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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18)- 2024. 01. 11(목) |
이번 순례는 청주교구 감곡 매괴성모 순례지 성당과 베티 성지이다. 그리고 시간이 되면 청주 서운동 성당까지 갈 생각을 하고 출발했으나 당일 계획이고 낮의 길이도 짧을 때라 처음부터 서운동 성당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07:30 성당 출발. ‘소한(小寒)이 대한(大寒) 집에 와서 얼어 죽었다’는 속담처럼 연중 가장 추운 1월 초 · 중순인데도 다행히 혹한의 추위는 아니다. 떠나기 며칠 전만 해도 서울에 눈이 많이 내렸다는 소식에 걱정을 했으나 이렇게 출발이 되어서 다행이다.
더욱 다행인 것은 고 요셉 형제가 운전 봉사로 함께 한 점이다. 자영업을 하는 입장에서 시간 내기가 어려울 텐데 그의 고향 문경지역 성지가 포함되었던 12차 마원 성지, 16차 멍에목 성지에 이어 이번이 벌써 세 번째이다. 고마운 일이다. 직업 운전자에 못지 않는 운전 솜씨에 매번 놀라지만 더 훌륭한 것은 자신의 재능을 남을 위해서도 기꺼이 쓴다는 것이다. 진정 ‘재능 기부’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표양이라 하겠다.
영천-상주 고속도로를 달려 낙동 휴게소에서 한번 쉬어 약 3시간 반이 걸려 성지 마을에 도착. 성지가 가까워질수록 성지 뒷산 마루에 보이는 십자가가 점점 커진다 .성지 주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357-2 (도로명 음성군 감곡면 성당길 10)
감곡 매괴성모 순례지 성당 - 충북의 모본당이자 유서 깊은 성모 성지 |
장호원 본당의 창설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康川面 釜坪里) 속칭 부엉골은 초기 산골 교우촌인데 이 마을에 본당이 생기고 1885년 예수 성심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가 1887년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뒤에도 얼마 동안 부엉골 본당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1894년 봄 부엉골 본당 신부로 부임한 프랑스 외방전교회 가밀로 부이용(Camillus Bouillon, 한국명 任加彌) 신부는 본당의 관할공소들이 모두 남쪽에 치우쳐 있고 본당은 북단에 위치하여 사목활동이 매우 불편하여 본당을 이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공소 사목을 하면서 이전할 곳을 물색해 오던 중 장호원의 매산이라는 조그만 산 아래 큰 저택 한 채를 보고 첫눈에 성당 이전지로 적당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너무 크고 훌륭한 집이라 가난한 선교사의 입장에서는 매입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실제 그 집은 명성황후 민씨의 6촌 오빠 민응식의 집이었는데 1882년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피신해서 얼마 동안 묵었던 역사성을 지닌 집이었다.
이에 가밀로 신부는 성모님께 “성모님, 만일 저 대궐 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여기에 성전을 짓고,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어 평생토록 모시겠습니다.” 하고 허원 기도를 하였다. 그러고는 부엉골 본당에 돌아가서도 끊임없이 기도했다.
가밀로 신부가 다녀간 뒤 역사의 격랑 속에서 민씨 집안이 몰락하고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조선 의병이 그 집을 거점으로 하고 있는 중, 일본 군대가 들어와서 의병을 몰아내고 집을 불태운 일이 일어났다. 이렇게 되자 가밀로 신부는 1896년 성모성월인 5월에 폐허가 된 집터와 주변 산지를 기적처럼 손쉽게 매입할 수 있었다. 성당 터를 두고 허원 기도를 한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그리하여 몇 달 뒤 9월 17일 부흥골에서 장호원으로 서둘러 이전을 하였으며 같은 해 1896년 10월 7일 장호원 본당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당시 장호원에는 신자수가 5-6명에 불과하였지만, 본당의 관할 지역은 매우 넓어 경기도 여주 · 이천, 충청도 단양 · 제천 · 충주 · 음성 · 괴산 · 진천 · 청주 · 보은 등이 여기에 속하였으며, 공소 수 27개에 총 신자 수는 1,3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장호원(長湖院), 조치원(鳥致院) 등 ‘원(院)’이 붙는 지명은 옛날 관리들이 지방 순회를 할 때 숙식을 제공했던 마을이다. 대체로 교통의 요지이며 역촌(驛村)과도 관련이 있다. 현재도 장호원은 서울에서 충주로 남북을 연결하는 3번국도와 평택·제천·영월을 동서로 연결하는 38번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있다.
장호원에 정착한 뒤 부이용 신부는 불타서 뼈대만 남은 건물을 개조하여 우선 작은 성당과 사제관 공사를 추진하여 그 해 12월 5일 이를 완공하였다. 첫 성당이었다.
그러나 장호원 자체의 신자수가 증가하였고, 또 20여 개에 이르는 공소의 신자들도 증가하는 상태였으므로 소성당으로 교우들을 다 수용하기 어려워 정식 성당 건립이 시급하였다. 이에 그는 1903년 성당(아랫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다음 해인 9월에 이를 완공하고 1904년 10월 2일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갖게 되었다. 신축 성당의 규모는 한옥과 양옥의 절충식으로 총 80평이었다.
장호원 본당에서 매괴성모성당으로
가밀로 신부는 성당이 설립되고 성전이 세워지자 이곳 성당 터를 매입하기 전에 성모님께 허원한 대로 성당 이름을 매괴성모성당(玫瑰聖母聖堂)으로 바꾸었다. 성지에서는 성당 뒷산을 매산(玫山)으로 쓰고 있는데 매(玫), 또는 매괴(玫瑰)는 중국에서는 붉은 해당화나 장미를 지칭한다. 따라서 장미동산(매산)에 성모님을 모시고 장미 다발(로사리오)을 바치는 격이니 우연치고는 절묘한 우연이다. 로사리오를 지금은 묵주기도라고 하지만 옛날 신앙선조들은 매괴신공(玫瑰神功)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음성군 홈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감곡면 ‘매산’의 한자가 梅山이다. 아마도 원래는 梅山인 것이 성당이 세워진 후 성모님과 관련을 지어 玫山으로 바뀐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산 이름으로 부를 때는 둘 다 ‘매산’이니 이 역시 우연이라고만 볼 수 없는 여지가 있다.
본당 사목이 점차 정착되자 가밀로 신부는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미신이나 잘못된 관습을 극복하고 올바른 신앙인을 양성하기 위한 간접 전교도 의도했을 것이다. 그는 1907년 남학교인 매괴학당을 설립하고 이어 1912년에는 여학교도 설립했는데, 그중 여학교는 그 해 본당에 설치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교육을 담당하여 더욱 발전되었다. 이들 학교는 이듬해 6년제 보통학교로 과정이 변경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왔는데 바로 성지 바로 밑에 있는 매괴여자중학교, 매괴고등학교이다.
1914년 10월 4일 가밀로 신부 주도로 서울과 대구대목구 사제 25명 중 12명이 감곡에 모여 국내 첫 성체현양대회를 개최했다. 이 전통은 1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행해져 오고 있다. 성체현양대회는 총 4부로 진행되는데 1부는 성모광장에서 성체현양대회미사 봉헌하고, 2부는 성체를 모시고 행렬을 지어 매산으로 오르는 성체 거동을 하고, 3부는 매산 정상에서 성체 강복과 세상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한 후 , 4부는 성당 안에서의 성체 강복을 한다.
성당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신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성당 건축이 최대의 현안이었는데 드디어 오랜 계획 끝인 1930년 10월 7일에 현재의 고딕 연와조 성당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4년 뒤 1934년에는 화강암으로 된 2층 석조 사제관을 지었다. 이 사제관은 지금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1933년 본당 성가집을 편찬 간행하였다. 이렇듯 신부와 신자들의 열성으로 본당의 교세도 더욱 증가하여 1937년에는 총 신자수가 2,150명이 되었다.
일제 말기가 되면서 다른 본당들과 마찬가지로 매괴성모 본당도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다. 일본인들의 감시와 간섭이 계속되었고, 1942년에는 보좌 조인환(曺仁煥, 베드로) 신부가 사소한 일로 투옥되기까지 하였다.
일제말기 일제 당국에서는 이곳 매산 언덕에 자기네들의 신사(神社)를 건립하려고 획책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공사 때 마다 성모님께서 기상이변의 표징을 내려주셔서 이를 지켰다고 전해 온다.
뿐만 아니라 이해 성당 창설자 가밀로 신부가 일본인들의 적대국인 프랑스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용산 신학교에 연금되기도 했다. 그 결과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제2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이어 다음해에는 유영근(劉榮根, 요한) 신부가 부임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때 신자들은 부이용 신부가 입국할 때 고종황제로부터 하사받아 쓰지 못하고 제대 밑에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지역에서 맨 먼저 게양하고, 가밀로 신부를 다시 맞이하여 광복의 기쁨을 맛보았다. 이로 보건대 가밀로 신부가 얼마나 우리나라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가밀로 신부는 이해 11월 제4대 주임으로 다시 부임하여 활동하다가 1947년 10월 자신을 성모님께 의탁하며 선종하여 이곳에 묻혔고, 그 뒤를 이어 보좌로 활동하던 박고안(朴稿安, 프란치스코) 신부가 주임으로 임명되어 6.25 전쟁을 겪었다. 전쟁 중에 공산당원들이 성당 제대 중앙에 모셔진 매괴 성모상을 파괴하려고 총을 쏘았으나 파괴하지 못했는데 그 탄흔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1986년 본당 설립 90주년을 맞이하여 성모 동산을 정비하고 가밀로 신부의 입상을 제작, 축성하는 동시에 감곡 본당 90년사를 편찬 간행하였다.
그동안 감곡 본당은 청주교구 충청북도의 모본당으로서 그 동안 많은 자본당을 낳게 되었다. 1920년 고마리 본당(증평 본당의 전신), 1932년 청주 본당(수동 본당의 전신), 1945년 충주 본당, 1957년 무극 본당(현 금왕 본당), 1995년 앙성 본당, 2001년 생극 본당 등이 분할 설립되었으며, 다시 이로부터 여러 자본당들이 분리되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묘지의 매입, 자선 활동, 신심 활동 등을 통하여 지역 사회 안에서 활동하는 공동체로 성장시켰는데 이런 전 과정을 ‘감곡본당 90년사’에 담은 것이다.
2000년, 본당 100년사 · 화보집을 발간하였다. 본당 100년사는 복음의 전래와 교구의 변모, 본당의 설립과 성장, 감곡 본당과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인 성직자의 사목과 본당 설립 100주년 행사, 자료집과 뮈텔 주교일기에 나타난 감곡 본당, 공소현황 등으로 정리되어 있다. 또 화보집은 초창기부터 각 시기별로 본당 역대 주임사제와 수도자, 본당 출신 성직자와 수도자, 본당 전교 · 단체활동, 성체현양대회, 교육 · 신심활동, 산하 공소 행사를 모두 담았다.
2002년 10월 10일에는 유물관(현 역사박물관)을 개관했다. 이 유물관은 1934년 건축된 연면적 353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석조 건물로 그동안 사제관으로 사용하던 것을 개조한 것이며, 성당이 최초 설립된 1896년 이후 전해 내려오는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2005년 2월말 사제관, 수녀원과 함께 가밀로 영성의 집을 신축하고 피정 및 순례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매괴 성모성당에서 매괴 성모 순례지로
청주교구(장봉훈 주교)는 2006년 10월 7일 감곡 매괴성당을 매괴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했다. 성모 순례지 지정은 1991년 10월 7일 성모께 봉헌된 수원교구 남양 성모성지에 이어 한국 교회에서 두 번째이다.
매괴 성모 순례지 선포 이후 감곡 성당은 전 공동체가 성역화에 힘써 가밀로 영성의 집 앞에 임 가밀로 신부 동상을 세우고, 2008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매산 정상에 높이 15m의 대형 십자가와 제대, 성모상과 사도 요한상, 임 가밀로 신부 성체강복상 등을 새로 마련하여 축복식을 갖고 세계적인 성모 순례지로 도약할 채비를 갖췄다.
이로써 1896년 부임하여 50년간 성체 신심과 성모 신심을 두 축으로 해서 공동체를 이끈 임 가밀로 신부의 기도가 그 열매를 맺고 있다. 그리고 2009년 4월 20일 ‘로마 성모 대성전(Saint Mary Major Basilica)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당 및 순례지’로 지정되었다.
2014년 성모광장에서 성체현양대회 10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2018년 성모동굴을 확장하고 프랑스 루르드 성지의 마사비엘 동굴을 그대로 재현한 성모동굴 축복식을 가졌다. 지금은 성모신심을 가진 전국의 많은 신자들이 순례와 피정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신자 아닌 일반인들도 역사적 자취를 기억하고자 많이 다녀가기도 한다.
성지 마을에 들어서자 네비게이션은 안내 종료를 알린다. 주차를 하고 성당 마당에 올라가니 이곳 저곳에 아직 잔설이 남아 있다. 하늘에는 온통 검은 구름이 해를 가려 전체의 풍경은 을시년스럽지만 높이 솟은 성전의 첨탑은 이를 상쇄하듯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마당 한쪽에 안내 게시판이 둘인데 하나는 성지 유래와 연혁을 알려주고 하나는 성지의 지형과 건물이나 시설의 위치를 안내하고 있는데 이 성지 안내도만 보더라도 이 성지가 얼마나 명당터인가를 한눈에 알 수가 있다. 안내판 앞에는 이 성지가 로마의 성모 대성전과 영적유대가 맺어진 인정서 등이 제시되어 있다.
안내판 옆의 비석에는 감곡 매괴성모순례지의 의의와 자랑거리를 아주 잘 요약하여 새겨놓았는데, 첫째는 이 성지가 성모님께 봉헌된 곳이며, 둘째 성모님과 관련된 신비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곳이며, 셋째 성모님 품안에서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가 배출된 곳이며 넷째 한국 최초의 성체현양대회가 개최된 곳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은총과 치유의 빛이 강한 성지라고 했다.
먼저 가밀로 영성의 집, 대성당, 매괴박물관, 성모광장과 성모동굴, 십자가의 길을 통해 산상십자가에 오르는 것을 순례 경로로 정했다.
가밀로 영성의 집
초대 주임인 가밀로 신부의 이름을 딴 가밀로 영성의 집은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한꺼번에 순례객 100여명의 숙박 피정이 가능하다. ‘가밀로 영성의 집’ 오르는 언덕에는 가밀로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손에 모자를 든 긴 망토 차림이다.
동상 밑 축대에는 그가 평소 자주 말했다는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I loved you before l met you)' 라는 구절이 커다랗게 쓰여 있다. 만약 영화 속에서라면 명대사가 될 수 있는 말이다. 서로 만나기 전에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다가 만남 이후에 사랑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 인간관계의 보통의 경우인데 얼마나 운명적이며 필연적이기에 만나기 전부터 이미 사랑했을까?
건물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회랑과 정원만 보고 나왔는데 게시된 전시물만 보더라도 이미 감곡성당의 역사적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대성당(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1930년 전국에서 18번째, 충청북도에서는 최초로 건립된 고딕 성당 건물은 프랑스 신부인 시잘레(Chizallet, 池士元)가 설계하고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했다. 길이 40m, 넓이 15m, 종탑 높이 36.5m의 건축물로 명동성당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준다. 라틴 십자형의 평면 구성은 국내 다른 옛 성당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성당 내부는 원형 돔의 천장 아래 열주가 두 줄 있고 그 양쪽에 측랑이 있다. 열주가 그리 굵지 않아서 내부가 가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엄청 공간이 넓은 인상을 준다. 제대는 옛날의 트리엔트식 돌 제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앞에 현재 사용되는 나무제대가 있다.제대 가운데 성광이 있다.
제대 뒷벽에는 양쪽 스테인드 글라스 가운데는 성당의 주보인 매괴성모상이 장미 꽃 송이 속에 모셔져 있다. 기적의 신비를 보인 성모님이시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 공산당원들이 성당 제대 중앙에 모셔진 매괴 성모상을 파괴하려고 총을 쏘았으나 파괴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 탄흔이 7군데나 있는데 성당에서는 그 고통과 기적의 흔적을 없애지 않고 지금까지 70년간을 보존하고 있다. 이는 그 총탄 흔적을 통해 성모칠고(聖母七苦)를 기억하며, 어려울 때마다 본당을 수호해주시고 전쟁을 겪은 우리 겨레의 아픔을 어루만지신 성모의 마음을 깨닫기 위함이다.
양쪽 회랑의 벽면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입체적인 조각으로 멋지게 새겨져 있다. 성당 왼쪽 회랑 벽에는 소화 대레사상과 예수성심상이 있고 예수성심상 아래 제대에 가밀라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오른쪽 대칭되는 벽에는 김대건 안들레아 신부의 상이 있고 역시 그 아래 제대에 유해성광이 모셔져 있다.
제대 위 성모상은 프랑스에서 제작해서 들여왔다고 하는데 성모상의 팔에 6단 묵주가 결려 있다. 성모님께서 벨라뎃다 성녀에게 발현하시어 벨라뎃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도 1단을 더 바치는 것을 허락하신 데서 기인하여 당시 프랑스에서는 6단 묵주가 유행이었다고 한다.
예수성심상 옆에 소화 데레사 상이 나란히 있는 것은 가밀로 신부가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떠나기 전 가르멜 수녀원에서 소화 데레사와 영적 남매의 결연을 한데서 기인된 듯하며, 가밀로 신부의 어머니는 여러 개의 기적의 패를 아들에게 주어 필요할 때는 잊지 말고 사용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대성당 바깥에는 평화의 장미 정원이 있다. 우리 사회의 평화와 희망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유엔이 선언한 세계평화의 날인 2023년 9월 21일에 조성하였다. 여기 보존된 장미는 우리나라 전통장미 품종인데 짚으로 감싸 추위를 막고 있다.
매괴 박물관
대성당 바로 옆에 있는 매괴 박물관은 2002년 10월 10일에 옛 사제관을 개조하여 유물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1934년에 지은 연면적 353평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석조 건물로 역사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성당이 최초 설립된 1896년 이후 성당에서 사용되던 전해 내려오는 값진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박물관 앞 계단 왼쪽에는 임 가밀로 신부의 흉상이 있다. 입구에 전시실 배치도가 있다.
(1층) 제1전시실(감곡성당의 역사)
(2층) 제2전시실(성모신심)
제3전시실(성체신심)
제4전시실(메리놀 사목 시대)
제5전시실(역대본당신부)
(3층 옥탑방) - 성체조배실(기도실)
관람 동선은 1층 제1전시실부터 2층, 3층 차례로 관람했는데 여기서는 딱히 전시실을 구별하지 않고 소개한다.
▲성모광장 성모상 - 원래 성모광장에 있었으나 1918년 성모광장 확장 시에 거두어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감곡성당 설립(1896) 당시 한국 천주교 개황 - 초기 성당의 설립 연대를 밝혔는데 경상남북도에서 감곡 성당보다 연대가 빠른 성당은 계산성당(1886), 왜관 가실성당(1894), 부산 범일성당(1889) 셋뿐이다.
성모광장 성모상 1896년 당시 본당 설립 상황
▲일산기(日傘旗)와 성광 - 1914년 시작한 성체 거동시에 햇빛으로부터 성체를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했던 성구이다. 1896년 성당 설립자 가밀로 신부 때 2년에 걸쳐 금사(錦絲)로 제작했다. 가로 53cm 세로 172cm. 포도, 보리, 양, 십자가, 팰리칸 모양의 수를 놓았다. 그 안에 성체 성광(聖光)이 모셔져 있다.
▲초창기 깃발과 사제복 - 왼쪽 붉은 깃발은 예수성심기이며 맨 오른쪽은 성모신심기이다. 가운데 옷은 캅파라는 사제복이다. 모두 성체거동 시에 사용했다.
예수성심기 사제복 성모성심기
캅바(cope)는 특별한 종교의식 때 사제가 입는 소매 없는 긴 외투형식의 옷이다. 앞은 터져 있고 가슴에는 쇠단추, 뒤에는 방패 모양의 납작한 두건. 가밀로 신부가 금사로 만들어 성체 거동 등 특별한 행사에 입었다.
▲매괴학교 설립 유물- 교육에 대한 가밀로 신부의 관심은 남달랐다. 올바른 신자와 국민을 만들기 위한 기본이 교육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일제가 금했던 동국사략 등 우리나라 역사서를 교재로 사용하다가 통감부의 제재를 받기도 했다. 이 작은 지역에 사제와 수녀가 100여명이나 나온 것은 여기 교육의 힘이다.
▲감추어 둔 태극기 - 가밀로 신부가 입국했을 때 고종으로부터 태극기를 하사받았는데 이를 제의장에 감추어 두고 종종 꺼내어 복사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외국인이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것이다. 그만큼 그는 우리나라를 제2의 모국으로 생각하고 사랑했던 것이다. 해방이 되자 가장 먼저 이 태극기를 꺼내어 모사하여 주민들에게 배부했는데 아쉽게도 실물은 소실되고 사진만 남았다.
▲ 가밀로 신부가 쓰던 구두, 포크 시계 등 용품
▲ 창설 초기의 물품들(성작, 조명기구, 촛대등)
▲ 고해성사대
▲역대 본당출신 수녀 및 신부
▲영사기와 환등기
▲신부님이 어릴 때 프랑스에서 사용하던 성물들
성체조배실(기도방)
1,2층 전시실을 다 보고 나니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고 그 입구에 성체를 모신 곳이어서 슬리퍼를 벗고 올라가라는 안내문이 있다.
▲성인유해 성광 - 매괴 대성당 오른쪽 옆 제대에 모셔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가슴뼈와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사스탕 신부의 머리털이 모셔져 있다. (1955. 5.2 노기남 바오로 주교) 가밀로 신부 때 성체 현시 시 사용되었다.
▲개인 기도실
▲읽기용 성서
박물관을 나와서 성모 광장으로 향했다. 바로 앞에 블록으로 축대를 쌓은 반원형 광장이 하나 나타난다. 가운데는 두 팔을 벌리고 맞아주는 예수성심상이 서 있고 위쪽 축대에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라는 필립피서 4장 6절의 말씀이 커다랗게 적혀 있다.
정말 우리는 무엇을 먹고, 입고, 편하게 잠잘 것인가 하는 세속적 걱정을 하는 너무 많이 하는 것 같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들에 핀 백합화가 길쌈을 하는가? 공중을 나는 새가 씨를 뿌리는가? 그런데도 그들은 먹고 입을 걱정을 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입히고 배불리 먹여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합과 새보다 더 귀한 사람에게야 더 잘 먹이고 입혀주시자 않겠느냐고.
예수성심상에는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는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이 적혀 있다.
반원형 광장 바로 위 길가에는 아담한 붉은 색 벽돌 건물이 순례자를 기다린다. 매괴 쉼터라고 안내되어 있다. 요즘 성지순례를 다니다 보면 대부분의 성당이나 성지마다 카페니 쉼터니 하는 시설이 거의 다 있다. 성전에서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교나 소통도 중요하다. 이를 위한 공간이 쉼터인 것이다. 더욱이 교우가 아닌 일반 방문객을 두고 본다면 전교의 장도 되는 것이다.
쉼터를 지나 축대를 따라 난 길을 조금만 더 가면 성모광장이다.
성모광장 및 성모동굴
안내판에 의하면 1943년 일본인들이 이곳에 신사를 지으려고 터를 닦으려 하자 가밀로 신부는 조선으로 떠나기 전 어머니가 주신 무염시태 기적의 패를 묻어두고 이 공사를 중단하게 해 주신다면 이곳을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기도했다고 한다. 이 허원 덕분인지 일본인들이 공사를 착수하려 할 때마다 폭우가 내리거나 벼락이 떨어져 공사장이 엉망이 되고 산자락이 무너져 더 이상 일을 진척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더러는 산짐승이 출몰하여 결국 신사 건립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되어 끝내 신사가 들어서지 못했으니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은 가밀로 신부의 간절한 기도에 성모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라고 본당 교우는 물론 지역 비신자 주민들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있다.
이후 1955년 8월15일 임 가밀로 신부의 뜻을 받들어 성모광장이 봉헌되었고, 1918년 10월4일 100차 감곡 성체대회(본당설정 122주년, 청주교구 설정 60주년)를 맞이하여 광장을 확장하고 매괴성모동굴을 봉헌하였다.
광장에는 눈이 상당한 두께로 쌓여 있어 서설의 정취를 자아낸다. 광장 오른편엔 경당이 광장의 울타리가 되어 지켜보며 서 있고, 광장 가운데는 두 그루의 두 그루의 소나무가 흰 눈빛에 대비되면서 푸름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서있다. 그리고 광장 맞은편에는 성모 동굴이 조성되어 있다.
십자가의 길, 산상 십자가
성모광장 뒤쪽으로 산상 십자가에 오르는 길이 나 있다.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약 300m 라고 안내되어 있어 오르막길이긴 하나 먼 길은 아니어서 오르기로 했다. 눈이 쌓여 미끄러워 그야말로 기도하듯 조심조심 한 걸음씩 내디뎠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다 해도 십자가를 지고 채찍을 맞아가며 오르신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길의 고통에 견줄까? 안내판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올라라고 권유하지만 가쁜 숨길에도 고통보다는 눈속의 산행이라는 낭만적 감성이 스며들어 죄스러운 마음도 든다.
도중에 쉼터도 있었으나 벤치 위에 눈이 덮여 앉을 수도 없고 해서 쉬지 않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10여분을 올랐는데 산상 십자가의 울타리가 먼저 맞이한다
대형 십자가 아래에는 안내비가 있는데 이에 의하면 1914년 가밀로 신부가 이곳에 나무 십자가를 세웠는데, 1976년 성령강림대축일에 나무 십자가를 쇠 십자가로 교체했으며, 2008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지금의 15m 대형 십자가를 세웠다. 그리고 그 아래 돌 제대와 성모상, 성 사도요한 상, 그리고 임 가밀로 신부 성체강복상(聖體降福像)을 축성했다고 비문에 새겨져 있다.
임 가밀로 신부 성체강복상 아래 비문에는 1914년 성체 성혈대축일에 한국 최초의 성체대회가 거행되었으며, 성전에서 성체대회 장엄미사를 봉헌하고 200여명의 신자들과 12명의 사제들이 매산 정상인 이곳까지 성체를 모시고 올라와서 동서남북 조선팔도를 향하여 성체강복을 했다. 그때 임 가밀로 신부는 눈물을 흘리며 “예수님, 이 백성들이 하느님을 알아 구원 받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우리 교회와 민족에 대한 신부님의 사랑을 기리기 위해 이 동상을 세운다는 내용이다. 그후 성체대회는 6 25 때를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이어오고 있다.
천상에 계시는 탁덕 임 가밀로 신부님
우리나라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감곡성당의 창설자 가밀로 신부의 묘
다시 성모동산에 내려와서 마지막으로 임 가밀로 신부의 묘소에 올랐다. 원래 이곳에 유해가 묻혔으나 1983년 대성당 예수성심상 아래 벽제대로 이장하고 이 묘는 가묘로 남게 되었다.
계단을 올라 숲길은 조금 걸으면 묘소가 나타난다. 묘소 왼쪽엔 묘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안내판이 있는데 임 가밀로 신부의 공적과 열정을 잘 소개하고 있어 그대로 옮긴다.
감곡 성지의 영원한 대부 - 가밀로 부이용 신부
가밀로 부이용 신부(1869-1947)는 프랑스 비엘 아무르에서 출생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로 한국명은 임가미(任加彌). 1888년 9월 18세로 대신학교에 입학 1893년 5월에 서품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조선교구로 전교를 명받고 9월 12일 제물포에 도착. 1894년 여주 부흥골에서 전교하던 중 본당 이전이 절실하던 차에 이곳 감곡으로 이전하여 장호원 성당을 설립하였다. 소성당을 신축하여 신자수가 늘어나자 1904년 성당을 신축하여 매괴성모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에는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을 길러주기 위해 매괴학당을 설립하였고, 1914년에는 지방에서는 최초로 성체신심행사인 성체거동을 행하였다. 1930년 충북 최초의 고딕성당인 매괴대성당을 완공하였으며 본당설정 100주년인 1996년에 충북유형문화재 제188호로 지정받았다.
일제말기 매산의 성모동산에 일본 천황숭배를 위한신사가 들어서는 것을 막았으며 1943년 일제에 의해 구금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제대 밑에 감추었던 태극기를 이 지역에서 제일 먼저 게양하여 민족정기를 깊이 심어주기도 했다.
1947년 10월15일 오전 11시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라는 기도와 함께 임종하는 순간까지 반세기를 감곡성당과 함께하였다. 무덤은 신부님이 평소 보아두었던 매산 중턱 이곳에 36년간이나 모셨다가 1983년 10월25일 당시 본당 주임 김광혁(베드로) 신부에 의해 성당 예수성심상 제대 밑으로 이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전 일과는 여기까지이다. 대성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성지를 떠났다. 점심을 먹으러 감곡면 소재지에 갔으나 적당한 업소를 찾지 못하여 내친 김에 장호원으로 갔다. 장호원과 감곡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기에 다리 하나가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도계가 된다. 감곡은 충북 음성군이고 장호원은 경기도 이천시이다. 왜 성당명을 감곡 땅에 두고도 장호원이라는 이름을 썼는지 알만 하다.
하기는 장호원읍이라 해도 식당을 쉽게 찾을 수 없어 시장에 들락날락 하다가 낙지집 한 곳를 찾아 식사를 해결하고 베티 성지로 향했다.
시간은 오후 3시가 가까워 온다. 따라서 오늘 순례는 배티에서 끝날 것 같다. 그렇다면 청주 서운동 성당은 다음으로 미룰 수 밖에 없다. 대신 배티 성지 가는 길에 조금 떨어진 백곡 성당을 들르기로 했다. 백곡 성당은 초기 이 지역 교우촌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고, 또 순교자 두 분의 묘를 성당 마당에 두고 있다. 따라서 공식적인 성지 못지 않게 성지로서의 의의가 있는 곳이다.
백곡 성당 - 순교자의 분묘를 모신 초기 교우촌 성당 |
백곡 성당의 연혁
주소는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273 (도로명 진천군 백곡면 백곡로 892)
배티 성지 바로 인근에 위치한 백곡 지역은 예로부터 깊은 산골로, 찾는 사람이 적었고 안성으로 넘어가는 도로가 말끔히 포장된 지금도 그리 인적이 흔치 않은 곳이다.
이 지방은 1800년대부터 수많은 박해를 피해 떠돌던 천주교도들이 모여들어 비밀 교우촌이 형성했던 곳이다. 충북 진천군과 충남 천안시 그리고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삼각점에 위치한 이 지역은 우선 그 지세가 험해 비교적 박해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위치가 각 지방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 교통이 편리했기에 박해 시기 은밀한 연락이나 밤을 틈탄 도주가 용이했던 것이 교우촌이 형성되기에 아주 적합한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1837년 이전에 양백리 배티 교우촌, 1851년 이전에 용덕리 용진골 교우촌이 되었다. 이밖에도 명암리 발레기 교우촌, 동골 교우촌 등이 형성되어 백곡 지역 천주교 신앙의 뿌리가 되어 왔다.
박해시기를 거치면서 이곳 백곡 지역에도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다. 이중 지장골의 오반지 바오로, 명암리 발레기의 김원중 스테파노, 배티의 장 토마스, 송 베네딕토, 송 베드로, 이 안나, 용진골의 박경진 프란치스코, 오 마르가리타는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복자로 시복된다. 박해 시대가 끝나고 1887년부터 백곡에는 교우촌을 중심으로 공소가 신설된다. 배티 공소, 용진골 공소, 삼박골 공소, 은골 공소, 모니 공소, 지구머리 공소가 차례로 만들어진다. 공소는 서로 분리·통합되다가 마지막에는 배티와 용진골 공소만 남았다. 백곡 공소를 관할하는 본당은 1890년에는 간양골 본당(예산), 1895년에는 공세리 본당(아산), 1900년에는 안성 본당으로 바뀐다. 1956년 4월 30일 진천 본당이 설립되면서 백곡면은 비로소 진천 본당 관할이 되었다.
백곡 성당은 박해 시대를 거쳐 신앙을 자유를 얻은 뒤 여러 번의 이전을 거쳐 1961년 7월 21일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였다. 진천 본당 제2대 주임 아헌(W. Aheam, 安) 굴리엘모 신부가 기존의 공소 건물로는 도저히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어 고심하던 중 ‘경주 이씨 문중’에서 현재의 공소 부지를 기증하여 우선 임시 건물로 삼고 공소 강당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후 산업화와 이농현상으로 신자수가 급감하면서 새로 증축하지 못하고 여러 번의 보수공사만 거쳐 오다가 1997년 공소 경당 옆에 교육관을 신축하였고, 2004년 경당 지붕 교체 및 바닥공사를 새로 했었다.
2018년 11월 20일 백곡 공소는 노후화된 기존 성당을 대신해 새 성당과 교육관 및 사제관을 건립해 봉헌식을 거행했다. 이어서 청주교구는 2019년 8월 16일자로 진천 본당 관할 백곡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백곡면 전체를 관할구역으로 하여 주임신부를 임명하고 복자 오반지 바오로(吳盤池)를 본당 주보로 정했다.
오후 3시 20분 성당에 도착. 성당 아래 주차장 마당 한쪽에는 교육관인 벽돌조 건물이 있는데 입구에 건물 이름으로 오반지 바오로관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마당 맞은편 돌담동굴 안에 성모님이 너무도 다소곳한 모습으로 맞아주신다. 성전은 언덕 위에 있다.
성전 내부는 전통 한옥식으로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에 창문은 색유리가 아니라 한옥 문살창문이다. 제대 후벽에 십자고상이 있고 그 아래 감실이 있다. 제대의 왼쪽 벽앞에는 한복 차림의 정숙한 성모상이 아기 예수를 안고 있다. 그리고 제대 앞에는 오병이어(五餠二魚)가 새겨져 있고 그 앞에는 복자 오반지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순교자 묘
성당 정문 옆에는 두 기의 묘가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남원 윤씨와 밀양 박씨 성을 가진 두 명의 바르바라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데 이들은 시누이와 올케간이다. 남원 윤씨 집안은 본래 홍주에서 살다가 21세손인 윤행윤 때에 박해를 피해 배티 골짜기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병인박해를 당해 윤행윤의 손자며느리인 밀양 박씨 바르바라(1827년생이며 23세손 윤태명 요셉의 부인)와 손녀 윤씨 바르바라가 함께 체포되어 신앙을 굳게 증거한 뒤 매를 맞아 순교했고, 그 시신은 가족들에게 거두어져 배티 성재골에 안장되었다. 집안에서 내려오는 이들의 순교일은 1866년 10월 20일이다.
이들의 유해는 본래 배티 뒷산 성재골의 6인 무명 순교자 묘역 안에 위아래로 나뉘어 안치되어 있었는데, 오랫동안 몰랐던 것을 1970년대 초에 후손들이 다시 찾았다. 1977년에는 평택에 사는 순교자의 후손들이 묘를 선산으로 이장하기 위해 배티를 찾았다. 이를 알게 된 배티와 백곡 공소의 신자들은 후손들을 만나 교회에서 대대로 잘 돌보며 기도드리겠다고 설득하여 두 순교자들의 유해를 백곡 공소 경내로 이장한 뒤 깨끗하게 단장하였다.
2019년 12월 6일에는 청주교구청에서 본당 주보인 복자 오반지 바오로의 유해 분배 예식을 거행하고 유해를 분배받아 본당에 모셨다. 백곡 성당은 복자 오반지의 활동지 중 하나이다.
백곡 성당을 떠나 이웃 배티 성지로 향했는데 거리가 2km 정도 밖에 되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