라고 말하는 초등학교 1학년인 딸 현이도 아는 진실을, 촛불의 함성을 외면하는 이명박 정부가 한심스럽기만 하다. 촛불문화제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그는 무대로 쓰는 윙카를 운전해 주기도 한다.
조 당원네는 조선대에서 열린 장기투쟁사업장 주점에 갔다가, 새벽 3시에 망월동으로 향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기념식에 참석해 망월동 출입을 통제된다는 얘기를 듣고 서둘러 간 것. 이명박 대통령이 망월동의 별을 보며, 5.18영령들을 기리는 시간을 준 셈이다. “원통하다. 군부독재 뒤를 이은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이 어떻게 망월동에 발을 디딜 수 있느냐. 우리가 구 묘역에서 집회하는 게 그들에게 밀려난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한다.”
다음 날, 국민대회가 열리는 금남로에 조 당원네가 다시 나타났다. 딸 현이는 아스팔트에 드러누워 졸고 있다. 편안한 집을 두고 아빠와 함께 고생스런 길을 마다않는 아이들이 고맙기만 하다. 아내 김정은 당원은 “(남편)활동하는 게 바른 거니까 이해하고 함께 하죠. 아이들이 아빠와 함께 행사에 오는 것을 좋아해요”라며 웃었다.
오월정신계승은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
조 당원은 광우병 쇠고기운반을 거부해 ‘운수짱’이라며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운수노동자다. 그에게 오월정신은 계승 광우병 쇠고기를 막아내는 것이며, 열악한 화물운송노동자의 노동조건을 바꿔가는 것이다.
그는 25톤 트레일러를 운전하고 있다. 하루에 두 번 광주와 광양항을 오간다. 금호타이어 수출 컨테이너를 싣고서.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조 당원의 손에 들어오는 수익은 얼마 되지 않는다. 기름값이 운송료의 80%나 차지하고, 보험료․검사비․적재물금까지 따지면 적자다. 12년 전 처음 화물차 운전을 할 때나 지금이나 운송료는 오르지 않았다. “처음 할 때나 지금이나 운송료는 똑같은데 기름값 오르는 건 상상을 초월하죠. 부대비용도 많이 오르고……. 가장 힘든 게 화물노동자인 것 같아요.”
“마이너스 인생을 살고 있는 거죠”라며 쓴 웃음을 짓는 조 당원. 그렇다고 이일을 그만둘 수 없다. 그만 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제도적인 모순을 바꾸는 길을 선택했다. 2003년 화물연대 파업에 동참했다. 투쟁하는 노동자가 된 것이다. 그는 “노조 활동하니까 마음이 편해요. 이전엔 힘들다고 푸념만 했는데 이젠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까요”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다.
노조활동은 보람 있다. 혼자선 엄두도 못 냈던 일, 노동자가 뭉치면 해낸다. 그는 2006년 3월, 화물연대 총파업을 이끌면서 집행유예를 받기도 했다. 당시 삼성광주전자가 제품을 운송하던 화물연대 노동자 51명을 해고했다. 부당해고 철회와 단체협약을 요구하며 한 달간 파업을 벌였으며, 결국 승리했다. 승리의 짜릿함, 동지들의 환한 웃음, … 현장 활동가가 된 그가 새로 알게 된 인생의 기쁨이다.
그는 금호타이어 지회를 조직한 주역이기도 하다. 보통 지회는 150명 이상이 모이는 조직이다. 광주엔 3000여명 화물운송노동자가 있다. 그 가운데 조합원 800여명. 그가 아직 갈 길이 멀다 하는 이유다. 더 많은 화물노동자가 노조와 함께 하도록 발품을 팔고 있다.
선한 웃음을 머금은 돌쇠
그는 스스로 불량당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최경미 광산구의원은 지난 총선, 유세차를 몰고 밥을 굶으며 온종일 농촌지역을 돌고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던 그를 기억한다. 최 의원은 “보기엔 무뚝뚝하지만 섬세하고 말보다 몸으로 일하는 일꾼, 바로 돌쇠 같은 일꾼”이라고 했다. 박성태 조합원은 “싫은 사람, 좋은 사람 구분없이 대한다”며 그의 주위에 사람이 많은 비결을 알려줬다. 진짜, 10분만 그의 곁에 있어 보면 안다. 쉼 없이 그에게 도움을 청하는 전화가 온다는 것을. 그러나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진짜 선한 웃음을 지닌 노동자라는 것을.
모범사원, 지독한 싸움꾼이 되다
정승기 대전 대덕구 한국타이어분회장
“현장에 있어야 회사를 감시할 텐데, 격리되니까 속이 탄다. 현장 사람들은 저를 믿고 제보를 해 주는데 활동이 막혔다.”
“죽여버리겠다!” 목에 칼 들이대고 살해 협박받다
민선희 당원은 씩씩하다. 유인물만 뿌려도 징계를 주는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매일 오후 2시 신탄진 한국타이어 정문 앞에서 “NO 정승기 강제전환 배치”라는 피켓을 걸고 있다. 민 당원은 남편 정승기 한국타이어분회장이 억울하게 공장에서 물류센터로 강제배치된 것에 항의하는 1인 시위 중이다. 퇴근하는 차량이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유인물을 나눠 준다. 민 당원이 나눠주는 유인물 내용은 끔찍스럽기만 하다. 정 분회장이 물류센터 동료에게 살해 협박을 당했다는 소식이다.
지난 22일, 물류센터서 형처럼 지내던 동료가 근무시간에 술이 만취한 상황에서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라. 출근하면 죽여버리겠다”면서 정 당원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곧 베어버릴 듯 협박을 했다. 정 분회장은 간신히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 사람이 나를 협박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의심이 가는 건, 전날 팀장이 왔다 간 거다.” 정 분회장은 그 사람이 사측의 사주를 받아 ‘과잉충성’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렇게 했는데도 회사에 멀쩡히 출근시키고 있다. 나는 유인물 뿌렸다고 회사 출입을 막고 경고장을 줬는데, 이 사람에게 솜방망이 처벌만 내린 것은 의심이 간다.”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정 분회장은 2005년 3월에도 작업현장서 주임에게 목을 따버리겠다고 협박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도 회사는 그 주임에게 감급의 경미한 처벌만 내렸다.
당 분회가 민주노조 활동…당원은 특별감시 대상
정 분회장은 신탄진공장에서 타이어 품질 검사를 하던 노동자다. 그런데 지난 15일부터 작업 연관성이 없는 물류센터로 강제전환 배치를 받아 타이어 상하차를 작업을 한다.
공장에선 근무시간에 화장실도 맘대로 못 간다. 동료와 얘기도 못 나눈다. 민주노동당 당원이면 특별감시 대상이다. 당원들은 회사의 탄압에 심각한 스트레스, 우울증을 앓아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당원으로 당당하게 노조 민주화 활동을 한다. 이것이 정 분회장이 끊임없이 사측에게 탄압받는 이유다.
“한국타이어 노조는 어용이고, 현장조직도 없다. 당 분회가 유일한 현장 조직이다. 당 분회가 민주노조 활동을 한다고 여겨 탄압을 한다.” 요즘 광우병 쇠고기로 인해 뿔난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명박 대통령과 회장이 사돈지간이라더니, 노동자 탄압도 닮은 모양새다.
절친한 동료의 압사, 부당한 현실에 눈 뜨다
93년 입사한 정 분회장은 10년 이상 회사를 위해 아주 열심히 일했다. “회사에서 가장 상을 많이 탄 사람이었다. 마라톤대회에 회사 깃발 들고 달리기도 했다.” 그런 그가 노동자로 자각하는 계기는 절친한 동료의 죽음이다. 일하던 동료가 압사를 했는데 그 처리과정이 너무 비인간적이었다. 사측은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근조리본도 달지 못하게 했다. 그 때부터 부당한 노동현실에 눈을 떴다. “노동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전태일 평전 한번 읽었다”는 정 분회장. 질기게 싸우고 있다. “난 목숨 걸고 싸운다.”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 산재사망의 진실을 밝히는데 매달린 그에게 떨어지는 건 고소고발, 가압류, 징계, 조합원 영구제명이었다. 정직 3개월은 일상사다. 본격 싸움을 벌인 2005년부터 회사를 상대로 한 소송만 20여건이 넘는다. 지금도 부당전보 취소 가처분 신청을 비롯해 5건이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꼼꼼하게 자료를 모아 놨다. 소송자료만 해도 두꺼운 두 개의 파일이 꽉 찰 정도다. 이제 소송의 달인이 됐다. 강력한 탄압이 ‘싸움의 기술’을 익히게 한 스승인 셈이다.
‘죽음의 공장’ 진실 밝히기…“함께 싸우자” 유가족 설득
한국타이어는 ‘죽음의 공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지난 1년 6개월 동안 15명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지난 4월 28일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에 ‘2008 최악의 살인기업’으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유족들이 ‘한국타이어노동자집단사망 진상규명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싸움에 나서는데 정 분회장이 노력이 컸다. 사망 노동자 자료 수집을 하고, 유족을 찾아가 “회사 책임이다. 싸우자”고 설득했다. 처음에는 유족들이 그를 의심했다. “정치적 의도가 있거나 한몫 잡으려 하냐고 의심받았다. 그러나 진심을 알게 되니까 속을 털어놓았다.” 그래서 대책위가 꾸려지고, 억울한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사측은 공식 사과 한 번 없다. 오히려 유족 가계도까지 만들어 탄압빌미로 삼을 지경이다.
싸움의 기술 “질긴 놈이 이긴다!”
숨죽인 현장노동자들도 내색은 않지만 그를 믿고 지지한다. 그가 두둑하게 모아놓은 자료의 제보자는 다름 아닌 현장 노동자다. 소리 없는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그의 활동을 방해하려고, 회사는 전환배치라는 이름으로 그를 현장과 격리시킨 것. 그는 속이 탄다. “현장에 있어야 회사를 감시할 텐데, 격리되니까 속이 탄다. 현장 사람들은 저를 믿고 제보를 해 주는데 활동이 막혔다.”
반드시 공장으로 돌아가야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아갈 자신도 있다. “회사도 강제전환 조치가 정당한 전보조치가 아니고 징계라는 것을 인정했다.” 소송의 달인이 된 그가 법을 우호적으로 만들 싸움의 기술을 쥔 것이다.
“노동조합을 바꿔내야 한다. 그 것 밖에 답이 없다!” 고 강변하는 정 분회장, 그가 목숨을 걸고 헤쳐 온 노조 민주화. 조금씩 전진하고 있다. 얼마 전 대의원대회에서 대의원 선출방식이 ‘기표식’으로 바꿨다. 기존 노조 대의원 투표방식은 ‘자서식’. 즉 자기 이름을 친필로 서명하는 원시적인 방식이었다. 선거 때마다 자서식 투표 가처분소송을 냈다. 한국노총에서 권고를 받은 사항이긴 하지만 끊임없는 투쟁으로 바꾼 것이다.
“잠자는 시간 말고는 투쟁만 한다”는 정승기 분회장. 그는 민주노조를 만들 때까지 쉼 없이 투쟁할 것이다. ‘질긴 놈이 이긴다’ 하지 않았던가. 그는 본디, 하나를 하더라도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또, 그에겐 2004년 12월 24일 함께 당원으로 가입하고, 함께 싸워온 든든한 동지, 아내 민선희 당원이 있다. 그래서 씩씩하게 싸울 수 있다.
‘재개발공화국’ 서울서 서민의 주거기본권 찾기
2010년 진보 서울 밑그림 그리는 정상길 당원(동작 당원)
오월의 마지막 날, 벌써 여름이 찾아온 듯 후덥지근하다. 좁고 경사진 골목길을 오르는 상길 씨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재개발이 추진돼 이주와 철거를 앞두고 있는 흑석동 6구역을 찾아가는 길. 이 곳 세입자에게 법에 보장된 권리를 찾을 수 있게 정보를 알려주고, 세입자공동소송인을 모집하는 홍보활동에 나선 것이다.
대문마다 준비해간 홍보물을 끼우기를 한참, 평상에 앉아있는 아주머니들을 만났다. 홍보물을 나눠주고 설명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한 아주머니가 삿대질을 하며 “뭐 하러 왔냐?”, “안 그래도 집값 떨어져 속상한데 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상길 씨도 질세라 목소리를 높인다. “왜 나누고 살려고 하지 않냐”고. 좀 체로 화를 내지 않는 상길 씨가 목소리를 높이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집주인들은 세입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줄이려 하기 때문. 그러니 세입자를 보호하는 것이 곧 집주인에게 손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상길 씨는 달갑지 않은 손님인 게다. 이런 봉변은 다반사다. 때론 이권을 가지고 재개발에 개입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장 갈 곳이 없는 어려운 형편의 세입자에겐 그저 고맙기 한 존재다. 위쪽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새댁은 “전세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면서 물어왔고, 이에 상길 씨는 조근 조근 설명해 준다.
상길 씨가 이곳 흑석동을 찾은 것은 지난해 여름부터다. 재개발이 추진되는 곳을 찾아 세입자의 권리 찾기를 지원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세입자가 20% 정도 남아 있다.
동작공대위 집행위원장, 상도5동 철거민투쟁 승리 나눠
이날 상길 씨와 함께 홍보활동에 나선 이들은 동작승리연대 회원들. 이들은 지난 4월, 상도5동 철거지역 승리를 이끌어낸 주역들이다. 꼬박 4년을 싸웠고, 마지막 남은 2명의 주민도 보상을 받았다. 싸움을 승리한 상도5동철대위는 해산하지 않고, 동작승리연대로 이름을 바꿔 연대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상길 씨와 이들의 인연은 2006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길 씨는 2006년 4월 구성된 ‘주거기본권 확보와 영세상인 생존권 보장을 위한 동작공동대책위원회’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아 상도5동철대위 싸움에 적극 나섰다. 상도5동 철거 싸움은 늘 조마조마했다. 상도5동철대위 2년맞이 투쟁을 준비하며 “잘못하면 누를 끼친다”는 생각에 잠도 못 자고 조직을 했다. 그 결과 전노련의 서울조직이 다 참여하고, 수천의 대오가 집결했다. 상도5동 철거민은 “할 수 있다”는 자신과 희망을 찾았다.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하니까 행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손채숙 동작승리연대 부회장은 “상길 씨는 우리보다 더 열심히 했다”면서 “너무 성실한 젊은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미혜 전 상도5동 철대위원장은 “싸우기 바빠 애인도 못만들었다”면서 “우리가 승리하고 상길 씨 결혼추진위 꾸리자고 했어“라며 웃으신다. ‘상길 씨’는 이들 모두의 아들이고, 동지인 셈이다.
동작공대위는 동작구위원회, 상도5동철대위, 전노련 남부지역, 숭실대총학생회 등의 지역단체들이 모인 연대기구. 철거민, 세입자, 노점상, 학생, 당원 등 다양한 계층이 모여 일상적인 연대를 이루고 있다. 상길 씨는 “연대조직은 운동방식이나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조정하는 게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동작공대위는 지속적으로 연대하면서 동질감이 형성됐다”면서 기꺼이 “한 식구”라는 표현을 썼다. 상길 씨는 “주민의 생존권 문제에 긴밀하게 연대하는 동작공대위는 서울 지역활동의 모범으로 평가된다”며 은근슬쩍 자랑도 늘어놓는다.
재개발공화국 서울…진보 서울 밑그림을 그린다
상길 씨는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아니 동작에서 서울시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그가 맡은 일은 서울시당 뉴타운TF팀 간사다. 동작공대위 경험을 살려 서울시당에서 뉴타운 사업을 시작했다. 뉴타운TF팀은 부동산 컨설턴트인 백 준 당원과 뉴타운 문제가 불거진 서대문, 마포, 동작, 성동 지역위 등이 참여한다.
지난 총선, 서울에선 ‘뉴타운 공약’이 승패를 가늠 지었다. 하지만 건설업자의 배만 불리는 뉴타운은 집 없는 서민들에겐 고통만 안겨줄 뿐이다. 서울을 바꾸는 진보적 도시플랜을 마련하기 위해선 가장 우선 맞서 싸워 할 과제가 뉴타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는 뉴타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당원들이 세입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사업을 펼 수 있도록 매뉴얼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집이 상품으로 거래되고 정말 가진 자들의 재산증식 수단으로 철저하게 악용되고 있다”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상길 씨. 그는 “최근 서울 재개발조합 연합체가 주거이전비나 임대아파트 비율 등 보상기준을 후퇴시키려고 한다”면서 “주거가 상품이 아니라 사회재로, 주거권이 사회권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진보정당이 지역서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상길 씨는 서울시당 당원들이 재개발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7월 재개발, 세입자학교를 준비하고 있다. 세입자학교는 이미 작년하반기 동작공대위에서 5회에 걸쳐 진행한 경험이 있다. 세입자학교에 참여한 주민들은 동작공대위 카페 회원으로 가입, 카페 회원은 200여명으로 늘어났다.
서울시당의 뉴타운 사업은 2010년 지방선거를 겨냥하고 있다. 상길 씨는 “집 없는 다수의 서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서울을 만들어갈 진보정당을 주저하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게, 뉴타운 사업에 승부를 걸겠다”는 다짐이다.
당원들의 분노를 ‘희망의 에너지’로
김종현 인천서구 비대위원장
노조원 흩어지던 아픔 당에서도 반복할 수 없었다
꼬박 석 달이 지났다. 김종현 당원이 ‘인천서구위원회 비대위원장’이라는 낯선 직함을 단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그동안 김 위원장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당원들을 만날 수 있다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갔다. 때로는 지역위원회 일과 개인사업 일정이 겹쳐 아등바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당원들의 분노를 ‘희망의 에너지’로 모아내는 시간이었다.
인천 서구위원회는 ‘탈당사태’를 혹독하게 겪었다. 김 위원장은 지역위원회 해산 결정을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었다. 한영공영이 파산을 겪게 되면서 노조원이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던 그가 다시 그러한 고통 앞에 마주섰다. 자본의 탄압에 의한 분열도 아니고, 정치적 견해 차이로 지역위원회를 해산하겠다는 말에 그는 억장이 무너졌다. “이건 아니다, 싶었죠!” 그는 비대위원장을 맡았고, 당의 단결을 바라는 당원들을 열심히 만났다.
당시 460여명의 당원 가운데 절반이 당을 떠난 상태였다. 김 위원장은 당의 조직체계를 세우는데 집중했다. 그 시작은 분회재편이었다. 분회를 이끌어갈 분회장을 세우고, 현장분회를 3개로 재편했다. 김 위원장은 직접 노동현장을 찾는 발품도 아끼지 않았다. 현장1분회를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 부성여객 황일남 노조위원장, 탈당했다가 복당해 노년위원회에 참가한 서갑순 당원 등 김 위원장의 어깨의 무거운 짐을 덜어준 당원들이 있어 분당의 상처는 치유돼가고 있다. 늘 노심초사했던 김 위원장은 이제 “당 할동의 골간인 분회 꼴은 갖춰놨죠”라며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후보 못낸 아픔 ‘이젠 그만’ … “2010년을 다를 것”
서구위원회는 총선, 서구청장 보궐선거를 속 타는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더욱이 쇠고기 정국의 수혜를 톡톡히 입은 통합민주당 이훈국 후보의 당선은 후보를 출마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더 크게 만들었다.
김 위원장은 이를 악물었다. “2010년 다를 것이다.” 정당 활동의 최고목표는 선거를 통해 성과를 남기는 것. 서구위원회는 2010년 최소 2명 이상의 구의원 당선을 목표로 세웠다.
객관조건도 나쁘지 않다. 지역개발에서 소외된 곳인 서구는 저소득층과 노동자가 밀집해 있는 곳이며 시민사회단체들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다. 저소득층 지역아동센터인 ‘내일을 여는 교실’, 인천여성회 서지부, 인천연대 서지회 등 서구를 기반으로 지역사업을 벌이는 단체들과 연대도 꾀하고 있다.
“다시 열심히 해보자.” 당원들의 기세를 모아 2010년을 향해 뛸 태세를 갖춰가고 있다. 특히 노동현장을 기반으로 당 강화에 정성을 쏟고 있다.
그런 가운데 촛불문화제로 자신감도 회복했다. 김 위원장은 강남시장에서 광우병쇠고기 반대 1인 시위와 서명운동을 앞장섰다. 이곳에서도 촛불소녀들과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지난 6월 10일에는 ‘광우병 쇠고기를 반대하는 인천서구 주민모임’ 깃발을 들고, 100만 민중대회 참석하기도 했다.
노동자의 ‘깡’으로
“온전하게 시간을 다 쏟아 부어도 모자랄 판에…….” 김 위원장은 열정은 앞서는데, 생계를 위한 개인사업과 병행해야 하는 조건 때문에 안타까워한다.
당원들은 김 위원장이 지난 석 달을 슬기롭게 헤쳐 왔듯, ‘사람을 품을 줄 아는 넉넉한 품성’으로 지역위원회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노동자의 패기와 깡으로 단련된 그에게 당원들이 거는 기대가 크다. 그는 사측과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맞서 구속과 해고를 감내하며 싸웠던 한양공영 노조위원장이었으며, 인천노조에서 비정규직 조직에 앞장섰던 활동가가 아니었던가.
“민주노동당이 지역에서 진짜 뿌리내리고 잘 커야죠. 국민에게 대안세력으로 인정받아야죠.” 지역서 이름만 걸어놓는 당이 아니라, 더 많은 주민에게 사랑받는 당을 만들고 싶다는 김종현 위원장. 그는 오늘도 희망을 함께 키워갈 당원을 만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청주 촛불문화제 ‘명’사회자로 등극한 임산부
촛불 아줌마, 금선아 당원(청주 당원)
철당간의 촛불…천년 역사의 만남
청주 성안길 철당간은 1000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고려 광종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며 독자연호를 썼다는 것을 알려주는 귀중한 국보인 ‘철당간’ 광장에서 날마다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철당간은 화강석으로 그 사이 둥근 철통 30개를 연결해 세운 고려시대 청주의 대표 절집인 용두사의 당간이다. 철통에는 ‘준풍 3년’(962년)이라는 연호가 새겨져 있다.
철당간 광장의 촛불은 이명박 대통령이 부시를 만나는 조공으로 갖다 바친 ‘국민건강권’과과 ‘검역주권’을 되찾으려는 촛불이다. 철당간 광장에선 1000년 전 민족주체성을 강조한 고려인의 숨결이, 1000년 뒤 ‘검역주권’을 지키려는 후손들에게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촛불 아줌마, 촛불행진 이끄는 마이크를 잡다
장마가 시작된 17일 저녁에도 이곳에선 어김없이 촛불이 피어올랐다. 22개월 된 딸의 손을 잡고 나타난 촛불 아줌마, 금선아 당원은 마이크를 잡았다. 금 당원은 촛불문화제에서 명사회자로 등극했다.
“사회가 특별하지는 않다. 촛불문화제를 구성하는 하나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는 그녀는 늘 ‘어떻게 하면 촛불문화제의 분위기를 살릴까’ 궁리를 한다. 그래서 촛불문화제에 나오기 전, 딸에게 저녁밥을 먹이고, 짬을 내서 촛불소식을 모은다. 17일은 홈에버 인천 남동구점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호주산으로 둔갑시켜 판매한 것에 온 국민의 분노가 들끓었다. 금 당원은 이 소식을 전하면서, 촛불문화제를 마치고 홈에버 청주점까지 거리행진을 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명박은 물러나라!”, “의료 민영화를 반대한다!” 구호를 선창하는 그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철당간에 쩌렁쩌렁 울러 퍼졌다. 이명주 충북도당 사무처장은 “여러 명을 사회자로 세워 봤는데 금선아 당원이 제일 분위기를 잘 살린다”고 칭찬을 했다.
임산부의 몸으로 밤 12시까지 사회…촛불 참여가 ‘최고의 태교’
지난 6월 10일 청주에서도 최대 인파가 모였다. 그 날도, 금 당원은 5000여명의 시민 앞에서 사회를 봤다. 그리고 사창사거리까지 진행된 거리행진을 대오 맨 앞에서 이끌었다. 정남득 청주시위원장은 “선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만 두라고 말려도 듣지 않았다”면서 “밤 12시까지 행진대열을 이끌었는데 뭔 일 날까 봐 조마조마했다”고 10일 일을 떠올렸다. 정 위원장은 “(선아가)자신을 아끼지 않아 걱정”이라고 하더니, “그 열정을 누가 말리겠냐?”고 애정이 묻어나는 푸념을 했다.
금 당원은 현재 임신 7주차 임산부다. 태아와 자신의 건강을 위해 편안하게 지내야할 시기에 연일 촛불문화제 사회를 보는 것에 주변에선 걱정이 많다. 그러나 그녀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삼성자본과 맞섰던 내공으로 촛불항쟁을 승리로
촛불문화제에서 ‘충북 광우병감시단 활동을 하는 주부’라고 소개해, 사람들은 그런 줄만 알았다. 하지만 금 당원의 내공은 이미 수년 전부터 쌓아 온 것이었다. 그녀는 월드텔레콤 지부장으로 삼성자본과 맞서 싸웠던 저력이 있다.
금 당원은 월드텔레콤에 입사 2년 만인 2002년 노조를 만들고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이듬해 ‘고용안정 협약서’를 체결했지만 회사는 약속을 저버리고 2004년 1월 새벽에 기습적으로 장비를 빼 중국으로 이전했다. 당시 6개월 동안 공장을 점거하고 싸웠으나, 삼성의 하청업체였던 월드텔레콤의 노조는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그 뒤 금 당원은 1년 정도 끊임없이 취업을 시도했으나 월트텔레콤 지회장이었던 사실이 밝혀지면 더 이상 회사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면접보고 나서 이틀 만에 해고된 적도 있고, 2주일 만에 해고된 곳도 있고, 가장 오래 다닌 곳이 한 달이다. 5번 해고를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취업하려고 애를 썼던 것은 영세중소기업에서 저임금에 시달리는 여성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 기세로, 깡으로 2008년 촛불문화제를 이끌고 있다. 금선아 당원은 이번엔 꼭 승리하는 투쟁을 만들고 싶다. 이것이 ‘최고의 태교’라는 생각으로, 무대에 선다. ‘반드시 국민이 이긴다!’는 자긍심에 저절로 힘이 솟는다.
이주여성은 따뜻이 보듬어야 할 우리 자매들
한글학당 선생님, 송신희 당원
월요일 오전 태안민생지원센터는 ‘이주여성들의 수다’로 떠들썩하다. 이주여성들을 위한 한글학당이 열리는 날, 태안군내 거주하는 태국․필리핀․중국․몽골 등 아시아 여성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 이들은 모두 한국 남성과 결혼해 살고 있는 결혼이주여성들이다. 서툰 한국말로 한글을 따라 읽는 이들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기만 하다.
이 한글학당에서 “선생님”으로 불리는 송신희 당원. 송 당원은 한글학당에서 이주여성들을 선생과 제자로 만났지만 끈끈한 자매애로 보듬고 있다. 아이 셋을 둔 송 당원은 임신과 육아에 힘겨워하는 이주여성들이, 모국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애처롭기만 하다. 스물아홉 살 새댁인 태국 출신 아로니 씨가 유산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나 속이 상했다. 다행히 고국에 가서 3개월 쉬고 돌아온 뒤 표정이 밝아진 아로니 씨를 다시 만나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한글학당…수준에 맞게, 쉽게
한글학당은 지난해 5월 태안성폭력상담소 유재연 소장이 처음 시작했다. 당시 사무국장이던 김성림 태안군위원장이 한글학당 강사를 맡아왔다. 그런데 유 소장이 서산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한글학당이 문을 닫게 될 상황에 처하자, 태안군위원회가 한글학당을 계속 이어 가기로 했다.
태안에는 한글학당 외에도 여성회관, 교회 등 이주여성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곳이 여럿 있다. 이곳 저곳 다녀본 경험이 있는 이주여성들은 “한글학당이 제일 쉽게 가르쳐 준다”고 칭찬을 한다. 송 당원은 “수준에 맞게 교재를 선택해 이주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쉽게 가르쳐주니까 좋아한다”고 했다. 또한 한동안 한글학당에 나오지 못하는 이주여성을 직접 찾아가는 세심한 배려도 아끼지 않는다.
이주여성을 사회구성원으로 따뜻하게 품어야
송 당원은 “한글학당에 나오는 이주여성들은 배움에 대한 열의가 높고, 남편이나 가족들이 존중해 주기 때문에 참여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이어 “안타까울 때가 많다”며 얼굴이 침울해진 송 당원은 “자리 나라를 떠나 낯선 곳에서 사는 이주여성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했다. “여건이 된다면, 인권문제 등 그들이 처해 있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데까지 활동을 넓혔으면 좋겠다”는 송 당원은 이주여성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가 다문화가정을 좀 더 따뜻하게 품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송 당원은 아직은 자신이 그런 몫까지 하기엔 부족함이 많다고 스스로를 낮췄다. 하지만 송 당원은 이전에도 사람을 귀히 여기는 일을 해 왔고, 앞으로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안시대’라는 주간지 기자로 일할 때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란 코너를 맡아 태안지역의 평범한 이웃을 찾아갔다. 그 때 원북방면을 운행하는 시골버스의 안내양을 만난 적이 있다. 원북방면 버스는 학안포, 신두리 등 관광지가 있어 안내양을 배정했다. 노인들이 버스타고 내릴 때 짐도 덜어주고, 대화상대도 돼 주는 안내양과 동행취재를 하기도 하고, 평생을 농부로 살아온 시골 노인을 취재하기도 했다. 자신의 사연이 실린 신문을 들고 다시 찾을 때 그들이 굉장히 기뻐하던 기억은 짧은 기자생활의 큰 보람으로 남아있다.
우리에게도 이주여성에 대한 아픈 기억은 있다. 미군 아내로, 서독 간호사로, … 우리 역사에도 이주여성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아픔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새 삶을 찾아 온 이주여성에게 좀 더 따뜻한 배려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믿는 송 당원은 이주여성들과 삶의 애환을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화순 사람으로 뿌리 내리고 싶다”
김문찬․김지숙 부부 당원(전남 화순)
김문찬․김지숙 부부 당원 가족은 지난주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문찬 씨 일터가 광주로 바뀌면서 1주일 휴가를 냈다. 문찬 씨와 지숙 씨, 15개월 된 아들 준혁이는 푸른 동해바다를 눈이 시리도록 봤다. ‘촛불집회로 바쁜 시기에 한가하게 여행이나 다니냐’고 나무랄 수도 있지만 이들 부부에게 이번 여행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아기도 낳아 키워야 되고, 내 삶도 추스러야 되고 고민이 많다”는 지숙 씨의 자아찾기 여행인 셈이다. 그러나 고민이 말끔히 풀리진 않았다. “여행의 결론은 ‘열심히 살자’죠.” 남편 문찬 씨가 끼어든다. ‘어떻게 가치 있는 삶을 살까’는 한평생 고민해야 할 문제라는 거다.
4.9총선 춤바람 일으킨 주역들
문찬 씨와 지숙 씨는 2005년 결혼을 하고 화순에서 살기 시작했다. 광주도 가깝고 집값도 싼 게 화순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이유다. 처음 이유야 그랬지만 살다보니 정이 많이 쌓였다. 특히 지난 4.9총선은 이들 부부가 진짜 화순 사람이 되는 계기가 됐다.
부부는 총선때 전종덕 후보의 선거운동원으로 뛰었다. 화순민주청년회를 비롯한 젊은 당원들 중심으로 유세단을 꾸려, 화순․나주를 돌려 ‘춤바람’을 일으켰다. 유세단이 첫 선을 보였던 화순 5일장에선 민주당 선거운동원들이 경계를 할 정도였다. 광주로 출근하는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너릿재 터널에서 아침유세를 벌이기도 했다. 급기야 경쟁상대인 민주당측은 이들의 인기를 잠재우기 위해 전문 에어로빅 강사를 ‘초빙’하기도 했다.
문찬 씨는 휴대전자 대리점에서 일하는 틈틈이 유세단에 결합했고, 지숙 씨는 온종일 선거운동을 뛰었다. 그래서 아들 준혁이도 손가락을 네 개 펴고 곧잘 선거운동을 따라 했다. 주변에선 “준혁이가 10표는 모았을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전종덕 후보의 15.37%라는 지지율에는 이들 가족이 흘린 땀방울이 녹아있는 셈이다.
아내 지숙 씨 “요즘 질풍노도의 시기다”
“총선을 겪으면서 화순지역 당원과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됐다”는 문찬 씨는 “선거 끝나고도 불러주는 술자리가 많다”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재미가 쏠쏠한 눈치다. 이 얘기를 듣던 지숙 씨가 살짝 눈을 흘긴다. 선거 때는 함께 어울렸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 “임신한 줄도 모르고 선거율동을 했는데 선거 끝나고 나서야 둘째아이 임신 사실을 알았다”는 지숙 씨는 현재 임신 5개월이다.
지숙 씨는 올해 3월부터 전여농 전남연합 총무를 맡고 있다. 농사짓고 살림하고 아이 키우면서 1인 다역을 거뜬히 하며 살아가는 여성농민의 삶의 지혜를 배우고 싶어 총무를 맡았다. 그런데 둘째 임신이라는 변수가 생겼다. 앞으로 2~3년은 더 출산육아에 투자해야 할 듯하다. 그래서 지숙 씨는 답답하다. 의욕은 앞서는데 활동에 제약을 받으니까.
“질풍노도의 시기”라며 고민이 많은 지숙 씨를 곁에서 지켜보는 문찬 씨는 아내가 좀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 친화력이 뛰어난 지숙 씨는 늘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문찬 씨는 “지숙이는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에서 상근할 때도 활력소 같은 역할을 했다”면서, 앞으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다독였다.
남편 문찬 씨 “화순에서 뿌리내리고 싶다”
문찬 씨는 화순민주청년회 회원이기도 하다. 이곳 젊은 회원들은 총선 때 열심히 뛰었다. “나는 춤춘 것밖에 없다”는 문찬 씨는 “청년회원들이 진짜 모범”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화순에서 촛불문화제를 주도하고 있다. 화순 중심가인 광덕지구 사거리에도 주말마다 광우병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문찬 씨는 “젊은 사람이 할 일이 많은 곳”이라며 “화순에서 뿌리내리고 살고 싶다”고 했다. 또 그는 화순군민을 위한 대중사업을 벌여나갔으면 한다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처음 인연을 맺었던 대학시절의 풋풋함과 열정을 잃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는 문찬 씨와 지숙 씨. “준혁이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다”는 이들 부부는 준혁이의 고향인 화순에서 진보정치를 가꾸는 진보농부로 살아갈 계획이다.
“내가 먼저 움직여 사람들을 편하게 할 수 있다면”
김민수 당원(경기 평택 당원)
“모범상 받은 당원이에요. 1주일 휴가내서 선거운동을 뛰었어요.”
이현주 평택시위원장은 김민수 당원을 아주 열성적인 당원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김 당원은 맹장수술을 받고 난 뒤, 곧바로 총선에 뛰어들었다. “민주노동당 찍을 거죠?”라며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받아내는 김 당원. 평소 그를 지켜본 지인들이 놀랄 정도로 김 당원의 모습은 활기찼다.
지난 총선은 김 당원이 평택시위원회로 당적을 옮기고 처음 치른 선거다. 김 당원은 부천에서 오래 동안 활동했다. 최순영 전 의원이 부천시의원을 하던 시절 선거를 도왔으며, 당과 인연은 국민승리21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취업을 계기로 부천에 올라왔다. 그곳에서 만난 선배의 소개로 부천사랑청년회 활동을 했다. 그의 20대는 청년회 빼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청년회 활동에 전념했다. 그리고 맞이한 30대. 청년회와 병행하던 아르바이트를 접고 현장행을 감행했다.
노조의 소중함을 알게 해 준 ‘파업’
김 당원은 용역업체의 소개로 차량부품을 생산하는 대한솔루션에서 일을 하게 됐다. 비정규직으로 일한 지 8개월 만에 정규직이 됐다. 정규직이라고 하지만 시급 3000원이 안 될 정도로 근로조건은 너무나 열악했다. 그는 동료 9명과 함께 노동조합을 준비, 지난 2007년 5월 노조를 세웠다. 당시 26명이던 조합원수는 현재 143명으로 늘어났다.
금속노조 경기금속지회 대한솔루션분회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연대사업부장. 청년회 활동을 오랫동안 했지만 노동운동은 새내기나 다름없다. “아직은 노동운동이라고 크게 표현하고 싶지 않아요. 남보다 내가 먼저 움직여 사람들을 편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죠.”
그와 조합원들은 하나 하나 배우면서 노조를 꾸려가고 있다. 현재 노조는 사측과 임단협 교섭 중이다. 현재 노조결성 이후 첫 파업을 끝내고, 생산량을 줄이는 태업을 진행하고 있다.
김 당원은 “파업하면서 감동을 많이 받았다. 평소 표현을 잘 안 하던 누님들이 적극 동참했다”고 환하게 웃었다. 조합원들은 파업기간 노조가 보낸 지침을 성실하게 실천했다. 이번 4일간의 파업은 조합원들과 진솔한 삶의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예전에 김 당원이 문자를 보내도 묵묵부답이던 조합원들이 “힘 내세요”, “더 열심히 해서 좀더 나은 현장 만듭시다”, “간부들 힘내고 술 한잔 합시다”고 답장을 보내준다. 그가 “파업 휴유증은 없다. 서로 다독거려 주고 분위기가 좋다”며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다. 전면파업이 노조활성화의 계기가 된 셈이다.
더디지만 조합원과 한걸음씩 앞으로
대한솔루션분회 조합원 가운데 50명이 당원이다. 지난 총선 때 노동자정치세력화 교육을 받고 입당을 했다. 처음에 총선교육을 하면서 가입원서를 돌렸으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조합원들이 퇴근하는 길에 조합 사무실에 들러 입당원서를 냈다. 조합원들은 교육받고 일하면서 곰곰이 생각한 뒤 스스로 입당을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김 당원은 월요일마다 주간 <진보정치> 배달원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다. 조합원들이 조금씩 민주노동당을 이해하고 관심을 갖는 모습에 뿌듯해 하며 더디지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다.
요즘은 조합원들에게 “서울나들이 가자”고 설득, 촛불집회에 참석하기도 한다. 촛불에 감동한 문대식 사무장과는 이번 여름휴가 때 노동자통일선봉대를 함께 가기로 약속했다.
그동안 김 당원은 세상 진리를 깨우쳐왔던 책을 소중하게 모아놓고 있다. 훗날 아이들이 “아빠, 이 책이 뭐야?”라고 물어볼 때 “너희들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아빠가 열심히 공부했던 책들”이라며 자랑하고 싶단다. 그런데 그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 38살 노총각 신세다. 시비를 걸어도 히죽 웃어넘기는 절대 미워할 수 없는 김민수 당원. 그가 꿈을 함께 이룰 소중한 인연을 하루 빨리 만날 수 있기를.
억울한 구속생활 8개월
“세탁소 지켜준 동지애가 고마워요”
양일석 당원(경기 고양)
양일석 당원은 밝고 건강해 보였다. 그가 지난 17일 고양시 백석동 주택단지에 자리 잡은 굿모닝 세탁소로 돌아왔다. 8개월 만이다. 다시 세탁소 일을 시작한 양 당원의 다림질은 활기가 넘쳤다.
범국민행동의 날 유일한 구속자
양 당원은 지난해 11월 11일 범국민행동의 날 연행자 가운데 유일한 구속자. 당시 경찰은 집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인도통행을 막았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경찰과 몸싸움이 벌어졌다.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고양시위원회 당원을 만나러 서울 태평로 일대를 거닐던 양 당원은 시민과 경찰의 실랑이를 말리는 입장이었다. 어이없게도 한 시민이 연행되는 것을 막다가 덩달아 연행된 경우다. 강서경찰서로 이송된 양 당원은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경찰은 막무가내 모르쇠였고, 폭력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날 집회에서 팔을 다친 전경이 “윗도리가 벗겨진 사람이 때렸다”면서 양 당원에게 혐의를 뒤집어 씌웠기 때문.
경찰측이 증거자료로 제시한 사진 150장 가운데 양 당원 모습이 담긴 사진은 달랑 2장. 연행되기 전 전경 앞에 있던 모습과 전경 대열 안쪽으로 끌려가 연행되던 모습 뿐이다. 양 당원은 “사진만 보더라도 전경의 진술은 거짓이다. 그 때까지 옷이 벗겨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서울경찰청과 남대문경찰서에서 채증한 동영상은 양 당원의 진술내용과 일치했다. “내가 연행되는 사람 팔을 잡고 있었다. 그 화면이 내 진술을 확인시켜 준 꼴이 됐다.”
이렇게 무혐의를 입증할 명백한 자료가 있는데도 전경 진술만 인정해 양 당원을 구속시켰다. 그리고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재판이 지속됐다. 1심에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아 항소를 했다. 항소할 때 피해전경이 탄원서를 써 주고, 법정에 나와 “가해자가 누군지 모른다”고 증언을 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지난 17일 출소한 양 당원은 “희생양 삼아 판결을 내린 것”이라며 다시 상고를 준비하고 있다.
한편 양 당원은 재판과정에 대한 중앙당의 대응이 몹시 서운했다고 한다. 전경의 허위진술에 근거한 선고였음에도 중앙당이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았기 때문. “이명박 정부 아래 나보다 억울한 일들이 많을 수 있고, 촛불 구속자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 있을 거다. 당에서 적극 대처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루도 빠짐없이 세탁소지킴이가 돼 준 당원들
양 당원이 구속돼 있는 8개월 동안 세탁소는 부인인 석영인 씨가 꾸려갔다. 영인 씨는 아이 셋을 키우며 세탁소 일을 했다. “처음에는 운전도 못해서 걸어 다니며 배달했다”는 영인 씨.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도망가고 싶을 만큼 힘들어 눈물도 많이 흘렸는데 지금은 생각도 안 난다”며 힘겨웠던 지난 날을 잊은 듯 환하게 웃었다.
고양시위원회 당원들이 틈틈이 도왔다. 이른바 ‘양일석이네 세탁소 지키기’ 운동이다. 당원들은 당번을 정해 퇴근한 뒤 세탁소 일을 도왔다. 양 당원은 “너무 고마웠다. 얼굴도 모르는 당원이 많았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와줬다”면서 감사의 인사를 했다. 양 당원은 무엇보다 소중한 세탁소를 지켜준 당원들을 통해 ‘이런 게 동지의 사랑이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4년 전 전셋집 보증금을 빼서 마련한 세탁소는 가정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양 당원이 구속되고 나서 당장 세탁소가 제대로 운영될 수 있을까 내심 걱정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주인이 사라진 이유를 손님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탁일은 영인 씨가 감당하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열심히 사는 것이 동지들에게 보답하는 길”
양 당원은 “아직 출소한 게 실감이 잘 안다”고 한다. 그토록 걱정했던 세탁소로 돌아와 다림질을 하는데 처음 하는 것 마냥 낯설다. 다림질을 한 햇수가 20년이 넘는데 8개월의 공백이 낯설게 만든 모양이다. 양 당원은 1988년부터 평화시장 봉재공장에서 시다로 일했다. 그 때 나이가 16살. 어렴풋하게 들은 전태일 열사 얘기보다 따뜻하게 대해 주는 미싱사 누나, 형들이 좋아 청계피복노조를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다. 그리고 노조에서 풍물을 배우고 전노협 시절 문선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번 수감생활은 어려웠지만 동지의 사랑으로 따뜻했던 그 날들을 떠올리게 했고, 더 열심히 살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더 열심히 살자. 그것이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세탁소 일에 매달리다 보면, 따로 시간 내서 사회활동을 하기 어렵다. 그래서 독거노인들의 이불빨래 등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세탁자원 활동을 하려고 한다. 그 일은 양 당원이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일이기도 하다. 함께 어울려 사는 따뜻한 세상을 위해.
“실망해 떠난 이들 꼭 돌아오게 할 겁니다”
이주현 강동구위원회 부위원장
서울시당에 ‘당원의 향기’ 꼭지로 소개할 당원을 소개해 달라고 했을 때 시당 한 간부가 주저 없이 추천한 이가 바로 강동구위원회의 이주현 당원이었다. 그의 당 활동이 당 초기부터 집단탈당 사태를 거쳐 최근 촛불항쟁에 이르기까지 서울시당사의 축소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당원이 당 활동을 본격화한 때는 지난 2003년 말경. 2002년 입당했으나 강동지역 시민단체 활동에 주력했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구별 지구당 분화 방침이 결정되자 이 당원도 이를 계기로 강동을지구당 창당작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당시 강동 송파지역의 ‘엄마’조직이라고 할 송파을지구당쪽에서 ‘너무 성급하다, 이번 선거까지는 역량을 하나로 집중해야 한다’는 등의 이유와 절차상 실수를 들어 제동을 걸었다. 이 당원은 이때 처음 당내에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지구당 창당작업은 좌절됐지만 그는 ‘당’을 알게 된 것이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논의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중요함을 알았습니다.” 강동을지구당 창당추진위는 결국 총선 이후 결성됐고, 이 당원은 추진위 간사를 맡아 지구당 건설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추진위 기간 내내 점심시간을 이용해 당원들을 만났습니다. 점심시간이 어려운 당원은 저녁에 만나 술을 마셨구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가 제일 즐거웠던 것 같네요.”
발로 뛰며 당원들을 만나 조직체계를 만들고 지역위에서 함께 일할 간부들도 세워냈다. 하지만 2005년 시군구별 지구당 통합 방침은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을 안겼다. 통합 강동구위원회 위원장 선거가 경선으로 치러지게 된 것. 이 당원은 공동위원장제를 제안했으나 상대측에게 거절당했다. 경선은 당원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줬고 분회는 모임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통합지역위 지도부는 그에게 분회장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1년 이상 어려운 시기를 보낸 이 당원은 2006년 5.31지방선거에 구의원으로 출마하면서 활동을 재개했다. 또 5.31지방선거는 그가 당 활동에 관한 관점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선거를 치르며 주민 속으로 들어가 뿌리내리는 게 중요함을 깨달은 것.
그러나 세 번째 위기가 닥쳤다. 집단탈당 사태가 터졌다. 이 당원은 울기도 많이 울었다. 특히 정치적 입장차 때문이 아니라 ‘싸우는 모습 보기 싫다,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탈당한 이들의 얼굴은 지금도 생생하다. “실망해 떠난 당원들은 한명한명 만나서 반드시 돌아오게 할 겁니다.”
이 당원은 어떤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이를 지역 주민들을 조직하는 계기로 삼고자 애쓴다. 촛불정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길거리 전당대회가 있던 날을 빼곤 당 깃발 대신 항상 ‘강동구 광우병 감시단’ 깃발을 들고 나갔어요. 그럼 오가다가 ‘어 강동구네, 나도 강동구 사는데’하면서 깃발을 찾는 주민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만난 분들과 명함을 주고받고 나중에 연락을 해서 다시 만나죠.”
이 당원의 강동구위원회는 촛불 집회에 처음으로 ‘주민’ 깃발을 들고 나갔다. 72시간 릴레이 촛불시위 때는 강동구민 천막도 세웠다. 관내 촛불집회도 제일 먼저 했고, 서울지역에서 광우병 감시단 발족도 가장 빨랐다. 이런 활동들이 알려져 다음 아고라에 강동구를 칭찬하는 글이 올라왔고 네티즌들의 격려가 이어졌다.
“촛불현장에서 만난 강동구 주민들이 곧장 입당하기는 어렵죠. 그래서 그분들에게 광우병 감시단 가입을 권유하고, 강동구에서 촛불집회가 있을 때마다 연락을 해서 만날 기회를 만들죠.” “새로운 만남이 정말 재밌고 항상 기대된다”는 그의 지역 당 활동 기조가 잘 드러난다.
“당 깃발 아래 당원들이 모임하는 것은 당 활동이 아니라 당 생활입니다. 지역에서 주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사업을 만드는 게 당 간부의 역할이고, 그것이 바로 당 사업이죠.” 그가 만들어가는 강동구위원회의 당 활동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기대된다.
13년째 청소년교육문화센터 ‘우리세상’ 일꾼으로
“청소년은 우리사회의 미래입니다”
지명희 당원(대구 서구 당원)
푹푹 찌는 한여름, 한줄기 시원한 비가 내렸다. 전국에서 가장 더운 도시 대구의 거리를 뜨겁게 달궜던 더위를 좀 누그러뜨렸다. 18년 전 지명희 당원에게 ‘새벗’청소년도서원은 한여름 시원한 소나기처럼 찾아왔다.
90년 여름, 고교 2년생이던 그는 친구와 함께 ‘새벗’이 마련한 ‘열린교실’에 참가했다. 경찰의 삼엄한 검문 때문에 경북대 담장을 뛰어 넘고서야 참여할 수 있었던 열린교실은 그의 세상에 대한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꿔놓았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 가난할까’라는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곳이 생겼다. 감수성 풍부한 소녀가 시 쓰기보다 더 재미난 일을 찾은 거다.
이렇게 인연을 맺은 ‘새벗’이 지난 1996년 ‘우리세상’으로 이름을 바꾸고 청소년교육문화센터로서 자리 잡는데 그는 청춘을 바쳤다. “‘우리세상’은 내 꿈이 시작된 곳이고, 또 꿈을 실현해 나가는 곳이다. 10대, 20대, 30대 중반까지의 내 삶이 곧 ‘우리세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에게 ‘우리세상’은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3년 한결 같이 청소년의 벗으로
‘우리세상’은 청소년들이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청소년 자치활동에 중점을 두고 있다. 현재 지 당원은 ‘우리세상’의 교육행사팀장을 맡고 있다. 단체일꾼으로 활동한지 햇수로 13년째다. 지금도 그의 열정은 처음처럼 뜨겁다. “한 10년 정도 활동하면 청소년들이 행복하게 생활하는 학교와 사회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히려 입시교육이 강화됐다. 여전히 이 활동을 해야 하는 이유다.” 그는 중학교 1학년생의 꿈이 공무원이라고 말할 때, 고등학교 1학년생의 꿈이 보충수업을 해서 돈을 많이 버는 영어교사라고 말할 때 안정된 직장보다 좀 더 보람있고 가치있는 꿈을 꿀 수 있게 도와주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믿는다.
‘우리세상’은 1년 연중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특히 여름방학에는 NGO캠프, 영화영상제작캠프 등 주말마다 다채로운 주제의 캠프들이 열린다. 그는 청소년 프로그램은 세심하게 기획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배우는 것도 있고 재미도 있어야 한다. 그것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세상’의 광팬이 될 정도로 재미있는 행사를 준비하려는 일꾼들의 노력은 부단하다. 레크레이션 강사 자격증을 가진 그는 분위기가 조금만 침체돼도 재미있게 놀아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직업병 수준이다.
그는 “마흔쯤 되면 새로운 일을 찾지 않을까” 하면서 웃는다. 후배 송은희 당원은 “지 선배는 밝고 에너지가 넘친다. 참 따뜻해서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했다.
‘우리세상’도 촛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지 당원은 대구백화점 앞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에 청소년들과 함께 참여했다. 또한 그는 집회사회를 잘 본 덕분에 ‘대구의 김태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지 당원은 청소년들의 촛불참여에 대해 “각성된 청소년들이 우리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면서 “정의롭고 실천적인 청소년들의 본성이 폭발했다”고 평가했다.
지 당원은 이미 2002년 미선․효순이 추모행사에서 청소년들의 힘을 확인한 바 있다. 당시 ‘우리세상’이 독자행사를 준비하면서도 과연 성사시킬 수 있을까 우려를 많이 했다. 막상 행사 당일이 되자 300여명의 학생들이 행사장으로 몰려들었고, 대구 남구 봉덕동의 미군부대까지 행진해서 ‘우리세상’ 일꾼들을 감동시켰다.
“현장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죠”
강성택 당원(강원 원주)
금속노조 기아자동차 정비지회 원주분회장
강성택 당원에게 행복은 아침 현장을 한 바퀴 돌며 조합원을 만날 때, 점심시간 조합원들과 탁구를 치며 어울릴 때, 비정규직 투쟁 사업장을 찾아 노동자들과 연대할 때 등 순간순간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그는 유달리 까만 얼굴에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그의 선한 웃음은 하루를 시작하는 조합원들의 마음을 밝게 만든다.
그의 일터는 기아자동차 원주서비스센터. 좀 더 자세하게 얘기하자면, 그는 금속노조 기아자동차 정비지회 원주분회 분회장이다. 조합원이 54명인 원주분회에 상근하는 단 한 명의 노조간부다. 그러다보니 그의 하루는 늘 분주하기만 하다. 신경 쓸 일도 많다. 조합원들의 요구사항을 수렴해서 사측과 협의하고, 조원들에게 지회 지침을 전달하고, 정비업소나 기아차판매지점 등에서 일하는 조합원들도 챙겨야 한다. 또한 민주노총 원주시협의회를 비롯한 연대사업도 오롯이 강 분회장 몫이다.
원주센터를 방문한 지난 19일 점심시간, 노조사무실에는 식사를 마친 조합원들이 찾아와 쉬고 있었다. 강 분회장은 자신보다 연배가 많아 보이는 조합원들과 스스럼 없이 농담을 주고 받으며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입사 13년차인 강 분회장은 원주센터에선 막내 축에 속한다.
강 분회장은 평소엔 점심식사 뒤, 조합원들과 어울려 탁구 치는 걸 즐긴다. 탁구 마지막 경기는 으레 커피내기인데, 강 분회장은 슬쩍 질 때도 있다. 자판기 커피 한 잔 200원, 그 200원으로 조합원들의 마음을 얻는 셈.
노동자통일선봉대로 보낸 여름휴가
강 분회장은 군대를 제대하고 기아자동차훈련소에서 6개월간 도장기술을 배운 뒤 1995년 5월 입사를 했다. 그리고 99년 원주센터로 전출 오기 전까지 강릉센터에서 일했다. 2000년 말, 당시 지부장이 “너 사무장 좀 맡아라!”는 말에 등 떠밀려 원주분회 사무장을 맡게 됐다. 지금 돌이켜보면, 얼떨결에 시작했지만 ‘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무장을 맡은 뒤, 대의원, 교육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많이 배웠다. 특히 정비지회 교육위원으로 한 달간 합숙하면서 직접 자료를 찾고 교안을 만들어 조합원들을 교육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꼈다.
그는 지난 8월 11~15일 여름휴가를 내서 노동자통일선봉대로 전국을 누볐다. 몇 년 동안 맘에 품고 있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는 자부심이 한여름 무더위를 잊게 했다. 광주 망월동 참배부터 결합한 그는 대추리, 무건리, 기륭 투쟁 등을 함께 했다. “대추리 이장님이 미군이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통일은 없다고 하는데 가슴이 짠했어요. 무건리 투쟁은 잘 해야죠.”
자동차에 민주노동당 마크를 찍다
강 분회장은 자신의 자동차 본내트에 민주노동당 마크를 찍고 다닐 정도로 당에 대한 애정도 남다르다. 2006년 저조한 지방선거 성적에 낙담했던 그는 사람들에게 당을 알리기 위해 당 마크를 찍고 다니기 시작했다. 도장기술자의 실력을 한껏 발휘한 당 마크는 예상대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었다. 사람들이 “이게 뭐냐?”고 물으면, 그는 정성을 다해 민주노동당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열정적인 분회장이 있어서일까. 원주분회는 올해초 정비지회로부터 세액공제 모범분회로 선정,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강 분회장은 서랍장에 고이 간직한 감사패를 가리키며 “조합원 절반 이상이 세액공제에 참여했어요”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당원은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라며 아쉬움을 내비치기도 했다.
“노동자가 사회참여에 더 많이 관심 가졌으면”
강 분회장의 임기는 올해 말까지다. 임기를 마치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선뜻 “이전에 일했던 현장에서 다시 땀 흘려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새로운 분회장을 선출하고 자신은 조합원으로 열심히 활동하는 것, 그것이 노조를 풍성하게 살지우는 길이라고 믿는다. “선배들이 조합 간부직함을 갖고 있을 때만 활동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조합간부들의 활동이 단절되지 않아야 활동가가 늘어나는 것이잖아요.”
강 분회장은 원주 촛불집회 사회자로 참여했던 일을 떠올리며 “노동자가 사회참여에 더 많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민주노동당 당원이라서 행복합니다”
지상석 당원(부산 진구)
부산시당 새 사무실 실내장식 뚝딱 해치우다
부산시당은 지난 5월 부산진구 전포동에 새 사무실을 마련했다. 새 사무실은 당일꾼들의 사무공간, 당원 교육공간, 상담공간 등으로 단정하게 구분돼 있다. 이 사무실의 실내장식은 지상석 당원이 맡았다. 지 당원은 사무실 이전 소식을 듣고 일을 자청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무실 공사를 하는 5일 동안 그의 망치질은 유난히 흥에 겨웠다. 자신의 손으로 당원들의 소중한 보금자리를 만든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다. “당원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그는 평소 고장난 문고리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철물점에서 재료를 사와서 문고리를 고쳐야 직성이 풀린다. 또한 지방선거 후보 사무실의 탁자까지 직접 만들어 줬다. 그가 입당하고 처음 맞이한 2006년 지방선거 때다. 그는 부산 진구 전포동에서 출마했던 박영숙 후보의 선거운동을 전 기간 뛰면서 열혈 당원으로 거듭 났다. 그 뒤 “집처럼 포근하다”는 부산 진구위원회에서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년 목공노동자 “임금 떼이기 일쑤, 노조 생기고 덜한 편”
지 당원은 20여년 건설현장을 누빈 목공노동자이다. “울릉도 빼고 전국을 다 다녀봤다”는 그는 지금도 일감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전국이 그의 일터인 셈이다.
“일하고 나서 욕먹지 말자”는 나름 원칙을 갖고 성실하게 일하지만 경기침체로 일거리가 예전 같지 않다. 그는 “목공일이 경기를 많이 타는 편이다. 김해, 창원, 울산으로 많이 일을 다니는데 특히 부산지역의 경기가 안 좋다”고 했다. 게다가 건설현장의 고질병인 ‘임금체불’은 심각한 수준이다. 지 당원도 경주의 한 업체에서 보름간 일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27일에는 경주로 담판을 지으러 갈 거라고 했다.
그는 “노조가 있어 그나마 예전보다 임금체불이 덜한 편”이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노조는 부산인테리어 목공노조를 가리키는 것. 부산인테리어 목공노조는 지난 2002년 2월 정식 출범한 국내의 유일무이한 목공노조다. 2001년 7월 국도극장 현장에서 일했던 목공노동자 80여명 가운데 45명이 10만원씩을 내서 노조 설립 자금을 마련했으며, 그해 연말 ‘목수인의 밤’을 열면서 목공노동자 100여명이 노조에 가세했다. 인맥에 의한 취업알선구조, 임금체불, 부당해고 등 열악한 근로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노조의 활동은 목공노동자들의 단결의 기운을 한껏 높였다. 한 때 500명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조합원이 늘기도 했다. 노조는 부산시청을 상대로 관급 공사에 부산지역 목공노동자를 우선 채용하도록 협약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합원이 200여명으로 줄었다. 부산지역 건설경기 침체가 노조활동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 일감이 없어 생계가 어려워진 조합원들이 노조활동을 중단하고 있다. 그래서 노조는 오는 30일 조합원과 백숙 먹는 날을 마련하고, 임금인상 논의를 해 볼 요량이다.
당활동 속에 만난 소중한 인연
아직 45살의 노총각인 지 당원은 요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굳이 인상 찡그리고 살 필요는 없잖아요. 남들보다 쬐금 더 웃습니다. 으흐흐~” 본디 성품이 느긋하기도 하거니와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는 말끝마다 웃음이 넘친다. 지역 당원의 소개로 만난 천정금 당원이 그에게 웃음보따리를 선사하는 주인공이다. “저 양반 만나면서 가슴이 설레네요. 살면서 이렇게 가슴 설레본 적 없어요”라며 연신 천 당원에게 눈길을 줬다. 두 당원의 연애는 부산시당에서도 큰 화젯거리다. 지역당원들은 지 당원이 천 당원의 친정이나 다름없는 영도구위원회의 수련회를 쫓아가는 것을 짓궂게 놀리기도 하지만, 민주노동당 속에서 사랑을 키워가는 두 당원이 행복하기를 비는 마음이 앞선다.
안수용 부산진구위원회 부위원장은 “지상석 부위원장은 외지로 일을 떠나 있더라도 동지들을 알뜰히 챙겨주는 정이 많은 당원”이라며, 두 당원의 앞날에 밝은 햇살이 가득하길 빌었다.
“노조가 지역사회발전 한 축으로 역할해”
포항시위원회 버팀목이 돼 준 대의원 김용수 당원
포항시위원회는 날마다 당원이 늘고 있다. 지난 8월초부터 ‘릴레이 당원확대사업’을 벌이면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 또 포항시위원회가 해산된 줄 알고 당을 떠났던 당원들이 복당을 요청해 오면서 지역위원회는 활기가 넘치고 있다.
탈당사태 이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포항시위원회의 든든한 버팀목이 된 곳은 현대제철 분회다. 현대제철분회는 민주노동당을 통한 노동자정치세력화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밝히고 지역위원회 해산에 맞섰다. 당시 대의원대회서 유일하게 해산 반대표를 던졌던 대의원은 김용수 현대제철지회장. “포항시위원회의 가장 큰 분회가 중심을 잡고 있어 그나마 탈당자수를 줄일 수 있었다”는 김 지회장은 현장에선 걸출한 노조간부였으나 당 사업엔 생소했다. 현대제철분회원들도 마찬가지. 이들에게 왕도는 없었다. 당을 지키겠다는 열정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길 밖에는.
그동안 현대제철분회가 당 활동에 마냥 뒷짐만 져왔던 것은 아니다. 2004년 총선에선 전체 조합원 1400여명 가운데 800여명이 세액공제에 참여, 전국 최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 2006년 지방선거에서 복덕규 시의원이 당선되기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다해온 저력 있는 분회다.
포항시민에게 박수받는 현대제철 노조
김 지회장을 만난 지난 8월30일은 금속노조 현대제철지부 지부장 선거가 진행되던 날이다. 김 지회장은 이번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현장으로 돌아가 초심을 다잡겠다”는 김 지회장은 땀흘리며 일할 현장행을 선택했다.
그는 지부장으로 3년, 수석지부장으로 2년간 활동하면서 ‘노조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저소득층 가정에 쌀, 연탄 지원 등을 꾸준히 해 왔다. 또한 지난해 7월 파업을 통해 포항공장의 경영흑자를 포항공장의 신기술 개발, 시설확대에 투자하도록 유도했다. 포항공장 1000억원 재투자 유도는 지역사회에서 ‘파업의 신문화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당시 지역사회분위기가 2006년 건설노조 파업 후유증으로 인해 ‘파업이라면 진절머리 난다’고 할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현대제철노조 파업이 지역민들에게 지지를 받은 것은 대단한 일이다.
김 지회장은 “파업을 하더라도 지역여론을 우호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그동안 모아놓은 노조관련 기사를 보여줬다. 그 가운데는 지역일간지에 보도된 ‘현대제철노조 파업지지 논설’, 김관영 경북도지사가 보낸 격려글 등도 있었다.
이런 노조활동에 ‘노조가 개량화된 게 아니냐’며 비난하는 이도 더러 있다. 이에 대해 김 지회장은 “노조가 개량화됐는데 파업을 하냐”면서 “노조활동이 공장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노조가 파업 잘 한다고 지지받는 게 아니라 우리사회 한축으로 인정받는 것이 노조의 힘”이라며 “현대제철노조는 경북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노조다. 우리 노조 정도면 도지사, 시장은 상대해야 하지 않겠냐”며 자신감을 나타냈다. 대기업 노조로서 지역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겠다는 것.
하지만 임기 한 달을 남겨둔 그에게도 마음의 빚은 있다. “임기가 끝나기 전에 기륭이나 KTX 등 비정규직 노동자가 벼랑 끝 사투를 벌이는 현장에 가서 함께 투쟁하고 싶다. 그래야 양심의 가책을 덜 느낄 것 같다”는 그는 대기업 정규직노조의 한계를 시인하기도 했다.
“시의원 한 번 하고 싶다”
김 지회장은 입사 21년 만에 처음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 그런데 분양받은 아파트는 애초 조감도와 달리 형편없이 지어진 어린이놀이터를 비롯해 곳곳에서 하자가 발견됐다. 예비입주자들은 온라인카페를 개설, 정보를 공유하며 시공사측을 상대로 협상을 벌였다. 현재 시공사측과 협상은 마무리단계이며 예비입주자들의 최종승인을 남겨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예비입주자로부터 신임을 받은 그는 입주자대표회의 부회장을 맡게 됐다.
김 지회장은 환경운동연합,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를 비롯한 사회단체뿐 아니라 고향인 흥해읍의 향토청년회 활동에도 열심이다. 이런 지역활동은 노조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한 활동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그는 “기회에 된다면 시의원도 도전해 보고 싶다”고 했다.
휠체어를 탄 펜싱선수, 다음 꿈은?
김민기 당원(경기 양주)
휠체어를 탄 펜싱선수
김민기 당원이 겨누는 칼끝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자신의 운명일까, 세상의 낯선 시선일까.
김 당원은 요즘 펜싱에 열중하고 있다. 그는 경기도 동두천시에 있는 장애인 펜싱 연습실에서 하루 2시간씩 펜싱을 연습하고 있다. 엄청난 체력소모에 연습을 마치고 나면 그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는다. 그래도 그 순간이 좋다. “땀 흘리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는 그는 장애인체전 참가도 앞두고 있다. 오는 10월5일 광주광역시에서 열리는 전국장애인체전에 펜싱선수로 참가할 예정이다.
외진 장애인단체사무실, 장애인복지 수준의 바로미터
그가 살고 있는 양주시에서 가까운 동두천시에 장애인 펜싱 연습실이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 만큼 장애인체육시설 한 곳 갖추지 못한 양주시의 장애인 복지정책엔 불만이 크다. 장애인들이 복지회관을 이용하려면 동두천시나 의정부시로 나가야 하는 불편함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서 양주지역 장애인단체들이 장애인복지회관 건립 촉구 서명운동을 벌였다. 이같은 장애인들의 요구에 양주시측은 ‘고읍지구 행정타운조성 장기계획에 장애인복지회관 건립이 포함돼 있다’는 궁색한 답변만 내놓을 뿐이다.
양주장애인단체총연합 사무국장인 그가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 준비뿐 아니라 집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는 2001년 경기도지체장애인협회 활동을 시작으로, 수화통역센터를 거쳐 장애인단체총연합에서 활동하고 있다. 처음 양주시로 올 때는 “장애인복지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양주의 복지수준을 높이겠다”는 야심찬 꿈을 가졌다. 사무실 운영에 턱없이 부족한 보조금으로, 출세를 위한 경력쌓기에만 관심 있는 간부와 부딪히면서도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양주전철역에서 한참이나 들어가는 외진 곳에 자리 잡은 단체 사무실만큼이나 양주시의 장애인복지 정책은 주변에 머물렀다.
내 삶의 동행자가 돼 준 민주노동당
이런 현실에 점점 지쳐가는 그에게 민주노동당은 햇살처럼 다가왔다. ‘양주에도 민주노동당이 있을까’라는 호기심으로 검색을 했고, ‘민주노동당 양주시위원회’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너무나 기쁜 마음에 당장 가입했다. 그게 지난해 여름이다.
1년여 당생활에서 느낀 것을 묻자 “가족적인 분위기가 참 좋다”면서 따뜻한 지역위원회 분위기를 최고로 꼽았다. 그는 양주역 앞에서 열리는 광우병 촛불문화제와 상수도민간위탁 반대 촛불문화제 단골 참가자이며, 사무실에 양주시의원 의정비 인상 관련 주민감사 청구 서명용지를 비치하고 서명을 받을 만큼 열심이다. 그런 그의 활동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장애인도 있지만 이들에게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벽을 깨나가는데 민주노동당이 훌륭한 동행자임을 꾸준히 설득한다고 한다.
현장 경험을 토대로 장애인정책을 만들고 싶다
10년 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장애를 갖고 됐고, 마음의 장애를 극복하는 길에 사회복지를 공부했다는 김민기 당원. 신체의 장애는 그에게 더 꿈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이제 그는 당을 통해 꿈을 키운다. 장애인의 이동권 확보와 교육권 확보를 위해 노력해온 민주노동당과 함께 “현장에서 느낀 것을 정책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싶은데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있는 극장이 없다”고 아쉬움을 털어놓던 그가 정책의 입안자로 참여한다면 장애인을 위한 멋진 극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또 그처럼 운동을 즐기고 싶은 장애인들을 위한 체육시설을 만들지 않을까.
현재 그의 꿈은 시의원이다. 그렇다고 2010년 지방선거가 목표는 아니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 34세의 청년에게 기회는 많다. 긴 호흡을 갖고 차근차근 준비해 갈 계획이다. 당장은 오는 10월 전국장애인체전에서 우승하는 게 목표다.
“뻐꾸기가 되겠다”
정을 싣고 달리는 버스노동자 전광재 당원(경남 김해)
경남 창원시 한서병원 앞에서 58번 시내버스를 탔다. “안녕하세요?” 반갑게 맞는 버스운전기사 전광재 씨. 그는 김해시위원회에서 소개해준 이번호 ‘당원의 향기’ 코너의 주인공이다.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인 전 당원은 창원시내를 돌아 불모산 터널을 넘고, 김해시 장유면을 돌아 삼계동에 이르는 1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얘기보따리를 풀어놨다. 유쾌한 재담꾼을 만난 기자는 운전석 뒷자리에 앉아 즐거운 동행을 했다.
교통약자에게 친절한 58번 버스노동자
전 당원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버스에 오르자 “천천히 타시라”며 노인이 자리에 안전하게 앉는 것을 확인한 뒤 출발했다. 그는 배차시간에 쫓겨도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를 최우선으로 했다. 그는 매일아침 목발을 짚고 출근하는 장애인을 위해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은 시민에게 “자리 양보를 해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우리 아이도 청각장애아라서 더 관심을 갖게 된다”는 그는 “장애인들이 미안해 하며 버스를 타지 않게 저상버스가 많이 보급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해시의 시내버스 150여대 가운데 저상버스는 5대뿐이다.
서민들의 발인 버스에는 사람 사는 정이 오고간다. 장날이면 보따리 속에서 단감을 꺼내주는 승객도 있고, 사탕이나 음료수를 주는 승객도 있다. 전 당원은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는 손님도 있는데, 성의를 생각해 급하게 받아 마시다가 입술이 다 대인 적도 있다”면서 익살스럽게 말하더니 “커피를 주려면 캔으로 줬으면 좋겠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교통카드가 처음 도입됐을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승객들이 교통카드 단말기에 가방을 대고 찍는 것을 유심히 본 할머니가 “버스 공짜로 타는 가방은 어디서 파느냐?”고 물어 웃음바다로 되기도 했단다. 교통카드의 쓰임새를 몰랐던 할머니는 가방만 찍으면 공짜로 타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좀 더 나은 직장, 세상을 만들고 싶다”
그는 지난해 7월 민주노동당 당원이 됐다. 입당사연도 재미있다. “우리는 입사하면 자동으로 노조 조합원이 되는데 한국노총 소속이라서 민주노동당은 입당 못하는 줄 알았다”는 그는 지난해 5월 김해시위원회가 마련한 한미FTA 강연을 듣고 난 뒤 입당을 하게 됐다.
‘알면 보인다’고 했던가. 당원이 된 그는 <전태일 평전>,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등을 읽으며 기억의 한 자락으로 남아있던 역사의 단편들을 퍼즐 맞추듯 짜 맞췄다. 지난 87년 최루탄이 터지는 부산 거리에서 눈에 치약 발라주던 대학생들을 따라 ‘짱돌’을 던졌던 일, 스쳐들었던 80년 광주 얘기가 생생한 민중의 역사로 가슴에 다가왔다. 그래서 그는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신애 역의 이요원이 거리방송을 하는 장면을 보고 혼자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었다.
그는 “‘근로자’는 익숙한데 ‘노동자’란 말은 왠지 꺼려졌다. 그런데 이제 우리 아이들에게 아빠 직업을 당당하게 버스노동자라고 소개한다”면서 “뻐꾸기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뻐꾸기는 ‘버스를 바꾸는 기사’라는 의미를 담은 그의 아이디이기도 하다.
58번 버스를 운행하면서 권영길 의원 창원사무실을 발견하고 “너무 설랬다”는 그는 “권영길 의원이 마흔 여섯의 나이에 늦깎이 노동운동을 시작했다는데 나는 몇 살 더 빠르지 않냐”라고 웃으면서 자신이 몸담은 곳부터 바꿔가겠다고 했다. 본래부터 그는 신호위반과 난폭운전을 부추기는 빠듯한 배차시간, 짧은 휴식과 불규칙한 식사, 사고에 대한 자부담 등 버스노동자가 겪는 부당함을 사측과 노조에 적극 제기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말이 많은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부당함을 느끼는 버스노동자와 함께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갈 계획이다. “여기서 좀 더 나은 직장,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그는 “민주노동당 당원이 되게 해 준 버스회사와 노조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수고한다’ 인사는 버스노동자의 피로회복제
전 당원은 대선과 총선 선거운동을 가장 보람 있는 당활동으로 꼽았다. 하은숙 김해시위원회 사무국장은 “대선 시기 사람의 시선을 확 끄는 몸짓으로 큰 인기를 누렸다”며 “말보다 실천으로 보여주는 당원”이라고 칭찬했다. 김해시위원회 대위원대회에서 모범당원상을 받기도 한 그는 중앙대의원이 돼 더 적극 당활동에 나서고 있다.
또한 모범운전자회 감찰계장이기도 한 그는 가야문화제를 비롯한 지역행사에서 교통정리 자원활동에도 열심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는 전 당원은 인터뷰가 끝날 무렵 당원들에게 꼭 전해달라고 한 말이 있다. “당원들이 대중교통을 많이 이용하고,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버스노동자에게 먼저 ‘수고한다’고 인사를 건넸으면 좋겠어요. 우리에겐 그 말이 세상 어떤 말보다 기분 좋은 말이거든요.”
“시민들이 직접 ‘뇌물시장’을 심판하겠습니다"
이연수 시흥시장 주민소환에 적극나선 정왕3동 분회장 조영수 당원(경기 시흥)
목이 쉬도록 주민소환 서명을 받은 억척꾼
“이연수 시장은 뇌물을 받고 징역 4년을 선고받고도 사퇴를 안 하고 있습니다. 시흥시민 4만1,000명의 서명을 받으면 이연수 시장을 시민들이 직접 심판할 수 있습니다.”
시흥시 정왕동 시화병원 앞 사거리에서 목청껏 외치는 청년의 호소에 시민들은 발길을 멈추고, 이연수 시흥시장 주민소환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서명 참가자가 늘어날수록 조영수 당원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렸다. 처음 서명운동을 나섰을 때만 해도 석 진 시흥시위원회 사무국장 옆에서 뻘줌하게 서 있던 그였다. 그러나 ‘한 번 해 보자’는 마음을 먹은 뒤부터 그는 억척스럽게 서명을 받았다. 시화병원 앞에서 열리는 5일장은 시흥시위원회가 서명운동을 벌이는 주요무대. 조 당원은 “잘 되겠냐”고 반신반의하는 시민들을 잡고 “우리 시민의 힘을 보여주면 다음 시장은 시민들 무서워서 부정비리 저지르겠느냐”고 설득을 했다. 그렇게 그는 혼자 하루에 220명의 서명을 받을 정도로 열정을 쏟았다. 김수정 시흥시위원장은 “시흥시위원회가 서명 받은 7000여명 가운데 조영수 당원이 서명 받은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라고 그의 노고를 칭찬했다.
서명운동이 힘들기도 했지만 “시흥시민이면 이거 해야 돼”라며 자동차를 멈추고 서명을 하고 가는 아저씨, “수고한다”며 시원한 음료를 건네주는 아주머니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이 있다면, 길거리 서명만 받은 것. “민주당은 아파트부녀회를 통해 서명을 받는데 우리는 길거리에 나가 서명운동을 하는 게 안타까웠죠. 우리도 아파트단지 뚫어서 주민들 만날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이연수 시장 주민소환을 나선 이유
이연수 시장은 지역개발사업과 관련해 1억원의 뇌물을 받아 지난해 11월 구속 수감됐고, 올해 5월 1심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아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자진사퇴를 해도 모자랄 부정비리를 저지른 이 시장이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나올 때까지 사퇴하지 않겠다고 버티자, 시민들이 직접 이 시장을 해임시키겠다고 나선 것.
시흥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시흥시위원회는 지난 7월11일 주민소환운동본부 발대식을 가진 뒤 서명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래서 시흥시민들의 여름은 광우병 쇠고기와 주민소환으로 뜨거웠다. 지난 9월19일까지 4만7,000여명이 서명에 참여, 소환발의요건을 충분히 갖췄다. 소환 발의요건은 시흥시 유권자 27만3,613명의 15%인 4만1,042명.
이연수 시장뿐 아니라 1~4대 시흥시장이 모두 정치자금법, 선거법, 뇌물 수수 등의 부정비리에 연루됐다. 이러한 시흥시를 올바로 세우겠다는 시민들의 의지가 주민소환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이제 10월10일쯤이면 소환성사 여부가 판가름 나게 된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올해 스물여덟살인 조 당원은 5년 전 ‘더불어 숲’이라는 산행모임을 시작하며 시흥안산지역일반노동조합과 민주노동당을 만나게 된다. ‘더불어 숲’은 시흥안산일반노조의 모태가 된 모임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소년가장이 된 그는 19살에 취업을 해야 했다. 첫 직장에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시당할 때가 많았다. 그 때 ‘더불어 숲’의 선배들을 만났다. 그의 인생에 따뜻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선배들이 마냥 좋았지만 처음부터 활동에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맡은 일이 부담스러워 도망을 친 적도 있다. “소극적이라 자기표현도 못했는데 적극적으로 변했죠. 이젠 책임감도 생기구요. 그런데 술이 자꾸 늘고, 주머니는 얇아지네요. 하하하~.” 그는 얘기를 할 때마다 큰 소리로 웃었다. “솔직히 활동은 너무 힘든데 사람들이 너무 좋아요. 하하하~.”
현재 시흥시위원회 정왕3동분회장, 시흥안산일반노조 대의원, ‘더블어 숲’ 총무를 맡아 힘겨울 때도 있지만 웃을 때가 훨씬 많다는 그는 이제 새로운 결심을 했다.
“기계가공 분야에서 전문기술자로 일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기술을 더 배우기로 했다. 그가 일하는 곳은 시화공단에 위치한 자동차부품 생산공장인데 요즘 부쩍 일감이 줄어 주 4일 근무를 하는 형편이다. 그의 새로운 도전은 이 어려움을 이겨내는 방편이기도 하다. 새로운 도전 앞에 선 조영수 당의 결심은 늘 그렇듯 간단명료했다. “열심히 해야죠!”
“봉사단체 가입보다 입당시키는 게 쉬워요”
정읍시위원회 당원확대 일등공신 이민선 당원(전북 정읍)
“새 세상을 꿈꾸는 자만이 새 세상의 주인이 된다~”
이른 아침 6시 전북 정읍시 시기3동에 위치한 차사랑주유소에서 민주노동당 당가가 힘차게 울려 퍼진다. “노래가 참 경쾌해서 좋다”는 주유소 대표가 아침마다 유행가 대신 당가를 틀어놓아 간혹 손님들이 “무슨 노래냐”고 물어오기도 한다.
당가를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민선 대표는 “민주노동당 정읍시위원회가 평범한 이웃들의 친근한 벗이 돼야 한다”고 늘 강조하며 몸소 실천하고 있다.
주유하러 오는 화물차 운전사에게 차를 권하며 “화물차가 사는 길은 민주노동당과 함께 하는 것”이라며 입당이나 후원을 권유하고, 그가 참여하고 있는 국제와이즈멘 회원들을 당원으로 많이 가입시켰다. 국제와이즈멘(Y's Man International)은 1920년 미국에서 YMCA를 돕기 위해 결성돼 YMCA와 협력을 도모하는 한편, 자원활동을 하는 단체이다.
“와이즈멘 가입시키는 것보다 민주노동당 입당시키는 게 쉬웠어요. 봉사단체인 국제와이즈멘은 한 달 회비가 10만원 정도 되는데, 한 달 당비는 1만원이잖아요. 1만원 내고 좋은 사람들 만날 수 있다고 설득하죠.”
그렇게 해서 그가 받아온 입당원서만 해도 서른 장이 넘는다. 워낙 사람들을 좋아하는 그는 당 가입을 받는 자리는 주로 술자리였다. 그가 민주노동당과 가까워진 것도 물론 술자리이다.
곤욕스런 자기소개 , 스피치훈련으로 극복
그는 2004년 총선이후 당에 가입을 했다. 친동생인 이민철 완주군위원회 부위원장을 통해 4형제가 모두 입당을 한 것. 학생운동권 출신 동생을 둬서 마음고생을 퍽이나 했던 그가 입당을 하면서 격세지감을 느꼈다. 당시 정읍시위원회 사무국장이던 권대선 당원이 불러내는 술자리에 한번, 두번 참여하면서 당을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그는 처음 당원모임에 참석해 자기소개를 하면서 아주 곤욕을 치렀다.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니 긴장돼서 가슴은 떨리고 머릿속은 하얘지고 얼굴은 빨개졌다. 그 일을 계기로 전북과학대 평생교육원 스피치교육을 받기도 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남 앞에 서서 말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당원모임 갈 때마다 자기소개를 시키네요. 그래서 평생교육원 등록해서 1년 동안 스피치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뒤 봉사단체 회장하는데 도움이 많이 됐지요.”
‘운동권끼리’만의 정당 한계…“인맥을 넓혀라”
그가 민주노동당의 전파자가 된 것은 2006년 지방선거를 겪고 나서다. 당시 완주군의원 후보로 출마한 동생의 선거운동을 도왔는데 민주노총, 농민회 등 한정된 운동권 인맥으로 선거를 치르는게 안타까워 보였다. “민주노동당 후보들은 운동권 출신이 많잖아요. 인맥이 운동권 테두리 안에서 너무 한정적이더라구요, 그런 것을 타파해야겠다 싶었지요.”
흔히 말하는 ‘운동권 출신’이 아닌 그가 본 민주노동당의 모습은 ‘운동권끼리’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어 답답해 보였다. “시민과 접촉할 수 있는 모임이나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느꼈죠.”
그래서 그는 회장직을 맡았던 국제와이즈멘 회원들을 적극 입당시켰다. 현재 전체 회원의 40% 가량이 당원이다. “회원들의 친교와 화합을 이루는 게 리더십”이라는 지론을 펴는 그는 당원들과 와이즈멘 회원들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었다. 지난 2007년 여름 정읍천변에서 청년당원과 와이즈멘 회원의 막걸리내기 족구시합은 당의 장벽을 허무는데 한몫 했다.
이 당원은 “당원들이 일반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어울려야 당이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한편, 그 주장을 적극 실천에 옮기고 있다. 그는 시민들이 당을 친근하게 여길 수 있게 당의 문턱을 낮추는 일등공신인 셈이다.
그래서 권대선 당원은 사무국장 시절 가장 고마운 당원으로 그를 기억한다. 권 당원은 “이민선 당원은 정읍시위원회가 시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당의 외연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농산물 가격을 보장해야 농촌이 살죠”
신현학 당원(강원 홍천)
가을 햇살을 담은 홍고추의 끝물을 따는 신현학 당원의 손길이 분주하다. 풍작인 고추농사에 어깨춤이 절로 나야 하겠지만 그는 어깨가 축 처진다. 농촌의 어려운 현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겠지만 올해 들어 더욱 실감을 한다.
신 당원은 10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다. 그는 교육행정직 공무원, 택시노동자로 20년 동안 객지생활을 했다. IMF 직전 시작한 택시운전은 IMF를 겪으면서 하루 3만원 벌이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인 홍천군 남면으로 돌아왔다.
“정부시책 따라 가면 망해요”
처음 시작한 농사는 느타리버섯 재배. 당시 정부에서 특수작물로 지원을 해 주는 작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버섯농사도 별 재미가 없다. 중국에서 밀려드는 농산물 때문에 제 가격을 받지 못하기 때문. “정부시책에 따라가면 망해요. 정부에서 특수작물이라고 지원해 줬는데 지난해 가격이 하락해서 그만뒀어요.”
요즘 재배하고 있는 양배추, 브로콜리, 칼리 플라워(하얀 브로콜리) 같은 양채류 역시 가격 하락으로 손해만 보고 있다. 양배추 3개들이 1망이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에서 1000원 정도밖에 못받았다. 그래서 적채(빨간 양배추)는 내다 팔지 않고 저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저장기간은 보통 3개월, 벌써 두 달째 냉장보관 중이다.
신 당원이 경작하는 밭은 1만5,000평정도. 남의 땅 소작이 많은 편이다. “‘내년엔 괜찮겠지’ 하면서 해마다 버텼는데 소작은 더 이상 안 하려고 해요.”
특히 비료값, 기름값이 올라 농사짓기가 더 힘들어졌다. 주위 농민들은 “내년엔 농사 덜 짓고 산에 가서 약초 캐는 게 낫겠다”고 탄식을 한다. “생산비는 올라갔는데 농민들이 농산물 가격 결정을 못하고 중도매인들이 가격 결정을 하다보니까 뾰족한 수가 없죠.” 신 당원의 시름이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농촌 보건활동은 농민회 활동의 가장 큰 보람
그래도 신 당원은 어려움을 함께 이겨낼 농민회원들이 있어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는 홍천군농민회 남면지회장이다. 그는 2년 전 농민회와 민주노동당에 함께 가입했다. 그는 한 때 열린우리당 당원이기도 했다. 쌀개방 반대투쟁을 함께 벌였던 조일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이 국회에 입성하자 쌀개방 찬성으로 입장을 바꾸는 것을 보며 크게 실망한 뒤 열린우리당을 탈당을 했다.
신 당원은 농민회 활동 가운데 가장 보람 있는 활동으로 농보활을 꼽았다. 농민회원들은 홍천군농민회가 운영하는 농민약국의 약사, 대학생들이 함께 농보활을 다닌다. 며칠 전에도 시동 2리 노인회관을 찾아 약도 지어주고, 침과 뜸도 놓고, 안마도 해 드렸다. 스포츠마사지를 배운 그는 안마를 담당하고 있다. “농보활 덕택에 농민회에 대한 반응이 좋고, 지난 총선 때 민주노동당 지지율도 높게 나왔어요.” 지난 4.9총선 때 홍천군 당지지율이 5.18%인데 남면지역은 16%나 나왔으니 그가 자랑할만도 하다.
농민과 소비자가 함께 농촌을 살려야
신 당원은 농산물 가격을 보장하는 게 농촌을 살리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선 중도매인이 농산물 가격을 결정하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는 “농촌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대도시의 소비자가 직접 살 수 있는 직거래 가게를 운영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고 깅조했다.
신 당원은 민주노동당이 살맛나는 농촌을 만드는데 힘을 써 달라고 했다. 또 “강원도에는 밭이 많아요. 쌀 직불제처럼 밭작물에도 직불제 도입을 관철해 냈으면 좋겠어요”라고 간절하게 말했다.
홍천군 남면 지역은 저농약, 유기농 재배를 많이 하고 있다. 그래서 누렇게 익은 벼 이삭 사이로 푸드덕거리며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쉽게 볼 수 있다. 신 당원은 이렇게 농약사용을 줄이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소비자들이 지저분하고 벌레 먹은 농산물을 안 사니까 고독성 농약을 많이 치는 겁니다. 앞으로 깨끗한 것보다 벌레 먹고 못 생긴 것을 좋아했으면 합니다. 그것이 농약을 덜 치게 하는 방법입니다.”
“방어동 분회장 신고합니다”
용인기업 해고자들과 연대투쟁을 벌이다 김사원 당원(울산 동구)
울산 동구위원회 방어동 분회장. 아직 김사원 당원에게는 어색한 호칭이다. 그는 지난 9일 끝난 동구위원회 당직 선거에서 선출된 새내기 분회장이기 때문.
“방어동 분회를 잘 꾸려보겠다”는 의욕을 갖고 분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정작 당선되고는 분회원들에게 인사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일터에서 벌어지는 현안에 온정신을 쏟다보니 좀처럼 짬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차에 “주간<진보정치> 인터뷰를 하게 됐다”는 김 분회장은 지면을 통해 먼저 인사하게 돼 분회원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현대미포조선은 용인기업 해고자를 복직시켜라”
김 분회장의 일터는 현대미포조선. 그는 현대미포선 사내기업이었던 용인기업 해고 노동자의 복직투쟁을 함께 벌이고 있다. 그가 활동하는 ‘현장조직건설 준비모임’은 지난 7월 중순부터 출퇴근 선전전, 중식집회 등을 벌이고 있다.
그는 직접 만든 유인물을 펼쳐 보이며, 용인기업 해고자 투쟁을 자세히 설명했다. 현대미포조선의 선박 수리를 맡아왔던 용인기업이 지난 2003년 폐업하자 해고자 신세가 된 비정규직 노동자 30명은 “부당해고를 당했다”며 원직복직소송을 내고 6년간을 싸워왔다.
이윽고 지난 7월10일. 대법원은 “현대미포조선이 채용, 승진, 징계 등에 실질 권한을 행사해 왔고, 작업량의 단가도 현대미포조선의 노사 임금협약 결과에 따라 결정됐다”면서 “직접적인 근로계약관계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판단, 원심을 파기하고 부산고등법원으로 환송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용인기업 해고노동자의 현대미포조선 정규직 지위를 인정한 셈이다. 간접노동자의 원청 사용자성을 인정한 의미 있는 판결이지만 한계도 있었다. 대법원이 파기환송하면 고등법원은 대법원 판결을 따라야 하지만 부산고법은 100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있다. 현대미포조선 사측이 새로운 자료를 제출해 시간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하나”
“이제 남은 건 노동자의 단결된 투쟁”이라는 김 분회장은 정규직, 비정규직이 하나로 뭉쳐 싸워야 해고 노동자들의 고통을 끝낼 수 있다고 했다. 정규직인 그와 동료들의 이런 비정규직 연대투쟁에 대해 사측의 방해 또한 만만치 않다. 툭 하면 사진 채증자료와 녹취록을 제시하며 사규위반이라고 징계조치를 내린다. 그래도 그는 꿋꿋했다. 그는 “사규위반 통지는 늘 받는 것”이라며 사측 노무담당자의 감시에 이골이 난 표정을 지었다.
정규직인 그와 동료들이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는 것은 현장민주화를 이루는 길이기도 하다. “노조의 혁신이 필요하다”는 그는 그 해법을 비정규직 연대투쟁에서 찾은 것. 그래서 그는 늘 “노동자는 하나”라고 강조하며 후배들을 실천투쟁으로 이끌고 있다. 그와 함께 활동하는 김의섭 당원은 “후배들을 엄하게 채찍질해서 따르는 후배들이 힘겨울 때도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자 김 분회장은 “우리는 정몽준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탈당사태로 노동현장도 갈라져 있다”면서 후배들이 강철처럼 단련돼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천 속에서 혁신하는 모습을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감은 실천 속에서 드러난다. “한 번 결심하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는 후배들에게 원칙을 지키는 선배로 모범을 보이고 있다. 당을 향해서도 “해고자도 모두 당원이다. 당원들이 투쟁하는 곳에 오지 않고 당을 당원들에게 돌려주겠다고 하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말로만 혁신을 부르짖지 말고 실천에 적극 나서라는 주문이었다. 그 자신도 분회원들의 요구를 듣는 것부터 시작해 방어동 분회가 할 일을 차근차근 찾아나가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덧붙인 한마디.
“방어동 분회원 여러분, 조금만 기다려 주이소. 우리 함께 멋지게 방어동 분회를 만들어 보입시더!”
지역공동체를 꿈꾸는 사과나무 공부방
윤혜경 당원(서울 광진)
서울시교육청은 기어이 국제중학교를 강행하려고 하는가. 2주일 만에 다시 서울시교육청사 앞에 차려진 국제중 반대 농성장을 찾는 윤혜경 당원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10월28일 오후 서울시교육위원회에 ‘특성화중학교(국제중) 지정 동의안’ 재심의를 요청했다. 지난 15일 서울시교육위가 심의 보류 결정을 내린 국제중 동의안을 2주일 만에 다시 심의요청을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
“공정택 교육감 퇴진운동 벌이겠다”
다시 국제중 반대 싸움이 불붙었다. ‘대원중학교의 국제중 전환 반대 주민대책위’(대원중 주민대책위) 대표를 맡고 있는 윤 당원은 29일 농성장을 지키며 노심초사했다.
그는 “국제중 설립은 사교육비 폭등, 교육차별의 문제”라고 거창하게 말하지 않는다. 당장 세 아이의 엄마인 자신의 문제였다. 그리고 날마다 함께 생활하는 사과나무 공부방 학생들이 당장 피부로 느낄 문제이기도 했다. “우리 학생들 가운데도 대원중 학생들이 있다”는 윤 당원은 대원중이 국제중으로 전환하면 원거리 통학 문제가 심각해진다고 지적했다.
현재도 중곡1~4동에는 중학교가 부족한 형편이다. 중곡1~4동에서 해마다 약 1000명의 초등학생이 졸업을 하는데 지역 중학교에서 다 수용하지 못해 구의동이나 광장동의 중학교로 배정받는 학생들이 있다. 그런데 대원중을 국제중으로 전환하면 당장 내년부터 더 많은 학생이 다른 동네 학교를 다녀야 하는 셈이다. 서울시교육청이 보완책을 마련했다고 하나, 2010년 중곡동에 학교를 신설하겠다는 계획만 있을 뿐 구체적인 대책은 마련되지 못한 실정이다.
“가뜩이나 중학교 배정에 불만이 많았는데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국제중을 밀어붙이니까 엄청나게 불만이 컸다”는 윤 당원은 “이제 공정택 교육감 퇴진운동을 벌여나갈 것”이라고 했다.
“빈곤의 상처 치유는 지속적인 관심에서”
“경쟁보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교육”을 강조하는 윤 당원은 사과나무공부방에서 지역공동체의 희망을 찾고 있다.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사과나무 공부방은 사교육활동을 하지 않는 소외계층 중학생들을 위한 무료 공부방. 사과나무 공부방은 3년 전 성동광진시민연대의 재정지원으로 문을 열었으며, 지금도 회원들과 지인들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윤 당원은 처음에 의욕이 앞섰던 만큼 실망도 컸다. 학생들이 당연히 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이해하고 잘 따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욕심에 지나지 않았다. “누구로부터 따뜻한 관심이나 지지를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갑자기 ‘잘 한다, 훌륭하다’고 칭찬한다고 잘 따르겠어요? 어깃장을 놓는 게 당연하죠.”
우선 그는 학생들과 자주 만나 상담을 하면서 신뢰를 쌓아갔다. “사회와 어른들로부터 사랑받지 못해 생긴 상처라서 지속적인 관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죠.” 차츰 학생들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하고 출석률도 좋아졌다. 지금은 문화학교의 지원을 받아 진행하는 특별활동인 ‘난타학교’나 고구마 캐기 등의 체험활동에 신나게 참여하고 있다. 또 공부방에서 말타기를 할 만큼 사과나무 공부방은 학생들에게 편안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무기력감이나 폭력의 형태로 나타나는 빈곤의 상처를 공부방이라는 공동체를 통해 치유해 나가는 셈이다.
“사과나무 공부방에서 희망을 찾다”
윤 당원은 “예민한 사춘기 학생을 지도하는 일이라서 빈곤의 상처를 치유하는 좀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프로그램이 마련됐으면 좋겠다”면 사회와 함께 풀어야할 과제를 던졌다. 그는 사과나무 공부방 같은 수많은 현장의 경험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역아동(청소년)센터의 정책을 바꿔나가는 토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윤 당원은 사과나무 공부방 운영을 계기로 지역아동센터, 장애인자립생활센터 등이 복지자원을 공유하고 연대활동을 펴는 광진복지네트워크와 국제중 반대 활동에도 참여하게 됐다. 그는 이런 활동을 통해 민주노동당이 신뢰를 얻는다는 생각으로 사과나무 공부방 대표를 찾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고 있다.
“반드시 택시월급제를 지켜내야죠.”
단협 무효 투쟁에 나선 한성택시노조 비대위원 김성호 당원(인천 계양구)
새벽 2시에 일을 나섰던 김성호 당원은 오후가 되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그는 꼬박 12시간 택시운전을 하고 현장조사를 나온 근로감독관을 만나고 오는 길이다.
그는 이달부터 한성운수노조 비상대책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후배들의 배경이 돼주겠다”면서 지역위원회나 노조에서 앞에 나서기보다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하던 그가 노조 비대위원으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노사가 체결한 임금협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룬 택시월급제인데…”
전국민주택시노조(민주택시) 소속인 한성운수노조는 월급제를 시행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10월30일 한성운수 노사가 단체협약을 맺어 월급제를 정액제로 바꿔버렸다. 또 단체협약에는 사측이 전액 부담해오던 가스값(LPG값)을 1일 30리터만 지원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당장 정액제가 실시되면 12년 근무한 김 당원은 월급이 45만원이나 줄어든다. 대부분의 택시노동자들도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의 손해를 보게 된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단체협상을 4개월 동안 진행하면서 노조 지도부는 조합원들과 상급단체에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았다. 단단히 화가 난 조합원들은 노조 지도부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지난 1일 비상대책위를 구성했다. 그리고 지난 3일 인천지방노동위에 단체협약 무효가처분 신청을 내고, 인천시청을 방문하는 등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김 당원은 “2002년 65일간의 파업투쟁으로 이룬 성과를 어떻게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느냐”며 분개했다. 2002년 당시 민주택시 인천본부 소속 30여개 사업장이 파업투쟁을 벌인 성과로 월급제가 시행됐다. 월급제는 당일 수입을 전액 회사에 납부하는 전액관리제를 전제로 해 일정한 월급을 지급받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당일 사납금을 채우려는 택시노동자들이 과속운전이나 교통법규 위반, 장시간 노동 같은 폐해는 사라지게 됐다.
김 당원은 택시노동자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월급제를 반드시 지켜낼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반드시 월급제로 원상회복시키고 노조 조직을 강화해야죠.”
부당한 것은 참을 수 없다
“부당한 것은 절대 그냥 볼 수 없다”는 김 당원은 한성운수에서 일하는 12년 동안 수차례 지방노동청에 진정서를 냈다. 한번은 그가 손님을 태우다가 접촉사고가 나서 13일 동안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사측이 입원한 날짜만큼을 결근으로 처리해 만근을 인정받지 못하고 월차도 쓸 수 없게 됐다. 너무 억울했던 김 당원은 노동청에 진정서를 냈고,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아 결근 처리를 취소시켰다.
그는 자신이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고 노력하는 만큼 동료들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확대된다는 데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지난 12년 동안 그가 모아놓은 ‘노동법 내용과 판례’ 자료집만 해도 족히 책 5권 분량은 됐다. 마치 보물상자를 열듯 노란서류 봉투 속에서 꺼내서 보여준 ‘노동법 내용과 판례’ 자료집에는 다양한 사례들이 깨알 같은 글씨로 꼼꼼히 정리돼 있었다.
“민주노동당 있어야 노동자 편해”
그는 20년 전 호주 이민을 꿈꾸던 젊은이였다. 당시 운영하던 슈퍼마켓을 정리하고 무작정 호주행을 감행했다. 3개월 여행비자로 호주에 갔던 그는 ‘노동자가 대접받는 나라’ 호주에서 살고 싶었으나 영주권을 받지 못해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뒤 용접공, 청원경찰, 택시운전을 하면서 한국생활에 적응해 갔다. “호주처럼 노동자가 대우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그는 노동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02년 여성택시노동자의 보건휴가를 찾아주려고 노력하던 그는 인천시당 부평구위원회 법률상담소를 찾아 상담을 받았다. 그 인연으로 민주노동당에도 입당했다.
당원이 된 그는 늘 “민주노동당이 있어야 노동자가 편하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면서 지인들을 입당시키고, 선거철에는 택시 승객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당 후보를 알리는 등 선거운동원으로 한몫하기도 했다.
근무시간과 분회모임이 겹쳐도 꼭 분회모임에 들렀다가는 계양구위원회의 맏형 김성호 당원. 방제식 계양구위원회 사무국장은 고마운 마음을 이렇게 전했다. “청년보다 더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성호 형님이 있는 것 자체로 힘이 됩니다.”
“포스코에 맞서 승리하는 지역공대위 만들 겁니다”
박정철 당원(전남 광양)
‘어떻게 하면 포스코 자본에 본때를 보여줄 수 있을까.’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한 수만명의 노동자와 함께 구호를 외치고 있어도 박정철 당원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함성이 박 당원의 가슴 속에 메아리칠 때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협력업체들의 열악한 근로조건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비정규직 철폐!” 노동자의 외침은 광양에서나 서울에서나 절절하기는 매한가지다.
“노동자와 주민이 함께 싸우겠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포스코. 그 세계적인 철강기업이 전남 광양에선 노동자 탄압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2년만에 복직한 노동자를 2일만에 해고한 이레코, 민주노총 금속노조를 탈퇴하고 기업노조로 전환하지 않으면 청산 절차를 밟겠다는 삼화금속, 노사교섭 참석을 무단결근으로 처리해 노조 간부를 해고한 덕산 등은 모두 포스코 하청업체들. 민주노조를 세운 하청업체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이제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쳐 대기업인 포스코를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 전남본부는 지난달 26일 ‘포스코 원하청 노동기본권 보장! 해고노동자 원직복직! 지역생존권 쟁취! 삼화산업 청산 철회와 고용보장을 위한 전남동부권 범시민대책위원회’라는 다소 긴 이름의 지역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요즘 박 당원은 지역공대위를 만들기 위해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YMCA 등 지역시민사회단체와 순회 간담회를 갖고 있다. 그는 “우리 지역은 하이스코 비정규직 투쟁, 촛불문화제를 통해 연대경험이 축적돼 있다”면서 지역주민과 함께 승리하는 투쟁을 만들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못다 이룬 꿈 ‘노조 건설’
그 역시 포스코 협력업체 노동자였다. 지난 2000년부터 포스코에서 생산하는 철을 원료로 공급받아 파이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하루 10시간 근무하고 2시간 잔업을 더했다. 1주일 평균 60시간 이상 일을 한 셈이다. 정비팀으로 부서를 옮겼을 때는 1주일에 2일 이상 철야를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노조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꿈을 품고 8년을 견뎌냈지만 치밀한 노무관리에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그는 지도부의 수배로 어려운 처지에 직면한 민주노총 전남본부에서 활동하게 됐다. 처음 간부를 맡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현장에서 못다 이룬 꿈을 이루는 길이라고 여겨 결심하게 된 것.
“선거 때처럼만 하자”
지난 2002년 입당한 박 당원의 당활동은 거의 선거와 연결돼 있다. 그는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노동자의 근본처우는 바뀌지 않는다”며 지난해 연말 대선과 올봄 총선, 6.4보궐선거에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는 지난 6.4보궐선거에 광양시 다선거구(진상․진월․다압면) 후보로 출마한 조길호 광양시위원장과 함께 5일장이 열리는 농촌지역을 돌며 “김수정 전 시장이 면세유 불법유통으로 구속돼 보궐선거가 치러진다”면서 보궐선거 원인을 제공한 정치세력을 심판하자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고생한다”며 시원한 물을 건네주던 장터 사람들이 다 민주노동당 지지자인 것 같았지만 결과는 ‘도로 민주당’이었다. 그렇다고 그는 낙담하지 않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요. 꾸준하게 지역활동을 해야 ‘민주노동당이 무슨 일을 하는구나’ 알고 지지해 주지 않겠어요.”
이제 민주노총 새내기 간부가 된 그는 “선거 때처럼 사람을 만나자”며 나태해지려는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또 “선거 때 악수 한 번으로 사람마음을 녹이듯 그렇게 정감 있게 사람을 만나야겠다”면서 포스코의 탄압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키기 위한 지역공대위를 꾸리는데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성’과 ‘정치’의 거리를 좁히겠다”
대전시당 여성위원장을 맡다 이지연 당원(대전 중구)
대전시당 여성당원들이 뭉쳤다. 여성당원들은 새로 ‘대전시당 여성위원회’를 꾸리기 위해 활동력을 높이고 있다.
여성당원들이 탈당사태로 활동이 중단된 여성위를 새로 꾸려보자고 뜻을 모은 건 지난 7월. 당시 대전시당 성평등강사단 3명 가운데 1명인 이지연 당원은 선배들의 권유로 여성위원장을 맡게 됐다.
이 당원과 여성위 준비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의 여성당원들은 ‘여성과 정치의 거리를 좁혀보자’는 생각으로 하반기 사업을 모색했다. 그래서 ‘평등캠프’와 ‘의정감시단 육성 강좌’를 마련하게 됐다.
평등캠프는 지난 10월25~26일 12쌍의 부부당원, 예비부부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이들은 성격유형검사, 의사소통훈련, 춤테라피, 달빛데이트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파트너십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좋았다. 1년에 1번씩 이런 캠프가 열렸으면 좋겠다”는 참가자들의 평가에 그는 비로소 첫 사업을 무사히 치렀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성위, 의정감시단 구성을 목표로 하다
그리고 지난 11월6일부터 ‘성인지적 관점으로 본 대전시 조례분석 강좌’를 시작했다. 지난 11월25일에는 ‘시정․의정 참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금홍섭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에게 시정․의정활동의 ‘비법’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남은 강좌는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워크숍’, ‘대전시 조례분석 현황과 실태조사’ 등 당원들이 직접 발로 뛰는 모둠활동.
이번 연속강좌를 통해 의정감시단을 꾸리는 것이 목표다. “처음 여성당원들에게 지방자치는 굉장히 낯선 얘기였어요. 이번 강좌로 지방자치의 기본개념은 잡고 있으니 내년엔 예산분석도 하고 조례개정운동도 벌여볼 참이에요.” 강좌에 참여하는 당원의 기세로 보면 내년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대전 시정과 의정에 개입력을 높여나갈 여성위의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남편과 성평등 복습, 새벽까지 티격태격
‘여성위원장 이지연’은 언제부터 여성주의에 천착하게 됐을까. 부산지역 청년단체에서 활동했던 그는 한때 “여성운동은 내가 굳이 관심 갖지 않아도 되고 할 일도 아니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5년 결혼하고 2006년부터 대전으로 옮겨와 살면서 대전여민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여성주의’에 새롭게 눈을 떴다. 그리고 가정폭력상담원, 성평등상담원 교육을 받은 그는 대전여민회의 ‘강사뱅크’에서 활동을 한다.
상담원교육을 받을 당시 그는 꼭 집에 가서 남편을 상대로 복습을 했다. 그러다가 ‘여성주의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남편과 새벽까지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남편에게 “여성주의는 인간이 인간답게, 남녀가 평등하게 살자는 것”이라는 아주 근원적인 개념부터 차근차근 이해시켰다.
그 뒤 남편인 노원록 당원은 이 당원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됐으며 여성위 사업에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남편은 집안일이나 시댁일, 귀가시간에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아요. 새벽에 귀가할 때는 대리운전 기사도 돼준답니다.”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남편은 그의 곁에서 정성스럽게 보이차를 우려내 찻잔에 따라줬다. 부드러운 보이차 덕에 기자와 이 당원은 전통다원에서 수다를 떨듯 편안하게 즐겁게 얘기를 나눴다.
대전시당 여성위는 오는 12월20일 총회를 열고 공식출범할 계획이다. “여성당원들이 지역에서 정치역량을 키우고, 쉽고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는 대중사업을 일상적으로 벌여 여성위의 존재감을 높이겠다”는 포부를 밝힌 이 당원. 그는 달마다 열리는 여성위 회의에서 전문가를 초청해 교육을 받으며 꾸준하게 전문성을 키워갈 것이라고 했다.
주부에서 당활동가로 ‘10년만의 복귀’
새내기 사무국장 김은정 당원(광주 광산)
“그 놈의 선거는 언제 끝나?”
엄마가 매일 늦게 들어오는 게 서운한 12살 민지가 투정을 부린다. 민지의 엄마 김은정 당원의 귀가가 거의 매일 늦기 때문. 지난해 대선 무렵 당 활동을 시작한 김 당원의 첫 당내 역할은 대선 유세단. 그 뒤 총선과 당 최고위원 선거를 치르고 또 얼마 전엔 광산구위원회 당직 선거도 치렀다. 그러니 민지는 엄마가 늘 선거로 바쁜 줄 아는 게다.
“아이들과 집에서 저녁을 먹어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는 김 당원은 광산구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고 더욱 바빠졌다. 그는 지난 10월 광산구위원회 운영위원회에서 인준을 받은 새내기 사무국장. 박귀선 전 사무국장이 광주시당 정책실장을 맡게 되면서 바통을 이어받았다.
10년만에 다시 사회활동을 시작하다
“10년 놀다가 나왔소.” 당에 오기 전 무엇을 했냐는 물음에 김 당원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지난 1996년 결혼해 시할아버지와 시어머니를 모시고 연년생 남매를 키우며 살았다. 10여년의 매운 시집살이를 한 그는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러나 10년만에 사회생활을 하려고 보니 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2006년 10월부터 1년간 자동차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러다가 “함께 일해 보자”는 선배의 권유를 받고 광산구위원회 사무차장으로 당 활동의 첫발을 뗐다. 그는 당원들과 안면을 틔우기 위해 처음 몇달 동안 술자리란 술자리는 다 따라다녔다. 부지런하고 서글서글한 성격을 지닌 그는 사람들과 금세 친해졌다.
“당원들 만날 때가 가장 보람 있어”
그는 요즘도 짬이 날 때마다 당원들을 만나는 부지런을 떤다. “당원 한명, 한명을 알아가고 당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일이 가장 보람 있다”는 그가 전화를 자주 걸어 친해진 당원 가운데 광주시당 대의원을 맡게 된 이도 있다. 화물연대 조합원인 김의선 당원. 그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도 김의선 당원은 “잠 깨서 좋소”라며 반갑게 받아줬다. 밤에 운전을 많이 하는 화물노동자라 그 뒤에도 자주 전화를 했다. 그런 다음 집회현장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며 당에 대한 애정이 많은 당원임을 알게 됐다. 그는 당 행사가 있을 때마다 김 당원을 챙겼고, 점점 얼굴 볼 기회가 많아졌다. 시당 대의원을 맡아달라는 요청도 선뜻 승낙한 고마운 당원이다.
그는 당원들의 목소리를 가장 가깝게 들을 수 있는 분회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야 당이 강화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현재 당직선거를 보면 투표율이 겨우 50%를 넘어요. 당권이 없는 당원을 포함하면 전체 당원들의 30% 정도가 참여하는 셈이지요.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70% 당원들의 목소리도 담아내고 싶네요. 그것은 끊임없이 당원을 만났을 때 가능하겠지요.”
2010년 겨냥 분회재편 “활동력 높일 것”
그가 사무국장으로서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재편한 분회의 활동력을 높이는 것이다. 광산구위원회는 2010년 지방선거를 대비해 분회를 기초선거구 단위로 재편했다. 그리고 분회장을 뽑고 분회 운영위를 꾸렸다. 분회체계를 세우는 것이 곧 사람을 세우는 일. 그는 지난 가을 분회일꾼을 세우기 위해 부지런히 당원들을 만나러 다녔다. 그 결과 분회체계는 갖췄다. 요즘은 2주일에 1번씩 분회 운영위를 열면서 지역활동 의제를 찾고 있다. 첨단분회는 임대아파트 분양학교를 열어 분양자율화 문제에 대응하고 있으며, 송종분회는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하고 있다. 또 김 당원이 소속된 우산월곡분회는 주민들이 즐겨찾는 어등산 등반모임을 하면서 지역활동을 모색하고 있다.
2010년을 향한 도전을 시작한 지역위의 살림을 맡아 어깨가 무거운 그는 최근 또 하나의 결심을 했다. 그 자신이 직접 지방선거 후보로 출마하기로 말이다. 그래서 틈틈이 이를 준비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우선 배드민턴 동호회, 송우초등학교 교통동호회 등에 참여하고, 공장에서 함께 일한 동료들과 볼링팀을 만들어 친목을 다지고 있다.
10년만에 주부에서 당 활동가로 복귀한 김은정 당원. 2010년 지방선거에 출사표를 던질 당당한 아줌마, 그의 용감한 도전은 계속 된다.
“농산물직거래 장터 제안합니다!”
젊은 농민 양정석 당원(충남 서천)
외양간 너머로 고개를 쑥 내밀고 있는 한우들에게 먹이를 챙겨주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양정석 당원. 그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서천읍 시장에서 야채를 파는 어머니를 태워드리고 와서 비닐하우스에 퇴비를 내고 논갈이를 한다. 그리고 틈틈이 어머니가 주문받은 배추를 직접 배달하는 일도 하고 있다. 그래서 농번기가 끝나도 그의 일손은 분주하다.
올해 그는 처음으로 국화를 재배했다. 첫 농사라 서툰데다 수확기에 일손이 모자라 겨우 생산비를 건진 정도다. 또 배추 6천포기를 심었는데 2천포기만 내다 팔고 남은 4천포기는 밭에서 첫눈을 맞았다. 게다가 사료값은 오르는데 소값은 떨어지고…. 그래도 내년 농사에 쓸 퇴비를 만들기 위해 계속 소를 키우고 있다. 이만저만 손해가 아니다.
“해마다 농사짓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그는 부모님과 함께 햇수로 9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요즘 농촌에서 보기 드물다는 젊은 농사꾼이다.
서천군농민회 막내
올해 스물아홉인 그는 서천군농민회의 막내다. 6년 전 이웃 동네의 친한 선배를 따라 농민회에 첫걸음을 했던 그는 농민회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농민회의 형님들은 어눌한 말씨의 그를 편견 없이 따뜻하게 맞아줬다. 또래친구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 외로웠던 그는 농민회 형님들을 참 잘 따랐다. 처음 물대포와 최루탄이 쏟아지던 농민집회에 참석해 ‘왜 내가 여기 왔을까’라며 두려움에 떨던 그가 농민집회 참가를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여기는 어엿한 농민회 활동가로 성장하는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형님들이다. “형들은 나의 선생님이이에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형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어요.”
농민회 형님들 “굉장히 노력하는 후배”
양 당원이 인터뷰한다는 소식을 들은 농민회 형님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지난 9일 장항선을 타고 충남 전역을 거치다시피해서 3시간만에 서천역에 도착한 기자를 함께 마중 나온 이희복 서천군농민회 선전부장은 인터뷰 내내 그의 곁에 함께 있었다. 때로 기자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얘기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기도 했다. 이 선전부장은 “국화, 배추 등 농사도 많이 짓고 늘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농사꾼”이라며 후배인 양 당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충남도당 대의원을 맡다
그는 농민회 형님들의 권유로 지난 2006년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리고 올해는 충남도당 대의원을 맡게 됐다. “처음 형들이 대의원 맡으라고 했을 때 눈앞이 깜깜했다”는 그는 막상 대의원을 맡고 보니 김혜영 도당 위원장, 지형철 정책국장 등 좋은 당원들을 많이 만나게 돼 좋다면서 입가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는 배추, 토마토, 파 등 다양한 야채농사를 짓고 있으며, 어머니가 그것을 직접 시장에 내다파는 모습을 보면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이어주는 직거래장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해왔다. 그래서 그는 “농민은 농산물을 제값 받고, 당원들은 안전한 농산물을 먹을 수 있는 길”이라며 도당에 농산물직거래 장터를 제안하기도 했다.
“푸근한 당을 만들었으면”
준비위원회 단계인 서천군위원회는 지난해 대선 선거운동을 계기로 지역비전 찾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여름 광우병 반대 촛불이 전국을 뒤흔들 때는 서천역전에서 촛불문화제를 열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 서천군위원회는 활동이 활발하진 못한 상태다.
그는 자신이 서천군농민회를 푸근하게 여기는 것처럼 서천군민들이 민주노동당을 푸근하게 느낄 수 있게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대의원으로서 할 몫이 있다면 기꺼이 나서겠다고 다짐한다. 당장은 당원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농민회 형님들을 챙기는 것이 그가 할 일이다. “형 똑바로 해!”라고.
“사천의 희망을 반드시 지켜야죠”
김연화 당원(경남 사천)
올 한해 민주노동당 사천시위원회 정동면분회장, 사천여성회 사천읍지부 사무국장 등을 맡아 동분서주 달려온 김연화 당원. 한해의 끝자락에 선 그는 고민이 많다. 지난 봄 ‘사천의 기적’을 일궈냈던 강기갑 대표의 선거운동을 뛰었고,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를 막아내려고 장바구니실천단 활동을 벌였고, 여성들을 정치의 주인으로 세우기 위해 ‘여성정치학교’를 여는 등 부지런히 살았다. 그는 매순간 최선을 다해 노력했으나 한해를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그것은 실무에 쫓겨 사람들을 더욱 살뜰하게 챙기지 못했다는 반성이 기도 하고, 강 대표 재판문제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만이 희망”
사천읍과 삼천포가 나눠있는 지리적 조건을 감안해 사천여성회가 삼천포에 본부를 두고, 사천읍에 지부를 설립한 지 햇수로 3년째를 맞고 있다. 사천읍지부 사무국장을 맡은 김 당원은 영어, 육아, 산행 소모임을 꾸렸고, ‘찾아가는 마실’ 사업을 벌였다. 아파트단지의 작은도서관이나 부녀회를 찾아가 천연비누․화장품 만들기, 부모강좌 등을 열었던 ‘찾아가는 마실’은 문화공간이 부족한 사천읍지역에서 꽤 인기 있는 사업이었다. 그 사업을 통해 여성회를 알려내고 회원도 늘렸다. 또 여성회 회원들과 결혼이주여성들이 서로 한글과 영어를 가르쳐주며 각 나라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혀가는 영어소모임은 나름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문제는 여성들이 이런 소모임에 ‘참여’는 하는데 ‘주체’로 나서는 것은 부담스러워 한다는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자신도 그랬던 적이 있다. 결혼하기 전 그는 창원에서 청년회 활동을 했다. 직장과 청년회활동을 병행하는 생활은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2003년 결혼을 하고 사천으로 옮겨오면서 좀 편히 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정희 사천시위원장과 여명순 사천여성회장은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끈질기게 찾아와 “함께 해보자”고 설득했다. 결국 사천시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았고 임신을 하면서 잠시 활동을 쉬었다. 그 뒤 6개월된 아들 명현이를 데리고 다시 여성회 활동을 했다. 여성들끼리 끈끈한 자매애로 뭉친 여성회는 이전 청년회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지금은 그 때 그들이 베풀어준 따뜻한 배려가 더 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그 또한 마음을 열고 따뜻하게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가진 역량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야죠. 사람만이 희망이잖아요.”
무슨 일이든 ‘척척’
그를 곁에서 지켜본 당원들은 “무슨 일이든 알아서 척척 하는 당원”이라며 미더워한다. 실제로 지난 총선에서 정치를 멀게만 느끼던 평범한 주부들을 강 대표의 지지자로 만드는데 그의 역할이 컸다. ‘찾아가는 마실’로 인연을 맺은 주부들에게 과감하게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를 지지해 달라고 했다. 사실 여성회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으나 그가 과감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평소 그가 그들과 돈독한 신뢰를 쌓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 진심은 통하는 법. 사천의 새로운 변화를 이루겠다는 강 대표의 진정어린 호소가 주부들의 마음을 열게 했다.
이렇게 사천시민들의 뜨거운 열망을 안고 당선됐던 강 대표가 정치탄압의 표적이 돼서 의원직 상실위기에 처했다. 그는 “너무 억울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가 많다. 삼천포에 사는 친구들이 “내년 보궐선거 한다며?”라며 지역에 떠도는 소문을 듣고 한마디씩 하면 힘이 쭉 빠진다. 그랬던 그가 지난 14일 강 대표를 지키려고 전국에서 사천으로 달려온 당원들과 네티즌들을 보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이번 문화제에서 지난 총선 때의 뜨거웠던 열기를 다시 느꼈어요. 이 여세를 몰아 반드시 강 대표를 지켜내야죠.”
“당이 정치탄압 받는 당원과 함께 싸워야죠”
성향아 당원(서울 강남)
강남구 역삼동 테헤란로에 위치한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정문에서 부당해고에 맞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성향아 당원. 그는 지난 10월13일 두번째 해고를 당했다. 그가 공단측에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1년 계약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원’이라는 이유로 해고
그가 첫 해고를 당한 것은 지난해 12월20일. 당시 그는 정부가 공공기관에서 상시지속적인 업무에 2년 이상 종사한 자를 무기계약으로 전환시키기로 한 지침에 따라 별정직 전환 대상자 14명에 포함됐다. 그는 2003년 10월부터 4년여 동안 공단 재해보상실에서 공무상 재해를 입고 요양치료를 받고 있는 공무원들의 요양심사를 담당해 왔기 때문에 자격 요건이 충분했다.
그러나 공단은 ‘민주노동당원’이라는 이유를 들어 최종 전환심사에서 그를 제외시켰다. 너무나 억울했다. 그는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원내진출을 이룬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평소 당원임을 밝히고 공개 활동을 해 왔으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주말마다 공단 직원들의 인라인, 국선도, 마라톤 모임에 참여하면서 정규직 동료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정치활동 금지규정을 들이대며 탈당하지 않으면 해고하겠다고 한 것이다. “‘생존권을 택할래, 양심의 자유를 택할래’ 하는 거잖아요. 명백한 정치탄압이죠.”
해고된 성 당원은 공단 앞에서 ‘부당해고 철회’ 1인 시위를 벌이며 지방노동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지노위로부터 ‘부당해고 인정과 원직복직 명령’을 받아 지난 6월 복직했다. 또 국가인권위는 지난 8월 “헌법과 정당법에 위배되는 공단의 인사규정을 개정하고, 성향아 씨의 별정직 전환 절차를 재개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복직 4개월만에 두번째 해고
그러나 성 당원은 복직 4개월 동안 ‘집단 왕따’를 당했다. 그 고달픈 복직생활에 위로가 된 것은 청계광장에서 피어난 촛불이었다. “촛불 덕분에 자신감을 갖고 생활했죠. 촛불문화제에 가면 서로 배려해주고 먹을 것도 나눠먹고 힘이 났어요.”
복직한 성 당원은 국가인권위에서 권고한데 따라 고용보장을 공단측에 수십차례 요구했다. 홍희덕 의원실에서 공단인사팀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그 때 공단측은 홍 의원실에 국정감사가 끝난 뒤 성 당원과 면담을 하겠다고 해놓고선 그를 해고한 것이다. 그는 “대화를 진행하고 있는데 해고를 한 것”이라며 부당해고를 주장했지만 공단은 오히려 “성 씨가 계약을 거부했다”고 비방했다. 그가 공단에서 1년 계약서를 쓰라고 했을 때 “기간 없이 계약하던지, 고용보장을 첨언해 달라”고 요구한 것을 이렇게 왜곡한 것이다. “당장 해고될 수 있다는 공포심 때문에 더 안 좋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어요.”
그가 해고되고 난 뒤 지난 10월30일 공단측은 이사회를 열어 정치활동금지규정을 폐지했다. 그의 투쟁이 일궈낸 성과라서 가슴이 뭉클했지만 한편 뒤늦은 결정에 아쉽기도 했다. 그는 다시 투쟁에 나섰다. 공단에선 홀로 해고됐지만 그의 투쟁은 외롭지 않다. 자기 일처럼 여기며 연대해 주는 동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싸워 반드시 이기겠다”
두번의 해고를 겪고 투쟁한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굉장히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한 자신을 발견했다. 사실 해고되기 전에는 늘 “어려운 일이 닥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소극적인 성격이었으나 최근에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씩씩하게 이겨내겠다”는 용기를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내년에도 끈질기게 싸워서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다짐하면서 마지막으로 민주노동당에 쓴소리를 했다. 당원이 정치적 탄압을 받는데 당이 가만있으면 안 된다는 따끔한 질책이었다.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는 이유로 두번이나 해고를 당하면 항의성명이나 논평이라도 낼 줄 알았죠.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저들이 우습게 알잖아요. ‘감히 민주노동당 당원을 건드려, 가만 두지 않겠다’고 난리를 쳐야죠.” 그러면서 그는 국회의원들에게도 당부했다. “다섯분 의원들 가운데 한분만이라도 공단이사장을 면담해주세요.”
“내가 도움받은 만큼 돌려줘야죠”
파산면책 전파자, 여승철 당원(부산 영도)
“까짓, 내가 좀 더 손해보고 살지.”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온통 마음을 헤집어 놓았던 격랑은 어느새 잔잔한 파도로 가라앉는다. 그는 부산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속상했던 일을 툴툴 털고 일어선다. 때로는 ‘실없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늘상 ‘허허’거리는 여승철 당원. 그는 그렇게 어머니 품 같은 바다를 벗삼아 부산 영도에서 40여년을 살았다. 부산 영도는 태어나지만 않았을 뿐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택시노동자인 그에게 일터이며, 파산면책 상담을 하는 그에게 활동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그는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의 몸으로 워낙 열심히 살아서 동네에서 인정받는 일꾼이다. 지난 대선 때는 900명의 연고자카드를 작성해 부산시당에서 연고자찾기 최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6년차 택시노동자의 새 꿈
여 당원은 6년차 택시노동자다. 그는 불편한 다리로 하루 평균 16시간 정도 가속 페달을 밟는다. 그래도 노동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을 갖고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는 80년대 후반 부산에서 가장 번창했던 신발공장의 고무노동자로 노동운동에 첫발을 뗐다. 당시 민주화의 기운은 열악한 신발공장에도 노조설립 바람을 일으켰다. 고무노동자협의회 소속이었던 그는 삼신산업사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다가 해고돼 1년간 복직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91년 당시 전노협 탈퇴 종용에 맞서 싸우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한진중업공 노조위원장인 박창수 열사와, 어용노조의 30분 일 더하기 운동에 저항해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고 외치며 공장 옥상에서 투신한 권미경 열사를 가슴 깊이 묻은 사람이다. 그에게 두 열사는 힘겨운 삶을 지탱해준 버팀목과 같다.
요즘 그는 택시노동자로서 새로운 꿈을 키우고 있다. 부산시당이 현장노동자들과 연대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벌이는 일촌맺기사업 택시분과에 참여하고 있는 것. 부산지역은 민주택시노조가 와해된 이후 택시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이 매우 열악한 상황. 새해에는 최저임금제 도입 등 제도개선을 위해 택시노동자들의 힘을 모아나갈 계획이다. “노동자들을 조직하기가 만만치 않지만 이왕 손을 댔으니 죽기 살기로 해 봐야죠.”
파산면책 경험살려 상담자로
그는 지난해 연말 영도구위원회 송년회에 파산면책 상담을 하면서 인연을 맺은 주민들과 함께 참석했다. 그들이 근심걱정을 잊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서 여 당원은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도 한 때 신용불량자였다. “빚 독촉하러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항상 불안했죠. 그래서 집에 들어오면 문을 잠그고 아무리 초인종을 눌려도 내다보지 않았죠.” 그러다가 그는 지난 2007년 7월 사하구위원회에서 상담을 받고 파산면책 과정을 밟게 됐다. 그는 법조문을 하나하나 찾아가면서 진술서를 써 법원에 파산신청을 접수한 뒤 10개월만에 면책을 받았다. 그 뒤 그는 긴 어둠의 수렁을 빠져나온 듯한 기쁨을 더 많은 사람들과 누리기 위해 파산면책 상담자로 나섰다. 10평 남짓한 작은 아파트 한켠에 컴퓨터를 새로 들이고 파산관련 자료를 비치했다. 그리고 관련법을 공부하고 판례를 모았다. 그의 아파트가 민생상담센터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신용불량자들에게 파산을 신청하기 위해 갖춰야 할 서류를 꼼꼼히 일러줬다. 50대의 한 아주머니는 선박사업을 하던 남편과 이혼하면서 엄청난 부채를 떠안게 됐다. 아이 셋을 키우던 그 아주머니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면서 고생 고생하다가 파산신청을 하게 됐다. “채권추심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엄청나게 마음고생을 하고 살았다면서 굉장히 고마워했죠.”
지난해 파산면책 상담은 작은 결실을 거뒀다. 그의 도움을 받은 주민 13명이 파산신청을 했고 이들 중 6명이 면책을 받았다. 또 6명이 입당하기도 했다. 하루 16시간 택시운전을 하면서도 잠자는 시간을 쪼개 파산면책 상담을 하고 진술서를 다듬어 준 그의 노력이 일궈낸 성과다. 그는 새해에도 파산면책의 전파자 역할을 하겠다고 한다. “내가 힘들 때 도움을 받은 만큼 사회에 돌려주며 살아야죠.”
“비정규직이 없어질 때까지 우직하게”
고홍규 당원(경기 수원)
“제구실 못하는 노동부, 똥덩어리~!”
“노동부, 누가 봐도 뻔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해결 못하는 무능한 당신은 ‘뭐?’, 똥 덩어리~!!”
수원시 장안구 서부우회로 인근의 경인지방노동청 수원지청에서 하루건너 1인 시위를 벌이는 고홍규 당원. 그가 몸에 걸치고 있는 선전판의 글귀들이다. 격일제로 버스운전을 하는 고 당원은 쉬는 날마다 ‘비정규직 철폐’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3일 첫 시위에 나선 그는 당시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의 주인공이 즐겨 쓴 ‘똥덩어리’란 낱말을 인용해 선전문구를 만들었다. ‘똥덩어리’란 표현이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노동부를 꾸짖고 싶은 그의 마음을 잘 대변해 줬기 때문이다.
“수원여객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심하게 차별받고 있어 1인 시위에 나섰다”는 그는 누가 시켜서 시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비정규직도 아니다. 그럼 왜 1인 시위에 나섰을까.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똑같은 회사에서 똑같은 시내버스 노선을 똑같이 운전하는데 차별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근무일수가 더 많지만 임금은 절반 수준이다. 그가 입사하던 11년 전만해도 비정규직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전체 840여명 가운데 170명이 비정규직이다. 해마다 비정규직은 늘어나는 추세다.
본래 잘못된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성격인 그가 회사에 ‘찍힐까’ 두려워 아무런 말을 못하는 비정규직을 대신해 항의행동에 나선 것. 주변 사람들은 ‘좀 하고 말겠지’ 했으나 벌써 70여일이 지났다. 영하로 뚝 떨어진 날씨에 힘겨울 법도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그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있어서다. 회사 동료이며 수원민주버스노동자회에서 함께 활동하는 양학열 당원이 그의 곁을 지킨다.
두 당원의 1인 시위는 근로감독관을 괴롭히는 짓궂은 장난으로 지루할 틈이 없다. 지난 2일 아침 ‘똑바로 하라’는 의미를 담은 새해 선물로 엿을 그들에게 나눠줬다. 그 엿을 받고 ‘붉으락푸르락’ 변하던 근로감독관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꽤나 통쾌했다. 또 출근시간을 따져가며 놀려대는 통에 ‘만년 지각생’이던 어느 근로감독관의 출근 습관이 바뀌기도 했다.
민주노조 만들기 위한 즐거운 고생
고 당원의 근로감독관 괴롭히기는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 2007년에도 그는 노동청을 찾아가 비정규직 차별 시정을 요구했다. 현행법상 차별을 받은 비정규직 당사자가 시정을 요구해야 하지만 그는 끈질기게 근로감독관을 설득했다. 결국 그는 수원여객에 대한 근로감독을 실시하겠다는 답변을 얻어냈다.
또 그는 사측과 노조의 잘못도 거침없이 지적한다. 그러다가 고 당원은 지난해 7월 노조에서 제명됐다. 한국노총 소속의 현 노조집행부가 사측과 임금동결 밀실교섭을 하려고 한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한 것을 ‘유언비어 날조’로 몰아붙여 제명한 것이다. 그 뒤 그는 민주노총 운수노조에 ‘나홀로 조합원’으로 가입했다.
최근에는 사측이 기본금만 통상임금으로 책정한데 반발, 특별연장수당과 근속수당, 비디오 수당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시켜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가 애쓰는 만큼 현장도 작은 변화가 일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측의 눈치를 봐서 쉽게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지만 내심 고마워한다. 동료인 양 당원에게 그의 안부를 살짝 묻기도 하고 “고생이 많다”는 인사를 전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거창하게 노동운동이라고 표현할 만큼 내세울 게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왜 힘들게 그러느냐’고 하면 다만 “잘못된 것을 보고도 아무 말 않고 참는 게 더 힘들다”고 할 뿐이다. 그런 그가 2009년 ‘큰 목표’를 하나 세웠다. 2010년 복수노조 허용을 앞두고 민주노조를 준비하겠다는 것. 1인 시위도 민주노조를 준비하는 과정인 셈이다. 그는 “이렇게 비정규직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 나간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복수노조가 생길 때 힘을 모으지 않겠느냐”며 즐거운 고생이라고 말했다.
“비정규직이 없어질 때까지 1인 시위를 계속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힌 그는 민주노동당도 우직하게 투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KTX, 뉴코아 등 비정규직 투쟁이 이슈가 될 때 함께 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시들해지는 게 안타깝네요. 싸움을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죠.”
“충주서 진보정치 거점을 만들겠다”
김선애 당원(충북 충주)
지난해 18대 총선에서 진보정치를 지켜낸 민주노동당 113명의 ‘다윗’ 가운데 한명이었던 김선애 당원. 그는 충북 충주에서 척박한 진보정치의 토양을 비옥하게 일구는 20대 지역정치인으로 힘차게 살고 있다.
20대 후보출마, 지역정치인되기 결심
김 당원은 총선 당시 20대 젊은 여성후보로서 지역주민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충주지역에서 민주노동당 후보의 출마도 처음이었고, 여성후보의 출마도 처음이었으니 후보자 합동토론회에서 그의 활약은 돋보였다.
총선을 준비하는데 채 한달도 남지 않았던 때였다. 당시 집단탈당 사태로 인해 총선을 치르는 것 자체가 무리였으나 바닥을 치고 있는 당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후보를 내기로 결의를 모았다. “당 인지도를 가장 빠르게 높이려면 젊은 여성후보가 출마하는 게 좋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충주시위원회 사무국장으로 갓 인준받은 김 당원이 가장 적합한 후보로 추천됐다. 출마결심과 함께 후보가 된 그는 대형마트규제, 대학등록금상한제를 주요공약으로 내걸고, “충주에도 민주노동당이 있었어?”라며 낯설어 하는 지역주민들에게 당의 정책을 부지런히 알려냈다.
준비되지 않는 선거라 좌충우돌 실수도 많았지만 탈당사태로 냉담했던 당원들의 마음을 모아내고 지역사회에서 당의 영향력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총선 이후 지역 방송국 등 언론사들이 잇따라 지역현안에 관한 당론을 문의해 오고 있다. 최근에도 “4대강 정비사업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당론은 무엇이냐?”라고 물어오기도 했다.
그래서 “20대 국회의원 출마 경력이 부담스럽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출마할 때 지역에서 계속 활동하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부담스럽지는 않아요. 오히려 책임감이 커졌죠.”
“당 실무보다 지역활동에 무게중심을”
그는 지난해 연말부터 전화통화만 하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당원들을 직접 찾아가 만나고 있다. 그렇게 새로 알게 된 당원이 8명이다. 그 가운데 국민승리21 때부터 활동하다가 2003년 노동자대회 때 구속됐던 당원도 있다. 구속으로 직장을 잃고 한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던 그 당원은 최근 다시 활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터에 김 당원이 먼저 연락해오자 “너무 고맙다”며 반가워했다. 그런 당원들의 따뜻한 인사에 기운이 샘솟는다는 그는 “올해 상반기까지 그동안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당원들을 다 만나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당조직의 내실을 다지기 위해 휴면당원을 만나는 한편, 정치적 전망을 갖고 지역활동에 적극 나설 당원들을 발굴하는데 힘을 쏟으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오는 3월 연수동으로 거주지를 옮겨 지역활동을 펼치려고 한다. 아직 지역위 당원들과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혼자서는 꽤 오랫동안 고민한 일이다. 2010년 지방선거를 돌파하기 위해 반드시 지역거점을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한 때문이다. “연수․목행․용탄동 시의원 선거구를 지역거점으로 만드는 사업을 시작하려고 해요. 이 지역에 차상위계층, 장애인 등이 1천세대 이상 밀집해 있는 영구임대아파트단지가 있는데, 거기서 한부모가정을 위한 가족센터, 마을도서관 사업을 해보고 싶어요.”
그는 여느 20대보다 당찬 구석이 많다. 낮에는 당활동으로 바쁘지만 한집안의 가장으로서 책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새벽 아르바이트. 새벽4시 찬바람을 맞으며 생활정보지 배포로 하루를 시작하는 힘겨운 생활에도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생활고 때문에 하루 서너시간 자면서 투잡, 쓰리잡을 하는 분들을 보면서 새로운 결의를 다지고, 일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