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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지음 한티재 펴냄 2016-09-19 |
천둥의 뿌리
이하석 시집
대구 ‘10월항쟁’ 70주년,
‘현존하는 과거’와의 시적 대면
평생을 대구에서 살아 온 이하석의 시집 『천둥의 뿌리』는 대구라는 도시에서 벌어진 집단적 죽음의 기억을 불러내어 고통의 언어로 지어낸 집이다. 그런데 이것이 번듯한 사당이나 기념관이 아니라 조촐한 초막으로 지어진 이유는 집단적 죽음의 기억들이 아직 공식적으로 복원되지 못하고 원혼들이 아직도 천도(遷度)되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 살면서 늘 부채의식에 시달려 온 시인은 혼신의 힘을 다해 고통의 언어로 가까스로 기둥을 세우고 얼기설기 서까래를 엮어 중음신들이 임시로 거처할 오막살이 한 채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떠듬거리며 이렇게 고백한다. “나 역시, 여전히, 죽음의 사랑을 제대로 말 못 합니다.”(「시인의 말」).
가슴속에 뭉쳐 있는 뜨거운 사랑의 불덩어리를 끄집어내려 해도 침묵을 강요하는 온갖 금기와 감시와 검열의 트라우마 때문에 말은 가시처럼 목에 걸려 나오지 못한다. 오죽하면 시인은 “사랑을 고백하면서,/당신이 내게서 점점 더 멀어지기를 꿈”꿀까(「사랑에 대하여」).
지난 45년간 ‘이성의 힘’과 ‘자기절제의 정신’을 동력으로 하여 시를 써 온 이하석 시인이 수십 년의 인고 끝에 마침내 터뜨린 ‘거대한 울음’이자 가장 냉정하게 기록한 ‘치열한 고발’인 이 시집은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화엄적(華嚴的) 대오’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 시의 역사에서도 매우 드문 사례이다.
대구의 역사와 대구의 시인이 대면한 이번 시집을 지역의 출판사 한티재에서 펴내었다는 데 더욱 큰 의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저자 이하석
1948년 경북 고령에서 출생하여 6세 때 대구로 이주, 쭉 대구에서 살아오고 있다. 1971년 『현대시학』지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투명한 속』 『김씨의 옆얼굴』 『우리 낯선 사람들』 『측백나무 울타리』 『금요일엔 먼데를 본다』 『녹』 『것들』 『상응』 『연애 간(間)』 등과 시선집 『유리 속의 폭풍』 『비밀』 『고추잠자리』 『부서진 활주로』 『환한 밤』 등이 있다. 대구문학상, 김수영문학상, 도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김광협문학상, 대구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 추천사 염무웅 (문학평론가)
이하석 시인의 45년 창작생활을 관통하는 핵심적 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이성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과학도의 명징성에 준하는 관찰자의 냉정함을 나는 그의 서정시에서 보곤 한다. 강과 들, 나무와 벌레 같은 존재들과의 생태적 교감을 표현하는 작품에서도 그는 감정과잉을 억제한다. 그의 시가 구현하는 이미지의 견고성과 투명성이 때로 감성의 메마름처럼 보였던 것은 이런 자기절제의 정신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시집 『천둥의 뿌리』는 수십 년의 인고 끝에 마침내 터뜨린 ‘거대한 울음’이자 가장 냉정하게 기록된 ‘치열한 고발’로 읽힌다. 작년 이맘때 나온 시집 『연애 間』의 몇몇 작품들, 가령 「밥」 「가창댐」 「사람들」 등이 이미 오늘의 폭발을 예고하고 있거니와, 시집 전체가 이번 『천둥의 뿌리』에서처럼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화엄적(華嚴的) 대오’를 형성하고 있는 예는 우리 시의 역사에도 드물 것이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릅니다. / 대답하면 나는 너무 명백하게 드러나버립니다. / 가창골, 송현동, 상인동, 본리동, 앞산 빨래터 계곡, 경산 코발트 광산, 칠곡 신동재와 돌고개에서 / 모든 나는 / 그렇게 죽음 앞에 세워지지요.”(「호명 1」)라고 노래한 그대로, 시인은 수많은 억울한 주검들로부터 호명 받고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몸이 되어 죽음 앞에 세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향토사의 비극이자 민족사의 비극일 수밖에 없는 ‘현존하는 과거’와의 시적 대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